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대부분 뻔한 구도에서 장애인 당사자와 비장애인 조력자를 구분한다. 노들처럼 그것을 설명하기 좋은 곳도 없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강력한 자장 안으로 빨려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는 ‘차별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형성될 수 있지만 저항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에는 그 경계의 구분이 의미가 없다. 모두는 저항의 주체일 뿐이다. ‘노들과 같은 공동체가 사라지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노들을 그저 차별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 바라본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와 같은 구호는 수십 년 차별받아온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그저 해가 지고 달이 지듯 버스를 풍경의 일부로 - P11
여길 뿐 자신이 ‘탈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싸우려는 자, 저항하는 인간만이 ‘발명‘해낼 수 있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마지막까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노들이 궁금하여 찾아온 사람들은 약속한 듯 물었다. ‘무엇이 가장 보람되는가‘, 혹은 ‘이 공동체의 비결은 무엇인가‘로 요약할 수 있을 만한 것들이었다. 어떤 날은 ‘학생들이 한글을 깨우칠 때‘라고 대답하고 어떤 날은 ‘교사회의‘, 어떤 날은 ‘평등하기 위해 노력하는 관계‘라고 대답했지만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그 답들은 어딘가 조금 부족했던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틀린 답에 가깝다. 사람들의 진부한 질문이 싫었으면서도 나 또한 이 작업을 하는 내내 그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의도한 것이 아닌데, 실은 의도했던 것을 정확히 실패했기 때문인데, 나는 ‘노들야학을 하는 보람은 이거다‘라고 한마디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 ‘노들의 비결은 이거다‘라고 못박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다시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심술궂게도 ‘수많은 하루들‘이라고 대답하겠다. - P12
‘오늘 일어난 일: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다. 웃긴 했는데 무슨일로 웃었는지 모르겠다.‘
절묘한 표현이라고 생각하며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노들야학을 한다‘는 것이 깜빡거리는 형광등을 갈고 사라진 걸레를 찾아 돌아다니는 일처럼 사소할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웃을 일이 더많았으니 충분히 행복한 날들이었습니다. 비록 정든 이들이 자주 떠나갔고 때로는 함께 공부하던 이가 사라지는 참담한 일도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날, 아무런 특별한 별일이 없었으므로 견딜 만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노들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가장 눈에 밟혔던 것도 바로 그 사소한 일상이 아니었나요? ‘누군가는 노들을 지켜주었으면‘ 했던 당신의 이기적인 마음도 실은 누군가 남아서 형광•등을 갈고 칠판지우개를 털어주길 바랐던 것이라고 나는 짐작합니다. - P28
야학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공간이었지만 누구도 남으려 하지 않고, 남을 수도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공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무도 누군가의 등을 떠밀지 못했으리라. 그때 박경석이 겸연쩍게 손을 들고 나섰다. 그가 야학을 사랑하는 방식은 ‘남아서키우는 것‘이었다. 그는 노들야학의 세 번째 교장이 되었다.
노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자
1997년 6월 10일, 별 준비 없이 초라하게 진행된 박경석 교장의 취임식은 단언컨대 노들야학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순간이다. 떠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당연했던 시절에 야학을 자신의 인생에 묶은 최초의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청춘의 한 마디를 끊어서 야학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길 위에 야학을 얹어 보았다. - P59
이제부터 노들이 굴러간 모든 곳에 그가 있다. - P60
"작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것이 모래 위에 디딘 것인지 반석 위에 디딘 것인지 지금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그것은 흔적도 없이 바람에 날려 사라질지 모른다. 기억해야 한다. 조금씩 눌러주지 않으면 또다시 잊혀져버릴 흔적들을 기억하자. 우리에겐 세상 모든 길을 갈 수 있는 당연한 권리가 있다." 노들바람 - P75
운동이 사라져가는 시대였다. 야학은 장애인의 학력을 높여서 차별을 가리는 데에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 없는 세상을 향한 저항의 가치를 실천하는 공간이 되어야 했다. 노들은 그 저항이 이름 있는 정치인의 힘찬 연설로서가 아니라, 방구석에 갇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수많은 중증장애인들로부터 시작되어야한다고 믿었다. 꽁꽁 숨어 있는 그들을 집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야 했다. 그러기 위해 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이 높고 - P79
