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징 솔로 - 혼자를 선택한 사람들은 어떻게 나이 드는가
김희경 지음 / 동아시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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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미혼, 중년은 이혼, 노년은 사별."
많은 경우 사실이라 해도 빈약한 설명이다. 특히 중년이 그렇다고 느꼈다. 40세 이상의 중년 1인 가구 중 결혼을 당위로 여기지 않는 비혼이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뭉뚱그려도 되나. 더 께름칙하게 느꼈던 건 이 허술한 공식이 혼자 사는 삶에 대한 설명을 결혼의 반대편에만 묶어둔다는 것이다. 결혼을 중심에 두고 그것의 대척점인 주변부에 혼자 사는 삶을 놓은 뒤, 결혼 바깥의 삶이 괜찮은가 아닌가를 측정한다. 결혼의 편에 서서 혼자 사는 삶을 바라보며 취약하다고 단정 짓는다. 마치 결혼이 표준이자 정상이고, 비혼은 일탈이자 비정상인 것처럼.
되레 현실은 거꾸로 아닌가. 비율만 놓고 보면 성인들이 살아가는 방식에서 혼자 살기는 다수이자 주류가 되었다. 2015년 무렵부터 한국의 주된 가구 형태가 - P8

된 1인 가구는 2021년 기준 716만 6,000가구로 전체의 33.4%에 이르렀다. ‘정상가족‘이라 불리는 부부와 자녀로 구성된 가구(29.3%)보다 많다. 전체 가구의 3분의 1이 넘을 정도로 흔한 삶의 유형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비정상, 소수, 비주류처럼 이야기되는 것은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국내의 1인 가구 담론에서는 중년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1인 가구를 다룬 정책과 담론은 주로 청년을 중심에 둔 ‘당당한 싱글‘이거나, 노인을 중심에 둔 ‘돌봄이 필요한 싱글‘ 위주다. 중년 1인 가구가 등장할 때는 이혼 또는 ‘기러기 아빠‘로 혼자가 되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남성의 사례로 다루어지거나, 새롭게 등장한 사회적 취약 계층으로 여겨진다. 아마 1인 가구 중 이미지가 가장 부정적인 세대는 중년이 아닐까 싶다. - P9

중년 1인 가구, 홀로 나이 들어가는 ‘에이징 솔로Aging Solo‘가 대폭 늘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혼자 사는 게 과도기적 상태가 아니라 삶의 기본값인 사람들이 나이 듦이라는 과제를 함께 직면하고 있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노인 1인 가구는 노년기에 접어든 뒤 배우자와 사별한 경우가 대다수였지만, 이제는 혼자인 상 - P11

태로 중년에서 노년으로 생애 전환을 겪게 될 대규모 집단이 등장했다. 우리가 가본 적 없는 초고령 사회에, 솔로의 조건으로 진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무리 요즘 자녀가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도 노년에 자립이 어려워지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자녀에게 의존하는데, 자녀가 없는 에이징 솔로가 늘어나면 노년과 생의 막바지 풍경도 크게 바뀔 것이다.
에이징 솔로는 결혼에 대한 주위의 압력에서 어느정도 자유로워졌고, 혼자인 삶을 오랫동안 꾸려온 사람들이다. 혼자 사는 성인도 경제적 독립, 주거, 친밀한 관계 맺기, 정서적 안정, 노년의 준비 등 모든 사람이 겪는 생애 과제들을 마주한다. 세상이 비혼인 중년을 취약하고 비정상적이며 비참해질 것이라고 바라보는 이유는 나이 들어서도 혼자 사는 사람들은 이 생애 과제들을 제대로 치러내지 못하리라 예단하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그건 결혼한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성숙해지고 온전한 삶을 살아내는 과정은 애초에 결혼 여부와 상관없는 일이다. - P12

중년여성의 어려움으로 ‘빈둥지증후군‘을 이야기하고 잘 늙어가는 방법으로 ‘배우자와의 관계 재정립‘을 말하는 사회에서, 혼자 사는 내가 참조할 만한 현재와 미래의 이야기를 찾을 수 없었다. 에이징 솔로의 삶에 ‘없는‘ 것 말고 ‘있는‘ 것, 그들이 경험하는 여정과 마주하는 문제들에 대처하는 방식, 새로이 만들어 가는 관계들이 궁금했다. 있는 듯 없는 듯 취급받는 에이징 솔로의 삶을 가시화하고 싶었다.
款혼자 사는 사람을 정의하는 기준은 다양한데, 이 책에서 말하는 에이징 솔로는 결혼의 경험이 있건 없건 스스로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상태로 살기를 선택해 현재 그렇게 살고 있는 중년을 뜻한다. 대다수가 1인 가구지만, 친구 등 동거인이 있는 경우에도 배우자와 자녀가 없는 비혼의 중년은 에이징 솔로에 포함했다. - P13

그러나 혼자 살기는 이미 많은 이들이 공통으로 갖는 삶의 조건이 되었다. 그러한 삶의 방식과 그것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은 제대로 논의되고 있는가? 1인 가구의 급증으로 관련 담론도 증가하는 추세지만, 당사자가 내어놓는 이야기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위기‘이자 공동체가 무너지는 징후처럼 다루어진다. 그런 담론 안에서 자신의 삶이 설명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 P15

세대 간 차이는 비혼 담론의 변화에서도 또렷하게 드러난다. 지은숙 박사가 한국 비혼 담론의 흐름을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비혼 1세대는 "1970년대 이후 출생하여 민주화운동 속에서 비판적 사회의식을 길러왔고, 가부장제와 소유 중심의 사회로부터 거리를 두고 공동체적 지향으로 살면서 주로 생활정치와 복지정치의 영역에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의제를 형성해온 사람들이다.
2015년 이후에는 "미투운동,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등을 거치면서 20~30대 여성을 중심으로 온라인에서 새로운 페미니즘의 흐름이 등장"했고 그 속에서 "비혼을 남성과 가부장제를 타격하는 정치적 행동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시각"이 탄생했다. 비혼 2세대가 주도하는 이러한 흐름이 등장하면서 비혼의 대중화 시대를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 P59

한국의 기록적인 저출생 현상의 구조적 원인은 아이를 낳지 않는 여성들의 이기심과 페미니즘이 아니라, 뿌리 깊은 성차별과 가부장 문화에 있다. - P73

비혼·비출산 여성은 자신의 아이만 없을 뿐이지, 사회에 무관심하고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다. 되레 사회 참여에 더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사회봉사단체 등 자발적 결사체에 참여하는 정도를 비교해 보면 남성은 기혼자의 참여가 높고 비혼자는 그렇지 않지만, 여성은 거꾸로 비혼자의 사회 참여가 높고 기혼자의 참여는 낮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즉, 한국 사회에서 가족을 꾸리지 않은 남성은 주관적 삶의 질뿐 아니라 공동체와 결속하는 정도도 낮아진다. 그만큼 자신을 희생하고 뒷받침해 주는 여성의 존재가 남성에게 중요하고, 가족이라는 일차적 사회관계가 ‘관계 자원‘으로서 남성에게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면 여성에게 아내와 엄마 역할이라는 부담은 공동체 참여를 가로막는 장애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 P76

‘혼자 살면 젊을 때나 좋지 나이 들어 외롭다‘라는 말은 ‘혼자 살면 아플 때 서럽다‘와 함께 ‘혼삶‘의 입구에 - P80

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오래되고 불길한 2대 경고다. 이 경고를 뒤집으면 사람들은 외로울까 두렵고, 아플 때 돌봄 문제가 걱정되어서 가족을 꾸린다는 말도 될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 두 문제를 가족 밖에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채, 가족을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혼삶‘에 외로움과 아픔을 덧칠한다. - P81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때에 친한 친구들은 다들 결혼해 아이를 키우느라고 만날 수가 없었어요. 고통을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고 너무 외로웠죠. 그런데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때와 관계를 맺고 싶을 때를 제가 알아서 결정할 수 있어요. 가끔 외롭더라도, 싫은 사람과 같이 있지 않아도 되는 게 제일 좋아요. 물론 외로움이 정말 문제인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고정관념에 전염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막 너무 즐겁지는 않지만 그냥 혼자 - P82

있는 감정 상태에 사람들이 외로움이라고 딱지를 붙이니까, 이게 외로운 거구나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고 봐요." - P83

1사회적 고독과 고립, 소외를 해결하고 유대를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찾는 것은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다. 1인 가구의 증가가 사회에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내는지도 주목하고 대응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두 현상을 뒤섞어 1인 가구의 증가가 사회적 고립의 주원인인 양호도하는 것은 진단이 잘못됐을뿐더러 데이터로도 입증되지 않는다. 어떤 문제든 부정확한 진단과 과도하게 단순화된 서사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 - P90

