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7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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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도시를 아는 편리한 방법은 거기서 사람들이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죽는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 P12

‘물음: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답: 시간의 길이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것. 방법: 치과 병원 대기실에서 불편한 의자에 앉아 여러 나절을 보낼 것. 일요일 오후를 자기 방 앞의 발코니에서 보낼 것.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어로 하는 강연을 경청할 것. 가장 길고 가장 불편한 철도의 코스를 골라 가지고 물론 입석으로 여행할 것. 공연장의 매표구 앞에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차례가 오면 표를 사지 - P40

말 것 등.‘ - P41

사실 재앙이란 모두가 다 같이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막상 우리의 머리 위에 떨어지면 여간해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많은 페스트가 있어 왔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나 마찬가지로 그것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믿음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그렇게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 - P54

나 어리석은 짓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필경 너무나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쟁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법도 없는 것이다. 어리석음은 언제나 악착같은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고 있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네들 생각만 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앙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재앙이란 인간의 척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앙이 비현실적인 것이고 지나가는 악몽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재앙이 항상 지나가 버리는 것은 아니다. 악몽에서 악몽을 거듭하는 가운데 지나가 버리는 쪽은 사람들, 그것도 첫째로 휴머니스트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대비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시민들이 딴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겸손할 줄을 몰랐던 것뿐이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아직 모든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앙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추측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을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지니고 있었다. 미래라든가 장소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금지해 버리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상상인들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지만 재앙이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이다. - P55

리샤르는 주저하다가 리유를 건너다보았다.
"솔직하게 당신 생각을 말해 주시오. 당신은 이것이 페스트라고 확신합니까?"
"질문을 잘못하셨습니다. 이건 어휘 문제가 아니고 시간 문제입니다."
"선생의 생각은 결국" 하고 지사가 말했다. "이것이 설령 페스트가 아니라 해도, 페스트가 발생했을 때 취하는 예방 조치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겠군요."
"기어코 제 의견을 필요로 하신다면 사실 제 의견은 그겁니다."
의사들은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리샤르가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치 그 병이 페스트인 것처럼 대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표현은 열렬한 동의를 얻었다.
"당신도 같은 의견이시죠, 동업자 양반?" 하고 리샤르가 물 - P73

었다.
"표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고 리유가 말했다.
"다만 시민의 반수가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머지않아 실제로 그렇게 될 테니까요." - P74

평상시에 우리들은 누구나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사랑이란 예상 밖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또한 우리들의 사랑이 보잘것없다는 것도 다소 담담한 태도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추억이란 더 까다로운 것이다. - P102

피로해진 탓도 있고 해서 그는 무심한 사람이 되었고, 점점 더 말이 적어졌으며, 젊은 아내가 자기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계속 이끌어 나가지 못했다. 일하는 남자, 가난, 서서히 막혀 가는 장래, 식탁에 앉아도 할 말이 없는 저녁때의 침묵, 그러한 세계에 정열적 사랑이 파고들 여지란 없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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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상한 몸 - 장애여성의 노동, 관계, 고통, 쾌락에 대하여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36
장애여성공감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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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상한(queer) 몸을 가지고 있다. ‘모든 몸은 아름답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다르지 않다는 말은 때때로 차별에 저항하기 위해서 채택하는 선언이지만 각자가 가진 차이들을 쉽게 지우거나 고유한 삶의 방식들을 질문하지 않게 만든다는 점에서 너무 뭉뚝하고 얄팍하다. 장애여성들은 정상성의 기준을 해체하고 사회의 규범에 도전하는 퀴어한 사람들이며 각기 다른 몸을 가지고 고유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퀴어함은 성소수자를 ‘이상하다‘며 비하하는 말이었지만, 사회와 불화하는 그 이상함이 사회가 추구하는 정상성의 폭력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하는 정신이 되었다. 우리는 여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사회와 국가는 온전하지 못한 기능이나 스스로 구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차별하고 배제하지만, 바로 거기에서 - P20

불구의 정치가 피어난다. 불구는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이지만 우리는 불구의 정치를 통해서 단지 사회질서에 통합되기 위한 장애 극복을 거부한다고 선언한다. 이상한 몸은 불구의 정치를 위한 우리의 힘이다. 이런 우리의 퀴어함이 자랑스럽고, 퀴어한 존재들과 동료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 P21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남아서 운동을 해야 하는 걸까? 우리의 활동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일까? 이런 질문을 새삼스럽게 던져본다. 비장애 사회와 장애 사회가 같은 꿈을 꾸나? 어떤 세상을 꿈꾸지? 행복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이라는 게 뭘까? 이런 근본적인 질문도 이어진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정말 평등해질 수 있을까? - P59

"나는 장애가 있는 그대로를 원해. 이 자체로서 행복하기를 바라지. 근데 가끔 내가 모르겠는 것이 정말 그게 다인가? 계단이 하나도 없고 평평하고 그런 데서 막 전동휠체어로다닌다고 하면 내가 행복한가? 가끔은 나도 두 발로 걷고 싶지 않을까?"
이런 불경스러운 질문을 해본다. "내가 가끔 두 발로 걸고 싶다는 욕구가 있을 때, 두 발로 걷게 만들어준다면, 그게 평등한 건가?" 올해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이 끝나고 패럴림픽이 시작됐을 때 패럴림픽 개막식에는 어떤 척수장애인이 걸을 수 있게 해주는 로봇을 입고 성화 봉송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장애인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다주는 좋은 기술로 보이지만 그 기술에 투자하는 자본의 욕망은 장애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손상을 ‘보조‘하기 위해서 개발되는 기술의 한계는 모호하다. 예컨대 인간의 팔을 대체하는 인공지능의 팔은 슈퍼인간이며, 인간의 능력을 수백 배 능가하는 기술이 오히려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할 수도 있다. 무언가가 실현된다고 할 때 그것이 누구의 욕망이고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집요한 질문과 날카로운 시선이 필요한 이유를 알려주는 장면이다.
지금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인권과 평등의 담론 속에서도 장애인은 주어진 역할을 해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규범이 된 인권과 평등은 충분하지 않다는 감각도 동시에 생긴다.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있 - P60

는 그대로를 인정한다‘라고 말하는 것. 무척 쉬운 말 같지만 나의 모든 욕망과 욕구를 사회에서 인정받고 실현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게다가 나의 욕구와 욕망은 변화무쌍하다"는 영희의 일갈은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구분, 공적인 가치와 사적인 가치를 나누는 기준을 다시 보게 만들고 장애인 해방의 지향과 목표를 확장하고 수정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자유롭고 평등해진다는 해방은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P61

장애를 가진 사람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일은 여전히 몇 가지 주제로 한정되어 있다. 아니 사실은 한 가지다. 장애 극복 서사를 보여주거나 의료적 도움을 주는 일이나 경제적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들의 주제는 다 같다. 그건 흔히 동기부여 프로그램이라고 불리는 영감 포르노다. 영감 포르노는 호주의 코미디언으로 활약한 장애여성 스텔라 영(1982~2014)을 - P67

통해 알려진 말이다. 그는 장애인의 몸과 고난, 노력이 비장애인에게 삶의 동기부여로만 활용됨으로써 장애인의 이미지가 착취된다고 주장했다. ‘장애를 극복한 사나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엄마‘ 등으로 소개되는 장애 극복 이야기와 사지 없이도 훌륭하게 과업을 수행하고 환히 웃는 얼굴 이미지들은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낙담하고 실패한 비장애인들에게 동기부여하기 위해서만 사용된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에 나오기로 결심한 장애인들의 동기는 다양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프로그램 진행자의 코멘트, 내레이션, 자막은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작동되고 장애인의 삶은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게 배치된다. 그리고 대부분 텔레비전에 나온 이후의 삶은 완전히 잊힌다.
(...) 그 프로그램에는 수술 후 - P68

초기 재활 치료를 받는 과정까지 담겼는데, 레드는 발음이 예전보다 또렷해졌고, 보조기를 차고 걷는 연습까지 할 수 있었다. 항상 혼자 바닥에서 땅을 보고 밥을 먹다가 누군가와 함께 마주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 사람답게 사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레이터는 "바로 자신의 잃어버렸던 삶의 새로운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죠. 제2의 인생,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OOO 씨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라는 멘트를 하면서 프로그램은 끝났다.
레드는 사실 인생을 잃어버린 적이 없다. 레드는 앉아서 밥을 먹게 되어 ‘사람답다‘라고 했지만 ‘사람답지 못했던‘ 시절에도 밥을 먹고, 대학에 다니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고, 누군가와 섹스를 했다. 영감 포르노의 주인공이 반드시 영감 포르노의 피해자는 아니다. 텔레비전에 출현했던 많은 장애인이 그랬듯이 레드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수술 비용을 해결했고(TV에 출현해 성전환 수술을 받은 트랜스젠더도 있고, 성형수술 프로그램에 출현해 ‘새 삶을 찾은‘ 사람도 많다), 아직 안정되지 않은 수술 방법에 대한 공신력을 확보했다. 텔레비전에 사생활이 노출되고 자신의 삶이 프로그램의 목적에 맞게 배치되고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또 하나의 극복 서사로 사용될 뿐이겠지만 수술을 하고 난 뒤 레드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이 삶의 변화는 텔레비전에 출현했기 때문에 초래된 것인지, 아니면 수술과 재활을 통해 기 - P69

능이 회복된 것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수술 후 찾은 자신감 때문인지 분명하지 않다. 사실 수술을 통해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엄밀히 말해 운전을 하게 된 것밖에 없다. 레드는 수술 이후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출퇴근하는 것과 운전하기라고 말했다. 프로그램은 힘겨운 일상을 살다가 수술이 성공한 후 재활을 시작하는 레드의 모습으로 끝났지만, 레드의 삶은 여전히 레드가 저지르는 대로 흘러가고 있다. - P70

전형화는 소수자의 삶을 차별하는 손쉬운 방법이다. 치료, 극복, 불행, 불편 등의 부정적 서사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혐오와 차별로 구성된다. 많은 장애인들은 자신이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물론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것은 비장애인과 완전히 똑같은 삶을 산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생의 과정에서 겪는 감정, 관계의 역동, 실패와 성공, 변화들을 겪어내면서 사는 것은 누구나 비슷하다. 그 보편성과 장애라는 고유성 사이에 일어나는 복합적인 삶의 모습을 설명하며, 세상에 목소리를 내는 것이 경순은 쉽지 않았다. - P117

