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
리단 지음, 하주원 감수 / 반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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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에 익숙해지는 것이지, 병을 좋아할 수 없다. 익숙해진 병과 앞날을 조금 함께 걸어볼 뿐이지, 그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칠 수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여 병이 마치 배우자라도 된 양 여겨볼 뿐이나, 병의 배신에 여상하게 굴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병과 대치하든 공존하는 함께 존재하면서, 다른 영역에 발을 디딜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영역이란 언제나 행복하고, 즐겁고, 재미난 곳이 아니며 모멸을 무릅쓰고, 수치감을 느끼며, 망칠 것을 재차 우려하면서 조심스럽게 때로는 과감하게 굴어야 하는 곳, 바로 사회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많이 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사회의 일원이 되면서 정신병을 얻는다. 게다가 정신병은 사회적으로 고립되었을 때 더욱 심화된다. 이게 무슨 역설이란 말인가.
정신병은 당신이 가족이나 친구, 지인들과 거리가 멀고 관계 설정이 미미하고 동떨어져 있을 때 더욱 가중되어 당신의 ‘소중한‘ 짐이 된다. 그럴 때 당신은 자신의 유일한 끈과 영향력인 정신병적 상황과 상태를 붙잡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당신이 학교를 그만두거나, 인간관계가 파탄 나거나,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했을 때 당신을 제일 먼저 맞아주는 것은 병이다. 우호적으로? 우호적으로. - P369

하지만 밤은 가고 새벽이 오며, 몇 달 몇 해를 누워서 자신의 실책에 대해 생각만을 거듭해나갈 수는 없다. 결국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다만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달라 어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툴툴 털어낼 수 있지만 어떤 이는(예를 들면 나의 경우 사직의 여파에서 일어나는 데에 3개월이 걸렸다.) 몇 달, 아니 몇 해가 걸릴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의 순간 전까지, 우리는 병의 얼굴을 쓰고 휴식하고 있는, 대기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이유도 제각각으로, 돈을 벌지 않아도 된다면 충분히 지원에 기대서쉬고 있어도 괜찮지만, 돈을 벌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실패 후 다시 사회의 일원이 되는 과정에 뛰어들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습관을 만들고, 건강한 생활을 지속하고,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수치의 기능을 하고, 자신의 ‘나쁜 사이클‘에 뛰어들지 않아야 하는 이들,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사회화를 선택하는 이들은 종종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이 모든 것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결국 우리의 정신병은 이 무의미의 강을 건너 사회의 영역으로‘왜’ 돌아가야 하는지 탐구하는 데로 수렴한다. 여기서 정확한 대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설득하는 답변은 얻어야만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사회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음‘의 상태는 소위 스카우트 배지처럼 한 번 획득한다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 P370

어느 날 갑자기, 또다시 어떠한 요인으로 추락하고, 퇴보하고 탈락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상기하면 노력은 발동을 멈추고, 행동은 머뭇거리게 된다. 어차피 또 패배해서, 또 자기의 방(마지막 보루)으로 후퇴해 또다시 사회의 재진입을 꾀해야 하는데, 새로 시작되는 병증은 더 견딜 수 없을 것이고, 무엇이 새로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확실성. 우리는 불가능한 고통에 대해서는 시지푸스가 되어 끊임없이 몸을 던져볼 수 있다. 계속해서 꼭대기로 끙끙거리며 돌을 굴릴 수 있다. 그러나 불확실함에 대해서는 수를 쓰기 어렵다. 어쩌면 영원히 자기 방에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기만 하는 생을 살게 할 것이라는 전망은 우리를 좌절스럽게 한다.
(...)
불확실성에 맞서 정신병자를 지지하는 것은 바로 일관된,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들이 바로 병식, 약, 돈, 그리고 사람이다. - P371

정신병자인 우리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고 자책하거나, 인생이 손쓸 수 없이 망가졌다고 믿을지도 모른다.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에 삶을 끝내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병과 있는 것만으로도 품이 든다. 일상을 사수하고, 자신을 돌보는 것이 언제나 도전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시작해야 한다. 가장 작은 행동,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나날이 우리를 지킨다. 우리는 누가 이기고 지는 승부를 하는 게 아니다. 오늘 건실한 하루를 보냈다고 내일도 그러라는 보장은 없다. 정신병의 나라에서 우리는 몇 번이고 새로 시작하고, 몇 번이고 버리고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도망쳐도 좋고, 비겁해져도 좋다. 다만 충분히 말하고, 기록하고, 관찰하자. - P390

우리가 그리는 지도가 완벽할 필요는 없다. 병이 기상천외한 행보를 보이며 우리를 앞지를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 안에서 우리는 뭐든지 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신병의 나라에서. -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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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
리단 지음, 하주원 감수 / 반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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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굴처럼 여러 곳으로 사방팔방 이어져 있다는 말이었다. 돈이 있는 그의 눈은 예리하게 매번 새로운 빈 굴을 찾아냈고 그러면 그는 그것을 채우러 카드를 들고 백방으로 돌아다녔다. - P218

정신질환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분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난은 병이 파고드는 취약한 부분들 중 하나다.
오랫동안 가난에 시달려온 이들을 관찰하면 그들의 위축, 수동성 등을 포착할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최악을 가정하고 차악일 때 안도감을 느낀다. 최선을 목적으로 놓고 차선을 이루려 노력하며 성취감을 얻는 것은 그들의 방식이 아니다. 그들이 절망하는 것은 현재 어떠한 곤경에 처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든 빌리는 무엇을 하든 삶이 나아질 일이 없다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벼랑같은 가난에 내몰린 이들이 이상사고나 사고장애를 겪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바닥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우울증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에게 인생은 부족하고 불안하며 절망적인 게 당연하므로, 야망도 이상 - P221

도 먼 이야기로 여겨 반응하지 않거나 그런 것들을 자꾸 환기시키려는 자에게 적대감을 표현한다. 이들의 상태는 우울증의 병적인 상태와 흡사한 양상을 보인다. 자연히 가난에 상시 내몰린 이들에게 정신질환이 발병했을 때 악화되기가 쉽다. 병이 불씨라고 하면, 빈곤은 그 불씨를 부채로 지피는 격이다. - P222

가난한 병자들은 거처, 거주가 안정적이지 않아 수시로 바뀐다.
이들은 주거 이동을 반복하는데 이때의 이동은 상향 이동이 아닌 비슷한 수준에서의 이동이거나 하향 이동인 경우가 많다. 새로운 거주지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또다시 많은 노고가 필요하며, 잦은 이사에 따른 심리적, 물질적 비용은 가난한 병자를 위축시킨다.
중독(알코올, 니코틴, 카페인, 게임, 약물, 행위)은 정신질환이 있을 때 더욱 쉽게 관찰되며, 가난으로 인해 심리적으로 위축되었을 때에 더욱 심화된다. 술이나 담배, 커피, 게임, 스마트폰 등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이 가난하다면 다른 것들을 제한하지 중독 행위를 중지하지는 않는다. 중독 행위에 드는 비용을 ‘기본요금‘처럼 당연하게 취급하지만, 모두 합쳐 계산해보면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도 이들은 중독 행위가 그만한 값을 한다고 여긴다. 고도로 지속되는 스트레스의 압박에서 ‘한숨 돌리게‘ 해주는 것이 중독 행위이니 이들에게는 늘 최우선 순위에 있다. 식사나 병원비는 그다음, 아니면 안중에도 없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돈이 떨어져 이틀을 굶을 때는 방에만 있더니 마침내 담배가 떨어지자 성을 내며 즉시 털고 나가 바깥 골목을 돌아다니며 기다란 꽁초를 주워 좋다고 피워댔다.
가난한 병자들은 단조로운 정동을 보인다. 대체로 누워 있으며, 누운 채 동영상을 보거나 인터넷 서핑을 한다. 물을 마시고 눕고, 밥을 먹고 눕고, 화장실에 다녀와 눕는다. 특징적인 무망감이 그를 배 회한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이 없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으 - P225

며, 지금에 대해서도, 아니 전부 다 생각하기 싫다. 그에게 있던 정신질환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가난은 당신이 돈이 없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 한다고(섭식장애가 있다면 더더욱), 돈이 없기 때문에 돈이 나가는 모든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조른다. 특히 돈이 없으니 ‘이 돈으로 병원에 가는 것보다 다른 데에 쓰는 게 낫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비교적 흔한 패턴으로, 마침 정신과 치료에서 드라마틱한 효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더더욱 단약 등의 치료 중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복약은 우리의 정신을 잡아주는 보루이고 이 선이 무너지면 다시 쌓아 올리기까지 많은 시간이 든다.
‘가난‘이 오랜 이슈인 정신질환자들은 생활습관이나 사고방식, 나아가 삶 전반에 병이 구석구석 뿌리를 내리는 것을 느낀다. 가난 상태에서 필연적으로 가능한 선택지는 매우 협소하고, 쿠션 역할을 할 안전장치는 미비하기 그지없다. 생존을 우선해 필사적인 선택만 연이어 내려왔던 가난한 병자는 많은 경우 ‘이것이 아니면 안 돼. 이번이 아니면 끝이야.‘처럼 극단적인 사고를 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크나큰 압박을 느끼므로 여유를 가질 겨를도 없다.
회피와 포기는 이들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다. 이것이 장점으로 발휘되면 빠르게 자신을 보호하고 원인 대상을 차단함으로써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고, 새로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다. 얻을 것은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잃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 - P226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계속 외부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방식은 결국에는 병자를 고립무원의 상태로 만든다.
고립 상황에서는 더더욱 자신을 돌보지 않고, 병으로 인해 망가진 생활습관은 고착되며, 심하게는 방 밖에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에 빠져들기 쉽다. 의식주 생활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는 주변의 작은 도움이란 말라 죽어가는 화분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에게는 좀 더 확실한 처방이 필요하다. - P227

정신질환이 있는 이들이 저지르는 흔한 실수는 ‘완벽‘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완벽하고 완전하게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전제한다거나 은연중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정도보다 더욱더 잘하기를 요구하고 원한다. 새 학기에 우리는 갖가지 양장 노트와 펜, 필기구, 심지어 아이패드와 스마트펜슬 등을 구입하며 수학을 위해 돈을 바른다. 게다가 계획적으로 시간표를 짜고, 시간 단위도 아니라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생활을 해내고자 한다. 우리에게 ‘무리‘란 없으며, 누구도 절대 힘들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생활을 수행해내는 자신과 그것을 해내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무능력한 자신만 존재한다. 분 단위의 계획은 흐름을 타면 하루를 쉽게 보내게 해주지만, 곳곳에 은신해 있는 변수의 존재는 계획이 모래성처럼 무지게 한다. 그리고 정신병이 있는 이들은 자신의 계획이 무너졌을 때 함께 주저앉아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혹자는 계획 중 하나만 어긋나도 모든 계획이, 인생 전체가 끝난 것처럼 여기고 자살하려 하거나 사람들 사이에서 영영 사라져 연락 두절된다. 여기에서 다음으로 넘어가기 위해 우리는 단계 단계를 착실히 밟아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따금 다른 곳으로 건너가기 위해 점프를 하거나 징검다리를 건너야 하는 일도 있다. 그러나 정신병에 시달리 - P239

고 있는 이들은 돌다리가 아니면 절대 건너지 않는다. 사소한 문제도 그들에게는 위험의 징조나 불길함으로 읽히며, 속수무책으로 ‘나는 이렇게 무능력해. 죽자.‘와 같은 극단적 사고로 빨려 들어간다. 따라서 쉽게 포기하고, 쉽게 도망가며 쉽게 숨어버린다.
꼭 완벽주의자가 아니라도 주석을 제대로 달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 된 과제를 제출하지 않고, 출석 점수가 아슬아슬할 때까지 결석했다는 이유로 그 학기 자체를 포기하며 학교에 가지 않는 등, 병자들은 자신이 세워놓은 기대치에 못 미치는 상황이 되면 손을 놓고 숨어버린다. 여기서 문제는 ‘완벽하지 않고 내 기준 미달이니 남들에게 보일 가치도 없다.‘와 같은 생각은 굉장히 비장하다는 데에 있다. 정신병이 있다면, 비장함과는 거리를 두어야 살아남는다. 자신에게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이들은 너무 빨리 죽는다.
때때로 학교에 아는 이나 친구 없이 다니는 병자들이 있는데 수업을 들을 때 최소한의 정보 공유는 필요하며(갑작스런 휴강이라든지, 시험 시간이 변경된다든지) 따라서 자신의 병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냥 서로 아는 사람 정도의 지인들이 있어야 한다. 일찍부터 고립된학 교생활을 해온 이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인간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는지 따위가 아니라 사회에서 고립되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는 자기 자신이다.
다음은 정말 큰 착각으로, 내 경우에는 이게 특히 심했다. 마치수업시간에 졸면서 ‘오늘의 필기는 내일의 나에게 맡긴다…….‘라고 - P240

쓰듯, 나는 조증이 오면 현재 산재한 모든 과제를 극적으로 해결해줄 내가 생겨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내 기준 ‘상태가 좋은 나‘는 이미 미쳐 있는 상태였고, 그 상태에서 적어 내린 과제들은 마치 정신증의 지리멸렬을 매우 잘 보여주는 듯한 글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이 거의 ‘명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수업에서 모두의 앞에서 질타를 받았다.
이를테면 우울증에서 호전된 상태에서는 글을 잘 읽을 수 있고 또한 잘 쓸 수 있는데 지금 하필 우울 삽화라서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 우울증 자체가 주는 통찰력은 마음에 들지만 실행력은 제로여서 불만인 것, 또는 불안이나 초조가 너무 깊어 글 자체가 써지지 않는 것, 아니면 조증 상태에서는 기분이 좋아져서 텍스트도 잘 읽어내리고 해석이나 분석도 참신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상태를 기다리는 것. 이런 행위들이 병과의 유착을 만들어내며 병에 의존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병에 의존적인 인간, 병을 사랑하는 인간이 되어, 병의 다정한 연인이 되어 손에 손을 잡고 병의 나라로 떠나는 것이다.
자율성이 높은 대학 생활에서는 자연히 병의 기운을 빌려 무언가 해보는 일이 잦다. 하지만 자신을 기분 좋게 하는 것들, 재밌어 보 이는 것들, 흥미로운 것들, 하고 싶은 것들만 한다면 머잖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많은 것들을 겪으며 성장한 것은 자아도 자신도 아니라 병이었음을. - P241

병적인 일의 특징은 휴식 시간을 갖지 않는 것이다. 설사 휴식하더라도 휴식에 죄책감과 수치심이 들게 하는 것이 병의 증거다. 정신병에 시달리는 이들은 스스로를 궁지로 내모는 경향이 있는데, 자신이 스스로를 혹사하는 것에 대해 사이코패스처럼 무감각하다. 적절한 휴식, 수면은 인간에게 필수적인 일임에도 말이다. 병자들은 기분이 좋거나, 오름세에 타거나, 운 좋은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면 기꺼이 그 흐름을 향해 몸을 던진다. 기타 과제나 업무를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여력을 비축하는 행위를 일절 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로지 눈앞에 달성할 이것을 위해 수명을 깎듯이 움직인다. - P242

직업은 직과 업으로 구성된 글자다. 직은 돈을 받고 노동을 하면 그만인 것이고, 업은 인생에 걸쳐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당신의 병이 업이라면, 임금노동을 맡는 직이 당연 - P246

히 서로 쌍으로 있어야 균형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니 직을 구하는 데 있어 너무 양심적으로 굴 필요도, 고심해 선택할 이유도 없다. - P247

나의 정체성은 사람이라기보다 리튬 네 알에 가깝지 않은가. 종종 약물의 의인화나 약물의 자기화에 대해 생각한다. 특히 우울 삽화일 때 기분조절제와 항우울제 두 종을 각기 최고용량으로 복용해야 최소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나에게 약물은 무엇인가.
나와 긴밀한, 맹신하지 못하지만 긴밀한 약물. 가끔은 허우적대는 나 대신 하루 이틀 정도 몸을 움직여주는 약물. 언제나 믿지는 않지만 가끔은 사람보다 의지하게 되는 약물, ‘네가 언제까지 작용할수 있을까?‘ 시한폭탄을 인 것 같지만, 수많은 약물이라는 선택지가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돌고 돌아 몇 가지 약물에 정착하고 그래서 원망하고 그래서 좌절하며 그래서 무감각해지고 그래서 불신하게 되므로 나는 알아가야 한다. 내게 맞는 옷을 찾는 것처럼, 가게에서 거듭 바꿔 입어보며 거울을 보고 그리고 집에 와서 결국 잘못 샀다고 팽개치더라도, 실수와 허탕을 거듭하더라도, 우리는 찾아야 한다. 알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앞으로 또 다른 내가 될 것이므로. - P270

