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들판의 꿈 - 그들의 배움, 그들의 투쟁, 그들의 일상
홍은전 지음, 노들장애인야학 / 봄날의책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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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대부분 뻔한 구도에서 장애인 당사자와 비장애인 조력자를 구분한다. 노들처럼 그것을 설명하기 좋은 곳도 없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강력한 자장 안으로 빨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차별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그 경계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모두는 저항의 주체일 뿐이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노들을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와 같은 구호는 수십 년 차별받아온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그저 해가 지고 달이 지듯 버스를 풍경의 일부로 - P11

여길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싸우려는 자, 저항하는 인간만이 ‘발명‘해낼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노들이 궁금하여 찾아온 사람들은 약속한 듯 물었다. ‘무엇이 가장 보람되는가‘, 혹은 ‘이 공동체의 비결은 무엇인가‘로 요약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어떤 날은 ‘학생들이 한글을 깨우칠 때‘라고 대답하고 어떤 날은 ‘교사회의‘, 어떤 날은 ‘평등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계‘라고 대답했지만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답들은 어딘가 조금 부족했던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틀린 답에 가깝다. 사람들의 진부한 질문이 싫었으면서도 나 또한 이 작업을 하는 내내 그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의도한 것이 아닌데, 실은 의도했던 것을 정확히 실패했기 때문인데, 나는 ‘노들야학을 하는 보람은 이거다‘라고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노들의 비결은 이거다‘라고 못박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다시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심술궂게도 ‘수많은 하루들‘이라고 대답하겠다. - P12

‘오늘 일어난 일: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다. 웃긴 했는데 무슨일로 웃었는지 모르겠다.‘

절묘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노들야학을 한다‘는 것이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갈고 사라진 걸레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처럼 사소할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웃을 일이 더많았으니 충분히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비록 정든 이들이 자주 떠나갔고 때로는 함께 공부하던 이가 사라지는 참담한 일도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날,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으므로 견딜 만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노들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눈에 밟혔던 것도 바로 그 사소한 일상이 아니었나요? ‘누군가는 노들을 지켜주었으면‘ 했던 당신의 이기적인 마음도 실은 누군가 남아서 형광•등을 갈고 칠판지우개를 털어주길 바랐던 것이라고 나는 짐작합니다. - P28

야학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공간이었지만 누구도 남으려 하지 않고, 남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도 누군가의 등을 떠밀지 못했으리라. 그때 박경석이 겸연쩍게 손을 들고 나섰다. 그가 야학을 사랑하는 방식은 ‘남아서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노들야학의 세 번째 교장이 되었다.

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자

1997년 6월 10일, 별 준비 없이 초라하게 진행된 박경석 교장의 취임식은 단언컨대 노들야학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 야학을 자신의 인생에 묶은 최초의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청춘의 한 마디를 끊어서 야학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길 위에 야학을 얹어 보았다. - P59

이제부터 노들이 굴러간 모든 곳에 그가 있다. - P60

"작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것이 모래 위에 디딘 것인지 반석 위에 디딘 것인지 지금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려 사라질지 모른다. 기억해야 한다. 조금씩 눌러주지 않으면 또다시 잊혀져버릴 흔적들을 기억하자. 우리에겐 세상 모든 길을 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 노들바람 - P75

운동이 사라져가는 시대였다. 야학은 장애인의 학력을 높여서 차별을 가리는 데에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저항의 가치를 실천하는 공간이 되어야 했다. 노들은 그 저항이 이름 있는 정치인의 힘찬 연설로서가 아니라, 방구석에 갇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수많은 중증장애인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고 믿었다. 꽁꽁 숨어 있는 그들을 집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야 했다. 그러기 위해 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이 높고 - P79