병원이 보호자로 법적 가족을 당연하다는 듯이요구해서 법적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의료법에는 병원에서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수술 동의서나 입원 동의서에 관한 세부 규정이 없다. 응급 상황에도 항상 법정대리인이나 보호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입원할 때 연대보증인을 요구하는 병원의 관행도 법적 효력이 없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 국민권익위원회의 제도 개선 권고에 따라 연대보증인을 세우는 관행을 시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부 대형병원에서는 이 관행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연대보증인을 요구하는 민이 - P96

간병원들이 많다.
수술할 때 보호자의 동의서를 받는 관행에 대해서도 보건복지부는 이미 2007년 대한병원협회에 공문을 보내 보호자의 수술 동의서가 없다고 환자의 수술을 지연시키거나 거부하면 의료법의 진료 거부 행위에 해당해 처벌이나 행정처분을 받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직계가족인 보호자를 찾고 동의서를 요구하는 관행은 여전하다. 의료사고가 나거나 수술비를 청구할 때 분쟁이 날 것에 대한 병원 측의 우려 때문이다. 사회건강연구소는 2019년 펴낸 연구 보고서 「의료현장에서의 보호자 개념은 다양한 가족을 포함하고 있는가?」에서 "병원의 과도한 ‘보호자 찾기‘는 ‘리스크 관리차원‘에서 진행되는 것"이며 "‘환자 중심‘의 사고가 아니라 ‘의료현장의 편의성‘ 중심 사고"라고 짚었다.
이 관행 때문에 1인 가구, 동성 커플 등 소위 ‘정상 가족‘의 틀을 벗어난 사람은 실제 일상을 함께하는 이가 실질적 보호자가 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이 보고서는 "이는 단순히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존재 조건이 사회에서 체계적으로 무시되고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을 뜻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 P97

걱정은 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돌봄의 문제는 절대 혼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우에노 지즈코는 ‘팀K‘를 소개하면서 "가족에게 의지할 수 없는 싱글에게는 가족을 대신할 네트워크가 반드시 필요하다. 없다면 노력해서 만들어야 한다"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먼저 해본 사람들이 "절친한 친구가 많을 필요도 없다", "누구나 할 수 있다"라고 한 말에 은근한 기대를 걸어본다.
그런 돌봄 관계망들은 조한진희의 말마따나 "혈연 관계나 친밀한 관계 등으로 배타적 경계를 나누지 않고도 누구나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사회"로 가는 작은 씨앗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 씨앗들이 여기저기에 뿌려지는 광경을 보고 싶다. - P107

"(...) 어떤 일로 힘들 땐, 가령 상사의 말도 안 되는 지시로 화가 났거나 프로젝트 진행이 굉장히 힘들어졌을 때는 사적으로는 별로 안 친밀하지만 그 상황을 같이 겪고 있는 동료가 그 순간엔 둘도 없이 친한 사이가 되어 공감하면서 신세 한탄을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회사에서 힘든 일을 함께 겪으며 서로 위로했던 동료 중엔 제가 회사를 그만둔 뒤 멀어지거나 연락이 끊긴 사람이 많죠. 그렇다고 삶의 어떤 국면에서 가진 그 순간의 친밀함이 피상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순간의 친밀감을 여러 사람과 이어가면서 살아가는것 도 삶의 한 가지 방식 아닌가요?"

사람마다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전부 다른 것을 두고 남지원은 "친밀감은 식욕과 비슷한 것 같다"라고 표현했다. 충족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양은 있을지 몰라도 - P119

어떤 종류의 친밀감을 원하는지는 기질과 경험의 차이에 따라 다르고 색깔도, 총량도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친밀감에 대한 욕구가 클 거고, 결혼해 봤거나 낭만적 사랑에 근거한 친밀한 관계를 맺어본 사람은 그것을 원했던 적이 있으니 그리움, 결핍 같은 게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걸 원한 적이 없어서 그 삶을 몰라요. 제게 필요한 친밀감은 원가족과 친구들을 통해 채워지죠. 제가 겪어보지 않은 관계를 아쉬워하지 않기 때문에 낭만적 친밀감에 대한 욕구는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제 옷장에는 제 스타일의 옷들이 있는 거죠. 내가 입어보지 않은 옷을 두고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미니스커트도 입어볼걸 그랬다‘ 같은 식의 생각은 전혀 들지 않거든요." - P120

친밀한 관계가 주로 낭만적 사랑에만 국한된 것처럼 여겨져 온 것은,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가 지나치게 강력한 바람에 그것이 아닌 다른 친밀한 관계의 사례와 대안에 관한 이야기가 빈약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낭만적 사랑은 인간의 본성이라기보다 문화의 산물에 가깝다. 낭만적 사랑은 18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시인들이 사랑을 낭만화하면서 태어났고, 문학을 통해 확산했다. 그런데도 낭만적 사랑을 통해서만 사람이 온전해진다는 신화가 강고해서 다른 유형의 사랑의 중요성이 쉽게 간과된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삶에서 우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낭만적 사랑보다 과소평가된 면도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우정에서도 이른바 ‘베프(베스트 프렌드)‘나 ‘솔메이트‘ 등 ‘온리 원‘을 추구하는 경향을 종종 보게 되는데, 이 역시 낭만적 사랑에 대한 신화가 끼친 강력한 영향의 결과가 아닐까 짐작한다.
에이징 솔로가 친밀감을 추구하는 방식은 "식욕이 사람마다 다르듯" 저마다 달랐다. 원가족과 긴밀한 사람도 있고, 친구·공동체·스스로 만든 모임 등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를 구성하며 친밀감을 충족하는 사람들도 - P122

있다. ‘가장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없어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며 살아간다. 솔로도 친밀한 관계를 원한다. 다만 결혼이라는 제도로 묶인 관계를 원치 않을 뿐이다.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보다 각기 다른 친밀한 관계를 여럿 갖는 것이 삶의 만족도를 더 높여준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있다. 슬퍼서 위로가 필요할 때, 행복한 일을 같이 나누고 싶을 때, 불안을 누그러뜨려야 할 때 등등 서로 다른 감정을 나눌 각각의 관계를 여러 개 가진 사람이 그 모든 감정을 아주 가까운 소수의 관계에서만 나누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특정한 감정을 다룰 특정한 관계를 그냥 관계relationships 대신 감정 관계emotionships라 불렀는데, 그런 감정 관계의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갖는 것이 삶의 질을 더 높여준다고 했다. - P123

서울시에 사는 25~42세의 고학력 비혼 1인 가구 여성 14명을 심층면접한 김민지의 연구에서 원가족과 얼마나 가까운지와 별개로 비혼 여성이 생각하는 가족의 기준은 여전히 "원가족과 그들이 사는 공간"이었다.
연구자는 이들이 "가부장적인 정상가족에 비판적이고 혼자 살기를 통해 정상가족과 거리 두기를 하면서도, 대안적인 친밀성의 모델이 문화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서 가족 형성에 대한 전면적 부정과 정상가족의 추구 사이를 오가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 P134

가족이 아닌 친밀한 관계를 말할 때 ‘가족 같은 사이‘, ‘가족이나 다름없는 친구‘처럼 계속 가족을 기준으로 삼아 비교하는 사고방식도 새로운 관계의 상상과 확산을 어렵게 한다.
비혼 연구자인 지은숙 박사는 "공동체나 새로운 주거 형식, 새로운 연대의 방법을 생각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근대가족의 프레임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해서 300년 정도 유지되어 온 근대가족 프레임이 정서적 애착을 중심에 둔 삶의 모델이 되어버렸어요. 서양의 근대가족 모델은 커플 중심인 반면, 한국에선 자녀가 있어야 세트가 완성돼요. 특히 여성은 자녀와의 밀착감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요. - P135

오히려 커플 중심 관계는 선택지가 다양할 수 있어서 변화가 빠른데, 한국의 경우 자녀 중심인 근대가족 모델의 대체 불가능성이 너무 강력해서 변동도 느리죠. 비혼인 제 친구들에게서도 나이 들수록 부모에 대한 친밀성의 농도가 더 짙어지는 모습을 봐요. 자기의 역사, 존재를 확인하는 데 가장 많이 의지하고 평생 가장 오래 알아온 존재가 부모니까요. 저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난 사람은 아니지만 이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그는 비혼 여성이 나이 들수록 부모와 더 밀착되는 현상을 "수렁"이라고까지 표현했는데, 이 밀착된 관계가 솔로의 부모 돌봄 독박을 합리화하는 도덕적 핑계로 쓰이기도 하니 수렁이라 할 만도 하다. 뒤에서 에이징 솔로의 부모 돌봄 독박을 따로 살펴보겠지만, 기혼인 형제자매가 부모 돌봄을 솔로에게 떠넘기는 일도 잦은 한편, 본인 스스로 부모 돌봄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도리라고 여기는 에이징 솔로도 많다. - P136