퇴원 후의 사회 복귀는 언제나 내 고민이었다. 껍데기는 여기에 있지만 알맹이는 여전히 병동에서 과자를 까먹고 있었다. 나는 빽빽한 스케줄로 소화를 할 수 있든 없든 일단 일을 던져놓는 기질이 있었고, 그것을 해내야 하기 때문에 점점 무리하고, 기력은 점점 더 빈곤해졌다. 우리가 정신병동에 입원해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기상과 취침 시간이 규칙적인 것, 삼시 세끼를 먹으며 충분한 영양 섭취를 하는 것, 복약을 제때 하는 것인데 혼자 사회 복귀 과정을 치르려니 병동에서는 당연했던 규칙적인 것부터가 제대로 되지 못했다. - P284

폐쇄병동이란 기피할 곳도 아니고, 천국도 아니다. 친구를 사귀기에 적절한 곳도, 그렇다고 외로움에 사무치기만 하는 곳도 아니다. 시간을 버리는 곳도 아니고, 시간을 저축할 만한 곳도 아니다. 책을 산더미처럼 싸 가지 않아도 드라마가 펼쳐지는 곳이며, 외부와 완전한 단절을 꾀할 수도, 혹은 꾀를 내 외부와 교류를 만들 수도 있는 곳이다. 모두 당신을 도우려 하지만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입원 생활에 잘 적응했고 병세가 완화되는 모습을 보였어도 퇴원 후 급격히 나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은 연기할 수도, 감출 수도 있다. 사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을 - P285

가장 견딜 수 없어 일부러 위험한 행위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비슷한 질병의 친구들을 만나서 사이좋게 지내거나, 사이좋게 전이될 수도 있다.
내가 갔던 곳에 비교적 따뜻한 병동임에도 폴라티를 입고 그 위에 환의를 입은 노년의 여성분이 있었다. 그분은 계절성, 양극성 정동장애 때문에 매해 겨울이 올 때 즈음부터 의례적으로 약 한 달여를 입원한다고 했다. 그분은 가만히 앉아 햇볕만 받는 일이 주목적이요 일과였다. 오전에 뜬 해는 정오를 거쳐 점점 그림자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만들었다. 나만의 목적을 가지고 입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이유로 입원한다. 입원 중에 자신의 병을 알게 되고, 마지막으로 사회로 돌아간다. 이곳의 경험은 인생에서 파내야 하는 단절의 부분도 아니며, 때로는 당신 병의 서사를 흐르기 용이하게 해줄 수도 있다.
폐쇄병동에 입원할 때에는 작은 목표를 가지고 들어가는 것이좋다. 목표는 너무 큰 것(병증이 모조리 해소되는 것, 자해를 평생 끊는 것 등)이 아니어야 한다. 만약 내가 다시 폐쇄에 입원하게 된다면 낙서 노트를 한 권 가지고 들어가 만화를 한 편 그리고 돌아올 것이다. 하나의 목적한 바를 달성하고, 사회에 복귀하기 전에 작은 연습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상태가 매우 나빠서 사고와 판단도 불명확 - P286

한 상태에 있다면, 목적이나 목표보다 그냥 있는 게 중요하다. 또 ‘빨리 나아야 해.’, ‘어제보다 나아진 것 같아.‘ 같은 비교형 생각, ‘내가 왜 여기에 있지?‘ 같은 WHY형 질문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질문, 예를 들면 ‘여기서 뭘 할 수 있지? 아, 물 먹을 수 있군’이 도움이 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 생각하고, 귀에 들리는 것만 생각하면 시간은 더 쉽게 간다. 자신의 질병 서사를 톺아보는 것보다 병원 안에서 주위와 주변 사람을 관찰하고 웃음 포인트를 찾아내려 하는게 중요하다. 치료받고 안정하는 것보다는 그 자체로 ‘있는‘ 것이 우선하며, 때로는 그 ‘있다 가는‘ 것으로 폐쇄병동 경험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덧붙여 입원했을 때 우리는 꽤 많이 자주 심심해하지만 퇴원한 뒤에는 그 심심함이 공허감이 되어 우리를 덮칠 것을 대비하자. 바깥으로 나가면, 퇴원하게 되면 잠시 미뤄두고 내려놓은 것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괜찮다. 모두 제자리에 있을 것이고 우리는 제법 괜찮아졌을 테니까. - P287

처음에는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한다.
인과관계가 흐트러지지도 않았고, 나름의 이유를 알고 있다. 자신의 정상 행동과 이상 행동을 구분할 줄 알며 이상 행동에 부끄러움이나 수치심을 느낀다. 자신이 왜 그렇게까지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하더라도, 어쨌든 저질러진 일에 대해 단편적인 기억을 지니고 있다. 어떤 기억은 너무나 트라우마여서 수납해둔 채 다시는 꺼내 보지 않으며, 어떤 기억은 이미 오염되고 변색되었기에 ‘마음이 떨리지 않아‘ 버린다.
사람마다 자기 방식의 기억술을 가지고 있다. 정신병이 있는 자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은 온전히 보존되는 수장고가 아니므로 원하는 기억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듀이 십진분류법 같은 기술법을 가져야 편리하다. 아마 모두 자신만의 분류법을 가지고 기억을 - P289

다루고 있을 것이다.
위의정신병이 계속되는 사람에게 기억은 반드시 봉착하는 난관이 된다. 내가 기억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 역시 많은 정신병자들이 기억력 감퇴, 왜곡, 곡해 등의 증상을 호소하기 때문이었다. 기억이 너무 큰 자발성을 갖게 되면 사람이 버티지 못한다. 사람을 버티지 못하게 하는 기억은 주로 감정적인 것, 기분의 이상, 충동, 공허, 허기, 고독, 불규칙성, 일회성, 왜곡, 맹점 등이다. 그것들이 모두 소위 과거의 정상 상태에서는 스스로 해결하고 위치를 지정할 수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에, 기억력에 문제가 생기면 병자들은 특히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기억들은 고유의 좌표를 갖지만 상호 연계되지 못한다. 특히 어떤 감정과 기분이 일시적으로 폭발하더라도, 그리고 그것이 다른 폭발의 연쇄로 이어져도 그 사이의 맥락이 금방 소거되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아내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맥락 없이 치솟는 감정만 느낄 뿐, 기억으로 유의미한 흡수와 축적을 이루지 못한다.
단편적으로 이뤄진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도 혼란스럽지만, 기억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는 점이 병자들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지난날에 대해 잘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을 큰 흠이라 느끼지 않지만, 자신의 서사를 구성하는 기억력/기억법에 자부심을 느끼던 이들에게 이는 존재의 의의를 빼앗긴 것처럼 심각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정신병과의 난전에서 기억을 바탕으로 싸우던 이들에게 기억에 결함이 생기면 결과적으로 가장 유용한 창과 방패 - P290

를 모두 빼앗긴 셈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록을 시작한다. 가장 쉬운 접근은 일기다. 그러나 일기를 쓰다 보면 자연히 알게 된다. 일기가 자신을 표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기록법이라는 것을, 혹은 일기라는 단어에 무색하게, 매일을 적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기에 미흡한 도구라는 것을 시차를 두고 깨닫게 되며 그 후로 일기를 굳이 적지 않는다. 일기를 적든, 적지 않는 유의미한 차이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기가 갖는 단점으로는, 감정과 생각의 편린들, 그들이 이루는 꼴의 지지부진에서 벗어나는 느낌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다. 병자는 변화의 양상을 관찰하는 동안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병자의 필력이 달리고 내용이 빤하고 재미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일각이며 오히려 이것은 언어의 문제, 병자들은 자신의 상태에 부합하는 기호와 언어를가지고자 하나 정합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문제다.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은 우리의 고통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다. ‘나는 매우 죽고 싶다.‘와 ‘의사가 나한테 아빌리파이 30을 줬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른다. 병의 초기에 사람들은 으레 자신에게 찾아오는 불안과 초조, 견딜 수 없는 기분, 돌연 폭발하는 충동들을 설명하는 데 곤욕을 겪는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된다. 자신은 지금 역어(譯語)로 말한다는 것. 모든 고통은 번역어로서 존재한다는 것, 그러므로 자신은 평생 이 기분과 고통을 타인에게 전달할 - P291

수 없을 거라는 점.
(...)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언어라는 매미채로는 결코 병을 잡아챌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결국 언어, 바로 모국어가 자신을 버린 느낌 - P292

이야말로 정신질환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 중 하나다. 이미 죽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단순한 ‘죽고 싶다‘쯤은 죽음의 레이스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입속으로 죽음을 곱씹으며 다니지만, 더는 자신이 표현하는 죽음에 무게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더욱 죽음을 자조하며 우스꽝스럽게 말하지만 경박해 보일 뿐이다. 당신의 ‘죽고 싶다‘는 이미 널리 통용되는 ‘죽고 싶다‘ 아래에서 흐드러진다. 본인이 느끼는 바로 그 특별하고 특유한, 자신을 절망케 하는 유일한 ‘죽고 싶다‘를 아는 사람은 없다. - P293

정신병은 기존에 흐르던 기억의 물꼬를 막아 어디는 웅덩이를 만들고 어디는 메마르게 한다. 나의 경우 병의 경중에 따라 기억의 풍경이 달라진다. 다만 패턴이 있고, 패턴을 파악하는 것까지는 어려워도 포착할 수는 있다고 믿기 때문에 기록하는 것이다.
우리는 굳이 기록을 통해 기억과 만나지 않는다. 기억은 무시로 문을 두드리는 침입이고 불청객일 수도, 자애로이 굽어살피러 오는 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언제나 치밀하게 자기를 되짚어 흐트러진 모양을 다듬는 자일 수도 있다. 정신병자들에게, 특히 정신증자에게 기억은 모호하다. 기억은 아름답고 괴팍하며, 한 자리에서 서성이고 있다. 기억은 되려 기억하는 자를 구경하기도 하고, 실체가 없는 주제에 생물의 행동을 한다. 기억은 고유한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기억과 인간 간의 균형이 어그러지면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기억을 넘지 못하고, 자신의 일부를 조금 두고 온다. 기록은 그것을 건지려 펴는 그물이며 기억을 유혹하는 낚싯대로, 모든 파편을 주워 완전한 형상이 다시 되기를 염원하나 이미 병자들의 삶은 기억에서 멀어지고 일상은 달라져 있기 때문에 그것은 주인 없는 기억으로 떠돈다.
병자들의 기록법은 비슷한 출발을 거쳐 저마다 다른 길로 향한다. 때로 기록이라는 것을 영구히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그렇다. 써도 잊고, 쓰지 않아도 잊는다. 반드시 써두어야 살아남는 건 아 - P294

니다. 하지만 기억을 기록하는 사람은 다시 기록으로써 기억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고 기록의 형태는 꼭 문자가 아니어도 된다. - P295

우리의 기록은 우리를 더 나아지게, 성숙하게, 교훈을 얻도록 유도할 만큼 거창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쓰고, 적고, 편집하고 찍으며, 외치고, 빚고, 소리내고 그려야 한다.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다음 단계로 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이 우리의 구원이 되지 못하고, 어떤 문도 열지 못하고 그리하여 기록에 패배하더라도, 그 패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생을 위해 제 기억을 조형해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 P297

사람마다 자해의 법칙, 규칙, 범주, 영역, 미학을 갖는다. 그 안에서 마치 스마트폰 농장 게임을 하듯이, 게임 속에서 ‘배 농사‘를 전문으로 짓는 농부와도 같이 자해 활동이 진행된다. 그리고 각자 자기 자해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간다. 어느 정도의 깊이, 강도, 흠집이 적절한지, 어떻게 시간대나 장소를 물색하는지, 후처리를 어떻게 하는지, 자해 흔적을 어떻게 은닉하거나 보이게/알게 하는지 등을 ‘관리‘하고자 한다. 자해는 통제에서 벗어난 일탈, 우발 행위이면서도 역설적으로 지극한 통제 아래에 놓여 있으며 이 통제가 바로 자해의 핵심 - P303

이기도 하다.
자해는 당신의 정신과 육체 사이에 균열을 내 관계를 정립한다. 그것은 처음으로 느끼는 정신과 육신과의 연결일 것이다. 이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당신의 내면에서 너는 죽어 있지 않다고, 살아 있다고 속삭이는 나만의 비밀, 나만의 진실, 나만의 친구가 생겨버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자해를 통해 두 번 존재한다. 첫째, 육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둘째, 내 기분이 나아질 수 있음을 확인한다. 자해로 인한 심신의 변형(흉터, 정신적인 흥분 고조)이 생긴다면 육체와 정신 사이에 직통으로 오가는 철도를 만든 것과 같다. 자해는 육체를 장악할 수 있게 하며, 거덜 난 육체성은 자기 자신의 무능력과 무력감을 해소해주고, 우리는 자해 후 잔해를 돌보면서 다시 한번 육체를 장악한다. 우리는 자해를 통해 신체에 상처를 입히고 훼손하며, 행위로 인한 상해를 수선하고 회복하며 육체성을 획득한다. 약물 자해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약물 오남용을 통해 신체를 순종시켜 기절, 구토 등 비일상적이고 극적인 반응이 일어나게 한다. 그렇다. 자해는 자신의 몸을 식민지로 인식해 열심히 그곳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과 같다. 길게 늘어진 칼자국이나 바늘땀 같은 것들은 모두 이 고통의 세계에서 자신의 육체를 인식하는 증표가 된다. 자해를 통해 신체와 정신적 고통 사이의 괴리를 메우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자신의 자해를 설명하기에는 아직 자해에 관한 언어가 부족하다 - P304

고 느낄 수 있다. 그렇게 공백의 영역에 있는 자해에 대한 감정, 상태, 분석, 설명 등등이 반드시 언어화를 거치지 않아도 괜찮으며, 오히려 그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핵심은 자해가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경감시켜준다는 것이다. 분명히 매우 괴로웠고, 자해를 해서 덜 괴로워졌으며 자해를 계속하는 것은 그때 느낀 바가 있어서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 P305

과거 나는 자해를 "여기에서 저기로 가려는 마음"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조금 더 상술하면 자해는 이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에 가깝다. 그 때문에 자해는 한번 인생에 스며들면, 삶에서 다른 상태를 보려고 할 때 얼마든지 되불러올 수 있는 수단이 된다. 자해를 하는 우리에겐 모든 것이 모호해져 이 세계가 상상의 것인지 경험된 상상의 것인지 정말로 물리적인 세계인지 모르게 된다. 누구도 자신의 자해를 설명할 수 없고, 어쩌면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러니 아마도 100명의 자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자해하는 방식이 있고 무한한 자해에 대한 감정이 있을 것이다. - P312

내게 자해는 많은 것을 주었지만, 점점 줄 수 있는 것이 줄어들기에 삶에서 멀어져갔다.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마음 자체에 일어나는 균열이라곤 볼 수 없다. 지금도 나는 가끔 어떠한 상황에서 자해만이 가장 획기적인 수단이라고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만 나의 자해 - P313

는 늙고 나이 들어 이제는 그 고무줄이 굳고 균열이 가 쓸 수가 없다.
앞서 자해는 몸과 정신의 균열을 메운다고 했다. 그러나 자해를 거듭해나갈수록 그 효과는 줄고 효용 없는 행위 위에 반복만이 축적되는 형국이 오면, 스스로 의문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가 정말 세계에 균열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어느새 어두운 곳에 앉아 균열이 만들어지는 영상을 무한히 반복 재생하고 있는 것인지.