고립된 정립회관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이 일들을 꾸준히 추진해나갈 사람이 있어야 했다.
2000년 7월, 한 청년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아차산 언덕을 올라 야학의 문을 열었다. 에바다 투쟁에서 노들과 인연을 맺은 김도현이었다. 그는 활동비 5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야학에 ‘취직‘한 첫번째 상근활동가였다. - P80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P88

권리는 법전에 있지 않았다. ‘배운‘ 사람들이 먼저 찾아서 하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권리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당연한‘ 저상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바로 그 증거다. - P95

누군들 충돌이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시기 몇몇 교사들에게는 고통을 견디며 끝까지 밀고나가는 어떤 힘이 있었다. 두려움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일상 속에서 묵묵히 실천으로 증명했다. 어떤 교육파 교사는 어떤 운동파 학생과 함께 살며 그의 자립생활을 지원했고, 어떤 운동파 교사는 연극 수업에 들어가 ‘데모‘라면 기겁을 하는 학생의 삶에 오랫동안 귀 기울였다. 운동파가 교육파에게, 교육파가 운동파에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교육이 절대 눈감지 말아야 할 것과 운동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참된 교육도, 진정한 운동도 지극한 정성으로 파내려가다 보면 그 뿌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지지. - P101

교육과 운동은 그들의 실천 속에서 이어졌고, 갈등을 대하는 그들의 성실했던 태도는 이후 충돌의 순간마다 회자되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단절이다.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삶에서 분리되어 홀로 내달리는 것이다. 노들야학이 이 시기에 어떤 질적인 변화를 겪고 거듭났다면 그것은 이동권 투쟁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다. 치열했던 갈등을 견뎌낸 사람들이 온몸을 떨면서 피워낸 꽃이다. 가장 진실한 배움이 설 자리는 바로 그런 곳이다. - P102

만약 전장협이 DPI와 통합하던 시기에 한국사회에 투쟁을 통해서, 당사자의 주체적 힘을 통해서 장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단체가 단 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노들은 이렇게 홀로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조직과 자금력을 가진 수많은 단체들이 있지만 그들은 이동권 투쟁의 현장에, 에바다 투쟁의 현장에, 그리고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최옥란 열사를 보내는 길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P107

정부에서 지급하는 예산에 사활을 걸고 상급 관료들의 기득권과 출세의 길이 침해받지 않는 한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 단체 또한 그 나름의 긍정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 문제를 투쟁을 통해 권리로서 쟁취하고자 하는 단위와 그들과의 균형은 참혹할 만치 비대칭적이다. 이 척박한 지형 위에서 노들은 장애인운동의 딜레마와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 모른다. 그 무게감이 우리를 때때로 힘들게 한다. (...) 김도현 - P108

활동보조는 자원봉사와 달라서 행위의 주체는 장애인이고 보조인은 대신 수행할 뿐이다.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급여는 국가가 지급한다. 활동보조인은 이렇듯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전혀 새로운 관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야학 교사가 아무리 자신의 활동은 ‘봉사‘가 아니라 ‘연대‘라고 주장해도 그 무게중심은 철저히 교사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애인의 입장에선 이 비장애인이 언제 사정이 생겨 그 ‘연대‘를 중단하게 될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중증장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몇 시간이든 오줌을 참는 일이고 눈앞에 밥을 두고도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겐 가혹하게도 너무나 흔한 일상이어서 그것을 특별히 ‘문제‘라고도 인식하지 못했다. - P110

2003년부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활동보조인 파견 사업을 시행했다. 그즈음 전동휠체어도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활동보조서비스와 전동휠체어의 결합은 장애인의 일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걸을 수 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걷게 된 격이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중증장애인이라도 전동휠체어를 운전할 수만 있다면 방구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일찍 누군가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기만 한다면 온전히 ‘하루‘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30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상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 P113

한 시절 모든 악의 근원이 ‘이동할 수 없어서‘였다면 이제 모든 불행의 씨앗은 ‘활동보조서비스의 부족‘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새로운권리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 P115

