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당이 된 나를 걱정하는 상상과 다르게, 나는 행복해서 무당을 하고 있다. 무당이 된 후 가장 좋은 점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존재를 끌어안을 수 있고 정화할 수 있는 이 직업이 좋다. 낮에는 따뜻하게 사람들을 감싸고 밤에는 고요하게 기도할 수 있는 일상이 행복하다. 이 달콤한 케이크를 계속 먹고 싶어서 무당이 된 것 같다. 이 케이크를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 싶다. - P8
내 몸은 내 신당이다. 나의 신당에는 그림이 많다. 이곳에는 절대 지워지지 않는, 지우지 않을 상징들이 새겨져 있다. 손님들에게 고유한 기운을 담아 부적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부적을 만들어 신방에 걸어놓았다. 그림 많은 나의 몸은 그 자체로 부적이 된다. 손님들이 부적 타투 디자인을 의뢰하기도 한다. 나는 손님에게 꼭 필요한 기운을 디자인해 평생 간직할 타투 부적을 그려준다.
차별받고 밀려난 몸들이 나를 방문한다. 무당은 신이 되어 왕처럼 군림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과신 외의 모든 것 사이에 서서 낙인찍힌 몸까지 끌어안는 존재다. 다양한 몸들과의 만남이 오늘도 설렌다. 그래, 내가 이래서 무당이 된 거지. - P41
나는 세상이 궁금하고 다른 이들이 궁금해서 표현을 시작했다. 그 연장선에 무당이 있다. 당신을 꿰뚫는 게 아니라, 당신도 잘 모르는 당신의 사연을 만나고 싶어서 무당이 됐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흥과 한을 나누는 직업을 가진 무당 스스로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기존의 이미지를 넘어 내가 존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글을 ‘무당 일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그렇다. 무당이라는 이름표에 묻은 이런저 - P91
런 편견을 물어보고, 나아가 따져보면서 얼룩을 벗겨내고 싶다.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흥얼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내 몫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무당 홍칼리입니다." - P92
굳이 수식어를 붙이자면, 커리는 귀신을 보는 개가 아니라 보호자인 나를 잘 지켜보는 개다. 나는 커리의 보호자지만, 커리도 나를 돌본다. 커리와 산책하러 다녀오면 나는 흙이 묻은 커리의 작은 발바닥을 닦아주고, 드라이어로 말려준다. 내가 아플 때 커리는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나의 얼굴과 손을 핥아준다. 그런 커리의 체온에 통증을 잠시 잊는다. 나와 커리는 세상 많은 존재가 그렇듯 혼자 우뚝 솟은 게 아니라, 연약한 몸으로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커리와 함께 사는 이유를 굳이 말하자면, "우리가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여서요"라고밖에 답할 수 없다. 무당도 돌봄을 나누며 살아가는 지구의 구성원 중 하나라는 걸, 나는 이 새삼스러운 사실을 꼭 짚어야 한다. - P111
모든 제물에는 대가가 따른다. 제물을 바친 사람은 그보다 배로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온전히 자신에게 복으로 돌아올 수 있다. 덕을 쌓으면 복을 받는다는 당연한 말처럼, 굿에도 그런 이치가 작동한다. 굿은 무당이 신을 대접하는 무속의례로, 꼭 신만이 아니라 굿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위해 한을 풀거나 흥을 나누는 축제이기도 하다. 옛날에는 굿을 하는 행위 자체가 먹을 것 없는 동네 사람들에게 베푸는 행위였기에 더 효험이 있었을 거다. 게다가 지금처럼 공장식 축산이 없었기에 굿판에 올라오는 돼지에게도 한이 덜했을 거라고 느낀다. 돼지를 죽일 때는 돼지를 위해 기도를 올렸을 거다. 그 돼지를 나누어 먹으면서 사람들은 감사함을 느끼고, 좋은 에너지를 교환하기도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한국에서 유통되는 대부분의 돼지는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진다. 좁고 더러운 축사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먹기만 하다가 살 수 있던 생보다 훨씬 짧게 머물고는 죽임을 당한다. 이제는 손쉽게 값싼 돼지고 - P130
기를 구할 수 있다. 그들은 효험 있는 ‘제물‘이 아니다. 이미 이 세상의 희생자다. 살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제물로 생산되는 돼지를 굿판에 또 올리는 건 이미 죽은 존재를 다시 한번 난도질하는 것과 같은 행위가 아닐까. 돼지뿐 아니라 닭, 오리, 소도 비슷한 상황이다. 그들은 평생햇볕 한 줌 못 보고 몸이 겨우 들어가는 케이지 안에 갇혀서 강제로 임신당하고 생산성이 줄어들면 고기로 도축된다. 사육장에는 그들의 비명이 끊이지 않고, 그들의 고통은 한이 되어 몸에 저장된다. 우리는 식탁 앞에 놓인 그들의 한을 먹는다. 돌고 도는 한의 수레바퀴를 끊어내는 게 무당의 역할이라면, 나는 어떻게 이 광경을 마주해야 할까. 신령이 정말 억울하게 죽은 생명의 한을 먹고 싶어할까? 억울한 죽임을 당하는 그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비거니즘을 결단하고 실행하는 게 신령의 힘 아닐까?
비건은 단순히 고기를 안 먹는 생활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모르는 고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태, 그 상태로 살아가겠다는 지향이다. 들리지 않는 고통에 귀 기 - P131
울이고, 내가 등진 아픔은 없는지 살피는 태도다. 공장식 축산으로 살아서 고통 받고, 인간이 만든 환경 때문에 병에 걸리고, 도축되거나 살처분당하는 동물들의 고통은 뉴스에서도 말해지지 않는다. 그들의 넋은 어떻게 되는 걸까? 무당마저 그들의 고통에 고개를 돌리면, 누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줄까.
나는 굿을 받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온 손님에게 동물을 올려야하는 굿판 대신 봉사활동을 하라고 말씀드리곤 한다. 봉사하는 것이 굿을 여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굿을 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되면 돼지 머리나 닭의 살점이 필요하지 않은 굿판을 열면 된다. 나물 반찬과 과일로 꾸려진 제사상에 향을 피우고, 억울하게 죽은 돼지와 오리, 닭들을 위한 위령제를 함께 열고 싶다. - P132
무당은 인간과 신 중간에 있는 존재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생활하는 무당은 어쨌든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노동자이기도 하다. 많은 노동자가 그렇듯, 많은 무당도 불평등한 운동장을 살아가는 시민들이다. 그런 무당의 노동이 노동으로 인정받으면 좋겠다. - P139
무속신앙에는 뚜렷한 선과 악이 없다. ‘허주‘라는 잡귀신은 ㅆ지만 그 존재도 한을 품은 혼일 뿐이다. 우리는 그 존재를 내쫓기 위해 칼을 휘두를 수도 있고 불을 지르거나 닭 머리를 잘라서 살을 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전부가아니며, 전부여서도 안 된다. - P153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에너지도 그렇다. 차별받기 쉽고 존재가 지워지는 위치에 있는 어린 소녀가 늘 악령에 시달리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퇴마의식이 아니라, 그들이 죽겠다고 소리 지르지 않아도 그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사회다. -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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