장애여성 양육 서사는 위험에 빠지기 쉽다. 장애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아이를 낳아 키웠거나, 장애를 그대로 물려받아 힘든 삶이 대물림된다거나, 장애를 가졌지만 평범하고 밝게 살아간다거나. 이런 극복과 감동 서사를 벗어나기 힘들다. 같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세대를 걸쳐 삶의 방식을 이어가면서도 해당 시대의 사회 문화와 관계를 맺고 역동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오랫동안 우리는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주체로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대해오지 않았다. 다음 세대의 한 구성원으로서 장애인을 그리지 못하는 것은 지금 세대에 장애인이 평등한 시민으로서 살아가지 못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경순은 힘주어 말한다. "혼자선 되게 약해요. 사람이 있으니까 이렇게 강하게 나갔지"라며 자신을 지탱하는 딸들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장애가 유전된다는 걸 발견하면, 불행의 대물림만을 우려한다. 그러나 경순과 딸들이 서로 의존하며 만든 연대는 샤르코 마리 투스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도 살아가는 방식과 지혜로 이어졌다. 우리는 세 모녀 덕에 의학 서적에 나오지 않는 지식과 삶의 방식을 얻게 되었다. 불행이 아닌 질병과 장애가 있는 몸으로 서로를 지원하며, 자존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원칙을 경순은 대물림해주었다.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그녀가 버텼던 시간과 세웠던 원칙들을 세상이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 P122

당시 조화영이 경험한 성인 발달장애인 직업교육훈련은 참여자가 자신의 몸을 자발적으로 움직여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정해진 일에 자신의 몸을 기계처럼 맞추는 과정이었다. 그곳에선 몸을 자유롭게 쓴 적이 별로 없었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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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엄기호 지음 / 따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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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을 정리하면, 글을 쓰고 읽는 것이 말을 하거나 영상을 보는 것과 달리 인간의 사유하는 역량을 비약적으로 전환시켰다는 것입니다. 한편에서는 추상성이 높아짐으로써 보다 본질적인 것을 사유하게 되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한 나의 이야기가 그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체계적이고 치밀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 이야기가 얼마나 체계적이고 치밀한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거죠. 바로 이것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인간의 사유역량을 비약적으로 높였다고 말하는 이유겠죠. 말로는 이 치밀함과 체계성을 도저히 담을 수 없거든요. - P101

물론 문자와 읽기의 추상성과 기호성이 너무 높아서 생기는 문제도 있습니다. 오자와 마키코가 얘기한 것처럼,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 에게 너무 일찍이 추상적이고 기호학적인 것을 다루게 함으로써 현실을 망각시킨다는 점입니다. 삶의 구체성은 놓치게 되는 것이에요. 소위 구체적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보편성을 생각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이 구체성을 망각하는 형태로 가면 반쪽밖에 못 취하는 것이 되겠죠.
맥루언을 비롯해 미디어학자들이 얘기했다시피, 어떤 미디어를 장착해서 그것에 연결된다는 것은 그 미디어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그것이 할 수 없는 것까지 받아 안는 것이거든요. 보통 자원(affordance)과 제약(constraint)이라는 개념을 많이 쓰는데, 특정한 매체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있고, 이를 얻는 동시에 어떤 제한이 생긴다는 거죠. - P102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가 여러 교과뿐 아니라 매체들 간의 관계, 다양한 리터러시 사이의 균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라고 봐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삶과 어떻게 접속하느냐죠. 각 매체의 가능성과 한계를 잘 알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매체를 활용하는 경험이 많아져야 합니다. 텍스트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책 속이나 문제집 안에서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말글을 사용하는 경험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 경험을 통해 텍스트라는 기술을 유연하게 다루는 역량을 키워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그런 ‘삶을 위한 리터러시‘를 잘 키워주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어요. - P105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글쓰기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은 결국읽기의 문제와 결합돼 있다고 봐요. 예전보다 독서를 안 한다고 한탄 - P110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읽는 양으로 보면 지금 훨씬 많이 읽어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거든요. 양으로 보면 압도적으로 많이 읽는데, 한 이벤트의 길이라는 면에서 보면 굉장히 짧아졌어요. 길이가 짧아졌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제가 볼 때는 사유의 길이와 스케일이 짧아지고 작아진 것입니다.
(...)
말씀하신 것처럼 지금 글쓰기가 대유행입니다만, 저는 좀 냉소적입니다. 읽기가 기반되어 있지 않은데 쓰기가 가능할 것인가 싶거든요. 글을 쓰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이걸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글은 체계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글을 쓸 때는 그 글이 당대를 넘어 후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질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말과 달리 기록이잖습니까. 그 - P111

러니 글을 쓰는 것은 추상성을 높여 치밀하게, 체계적으로 구축함으로써 한편에서는 보편성을 획득하면서 동시에 구체적인 모습 또한 보여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한 권의 책이란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에, 그 세계 내의 정합성과 논리성과 인과성과 핍진성을 다 맞춰내야 하는 거죠.
그런 걸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쓸 수가 있느냐? 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쓰게 하더라고요. 매뉴얼이 있어요. 공장에서 제품이 나오는 것처럼 매뉴얼에 맞춰서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매뉴얼에 맞춰 썼을 때 그 사람이 과연 저자(author)가 되는 거냐, 아니죠. 그 글에 무슨 독창성(authenticity)이 있겠어요. 자기 사유가 없는데 독창성이 있을 리 없죠. - P112

선생님이 텍스트성의 역사를 말씀하시며, 초텍스트성 문화에서는 더 이상 정전이라는 게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정전은 없고, 주석으로서의 지식, 의견의 세계로 넘어갔어요. 의견의 세계에서 내 의견을 보태기 위해서는 이미 제시되어 있는 의견‘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듣기로 되는 게 아니고 읽기로만 가능해요. 듣는 것은 단수성이거든요. 이걸 듣고 다음 걸 들을 때는 and로 연결이 된다는 말이죠.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게 아니라, 이건 이거고 그다음에 저건 저거, 이렇게 단수성이 죽 연결되는 거죠. 단수성이 연결된다고 해서 복수성의 세계가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수성의 세계란 시간적이기만 해서는 안 되고 시간을 공간화해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에요. 한 공간에 여러 개가 있어야 복수성이라고 인지되니까요. 어찌 보면 기록이라는 것, 읽기라는 것은 시간을 공간화해놓은 거죠.
한 공간에서 죽 읽게 되는⋯⋯. 글을 쓴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써놓는 순간 책이라는 공간에 들어가기 때문에 복수성이 - P113

텍스트와 읽기가 가져다주는 역량이라는 면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다시, 책으로》에서 매리언 울프는 텍스트와 읽기가 공감능력을 키워준다는 얘기를 합니다. 마키아벨리의 사례를 드는데, 마키아벨리는 저자가 살았던 시대의 옷을 입고 책을 읽었다고 해요. 예를 들자면, 12세기에 쓰인 책을 읽으면 12세기 때 옷을 입고 영국 사람이쓴 책을 읽으면 영국 옷으로 바꿔 입고 읽었다는 거죠. 책을 읽는 것은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진지함과 흥분을 유지하기위해서라고 합니다. - P123

울프는 이걸 공감능력이라고 부르면서 그것이 책과 책 읽기가 제공하는 고유의 역량이라고 하죠. 그런데 사유라는 측면에서는 공감능력이라기보다는 역지사지의 사유역량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것을 ‘변신‘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그리스 신화가 ‘변신 이야기‘ 이지 않습니까. 변신은 인간의 오랜 꿈입니다. 하지만 신이나 천사 같은 존재와 달리 인간은 변신을 할 수가 없죠. 다른 존재가 되는 것, 그 가능성이 봉쇄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고, 이런 점에서 인간은 가능성을 빼앗긴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인간이 다른 존재가 되는 가능성을 빼앗긴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을 통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언어예요. 우리가 뭔가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할 때를 한번 생각해보죠.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만 그 이미지들이 다 언어적이죠. 말과 글입니다. 다른 존재에 공감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신할 수 있게 하는 것, 생각에서라도 남이 되어보는 것, 그것이 역지사지이며, 아렌트는 그것을 사유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사유역량을 공감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입니다. 최근에 발간된 《공감의 배신》의 저자 폴 블룸도 비슷한 입장입니다. 공감이라는 게 다른 존재의 입장이나 처지가 되어보는 것, 즉 역지사지하는 사유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방해할 수도 있다고 보는 게 폴 블룸의 시각입니다. 그의 주장처럼 저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능력이 아니라 역지사지하는 사유역량이라고 생각합니다. - P124

반복합니다만, 인간의 사유역량의 스케일을 획기적으로 키운 것이 읽기죠. 이론적으로 보면 내가 아직 읽지 못한 무한대의 텍스트가 있습니다. 그 무한대의 텍스트가 나의 어떤 상상력을 자극할지 모릅니다. 변신의 폭이라는 점에서 글은 시공간을 넘어 무한대의 경험을 지금 이 자리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나에게로 끌어오죠. 말의 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일이에요.
그럼, 과연 이렇게 사유역량을 확장시키는 것이 읽기만의 특권일까요? 물론 저는 읽기가 일으킨 혁명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을 읽기만의 특권이라고 보기는 곤란하다고 봐요. 오히려 읽기를 이렇게 특권화하는 것이 사유에 진입하는 장벽을 높이 쌓는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 P125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리터러시 교육을 제대로 해왔는가를 반성할 때, 반드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이 진입장벽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읽기가 혁명적인 것은 틀림없지만 진입장벽이 높다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그 진입장벽의 핵심이 추상성이에요. 텍스트의 가장 큰 장점이자 단점인 추상성 때문에, 읽는 사람은 보는 사람과는 달리 자기 머릿속에서 그 추상적인 개념들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어떤 텍스트는 읽어봤자 시각화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계속 읽어낼 수가 없죠. 그에 반해 영화는, 예술영화는 통속영화는 보이는 게 있으니까 보려고만 하면 계속 갈 수 있는 거죠. 이게 무얼 의미하냐면, 이 추상적인 글을 시각화하기 위해서는 나한테 개념, 명제, 배경지식, 이런 자원들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영상과 비교하면 현격하게 높은 자원이 필요한 거예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영화 〈매트릭스〉의 공간 이름인 컨스트럭트-건설을 해야 합니다.
바로 이런 요소가 읽기를 굉장히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어떠한 방식으로 사유역량이 만들어지며 유지되는지는 아예 못 보고, 비문자적인 것은 천박하고 저급한 방식이라고 일축하며 읽기를 통한 것만이 고상하고 고급한 것인 양 평가하게 만들죠.
그래서 저는 읽기의 사유역량을 특권화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 P130

고 생각해요. 오히려 읽기의 진입장벽이 무엇인지를 첫 번째로 봐야 해요. 두 번째는 그 진입장벽을 낮추거나 뛰어넘으려는 교육을 해왔느냐, 이것이 성찰의 지점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교육이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원을 대중적으로 만들어왔는가를 묻는다면, ‘아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 P131