2005년 말, 그가 노동부에 제출한 사업 기획안이 선정되면서 꿈은 급작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 열 명의 급여를 3년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2006년 3월 세 번째 노들,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이알찬과 퇴임한 교사들, 그리고 야학 학생 몇 명이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들야학이라는 공통분모를 믿었지만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 배움을 주고받던 관계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을 하는 관계는 몹시 달랐다. 수업은 쉬웠지만 함께 일하기는 어려웠다. 현수막 주문을 받기로 한 노동자 J는 길이를 재는 단위인 미터(m)와 센티미터(cm)를 변환할 줄 몰랐다. 출력기를 다루어야 하는 노동자 Y는 기계가 표시하는 영어를 읽지 못했다. 학생일 때는 문제될 게 없었지만 노동자일 때는 사정이 달랐다. 버 - P118

려지는 현수막이 속출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학교가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야학이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작업 지시서를 앞에 두고 즉석에서 수학 수업이 벌어지고 출력기 옆에서 알파벳 특강이 이루어졌다. 배움의 속도는 마음과 달리 속 터지게 더뎠다.
‘이알찬들‘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그들 역시 현수막이라고는 대학 시절 볕 좋은 날 천을 펼쳐 놓고 붓으로 쓰는 모습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회사를 찾아다니며 연수를 청하고 듣도 보도 못했던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다. 보조금이 중단되는 3년 뒤에도 살아남아야 했다. 살인적 노동 강도에 피를 말리는 긴장까지 더해졌다. 장애인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그들이 차별받은 역사까지를 보듬는 일이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한다고 누가 돈을 줄 리 없었다. 당장 장애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은 비장애인이 모두 메워야 했다.
‘이알찬들‘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하고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기계가 되고 총알이 되어야 했던 나날이었다. 늦은 밤 현수막을 ‘디자인‘해서 ‘출력‘을 걸어놓은 후, 기계 아래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다가, 출력이 끝나면 그것을 ‘마감‘하여, 새벽이 되면 사다리를 들고 ‘시공‘을 하러 나갔다. 야학에서 수업 마치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장애인도 일하고 싶다‘는 정당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의 정신으로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 P120

2001년 이후 시간은 참으로 역동적으로 흘렀다.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장애인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외침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2003년에는 교육권을 보장하라는 부모들의 폭발적인 투쟁이 시작되었고, 2004년에는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점거 농성이 231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2006년에는 장애인 수용시설이었던 성람재단의 비리를 해결하라고 종로구청 앞에서 153일 동안 농성을 했다. 또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교육지원법을 제정하라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라고 농성에 농성에 농성을 거듭하였고, 무시로 집회를 하고, 도로를 막고, 단상을 점거하고, 토론회를 개최하고, 문화제를 열었다.
그사이 노들야학 사무국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지역마다 우후죽순으로 자립생활센터들이 생겨났다. 이동권연대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과 장애인교육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결성되어 눈부신 활동을 펼쳤고, 다수의 노들야학 사람들이 그 활동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겨울이면 여의도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국회를 향해 소리질렀고,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광화문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었고 저상버스가 의무화 - P131

되었다. 2007년에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되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등의특수교육법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학습(學習)‘. 배우고 익힌다는 뜻. 우리는 ‘차별에 저항하라‘는 과제를 학습할 무궁무진한 기회 속에 놓여 있었다. 차별이 무엇인지, 저항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인권의식과 연대의식을 몸에 익혀 나갔다. 바야흐로 저항의 봄, 투쟁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은 그대로인데 불가능했던 많은 것이 다만 시간 속에서 가능해졌다. 혁명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시시각각 딛고 선 땅이 요동을 쳤다. 우리는 그 위에서 흔들리며 뒤섞였다. 부딪치고 넘어졌으며 균형을 잡고 일어서기 위해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말했다. 당신들의 자식이 노들을 만난 후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고. 몰랐을 땐 그것이 삶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숨만 쉰다고 모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직 죽지 않은 존재‘로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20년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우리는 단 하루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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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 사랑과 돌봄에 관한 퀴어한 참조
캔디(윤다림) 지음 / 들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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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날 ‘진정한 보호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우자도, 가족도, 친인척도 아닌 ‘그냥 친구‘니까. 그래서 이후 나는 ‘환자와의 관계‘를 묻는 질문에 ‘친구‘라 답했던 일을 내내 후회하게 된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보호자의 자격은 무엇인가?‘ - P33