자해는 자기를 망치고 흐트려놓는 즐거움을 준다.
를지지부진한 일상의 달리기에서 탈 것을 바꿔주고, 날게도 한다.
그러나 한 번 이 미친 열차에 타면 선로가 다할 때까지 내릴 수 없다.
그 속도감. 짜릿함. 변화무쌍. 활기!
선로의 끝에서도 기차는 계속 달린다. 그리고 끝의 끝에 가서야 멈춘다.
그리고 그곳엔 끝이 아닌 내가 있다.
-리단, 『자해장려안하는만화』 - P314

시도는 개인적일지라도 죽음은 모두의 것이 된다. 정신질환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살을 기도하는 것은 아니며, 자살한 사람들 모두가 정신질환자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병자들의 자살과 자살 기도, 자살 시도 후에 오는 것들, 그리고 자살한 정신질환자들의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일단 당신이 자살한다면 그 순간부터 당신의 서사는 모두의 것이 된다. 모두 당신을 오해할 것이다. 궁금하다는 명목으로 당신을 갑자기 알아내려 하고, 유언을 알려고 하고,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고 하고, 왜 죽었는지 알고자 한다. 오랫동안, 어쩌면 영원히. 당신은 당신의 진실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과 당신을 기억 속에 묻으려는 사람들 사이에 조금 더 존재할 뿐이다. 그 이후는 바랄 수 없다. - P315

본인이 직접 시도한 것이든 아는 누군가가 시도한 것이든, 성공한 것이든 실패한 것이든 자살은 깊은 공허를 남긴다. 깊고 고통스러운 병에 시달린 사람들은 자살이 보여주는 위태로운 달콤함을 안다. 대부분 수도 없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자살에 도달할지에 대해 시뮬레이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들은 우리로 하여금 자살의 개념을 점점 익숙하게,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자살사고가 언제 올지, 얼마나 심하게 올지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따라서 언제나 너덜너덜해져 술병을 잡거나 이불 속으로 무한정 도피하기도 하고 또는 함께 휘뚜루마뚜루 자해 파티를 하기도 한다. 자살은 반드시 나와 병 둘이 동등한 국제식 다이를 두고 치는 포켓볼이 아니며, 당신 손이 두 개라면 병은 천수관음의 손을 하고 당신을 유린할 것이다. 자살은 공평한 상대가 아니다. 시작된 순간부터 이미 기울어진 것과 진배없다. 외려 점점 더 커져 이윽고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일단 발생한 자살사고는 당신을 온 구석구석 헤집어놓을 것이다. 사소한 자살 생각부터 몇 날 며칠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는 자살사고는 차곡차곡 개켜지고 발라져 머릿속을 빼곡히 채우는 관념이 될 것이다.
자살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꼭 자살 직전에 있던 사건 사고만이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살을 하는 이유야말로 암호처럼, 해독할 수 없는 고대 문자처럼, 기록은 했으되 다시 읽어보면 뭐라고 하는 건지 위화감을 느끼고 이해할 수 없는 내용과 같다. 자살 - P316

은 눈을 번득이며 도사리고 있다. 당신이 조금만 균형을 잃는 순간을 기다리며 말이다. 만약 당신이 치솟는 자살사고로 숱하게 자해나 파괴적인 행동을 한다면 조속히 내원해 자신의 증상을 가라앉히는 등 빠른 진정이 필요하다.
또 다른 위험한 자살사고가 바로 만성적인 자살 관념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특정 기간이나 사건을 정하고 이를 기점으로 자살을 행하겠노라 정교히 플랜을 짜둔 자살사고다. 이것이 위험한 점은 단지 실행력이 높으며 성공률도 높다는 점에 있다기보다는 병자로 하여금 이른바 ‘죽음의 스케줄‘을 철저히 믿고 따르게 한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쉽사리 타인에게 노출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죽음의 색과 가까워지며, 계획이 타인에게 노출되어 저지당할 시엔 마치 자살을 실제로 시도한 사람처럼 공허감에 사로잡혀 현실과 사회로 복귀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자살자의 터널 사고(tunnel vision)는 오로지 자살만이 빛나는 선택지로 보이는 것을 말한다. 심한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보이는 경향이기도 하다. 또 자신에게 너무나 당연한 논리이기에 최소한의 힌트만 주어도 모두가 당연히 알고 이해하리라 여긴다. 음성으로 내뱉지 않았지만 상대 앞에서 했던 생각들을 마치 소리 내 직접 전달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타인의 입장에서는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하여 "네가 왜 자살을 해? 그런 이유로?" 따위의 질문을 던지게 되며, 이것은 자살을 생각하는 - P317

이들에게 좌절을 주고 다시 한번 자살을 결행코자 마음먹는 데에 일조하기도 한다. 결국 자신을 이해시킬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자신의 죽음뿐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때 자신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것을 스스로 깨닫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고, 주변 사람의 태도를 살펴 그들이 위화감을 느끼는 것을 보며 자기 생각이 일그러져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먼저 꺼내 자신의 생각이 온전한 형태를 하고 있는지 확인받을 수도 있다.
자살 위험에 놓인 이들에게서 단번에 위기감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 자살하고자 할 만큼 심각한 정신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도 소위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죽고 싶다‘라는 언어적 의사표현 없이 자살하는 이들도 있다. ‘죽고 싶다‘는 마음, 자살 충동의 형태 역시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사소한 일에 자살을 결심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남들이 ‘저러고 어떻게 살지?‘라고 반응할 정도여도 자살 시도의 임계에 도달하지 않기도 한다. 다행인 얘기지만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한 것만으로 자살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여부에는 시도의 심각성과 여파, 후처리, 의도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여타 정신병의 증상들처럼 한번 수위가 높아진 자살사고, 충동, 돌발 행위 등은 제어하기 어려워진다. 자살사고가 더는 자기에게서 발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 강림하듯 내려오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호소하는 자살사고의 첫째로 고통스러운 지점이 바로 여기에 - P318

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생각이 자신을 지배한다. 초조와 불안에 시달린다. 둘째는 자살사고가 너무 만성화된 나머지 미래에 대해 자살 이외에는 상상할 수 없으며 일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당연하게 전제된 경우다. 격한 감정이 요동치는 첫 번째 경우와 다르게, 이 지점에서는 이미 모든 결론을 자살로 맺어버렸기 때문에 삶에 애정도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는 상태이며 가장 불행한 것은 이 둘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자살이 최선의 해법이라는 사고방식은 비교적 흔하다. 사회와 소속집단에서 탈락하고 대인관계도 모두 망가진 사람, 연이은 실패를 겪고 건강도 회복도 희망적인 미래도 장담할 수 없는 이의 입장에서는 사회에 복귀해 ‘정상적 일원‘으로 살라는 요구는 어처구니없을 따름이다. 그쪽이 더 불가능하다는 것을 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지,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확신도 없이 기나긴 고난의 재활을 수행하기보다는 자살을 택하는 편을 현명하다고 느낀다. 자신이 부딪힌 장벽을 일시적인 것이라 여기지 않으며, 이에 대한 영구적이며 합리적인 해법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살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죽이는 행위라는 요지의 말을 다들 들어보셨을 것이다. 누군가는 자살은 타살이라는 말에 적극 동의하지만, 누군가는 자살은 마침내 자신의 의지로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에 타살이라 보기 어렵다고 본다. 어떤 이는 자신의 육체적 수명이 그보다 길었을지는 몰라도 자신의 삶을 여기에서 끝내고자 하 - P319

는 바가 명확해 죽음을 택하므로 여기까지가 제 수명과 마찬가지라는 점에서 마땅히 자연사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뭇 사람들은 자살이 병사라는 점에 크게 토를 달지 않고 대부분 동의를 표하지만, 결국 투병의 고통이 그를 잠식해버렸는지, 아니면 자살이 마지막 저항의 제스처였는지 누구도 그 죽음의 성격을 명확히 단정지을 수 없다. 결국 자살은 자살이며, 자살을 병사라고, 타살이라고, 자연사라고 말하는 것은 그 증상의 어떤 측면, 이를테면 어쩔 수 없음, 불가피한, 만성적인, 저항해도 좌절되는 상황을 설명해보려는 시도일지도모른다.
하지만 결국 자살은 자살이다.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자살의 의미는 단순히 삶을 스스로 끝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어떤 이들에게 자살은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며, 어떤 이에게 자살은 자신의 삶이 마침내 정신질환에 무릎을 꿇었다는 일종의 포기 선언일 것이다. 문제는 자살로 승리의 쾌감을 맛볼 사람도, 패배의 비감을 느낄 사람도 둘 다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자살의 성패를 결정할 수 있는 당사자인 자신이 존재하지 않게 되므로 자살을 성공 혹은 패배로 양분해서 인지해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되돌아오는 것은 없다. - P320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 끝나는 방식이든, 스스로 해를 입혀끝을 내는 방식이든 자살 시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상한 공간에 도달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어떤 종말을 맞기 위해 다리를 넘 - P327

었든, 자신의 고통을 끝마치기 위해 치사량을 삼키든, 살아남아 고개를 돌려 확인하게 되는 세상은 전과 같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자신은 더 이상 과거의 자신이 될 수 없음을.
(...)
정말로 자살은 미래를 앞으로 당긴다. 자살과 섞인 우리는 매우 응축된 사고를 하고 아주 밀도 높은 고통에 시달리며 앞으로 살면서 긴 시간 동안 느껴도 족할 고통이 매일 매 시 압축적으로 쏟아진다. 나는 지나간 시간과 과거사 때문에 자살을 택하는 비율보다 앞으로의 시간을 그렇게, 혹은 더 심하게 보내야 한다는 고통 때문에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여긴다. - P328

렇지 않다. 나는 자살을 기도한 ‘그날‘ 앞으로 보낼 수 있을 많은 시간을 지불하고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내가 버린 그 ‘나‘는 내 인생에서 계속 맴돌 것이다. 그날 그 시간에서 멈춰서 나의 일부는 그 시간에서 산다. 그 생각을 종종 한다. 자주 하는 것도 아니고 의식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고의 회로를 빙빙 거치다 보면 자살을 시도한 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나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합리적이고 타당한 선택이었다고 자신할 수는 없다. 그렇게 드러나는 복잡한 심경들은 필연적으로 ‘그날‘ 이후로 흘러가고 있는 내 시간대로 스밀 것이다. 나이와 성별과 이름이 적힌 팔찌를 차고 오래 깨어나지 않던 나는 링거 줄이 줄줄 매달려 있던 병상에서 뒤척이며 일어나서, 간호사도, 보호자도, 병동의 잠금장치가 걸린 유리문도, 경비도 아무도 몰래 병원 밖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아, 이대로 도망가버릴까?‘ 했지만,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살 얘기를 했지만 마치 농담거리인 양 밝고 산뜻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얼마간의 인생을 죽음을 택한 내게 쥐어주고 그냥 떠났다. 그리고 내가 잃은 것은 지나온 삶이 아니라 앞으로의 시간이라는 것을 늦게 알았다. ‘그날‘ 내가 그에게 건넨 부피만큼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망실됐다. 이것은 상상된 두려움이 아니다.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이 제거하고 싶은 대상은 많을 거다.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 특정 인간, 어떤 사실이나 기억등. 그러나 결국 지불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살아남았어도 - P329

당신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는 늘 거기에 있다. - P330

성정이 좀 더 느긋해져 ‘나를 싫어하는 적들은 강가에 앉아 구경하고 있으면 알아서 떠내려올 것‘ 같은 마음가짐이 되었을 때에 이제 자살사고는 이전만큼 강력하고 빠른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런 마음가짐은 사람들을 만나며 얻거나 풍파를 겪으며 습득하는 경우도 있고, 약물의 도움을 받아 누그러뜨린 상태를 만들어 유지할 수도 있다.
(...)
아마 언젠가 당신은 자살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것이며, 그런 조건과 환경을 갖출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은 자살하고자 하는 마음이 상시 존재해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괜찮은 축에 들게 될 수도 있다.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강가에 앉아 구경하는 놀이를 해보자. 강가에 앉아 여울을 피해 유영하는 오리들을 구경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 P335

섬 연애는 단순한 도식에서 시작된다. 섬 연애자들이 보이는 특징 중 하나는 불행한 과거나 쉽게 이해받기 어려운 고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가정폭력이나 집단 괴롭힘 등 성장 과정과 대인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은 이들, 그래서 가정이나 또래집단 혹은 기존 환경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어 했던 이들, 자신의 병이나 정체성 등이 ‘우리 사회 보편적인 기준‘에 어긋나는 요소로 취급되어 외부 세계에서 배제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자기표현을 검열해야 하는 이들, ‘나와 나의 상처나 이질적인 점마저도 공유할 수 있고 나를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인정하는 누군가‘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이들. 이들이 기존의 있던 곳에서 떠나려는 시도를 하고 마침내 성공해 새로운 환경이나 새로운 집단에 속하게 되었을 때, 이 새로운 곳에는 내가 나를 드러내도 될 만한 사람이 있을 거라 믿는다. 오랫동안 외로움에 시달렸던 사람은 자신처럼 상처를 가진 사람을 알아보고, 쉽게 이끌린다. 살면서 다른 사람하고는 나누지 못했던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나누며 단단해지는 결속은 타인이 이해할 수도 손댈 수도 없는 강력한 무언가가 된다. 불안정한 두 사람의 만남은 종종 격렬하고 배타적인 파국을 맞지만 물론 연애 초기에 당사자들은 이것이 섬 연애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연애와 우리가 말하는 섬 연애는 한 끗 차이, 종이 한 장 차이이기 때문에. - P338

퀴어-정신병-섬 연애라는 3단 콤보는 그 파괴적인 면모에 비해 의외로 흔하게 존재한다. 애초에 ‘이곳에서만 서로 이질성과 상처를 공유할 수 있다.‘라는 전제를 매개로 관계의 결속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비단 연애 감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 아늑함을 포기하고 밖에 나가 또다시 자신을 이질적으로 대하는 외부로 나간다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정체성들끼리 서로 연결돼 상호의존하기 때문에, 섬 연애를 포기하는 것이 곧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는 일이 되 - P340

어 이들은 결단코 헤어지지 않으려 노력하기도 한다. - P341

만약 당신의 많은 영역이 불안정하고 오로지 연애에서만 자기 자신을 성취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의존으로 인해 상대방이 지쳐가고 있는 것을 보고, 느끼고 있다면 자기 자신도 알 것이다. 헤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러나 섬 연애의 고립된 상태에서는 ‘나는 자살할 거야, 너를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행동, 자신의 생각, 자신이 저지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가치가 없다고, 사라지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태도. 나는 사람들이 섬 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갖거나, 말려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다. 섬 연애는 그렇게 ‘되는‘ 거니까. 그러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이 연애 안에서만 존재가 성립된다는 생각, 그 생각으로 말미암아 저지를 수 있는 행동의 극단에 대해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는 견해다. 그래야 지금 관계도, 그리고 언젠가 이후에 생길 관계들도 살 수 있다고 말이다. - P350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의사가 ‘나를 잘 알고 있다.‘라는 가정이다. 정보를 아무리 많이 제공하더라도 의사가 환자와의 관계에서 필요로 하는 정보는 그와 상이할 수 있다. 자신은 자기를 알리고자 제공하는 정보들, 이를테면 "제 이름은 리단, OO빌라 3층에 살고 검은 고양이를 키웁니다. 애인은 있습니다. 애인과 사이는 어떻냐면요 어쩌구 저쩌구 요새 걔가 어쩌구……" 같은 정보는 의사 입장에서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의사 입장에서 필요한 정보는 ‘밤에 잘 자는지, 몇 시간 정도 자는지, 식습관은 어떤지, 여전히 환청이나 이상한 감각은 계속되고 있는지, 외출은 하는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시작은 절박하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의 고통을 알아달라고 허공에 외치듯 시작하나 투병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점점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병 서사를 갖추게 된다. ‘의사에 - P364

게 아무리 말해도 결국 의사는 모른다.‘라고 생각하게 될수록 정신과 진료가 무의미하고 소용없다고 판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병과 홀로 싸운다는 것, 점점 병의 장악이 커지는 것에 대해 입을 다물고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다.
‘나‘를 설명하고, 알리고, 이해시키고자 하는 그 절박한 표현들이 좌절되고, 결국 당신은 의사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체념하게 될 수 있지만, 기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원에 내원해 의사의 진료를 받고 약을 타오고 복용하는 행위가 당신이 가진 것들, 잃고 남은 것들을 유지하기 위한 당신 자신의 의사 표시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을 돕는다는 것을. 이 의사가 날 구원해줄 수 있을까?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 병자들의 세계에는 구원이 없다. 행동의 연쇄, 행동의 축적만이 삶을 지탱한다. 병이 길어질수록 의사는 조력자의 역할을 하고 주 행위자는 자기 자신이 맡는다.
반면 부모는 자식이 그들의 생각에 성체가 아니면 절대 떠나지 않는다. 부모는 간섭한다. 끝까지 간섭한다. 그래서 당신은 전혀 예상치 못하던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당신이 병중에 진 채무를 부모가 대뜸 갚아주기도 하고, 때로는 집을 얻어주기도 하며, 일자리를 알아봐 주기도 할 것이다. 모이를 물어다 주는 새처럼. 당신은 기묘한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 무력감은 더욱 복잡미묘하게 관계를 재배치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갈등과 고성이 끊이지 않았던 집이 평화와 안정을 찾은 것처럼 변모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에 안착하는 병 - P365