진입장벽을 통과하는 게 특히 어려운 영역이 ‘쓰기‘죠. 어렵기 때문에 갖게 되는 쓰기에 대한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아우라가 있는 거죠.
요즘 들어 사람들이 다 책을 쓰고 싶어하는 게 그 아우라 때문이죠. - P132

리터러시의 문제를 그저 개개인의 역량 부족으로, ‘문해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안이하고도 위험합니다. 리터러시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할 것들이 묻히는 상황에 터하고 있어요. 한 사회가 자신의 이슈를 발굴해내고 이를 사회문화적인 공론장으로, 나아가 제도정치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역 - P133

량을 갖추었는가, 이것이 리터러시의 척도인 겁니다. 말해야 할 것에 침묵하면서 자신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말할 수있는 자‘에게서 리터러시의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하죠. 그런 면에서 리터러시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기본적으로 ‘문해력을 갖춘‘ 이들, ‘말할 수 있는 채널을 가진‘ 이들, 나아가 이들을 운용할 자본을 가진이들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빈곤이 가지지 못한 자의 책임이 아니듯, 비문해는 문해력 습득에 실패한 자의 책임이 아니죠. 오히려 그반대 아닐까 싶어요. ‘배운 놈들이 더한다‘는 말은 리터러시를 철저히 사유화한 이들에 대한 이 사회의 경고일지도 몰라요. - P134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리터러시를 개인의 역량으로만 보고 그 개인의 역량을 비판하는 것은 사회의 책임을 외면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읽기와 쓰기는 다른 매체와 달리 진입장벽이 분명히 높습니다. 그리고 그 높은 진입장벽에 의해 엘리트주의적인 요소가 있죠. 저는 이것은 읽기의 - P135

장점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사람들에게 진입장벽을 넘을 수 있는 역량을 키워주는 것이겠죠. 저는 읽기와 쓰기가 어렵다는 것, 재밌지 않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P136

리터러시 역량의 개인화에 대해 제가 더욱 우려하는 것은, 소위 무지한 사람들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되는 거예요. 지금 한국사회에서나타나는 많은 혐오, 그게 여성 혐오든 노인 혐오든 이주노동자에 대한 혐오든, 그 바탕에는 리터러시 문제가 깔려 있거든요. 만날 하는말이 "노인네들 유튜브 그만 보고 책 좀 읽어라, 신문 좀 읽어라."인 이유 또한 그들의 지적 능력에 대한 비하를 통해서 혐오를 정당화하 - P138

기 위해서죠. 그 뿌리에 리터러시의 개인화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터러시가 개인적 역량이지만 그 역량을 키우는 것은 사회적 역량이라는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사회적 역량이 되었을 때만 많은 부분에서 나타나는 혐오의 문제를 넘어설 수 있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노인 혐오는 대표적으로 리터러시를 무기로 삼은 혐오예요. 무지하고 무식하다는 혐오죠. 이들은 무지하고 무식하여 자기 생각이 없으니 선동에 쉽게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자들은 공론장을 오염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위험한자들이기에 배제되어야 한다는 논리인데, 리터러시의 이름으로 혐오가 정당화되는 겁니다. 여성이나 소수자,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혐오도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 많습니다. - P139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읽기에서 보기로의 전환은 몸이 바뀌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 보기 중심의 미디어 환경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중심으로 현재의 리터러시에 관해 말해보는 것이 어떨까 해요. 긍정적인 부분도 있을 것이고 부정적인 부분도 있을 테니까요.
여러 차례 언급했습니다만, 미디어의 변화 속에서 가르치는 일을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긴 글을 읽지 못하고 너무 지겨워한다는 말입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는 저도 많이 경험하고 있는 일입니다. 글을 좋아하는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면 대부분 긴 글을 읽지 못하고, 대하소설은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사들도 학생들이 책 한 권 전체를 다 읽은 경험이 너무 없다고 걱정합니다.
읽기가 주는 역량에 대해 다시 얘기하면, 긴 글을 읽는 게 지루하고 재미도 없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를 간단하고 명료하게 파악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에게 중요한 능력이, 복잡한 것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미 충분히 복잡하며, 단순화되지도 않을뿐더러 단순화하는 게 좋은 것도 아니에요. 단순하게 인식하는 것은 위험하기까지 합니다. 선악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등의 문제가 얽혀 있어요. 학문의 세계에서는 복잡성의 과학 등이 등장하면서 진리는 단순하다는 인식을 경계하는 분위기인데, 대중적으로는 여전히 진리는 단순하다느니 명료하게 인식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복잡 - P143

한 현상을 복잡하게 인식하는 것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분위기가 있어요. 이것은 한 사람의 역량으로 볼 때도 문제지만, 한 사회의 문제를 풀어나가는 데서도 문제적인 일이 되죠. - P144

딱 세 단계로 나눌 수는 없지만 단계성이 있는 것 같아요. 격식을 갖춘 책의 정보와 일반 웹문서의 정보, 다음에 동영상의 정보, 각각의 영역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고 했을 때 책, 위키피디아 등의 웹문서, 동영상의 차례로 지식의 호흡이 짧아지는 경향이 있는 거죠.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하나 제기되는데, 가짜뉴스는 완전히 틀린 정보를 주는 거지만 요약본은 누군가에 의해 편집된 정보를 준다는 거예요. 가짜라고 볼 수는 없지만 굉장히 주관적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어요. - P146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전히 많은 사람이 단편적인 정보를 담은 동영상을 보고 있는데, 그렇게 요약되고 편집된 동영상을 기본 미디어로 삼아서 지식과 정보를 얻다 보면 일종의 관성, 아비투스가 생긴다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걸 빨리, 흥미롭게 전달해주는 건 소화를 하는데 그렇지 않은 미디어를 접하면 지루해서 끝까지 볼 엄두가 안 나죠. 이런 변화 속에서 미디어를 편식하게 되고요. 몸은 점점 특정한 길이와 포맷의 영상에 익숙해지죠. - P147

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메시지와 마찬가지로 미디어도 중립적일 수 없죠. 특정한 매체 또한 단지 연결통로로만 기능하지는 않아요. 어떤 면에서는 연결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분리하고 단절시키는 거예요. 웹툰을 통해 정보를 접할 때와 영상을 통해 정보를 접할 때, 인지나 정서가 반응하는 방식은 다르죠. 라디오 청취에서의 정보 처리와 소설 읽기에서의 정보 처리 또한 다르고요. 비슷한 내용을 서로 다른 매체로 접한다고 할 때 우리 뇌는 단지 ‘비슷한 내용‘만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매체성‘을 경험합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매체에 따라 우리 뇌의 활성화 패턴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패턴이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뇌가 달라진다는것, 우리 몸의 습속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든 동영상이든 당장 필요한 지식만 얻으면 된다는 생각은 인간의 몸과 매체가 맺는 관계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고, 매체의 강점과 한계, 매체가 우리 머릿속에서 일으키는 변화, 매체의 사회적 영향 등을 무시하는 것이죠. 처리 과정 없이 산출물이 나올 수는 없잖아요. 매체를 사용할 때 수반되는 경험을 무시하고 써먹을 수 있는 지식만 결과로 보는 것도 위험하고요.
다매체 시대의 리터러시 교육을 고민할 때 ‘메타인지(metacognition)‘를 한 축으로 설정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미디어를 무색무취하고 중립적인 도구로 보는 게 아니라, 개별 매체의 성격을 따져보면서 어떤 면에서 강점이 있고 어떤 면에서 약점이 있는지 명확하게알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랬을 때 내가 책을 읽거나 웹툰을 보거나 - P151

영상을 보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거든요. 그러지 않으면 그냥 보는 거죠. 뇌는 자신도 모르게 변해가고요.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영상은 우리 뇌에 무슨 짓을 하고 있지?" 라고요. - P152

그런 점에서 본다면, 사실 읽기와 보기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요새 많이 하는 말로 ‘어디서 읽고 보는가‘라는 플랫폼의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파일을 다운받아서 보는 것, 혹은 넷플릭스를 보는 것 등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읽는 것과 보는 것 중에서 어떤 것에 익숙해져 있는가라는 문제가 하나 있고, 어디에서 읽고 보는가라는 문제가 또 하나 있을 것 같습니다.
플랫폼, 매체, 그리고 인간의 행위 사이에 어떤 순환이 있는 것 같아요. 먼저 어떤 특정한 플랫폼, 공간에서 매체의 변화가 세계를 지각하고 인지하는 방법에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게 세계를 대하는 몸의 변화를 일으키죠. 그러고 나면 그 변화된 몸으로 다른 매체들을 사용해 세계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만나는 공간, 즉 플랫폼의 특성이 또 매체의 특성을 넘어 주체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런 점에서, 아무래도 인터넷이라는 플랫폼 혹은 공간의 특성을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이 공간의 읽기와 쓰기 사이에 아이러니한 비대칭성이 있다고 보는데, 쓰는 양과 길이는 무한대로 늘어나는 반면, 읽는 호흡은 점점 짧아지거나 요약적으로 되는 거죠. 인터넷에 글을 쓸 수 있게 되면서, 쓰고 싶은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정말 시시콜콜하게, 별 쓸데없는 것까지 다 쓰고 있어요. SNS를 보면,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공간에 왜 쓰지 싶은 글이 많습니다. 이전 같으면 화장실에 익명으로 쓰던 글들이죠.
그러다 보니,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뭘 이런 걸 쓰냐." 또 "뭘 이 - P156

렇게 길게 쓰냐." 하면서 휙휙 넘기며 확인만 하려고 하죠. 쓰는 사람은 길게 쓰는데 읽는 사람은 촘촘하게 읽지 않아요. 그렇게 긴 글, 짜임새가 촘촘하지 못한 글을 다 읽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거죠. 그 결과 그 사람이 글을 이끌어가고 구성하는 방식, 방법론 등은 간과하고 결론과 핵심만 봐요. 이건 깊이 있게 글을 읽는 것이 아니죠.
쓰는 사람은 무한대로 길게 쓰고, 읽는 사람은 가급적 결론만 요약해서 보려고 하는 이 비대칭성에 의해 독자의 죽음과 저자의 죽음이 모두 나타난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제가 말하는 독자는 그저 글을 읽는 사람,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 깊이 있게 읽는 사람을 의미하는데요. 단순하게 읽는 사람이 아니에요.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는 게 아니라 복잡하게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깊이 있게 읽는 독자입니다. 글을 촘촘하게 읽으며 그 사람이 글을 구성해가고 논증해가는 방식, 즉 방법론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독자입니다. 이런 독자가 점점 사라지고 있어요.
또한 이 비대칭성에 의해 저자도 죽어갑니다. 문자매체 중에서도 인쇄매체의 시대에 저자는 한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저자에게 무한대의 지면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칼럼은 200자 원고지 10장에서 20장, 단행본에 들어가는 한 꼭지는 100장 이내, 논문은 책으로 제본했을 때 100쪽에서 200쪽 등 글의 길이에서 한계가 주어지죠. 그렇기에 저자는 이 한계 내에서 어떻게 해야 자기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지 고민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무엇보다 글의 짜임새, 구조, 글쓰기의 방법론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죠. 그런데 인터넷에 글을 쓰게 되면서, 쓰는 사람은 ‘장황하게‘ 글을 쓰고 난 다음에 ‘간략 - P157