다시 거슬러가 생각해보면 나는 썩 좋은 보호자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치료 과정에 함께했지만, 치료 방향을 제시하거나 어떻게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환자가 하고 싶다면 하는 것이 후회가 없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력사는 워낙 고집이 강한 사람이니까, 괜히 그런 문제를 두고 대립하면 스트레스를 받을 테니까. 하지만… 어쩌면 나는 두려웠던 게 아닐까? 내가 주장하고 선택한 방법으로 치료하다 무슨 일이 생기면 원망을 듣게 될까봐?
나는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가 원하는 당근 주스를 만들고 레몬즙을 짜냈다. 환자의 질병을 낫게 해줄 수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적극적으로 따르고 소극적으로 주장했다. 력사는 이제 환자니까 서울에 올라와 있어야 한다고 강권했을 뿐,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병원에 다니고 어떤 치료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 P43

토론하지 않았다. 막연히 병원을 신뢰했던 것이라고, 력사의 결정을 믿었던 거라고 생각했지만, 역시나 두려워서 회피했던 것 같다. - P44

력사에게 말했다. 이제는 요양병원을 나와서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고. 그래도 력사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에게 요양병원은 마지막 선택, 최후의 보루 같은 것이었다. 력사에게 요양병원에서 퇴원한다는 것은 곧 그 선택이 실패했음을, 더 이상 삶에 남은 희망이 없음을 의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와 친구들은 끈질기게 마음을 다해 력사를 설득했고, 결국 력사는 요양병원에서 퇴 - P47

원하여 서울로 돌아왔다. 그것이 력사가 세상을 떠나기 삼 주 전의 일이다. - P48

그리고 그 모든 것과 별개로, 그러한 상황에서도 환자를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동등한 한 인간으로 대하고, 여전히 소중한 친구이며 가족이라고 이야기해주는 그 목소리들이 환자의 존엄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력사의 마지막 순간 우리 친구들은 줌(zoom)으로 모였다. 그때 그들이 건네준 말 한마디 한마디가, 력사가 존엄을 가진 한인간으로서 사망할 수 있게 했다. 정말로 큰 선물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으로서 각자 생각하는 존엄과 품위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자기 신체를 통제하는 것, 어떤 이에게는 효능감과 유능감, 어떤 이에게는 또 다른 것이겠지. 이것은 삶의 순간순간마다 처한 상황마다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한 가지는, 이 존엄이라고 하는 것을 나 혼자 만들어낼 수는 - P70

없다는 사실이다. 서로의 삶이 존엄할 수 있도록 바라봐주고 말 걸어주는, 기댈 수 있는 옆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함께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나는 생각한다. - P71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내 호스피스 병동에 자리가 나서 력사는 친구들로부터 환송받으며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는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병원은 간호·간병을 엄격히 관리하고 제한했고, 보호자는 최대 한 명만 상주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전까지는 어디든 내가 함께였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이번 보호자의 권리는 력사의 어머니가 가져가셨다.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자식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키겠다는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어머니께 힘들면 언제든 교대해드릴 수 있다고 거듭거듭 말씀드리고, 매일매일 코로나19 검사를 받으며 병동에 들어갈 수 있기를, 가서 력사를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력사는 이미 문자메시지를 보내는 것조차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이따금 전화 통화를 할 때조차 력사가 엄마랑 24시간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용건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눈치가 보여 둘만의 이야기 같은 건 거의 하지 못했다.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과 력사의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이때부터 나는 - P79