자는 없다. 그들은 평화보다는 기이함, 일그러짐, 비틀린 듯한 위화감을 느낀다. 억지로 작은 새 둥지에 처넣어진 성체 새들마냥.
과거 어느 날 병원을 나서서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손에 들린 아버지의 신용카드와 영수증, 한 달치의 약이 든 봉투를 안고 생각했다. 비록 병원에 간다고 할 때 병원비를 기꺼이 내주겠지만, 그 돈이 무엇으로 교환되는지 집에서는 절대 알지 못하겠구나. 이 병에 대해서 부모가 이해를 할 일은 없고 우리는 그저 이 주제에는 거리를 두고, 다른 때에는 행복한 가족일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 도시의 무연고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뭐 어때. 담배를 다 피우고, 버리고, 사거리의 횡단보도에서 조금 잰 발로 집으로 돌아갔다. 새 둥지에 떨어진 커다란 뻐꾸기면 어때, 나는 언젠간 날아갈 수 있다. - P366

고통을 맞닥뜨렸을 때 자신의 존엄을 지켜내는 일은 숭고하다. 그러나 숭고한 일만 벌어질까. 사실 그의 내면은 정말로 비참과 아픔으로 고래고래 흉측한 소리를 지르고 있을 수도 있다. 그의 내부는 너무나 망가졌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소리 지르는 것을 들으면서, 또 소리 지르는 이유를 알면서 시끄럽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비명, 소음으로 인해 또 병이 생겨난다. 이윽고 우리는 알게 된다. 고통에 노출될수록 인간이 단단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고. 고통과의 알력은 두더지게임 같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오락기의 나무 두더지들은 아무리 내려쳐도 까닥하지 않지만 우리의 고통은 입을 다물라고 망치로 내려칠수록 새로운 모습을 하고 와와 불어난다고. - P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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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 -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안내서
리단 지음, 하주원 감수 / 반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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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알고 있다. 필연적으로 이 싸움은 우리가 지게 될 것이라는 걸. 나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노화보다 빠르게 진화하는 병을 보고 있노라면 진절머리가 난다. 그러나 사실은 생각한다. 병이 펼쳐주는 지평도 상상만큼 나쁘지 않다고, 가끔은 기꺼이 그의 움직임을 보조한다. 나는 많은 약을 먹고 있지만, 그것들이 병증을 공격하고 소멸시킨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약은 병을 좀 더 합리적인(병과 병자 모두 고개를 끄덕거리는 수준의) 크기로 조정하는 역할이다. 선두에서 씨름하는 건 자신이다. 그리고 전선의 선봉에 서야할 때 나는 가끔, 아니 종종, 아니 좀 더 자주 병에게 진두지휘를 양보하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제 너무 섞이고 얽히고 휘말려버렸다. 무언가 하려 해도 그게 정말 자신을 위한 일인지, 병이 속삭여 하자고 조르는 일인지 구분하기도 모호하다. - P25

나는 정신병자들이 나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낫는다는 것이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의미로, 과거 그 사람의 어떤 ‘맑았던‘ 시점으로 돌아가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두 똑똑하고 영리했던, 기민하고 총명했던, 꽤 괜찮았던 시기를 안다. 하지만 병은 그곳 그 정류장으로 가는 버스가 아니다. 오히려 병의 힘을 빌려 우리가 그때보다 똑똑하고 영민할 수 있는 미래에 당도한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가능성이 높다. - P26

병이 없는 사람은 병식을 가진, 병식을 가져야 한다는 괴로움을 모른다. 병식은 단순히 ‘나는 병이 있습니다.‘ 하고 인정하는 것과 다르다. 병식은 병을 인정하고, 이 병을 관리하는 패턴을 만들며, 병적 상태에서 자신의 행위가 자신 또는 타인에게 가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나는 병이 있다.‘라고 생각하 - P40

기만 하는 ‘병식 없는‘ 환자 A와, 병식이 있는 환자 B는 똑같이 조증이 와도 그 사고와 행동이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A에게 조증이 왔다. A에게도 자신의 상태에 대한 통찰이 있기 때문에 조증 상태가 점점 심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A는 여러 가지 딴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다음 주 병원에 가서 의사에게 조증을 밝혀야 하나? 2주 후에 친구들과 모임이 있는데 그때까지 가만 있다가 ‘재미 좀 본‘ 다음에 하이텐션으로 놀고 나서 그때 의사에게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조증은 규칙적인 속도로 역을 향해 들어오는 기차가 아니라 살얼음에 미끄러져 마구 회전하며 주위의 모든 것을 들이받는 자동차에 가깝다는 것이다. 예측불가한 그 진행 속도에 그대로 올라타버려 그는 친구들과의 모임 전에 이미 사고를 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불쾌한 일을 벌일 가능성이 높다. 인식한 즉시 빠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증상이 악화된다는 것을 알고, 조증이 아무리 발버둥치며 달콤한 말을 해도 귀를 막고 자신을 병원에 끌고 가는 것. 후일을 대비하여 미리 조증의 퇴로를 차단하는 이 행동이 병식 있는 병자의 것이며 여러 가지 불상사로부터 병자를 지킨다.
병식을 가진 B의 경우, 조증을 눈치채면 단번에 불려간다. 이름하여 조증 법정으로. "조증 인정하십니까?", "최근 며칠간 50만 원 쓰셨죠? 당장 병원 갑시다.", "자이프렉사(항조증제로 체중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있음) 먹고 10킬로그램 찌겠네요. 그래도 가셔야 합니다."라 - P41

고 말하는 검사와, "아니 아무 문제도 없으시잖습니까. 좋아 보이시는데?", "과장된 걱정을 하시는군요. 기분이 좀 나아지셨을 뿐입니다." 하며 정중하고 뻔뻔하게 부인하는 변호사 사이에 끼어 우왕좌왕할 것이지만, 그래도 그는 판결을 내린다. 그는 여러 수를 생각하지만 결국 머릿속 법정을 폐회하며 과거의 판례, 사고의 전적을 쭉 한번 읊고 ‘병원에 가라.‘라는 판결에 따라 버스에 몸을 싣는다.
당신이 병적 상태에서 아무리 계산하고 생각하고 예측해서 발걸음을 디뎌도 그 길은 당신이 원했던 방향으로 당신을 안내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미 병이 침입한 상태로 병을 다루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도 곧 지나가리라."라는 말처럼, "지금 병원에 가라."라는 말 또한 우리에게 언제든 실천할 수 있는 잠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옷을 꿰입은 후 병원에 가 고백한다. 이어지는 치료와 치료의 망망대해에 닻을 내린다. 우리는 병식을 가졌으니까. - P42

이런 맥락에서 나는 ‘병밍아웃‘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용어는 명백히 퀴어의 단어를 차용한 것이다. 그리고 정신병을 밝히는 일 역시 1) 반복해야 하고, 2) 말을 꺼낼 상대에 대한 사전 조사가 필요하며, 3) 밝힐 상대 그리고 자신에게 감정적 동요가 발생하여 갈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 P45

자신의 병을 사회적 맥락 속에서 발화해야 하는 이들은 이 ‘정신병‘이라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다른 (비슷한 소수자의) 습속이라든지 문자를 베꼈다. 이에 관해 ‘퀴어의 소수자성을 지운다.‘라고 비판한다면 반론이 있을 수밖에 없다. 퀴어라는 집합의 여집합에 정병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이들이 두 집합의 교집합에 속한다. 피차 언어 없는 소수자들끼리, 기저도 서로 공유하고 있는 이들끼리 누가 누구의 언어를 갖다 쓰고 말고 한다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울‘ 만큼 권력이 강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 P46

이를테면 누구에게나 "나 같은 사람이?", "내가 설마 그런 것까지 하겠어?" 싶은 행위들이 있을 것이다. 조증은 그런 선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버린다. "조증은 뭐든지 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언뜻 긍정적인 말처럼 들리겠지만, 결코 그런 의미만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뜻도, 동시에 어떤 범죄든 저지를 수 있다는 뜻도 된다. - P90

조증이 처음 발발한 사람들은 이것을 가히 신이 자신에게 내린 선물인 것처럼 받아들인다. 그들은 뭐든지 할 수 있고 또한 뭐든지 될 수 있었다. 조증을 딛고 솟아난 인생. 그러나 몇 차례 재발하게 됐을 때 조증 환자는 비로소 시름에 잠긴다. 아직 조증이 망칠 미래가 선명하지 않은 이들은 이 과정에서 조증을 숨긴다. 일이 터졌을 때야 조증을 재우려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조증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벼랑으로 몬다는 걸 알게 된 조증 환자들은 솔직해진다. 그들은 증상이 생겨나기도 전에, 예감이 들었을 때 즉시 병원에 간다. 그리고 그전까지 먹던 모든 약들을 항조증 약으로 바꾸고, 거대한 데파코트와 줄줄이 이어지는 리튬과 라믹탈과 셀 수 없는 알프라졸람을 달고 돌아온다. 그렇게 돌아온 곳은 지옥이다. 조증에 정직한 사람들이 가는 지옥. - P73

나는 BPD는 사람들에게 좀 해를 끼쳐야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시에 ‘살면서 그런 해를 좀 입으면 어때?‘ 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그래서 BPD의 존재가 그렇게 사람들이 말하듯 불가촉민인 양 여겨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말로 누군가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그를 내치는 방법도 배우고 해봐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 P107

한편에서는 로맨틱 코미디를 촬영하지만 다른 쪽에서는 자살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 것이 BPD의 일상이며, 이 아이러니가 발각되어도 그는 상대가 왜 충격을 받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에게는 원래 극단이 당연하기 때문에. BPD의 감정이야말로 롤러코스터처럼 역동적이다. 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고도도 모를 곳까지 끌려올라갔다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동댕이쳐지는 삶을 살아왔다. 만성적인 불안과 공허에 지속적으로 시달려 익숙해진 그들의 내면 세계에서는 파괴적인 생각과 실험 들이 연이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것은 다분히 폭력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이로 인해 자살사고나 타인에게 해를 끼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울어도 이것을 ‘그렇게 해야 하는‘,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문제는 BPD들에게 생각(사고)이란 단순히 머릿속에 있는 무언가가 아니라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모범적인 역동이라는 데에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해 이는 고통은 BPD들에게 수족을 잘라낼 때 느끼는 것처럼 실제로 감각하는 고통과 다름없다. 그런 고통을 지우기 위해 무슨 수든 쓰는 BPD를 사람들은 언제나 오해할 뿐이다. - P109

정신이 망가진 사람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마지막까지 해치는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특히 자기 자신의 육체다. 많은 정신병자들 - P137

이 몸과 정신병을 분리하여 사고한다. 체력 저하, 체중 증감, 무기력증, 수면장애 같은 신체의 신호를 무시하고 자신이 분석한 정신병의 원인을 소거할 수 있으면 지금 봉착한 제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처음에는, 혹은 어떤 시점까지는 이런 전략이 먹혔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하는 실수가 초발 삽화에서 약물 치료로 호전을 보이면 빨리 약을 끊고자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실수는 병을 치료할 기간을 이를테면 1~2년 정도로 잡고 그 안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만든 마지노선에 쫓기듯이 치료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섣불리 자의적으로 단약하게 되면 일이 힘들어진다. 단약 이후에 삽화가 발생할 가능성이 제로가 아니므로 병이 다시 발발하게 되면 이들은 필연적으로 무너지며 재차 병의 이유를 찾으러 돌아다닌다. 사실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다시 병원에 가게 되었을 때에 그들은 이미 이전에 먹었던 용량을 상회하는 약을 복용하게 되며, 이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병은 점진적으로 자라난다는 사실이다.
자라나는 정신병은 교묘하다. 임계점을 넘어선 정신병은 더는 우리 안의 타자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과 긴밀하게 섞여버린다. 병에 오염되었다고 보든, 병과 혼합되었다고 보든 이제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기분을 잃어버리고 병증이 호소하는 대로 사고하고 판단을 내릴 공산이 커진다. 병은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를 보다 - P138

확장하고, 우리가 인식을 마치면 그 속으로 재빨리 스며들어 자신의 몸집을 불린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병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구가 상승하는데, 사실 제어가 가능했던 시기는 이미 놓쳤다. 이제는 확대되는 병의 지각을 쫓아가려는,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에 그칠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알게 된다. 병이 내부에서 발발하는 느낌이 아니라 외부에서 내려오는 느낌을 병이 내 내적 자양분을 먹으면서 자라나는 게 아니라 다 자란 성체로 불쑥 등장하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이쯤되면 이제는 물을 수밖에 없다. 이 병을 낫게 하는 게 가능할까?
정신병을 앓는 이들 중 일부는, 의사가 당신이 정신과 약을 평생 먹어야 하고, 이 병은 죽을 때까지 관리해야 하는 병이라고 말하면 실망감과 낭패감을 감추지 못한다. 한편, 일부는 덤덤히 받아들이고 자기도 당연히 그리 생각했음을 피력하는 경우도 있다. 더 이상 무엇을 좋아지게 하기 위해 치료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약을 복용하고, 생활 습관을 개선하고, 환경과 여건을 갖추는 데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상상 이상의 비용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어떤 이들은 그 비용을 지불할 여력이 되지 못해 간신히 저공비행으로 버티거나 추락하고 다시 올라오지 못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교착상태에 새로운 지평이 되어줄 신체 질환이 발발한다. 경증으로는 약물 부작용부터 근골격계 이상, 대사 질환, 각종 감염증, - P139

피부 질환, 자가면역 질환, 심지어 탈모에 이르기까지 더는 몸이 이전같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원인과 진단이 명확한 병증들은 비교적대처하기 용이하다.
약물 부작용이나 정신 흥분 상태가 유발하는 발작을 경험해본 이들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각과 육체를 완전히 제어할 수 없고 자기 멋대로 날뛰는 신체 말단들을 갉아대는 듯 기이한 통증을 겪으며 벗어날 수 없는 경험 말이다. 신경과에서도 원인을 찾지 못하고, 증상이 폭발할 때에 응급실에 내원해도 이유 없는 ‘액팅 아웃(acting out, 말이 아닌 행동으로 갈등을 분출하는 정신과적 증상)‘ 정도로 받아들여지는 그런 고통들. 당신은 이제 고통이 불합리하게 배분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원인 불명의, 저절로 생기는 병(특발성 질환)을 병 - P140

자들이 홀로 이겨내기란 매우 어렵다. 이제껏 내 말을 잘 듣고, 내 편이라 여겨왔고, 함께 정신병과 맞서던 육체의 배반은 마치 누군가 나를 포기한 것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마음이 지각하는 시간의 흐름이 어떻든, 육체는 차곡차곡 나이 들어간다. 스무 살의 숙취와 서른 살의 숙취가 다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신체가 담보가 되기는커녕 신체의 병이 마음의 병과 손을 잡고 함께 행복의 나라로 가버리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당신의 사고장애, 정신증이 생각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너덜너덜한 몸과 결합해 여러 이상 사고를 야기한다. 당신은 ‘내가 죽어야이 고통이 끝난다.‘ 하고 맹목적인 믿음을 갖기도 하고, 얼마나 더 시달려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탐구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내몰 수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반대되는 상황, 즉 육체의 질병을 해결해야만 정신의 짐도 덜 수 있을 거라는, 정신병의 초기와 반대로 작용하는 생각을 키워나가는데, 문제는 육체의 고통이 사라지더라도(고통의 원인이나 고통스러운 요소를 제거·치료하더라도) 정신에 생겨난 얼룩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이 얼룩은 비단 자살사고나 자해 충동같은 자기파괴적이고 분명한 형태로 표출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자신을 돌볼 만한 이유를 찾지 못해 제대로 된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는다거나, 병이 어떻게 진행되든지 개의치 않는 무시일관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 어쨌든 긴 투병, 투병과 투병들 사이의 중첩은 우리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포 - P141