하게‘ 명료한 메시지와 정보를 전달하게 되었어요. 한계 내에서 글을다루기 위해 짜임새를 만들어야 하는 저자의 죽음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리터러시 교육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잘 때까지 너무 많은 걸 읽어요. 짧고 난삽한 글들을 너무 많이 읽고 있는데, 이렇게 많은 걸 다 읽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세상의 그 많은 지식을 내가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가 알아야 될 것에 대해서만 알면 되고, 내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한 사람에게 의지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특히 한국에서는, 어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온 국민이 전문가가 됩니다.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 사건을 알기 위해 필요한 전문적인지식까지 죄다 인터넷을 뒤져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내가 전문가나 준전문가적인 앎에 이를 수 있는가, 그건 아니거든요.
저는 이게 교육이나 리터러시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제라고 생각해요. 근대사회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하거든요. 의사를 비롯해 어떤 직능단체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그와 관련된 논쟁이 생길 때 굳이 내가 그 내용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돼요. - P158

이와 관련해 ‘내재화(internalization)‘라는 개념을 살필 필요가 있어요. 러시아의 심리학자이자 교육이론가인 비고츠키의 생각을 기반으로 한 개념인데요. 어떤 기능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내면화되지 않아요. 30년 동안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린다고 해서 계산 능력이 - P164

키워지지는 않는 거죠. 그런데 30년간 주판으로 주산을 했다면 머릿속에서 웬만한 계산은 넉넉히 해낼 수 있거든요. 계산 능력이 내면화되어서 암산이 가능해지는 거죠. 우리가 검색을 하면 필요한 지식이 바로 나온다는 것은 내재화의 가능성, 내재화 이후 숙성되는 과정의 가치를 생각하지 못한 발언이라고 봐요. 세상의 그 많은 ‘찾으면 나오는 지식‘은 배울 필요가 없는가, 그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 지식들을 내 머릿속에 가져온 뒤 기존의 경험과 지식, 또 새로 들어올 지식과 버무리고 숙성시키고 발효시켜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또 내 삶에서 어떤 상황에 닥치든 그걸 끄집어내서 맥락에 맞게 활용할 수 있는 역량, 이걸 보통 지혜라고 부르잖아요. 그 지난한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 찾으면 나온다고 하는 건 배움과 발달의 본질을 무시하는 말입니다.
지금의 상황은 검색의 시대, 또 쉽게 이해되는 지식의 시대로 조금씩 가고 있고, 초등학생의 경우엔 조금 더 심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지금 리터러시 교육에서 추구해야 할 바는 ‘내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내가 무엇을 찾아낼 수 있는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에 있는 지식을 엮어서 무엇을 만들어내는가, 무엇을 새롭게 나의 지식과 지혜로 버무려 발효해내는가를 강조하는 쪽으로 가야 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걸 제가 다른 책에서 강조했던 표현으로 바꾸면, 리터러시가 앎의 문제가 아니라 다룸의 문 -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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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 삶을 위한 말귀, 문해력, 리터러시
김성우.엄기호 지음 / 따비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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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텍스트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근대성(modernity)의 관점에서 봅시다. 그때 읽는 사람은 주체이고 읽히는 대상, 즉 세계는 수동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자신을 텍스트로 다루면서 읽어주는 사람, 즉 독자가 나타나야 비로소 존재할 수 있게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독자야말로 근대사회에서는 주체라고 할수 있습니다. 독자가 저자만큼 중요하죠. 나중에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독자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두 다 독자가 아니라 저자이기를 바랍니다. 독자가 중요한 이유를 다시 강조하면, 읽는 행위를 통해서만 세상 만물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가지고 존재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독자는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문제는, 자기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이렇게 정함으로써 그저 해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세계를 하강시킨다는 것입니다. 말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우리에게 말을 건넵니다. 나의 해석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물이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말을 들어야 합니다. (...)
이와 반대로, 세계가 말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해석을 기다리는 - P21

글이 된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강한 주체로서의 의미를, 세계에는 수동적인 위치만 부여합니다. 근대사회가 인간 중심주의, 문자 중심주의, 주체 중심주의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죠. 제가 잘 쓰는 표현대로 하면, 말을 듣고 응답하는 말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사람들이 솔깃해 2인칭의 위치는 희미해지고, 읽는 것을 통해 의미를 해석하고 부여하는 주체, 쓰는 행위를 하는 주체라는 1인칭만 강조됩니다. 이런 과도한 주체성이 근대의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다고 생각해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의 세계에서 글의 세계로 바뀌었다는 것은 중세 사람들의 입장에서 생각할 때 아마 리터러시의 위기였을 것입니다. - P22

다만 이런 학력고사식 독해에서는 자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제가 앞에서 근대 이후 세계를 텍스트로 다루게 되었다고 말했는데요, 학력고사식으로 본다면 이 텍스트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해석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정해진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거죠. 이렇게 되면 텍스트를 읽는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해석을 통해 자기 의견을 갖는 게 아니라 정해진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교과서와 시험이 그런 문해력을 키워준 거죠. 시험문제를 풀기 위해 지문을 이해해야 하고 지문 밖으로 눈을 돌리면 안 되는 거예요.
(...)
재밌는 것은, 바로 그랬기 때문에 글을 읽고 싶었던 아이들은 교과 - P28

서 밖으로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교과서의 시와 소설이 아니라 자기가 읽고 싶은 시와 소설을 따로 읽은 거죠. 그러니까 맥락을 파악하는 힘으로서의 문해력은 아예 따로 키운 거예요. 그런데 따로 읽었던 그게 다 해석을 기다리는 텍스트였던 거죠. 해석하는 역량, 세계를 텍스트로 다루는 역량은 사실 교육제도 바깥에서 쌓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 좀 잘하던 아이들은 양쪽의 텍스트를 다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건데, 저는 이걸 한국 교육의 아이러니라고 표현해요. 주입식 교육이 좋은 교육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철저히 점수를 따기 위해 정답을 찾는 기능적인 역할만 하다 보니 소수의 학생들은 상상력이나 문학적 감수성 등은 아예 다른 과정을 통해 획득했던 것이죠.
그럼 수능 이후는 어떠한가? 수능은 학력고사와 비교할 때 그런사전적 의미를 묻고 정답을 고르는 식에서 많이 탈피한 것은 사실이죠. 지문의 길이도 많이 길어졌고, 복합적인 의미를 따지는 역량도있어야 하고요. 또 논술고사도 있죠. 적어도 학력고사보다는 한 걸음더 나아간 것이라고는 볼 수 있습니다. 해석하고 그 해석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주장할 줄 아는 사람을 양성한다는 점에서는요.
학력고사에서 수능으로 바뀌면서 이런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여전히 문자 텍스트 중심이죠.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험체제 바깥의 참조 대상은 극적으로 바뀌었습니다. 더 이상 다수의 사람들이 읽고 참조하는 것은 문자 텍스트가 아닙니다. 시험을 위해 읽는 도구일 뿐이고, 그 바깥에서 교양을 쌓기 위해서나 성찰을 하기 위해서 읽고 참조하고 해석하는 것은 - P29

문자 텍스트가 아니라 동영상입니다. (동영상도 텍스트처럼 읽는가 아닌가는 논쟁적이니 여기서는 일단 문자에만 텍스트라는 말을 붙이겠습니다).
(...)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말하고 듣는 것이 읽고 쓰는 것으로 전환되었다면, 지금은 정보나 이야기를 ‘읽고 쓰는‘ 게 아니라 ‘보고 찍는‘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보를 습득하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방식이 바뀌고 있는 것이죠. 저는 읽고 쓰는 것을 통해 의미를 파악하고 구성하는 사람들과 보고 찍는 것으로 그걸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한국사 - P30

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세대 갈등에도 이런 측면이 깔려 있다고 보고요.
읽고 쓰는 걸 중심에 둔 사람들은 보고 찍는 게 중심인 사람들이맥락(context)을 파악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어요. 읽는 행위는 맥락을 파악해가는 과정이잖아요. 앞에서 말한 학력고사 방식의 ‘무식한‘ 시험은 해석의 여지를 두지 않고 정답을 찍는 것이었지만, 사실 의미는 사전적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맥락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맥락을 어떻게 파악하는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고요. 이런 점에서, 읽고 쓰는 걸 중심에 두는 사람은 내 앞에 주어진 것을 텍스트로 대하면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그 전후좌우를 살피는 걸 우선적으로 합니다. 맥락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확실히, 새로운 세대가 맥락을 파악하는 능력, 텍스트를 기반으로 더 큰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죠. 그런데 저는 그런 지적이 너무 성인 중심의 관점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저희 분야에서 고전과 같은 논문이 있어요. 1996년에 《하버드 에듀케이션 리뷰(Harvard Educational Review)》라는 학술지에 ‘앞으로 리터러시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세계적으로 저명한 학자들이 모여서 입장을 담은 논문(position paper)을 냈어요. 그 논문의 핵심 키워드가 멀티리터러시(multiliteracies), 즉 다중 문해력입니다. 그간 - P31

텍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리터러시가 서구 근대사회를 관통해 왔지만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다양한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리터러시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논문이에요. 저자들이 강조한 것은 단순히 인터넷이 등장했다든가 미디어가 발달했다는 게 아니라, 우리 삶을 구성하는 영역들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에요. 개인의 프라이버시 영역이라고 하는 게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고,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면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섞이고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빠르게 오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죠. 과거에 상상할 수 없었던 언어와 문화의 섞임, 사람들의 이동, 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사적인·공적인·직업적인 변화들이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앞으로의 세계에서는 텍스트를 읽고 쓰는 능력으로서의 문해력은 소리와 이미지, 공간과 제스처 등을 포괄하는 멀티리터러시의 하위 분야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해요. 문자 기반 텍스트만으로는 더 이상 사회와 교육에서 중심적인 리터러시를 구성할 수 없다고 이미 1990년대 중반에 선언한 것이죠.
하지만 한국 상황에서는 동영상이나 멀티미디어 보조교재를 활용하고 일부 수행평가에 활용한다고 해도, 여전히 시험은 기본적으로 텍스트잖아요. 평가체제의 근간이 텍스트라는 거죠. 수능도 마찬가지고요. 10대, 20대는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예요. 삶에서 늘 접하는 미디어가 동영상과 이미지, 소셜미디어인데, 이것과 동떨어진 방식으로 어른들에게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더 비판적으로는, 젊은 세대가 삶 속에서 배우고 경험하는 것을 평가할 만한 잣대 - P32