갈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공간에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매일 전전긍긍했다. 화도 났다. 내가 력사의 배우자였다면, 저 병동에 보호자로 들어가는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나였을 텐데. 어머니께서도 비록 자식의 죽음이 슬프지만, 자신이 아니라 력사의 배우자가 보호자로 동행하는 게 맞다고 동의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배우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아니었고, 력사가 가족에게 커밍아웃하지도 않았기에 어머니는 우리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다행히 력사는 호스피스 병동에 오래 있고 싶어 하지 않았고 력사의 막내 이모가 집을 내주신 덕분에 첫 번째 호스피스 생활은 길지 않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은 두고두고 나의 권리 없음을 생각하게 하는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력사가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호스피스 임종실에 들어가던 날, 응급실을 통해 력사를 입원시키는데 보호자 한 명만 동행할 수 있다고 했다. 당연히 어머니께서 자연스럽게 함께 들어가셨다. 그렇게 력사와 - P80

어머니를 응급실에 들여보내고, 병원 로비에 앉아 한•참 울었다. 이젠 정말로 마지막일 것만 같은데, 나는 력사와 함께할 수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너무나 무력했고, 두렵고 또 두려웠다. 력사를 떠나보내는 것만도 두려운데, 력사에게 잘 가라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멀리서 사망 소식을 듣게ㅍ될까 봐 너무나 절망스러웠다.
친구들이 찾아와 넋 놓고 있는 나를 근처 숙소에 집어넣어 주었다. 그렇게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밤을 보낸 다음 날, 력사의 어머니에게 연락이왔다.
"내가 간호사 선생님께 말해서 너도 같이 있어도된다고 허락받았어. 얼른 와!"
하늘의 도움인지 인간의 측은지심인지 아니면 그간 동고동락한 나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 때문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력사에게 갈 수 있으니 되었다. 나는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다. - P81

6월 9일 저녁, 친구들이 연락해 와 력사와 함께 줌 미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말했다. 력사는 그냥 자고만 있다고,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다고, 그냥 안 하는 게 낫다고. 친구는 그래도 단호했다. "누가 반응해주길 바란다니. 그래도 력사가 우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렇게 말하며 력사에게 이어폰이나 꽂아주라고 했다.
그렇게 열린 회의실 제목은 ‘줌으로 ASMR_력사에게‘, 그 소개에는 "력사는 계속 잠을 자고 있어요. 그러나 들을지도 몰라요, 친구들의 목소리를 력사에게 꼭 들려주고픈 친구들의 말을 나지막하게 나누어요. - P86

력사 곁에 있는 캔디가 력사에게 이어폰을 꽂아주고 호스피스실에서 함께 들을 거예요"라고 적어두었다. 속속들이 모인 친구들은 력사에게 안심하라고 이야기하며 편지를 읽어주기도 하고,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우리가 이렇게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력사에게 건네주는 마음들이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날 늦은 시간 나도 어머님이 잠드신 틈을 타서 력사에게 소근소근 귓속말을 건넸다.
"너를 만나는 동안 나는 정말로 행복했어. 너와 함께한 시간들은 언제까지나 나에게 소중한 기억으로 남을 거야.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마. 사랑해."
답변도 미동도 없는 력사였지만, 분명 내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시간은 이토록 차분하고 처절했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왜 난 그깟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 눈치 보고 숨죽여가며 해야 하는 걸까. 서글펐다. 이건 행운인가, 불행인가. 그냥, 지금 주어진 상황에 그저 감사하면 되는 걸까. 한순간도 평온할 새 없이 끝이 오고 있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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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물
홍은전 지음 / 봄날의책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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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람
홍은전 지음 / 봄날의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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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떠난 곳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었다. 많은 사람이 삶의 방향을 찾거나 바꾸었다는 그 길을 걸으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기만 하면 되는 그 길은 몸은 고단하지만 마음은 평화로운 안전하고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나는 화살표를 따라 꾸역꾸역 씩씩하게 걸어갔다. 그리고 40일 후 그 길의 종착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 많던 화살표가 일제히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지?‘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내가 정말로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나에게 방향을 알려주던 화살표 같은 존재들이 이젠 내 곁에 없다는 것도, 나는 화살표 없이 살아본 적이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그때 절절하게 깨달았다. - P12