기하게 유도한다.
병이 낫지 않는 사람들은 울적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새로운 질병이 생긴다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사소한 것, 이를테면 위장장애같은 것에도 쉽게 견디지 못해 한다. 입마름이나 오심 같은 사소한 증상을 겪을 때조차 마치 자기가 앉은 의자가 동댕이쳐졌다는 얼굴로 시름에 젖는다.
그러나 병이 펼쳐지는 장은 다른 나라의 월드컵경기장이 아니라 자기 몸이다. 그 연관성을 병이 낫지 않는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예를 들면 우울증으로 침대에 오래 누워만 있을 때 누워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습관이 생겼다면, 자연스럽게 팔꿈치에 체중을 싣는 자세가 되므로 테니스를 치지 않아도 테니스엘보가 생길 수 있다. 이처럼 오래 누워만 있으면 테니스엘보가 생길 수 있다는 것, 불규칙한 섭식 습관으로 역류성 식도염이나 만성적 위장장애를 얻게 될 수 있다는 것, 활동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특정 근육에만 부하가 가서 근육통이 생긴다는 것 등을 겪으며, 어쩌면 실은 모두 원인은 자신의 행동 양태에 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문제는, 이유를 찾고 그것을 해결하면 해소되는 일이 아닌, 병이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좌절이다.
병을 주렁주렁 달고 사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병들은 각기 다른 시기에 날아왔지만, 이 병이 저 병에 어떻게 기대고 있고 저 병은 다시 다른 병이랑 손잡고 있으며, 경한 몇몇의 병증이 사실은 중대 - P142

한 질환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모두 함께 개선하는 것이 아니면 그다지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 그러나 불규칙한 식습관과 폭식에서 온 섭식 문제, 활동 부족과 갑작스러운 체중 증가로 관절 이상을 겪어 이를 한번에 타개하고자 마음먹고 운동 계획을 세워 충실히 이행하고자 했고 며칠 실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신이 유감스럽게도 갑자기 새로운 활동을 감당하지 못해 손을 들어버려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대해서 말이다.
이처럼 여러 번 자신이 처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노력한 사람도 종내에는 두 손 들고 말기 때문에, ‘질병 관리 프로젝트‘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와 핵심은 아주 아주 간단한 것으로 잡아야 한다. 그리고 절대 혼자서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주위의 도움이 꼭 필요한데, 도움을 받으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을 요청하기를 수치스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프로젝트와 관계 사이에서 당신의 병은 (그것이 정신병이든 육체의 병이든 오래된 병이든 신생 병이든) 언제든 심한 기복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 P143

정신병은 처음에는 증상이 양호하고 환자가 잘 대응하는 것처럼 보여도 한 번 균형이 어긋나기 시작하면 비가역적인 파괴를 거듭하다 고립을 맞기 쉽다. 리튬을 1200밀리그램, 토피라메이트를 300밀리그램 먹고, 쿠에티아핀을 800밀리그램 먹고, 그리고도 모자라서 리스페리돈을 8밀리그램, 클로르프로마진을 50밀리그램 먹어도 나아지기는커녕 지금 상태에서 더 나빠지지 않게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있을 뿐이라는 비참함을 정신병이 없는 사람들은 모른다. 그리고 그런 비참한 상태가 마치 질 좋은 양분인 양 혹처럼 돋아나는 새로운 질병들의 존재가 얼마나 사람을 괴롭게 하는지, 그것은 정말로 아무도 모른다. 다만 끝없는 병의 계주를 지켜보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 P145

은 다음과 같다. 설명하고 분석하는 데 힘을 쏟지 말 것. 치료할 수 있는 질환은 절망의 상태로 버려두지 말고 충분히 치료할 것. 그리고 희망적일 것. 당신이 자신의 모든 기회가 끝났다고 생각하더라도, 악화일로라도, 가능성이 없더라도 희망적일 것.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예상치 못한 질병이 발견되었을 때, 그것이위중한 질병일 때, 당신을 위로하러 오는 사람들을 밀어내지 마시길 바란다. 고립을 두려워하라. 고립이 죽음으로 가는 티켓을 이미 끊어놓은 자의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어도 그 비장함을 두려워하고 언제나 연대를 구하라. - P146

이론적으로는 여러 가지 약을 써보며 집중 관찰하여 최적의 약물을 찾겠지만, 우리는 안다. 많은 환자들이 몇 주가 아니라 몇 개월, 심지어는 해가 지나도 ‘나한테 맞는 약!‘의 느낌을 알지 못하며, 지지부진한 통원 치료를 반복하며 부작용만 주렁주렁 달고 절망감만 쌓여가기 십상이라는 것을.
처음 정신과에 갔을 때, 나는 나를 이해하는 의사가 있는 병원에다녀야 당연히 좋을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병원을 발견한 것은 5년이 지나서였다. 그전에 계속 다니던 병원은 단점이 많았는데, 그럼에도 계속 다닌 이유는 그곳이 좀 더 퀴어 프렌들리하고(동성애에 유난을 떨지 않아서) 나와 애인이 같이 다니니 관계 문제 등에대해 이해도가 높을 것이고 그만큼 우수한 처방이나 조언을 받을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약물 치료에서 가장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의사와 대화가 통하는지’가 아니다. 의사가 자신이 처한 복잡한 상황이나 특수한 관계에 대해 아주 자세히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고 약을 잘 지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서사를 이해해줄 만한 정신과에서 진료받기 위해 집에서 매우 먼 곳까지 찾아가거나, 환자가 몰리는 곳이라 오랜 시간 대기해야 해 스트레스를 받으면 - P149

서까지 내원하기도 한다. 하지만 투자하는 시간과 비용만큼 내게 도움이 되는지를 꼭 따져봐야 한다. 만약 정신과에 가는 것만으로도 나의 많은 스트레스가 해소된다면 유익한 일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충분히 재고해볼 만하다.
약물은 자신의 고민, 정체성, 관계, 갈등 등을 단번에 해결해주는 마법의 도구가 아니다. 당연히 약을 먹는다고 즉각적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약물 치료는 몇 가지로 나뉠 수 있는 자신의 증상, 이를테면 불안, 공황, 우울, 조증, 자살사고, 환각 등 병증의 구체적인 면면에 대응하려는 치료다. 그러므로 약물 처방 면에서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찾는 것이 우리가 병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쟁취해야 하는 조건이다. - P150

그렇다면 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언제 정신과에 내원할지 결정하는 것, 대학병원에 갈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 병원을 바꿀 때에 들 이유를 찾는 것, 그리고 약이 자신에게 어떤 작용을 하는지를 파악하는 것, 무엇이 약물의 작용이고 무엇이 부작용인지 선을 그어놓는 것, 병원비를 마련하는 행위를 하는 것, 내원해 약물 치료를 받기 위해 해야 하는 일들을 하는 것, 약물 치료의 조력 집단과 - P157

연결되어 있는 것, 약물 복용 시간과 용량을 지키는 습관을 만드는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에 너무 많이 몰입하지 않을 것 등 너무나도 많아 다 쓰기 어려울 정도이다. 하지만 결론은 단순하다. 약물 치료는 약물의 영역이므로 약물 치료는 약이 하게 의 일게 맡기는 것. 그리고 사람은 사람의 일을 하면 된다. - P158

의사와 이야기하는 것은 정신질환의 세계에 익숙지 않은 초심자에게는 분명히 어려운 일이다. 자기가 어제 울며 죽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면서도 티슈를 다섯 장 쓴다. 하물며 의사의 약물 처방에 불만이나 문제를 제기하는 일은 분노와 슬픔으로 티슈가 50만 장쯤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에게 그간의 불만족스러운 상담과 약 처방에 대해 확실히 이야기해야 한다. 광인이 된 자신과 대면하는 것보다야 덜 어려울 테니까. - P161

정신과 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복잡한 까닭은, 처음 정신과 진료실에 들어가면 이제까지 쌓아놓았던 모든 이야기가 떼로 몰려들어 자기가 먼저 말하려고 아우성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맞은 것부터, 유치원 시절의 따돌림, 초등학생 때 집안의 파산, 중학생 때에는 일진들에게 구타당함,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었으나 우울하고 결국 입시에 실패하여 그동안의 가족 갈등이 폭발해 모두 동반 자살을 하자고 난리가 났던 일들, 가족을 떠나서 대학에 왔지만 연애는 실패하고 성적은 학사경고를 면할 수 없으며 돈은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모욕적인 상황을 마주하며 마음속에 살의가 일어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라고 눈물을 훔치며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어느덧 상담 종료 시간이 다가와 의사는 슬슬 난처한 기색을 보이고 오늘은 약을 줄 테니 다음 주에 오시라며 내보내는데 그때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다. 내 말을 듣기는 한 건가? 내 말에 반응이 없다? 내가 바보로 보이나? 내가 그 빌어먹을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가지고 온 건데…… 하는 마음으로 대기실에 다시 앉아 기다릴 적에 그래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 않았나 스스로 자위한다. 이름이 불려 약을 타서 몰래 꺼내보니 이름 모를 약 두 알이 봉지 하나에 들어 있어, 드디어 정신과 약을 먹게 되었구나, 나는 이제 공인된 정신병자구나, 하고 집에 돌아오는 버스 안 사람들을 보니 모두 정신이 멀쩡하고 나와는 다른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 사회의 일원으로 느껴져 집에 오는 입맛이 쓰면서도 나는 이제 인정받은 병자라는 마 - P162

음에 몸이 단다. 곧이어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가방을 열고 약봉지를 꺼내서 물컵에 물을 따라 경건하게 약을 입에 넣고 물을 머금었다. 그리고 일주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과를 처음 찾은 초심자라면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1. 이것은 약물 치료를 위한 상담이다. 심리 상담을 받고자 한다면 따로 심리 상담을 신청하라. 너무 많은 정보를 의사에게 전달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2. 모든 의사가 이해심이 많고 온당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핵심(예를 들어 특정 가족에게 폭력을 당해온 것, 섹슈얼리티, 종교가 있는지 여부, 출신 지역, 학력 등)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의사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라. 그런 의사와도 의사-환자와의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과 비용이 낭비되는 기분이 든다면 피하라.
3. 의사의 말에 일희일비하지 말라.
4. 의사의 언행에서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거나 수치를 주는 기색이 느껴진다면 그 병원에다시 가지 않아도 괜찮다. 이것은 약물 치료를 - P163

위한 상담이므로.
5. 의사는 타격팀이 아니다. 약물이 타격팀이다. 의사의 말들에 나를 돌아보기보다 바뀐 약물이 주는 느낌을 조목조목 기록하는 편이 낫다.
6. 약물은 내 느낌으로 복용하는 것이 아니라, 통계로 따져 처방한다. 우울한 기분이 든다고 재깍 항우울제를 받는 것이 아니다. 의사와의 충분한 상담을 통해 받는다. 고로 질문하지 않는 의사는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7. 어떤 특정 약을 타고 싶어 그 약을 타려고 연기하는 건 위험하고 병적이므로 그런 생각이 든다고 말하라.
8. 의사도 마찬가지로 당신이 너무 많은 정보를 제공하면 필요한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것이 어렵다. 이를테면 상담 때 내 정보들을 시간순으로 나열하는 것보다 중요도나 항목순으로, 한 번에 하나씩 나열하자(가정/친구/학교/직장 등).
2. 할 말을 메모하되, 리스트 형식으로 - P164

두괄식으로 작성한다.
10. 하지 못한 말이 상담 뒤에 기억나면 카운터에 양해를 구하고 말한다. 특히 미처 진료실에서 말하지 못했던 것 중 약 부작용이 있다면 꼭 말한다. 처방된 약물에 대해 의문이 있다면 이것도 꼭 말한다.
11. 진료실에 들어가서 약물에 관한 것을 우선으로 말하는 습관을 들여, 약물 조정이 진료의 핵심이 되도록 습관을 들이자.
12. 상담의 많은 시간을 약에 관련하여 말한다. 잘 듣는 약, 보통, 안 듣는 약 하나하나 체크해 자신에게 맞는 약물군을 찾고 약물 지도를 함께 그려나간다.
13. 그다음으로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말한 내용을 주로 이야기한다. 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언행과 상태를 관찰할 수 있다. - P165

우울증 환자는 냉혹한 현실 인식의 달인이다. 가장 엄격한 기준을 먼저 자신에게 적용한다. 우울증이 심하거나 우울 삽화일 때에는 행복이나 기쁨이 생의 본질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좋은 일이 일어나 미소지어도 금세 무감하고 공허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길고 극심한 우울증을 겪어온 환자들은 최상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기준점이 되어 마음을 차지하고 정신을 압도하는것은 ‘최악‘이다. 때문에 최악에서 살짝 벗어나거나 최악을 모면했을 때 만족을 느낀다. 이 중증 환자들은 고통스러운 상황(자해나 사고 등)에 너무 익숙해져서 고통을 느끼는 상태를 ‘편안한‘ 것으로 느끼기도 한다. 어떤 우울증 환자는 삶에서 불행, 갈등이나 파국이 발생해야 비로소 "살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한다. 우울이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무기력하고 침울한 것이 디폴트가 되고, 예측을 벗어나는 극적인 상황에 놓이면 그제야 분노와 증오를 겪으며, ‘뭔가 느껴진다=좋은 일이다’라는 순환을 학습하는 것이다. 결국 우울증 환자들은 좋은 일보다 나쁜 일에서, 기분의 상승보다 기분의 바닥에서 사금을 찾는 자들이 되고 만다. 신체적으로도 그들은 구부정하다. 바닥을 보며 걸으며, 구석에 인접할수록 편안함을느낀다. - P170

우울증은 단절의 병이다. 인간은 어떤 행위를 할수록 지식과 정보가 누적되지만, 우울증 상태에서는 그것이 어렵다. 그들이 뭔가 해도 그것이 점을 찍듯 모여서 패턴을, 그 사람의 인생의 그림을 그려주지 못하고 점과 점 사이의 거리는 별처럼 멀고 분산된다. - P171

소위 ‘생각이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 상태에 돌입하면 아주 작은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작은 정보들에도 긴 생각의 꼬리표가 생겨난다. 이것의 문제는 이미 병에 노출되어 사고의 왜곡이 심한 이들에게 왜곡된 사고가 활보할 수 있는 운동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많은 우울증 환자들이 자기에게 쏟아지는 정보에 둔감과 민감을 동시에 발휘한다. 동시에 우울증은 사고를 편집증적으로 빼곡하게 구성시킨다. 우울증 환자는 조용하고 정동이 둔해 보이지만 사실 굉장히 많은 생각과 의식으로 가득 차 있으며 때때로 이런 생각은 끝나지않고 며칠이고 계속되곤 한다. 자살사고라든지, 이 세상의 불합리라든지, 자신이 살아오며 받은 모든 상처들을 되새긴다든지 하는 부정적인 테마가 가득 차 사슬처럼 이어진다. 이런 연속된 사고들을 끊을 강경한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 꼬리를 잇는 생각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일단 주변 환경에 집중해보자. 눈에 보이는 사물의 개수를 세어보자. 색상은 어떻게 보이는가?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공간에 관심을 돌리고 주의를 환기하는 것은 비단 생각에서 벗어나는 데에만 유용한 것이 아니다. 우울증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방법에 적용할 수도 있고, 이처럼 관심을 기울이다 보면 나아가 자신의 공간을 더 안녕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당신은 자신의 병을 증명받기 위해 위험한 선택을 내릴 수도 있다. 혹은 정신병에 애정과 사랑을 느끼거나 헌신하기도 한다. 환자 - P172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병적인 우울이야말로 자신의 토대이자 전부 혹은 특기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병증의 일환이다. 우울증은 언제나 같은 모습, 같은 강도로 다가오리라는 법이 없다. 뿌리를 딛고 내릴 안정적인 형태의 토양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병에 초점을 맞춰 병의 존재에 일희일비하며 애정이든 증오든 필요 이상의 정념을 쏟는 것 자체로 병들은 기뻐 날뛰며 자란다. 그들이 기뻐할 일을 최대한 줄여보도록 하자.
만성적인 우울 상태에 놓이거나 우울증이 계속 재발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악화되기 쉽다. 악화가 누적된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지일 수 있다. 이전의 삽화 기간에 할 수 있었던 일을 다음 삽화에는 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로 많은 일을 한 번에 해결하려 하지 말고, 할 수 있는 일만 하되 아주 느리게 넓혀가야 한다. 그 기간에 언어 능력이 떨어지고 문해력이 낮아지는 것은 당신을 위협할지는 몰라도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런 ‘능력 저하‘가 자신을 괴롭히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면, 해당 능력의 영역에서 재활 프로그램을 시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능력‘의 회복이 아니라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회로의 회복이다. 또 능력 저하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 또한 한계가 있다.
는 것을 알아야 한다. - P173

우울은 생활반경과 할 수 있는 일들을 축소한다. 처음에는 직장또는 학교에 나가기 어렵게, 그러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렵게, 집 앞 편의점에 가기도 어렵게, 침대를 나서 화장실을 가기도 어렵게 줄여나가고 당신이 돌아다닐 수 있는 지도의 영역은 점점 어두워지고 작아질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당신에게는 퇴행성 관절염, 관절 이상, 대사증후군 등 각종 신체 질환이 발발하기 쉽다. 신체 질환이 발병하면 당신의 정신병의 지평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병은 당신의 모든 약해진 부분을 공략하기 시작한다. - P174