가 어른들한테 없다는 것을 지적해야겠죠. 여전히 성인들은 자기들이 할 줄 아는 것을 기준으로 새로운 세대를 평가하고 있는 거예요. 배운 대로 가르치고, 평가받았던 대로 평가하고 있는 형국이죠. 하지만 젊은 세대의 삶은 많은 부분 교과서적인 텍스트와 별 관련 없이 돌아가고 있죠. 유튜브가 가장 대표적인 예일 테고요.
그러니까 성인들이 10대 전후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공부할 시간을 반밖에 주지 않고 평가한 다음에 왜 이렇게밖에 못하냐고 비난하는 거랑 비슷하죠. 그건 공정하지 않은 거예요. 공정하지 않은 평가를 하면서 이를 통해 ‘문해력이 떨어졌다‘는 비판이 심화되는 거죠. - P33

비슷한 맥락에서, 60~70대 노년세대에 대한 비난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연령대가 문해력이 뛰어난 세대가 아니에요. 사회경제적으로 빈민 계층에, 블루칼라 노동자, 일용직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다가 퇴직을 하거나 일거리가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분들도 적지 않죠. 그런데 동영상이 들어오면서, 또 카카오톡이라는 소통 수단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리터러시를 접하게 된 거라고 전 생각해요. 지금은 이 모든 게 모바일에서 돌아가고요. - P34

이 상황이 전적으로 그분들의 잘못은 아니죠. 사회경제적인 토대가 약했기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었던 거잖아요. 교육받을 기회 또한 상대적으로 적었고요. 흔히 말하는 비판적인 리터러시를 갖출 만한 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카카오톡이나 유튜브가 이분들의 세계가 되어버린 거예요. 저는 사회적·교육적 공백이 그런 분들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사회가 그 세대에게 체계적으로 리터러시를 키워주거나 비판적으로 신문이나 잡지, 책을 소화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아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새로운 미디어의 거짓 정보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거죠. 소통과 표현에 대한 욕망이 둑 안에 갇혀 있다가 새로운 채널로 출구를 찾은 거니까요. 그런데 이 상황이 40대나 50대에게는 되게 한심해 보이는 겁니 - P35

다. "도대체 노인네들 왜 저러냐?"
그러니까, 세대론으로 반듯하게 가를 수는 없겠지만 중간 세대가 양쪽을 업신여기며 비판하는 모양새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이런 모양새는 젊은 세대에게도 공정하지 않고, 60~70대 이상의 노인들에게도 불만스러운 거죠.
(...)
제가 끊임없이 주장하는 게, 리터러시를 문제 삼는 사람들의 리터러시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문제제기하신 것처럼 ‘이것이 리터러시다‘라고 정의하는 것,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게 바로 권력이거든요. 이것이 리터러시다 하면 저것은 리터러시가 아닌 것이 돼버려요. 그렇게 리터러시를 정의한 다음에,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문해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 - P36

능력이 없는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것, 그것이야말로 권력이죠.
그 지점에서 선생님의 말씀 중에서 ‘성인 중심‘이라는 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요. 한국 현대사의 맥락에서 볼 때, 그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그냥 성인이 아니에요. 명확하게 1970년대에 태어난 저 같은 사람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86세대죠. 소위 86세대 이전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소수였어요. 그 정도의 문해력을 가진 사람들은요. 1960년대에 태어난 86세대부터 읽기가 대중화되었고, 그게 완전히 꽃핀 시기가 1970년대에 태어난 이들이 성장하던 때죠. 이들이 텍스트 기반 교육의 대중화에서 가장 수혜를 받았던 세대이고, 바로 문화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대죠. 리터러시를 정의하는 데서도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성인이라 해도 60대 이상은 제외되는 거죠. 60대 이상은 양쪽의 텍스트, 즉 교과서와 교과서 밖의 책을 다 읽으면서 키운 힘은 많이 없어요. 교과서의 지문을 읽고 그 안에서 정확한 의미와 괄호 안에서 빠진 단어를 찾는 역량은 시험을 치는 학교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들은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우리 세대는 대중화된 제도교육의 수혜를 받으면서도 부모가 책을 많이 사줬잖아요. 가난한 집에서도요. 책을 읽으면서 텍스트 안에서 맥락을 파악하고 구성해낼 수 있는 문해력을 키울 수 있었죠. 그래서 굉장히 오만해요, 이 세대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문해력의 기준으로 보면, 젊은 친구들도 한심하고태극기 들고 나오는 노인들도 한심하고, 이렇게 되는 거죠. - P37

몇 년 전까지도 한국 가수의 동영상에는 다 한글로 댓글이 달렸죠.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힘이었어요. 이런 맥락에서 해석이란 ‘의미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의미를 해석하고 그 해석된 것을 전달하고 공유함으로써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합니다. 문자 텍스트로 의미를 전달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또 의미를 공유하는 것을 통해서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의미를 같이 추구하는 정치 행위도 일어나고요. 따라서 의미 해석을 중심에 두는 문자 텍스트의 등장과 보편화는 근대사회의 탄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를 일일이 알 필요는없지만, 그것이 주는 정동(affect)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해졌어요. 정동은 언어로 의미를 파악하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것이니까요. 인문사회과학에서 ‘정동적 전회(轉回)‘라는 표현을 쓰는데요. 이것이 의미하는 큰 변화가 있습니다. 문자 텍스트 중심의 단일 문해력에서는 이해와 의미 파악이 중요했다면, 지금과 같은 멀티리터러시 상황에서는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동이 발동되고 있는가를 알고 공명하는 게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케이팝 스타의 유튜브에 전혀 알 수 없는 태국 글자로 댓글이 달려 있고 또 한자가 적혀 있고 하지만, 거기 붙어 있는 이모티콘과 느낌표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는 아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정동적 독해라고 하는 게의미론적인 독해보다 훨씬 더 중요해진 것 같아요. - P41

정동적 전회라는 것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죠. 저는 이것도 ‘텍스트의 자식들‘인 40~50대가 천박해 보인다며 젊은 세대를 비난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글을 쓸 때 부사나 형용사는 가급적 빼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왜냐하면 부사와 형용사, 감탄사는 감정의 강도를 강조하고 과장하는 것이니까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소위 인터넷 논객이라는 제 아랫세대의 글을 못 읽을 때가 많아요. ‘씨바, 졸라‘가 너무 많이 나와서요.
말과 글은 다르잖아요. 말로는 욕을 하거나 낄낄거릴 수 있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말에는 연극적 요소가 있고 현장성이 중요하거든요. 거기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순간적으로 감정이 공명되는 순간 - P43

이 있고, 공명이 되면 그 강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말에서는 순간적으로 격정적인 표현이 나오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글은 다르죠. 아니, 우리 세대는 다르다고 생각하죠. 문자는 훨씬 차분하고, 성찰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사나 형용사, 그리고 강도를 강조하는 접두사는 되도록 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요. 그런데 말에서뿐만 아니라 글에서도 욕이나 ‘핵’, ‘개‘, ‘존나‘ 같은 접두사와 수식구가 난무하는 것이니 글의자식들이 보기에는 너무 천박한 거예요.
일본의 대중문화비평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사이토 다마키는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분석》에서 이것을 감정의 강도를 소통하고 공유하는 관계라고 말합니다. 저자가 신주쿠, 하라주쿠, 이케부쿠로 등 일본의 대표적인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청소년들이 어떤 말을 하며 소통하는지를 살펴봤더니, 의미를 공유하는 게 아니라 감정의 강도를 공유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핵심이 ‘의미‘가 아니라 감정의 ‘강도‘인 것이죠(사이토 다마키, 2005). 86세대 같은 근대주의자들에게는 될 수 있으면 자제해야 하는 것이 청소년 관계의 토대가 된 거예요. 말이 아니라 글에서도요. - P44

저는 지금의 리터러시 논의에 크게 두 가지 편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문자를 기본 미디어로 전제하려는 편향인데요. 문자를 기 - P45

반으로 하는 리터러시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가정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편향은 문(文)이라는 것을 협소하게 정의해서 텍스트 중심으로 보고 있다는 거죠. 소통에 참여하는 사람이나 맥락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문해력에서 문이란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관련 논의들에서는 관계 혹은 관계성이라는 것이 거세된 채, 내가 혹은 상대가 텍스트를 얼마나 잘 이해했느냐를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텍스트‘, ‘너-텍스트‘는 보는데 ‘나와 너‘, 궁극적으로 ‘현재의 맥락에서 텍스트를 공유하고 있는 나와 너‘를 고려하지 않는 거예요. 이건 문제가 많습니다. - P46

"어떻게 다 읽으셨어요?"라고 물었더니 "우리 이야기잖아."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제 어머니 얘기를 왜 하냐면, 어머니는 성경을 여러 번 읽으셨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회의 기준에서 봤을 때 문해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사셨어요. 그런데 한자리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어내신 거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자기 삶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에요. 자신의 삶과 유리된 글은 누구도 쉽게 읽을 수가 없거든요. 제게 법학자가 쓴 논문을 주고 읽으라고 하면 굉장히 힘들어할 것이고, 못 읽어내는 부분도 많을 거예요. 텍스트라는 것이 객관적이고 공평한 난이도를 가지고 있고, 훈련을 받으면 모두가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삶과 권력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는 거죠. 어떤 텍스트로 평가를 하느냐는 권력의 문제예요. 우리 어머니에게는 그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힘이 없는 거죠. 내가 원하는 내 삶의 텍스트를 써내고, 읽어내고, 평가받을 수 있는 권력이 없는 거예요. 시험도 그렇고, 교육제도도 그렇고, 보편성과 일반성을 - P47

추구하는 과학이라는 체계 또한 그런 권력을 용인하지 않거든요.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평가하는 것은 과학적 지식이에요. 그런데 지식은 과학적으로 구성되기도 하지만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되는 영역도 분명 있거든요. 삶의 내러티브, 시쳇말로 하면 삶의 지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통찰,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이고 비판적인 이해, 이런 것을 평가하지는 않아요. 그런 식으로 보면, 어머니는 텍스트 중심의 문해력, 과학 중심의 리터러시, 제도가 ‘용인‘하는 리터러시의 변방에 있는 거죠. 이런 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텍스트를 읽을 때 그 텍스트를 대상으로만 생각할 뿐 지금 나와 교감하고 소통하며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이 주체성과 관련된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님은 그 책이 선생님과 어머님 사이에서 지어진 글이기 때문에 ‘우리‘라는 말을 쓰셨을 거예요. 글은 선생님이 쓰셨지만 함께 작업한 책이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관계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세계를 짓는 일이니까요. - P48