글쓰기는 사랑했던 것들을 불멸화하려는 노력이라고 했는데, 나의 글쓰기가 정말로 그랬던 것이다. 나는 떠나는 그 기차를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몇 번째 칸에서 어떤 일이 있었고 어느 정류장에서 누가 타고 내렸는지, 그것이 우리의 방향을 어떻게 조금씩 바꿔 놓았는지에 대해 밤새 이야기할 수 있었다. 내가 쓴 한 시절 우리의 역사는 내 몸에 고스란히 새겨져서 나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어떤 것이 되어 있었다. 그 시절이 나로부터 영원히 떠나가고 있었지만 전혀 아깝지도, 미련이 들지도 않았다. 오히려 허물을 벗고 빠져나오듯 후련했다. 이제 다른 기차를 타야 하는 것이다. 어떤 기차를 타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없었지만 똑같은 기차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 - P16

는 더 이상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지 않게 되었다. - P17

도서관에서 특강을 하던 그가 유럽에서 공부했다면 나 - P21

는 노들장애인야학에서 공부했다. 그것은 평생을 방구석과 집안과 시설에 갇혀서 여전히 조선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21세기의 한국 사회를 배웠다는 뜻이다. 그것은 21세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21세기를 전혀 다르게 겪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제 나는 그것이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란 걸 안다. 하지만 이전의 나는 내가 우물 안 개구리이기 때문에 우물 밖 세상에 대해 배워야만 세상에 대해 아주 작은 소리로라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만난 우물 밖 사람 역시 자기만의 우물 안에 갇힌 듯 보였고, 그게 너무 당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의 세계를 몰랐으니 그도 나의 세계를 모르는 게 공평하다고. 그러니까 인간은 모두 각자의 우물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세상은 그런 우물들의 총합일 뿐이라고. 더 거대하고 더 유구한 우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다른 우물들이 있을 뿐이라고. 그날 나는 나의 우물을 처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세계관이란 나의 우물이 어디쯤에 있고 다른 이들의 우물과 어떻게 다르게 생겼는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다.
나는 다시 신문을 펼쳤다. 장애인, 형제복지원 피해생존 - P22

자, 세월호참사의 피해자 같은 내가 아는 사람들의 세상은 거기에 없었다. 나의 우물은, 한 시절 나의 우주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왜 없지? 어떻게 이렇게 없을 수가있지?‘ 하며 신문을 넘기다가 금세 나는 또 그것을 의아해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노들에서 매일 들으며 살았던 소리들, 나를 힘들게 하고 때론 도망치고 싶게 했던 사람들의 한숨이나 신음, 비명이나 절규 같은 소리는 노들을 그만두자마자 마치 방음설비가 완벽하게 갖춰진 방의 문을 꾸욱 닫고 나왔을 때처럼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대신 세상엔 재밌고 신나는 것투성이었다. 노들은 먼지처럼 미미해서 보이지 않았다. 빛나고 화려한 무언가를 위해 기꺼이 쓸어버려도 좋은 어떤 것이 아니라 무엇이 쓸려나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그런 존재 같았다. - P23