가족에게서 독립하지 못했다기보다 전략적으로 가족 관계를 활용하는 에이징 솔로도 있다. 혼자가 된 여성 노인이 친척, 자매와 가까운 곳에서 살거나 함께 사는 것이 그런 경우라 할 것이다. 앞서 자신의 노후를 챙기겠다는 조카를 나무랐던 정세연 같은 솔로가 있는가 하면, 인터뷰를 사양했던 한 60대 초반의 비혼 여성은 자신의 집에서 서른이 넘은 조카와 함께 산다. 그는 조카에게 노후를 의탁하고 사후에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예정이라고 했다.
해외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솔로들이 기혼자보다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더 진지하게 생각하며 넓은 의미의 가족에게 시간과 노력을 많이 투자하는 방법으로 노후를 대비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성장 과정 내내 가족 안의 가부장적 폭력에 시달렸고 가부장제로부터의 탈주와 반격으로 - P138

비혼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가족은 끊어내야 하는 구속이자 극복해야 할 상처다. 에이징 솔로와 가족의 관계는 한마디로 단언하기 어려운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져 있는 셈이다. - P139

친구의 수와 관련해 가장 유명한 연구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형성하는 공동체의 규모가 어디에서나 150명에 수렴한다는 ‘던바의 수‘다. 이 수 안에는 여러 층위의 친구들이 포함된다. 원 안에 더 작은 원을 잇달아 그리듯 50명의 ‘좋은 친구들(파티 친구들)‘, 15명의 ‘친한 친구들(저녁 식사에 초대하거나 술집에 같이 가는 친구들)‘, 5명 가량의 ‘절친한 친구들(기대어 울 수 있는 친구들)‘로 좁아진다. 이 중 맨 안쪽의 원, 즉 5명의 절친한 친구가 나이들수록 집중되는 ‘관계의 핵‘이다." 던바에 따르면 이 ‘핵‘에는 친구, 가족, 반려동물, 푹 빠져 ‘덕질‘하는 가수, 신앙심이 두텁다면 각자가 믿는 신 등이 모두 포함된다. 어떤 대상이든 감정적 친밀감을 품고 자신의 내면에 가장 가깝다고 느끼는 대상이면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 친구가 없어" 하고 좌절할 필요도 없고, 숫자는 잊어도 좋을 것이다. 남지원처럼 영성에 기대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넓고 묽은 우정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여동생처럼 좁고 진한 우정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있다.
자신에게 친구가 충분한지 아니면 더 필요한지 스 - P150

스로 진단하는 방법도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마리사 프랑코Marisa Franco는 "당신의 정체성 중 일부가 억눌려 있다고 느끼는지를 스스로 살펴보라"라고 조언한다.

각각의 친구는 우리 안의 서로 다른 부분을 끄집어낸다. 다양한 친구 그룹과 함께하면서 골프를 사랑하는 자신의 이런 면, 꽃을 사랑하는 저런 면 등 다양한 자신의 특성을 스스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당신의 정체성이 위축되고, 당신 스스로 당신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유형의 친구가 필요하다는 신호다. - P151

비비가 30대에 처음 만나 50대가 되어 여성 노인 주거 공동체를 준비하기까지 어떻게 성장해 왔는지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들은 함께 잘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살면서 같이 정체성을 다듬고, 달라지는 생애주기를 함께 겪으며 삶의 파도를 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출산, 자녀의 취학, 졸업, 취업에 맞추어 부부의 생애주기가 변하듯 말이다. 가족 같으면서도 가족 같은 성격에 국한되지 않는 비비의 특징에 대해 마을은 다른 연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가족이란 말 말고 다른 말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단어가 없는 게 아쉬워요. - P165

가족에 비교하자면 가족보다 더 긴밀한 게 비비인데. 혈연적인 의미를 떼놓고 봐서는 사실 어느 부분에서는 가족 같은 게 분명해요. 그런데 가족이라고 표현하기에는 한정적인 것 같아요. 가족이라 칭하기엔 친구 같고, 친구 같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가족 같고, 또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동지적인 측면이 있잖아요. 미래를 같이 준비해 가는 사람이니까. 저에게는 가족보다는 훨씬 더 큰 개념으로 자리 잡은 것 같아요. 비비를 중심으로 미래를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원가족에게 잘하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여기(비비)를 기반으로 상상하고 있는 거죠."

서로의 꼴을 봐주는 공동체

이들은 비비가 크고 작은 일을 함께 겪어가며 긴 세월 유지될 수 있었던 힘으로 "공부와 돌봄과 여행"을, 그중에서도 "공부와 돌봄의 결합"을 꼽는다.

"비비의 한 친구가 암 투병을 하게 됐는데 - P166

그때부터 아픈 몸으로 사는 것을 주제로 같이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친구를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하는 공부였죠. 사실 가족이 병에 걸리면 공부를 해가면서까지 이해하려고 하지 않을 텐데, 공동체 구성원이 아프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공부하게 되더라고요. 아픈 친구가 자기 삶에 대해 생각하는 범위와 경험이 우리와 다른데, 아프지 않은 다른 사람은 ‘아프면 병원에 가서 수술받고 나온다‘와 같이 단순하게 생각하다 보니 아픈 몸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를 몰랐던 거죠. 모르면 아픈 친구에게 점점 더 공감하기 어렵고 ‘정상‘을 자꾸 요구하게 될 수도 있고요. 그래서 병원에 같이 가고 돌보는 수준을 넘어서서 같이 공부하기로 한 거예요. 시간이 좀 지난 뒤엔 다른 친구가 부모 돌봄을 하게 됐는데, 이번에도 부모 돌봄을 같이 고민하면서 공부하고 이걸 담론으로 만들 방법을 생각해 보고 하는 식이었죠. 각자의 생애 경험이 그냥 개인의 경험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되고, 함께 문제를 극복할 방법을 만들면서 - P167

지내왔다고 할까요." (마을)

마을의 이야기를 들으며 몸이 서서히 데워지듯 잔잔한 감동이 차올랐다. 비비에서는 누군가 아프면 중도하차하고 아프지 않은 사람들이 먼저 가는 게 아니라, 같이 멈춰 서서 아픈 친구의 일상을 이해하려 공부하며 애쓰고 서로 돌본다. 누군가 부모를 돌보는 부담이 늘어나면 공동체에서 빠지는 게 아니라 ‘부모 돌봄 자조모임‘을 만들어 서로의 고통을 나누고 위로한다. 그렇게 서로를 부축하고 서로에게 기댄다.
봄봄은 "비비의 가장 중요한 원칙은 모임으로서 우리가 무엇이 되어야 한다가 아니라 각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비비는 서로 격려하고 지지해 주는 안전한 관계, 안전한 공간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서로의 꼴을 봐주고 사는 공동체"라는 한마디로 명쾌하게 요약했다. - P168

그런 점에서 "폐 끼치고 다른 사람이 내게 기댈 수 있는 여지를 만드는 것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그건 정말 연습이 필요한 일"이라는 주얼의 말에 크게 공감했다. 마을도 "특히나 1인 가구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 못하는 말이 ‘도와줘‘라는 말"이라며 거들었다.

"비비를 운영하면서도 우리가 늘 도우면 도왔지 다른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청하는 입장에 처해본 적이 별로 없어서 그 말을 - P169

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도와달라고 말하면서 살아오지 않아서 그렇지, 도와달라고 하면 누구라도 도와준다고 생각해요. 도와달라고 말할 줄 아는 것이 도와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거죠. 그런 게 자기 돌봄이라고 생각해요. 성향에 따라 다르기도 하니까 너무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받을 줄은 알아야 해요.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누군가 손을 내밀고 나를 도와주려 할 때 감사하게 받을 줄 아는 것도 공동체 정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나는 꽤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살아가고 1인분의 삶을 스스로 감당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혼자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는 삶을 의미하는 거라면 독립을 협소하게 바라보는 태도라는 생각이 요즘에야 든다.
얼마 전 『이웃집 퀴어 이반지하』를 읽다가 작가 이반지하가 "내가 정말 1인분을 다 할 수 있었으면 사회가 필요 없다"라고 단호히 쓴 부분도 생각났다. - P170

우리는 순간순간 어떨 때는 0.8인분, 또 다른 상황에서는 내 깜냥으로 1.5인분을 할 때도 있는 거예요. 그렇게 얽혀서 사는 것이지, 지금 당장 내가 1인분인가 아닌가 꼭 그렇게 따질 필요는 없는 것 같아요. 순간순간 관계에 따라서 내 역할도 계속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혼자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역설적으로 혼자서만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려면 비비 구성원들의 말마따나 "서로 꼴을 봐주고", "폐 끼침을 주고받는" 연습이 필요하다. 내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지만 꼭 연습해야 한다고, 비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노후 계획 1번으로 마음에 새긴 일이다. - P171

"예전엔 일터의 스트레스가 집까지 고스란히 묻어 와서 먼지처럼 쌓이는 느낌이었는데, 텃밭에 모여 흙이랑 풀을 만지고 잡초를 뽑고 있으면 그 자체가 힐링이더라고요. 비가 오면 비 온다고 좋아하고, 가물면 가물었다고 - P173

걱정하고. 그렇게 우리가 같이 텃밭을 돌봤어요. 같이 김장도 하고 서로 일상을 파고드는 경험을 하면서 우정이 깊어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뿌리내리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더라고요. 셋 다 온전한 성인인데도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취급을 받고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기분이었는데, 이 3평짜리 텃밭에서 뿌리내린다는 느낌을 갖게 된 거죠." - P174

"친구들과의 관계가 텃밭에서 물리적 공간과의 관계 맺기로 이어지고, 이 경험이 마을에서 익숙한 얼굴들과 맺는 느슨한 관계로 확장되면서 마을에 비빌 언덕이 하나둘씩 늘어났어요. 비혼 여성이 안전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은 방범용 CCTV가 많은 동네가 아니라, 골목골목 익숙한 얼굴들이 많은 동네라는 생각이 들어요."