우울증 환자에게도 자신의 삶을 챙기는 것 이상의 책무가 존재한다. 우울증 환자도 직장에 나가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돌봐야 - P179

할 동물 식구가 있을 수도 있고, 빚이 있을 수도 있다. 우울증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었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목표는 ‘남들처럼‘ 움직이고 비장애인의 습속을 모방함으로써 견뎌내는 것이 아니다. 이 실험 과정은 자신만 알 것이고, 자기만이 이 재활의 고충을 알 것이다. 그래서 우울증 환자는 몇 배로 노력하는 데에 어려움과 억울함을 느끼기 쉽다. 남들이 쉬는 걸 당신은 쉬어줘야 할 것이며, 남들이 먹는 걸 당신은 먹어줘야 할 것이고 남들이 잠드는 걸 당신은 잠들려고 노력을 해야 이룰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비교하면 박탈감만 심해질 뿐이다. 링에 올라 싸우는 둘은 당신과 당신의 병이지 남들이 아니다. 타인과 겨루는 것은 기나긴 재활 실험 후의 일이다. 그러나 당신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어떤 시점에는 더 나빠질 수도 있고, 어떤 측면에서는 더욱 우수해질 수도 있다. 당신의 지금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변할 것이고 그리하여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 P180

양극성장애인은 한 사람이지만, 완전히 다른 것처럼 느껴지는 두 병증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 핵심이다. 조증에서는 병이 자신 - P183

을 장기 말 취급하면서 이래라저래라 요구하고 그에 대응해야 한다. 반면 우울증 상태에서는 도리어 환자가 직접 일궈야 하는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우울증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내리는 비와 같기에, 가랑비에 옷이 젖듯 점점 비가 내려 조증처럼 병증 자체에서 에너지를얻기는커녕 자기 몸 하나 간수해내지 못하는 데다가 병든 자신도 돌봐야 하므로 그렇다.
조증은 얼마나 빨리 예측하는지가 절반은 먹고 들어간다. 맨 처음의 조증은 돌발하나 그다음은 이전 조증이 찾아왔던 시기 또는 계절에, 트라우마적 사건이 발생했을 때, 스트레스가 높거나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때 등장한다. 흔히 간과하는 것이, 좋은 일, 축하할 만한 일이라도 양극성장애 환자에게는 절댓값이 큰 감정적 사건, 이른바 스트레스로 작용할 수 있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기나긴 우울증을 버텨낸 뒤 찾아오는 선물 같은 조증이다. 조증은 마치 위기에 등장하는 수퍼히어로처럼 몸과 마음이 피폐한 양극성장애인에게 앞날을 헤쳐나갈 기운과 좌표를 보여준다. 그러니 조증을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조증은 환자의 사고, 감각과 같은 내적 요인보다는 외적 요인에 의해 더욱 강력해진다. 동료의 위기나 죽음 등에 잠재력을 폭발시키는 만화 주인공처럼. 물론 현실을 살면서 그런 만화 같은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조증이 치밀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상황은 허를 찔린 듯 닥쳐오는 경우가 많다. 아주 사소한 일, 이를테면 - P184

카페 직원이 "다른 직원한테는 말하면 안 돼요."라며 자신에게만 무료 리필 커피를 줬다든지, 아니면 택시를 탔는데 바닥에 1만 원권이 떨어져 있다든지, 다른 사람에게 감사, 호의, 친절, 칭찬을 받았다든지 한 후 난데없이 조증이 증폭되는 케이스를 몇 보았다. 불특정다수 중 예외적으로 선택을 받았고 이득을 얻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외부 요인‘의 상황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공통적으로 ‘특별한‘, ‘선택받은‘, ‘뛰어난‘ 나의 유일성을 자극하는 상황이 많은 경우 조증이 심화되도록 작용할 수 있다. 개인을 겨냥한 언행이 아니더라도 정신질환 삽화가 발발해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겐 충분히 커다란 자극으로 흡수되어 병이 증폭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조증의 발발과 증폭을 감지한다면, 바로 병원에 가서 변화된 상태를 말하고 다른 처방을 받아야 한다. 조증은 시간이 아주 중요하고, 특히 초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에 현재 기분조절제나 항조증제를 복용하고 있어도 의사와 상의해서 약물을 조절해야 한다. 많은 양극성장애인들이 조증 초기에 오는 ‘예외적으로 선택받은 나‘라는 느낌, ‘유능해진 나‘,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을 잃고 싶지 않아 치료를 지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초기 진화에 실패한다면 보통 1주(DSM-5 기준)에 달하는 조증 삽화가 지속되는데, 조증이 기거할수록 그것을 앓는 사람은 빠르게 망가져간다. 조증자의 상승하는 기분은 반드시 동그랗고 예쁜 헬륨 풍선 모양이라는 법이 없다. 언제나 해피 벌룬이 올 거라고 기대 - P185

하는 것은 안일한 생각이다. 때때로 찌그러지거나 접힌, 구겨져 있는 왜곡된 상태도 많다. 주의가 산만해져 집중을 하지 못하고, 성마르고 강팍해져 신경질을 내고, 수면과 식사가 불규칙해 엉망인 몸, 그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여기저기 돌진해 일어나는 수많은 충돌, 게다가 신체화 증상과 정신증이 계속되는 1주(혹은 그 이상). 조증은 당신을 나은 존재로 만들어주기 위해 온 기회가 아니다.
양극성장애의 특징은 한쪽이 아닌 양쪽에서 일어나는 결함이라 할 수 있다. 양쪽에서 한 입씩 베어 무는 사과가 된 꼴이다. 양극성장애인 자신이 갖는 고유의 회복탄력성보다 언제나 그것을 상회하는 병의 침범이 존재한다. 이 땅따먹기는 초발한 이후 지지부진하게 힘 싸움을 계속하다가 결국 병이 진전되면 역전할 수 없는 오셀로처럼 진행된다.
조증과 우울증을 대립 구도로 설정하는 것은 양극성장애인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다. 자식을 편애하는 부모처럼, 우울증일 때 마땅히 돌보고 보살펴야 할 부분은 삭제하고, 조증일 때 범하는 실수와 실패는 무시한다. 이것은 그들의 전장인 당신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 이외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양극성장애인에게 중요한 것은 성과를 내거나 변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정상적인‘ 수준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도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조증은 ‘이용‘하고, 우울증은 ‘인내‘하고 싶을 터이지만, 중요한 건 성질이 다른 두 병을 앓는 사람은 자신 한 명으로, 양쪽 삽화에 다르게 반응할수록 자아만 - P186

분열한다는 점이다. 삽화가 올 때마다 우왕좌왕한다면 매번 삽화의 막강함에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양극성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질이 다른 두 가지의 손 쓸 수 없는 병이 신들의 전쟁을 일으켜도 부서지지 않는 강력한 자아를 갖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력한 자아라 함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자신이 내다보는 미래를 포괄하는 일관적이고 연속적인 자아를 말하며, 생애를 거쳐 지속되는 성질의 것들을 말한다. 이들의 존재는 인생을 토막토막 내 그 시간을 증발시키는 삽화와 겨뤄야 할 때 유용하다. 그러나 이는 생각만으로 가질 수 있거나 이뤄지지는 않는다. 물론 자기 자신이 제 인생을 하나의 서사로 만들어 서사 내의 연결고리들을 긴밀하고 단단하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각의 범주에서 하는 작업들은 생각에 스미어 왜곡을 일으키는 정신병에 취약한 점이 있다. 양극성장애인들은 반드시 생각뿐 아니라 현실 세계에 물리적인 토대를 두고 있어야 한다. 설혹 생각이 병증에 지배되더라도 물리적인 것들까지 병이 가로챌 수는 없다.
두 가지 병증이 오가기 때문에 양극성장애인에게는 그에 지지않는 단단한 토대가 필요하다. 파도 한 번에 무너지는 모래성은 100개, 1000개를 쌓아봤자 노동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자신의 일관성을 담보해내야 한다.
만약 양극성장애인이 자신의 삶을 매번 더 높은 곳을 향해 지금보다 한 발 나아가는 서사로 구상하고 있다면, 그는 계단을 만났을 - P187

때 기꺼이 자신을 한 발짝 더 딛게 해줄 모든 에너지를 끌어올 것이며, 조증이 오고, 조증의 힘을 빌리고, 추락할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나아가고 발전한다는 이미지(상승하는 그래프)는 적절하지 못하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예를 들면 자기 집 뒤에 작은 뒷산이 있고 한 시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다고 상상하는 편이 병에 이롭다. 일정한 시간, 적은 힘으로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수평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리고 조증이든 우울증이든, 조증 때 가뿐히 해내든 우울증 때에 몇 시간을 걸려 힘겹게 달성하는 한 바퀴를 돈다는 완결성이 병을 진정시키고, 또 우울 상태일 때에는 이 정도는 할 수 있다고 다행감을 느낄 수 있다. 이런 한 바퀴들이 누적되어 양극성장애인의 안정을 담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그리고 이렇게 쌓인 토대는 병과 별개로 존재한다. - P188

조증일수록 미래를 내다보려 하지 말고 하루하루 완결성을 충족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을 한 장 한 장 완결을 내자.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 밤에 자기 위해 눕기까지를 한 페이지로 완성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다음에 그것의 연속성 아래에서 계획을 세우는 것이지, A플랜, B플랜, 미래로 향하는 열차표를 잔뜩 끊어놓고 열차를 놓쳤다고 자기 인생이 망한 것처럼 느끼는(실제로 조증 시 좌절은 자신의 전부를 잃는 듯한 느낌이다.) 정동을 가지고 좌절하는 건 지나치게 가혹하 - P191

고 고통스러울 뿐이다. - P192

나는 조증은 결단코 사람이 견딜 수 있는 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때로는 생물 같고, 어떨 때는 고양이 같으며 어떨 때는 암흑이나 공기처럼 나를 감싸기도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주변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정신병과 나만 덩그러니 남을 때도 있다. 그러다 우울증이 찾아오면 조증은 원래부터 너라는 존재는 가치가 없었다는 듯 소리소문 없이 사라져버리곤 한다. 그러면 나는 뭘 하느냐, 긴긴 우울증을 앓으면서 조증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얼마나 가소로운지 나중에야 알았다. 내가 현실 세계에서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고, 현실에 남기로 마음을 정한 뒤에는 조증을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조증은 온다. 정해진 계절에, 예기치 않게, 여전히 돌발, 급성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우며 힘센 조증도 있지만 지리멸렬한 좀스러운 조증도 있고, 아무 역할도 못하는 것도 있다. 다만 이제는 어떤 열차도 타지 않는다. 적어도 내 어떤 부분은 언제까지고 기꺼이 열차에 올라타 끝까지 가려 하겠지만, 다른 부분은 언제고 내리는 손님 하나 없는 그 역 그 자판기 옆에 식은 종이컵을 들고 앉아 있을 것이다. - P195

정신병과 시간은 밀접한 관계다. 생활 공간, 조건과 환경이 정신병에 영향을 주는 것처럼 시간은 정신병과 병자를 지배하고, 병자는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정신병은 단절의 병이다. 특히 삽화가 뚜렷한 이들, 중증 우울증의 환자들에게 정신병은 매일매일 잎이 나고 꽃을 피우고 하루 만에 지는 식물처럼 기이한 시간 감각과 더불어 절대적인 단절을 겪게 한다. 병이 없는 사람들은 자가 호흡을 하듯 아주 자연스럽게 시간의 시계와 발맞춰 가지만, 병자들에게는 그 속도가 몹시 느리거나 둔중하고 어떤 경우에는 굉장히 빨라 궤적을 쫓을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인 시간 감각과 다른 일들이 왕왕 발생한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 경합할 때 병자들은 그래도 아직 아침에 일어나려 하고, 씻으려 하고, 외출하고자 하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자 노력하지만 불행하게도 대개의 경우 병자들이 패배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패인은 사실 단순하다. 첫째로는 자신을 먹이고 씻기고 외출을나가게 하는 이른바 ‘일상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병자의 상황을 극적으로 달라지게 만들 수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이런 장벽에 부딪혔을 때 병자는 쉽게 단념하기 때문이다. 특히 언제나 내심 자신 - P199

을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도록, 떠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혁신적‘으로 ‘단번에‘ 바꿀 수 있는 존재를 갈망하는 병자들은 더욱 상심에 빠진다. 그래서 정신병자들은 이사를 하더라도, 룸메이트를 들이더라도, 고양이를 기르더라도, 매일 카페에 가더라도, 학교를가더라도, 출근을 하더라도, 가사를 하더라도 자신의 기분이 궁극적으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에 좌절하고 만다. 또 이미 더는 생각만으로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마음을 먹으면, 사고방식을 바꾸면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이것은 대단한 함정으로, 한번 ‘우울은 사고방식의 문제‘라는 늪에 빠져버리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다. 홀로 집에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공상하고 있는 이들은 반드시 자신의 상태를 재점검해야 할 것이다. 내 주변의 정신질환자들 중 지나치게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 하고, 행동하기 이전에 거듭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통제력을 아득히 벗어나는 사고(accident)가 발생하자 10년 전 발병 이래로 가장 상태가 나빠지고 말았다. 우리는 분명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에 충실하며, 미래를 예방해야 하지만 셋 모두를 한번에 할 수 없을 경우가 많고 따라서 보통은 현재에 충실한 상태로 출발하는 편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 P200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자기 전에 핸드폰 등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정말로 중요하다. 다들 경험했을 것이다. 스마트 기기를 사용하는 순간 시간은 새벽이 되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수면제의 약 기운도 이겨낸 채 서핑의 서핑과 SNS의 SNS를 거쳐 유튜브의 추천 알고리즘까지 갖가지 탐방을 하다가 어느덧 죽은 듯이 잠들어 오후 느지막이 깨어나는 쓰레기 같은 기분으로 망했네, 중얼거리는그 경험. - P203

하고 싶은 것이 떠오르지 않는 이들을 위해 덧붙인다. 취미는 어떤 장면이고, 그 장면을 향해 뛰어드는 일이다. 그곳은 당신이 고민한다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은 아니고, 그토록 진절머리나는 시간을 이번에는 제 손으로 쌓아 만드는 성이다. 당신이 어떤 취미생활에 작은 만족감이라도 느꼈을 때, 그때 시간은 패배한다. 그러니 당신을 가로막는 시간의 행진을 토막 내버려라. 스스로 시간을 쥐고 운용하라. - P211

그가 평생 느껴왔던 결핍과 결여는 돈이 생기자 전부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다만 그의 머릿속에는 전자책 100만 원어치, 전자책을 읽기 위한 이북리더기, 이북리더기를 감싸는 보호 케이스, 그것을 넣고 다닐 검은 가죽 가방, 이런 식으로 살 것들이 끊임없이 떠올랐고, 그것은 그가 겪은 가난이 커다란 하나의 구덩이가 아니라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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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떻게 재밌게 읽으셨나 모르겠다. 이런 삶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다들 듣도 보도 못하셨을 건데, 입맛에 맞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으셨나 모르겠다. 솔직히 이런 얘기, 사실 다 거짓말 아니겠는가. 나한테 보이지 않았고 들리지도 않았던 얘기면 그게 거짓말이 아니고 뭐겠는가.
그래서 모두가 예상했다시피, 이 책에 쓰여 있는 글은 다 거짓말이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거짓말이라는 게 진짜 거짓말이다.
그래도 나는 세상에 기꺼이 거짓이 되어주려 한다. 진짜라고 말하는 것보다 네네 거짓 맞습니다, 라고 하는 게 속이 편 - P358

하다. 거짓이 되면 좋은 면도 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믿어주지 않기 때문에 대충 살아도 괜찮다. 매번 증명해야 하고 설명해야 하는 것에 질리더라도, 그것대로 좀 재수없게 굴어도 괜찮은 면도 있다. 물론 다 내가 살려고 하는 생각이다.

당신의 삶은 나와 얼마나 같고 다를 것인가. 어찌됐든 부디 평범하고 정상적인 일상에 감사하며 범사에 범사하길 바란다. 근데 사실은 안 바란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느라 바쁘다. 당신도 바쁠 것 같다. 그러니까 가끔만 만나자. 다음에 또 만나자.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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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퀴어 이반지하
이반지하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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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is an orphan. A survivor."
그애는 고아야. 생존자라는 말이지.

나는 저 대사가 참 좋았다. 어린 여자 체스 상대에 대해 당대 최고의 마스터가 긴장해야 하는데, 그 이유가 ‘생존자‘이기 때문이라는 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몸이 훅 흔들렸다.