선생님이 쓴 책을 어머님이 쉽게 읽으실 수 있었던 것은 관계 내에서 있었던 내용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선생님이 그 책에서 리터러시라는 단어를 썼는데 어머님은 리터러시라는 단어를 모르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읽으면서 리터러시가 무슨 뜻이겠구나 하고 짐작해내실 수 있어요. 이것은 순전히 선생님과 어머님의 관계 안에서 그 단어를 독해해내는 것이지, 사전에서 찾은 의미로 독해하는 것이 아니에요. 보통 리터러시라고 이야기할 때는 사전의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고요.
사전적인 의미의 문해력이 아무리 떨어진다 해도 대부분의 사람은 ‘우리‘ 사이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것입니다. 텍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어머님과 선생님이 함께 겪었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니 그 이야기 속에서 어머님이 텍스트를 해석할 수 있고, 당연히 그 해석은 다른 어떤 학자의 해석보다 분명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줄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권력화된 방식의 리터러시는 기호학적이고 추상적으로 다루는 역량만을 평가하고 그것만 리터러시라고보는 거죠.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누가 듣느냐, 누구와 함께하고 있느냐, 즉 선생님 말씀처럼 관계로서의 맥락이 빠져 있어요.
오자와 마키코가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에서 비판하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학교는 늘 기호학적이고 추상적인 것을 다루는 역량을 가르치고 그것만 측정하고 있다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기호학적이고 추상적인 지식을 삶의 맥락 속에서 위치시키는 힘은 잃어가 - P49

고 있다는 것입니다(오자와 마키코, 2012). 저는 그런 비판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리터러시라는 것 자체가 삶을 위한 것이기도 하고 삶의 리터러시이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삶의 리터러시, 즉 삶을 읽어내는 리터러시는 완전히 무시되는 거죠.
(...)
삶의 기예라기보다는 권력으로서의, 자본으로서의 리터러시가 힘을 얻는 상황은 우려스럽죠. 그런 권력을 가장 야만적으로 행사하는 장면을 인터넷에서 종종 보게 돼요. 우리는 누군가의 리터러시를 판단할 때, 이 사람이 어떤 텍스트를 얼마나 정확하게 이해했느냐를 봐요. 그런데 이 텍스트를 해석하는 권위는 자기한테 있다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석하면 잘하는 거죠. 특히 인터넷에서 문해력이나 리터러시라는 말이 쓰이는 맥락이 그렇습니다. 이게 얼마나 황당하냐면, 자기가 원하는 독해를 못 하는 사람한테 "이런 문해력 떨어지는 것들"이라고 비난한다는 거예요. 이 사람과 나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 텍스트를 - P50

읽어냈느냐만 보는 거죠.
맥락(context)이라고 하는 것이 크게 보면 두 가지라고 생각해요. 먼저 텍스트를 둘러싼 사회적 맥락이 있죠. 텍스트가 생산되고 공유되고 소비되는 방식과 관련된 맥락이에요. 또 하나는 내가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과 이 사람이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 즉 각자가 텍스트에 접근하는 맥락이 있어요. 이 두 가지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진리가 상대적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내가 이 텍스트를 대할 때와 저 사람이 텍스트를 대할 때는 굉장히 다른 지식과 태도를 갖고 읽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내 방식대로 읽어내지 않으면 리터러시가 떨어진다고 비난하는 것, 이게 위험하죠. - P51

재밌는 것은 서로 난독증이라고 한다는 점이죠. 이런 점에서 리터러시는 상대방을 조롱하고 비판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리터러시가 문제라면 왜 문제인가, 어떻게 문제인가는 논의하지 않는 거죠. 리터러시는 공적인 거잖아요. 내가 사유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말은, 리터러시가 있다 없다를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뭔가를 해석하고 난 다음에 불안해합니다. 불안해하는 게 당연하고 필요한 거예요. 내가 제대로 해석했나, 그게 불안한거죠. 왜냐하면 리터러시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원래 이런 의미야."라고 할 수 있는 신은 아무 데도 없기 때문이에요. 혹시라도 신이 존재한다면 토론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합의겠죠.
인터넷상의 논쟁에서 상대를 비난하며 ‘문해력이 문제야, 난독증이냐‘라고 하는 걸 볼 때마다, 이 어마어마한 주체성은 어디로부터 - P52

오는 것일까 하고 아연실색하게 돼요. 저는 제 전공 분야의 글을 독해할 때조차 혹시라도 잘못 해석한 게 아닌가 늘 불안해하거든요. 그러니까 물어볼 수밖에 없는 거고, 토론할 수밖에 없는 거죠. 둘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리터러시를 사유화하든가, 자신을 신격화하든가. 아니면 의미란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의식을 통해 이미 그 세계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에게 비의적으로 전달된다고 보는 영지주의 겠죠.
어떤 글을 본 적이 있는데요, 지독한 비문이라 도저히 읽을 수가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좋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명료한 글도 못 읽으면 글을 읽는다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비아냥거려요. 한국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주술관계도 안 맞는 글이었는데 말이죠.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했더니, 사실 그분은 그 ‘글‘을 읽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글을 쓴 사람을 추종하고 있었던 거예요. 한마디로 말해서 교주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거기에 ‘훔치훔치태을천상원군‘라고 쓰는 ‘옴마니반메훔‘이라고 쓰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죠. 의미는 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관계 자체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이심전심이고 불입문자예요. 세계를 텍스트로만 간주하고 관계를 무시하는 것만큼이나 관계 자체에 의미가 완전히 내재한다고 보는 이런 태도도 요즘 나타나고 있는 매우 우려할 만한 현상입니다. - P53

큰 맥락에서 보자면, 우리 사회에서 리터러시의 변동은 두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외부의 변동이 있고 내부의 변동이 있는 거죠. 외부의 변동이라 하면 미디어 생태계의 변화와 그에 따른 정보채널의 다원화, 세대 간 커뮤니케이션의 단절 같은 요소들입니다. 사회문화적이고 기술적인 변화에 따라 여러 매체가 중첩되고 발달하는 멀티리터러시의 급부상에서 오는 변동이라고 할 수 있죠. 미디어의 지형이 요동치면서 언론, 교육, 관계 등의 영역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랄까요.
이게 외적인 변동이라면, 그 상황 속에서 일종의 자기 성찰성에 대한 긴박한 요구가 있는 거 같아요. 제도 차원에서 리터러시를 정의할 수 있고, 리터러시를 평가하는 도구를 선정하며 특정한 지표를 운용할 수 있는 사람들, 지배적인 리터러시의 형태들을 체화하여 사회문화적 자본으로 만든 사람들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 상황, 이것을 리터러시 내부의 변동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전 외부의 변동이 만들어내는 이슈 못지않게 이 내부의 변동, 즉 성찰성의 부재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대표적으로 ‘이 문해력 떨어지는 것‘, ‘난독증 아니야‘, 또 제가 싫어하는 말 중의 하나가 ‘예절이 지능의 문제다. 지능 떨어지는 것들이 예절이 없다‘는 식의 말이에요. 어찌 보면 상대 - P54

방을 나와 다른 차원에 위치시키는 거죠.
(...)
듣고 있으면 ‘무식해’ 보이죠. 그런데 그 ‘무식하다는 느낌‘을 역사적으로 또 사회문화적으로 해석해내지 않고 지능과 연결시켜버리면 그 사람이 속한 사회경제적인 계층을 ‘지능이 낮은 계층‘으로 본질화해버리는 거죠. 지능이 낮으니 저런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인데, 정말 끔찍한 거예요. 이런 사고방식은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인종주의와도 닿아 있고요.
(...)
그래서 난독증이다, 문해력이 떨어진다, 지능이 떨어져서 예의가 없다, 이런 말들은 문해력이나 지능을 들어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 P55

무시해버리는 행위인 거죠. 그런 말들이 나오는 순간 대화는 끝나버리는데, 너무 쉽게 꺼내요. 텍스트를 오해한 상대의 리터러시가 문제가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런 단정적인 말을 입 밖에 내는 사람의 성찰성이 더 큰 문제예요.
(...) 다른 사람을 리터러시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낙인찍는 건 리터러시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 없는 거예요. 내가 읽고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불확실할 수 있는가를 성찰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 너무 쉽게 얘기하는 거죠. 나는 갖춘 사람, 상대는 갖추지 못한 사람. 나는 우월한 시람, 상대는 열등한 사람.
문해와 비문해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것은 철저히 비과학적입니다. 문해력이 좋다, 떨어진다로 생각하기보다는 문해력에 스펙트럼이 있고 종류도 굉장히 다양하다고 보는 게 적절하죠. 누구도 모든 맥락에서 통하는 완벽한 문해력을 갖고 있진 못하거든요. - P56

이 성찰의 문제를 다시 선생님이 말씀하신 관계성의 문제와 연결짓고 싶은데요. 성찰한다는 것은 저 사람이 한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가를 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때 첫 번째로 돌아봐야 하는 것은 아마 저 사람이 한 ‘말‘일 것입니다. 텍스트인 그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가, 혹시 틀리지는 않았는가를 돌아보는 것이 성찰이죠. 그러나 두 번째로 우리가 성찰해야 하는 것은 ‘저 사람‘의 말이라는 점이에요. 말을 해석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말을 ‘저 사람‘이 했다는 것을 보려는 게 또 성찰인 거죠. 말과 글의 의미는 저 사람과 나 사이라는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니까요. - P58

리터러시를 단숨에 정의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워낙 큰 개념이라서요. 하지만 리터러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방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머리에 든 게 많다, 학식이 높다‘ 이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런 관점에서 리터러시를 보면 개인이 무언가를 차분히 쌓아올리고 공부를 많이 해서 머리에 넣으면 리터러시가 점점 내 안에서 늘어나는 거죠. 조금 단순화시키자면, 나는 리터러시 100인데 쟤는 리터러시 80이야, 이렇게 숫자로 표시할 수있는 거예요. 이렇게 정의되는 리터러시가 함의하는 메타포는 ‘쌓아올리는 빌딩으로서의 리터러시‘ 예요. 그러니까 "나는 빌딩이 60층짜린데 쟤는 20층짜리야."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다양한 영역에서스펙트럼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단일한 수직선 위에 높고 낮음으로 존재하는 거예요. 리터러시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다고 생각하죠. 리터러시는 거대한 사다리이고, 나는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와 있는 셈이에요.
그렇지만 전혀 다른 방향의 메타포도 가능하거든요. 일종의 브리지, 다리를 놓는 것이 리터러시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민주주의체제에, 또 다양한 담론이 쉼 없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지금의 사회에 맞는 메타포라고 생각하는데요. 이 관점에서 보자면, 나한테 리 - P65