고립된 정립회관이 아니라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그리고 이 일들을 꾸준히 추진해나갈 사람이 있어야 했다. 2000년 7월, 한 청년이 역사적 사명을 띠고 아차산 언덕을 올라 야학의 문을 열었다. 에바다 투쟁에서 노들과 인연을 맺은 김도현이었다. 그는 활동비 50만 원을 받는 조건으로 야학에 ‘취직‘한 첫번째 상근활동가였다. - P80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P88
권리는 법전에 있지 않았다. ‘배운‘ 사람들이 먼저 찾아서 하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권리는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 자신의 힘으로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당연한‘ 저상버스와 지하철 엘리베이터가 바로 그 증거다. - P95
누군들 충돌이 고통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 시기 몇몇 교사들에게는 고통을 견디며 끝까지 밀고나가는 어떤 힘이 있었다. 두려움보다 더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충돌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일상 속에서 묵묵히 실천으로 증명했다. 어떤 교육파 교사는 어떤 운동파 학생과 함께 살며 그의 자립생활을 지원했고, 어떤 운동파 교사는 연극 수업에 들어가 ‘데모‘라면 기겁을 하는 학생의 삶에 오랫동안 귀 기울였다. 운동파가 교육파에게, 교육파가 운동파에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교육이 절대 눈감지 말아야 할 것과 운동이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서. 참된 교육도, 진정한 운동도 지극한 정성으로 파내려가다 보면 그 뿌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삶에 대한 지지. - P101
교육과 운동은 그들의 실천 속에서 이어졌고, 갈등을 대하는 그들의 성실했던 태도는 이후 충돌의 순간마다 회자되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사이의 단절이다.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교육과 운동 중 어느 하나가 독주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이 삶에서 분리되어 홀로 내달리는 것이다. 노들야학이 이 시기에 어떤 질적인 변화를 겪고 거듭났다면 그것은 이동권 투쟁 자체를 통해서가 아니다. 치열했던 갈등을 견뎌낸 사람들이 온몸을 떨면서 피워낸 꽃이다. 가장 진실한 배움이 설 자리는 바로 그런 곳이다. - P102
만약 전장협이 DPI와 통합하던 시기에 한국사회에 투쟁을 통해서, 당사자의 주체적 힘을 통해서 장애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단체가 단 한 곳이라도 있었다면 노들은 이렇게 홀로서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대한 조직과 자금력을 가진 수많은 단체들이 있지만 그들은 이동권 투쟁의 현장에, 에바다 투쟁의 현장에, 그리고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싸우다 죽어간 최옥란 열사를 보내는 길에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P107
정부에서 지급하는 예산에 사활을 걸고 상급 관료들의 기득권과 출세의 길이 침해받지 않는 한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장애인 단체 또한 그 나름의 긍정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 문제를 투쟁을 통해 권리로서 쟁취하고자 하는 단위와 그들과의 균형은 참혹할 만치 비대칭적이다. 이 척박한 지형 위에서 노들은 장애인운동의 딜레마와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담고 있는 유일한 공간일지 모른다. 그 무게감이 우리를 때때로 힘들게 한다. (...) 김도현 - P108
활동보조는 자원봉사와 달라서 행위의 주체는 장애인이고 보조인은 대신 수행할 뿐이다. 노동의 대가를 받으며 급여는 국가가 지급한다. 활동보조인은 이렇듯 ‘전혀 새로울 것 없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전혀 새로운 관계‘의 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야학 교사가 아무리 자신의 활동은 ‘봉사‘가 아니라 ‘연대‘라고 주장해도 그 무게중심은 철저히 교사에게로 기울어져 있었다. 장애인의 입장에선 이 비장애인이 언제 사정이 생겨 그 ‘연대‘를 중단하게 될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활동보조인이 없는 중증장애인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자신을 도와줄 누군가가 나타날 때까지 몇 시간이든 오줌을 참는 일이고 눈앞에 밥을 두고도 배고픔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다. 그들에겐 가혹하게도 너무나 흔한 일상이어서 그것을 특별히 ‘문제‘라고도 인식하지 못했다. - P110
2003년부터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는 활동보조인 파견 사업을 시행했다. 그즈음 전동휠체어도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활동보조서비스와 전동휠체어의 결합은 장애인의 일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걸을 수 없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걷게 된 격이니 기적이 일어났다고 해야 할까! 아무리 중증장애인이라도 전동휠체어를 운전할 수만 있다면 방구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일찍 누군가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기만 한다면 온전히 ‘하루‘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30년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삶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상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뜻이었다. - P113
한 시절 모든 악의 근원이 ‘이동할 수 없어서‘였다면 이제 모든 불행의 씨앗은 ‘활동보조서비스의 부족‘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새로운권리의식이 싹트고 있었다. - P115