관계가 단단해지고 마을에 뿌리내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는 자신이 바뀌어 가는 걸 느꼈다고 했다.

"2022년 7월에 코로나에 확진됐는데 집에 비타민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텃밭을 같이 가꾸는 친구가 광명에 사는데 자기 집의 - P175

비타민을 다 싸 들고 은평구까지 와서 우리 집 문에 걸어놓고 갔어요. 다른 친구도 택배로 뭘 잔뜩 보내고요. 그런데 예전 같았으면 ‘아냐, 괜찮아, 오지 마‘ 했을 텐데 이번엔 친구가 온다고 하니까 ‘그래, 와줘‘라고 대답했어요. 제게는 그게 큰 변화예요. 제가 기댈 수 있게 된 거죠. 우리가 여행 친구에 그쳤더라면 그런 말들을 하기 어려웠을 텐데, 텃밭을 같이 돌보면서 우정이 깊어졌고, 어느 시점에는 각자의 집을 돌면서 친구가 해주는 걸 그냥 다 받아먹고 와도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괜찮아, 오지 마"가 "그래, 와줘"로 바뀌었다는 말. 나는 이 말이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자율과 독립을 가치 선반의 가장 높은 자리에 놓고 살아오던 사람이 굳건하게 믿는 상대에게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고 순하게 기대는 말, 로맨틱한 관계가 아니어도 가능한 사랑의 고백처럼 들려서였다. 아직 "괜찮아, 오지 마" 세계의 거주자인 나도 언젠가는 "그래, 와줘"의 세계로 건너갈 수 있게 될까. 그럴 수 있는 마음의 징검다리를 스스로 만들어 낸 그가, 문득 부러워졌다. - P176

월소득 200만 원이 넘으면 OECD 기준 중산층에 해당한다. OECD는 중산층을 "소득이 중위소득의 4분의 3보다 크고, 2배보다는 작은 사람"으로 정의한다. 즉, 아주 넉넉하지도 않고 몹시 어렵지도 않은, 보통의 경 - P191

제력을 가진 사람이다. 이 기준을 적용해 30여 년에 걸친 중산층의 변동을 계산한 민간연구소 랩2050 이원재 전 대표에 따르면 2022년 1분기를 기준으로 봤을 때, 1인 가구가 월 200만~540만 원(4인 가구는 400만~1,000만 원)을 벌면 중산층에 해당한다. 금액의 범위가 좀 넓다는 느낌이 드는데, 여기에 해당하는 사람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만난 19명의 에이징 솔로 중 3분의 2가량은 이 기준으로 중산층 범위에 들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들이 갖는 미래에 대한 경제적 불안은 소득에 좌우되지 않았다. 훨씬 중요한 기준은 주거 안정성이었다.
뒤에서 주거 문제를 따로 살펴보겠지만, 소형 아파트를 가진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장기간 주거가 가능한 공공임대아파트에서 살거나 전세이더라도 장기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을 확보한 사람들이 집 없는 고소득자보다 미래에 대해 훨씬 안정적인 전망을 갖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질 좋은 집에서 살 수 있는 권리가 확보되어야 하는 이유다. - P192

노후의 빈곤은 1인 가구의 미래를 넘어서는 문제 - P193

다. 한국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OECD에서 가장 높다. 노인이 받을 수 있는 공적연금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녀가 있는 노인의 상당수는 장기간 자녀의 값비싼 교육 비용을 부담해 왔기 때문이다. 가난한 노인 중에서도 비수도권에서 혼자 사는 여성 노인이 가장 가난하다. 젊어서부터 혼자 살아온 여성 노인보다 생애 내내 가족 뒤치다꺼리만 하느라 교육을 받거나 직업을 가질 기회가 없었던 기혼 여성이 배우자와 사별한 뒤 더 큰 곤란에 처하기 쉽다. 평생토록 자기 자신을 위한 소득과 자산을 축적할 수 없다가 혼자가 된 여성 노인의 가난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못하고 제대로 돌봄을 받지 못하는 고난으로 이어진다. ‘혼삶‘에 나이·성별·가난이 이중 삼중의 덫이 되는 가혹한 상황에 내몰리지 않도록 우리를 받쳐주는 것이 공공의 역할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정부가 제 역할을 하는 것을 본다면 가난한 독거노인이 될지 모른다는 에이징 솔로의 불안도 다독일 수 있을 텐데 말이다. - P194

거의 모든 한국인이 꿈꾸는 ‘내 집 마련‘은 다수의 1인 가구에게는 요원한 일이다. 통계청의 「2022 통계로 보는 1인 가구」에 따르면 1인 가구의 주거 형태는 월세가 42.3%로 가장 많았고 자가가 34.3%, 전세 17.5% 순서였다. 전체 가구의 자가 소유 비중이 57%인 것에 비해, 1인 가구의 자가 소유 비중은 낮은 편이다. 내가 만난 에이징 솔로의 경우 19명 중 5명이 자가 소유자이니 1인 가구 평균보다도 살짝 낮다.
1인 가구의 3명 중 1명이 자가 소유자라는 전체 통 - P197

계도 성별을 구분해 들여다보면 그림이 사뭇 달라진다. 지은숙 박사는 서울시가 2017년 발간한 성인지 통계로 40~50대 비혼 여성의 주거 상황을 엿볼 수 있는 지표를 추정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별에 따른 주택 점유 형태를 보면 여성 가구주는 월세, 자가, 전세 순으로 많지만, 남성 가구주는 자가, 전세, 월세 순이었고 자가가 50%를 넘었다. 또 여성 가구주는 20~50대에 월세 형태로 거주하는 경우가 많고, 60대 이상일 경우에만 자가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 반면, 남성의 경우 20대만 월세 거주 비중이 가장 높고, 30대에는 전세, 40~60대에 이르면 자가의 비율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주거 형태상 아파트에 거주하는 비중은 여성 가구주보다 남성 가구주의 경우가 훨씬 높았다. 이렇듯 주거 상황에서 드러나는 젠더 격차는 일차적으로는 성별 간의 생애 소득 격차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 가구주 중에 1인 가구가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인 가구의 주거 빈곤이 젠더 - P198

간의 주거 격차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분석과 앞에 인용한 통계청의 전체 통계를 종합해 보면, 결국 자가를 소유한 1인 가구는 대부분 남성이거나 남편과 사별한 60대 이상 여성일 가능성이 크고,다수의 40~50대 여성 1인 가구는 주거 빈곤을 겪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 박사는 "1인 가구라는 가족 형태에서 오는 차별, 성차별, 그리고 나이차별이 중첩되어 주거 사다리가 이미 끊어진 한국에서 ‘끊긴 사다리의 가장 밑바닥‘에 중년의 1인 가구 비혼 여성이 놓여 있다"라고 진단했다. - P199

어디서 사느냐 하는 문제는 비단 공간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비는 2010년부터 계속 비혼 여성들과 만나면서 각자가 가진 삶의 주요한 고민을 마주해 왔는데 "많은 경우 그 삶의 종착역이자 해법은 안정된 주거"라고 했다.
이들이 말하는 주거권은 내 소유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세 가지 요건을 갖춘 권리였다.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친구, 서로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는 이웃. - P207

그리고 내가 갑작스럽게 이동할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적정 규모의 집. 이 세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내용의 권리"가 비혼 여성이 바라는 주거권이라고 설명했다.
주거 안정성과 연결이 비혼 여성 주거권의 핵심이라는 뜻인데, 에이징 솔로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친구나 이웃과 가까이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원하는 형태와 방식은 모두 달랐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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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이렇게 웃긴가
이반지하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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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정신만이 혼자 세상을 감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반드시 육체를 적당히 혹사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함께 세상에 맞서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 삶을 지속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집 근처 (꺅) 게이 스피닝과 (욱) 부치 웨이트 학원을 차례로 체험하고 나자, 절대로 이 방향으로 가서는 안 된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좀더 기존 사회의 전형과 틀을 답습한, 너무 열려 있거나 전복적이지 않은 에너지였다. 대안적이지 않은 시간이 목말랐다. 그러니까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정상적인 분위기의 꽉 막힌 운동 사회가 필요했던 것이다. - P16

영상 속 그는 주먹을 날릴 때 팔만 뻗지 말고 허리와 엉덩이를 동시에 비틀어 온몸의 힘과 무게를 주먹에 실어줘야 상대에게 강한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자신만의 무기를 정성 들여 세공해왔던 그는 그 소중한 주먹을 고작 자기 아내의 얼굴을 때리는 데 사용했다. 코뼈가 산산이 부서진 아내는 이후 평생을 비염과 코골이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가 한 TV 프로그램의 캡처 이미지와 함께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와 있었다.