피해자에서 생존자가 되는 것은 무척 존엄하게 느껴지지만, 이 사회가 실제로 생존했다고 해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어떤 보상을 주지는 않는지라, 그 생존의 의미가 무엇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피해자를 생존자라는 단어로 대치하는 것이 도리어 ‘정말 생존했는가‘를 되묻게만 하는 것 같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 말을 <퀸스 갬빗>에서 저런 맥락으로 들으니, ‘생존자’라는 말이 가슴 중간에 팍 꽂혀,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하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또 생존자라는 말이 상대방을 이토록 위협할 수 있는 요소라는 것에 아주 천진한 쾌감을 느꼈다. 근원조차 알 수 없는 특유의 끈질긴 생명력 그 자체로 살아남았다, 그 사람은 생존자야―라는 - P12

쓰임이 나에게 새삼 낯선 울림을 주었다.
세상아, 너는 두려워해야 할 거야. 나는 생존자거든―그런 태도.

그럼에도 〈퀸스 갬빗〉을 보는 내내 나는 주인공이 강간당할까봐 걱정했다. 미디어 시청자로 살아온 경험적 통계로 미루어보아 몇 번의 강간 모먼트가 있었기 때문에, 악― 이제 나온다 하며 그만 볼 준비를 하다가 말다 했다. 여러 명의 남성 체스 전문가 동료들이 주인공을 ‘돕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로 얘를 ‘실력자로 성장시켜주려는 의도‘였다는 게 놀라웠다. 재능 있는 여자를 진심으로 도우려고 하는, 재능 있는 우리 남성 친구들이 있다는 것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화면에서 그것이 구현되는 장면을 본다는 건 딱 구태의연한만큼 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새삼 잊고 있었던 오랜 장롱 속 페미니즘의 먼지를 털며, 이렇게 강간당하지 않는 잘난 여자 주인공이 나오는 픽션/논픽션을 계속 보는 삶을, 도무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달으며.
주인공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계속 실험해나가는 걸 보는 것도 좋았다. 성욕을 느끼고 표현하고 거절하고 이용하고 등등. 강간당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보통 이러면 - P13

사회로부터 성性적으로 크게 혼나곤 하는데, 이 시리즈에는 그런 것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다.

그러니까 잘난 여자를 감히 혼내지 말자. 제발 좀 그르지 말자.
버릇이 나쁘다 싶어도 제발 좀 내버려두자. 구린 구석 없이 정정당당하게 도와도 주자.
이토록 심플한 메시지를 전해본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존자가 얼마나 무서운지 빨리 깨닫도록 하자.
생존자는 살아남은 자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She is an orphan. A survivor.
Losing is not an option for her."
그애는 생존자야. 애초에 질 생각이 없어.

아니, 러시아 체스마스터 보르고프도 무서워한다고, 이 양반들아. - P15

생존자 조심해라. - P17

검열을 당한다는 것은 생각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것은 대단히 생산적이거나 발전적인 무엇이 아니라, 나 자신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 속의 장기와 세포 하나하나까지를 양말 까뒤집듯이 의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검열은 잔인하다. 검열하는 쪽은 간편하되 당하는 쪽에서는 정말로 내가 당당한 피해자인지를, 내 쪽에 정말로 한 점의 원인 제공도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것, 이것이 잔인함의 핵심이다. 검열은 저쪽에서 시작되었으나, 결국 그걸 지속하는 것은 이쪽, 나 자신이 된다는 것 말이다. - P47

잘라서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평생 살려고 하면 너무 힘들잖아요. 일 년만 살아보자, 한 달만 더 살아보자, 일주일만 더 살아보자. 하루만, 한 시간만, 십 분만, 일 분만…… 그렇게 가는 겁니다.
_<월간 이반지하> 4호 - P60

언제부터였을까. 미디어에 등장한 누군가를 보며 ‘저 사람, 저 정도 상황이면 죽고 싶겠다‘라고 생각하면, 별안간 그 사람이 정말로 죽은 채 떠올랐다. ‘죽을 만큼 괴롭겠다‘ 혹은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면, 며칠 혹은 몇 달 후, 그는 정말로 죽음이 되어버리곤 했다. ‘어, 맞아‘라고 답하듯 곧 맥없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죽을 만한 일에 실제로 죽어버리는 것‘을 이렇게 계속 목격해도 되는 걸까. 죽을 법한 일 다음에 죽음이 이어지는 것은, 왜 이토록 그럴 법하게 여겨지지 않는 걸까. 왜 이토록 그 인과가 부당하다 느껴지는 것일까. 죽을 법한 일들은 왜 계속 생기며, 왜 끝끝내 죽음까지 봐야 속이 시원한 듯 구는 것 - P70

퀴어 친구들은 일단 ‘살기‘부터 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살았으면, 행복하게 살았으면, 이런 생각보다
일단 우리 생명 유지부터 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호 - P74

남들은 다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못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환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1인분의 삶을 내가 온전하게 독립적으로 당당하게 살아낸다. 물론 중요한 이슈죠. 독립해야 한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잘살아야 한다…… 그런데 내가 정말 1인분을 다할 수 있었으면, 사회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는 순간순간 어떤 때는 0.8인분, 또다른 상황에서는 내 깜냥으로 1.5인분을 할 때도 있는 거예요. 간병하거나 누군가를 돌볼 때는 자기 몫의 1인분을 더 할 때도 있고. 그렇게 얽혀서 사는 것이지, 지금 당장 내가 1인분인가 아닌가 꼭 그렇게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 관계에 따라서 내 역할도 계속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저는 요새 ‘당당‘ ‘독립‘ 이런 말들이 신자유주의랑 만나서 굉장히 자본의 기준에서만 해석되는 것 같거든요. 미디어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그 틀에만 비춰서 나를 볼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11호> - P123

아직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람들은 내가 살아온 얘기가 궁금할 테니 그것을 쓰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읽혀야 할까. 살아온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근데 또 그 ‘어쩌라고‘가 예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승낙한다.
예전부터 제2차세계대전 이야기에 끌렸다. 책이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그때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갔다. 내가 궁금한 것은 크고 작은 전투나 정치적 움직임이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낸, 여러 층위의 생존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어떤 선정성에 대한 뒤틀린 호기심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과 함께 나는 꼭 한 가지가 궁금했다. 도대체 왜 그들은 그 이야기를 하는지. 그러니까 경험한 것만으로 충분히 고통이었을 그 일을 왜 또 꺼내서 이야기하게 되는 것인지, 그것이 정말로 의미를 갖는지, 그들이 그 이야기를 마쳤을 때, 이야기를 들은 자들이 떠나버린 시간을 이야기한 자 - P128

들은 또 버텨내야 하는 것인지. 그런 것을 인간이 버틸 수나 있는 것인지. - P129

이 말했다. 왜 자꾸 그 기억을 그리는 줄 아나요? 왜냐고 묻자 그는, 다룰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말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리고 맞는 얘기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종이 위에 기억을 잡아두려는 시도, 그 맹랑한 시도 자체가 마치 그 기억을 종이에 국한시키려는 행위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러면 마치 그 기억이 그 종이만해지기라도 할 듯한, 그런 착각. 하지만 맹랑해서 그 나름대로 위대할 착각. 그런 착각 없이는 삶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어서.
확실히 그 말에 대해 생각하면서부터 내가 그날 밤을 그려대는 것에 대해 조금은 편안해진 것 같다. 그리고 이후에 곱씹는 여러 행위들에 대해서도 그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씹다보면 씹힐 것 같아서, 오독오독 씹다보면 절단이라도 될 것 같아서, 나눠 삼킬 수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런 착각을 하려고, 그렇게 그것을 보내버리고 새 착각을 맞이하려고, 착각 없이 환상 없이 살기에는 던져진 삶이 너무 가혹하다.

갑자기 깨달았다. 내가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의 트라우마를 설득하는 글을 쓰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내 이야기를 끌러놓자마자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모든 것은 나의 망상이라고, 다 내가 지어낸 - P133

이야기라고 말할 사람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라서 그랬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는 것은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그것이 나의 경험과 감정에 대한 것이라면, 그런 것은 질리도록 겪어왔다. 말을 꺼내면, 그 말을 증명해야 할 것 같다. 증명하지 못하면 없었던 일이 되곤 했다. 나는 아마 그래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나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이 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냐고 많이들 물어왔는데, 나는 별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결국 이래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 P134

집에서 과거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 과거에 갇힐까봐 두려워진다. 그것이 아주 조금, 혹은 반 정도만 갇히는 것이라도. 그래서 자꾸 엄두가 안 났고, 엄두를 내지도 않았다. 쓰다가 잠깐 새로운 공기를 쐬어야 할 때, 그 순간 아무도 만날 수 없다면 어떡하나. 누구도 나를 과거에서 끌어올려주지 않고 말 그대로 각자의 상황에 격리되어 있다면, 나는 글에서 - P146

못 나올 수도 있지 않은가. 나는, 하지만, 나올 것이다. 나오고 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무엇을 어떻게 건드리면서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닐까.
위장에 껍질째 들어가 있는 성게를 꺼낸다고 생각해보자. 성게를 꺼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성게는 꺼내지면서 끝끝내 위장부터 입안까지를 모조리 훑고 헐어내면서 나올 것이다. 그래, 꺼냈으니 이제 성게가 없다, 라고 하기에는 이미 내 속은 성게의 흔적이 완연하다못해 피를 펄펄 흘릴 것이다. 그 피는 왠지 철철보다는 펄펄이다. 끓어나오는 피일 것이고, 또 그 피는 피대로 내부 장기를 덮어 계속해서 안쪽 면을 태울 것이다.
애초에 성게가 껍질째 위장에 들어가는 일 같은 것이 없었다면 제일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그냥 일어나버린다. 원하고 원하지 않았고 따위는 처음에나 원망조로 따져보는 것이지, 나중이 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들어가 있는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성게를 꺼냈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이미 온몸은 성게에게 훑어진 후니까, 그 이전의 상황 같은 것은 다신 없는 것이다.
당신은 이 수술을 하시겠습니까? - P147

하지만 그렇다고 그 일이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걸 스스로 전혀 의심하지 않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특히 끔찍한 기억일수록 나와 주변은 그것을 잊고자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마치 살 만한 삶들인 것처럼 착각할 - P159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결국 잊힌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살고 견디고자 하는 가냘픈 의지의 결과일 수도 있다. 나 역시도 내가 보라색 사람이었다는 것을 깜빡하거나, 정말로 그런 일이 나에게 있었나 생각할 때가 있다. 그것은 분명 자연스러운 망각이기도 하고, 그 기억을 꿈처럼 여기려는, 삶에서 그런 일은 정말 드문 것이라고 믿어보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 P160

보라색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 피부 표면에 머물렀다. 그날의 그 시간은 나의 일상과 사람들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어서, 완전히 잊혔다가도 샤워를 하거나 옷을 갈아입으려고 할 때면 나는 ‘아, 맞다‘ 했다. 엉덩이나 옆구리에서 새로운 보라 - P162

색을 갑자기 발견하기도 했다. 기억하는 것과 잊는 것, 그 어떤 것도 그 일과 완전히 걸맞지는 않게 느껴졌다. 마치 내가 그 사이에서 선택이라도 할 수 있는 듯이. - P163

처음 살아보는 반지하방은 처음에는 처음이어서 딱히 대단한 불만이 생기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웬만한 것은 다 그러려니 했다. 여기에 있는 것이 어쨌든 정신적으로 학교나 집보다 훨씬 나았기 때문에, 다른 문제들은 대단찮게 느껴졌다.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곳이 작업실이 아닌 본격 생활공간이 되자, 괴로움이 갈수록 커져갔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 중 하나는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 정말로 화장실 타일과 벽지였다. 왜 싫었나, 왜 견디지 못했는가 묻는다면, 사실 그것을 정확하게 어떤 이유다, 라고 설명하긴 힘들다. 당시엔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지금은 시간이 많이 지나서 정확히 어떤 무늬와 색감, 텍스처가 미칠 것 같았는지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화장실 타일과 벽지가 나를 매일 절망하게 했다는 것만을 기억하고 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벽지와 타일에 둘러싸이게 된 이삶이, 집을 나온 것이, 정확히 나의 선택이었기에 나는 탓할 - P166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 물론 나를 나오게 만든 상황에 대한 분노와 원망도 어마어마했지만, 결국 가장 원망스러운 것은 나와 가족의 조합이었다. 가족만, 혹은 나만 존재하면 됐을 텐데 왜 이렇게 묶여 나와서 나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 반드시 죽을 거라고 확신하게 되었을까. 그런 조합, 소위 말하는 팔자, 그런 것들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화장실 타일과 벽지를 보면서 울곤 했다. 그리고 작게 딸려 있는 베란다에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차서 큰 캔버스 그림들이 젖을 때마다 몸에 차곡차곡 절망이 쌓이는 것을 느꼈다. 캔버스를 뽁뽁이로 싸두긴 했지만, 결국 이것이 그림에 곰팡이를 만들 거라는 생각에 비가 올 때마다 초조하고 화가 났다. 나는 그때 집을 관리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고, 미술 작가로서 작품을 이고 지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도 아직 잘 몰랐다. 그 당시 알고 지내던 한 작가의 작업실에서 그림에 핀 곰팡이를 보고 나서 정말 그것만은 막고 싶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려고 하다가 멈칫하게 되는 때가 있다. 왜냐면 그 그림들은 내 공간에 쌓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유통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그려지지 않 - P167

은 이 그림이 유통되기 전까지 이고 지고 살 자신이 있는가, 그런 것을 스스로 되묻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그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 대단한 욕구가 각종 이성적 셈들을 이겨먹었다. 그래서 나는 그림을 그렸고, 악기를 샀고, 이사할 때마다 추가비용을 내야 하는, 이삿짐 아저씨들과 집주인에게 핀잔 듣는 ‘여자‘가 되었다. 삶은 계속 그림을 버리는 게 이치에 맞다고 귀에 대고 끊임없이 얘기해주긴 했다.
그다음에 살 집을 보러 다닐 때는, 이사를 나가 가구가 없는 집을 보면 그냥 다 넓고 깔끔해 보인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집 보기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커튼은 너무 비싸서 화방에서 전지를 사다가 창문에 더덕더덕 붙였다. 덕분에 매일 너무 춥거나 너무 더웠다. 무엇에다 돈을 써야 삶이 만들어지는지, 삶의 질이라는 게 올라가는지 전혀 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집도 살아 있는 것임을 몰랐다. 집도 사람처럼 계속 관리해주고 부족한 부분은 집주인에게 요구해서든 내가 직접 수리해서든 써야 하는 것이었는데, 그런 걸 전혀 몰라서 마냥 견디거나 비참해했다. 으레 외부먼지가 쉴새없이 들어오고 으레 냄새가 나고 으레 빗물이 들어오고 으레 몸이 무거워지는 그런 상태.
그래도 집에 문을 열고 들어올 때의 정적이 너무 행복해서 - P168

가끔 현관에 주저앉아 한참 그 정적을 놓칠세라 음미하곤 했다. 고함과 비명이 없는 집은 정말로 큰 의미가 있었다. 집에 뭐가 있느냐보다 뭐가 없는지가 훨씬 중요했던 때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으레 여자처럼 보이는 인간의 삶이 다 그렇듯, 밤마다 누군가가 집에 침입해서 나를 내려다보는 상상을 하고, 자주 잠에서 깨곤 했다. 그런 두려움은 비싼 비용을 치르게 했다. 나의 건강이 되었든 집의 위치가 되었든, 문과 창문의 잠금장치가 되었든, 어쨌든 끊임없이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별별 희한한 구조의 집이 많이 있었다. 변기 위에서 샤워를 하는 집은 처음 봤을 때도 충격이 컸지만, 살아보니 삶의 질을 말도 못하게 망가뜨리는 구조였다. 샤워를 하기도 변기를 쓰기도, 또 당연히 그 공간을 청소하기에도 불편한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집들은 내 생각보다 훨씬 흔했다. 이런 집을 보여줄 때마다 부동산 아재들은 아 이거 그렇게 안 불편하다고, 괜찮다고들 주접을 떨곤 했다. 하긴 내가 갖고 있는 예산을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안 불편해해야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아이고, 내가 이 돈을 갖고 와서는 매일 밤 샤워를 편히 하려고 했다니, 그래요, 미 - P169

안하게 됐습니다.