연말정산 철마다 그를 찾았다. 그리고 작년 겨울 그가 결국 말하고 말았다.
"나가고 싶어."
시설 측은 가족의 허락을 받아오라고 했다. 가족은 물론 반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가고 싶다는 그에게 나는 열번 스무 번 고쳐 물었다.
"정말 할 수 있겠어요?"
사실 그는 가족의 허락 없이도 퇴소할 수 있고 주거와 정착금도 받을 수 있다. 시설이 그것을 모를 리 없다. 이 벽관의 문이 오래전에 풀렸다는 걸 갇힌 사람들만 모른다. 그러니 질문은 실상 나를 향한 것이다. 벽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저 앙상한 어머니를 밀칠 자신이 있는지. 문을 열면 곧장 나를 덮쳐올 그를 업고 얼마간 전력 질주할 체력이 있는지. 그의 손에 술이 아닌 다른 것을 쥐게 할 대안이 있는지. 나는 자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를 피했다.
"잘 지내고 있는 사람 흔들지 마세요."
애원은 점점 호통으로 변했다. 닫힌 문 너머에 어머니의 - P35

일상이 있었다. 그것 또한 지켜져야 했으므로 나는 얌전히 돌아섰다. 그에겐 ‘어쩔 수 없다‘ 전하고 다음번 연말정산 철을 기약할 작정이었다. 그때 함께 간 동료가 어머니의 집 문틈으로 편지를 밀어 넣었다.
"허락지 않으셔도 우리는 하겠습니다."
순간 나는 그녀가 벽관의 문을 여는 것을 보았다. 내가 온갖 사람들의 평화를 계산하는 동안 그녀는 그 계산에서 빠진 단 한 사람을 보며 그저 신발 끈을 묶었다. 부끄러웠고 부러웠다. 그녀는 멋있었다. 그런 방식으로 수십 명의 탈출을 도와온 그녀는 싸움닭처럼 세상을 들이받으며 시설 바깥에 그들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소록도 100주년을 맞아 고흥군이 40여 년간 한센인들을 돌보았던 마리안느와 마가렛 수녀를 노벨평화상에 추천한다고 한다. 한센 병력으로 인해 격리된 사람들의 섬 소록도는 오랜 세월 차별과 폭력, 단종과 학살이 자행된 인권의 사각지대이자 침묵의 땅이었다. 수녀님과 같은 이들이 있어 갇힌 사람들은 고통을 덜었을 것이나, 덕분에 그 고통은 100년이나 지속되었다. 그 지속 가능함은 분명 어떤 평화에 기여했을 것이나, 그것은 실상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가둔 사람들, 소록도가 아니라 소록도에서 바라본 - P36

육지의 것이 아니었던가. 오래전에 깨어지는 게 더 좋았을 ‘당신들의 평화‘ 말이다. (2016. 1. 25) - P37

2001년 처음 노들장애인야학의 문을 두드렸던 나는 살면서 장애인을 거의 본 적 없는 평범한 비장애인이었다. 야학 교사인 나는 방황하던 대학 졸업반이었고, 또래인 야학 학생들은 초등학교는커녕 변변한 외출도 해본 적 없는 중증장애인들이었다. 장애인이 차별받는 세상이란 저멀리 따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일주일에 한 번쯤 ‘봉사‘하러 다녀오면 되는 줄 알았으나, 내 생각이 틀렸다. 학생들은 지나가듯 말했다.
"나도 대학가고 싶어."
"나도 연애하고 싶어."
"나도 돈 벌고 싶어."
거기엔 모두 ‘너처럼‘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한가한 소리를 일순간 팽팽하게 당기는 말, 저항하는 사람들이 던지는 밧줄 같은 말, 그것은 주술처럼 나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 P81

세상엔 자신의 유서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싸움은 그들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싸움의 지속은 타인의 유서를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김소연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의 울음을 이해한 자는 그 울음에 순교한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람의 구질구질함을 이해한 자는 그 구질구질함에 순교한다. 창살 ‘없는‘ 감옥에서 누리던 그마저의 편리도 내려놓고 창살 ‘있는‘ 감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들은 아름답다. - P102