노트북을 잠시 덮었다.
그렇게 퀴어와 페미니즘을 거세하고자 했던 나의 마음에 대해 잠시만 명상. - P19

다시 노트북을 열어
구독을 취소.

그러나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디지털 복싱의 바다에 다시 한번 뛰어든다. 다시는 운동선수를 깊게 검색하지 말자 다짐한다.
모양만 보자, 모양만.
자꾸만 심연의 페미니즘이 여성 복서를 검색하게 한다.
핵심만 보자, 핵심만.
어쨌든 지금 그냥 막 잘 때리는 방법만을 배우고저 한다. 그 너머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간주해내고저 한다.

그러다 결국 깊은 깨달음에 다다른다.
나,
복서 될 수 없다.
나,
조금도 맞고 싶지 않다.
나,
오로지 패고만 싶다. - P20

세상은 예술을 응원할 리가 없었다. 성과를 가져와 누리고 싶을지는 몰라도 예술의, 예술가의 시간을 응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시간관념으로 돌아가는 세계를 인정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머리, 몸, 감정을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시간 대비 성과를 쭉쭉 뽑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이 사회의 - P29

노동과 시간의 개념은 예술의 그것과는 좀 다른 결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 셈 안으로 예술이 기꺼이 욱여들어가지 않는다.
세련되고 멋진 세상이 요구하는 적절한 방향으로 몸과 머리를 써 그 대단한 돈을 벌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나는 바로 작업에 뛰어들지 못하고 숨을 돌리고 싶어하는 나를 원망했다. 세상 사장님들이 요구하는 효율만큼 창작을 해낼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돈도 예술도 놓치지 않은 채, 나 자신을 충분히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일생에서 몇 번 정도 세상과 닿아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횟수가 아니라 면적이라면 어느만큼일까 생각도 해본다. 다른 삶들을 끊임없이 마주치고 있을지는 몰라도 내가 나의 예술이 그들과 정말로 만나고 있나 생각해본다. 접촉면은 사실 기대보다 넓지 않을 수도, 양쪽 다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아주 잠깐일 수도 있다.

나는 내가 삶의 시간 대부분을, 연결되지 못한 채 열렬히 닿고 싶어하는 그 애매하고 서투른, 벤자민 버튼식의 부적절한 상태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택하려는, 혹은 오래전부터 주어져버린 삶이라는 직업은 그런 모양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 - P30

지만 그것은 스물몇 살에게는 참으로 아득한 생각이었다. 아주 슬프고 답답하고 아득한 생각.
처음 카페에서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를 읽은 지 10여 년이 지났다. 카페는 사라졌고, 나는 아직 예술가로 살아 있다. 시간은 여전히 부딪친다. - P32

사장님이나 다른 알바분들의 대타가 필요한 때는 주로 오늘같은 명절이나 휴가철이었다. 모두가 아는 크고 작은 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나는 꽤 핫한 인력이 되었다. 만약 우리 모두가 정상이었다면, 모두의 가족이 때맞춰 정상적으로 지탱되는 일은 불가능 - P34

했을 것이다. 365일 24시간 편의점이 닫히지 않게 유지하면서, 각 정상 가정의 존폐를 주관하는 되게 보이지 않는 손이 바로 여기 이 비정상이셨다 이 말이다.
정상 가정들은 비정상 가장의 서포트 없이는 가족 행사 하나 말끔히 치러낼 줄 모르는 족속들이었다. 올해도 추석이 다가오자 정상들은 비정상의 스케줄부터 먼저 체크하려 들었다. 나는 약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본다. 왜 이렇게 일과 가정을 양립 못하고 이러실까. - P35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 반갑다.

산뜻하고 따뜻한 봄 같은 반가움은 아니다. 분명 멀리멀리 떠나왔지만 여전히 같은 맛을 내는 프랜차이즈 햄버거와의 재회같은 반가움이다. 맛있다. 맛없다 등의 감상 영역은 지난 지 오래인채 그냥 그 맛. 그냥 바로 그 맛. 몸속 어디에 묵혀둔 잊지 않고 있던 감각이 자극된 반가움. 그것이 바로 죽고 싶다는 생각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만사가 힘들어진다. - P36

세상은 죽고 싶은 사람을 위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은 곧 참는 생각이 된다. 오줌을 싸갈기듯 저질러버리고 싶지만 꾹 참는 생각이 된다. 온통 살아 있는 것에 둘러싸여 매 순간 얼른 화제를 돌려보려는 의지가 된다. 한편, 그런데,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그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어디선가 배운 대로 죽고 싶다는 말을 애써 다르게 표현도 해본다. 지쳤다. 때려치우고 싶다. 배고프다. 피곤하다, 아니 사실은 재가 죽어야지 등등. 이렇게 죽고 싶다를 변주할 수 있으면 어물쩍 살아진다. 다룰 수 있게 된 듯 느껴진다.

살아있는 상태를 잊어야 자연스럽게 살아진다.

죽고 싶어지면 살아 있는 상태를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그때부터 삶이 어색해진다. 문득 내가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지금 내가 ‘살‘이구나, 이게 아니면 죽음이겠구나. 그렇게 그 어떤 것보다도 ‘살아 있다‘는 개념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홱 패대기치고 싶어진다. 그것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조금 싸구려이다. - P37

순도 백프로의 다이아처럼 오롯이 한 가지로 빼곡하다기보다 아주 많은, 낮은 픽셀의 불순물들이 죽고 싶다는 생각 옆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구질구질한 바람들이 너덜너덜 붙어 있다. 꾀죄죄한 고온의 수치심도 끼여 있다.

맛의 속성이나 결과와 무관하게 그때 그 햄버거를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알고 보니 그 맛은 정말 많은 가맹점을 가지고 있어서 삶의 골목 여기저기에 지어져 있었다. 아, 이게 여기도 있었구나 하며 무심코 들어가 사 먹고는, 그래 내가 알던 그 맛이네, 한다. 그 맛을 음미하면, 그 맛은 있다고 해야 할지 편안하다고 해야 할지 그리웠다고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가끔 다른 이에게도 그 햄버거 얘길 하고 그도 그걸 먹어봤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같은 햄버거 얘기를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 P38

매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기 바쁜 퀴어들에게 어른이 귀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우리는 툭하면 고작 5년, 10년 터울의 윗세대 혹은 그 이전 세대를 소환하며 그들에게 퀴어른 노릇을 바라거나 그냥 덜컥 맡겼다. 세상에 조금 먼저 와 살아남은 그들에게 분명 뾰족한 수가 있을 거라 믿었다. 사회와 친족이 철저히 감당을 실패한 원망과 하소연받이 역할을 떠넘겼고, 태초부터 맡겨놓은 지지를 뻔뻔히 요구하는 와중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생색을 내는 것 같으면 가차없이 재수없어하기를 잊지 않았다. 분명 누구에게나 위험하고 어려운 자리에 적어도 나보단 앞서서 방패막이가 되어주길 기대하며 그들의 옆구리를 습관처럼 찔러댔다.
물론 그 모든 것은 너무나 온당하고 그럴 법한 일이었다. 어느 커뮤니티에나 있을 법한 흔하디흔한 세대와 마음의 역동이었다. 하지만 가끔 우리는 우리 모두가 평생토록 온당한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잊는 듯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시민 대접을 해주지 않는 사회에 인간 대접을 해달라 몇 년을 외치다 뒤를 돌면, 어느새 나보다 그닥 어리지도 특출나게 귀엽지도 않은 퀴어놈들이 - P45

떼로 몰려나와 어르신 어르신 하며 인간성과 시대를 뛰어넘는 지혜와 인내를 요구한다. 마땅히 어른 대접을 받아야 할 곳에선 끊임없이 철부지 어린애 취급을 받고, 아직 그 밥에 그 나물이고 싶은 곳에선 갑자기 실제 나이의 몇 배나 되는 선조 노릇을 요구받는다. 한마디로 퀴어른이란 참으로 좃같은 일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지금 건넛상에 앉아 성성한 흰머리를 얹고 꼿꼿이 소맥을 자시고 계신 주름진 분들께 자꾸만 마음을기대는 일을 참아낼 수 없다. 그 한줌의 이들에게,
"아, 제발 쫌 죽지 말고 늙기만 하세요!!!"
라고 외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오늘만은 나보다 한 살이라도 많은 이들을 모조리 찾아내 되도 않는 애교와 어리광을 권력처럼 부려대고 싶어진다. 당신들의 죽음은 영원히 이르다며, 해준 것도 없는 주제 특유의 뻔뻔한 어깃장을 놓고 싶어진다.