좋은 집은 콘센트가 필요한 곳에 딱딱 있는 집이었다. 컴퓨터 주변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많은 멀티탭이 필요하지 않은ㅊ집. 하지만 집을 쪼개고 쪼개서 월세방을 만든 집들은 대부분 뜬금없는 곳에 콘센트가 있어, 항상 멀티탭을 여기저기 대주어야 했다. 게다가 전자레인지는 멀티탭에 꽂으면 무조건 전기가 나가버리곤 해서, 온전한 콘센트 하나를 할당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멀티탭은 언제나 몇 번의 곁가지를 치며 구석구석 배치되었다. 놀랍게도 멀티탭들은 전기도 공급하지만 먼지도 틈틈히 저장하는 매체였다. 하얀 선들은 또 얼마나 쉽게 꾀죄죄해지는지, 정말 그런 식으로 더러워져야만 하는 건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꽂아야 할 것들은 점점 더 많아져만 갔고, 집안 곳곳에 뻗친 선들은 마치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결계처럼 집 전체를, 내 삶을 둘러싸 딱 여기까지다, 라고 외치는 듯했다. - P170

물론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이 그렇게 문제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필요라는 건 상황 따라 적당히 창조해내거나 무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필요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으려면 그 비용을 정직하게 감당해야 할 뿐이다. 부동산이랄지 기억이랄지 뭐 그런 거 말이다. - P174

부모의 집을 나오며, 나는 다시는 내가 원목협탁에 걸맞은 - P175

삶을 살 수 없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그래서 불구덩이 같은 그 아수라장 속에서 그 많은 필요와 필수 중에 하필 협탁을 가져가기로 했을까. 집을 떠나면서 협탁을 들고 나오는 사람은 세상에 몇이나 될까. 반복되는 플라스틱과 MDF 사이에 원목협탁이라도 하나 있어주면 내가 떠나온 것들에 대해, 지금이 아닌 삶에 대해, 딱 원하는 만큼만 감정적 연결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뭔가를 잃지 않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것이 존재한 적 없었던 나의 격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또 기능이 아닌 취향이나 추억으로 갖고 있는 가구 하나쯤은 삶이 허락해주지 않을까 하는, 그런 사치를 무리하게 누려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 P176

안분지족 같은 거 하지 마. 필요 없어.
존나 사치스러운 마음으로 살아.
_<월간 이반지하> 5호 - P177

이런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내가헤테로인지 레즈인지 바이인지모르겠다. 그래서 제발 알고만 싶어, 내가 뭔지. 내가 무성애자인지, 로맨틱 에이섹슈얼인지 알고만 싶어. 그러니까 초조한 거예요. 이걸 내가 결정해야만 할 것 같아서.
하지만 누구한테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건 아니잖아요. 이것에 대해 초조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다들 쪼금씩 이상한 데가 있고 남들과 다르잖아요. 기본적으로 사회가 말하는비정상성에 우리가 걸려 있어도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_<월간 이반지하> 6호 - P181

근데 이 코로나 상황이 참기 힘든 핵심적인 이유는 뭐냐면, 모든 사람들의 상황 해석과 그에 따른 행동지침이 다른 데에 있다. 이것은 수년 전 내가 잠시 절에서 생활했을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 절에서도 속세처럼 각종 단속을 받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듣는 말은 바로 "절에서는 그러면 안 돼" 이다. 이 말은 약간 만능 문장처럼 모든 사람들이 각자 다르게 활용한다는 점이 백미다. 그래서 서로는 서로를 단속하고 무한히 배려하다가 결국 사람들은 돌아버리는데, 지금 코로나 상황도 좀 그렇다. 각자의 ‘안 돼‘가 많은데 그게 또 각각의 맥락으로는 합당해서 어쩌란 말이냐 분통이 터진다! 존나 통제! 근데 통제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작금의 시대가 도래하고 말았 - P235

고, 나는 그저 산다. 살아야 한다.
그 말인즉슨, 억지 휴식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시대가 오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앞에 뭐든 쓰고 ‘~시대‘라고 붙이면 꽤 있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시대에 살고 있는 주제에 시대를 꿰뚫는 척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시대는 동시대의 누구도 뚫을 수 없다는 것이 우리네가 맞이해야만 하는 뼈아픈 진실임을 인식하도록 하자. 부디 시대를 꿰뚫지 말자.
그러므로 어허 조금씩들 물러나서 억지 휴식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오늘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일과 일 사이에 일어나는 휴식이 그냥 휴식이라면, 억지 휴식이란 굳이 뭘 만들어내서 휴식을 취한다 이 말이다. 집이 아닌 장소를 예약해서 낯선 곳에 굳이 굳이 가서 쉰다거나, 일처럼 휴식 스케줄을 미리미리 만들어놓는 일을 (내가) 지칭하는 말이다. 그런 짓 없이는, 이 통제와 조심조심적 일상을 영위하기가 너무나 힘들다. 한강에 가서 강을 보며 마스크를 벗고 앉아 있는 것 정도로는 더이상 쉬는 것 같지가 않아져버렸다. - P236

세월은 무섭지. 세월 그 새끼가 무섭지. 그런데 저는 나이 얘기는 이젠 그만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요. 옛날에는 이런 얘길 들으면, 어차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지, 이렇게 생각했거든요? 근데 진짜 별 의미 없는 것 같아요. 특히 전염병의 시대를 살다보니깐 내가 젊든 늙든 당장 내일의 일을 알 수가 없잖아요.
내가 내일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지금 존나 늙은 거지.
그런데 50년 후에 죽을 거야? 그럼 나는 존나 쌩쌩하지.
그런데 언제 죽을지 알 수 있다? 없다!
만약 젊고 늙은 게 그렇게 중요하다면, 일단 내 남은 삶에선 오늘이 제일 젊잖아요? 오늘 해라!
그러니깐 마음 가는 대로들 살어. 왜냐하면 내 맘이 뭔지 아는 것도 너무 힘들기 때문에.
_<월간 이반지하> 8호 - P244

나도 나 자신이 싫지, 그런데 나는 또 나잖아. 나를 견뎌야 되는 거지. 이 삶을 살아야 하잖아. 너는 니로 태어난 이상 너를 견뎌야 돼. 이런 너를 견디는 것이 너의 길이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어요. 관계의 다이내믹 속에서 누구나 당연히 잘못할 수 있죠. 다 다른 존재니까. 근데 나를 견뎌야 합니다. 항상 착한 일만 하지 않는 나 자신도 견뎌야 그것이 정말 ‘으른‘으로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_<월간 이반지하> 9호 - P250

저는 삶의 가변성, 랜덤성에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 사태 같은 것도 우리가 전혀 예상한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미래를 우리가 살고 있잖아요. 저는 노후뿐만 아니라 미래라는 것이 과연 대비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순간의 유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영속적인 것은 없고, 저는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코로나 록다운으로 힘든 시기에 자기계발하는 사람들 있거든요. 지금이 기회다! 취업 대비 공부하고…… 적당히 해. 이미 황인종으로 태어났으면 끝이야. 이미 경쟁에서 한참 뒤처졌으니까 우린 그냥 재밌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_<월간 이반지하> 2호 - P261

우리 남성 친구들은 어떤 말을 해도 평생 누군가가 받아주고 들어줬거든요? 그래서 설득력이 약합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아요. 그냥 아무 말이나 뱉어도 다 들어줬거든요. 그런데 우리 여성 친구들은 어떻습니까. 목숨걸고 말을 해왔죠.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고. 여성 친구들 언어 능력이 왜 발달하겠어요? 안 들어주니까. 그래서 여성 친구들 이야기가 조금 더 논리정연한 경향이 있죠.
_<월간 이반지하> 5호 - P265

하지만 결국 어떤 시대적 부름도 시대에 가려 결국 잘 안 들리기 마련이라, 어떻게 대충 잘 적당히 알아서 맘대로 나는 가려 하오. - P323

식물에게 마음을 주고 키우다보니, 이들은 식물원에서 데려올 때처럼 완벽하게, 허투루 자란 곳 하나 없이 그렇게 평생을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떤 종류의 - P328

식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정도의 기본 생장 이후부터의 생은, 어중간하고 뭐라 이름 붙이기 애매한, 그 못난 중닭의 연속인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잎과 줄기들을 보면서 무엇이 곁가지인지 고민하다 말다 했다. 전체 화분의 균형감을 생각하면서, 매일 가장 예쁜 단면을 찾아 입체인 화분을 빙글빙글 돌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깨닫고 만 것은 그냥 이 불완전함 자체가 너무나 완전한 아름다움 그 자체라서, 도저히 이대로 전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화분을 약 30도씩 돌려보면서 어떻게 놓아야 가장 시각적 쾌감이 있는가를 혼자 조율하다보면, 다시 말해 화분을 멀리서 봤다가 가까이 다가가서 조금 돌리고 또 나와서 보고를 무한히 반복하다보면, 결국은 그냥 항복이다! 지금 맞는 각도를 찾았다 싶더라도 내일이면 뭔가 또 미세하게 균형이 깨져 있다. 그래서 또다시 돌리고 돌리다보면, 아! 내가 지금 하는 일은 영원히 맞출 수 없는 것을 맞추려고 하는 무모함과 무용함. - P326

나는 분명 완연한 중닭이었다. 그리고 발레를 했던 대부분의 시간 동안 그 중닭스러움이 싫었기에 중닭의 아름다움시도 보지 못했다. 중닭은 너무 과하거나 모자라서, 가려지지 않지만 필시 가려야만 하는 무엇이었다.
하지만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으 - P327

로서의 중닭이 아니라, 모든 측면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순간 같은 것은 없으며 영원히 여기저기 삐걱거릴 것이라서, 그래서 이 시간 축에서 다시 오지 않을, 그 모든 나사 빠진 순간을 끌어안음이 중닭이라면, 그런 고유함과 아름다움의 다른 이름이 중닭이라면.
그 중닭의 아름다움을 인지한 상태에서, 그때부터 절대로 도달하지 못할 균형을 향한 몸부림은 비로소 의미가 생겼다고 나는 생각했다. 우연히 어떤 성장과 노화의 아귀가 들어맞아 몸이 클래식하게 써지는 날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불가능한 완전함을 위해 도전하고 완전히 실패하는 것, 그런데 그 실패가 실은 모두 각각의 클래식임을 받아들이는 부분 말이다.

나는 예술에서 중닭의 아름다움이 진하게 느껴질 때 완전히 매혹된다. 영원히 도달하거나 완성하지 못할 어떤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앞에서 못난이를 숨기지 않은 채 대놓고 ‘나는 그곳에 이르지 못했소! 나는 중닭이오!‘ 하고 튀어나온 그 아름다움은, 절대로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다 바로 이런 중닭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식물 화분 돌리기를 지속하며 매번 가장 최고의 균형을 찾는 데 실패하고, 그 실 - P328

패에 대해 "아, 오늘도 역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대부분에서 우리는 중닭일 것이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매 순간의 중닭스러움에 대해 약간의 위로와 그 고유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를 남겨보는 것이다. - P330

아무튼 얘네는 큰다. 내가 어떤 마음이든 간에 그냥 자기들이 태어난 대로, 생겨먹은 대로 제 속도로 그렇게만 자란다. 가끔은 약간 나한테 엿먹어라 하는 느낌으로, 여봐란듯이 큰다는 노낌도 있다. 하지만 우리집 식물들은 자신들의 그런 생장에 어떤 미안함이나 송구함도 내비치지 않는다. 아마도 그게 매력포인트인 것 같다.
처음엔 기가 막히지만, 너무나 당당하고 아무렇지 않게 멋대로 다 깨부수면서 자라나는 것을 보면, 그들의 삶에서 나는 그냥 ‘보는 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나는 애초에 - P335

그 생에 관여할 자격이 없었으며 그저 보는 것 정도나 겨우 껴들듯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어떤 예고도 빚지지 않은 채, 어떤 껄끄러움도 없이 순정하게 지 할 일만 하고 사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순간들을 필연적으로 놓치게 되어 있다. 겨우 따낸 보는 자의 위치에서도, 실상 모든 순간을 보고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환경적 세팅 이외에는 어떤 공유도 약속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눈을 둘 수 있는 그들이 그곳에다. 식물의 탈을 쓰고 짐승 같은 거친 성장을 하고 있는 그들의 에너지가 있다. - P336

작가로 사는 것은 평생을 희망고문에 시달리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못하고 적체되어만 가는 그림들을 목도하는 시간들은, 또 그것이 이사를 할 때마다 정확한 비용으로 환산되어 청구되는 일은, 창작으로 생산된 것들을 계속 이고 갈 것인지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까지가 내 몫임을 끊임없이 인지하게 되는 이 직업은. - P338

저는 기본적으로 ‘창작자라고 해서 미래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아니라 인간의 삶 자체가 그런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은 좀 얇고 길게 하면 됩니다. 관계든 직업이든 뭐든 언제든 그만둘 수 있고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게 저의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창작자로 살다보면, 그게 마치 직업이라기보다는 소명이라든가 신화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될 때가 있는데요. 저는 사실은그런 순간에는 좀더 직업적으로 생각해보면 좋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창작을 그만둔다는 게, 지금여기 사연에서도 너무 비장하게 그러잖아요. "친구가 진지하게 그만둘 생각을 한다. 물론 당연히 하던 걸 그만두면 일반 직장이든 뭐든 걱정도 되고 큰 변화이긴 한데, 제 생각은 그래요. ‘그.럴.수있.다‘라는 거죠.
그림을 그리다 붓을 꺾었다? 아니에요. 그냥 회사 다니다 때려치운 거예요.
기억해야 할 건, 근데 언제든지 또 그걸 다시 할 수 있다는 거. 힘들면 좀 쉴 수도 있고, 딴 일 좀 할 수도 있고, 그게 무슨 순수함을 - P342

더럽힌다든가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럴 수 있다는 거죠.
사람들은 내가 나이가 너무 많아서, 너무 어려서, 또 여러 가지 상황이 안 좋아서 새로운 걸 시작하지 못하겠다. 혹은 하던 걸 못 그만두겠다, 이런 말들을 하죠. 근데 그런 완벽한 타이밍은 오지 않아요. 언제든 갈등도 있고 부딪치는 문제도 있고 그런 거죠. 창작이 힘들면 그냥 쉬면 되는 것 같아요..
일도 창작도 대단히 연속된 커리어를 쌓아야지만 의미가 있는 건 아니거든요. 한국 사회에서는 고정된 커리어나 소속을 갖고 있는 걸 당연히 여기다보니까, 초등학교 다니면 중학교 가고, 중학교 다니면 고등학교 가고, 이 선에 익숙해져서 그렇지, 사실 그런 계단은 환상에 가깝잖아요. 사실은 다 지그재그고, 커브고. 그래서 저는 그냥 그만둘 수도 있고 하고 싶을 때 또 하면 되고 그러면 좋겠어요. 내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편해지면서 상황이 객관화되는 게 있거든요.
죽을 때까지 해야 되는 일은 없어요. 죽을 것 같으면 안 해야 돼요.
한 사람의 창작 과정이나 삶에 대해서 이래라저래라 판단할 순 없어요. 그런데 저는 기본적으로 다 해도 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어요. 그게 이 사회가 우리에게 안 주는 메시지인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네 인생은 다 더럽다. 그렇게 순수하지 않다.
한가지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가지고 거기에 깃발 꽂고 이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이것저것 두드려보고. ‘아, 이거 아닌가?‘ 그럼 또 접었다가 딴 거 하고. 좀 - P343

치사하게 살아도 괜찮다 이 말이죠.
저는 존버의 시간도 고통이 담보되어야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길 하고 싶어요. 존버가 말 그대로 존나 버티는 건데 그 존나가 ‘존나‘ 아니고 그냥 ‘재밌게‘ 버틸 수도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요소를 계속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싶어요.
우리, 오염된 상태로 같이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순수하지 않게. 다 섞이고. 이랬다저랬다 하면서.
_<월간 이반지하> 2호 - P344

정말 기묘한 외로움이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하게 만들자 존재는 더욱 존재하기 위해 떠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봄과 더불어, 남겨진 자기 자신을 견디는 것까지가 만든 자의 몫이 된다. - P350

그냥 나로 사는 건데, 퀴어로 산다는 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운동적 측면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래도 저는 마음대로 살 거예요. 그게 포인트예요.
그냥 끝까지 재밌게 살고 싶어요.
_<으랏파파> 인터뷰 - P351

다 해도 됩니다. 페미니스트 종류 되게 많습니다. 슈퍼마켓 같은 거예요. 자유롭게 맘대로 사십시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괜찮아, 별일 아냐.
_<월간 이반지하> 4호 - P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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