터러시 자원이 많이 있다는 것은 타인을 깔볼 자격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다리를 놓을 수 있는 능력이 많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죠. 다른 면에서 보자면, 다리를 놓아야 하는 책무가 생기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메타포예요. 나는 60층짜리니까 거기서 내려다보는 게 아니고, 상대방으로 가는 리터러시라는 다리를 놓을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거예요. 그러면 이렇게 능력을 가진 사람은 다리를 놓아야 하는, 철학이나 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을 구축할 수 있는 윤리적인 책무가 생기는 거예요. 더 노력하고 더 이해하려고 애써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겁니다. 지금은 이런 책무에 대해서는 생각하지않고 줄을 세우는 방식으로 리터러시를 동원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 메타포의 빌딩을 바벨탑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아요. 자기 안에 일종의 바벨탑을 쌓아가는 거니까요. 성경에서 신은 바벨탑을 무너뜨립니다. 바벨탑을 무너뜨리고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만들죠. 그 이유를 저는 이렇게 봅니다. 누군가가 딱 하나의 언어를 독점적으로 가지고 신에게 도전하고, 또 그 언어로다른 이들에게 명령하고 깔보는 데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라고요. 정말 해야 할 것은 바벨탑을 쌓는 게 아니라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들이 더 많이 소통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거라고요.
선생님이 하신 말씀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주제가 나왔습니다. 우리 사회는 리터러시가 어떤 윤리적인 책무, 소명, 의무를 불러일으 - P66

키는가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리터러시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이 어떤 윤리적 책무를 가져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이게 얼마나 권력적인 것인가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리터러시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사회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사회를 서열화하고 지배와 피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 또는 누군가를 비인간화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거죠. - P67

선생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앎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도약이 있어야 되거든요. 차이가 있어야 돼요. 나와 똑같은 사람에게서는 배울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커뮤니티를 구성할 수 있고, 그 커뮤니티에 속할 사람들을 고를 수 있으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르침이나 배움은 일어나지 않아요. 스스로 속이는 거죠. 그런데 정서적인 면이나 동기적인 면은 계속해서 강해져요. 어쨌거나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걸 눈으로 확인하니까요. 소셜미디어가 없던 시절에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해도,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런 불안감이나 작은 의구심이 한쪽에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내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거예요. 내 말의 정당성이나 윤 - P70

리성을 지지받는 데 그 정도면 충분한 거죠. 그러니까 겁이 없어져요. 나침반 바늘이 흔들리지 않는 거죠.
이런 점을 개념화한 용어가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cffect)‘예요. 좁은 욕실에서 노래를 부르면 자기 목소리가 울려서 성량이 풍부해진 것 같잖아요. 그렇게 소리가 잘 울리도록 설계한 방을 에코 체임버, 즉 반향실이라고 하거든요.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줄 사람들로 소셜미디어의 관계를 구축하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한 커뮤니티에만 가입하면 자기 목소리가 합리적이고 대세라고 느끼게 되죠.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이 대부분이니까요. 저 또한 이런 ‘반향실 효과‘에서 자유롭지 못해요. 중요한 건 자신이 만든 온라인 공간이 세계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세계는 소셜미디어로 축소될 수 없어요. 그렇게 느끼는건 분명 착각이죠. - P71

이렇게 볼 때, 인터넷 커뮤니티 대부분의 의사소통은 동일한 언어들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에 가까워요. 동일한 언어들이 반복되는 걸 잘 보여주는 단어가 바로 ‘동감합니다‘인데요. 누군가가 쓴 글을 보니, 내가 생각하던 것을 이 사람이 썼어요. 그렇지만 아무리 평소 내가 생각하던 것이라 해도 다른 사람이 썼다면 나하고는 다르게 쓰거든요. 좀 더 디테일하게,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에서 좀 더디테일하게. 대신 내가 좀 더 디테일하게 쓸 수 있는 부분은 빠져 있겠죠. 이런 격차,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 차이를 없애버리는 말이 ‘동감합니다‘ 예요.
생각해보세요. 동의한다, 동감한다는 말은 나도 이미 그걸 알고 있다는 뜻이죠.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라면 거기에서 무슨 배움이 일어나고 도약이 일어나겠어요. 그저 강화만 될 뿐이죠. 그런 면에서, 도약의 반대편에 있는 게 강화라고 생각해요. 제 책 《고 - P72

통은 나눌 수 있는가》 3부에서 제가 강조했던 게, 이런 의사소통의 공간은 서로의 감정의 강도만 강화하는 공간이라는 겁니다(엄기호, 2019). 공감이라는 이름으로요. 문제는 이 공간이 전혀 성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죠. 최근에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도 출간되었습니다 (폴 블룸, 2019).
뭔가 활발하게 가르치는 것 같고 배우는 것 같지만, 사실 강도만세질 뿐 도약은 일어나지 않는 거죠. 저는 이렇게 도약이 일어나지않는 것 자체를 비문해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리터러시를 상태가 아니라 운동이라고 정의한다면, 한 상태에서 계속 강화만 되는 것은 비문해죠. 이런 점에서 보면 확실히 리터러시의 위기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P73

문자의 도입과 인쇄술의 발달이 인간의 사고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지식의 생산과 유통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그리고 학문과 예술의 발달을 어떻게 추동했는지 같은 여러 질문을 다룬 대표적인 저작을 꼽으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Orality andLiteracy)》와 마셜 맥루언의 《구텐베르크 은하계(The Gutenberg Galaxy)》를 꼽을 것 같아요. 이외에도 인쇄술의 영향을 깊이 다룬 엘리자베스 아이젠슈타인(Elizabeth Eisenstein)의 《근대 유럽의 인쇄미디어 혁명(ThePrinting Revolution in Early Modern Europe )》이나 마이클 콜(Michael Cole)과 실비아 스크라이브너(Sylvia Scribner)의 《리터러시의 심리학(Psychology ofLiteracy)》 등도 꽤 흥미로운 저작이죠. 이들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문자 및 리터러시의 발달과 인간의 사회문화적·인지적 변화 사이의 - P77

관계를 추적합니다. 이 저작들은 조금씩 다른 방향에서 문자문화와 인류의 관계를 추적하고 있어요. (...)
저는 이 중 비교적 덜 알려진 윌리엄 프롤리(William Fravley)라는 학자의 견해를 가지고 텍스트와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William Frawley, 1987). 프롤리는 텍스트를 중심으로 인류의 역사를 크게 세 시기로 분류했어요.
첫째, 구술 시대예요. 문자가 발명되기 전 텍스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즉 비텍스트성(non-textuality)의 시대죠. 둘째, 텍스트가 나와서서서히 성장하던 시대예요. 인쇄가 나오기 전까지, 텍스트성(textuality)이 탄생하고 성장하던 시대죠. 셋째, 인쇄가 대중화되면서 텍스트가 급속도로 성장하던 시대입니다. 인쇄 기술에 의해 텍스트가 대량 생산되고 소비되던 시대예요. 이를 초텍스트성(hyper-textuality)이라고 부릅니다. 프롤리가 깊이 논의하지는 않았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웹문서의 폭발적 증가는 초텍스트성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죠. 각각 비텍스트성, 텍스트성, 초텍스트성의 시대라고 명명할 수 있겠네요.
프롤리가 이 주제를 갖고 쓴 책이 《텍스트와 인식론(Text and Epistemo -logy)》인데 여기에 그의 문제의식이 잘 담겨 있어요. 텍스트의 탄생, 성장, 비약적 확대가 어떻게 인간의 앎, 즉 인식론에 영향을 주는가를 살피자는 거죠. 우리가 단지 문자를 활용한 것이 아니라 문자가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꾸어놨다는 겁니다. - P78

프롤리의 논의가 재미있는 것은 텍스트를 당연시하지 않는 관점을 보여주기 때문이에요. 텍스트가 무색무취한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역사관과 진리관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거죠. 저는 주로 텍스트성에 기반해 말씀드렸지만, 구술사적인 리터러시나 방법론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나 또래 친구들이 영상을 엄청나게 보지는 않는 듯해요. 선생님 경우에도 텍스트를 통해 삶이 죽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 과정에 대해 메타적으로 생각해본 경험이 있으신지요? 메타적이라 함은,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인간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쉽게도 현재의 학교 리터러시 교육에서는 잘 던지지 않는 질문이죠. - P85

과거를 이 자리에 불러와 현재화하는 구술과는 달리, 지금 이 순간을 과거로 만들어 미래에 남기는 것이 글의 기본적인 역할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쓰인 글은 해석을 기다리는 그 무엇이 됩니다. 대담을 시작하며 말씀드린 것처럼, 읽는 사람은 세상 모든 것을 텍스트로 여기고 그 의미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석은 자기만의 해석이 됩니다. 의견이 되는 것이죠. 이렇게 고독하게 자신만의 완결적인 의견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것이 근대적 시민이고 개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P89

그렇기 때문에 저는 텍스트라는 매체, 읽기라는 행위가 ‘개인을 출현시켰다‘고 생각해요. 이건 제 얘기가 아니라 서양의 많은 철학자가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구분해주신 것처럼, 구술문화에서는 지식 자체가 공동체지식이죠. 여기서는 지식의 주체가 공동체예요. 부족장이나 어른이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해도 개별화된 지식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었어요. 절기에 맞춰 마을 단위에서 이뤄지는 전통 의례 행위 같은 것도 조금씩 변하잖아요. 이런 연행(演行) 행위도 마을 어른들의 지도 아래 다른 사람들이 협업하면서 살아 움직입니다. 다들 조금씩 보태가면서 공동 창작의 형태로 발전시킨 지식입니다.
근대가 개인을 전면화시켰지만, 그 이전이라고 개인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지식인, 특히 불교의 승려들은 다 개인이었어요. 이들이 개인일 수 있는 이유가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한데, 읽는 순간에 인간은 고독해지거든요. 인간은 글을 읽으며 생각을 하잖아요. 생각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입니다. 특히 깊이 있게 골똘히 생각할 때 인간은 다른 사람과 같이 있는 순간조차도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물러나 혼자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읽기는 고독한 작업이죠. 구술문화에서 듣는 것은 계속 공동체에 참여하는 행위예요. 이와 달리, 읽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여행을 떠나는 거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책을 읽었던 이유가 그거였어요. 단칸셋방에서 다섯 식구가 살았지만, 책을 읽을 때만은 내가 그 방 소속이 아니게 되거든요. 많은 사람이 읽기를 여행에 비유하는데, 저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적 - P90