박종필의 앎은 앓음이었다. 그는 다큐를 찍어 명예를 얻었지만 우정을 나눈 형들은 객사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부채감과 자괴감으로 크게 앓았다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그 앓음이 박종필의 삶을 결정지을 만큼 대단했으리란 걸, 다큐를 보며 알았다. 이후 20년 동안 그는 장애, 빈민 현장의 영상활동가로 살았다. - P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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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말들 - 사랑도 혐오도 아닌 몸 이야기 아르테 S 5
강혜영 외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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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약자‘는 평생 자신을 사랑하는 문제와 투쟁해야 하는 이들이다. 성별, 인종, 계급, 나이 등은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 사회적 해석이다. 몸의 영역에는 쉽거나 작은 실천이 없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 - P14

신을 알고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선을 상대하는 용기, 나이듦을 인정하는 것, 아픈 상태도 인생의 소중한 부분이라는 인식, 남의 몸에 대해 되도록 적게 말하기부터 시작하자. - P15

몸에 대해서라면 좀 무식, 무지, 무관심한 쪽이다. ‘쪽이었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하고 싶지만 지금도 어느 면에서는 그러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가슴이 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는 꼭지만 달린 주제에 너무나 브래지어가 하고 싶어 공갈 브라를 하고 다녔다는데, 그런 심리 1도 이해 못 하는 나는 티셔츠 속으로 빤빤하게 떨어지는 가슴이 좋아 고무줄로 된 벨트를 가슴에 차고 다녔다. 무려 2년 동안이나. 엄마에게 들켰다가는 억지로 레이스 달린 - P68

아토피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부적절한‘, ‘이상한‘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부적절하고 이상한지, 그 기준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부적절하고 이상한 사람처럼 여기며 약 10년을 흘려보냈다. 20대가 된 나는 여전히 약을 끊지 못하고 1등급의 스테로이드 연고를 쓰고 있었다. 스테로이드 중독에 의한 부작용은 다양하다. 안면홍조가 생겼고, 살짝 스치기만 해도 멍이 들거나 상처가 날 정도로 피부가 예민해졌으며 에일리언 같다, 피부가 기름종이 같다는 소리를 들었을 - P35

나는 내 몸을 사랑하는가, 내 몸을 긍정하는가에 관해 오래 생각했다.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오래 보류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아니다‘였다. 나는 여전히 내 몸을, 내 피부를 사랑하거나 긍정하지 못한다. 그럼 나는 실패한 걸까? 사랑하거나 혐오하거나, 둘 중 하나만 있는 것일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주 오랫동안 내 몸을 혐오했고 또 그만큼의 시간을 들여 사랑하고 싶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라는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애초에 우리 삶이 그렇게 쉽게 온점을 찍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도 하고.
내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려 노력하다 보니 매일 실패하는 나를 발견했다. 피부를 위해 술을 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참지 못하고 마시는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다음 날 악화된 피부를 보며 또 나와 내 피부를 혐오했다. ‘내 피부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미션은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절대 정상까지 오르지 못하는 산이었다. 내 생각은 ‘내 피부를 사랑한다, 사랑 - P41

하지 않는다.‘ 두 가지에만 매몰되어 있었으니 어떤 노력을 해도 결국 내 피부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지금은 나를 향한 사랑이 불가능하다거나 완결된 상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몸에 대한 애정은 매일 바뀐다고 볼 수 있다.
내 피부, 내 몸을 사랑한다는 건 사실 자존감의 문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내 몸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니까. 하지만 이 자존감은 높거나 낮거나의 두 가지의 선택지만 있는 것이 아니며 어느 한쪽에만 멈춰 있는 고정된 형태도 아니다. 어제 술을 마셨다면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날이 되고, 오늘 운동을 하고 건강한 음식을 먹는다면 내 몸을 사랑하는 날이 된다. 언제든지 나는 나를 사랑하거나 싫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하지 못했다고 해서 나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거나 자책할 이유도없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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