2005년 말, 그가 노동부에 제출한 사업 기획안이 선정되면서 꿈은 급작스럽게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 열 명의 급여를 3년간 지원받는 조건이었다. 2006년 3월 세 번째 노들,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이알찬과 퇴임한 교사들, 그리고 야학 학생 몇 명이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들야학이라는 공통분모를 믿었지만 교사와 학생으로 만나 배움을 주고받던 관계와 직장 동료가 되어 함께 일을 하는 관계는 몹시 달랐다. 수업은 쉬웠지만 함께 일하기는 어려웠다. 현수막 주문을 받기로 한 노동자 J는 길이를 재는 단위인 미터(m)와 센티미터(cm)를 변환할 줄 몰랐다. 출력기를 다루어야 하는 노동자 Y는 기계가 표시하는 영어를 읽지 못했다. 학생일 때는 문제될 게 없었지만 노동자일 때는 사정이 달랐다. 버 - P118
려지는 현수막이 속출했다. 그러나 누구를 탓할 수 있겠는가. 학교가 그들을 받아주지 않았고 야학이 그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을! 작업 지시서를 앞에 두고 즉석에서 수학 수업이 벌어지고 출력기 옆에서 알파벳 특강이 이루어졌다. 배움의 속도는 마음과 달리 속 터지게 더뎠다. ‘이알찬들‘이라고 사정이 다를 리 없었다. 그들 역시 현수막이라고는 대학 시절 볕 좋은 날 천을 펼쳐 놓고 붓으로 쓰는 모습밖에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회사를 찾아다니며 연수를 청하고 듣도 보도 못했던 자격증을 따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했다. 보조금이 중단되는 3년 뒤에도 살아남아야 했다. 살인적 노동 강도에 피를 말리는 긴장까지 더해졌다. 장애인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그들이 차별받은 역사까지를 보듬는 일이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한다고 누가 돈을 줄 리 없었다. 당장 장애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은 비장애인이 모두 메워야 했다. ‘이알찬들‘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빴다. ‘장애인의 속도를 인정하고 노동권을 보장하라‘고 외쳤던 그들이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기계가 되고 총알이 되어야 했던 나날이었다. 늦은 밤 현수막을 ‘디자인‘해서 ‘출력‘을 걸어놓은 후, 기계 아래서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자다가, 출력이 끝나면 그것을 ‘마감‘하여, 새벽이 되면 사다리를 들고 ‘시공‘을 하러 나갔다. 야학에서 수업 마치고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실천하기 위해서 ‘장애인도 일하고 싶다‘는 정당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인간은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아니라 협력과 연대의 정신으로도 살 수 있고, 또 살아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 P120
2001년 이후 시간은 참으로 역동적으로 흘렀다. 이동권 투쟁을 시작으로 장애인의 생존권을 요구하는 외침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2003년에는 교육권을 보장하라는 부모들의 폭발적인 투쟁이 시작되었고, 2004년에는 정립회관 민주화를 위한 점거 농성이 231일 동안 진행되었으며, 2006년에는 장애인 수용시설이었던 성람재단의 비리를 해결하라고 종로구청 앞에서 153일 동안 농성을 했다. 또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하라고, 교육지원법을 제정하라고, 활동보조서비스를 제도화하라고 농성에 농성에 농성을 거듭하였고, 무시로 집회를 하고, 도로를 막고, 단상을 점거하고, 토론회를 개최하고, 문화제를 열었다. 그사이 노들야학 사무국과 노들장애인자립생활센터와 현수막 공장 ‘노란들판‘이 새롭게 문을 열었고 지역마다 우후죽순으로 자립생활센터들이 생겨났다. 이동권연대와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과 장애인교육권연대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가 결성되어 눈부신 활동을 펼쳤고, 다수의 노들야학 사람들이 그 활동가가 되었다. 사람들은 겨울이면 여의도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국회를 향해 소리질렀고, 여의도 윤중로에 벚꽃이 만개할 즈음에는 광화문에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2005년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제정되었고 저상버스가 의무화 - P131
되었다. 2007년에는 활동보조서비스가 제도화되었고, 장애인차별금지법과 장애인등의특수교육법이 새롭게 제정되었다. ‘학습(學習)‘. 배우고 익힌다는 뜻. 우리는 ‘차별에 저항하라‘는 과제를 학습할 무궁무진한 기회 속에 놓여 있었다. 차별이 무엇인지, 저항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배웠고 인권의식과 연대의식을 몸에 익혀 나갔다. 바야흐로 저항의 봄, 투쟁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몸‘은 그대로인데 불가능했던 많은 것이 다만 시간 속에서 가능해졌다. 혁명은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시시각각 딛고 선 땅이 요동을 쳤다. 우리는 그 위에서 흔들리며 뒤섞였다. 부딪치고 넘어졌으며 균형을 잡고 일어서기 위해 서로의 손을 뜨겁게 잡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다른 존재가 되었다. 많은 부모들이 말했다. 당신들의 자식이 노들을 만난 후 반항을 하기 시작했다고. 몰랐을 땐 그것이 삶인 줄 알았다. 그러나 숨만 쉰다고 모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 ‘아직 죽지 않은 존재‘로 사는 것은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20년을 그렇게 살아왔지만 이제 우리는 단 하루도 그렇게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마 - P13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