그리고 또다른 건넛상에서 울음소리로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피자가 살려낸 이들을 본다. 피자가 있어 피자의 장례에 올만큼 늙어낸 사람들을 본다. - P46

촘촘히 벽에 붙어가는 검은 리본의 행렬, 그리고 거기에 적힌 정의로운 이름들을 보며 나와 같은 상에서 밥을 먹는 이들과 절대로 위대해지지 말자는 다짐을 나누고 난 후, 나는 이 모든 사람들 틈에서 언제쯤 죽어도 될지 눈치 게임을 시작해본다.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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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님이 보고 계셔 - 홍칼리 무당 일기
홍칼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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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이 된 나를 걱정하는 상상과 다르게, 나는 행복해서 무당을 하고 있다. 무당이 된 후 가장 좋은 점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존재를 끌어안을 수 있고 정화할 수 있는 이 직업이 좋다. 낮에는 따뜻하게 사람들을 감싸고 밤에는 고요하게 기도할 수 있는 일상이 행복하다.
이 달콤한 케이크를 계속 먹고 싶어서 무당이 된 것 같다.
이 케이크를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싶다. - P8

내 몸은 내 신당이다. 나의 신당에는 그림이 많다. 이곳에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지우지 않을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손님들에게 고유한 기운을 담아 부적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부적을 만들어 신방에 걸어놓았다. 그림 많은 나의 몸은 그 자체로 부적이 된다. 손님들이 부적 타투 디자인을 의뢰하기도 한다. 나는 손님에게 꼭 필요한 기운을 디자인해 평생 간직할 타투 부적을 그려준다.

차별받고 밀려난 몸들이 나를 방문한다. 무당은 신이 되어 왕처럼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과신 외의 모든 것 사이에 서서 낙인찍힌 몸까지 끌어안는 존재다. 다양한 몸들과의 만남이 오늘도 설렌다. 그래, 내가 이래서 무당이 된 거지. - P41

나는 세상이 궁금하고 다른 이들이 궁금해서 표현을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 무당이 있다. 당신을 꿰뚫는 게 아니라, 당신도 잘 모르는 당신의 사연을 만나고 싶어서 무당이 됐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흥과 한을 나누는 직업을 가진 무당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기존의 이미지를 넘어 내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무당 일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렇다. 무당이라는 이름표에 묻은 이런저 - P91

런 편견을 물어보고, 나아가 따져보면서 얼룩을 벗겨내고 싶다.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흥얼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내 몫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당 홍칼리입니다." - P92

굳이 수식어를 붙이자면, 커리는 귀신을 보는 개가 아니라 보호자인 나를 잘 지켜보는 개다. 나는 커리의 보호자지만, 커리도 나를 돌본다. 커리와 산책하러 다녀오면 나는 흙이 묻은 커리의 작은 발바닥을 닦아주고, 드라이어로 말려준다. 내가 아플 때 커리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나의 얼굴과 손을 핥아준다. 그런 커리의 체온에 통증을 잠시 잊는다.
나와 커리는 세상 많은 존재가 그렇듯 혼자 우뚝 솟은 게 아니라, 연약한 몸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커리와 함께 사는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여서요"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무당도 돌봄을 나누며 살아가는 지구의 구성원 중 하나라는 걸, 나는 이 새삼스러운 사실을 꼭 짚어야 한다. - P111

모든 제물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물을 바친 사람은 그보다 배로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온전히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덕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는 당연한 말처럼, 굿에도 그런 이치가 작동한다. 굿은 무당이 신을 대접하는 무속의례로, 꼭 신만이 아니라 굿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위해 한을 풀거나 흥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굿을 하는 행위 자체가 먹을 것 없는 동네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위였기에 더 효험이 있었을 거다. 게다가 지금처럼 공장식 축산이 없었기에 굿판에 올라오는 돼지에게도 한이 덜했을 거라고 느낀다. 돼지를 죽일 때는 돼지를 위해 기도를 올렸을 거다. 그 돼지를 나누어 먹으면서 사람들은 감사함을 느끼고, 좋은 에너지를 교환하기도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국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돼지는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다. 좁고 더러운 축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먹기만 하다가 살 수 있던 생보다 훨씬 짧게 머물고는 죽임을 당한다. 이제는 손쉽게 값싼 돼지고 - P130

기를 구할 수 있다. 그들은 효험 있는 ‘제물‘이 아니다. 이미 이 세상의 희생자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물로 생산되는 돼지를 굿판에 또 올리는 건 이미 죽은 존재를 다시 한번 난도질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아닐까.
돼지뿐 아니라 닭, 오리, 소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들은 평생햇볕 한 줌 못 보고 몸이 겨우 들어가는 케이지 안에 갇혀서 강제로 임신당하고 생산성이 줄어들면 고기로 도축된다. 사육장에는 그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그들의 고통은 한이 되어 몸에 저장된다. 우리는 식탁 앞에 놓인 그들의 한을 먹는다. 돌고 도는 한의 수레바퀴를 끊어내는 게 무당의 역할이라면, 나는 어떻게 이 광경을 마주해야 할까. 신령이 정말 억울하게 죽은 생명의 한을 먹고 싶어할까?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비거니즘을 결단하고 실행하는 게 신령의 힘 아닐까?

비건은 단순히 고기를 안 먹는 생활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 그 상태로 살아가겠다는 지향이다. 들리지 않는 고통에 귀 기 - P131

울이고, 내가 등진 아픔은 없는지 살피는 태도다. 공장식 축산으로 살아서 고통 받고, 인간이 만든 환경 때문에 병에 걸리고, 도축되거나 살처분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은 뉴스에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그들의 넋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무당마저 그들의 고통에 고개를 돌리면, 누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까.

나는 굿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손님에게 동물을 올려야하는 굿판 대신 봉사활동을 하라고 말씀드리곤 한다. 봉사하는 것이 굿을 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굿을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면 돼지 머리나 닭의 살점이 필요하지 않은 굿판을 열면 된다. 나물 반찬과 과일로 꾸려진 제사상에 향을 피우고, 억울하게 죽은 돼지와 오리,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함께 열고 싶다. - P132

무당은 인간과 신 중간에 있는 존재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생활하는 무당은 어쨌든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많은 노동자가 그렇듯, 많은 무당도 불평등한 운동장을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런 무당의 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으면 좋겠다. - P139

무속신앙에는 뚜렷한 선과 악이 없다. ‘허주‘라는 잡귀신은 ㅆ지만 그 존재도 한을 품은 혼일 뿐이다. 우리는 그 존재를 내쫓기 위해 칼을 휘두를 수도 있고 불을 지르거나 닭 머리를 잘라서 살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전부가아니며, 전부여서도 안 된다. - P153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에너지도 그렇다. 차별받기 쉽고 존재가 지워지는 위치에 있는 어린 소녀가 늘 악령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퇴마의식이 아니라, 그들이 죽겠다고 소리 지르지 않아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회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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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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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를 시작하기 전 나는 그들과 나의 삶이 무관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커피를 좋아해서 공정무역 커피와 아프리카산자들의 삶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깻잎밭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표정이 어떤지는 몰랐다. 동물복지 제품을 고르며 스스로를 ‘가치‘ 소비자로 여긴 적도 있지만 그 동물을 다루는 손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유기농, 무농약, 친환경, 로컬푸드, 동물복지, 무항생제 같은 표시에만 안심하며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기를 주저한 시간들이었다.
4년이 넘게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그들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해 있음을 보았고, 그들의 눈물로 우리의 - P13

밥상이 차려지고 있다는 현실도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우리 밥상 위의 인권이다. 이주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그들이 처한 문제를 같이 고민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따뜻한 밥상을 차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본다. - P14

사람이 온다는 건 한 사람의 일생이 오는 것이라는 시구를 좋아한다. 이주노동자는 단순히 ‘인력‘이 되어 우리 사회의 노동력 빈칸을 메우러 오는 것이 아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한 보따리 짊어지고 오는 사람들이다. 그 보따리 안에는 삶도 있고, 꿈도 있고, 울음도 있고, 웃음도 있다. 특히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있다. 이주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밥상도 건강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P15

앞서 언급한 컨테이너 2개로 만든 집에 다섯 명의 노동자가 살면 얼마를 기숙사비로 내야 할까? 한 사람당 기숙사비 약 15만 원에 각종 공과금 5만 원을 더해 약 20만 원씩 내야 한다. 열 평 남짓 화장실도 없는 그 집에 고용주는 이주노동자로부터 월세 1백만 원을 합법적으로 받을 수 있고 실제로 그랬다.
단독 주택이나 빈집을 개조해 기숙사를 만든다면, 이는 상시 주거 시설로 간주되어 고용주는 한 사람당 월급의 15퍼센트인 약 30만원을 받을 수 있다. 여기에 전기세, 수도세, 인터넷통신비 등을 합하면 한 사람당 5만~10만 원이 추가된다. 따라서 이주노동자 다섯 명을 고용한 사업주가 농촌의 빈집을 고쳐 기숙사로 제공하면 월세 2백만 원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서울 한복판에 있는 집의 월세가 아니다. 농촌의 논밭 한가운 - P32

데 다 쓰러져 가는 폐가를 대충 고쳐놓은, 한겨울에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집의 월세가 2백만 원인 것이다.
이주노동자는 월급에 비례해서 기숙사비를 내기에 매년 최저임금이 올라도 월급 인상 액수가 그리 크지 않다. 세입자의 월급이 올랐다고 해서 그때마다 집주인이 월세를 올려 달라고 요구한다고 생각해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들은 좁고 더러운 공간에 여럿이 함께 살면서도 어마어마한 월세를 낸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한국인에게 상식적이지 않은 정책은 이주노동자에게도 부당한 정책이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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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투쟁기 -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한 1500일
우춘희 지음 / 교양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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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도급제는 불법이죠. (나: 네? 불법이라고요?) 네. 박스당 가격을 매기니까 그런 도급제는 불법이죠. 그런데 이만큼 깻잎을 따주지 않으면 우리가 남는 게 없어요."
고용주연합회의 한 임원이 한 말이었다. 한 사업주는 "우리가 하는 일은 법이랑 맞지 않으니까"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힘없는 농민들이 "힘을 합치고 단합해서" 농업 "실정에 맞지 않는"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야 하며, "우리(농민)끼리 룰(규칙)을 정해서 외국 애들 꼼짝 못 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부 소수의 고용주만 이런 인식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내가 만나본 한 고용주는 고의적 임금 체불을 시인하며 이주노동자들은 자기 나라로 곧 떠날 것이기 때문에 돈을 안 주어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주노동자를 고용해서 돈을 제법 벌었지만 여전히 이들에게 최저임금을 주는 것이 불만이었고, 어떻게든 법을 어기면서까지 이주노동자들을 조금이라도 일을 더 시키고 월급을 덜 줄지 궁리하는 고용주도 있었다. 성희롱을 일상적으로 저질렀지만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업장 변경은 안 된다고 소리친 고용주도 있었다. 또 다른 고용주는 근로기준법 위반과 갑작스런 해고 통보로 인한 해고 예고 수당(근로기준법 제26조에 의해 사용자가 적어도 30일 전에 예고하지 않고 해고했을 때 지 - P83

급해야 하는 30일분 이상의 통상 임금)을 더해 합의금을 물어주게 되자 "농민이 당했다"고 표현했다.
사업주들과 인터뷰할 때마다 "농민은 힘이 없다" "농민이 힘들다" "농민이 피해를 본다" 같은 표현을 많이 들었다. 그들은 ‘피해자/약자는 농민‘이라는 생각이 강해 보였다. 우리나라 절대 다수의 농가 형태가 기업농이 아닌 가족이나 소농인 것을 감안하면 농민들이 소득이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 이에 우리 사회에서는 정책적으로 농업인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다. 대부분의 농업인들은 "직불금부터 시작해 각종 보조금과 유류·전기세 혜택, 국민연금·의료보험 감면, 농협 조합원가입이나 농자금 대출"을 비롯해 각종 정부 지원과 세제 혜택을 받는다.
농민이 아무리 사회에서 인정하는 약자이고 농가의 현실이 아무리 열악하더라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것까지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들은 고용주가 지켜야 하는 법에 대해 귀를 기울어야 한다. 이주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생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 P84

내가 만난 일부 사업주들은 이주노동자에게 공짜 노동을 시키며 사실상 최저임금을 주지 않으면서 그마저도 주는 것에 불만을 토로했다.
"쟤네(이주노동자들) 못사는 나라에서 왔어. 캄보디아에서는 한 달 최저 월급이 20만~25만 원인데 여기에서는 일고여덟 배 더 벌어가잖아. 그러니까 한국인과 똑같이 최저임금을 적용하면 안 되지. 쟤네 월급 조금만 줘도 여기서 일할 거잖아. 쟤네 퇴직금도 받잖아. 한국만 손해 본다니까." - P92

매년 최저임금 책정을 두고 보수 언론과 경영계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을 주장한다. 소상공인이나 영세 사업자의 임금 인상부담을 완화하고 노동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약한 이들의 고용을 촉진하기 위해, 주로 지역·업종·규모별로 차등하거나 다소 생산성이 낮은 청년과 고령자를 차등 적용하자는 제안이다. 농업인 사업주도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해야 한다고 목소리 높인다. 이에 대해 2019년 9월 캄보디아에서 만난 한국산업인력공단 캄보디아EPS(고용허가제)센터 여동수 센터장은 이렇게 말했다.
"고용허가제는 ‘원조‘가 아닙니다. 내국인이 일하지 않는 곳에서 외국인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저임금으로 노동력을 공급받으니 오히려 우리가 더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최저임금보다 더 낮게 임금을 주는 것은 차별입니다."
고용허가제는 외국인 고용을 신청하는 사업주에게 내국인 구인 노력을 의무화하고 있다. 그 취지 자체가 내국인(선주민)이 일하지 않는 곳에 외국인(이주민)을 고용한다는 것이다. 선주민이라면 최저임금을 받고 일하지 않을 곳에 이주노동자가 그 자리를 촘촘히 메우고 있다. 여동수 센터장의 말대로, 한국과 사업주 입장에서는 최저임금으로 구하지 못할 노동력을 이주노동자가 제공하니 더 혜택을 보는 셈이다. - P93

캄보디아 출신 여성 노동자 비스나(20대) 씨에게 한국의 사업주들이 외국인 노동자에게 한국인 노동자보다 낮은 최저임금을 주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는 눈을 부릅뜨며 내게 반문했다.
"그래요? 우리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최저임금의 절반만 준다고요? 그럼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세금도 절반만 낼게요. 못사는 나라에서 왔으니까 음식 값도, 버스 값도 절반만 낼게요. 그러면 될까요?"
비스나 씨의 지적대로 이주노동자가 ‘못사는 나라‘에서 왔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보다 최저임금을 더 적게 책정해야 한다면 식비, 주거비, 교통비, 각종 세금도 더 적게 내야 할 것이다. 이주노동자가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것이 이주노동자에게 최저임금보다 더 낮은 급여를 주어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 P94

2019년 고용노동부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타당하지 않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최저임금위원회는 최저임금 차등 적용이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전문가 18명으로 구성된 ‘최저임금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를 꾸려 그 타당성을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다수의견은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어렵다는 것이었다. TF의 권고안에는 자세한 이유가 나와 있다. 업종별 구분은 어떤 업종을 차등하든 그 타당성을 찾기 어려운 데다 최 - P95

저임금보다 낮은 저임금 업종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낙인 효과가 발생한다. 지역별 구분은 사람들이 그 지역에 가서 일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들 것이고 지역 균형 발전을 저해할 수 있다. 연령별 구분은 우선 청년층의 생산성이 다른 연령에 비해 특별히 낮지 않기에 임금을 감액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 고령층에 대한 감액은 연령을 이유로 한 차별이자 다른 선진국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다(최저임금을 차등 적용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의 일부 주의 경우 주로 17~20세 미만 노동자에게 일정 기간에 한해서만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권고안에는 이주노동자 차등 적용은 국적, 인종과 관계없이 균등한 대우를 규정한 국제노동기구 제111호 차별 협약에 위반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외국인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일자리를 구하는 국내 노동자에게도 결코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다. 사업주는 더 적은 임금을 주면서 이주노동자를 고용하려고 하지 내국인 채용을 꺼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악영향을 문제 삼지 않더라도 본질적으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어긋난다. 최저임금은 한국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국적, 인종, 성별, 성적지향 등에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받아야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저‘ 기준이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 지급은 ‘차등‘이 아니라 ‘차별‘일 뿐이다. - P96

고용허가제를 새로 도입함으로써 산업연수생제도의 폐해가 일부 해결된 것은 사실이지만 고용허가제 역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 이주노동자를 옭아매는 조항 때문에 비판을 많이 받는다.
가장 문제가 되는 조항은 바로 사업장 변경 권한이 사업주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는 점이다(외국인고용법 제25조 제1항). 사업장 변경 제한은 우리 헌법에서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노동자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강제 노동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지적을 오랫동안 받아 왔다. 앞 - P117

서 설명했듯이 이주노동자가 사업장을 변경하고 싶으면 근로계약해지에 대해 사업주의 동의를 얻거나 아니면 사업주의 위반 사항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 사실상 이주노동자는 사업주가 동의해주지 않으면 일자리를 옮기고 싶어도 갈 수가 없는 셈이다. - P118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읽는 동안 많은 이주노동자의 얼굴이 스쳐갔다. 전북 미나리밭에서 일을 한 캄보디아 남성 노동자 두 명은 한겨울에도 물이 차 있는 밭에 고무장화를 신고 들어가서 미나리를 수확했다고 말했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고용주에게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더니 사업주는 1백만 원을 내놓고 가라고 윽박질렀다고 했다. 전남 담양 딸기밭에서 하루 12시간 넘게 딸기를 따다가 정말 이렇게 일하다가는 죽을 것같다는 생각에 ‘지구인의 정류장‘으로 도망친 여성 노동자도 있었다. 경남 깻잎 밭에서는 하루 10시간씩 매일 깻잎 1만 5천장을 따야 하는데, 정해진 양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에서 깎는다며 도움을 요청한 이주노동자가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떡집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는 근로계약서에는 오후 3시부터 12시까지 일한다고 나와 있는데, 새벽에 갓 만든 신선한 떡을 납품해야 한다는 이유로 오후 5~6시쯤부터 새벽 4~5시까지 하루 - P123

12시간을 일하고 한 달에 하루만 쉬었다고 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입에 들어가는 떡을 밤새 만들어냈지만, 정작 본인들은 일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적도 많다고 하소연했다. 이들은 모두 사업장을 옮기고 싶었지만 고용주가 사업장 변경에 동의해주지 않아서 발이 묶여 있었다. 고용허가제는 그리고 우리 사회는 사실상 이들의 강제 노동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우리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일까? - P124

그동안 정부는 이주노동자의 인력만 이용할 뿐 그들이 한국에 정주해서 살 수 있는 기회는 결코 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 왔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인력‘만을 요구한다. 이주노동자의 삶은 ‘영원히 일시적인(permanently temporary)‘ 상태이다. 이주노동자는 한국에 와서 일을 하지만 여기에서 정착해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지는 못한다. 정해진 기간이 다 되어 비자가 만료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며, 그 빈자리를 다른 이주노동자가 와서 채운다. 그러나 이주노동자는 단순히 ‘인력‘ 그 자체가 아니다. - P127

이주노동자는 그의 손과 더불어 그의 일생이 함께 온다. 이 나라의 국민은 아니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먹고, 축제를 열고, 마을과 사회에 어울려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이주노동자가 온다는 것은 단순히 ‘인력‘이 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오는 일이다. 이주노동자의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 P128

아이러니하게도 인력사무소의 세계에서 미등록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최저임금이 보장되어 있었다.
인력사무소의 노동자들은 터무니없이 낮은 돈을 주는 곳에서는 일하지 않는다고 했다. 제대로 된 돈을 받고 일하는 것, 곧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따라 일할 곳을 정하는 것, 김동규 씨의 말마따나 이곳에서는 그들의 ‘인권‘이 보호되고 있었다. - P175

고용허가제 업무 편람에 따르면 이주노동자가 성폭행 피해를 이유로 사업장 변경을 신청할 경우, 고용 센터에서 조사 후 피해 사례가 인정되면 ‘긴급 사업장 변경‘이 허용된다. 피해자의 진술 외에 증거가 없을 경우 상담 기관에서 상담을 받도록 안내하고 그 상담 결과를 토대로 삼아 사업장 변경 여부를 판단한다. 이 모든 사업장 변경 절차는 신속하게 진행하기 위해 3일 이내에 마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수사 결과 허위나 거짓(혐의 없음)으로 판정이 날 경우, (긴급하게 사업장을 변경한 경우에도) 악용 사례 방지를 위해 해당 이주노동자에게 ‘불이익‘을 부과한다. 새로운 사업장 알선을 중단하거나 고용 관계 해지후 출국 조치를 단행하는 것이다.
‘이주인권사례연구모임‘에서 2020년에 펴낸 <고용허가제 업무편람 다시쓰기》에서 지적한 대로 "성폭력 피해자의 신고가 - P191

접수되면 원칙적으로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를 위하여 필요한 조치로 긴급 사업장 변경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고용 센터는 "수사나 법률의 해석 및 판단을 하는 기관이 아니고, 이에 대한 권한도 없다." 또한 "성폭력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지원하고 사례를 다룰 수 있는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고용센터의 공무원에게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볼 수 없다. 추가 피해나 보복 행위를 막기 위해서라도 빠른 분리가 필요하다.
게다가 ‘혐의 없음‘이란 판정만으로 이주노동자에게 불이익 조치를 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혐의 없음‘이란 피의 사실이 범죄로 인정되지 않거나 피의 사실을 인정할 만한 충분한 증거가 없는 경우를 의미하며(검찰사건사무규칙 제69조), "검찰도 혐의 없음의 결과만 가지고 거짓 고소로 유추하지 않는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둘만 있는 공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 이외에 물적 증거가 확실치 않아서 법적인 입증이 어렵다. 상황이 이러한데 한국말이 서툴고 한국 문화도 낯선 이주노동자가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혐의 없음‘을 근거로 출국 조치를 한다면, 사실상 성폭행 피해신고 자체를 막는 효과를 가져올 뿐이다. - P192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현재 건강보험 의무 가입 제도가 인종 차별적이라고 비판했다. 첫째, 2020년 기준으로 보험료가 최소 113,050원으로 높게 책정되어 있다. 내국인은 소득과 재산 수준에 따라서 보험료가 산정되지만 외국인은 이런 과정 없이 내국인 보험 가입자의 평균 보험료를 낸다. 2017년 기준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월평균 근로소득은 147만 원으로 내국인의 67퍼센트밖에 안 되지만, 보험료는 내국인의 평균 보험료와 똑같이 냈다. 외국인은 더 적게 벌고 상대적으로 보험료를 더 많이 내는 셈이다. - P201

둘째, 내국인은 배우자, 직계존속, 직계비속 등이 피부양자로 묶일 수 있지만, 외국인은 배우자와 미성년 자녀만 피부양자로 묶일 수 있다. 따라서 성인인 외국인 자녀가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 세 명 각자에게 113,050원으로 보험료가 부과되어 한달에 적어도 339,150원을 내야 한다.
셋째, 보험료가 체납되면 체류 자격에 불이익을 준다. 보험료가 3회 초과 체납되면 비자 연장이 안 되고 출국 조치를 당할 수 있다. 건강보험료를 체납하면 의료 시스템 사용에 불이익을 주어야지(보험료를 완납할 때까지 건강보험 급여가 제한되기에 의료 시스템 사용에도 불이익을 주고 있다), 이주민의 체류 자격까지 엮어서 불이익을 주는 것은 합당한 조치가 아닌 명백한 차별대우이다.
넷째, 이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이렇게 보험료를 매달 내더라도 이주노동자들은 이에 합당한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주민의 의료 서비스 접근을 위한 정책 지원이 대단히 부실하다. 기본적인 통역 서비스조차 거의 지원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건강보험료 납부에 대한 정보 제공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 P202

그러나 오래전부터 유엔, 국제노동기구, 국제이주기구, 유럽연합 등 국제 사회에서는 초과 체류한 이주민을 ‘불법 체류자‘라 부르는 것은, 그들을 ‘불법적인 존재로 낙인찍어 혐오를 조장하기에 ‘미등록‘ ‘비정규‘ 같은 중립적인 용어로 써야 한다는 논의가 제기되어 왔다. 초과 체류의 문제는 행정 절차 위반이지 형사상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체류 문제가 적발되면 정부가 정한 절차에 따라 조치를 취하면 된다. 교통 법규를 위반한 운전자에게 ‘불법 운전자‘라고 하지 않듯이, 초과 체류한 이주민에게 ‘불법 체류자‘라고 할 필요가 없다. 국내 인권·이주단체에서도 사람의 존재 자체가 ‘불법‘일 수 없기 때문에 ‘불법 체류자‘ 대신 ‘미등록 이주민‘ ‘미등록 노동자‘라는 표현을 사용해 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미등록 체류자‘ ‘미등록 노동자‘라는 표현을 권고했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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