행위라고 생각해요.
여행은 내가 속한 공동체를 떠나서 낯선 곳으로 혈혈단신 가는 것이죠. 개인이 된다는 것에서 고독은 매우 중요한 문제예요. 그 첫 번째 이유는, 고독해진다는 것은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라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기 때문이에요. 두 번째로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자기를 대면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자기를 대면해야만 내면이 탄생합니다. 내면이 형성되는 계기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읽는 행위에서 비롯되죠.
읽기가 어떤 역량을 키워주는가라는 주제와 결합시켜본다면, 저는 읽기라는 행위가 두 가지 역량, 고독해질 수 있는 역량과 고독을 견딜 수 있는 역량을 키워준다고 생각해요. 아렌트가 구분한 개념으로 보면(한나 아렌트, 2006), 읽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고독해지는 게 아니라 외로워집니다. 추방되는 것에 가까운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와요.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이라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역량인데, 바로 이것이 읽기와 관련해서 더 깊이 얘기해야 할 주제라고 생각해요. 읽기는 개인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성장시키는가.
다음으로 문자와 읽기가 키워주는 역량이 무엇이냐, 저는 역사에 대한 감각이라고 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게 아니라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서 사유한다는 게 중요해요. 역사적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고 흐름에 사건들을 엮을 줄 안다는 것이죠. 우리 - P91

는 어떤 현상을 볼 때 자동으로 역사적으로 사유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일문제 같은 현안이 생길 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지금 이 일이 벌어지는가, 또 과거에는 이 일을 어떻게 다루었기에 여전히 그 여파가 지금에 미치는가, 그러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해야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라는 식으로 사유한다는 거죠. 이게 역사적 사유예요.
역사적으로 사유하는 존재의 특징은, 현재를 똑 떨어진 시공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본다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텍스트성이 생기고서야 기록된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긴 역사에 대한 감각이 있어야 자기 자신을 연속선상에 놓고 사유할 수 있게 되거든요. 짧은 역사를 갖고는 역사라고 할 수가 없는 거죠. 짧은 역사에 대해 우리가 쓰는 개념은 ‘당대‘예요. 3대라고 해도 사실 당대죠. 당대를 넘어서야 역사적 감각이 생겨요. - P92

이런 식으로 본다면, 3대라는 건 역사가 아니라 당대를 구성하는 동시대인인 거고, 동시대를 넘어가면 나랑 무관한 전설의 영역, 설화의 영역이 되는 거죠. 그런데 역사적 사유란 당대를 뛰어넘고 동시대를 뛰어넘는 것이라서, 그러려면 기록이 있어야 하는 거죠. 기록이 있을 때에만 당대라는 동시대를 넘어서 당대 이전에 무엇이 있었기에 당대가 이렇게 구성되었나를 볼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렇다면 읽기라는 것은 개인과, 동시에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만들어내는행위가 됩니다.
또 하나, 제가 주체성의 문제에서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변화는 거대주체의 소멸이에요. 역사적 존재로서의 자기,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이걸 생각하게 되면서 거대주체가 소멸하게 되었다고 보는 거죠. 담론의 공간, 주석으로서의 지식 생산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이런 의미일 텐데요. 이제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알거든요, 자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요. 특히 자연과학에서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지식이라는 게 거의 불가능하죠.
제가 이걸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대주체를 종식시켰기때문에 인간이 더 겸손해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만능감을 제거할 수 있죠. 많은 연구자가 처음에 어떤 주제를 떠올리면서 이건 정말 기발하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논거를 대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저작을 읽다 보면 자기가 하려는 게 대부분 이미 연구되어 있다는것을 깨닫게 되죠. 인류 전체의 거대한 축적 위에 올려지는 작은 벽돌 하나라도 되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말 겸손 - P93

해지거든요. 아주 예외적으로 읽기를 반복할수록 자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만 대다수의 사람은 읽으면 겸손해집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개인을 만들고 역사적 주체를 만들되, 동시에 거대주체가 아닌 작고 소박한 주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읽기라는 행위가 가진 매우 독특한 특징이라고 생각해요.
(...) 쓰기와 읽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밀접하게 엮여 있죠. 사회적으로 볼 때 리터러시 행위는 쓰는 주체가 텍스트를 매개로 읽는 주체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읽기와 쓰기는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글을 기반으로 하는 담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니까요. 쓰기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 먼저 다른 미디어, 특히 이미지나 영상과 비교할 때 텍스트가 갖는 두드러진 성격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텍스트의 유연함을 들 수 있어요. 영상에 비해 문자매체가 - P94

갖는 강점 하나는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어떤 식으로든 언어화할 수 있다는 거예요. 앉은 자리에서요. 어디서든 상관이 없죠. 슥슥 글로 풀어내면 되는 거니까요. 영상은 그럴 수가 없죠. 내가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아도 아무렇게나 영상화할 수가 없어요. 상상 가능하다고 뚝딱 만들어낼 수가 없는 거죠. 게다가 어떤 아이디어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투여해야 해요. 그러니까 SF나 판타지의 세계는 천문학적인 돈을 넣어야 영상으로 겨우 만들어낼 수 있는 반면, 문자로는 버스를 타고 있든 화장실에 있든 상관없이 끄적이고 타이핑할 수 있는 도구만 있다면 얼마든지 머릿속의 개념을 언어화할 수 있는 거죠. 영상에 비해 생산단가가 낮고 경제성이 월등한 겁니다. 물론 그렇게 나온 텍스트가 얼마나 깊이나 가치를 갖느냐는 다른 문제지만요.
다음으로 검색과 인용에서 텍스트의 강점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질문을 던져보죠. 텍스트 검색 및 인용의 유연함을 영상이 따라올 수있을까요? 다양한 소스를 엮어 하나의 논리적 구조로 만드는 일에 있어 단어의 연쇄라는 동일 포맷을 유지할 수 있는 텍스트에 비하면, 장르, 해상도, 구성, 색감, 음악, 내레이션 등의 요소들이 울퉁불퉁하게 엮일 수밖에 없는 영상이 같은 수준의 유연성을 확보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다시 말해, 텍스트매체의 경우 수많은 텍스트를 모으고 변형해서 다른 텍스트로 만들어내기가 비교적 수월해요. 하지만 영상의 경우에는 그게 쉽지 않죠.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상들을 묶어서 하나의 영상으로 만드는 건 까다로울 수밖에 없어요.
유연성, 경제성에 이어 텍스트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특징 하나가 추상성이에요. 영상이 추상적일 수 없다거나 텍스트가 구체적일 수 - P95

없다는 말은 아니에요. 밀도 있는 묘사나 추상을 이미지화한 영상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미디어의 속성상 문자매체는 시각매체에 비해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개념들을 아주 잘 다뤄요. (...)
물론 구체성에 있어서는 텍스트가 영상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멀티미디어가 세계를 그대로 복사하고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인데, 이런건 유튜브가 잘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신발 끈 묶는 법, 레이업슛 하는 법, 뜨개질 하는 법 같은 것들은 아무리 말로 해봤자 영상으로 보는 게 백배 낫습니다. 하지만 추상적 개념을 매개로 하는 사유, 예를 들어 존재라든가 과정, 관계, 사랑, 자유, 평등, 이런 것들을 개념화하고, 이를 체계화해서 사유의 틀, 나아가 이론을 만들고 소통하는 것은 영상으로 하기가 굉장히 힘들죠. - P96

소쉬르가 말하는 언어의 자의성인데(페르디낭 드 소쉬르, 2006), 이 앞에 있는 물건을 탁자라고 하건 데스크라고 하건, 그것은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누구와 얘기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탁자/나 /데스크/라는 말소리 자체에 의미나 개념이들어 있지는 않아요. 자의적인 거죠.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의미하는 - P97

대상과 언어 간의 거리가 엄청나게 먼 거예요. 거의 관계가 없는 거죠. 그런데 영상은 관계가 상당히 가깝죠. 관점이 개입되고 편집이 들어가긴 하지만, 찍는다는 것은 재료가 현실이거든요. 영상이 재현(represent)하는 미디어라면, 언어는 어떤 세계의 사태나 사건, 현상이나 대상을 상징(symbolize)하는 거예요.
언어와 대상 사이의 거리가 멀거나 관계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말과 글은 또 쓰임이 굉장히 달라요. 말은 발화자와 구체적인 맥락 모두를 담고 있어요. 언제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일어나는 발화 사건(speech event)을 생각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글은 구체적인 맥락이나 말하는 사람에게서 어느 정도 독립적이에요. 또 말은 호흡이 짧아요. 하지만 글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확장하는 일종의 저장장치가 되죠. 외장 하드디스크 드라이브 같은 역할을 한달까요. 그래서 엄청나게 긴 스토리나 논리를 전개하는 게 가능한 겁니다. (...)
그런 면에서, 쓰기라는 건 말을 그냥 옮겨놓는 게 아니에요. 말이 문자화되는 순간, 문자가 그 자체로 해낼 수 있는 영역이 생기는 거죠. 예를 들면 길고 촘촘한 내러티브를 만들어내거나, 방대한 스케일 - P98

의 역사적인 사건을 자세하게 기술하는 일, 또 고도의 추상성을 갖춘 이론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일 등이 있죠. 만약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가 마르크스나 헤겔, 도스토옙스키 같은 사람들의 생각을 향유하거나 우리의 삶에 적용하는 게 가능할까요? 당연히 불가능하죠. 그걸 가능하게 하는 미디어가 쓰기라는 겁니다.
(...)
이걸 자유도라는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거예요. 텍스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영상이 자유롭게 하는 게 분명히 있 - P99

어요. 그런데 지금의 영상 편집 기술이나 소프트웨어 발전 단계에서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누리는 자유로움을 영상을 찍고 만드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이건 좀 의문이에요. 언어를 매개로 해서 세계를 로딩하고 편집하고 그걸 통해서 지식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경험한 것을 성찰하고 나눌 수 있는 힘, 그것을 영상이 아직은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텍스트의 역사가 그만큼 길기 때문에, 영상기술이 아무리 빨리 성장한다고 해도 십 몇 년 안에 이걸 뒤집어엎을만한 힘을 얻기는 힘들다고 보는 거죠. 글을 쓰고 다듬는 속도로 영상을 생산하고 편집할 수 있는 시대는 아직 멀었어요. 결국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대한 감각, 긴 시간에 대한 감각, 제가 말씀드린 추상성에 대한 감각 등은 영상, 특히 현재 기술 수준의 영상에서보다는 텍스트에서 훨씬 더 잘 구현될 수 있고 자유자재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에서, 책 읽기는 영상 보기든 둘 중 하나만 잘하면 된다거나 혹은 지금은 영상 시대니까 영상 만드는 것만 잘하면 된다고 말하는 건 무책임할 수 있습니다. 어떤 매체를 가르칠 것인가를 고민할때 ‘요즘 뭐가 대세라더라‘를 중심으로 생각해서는 안 돼요. 인간에게 어떤 사고의 도구를 줄 것인가에 대해서, 그 도구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러한 변화가 개인과 사회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대중성만을 좇아서는 안 된다는겁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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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나
김성우 지음 / 쇤하이트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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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철학하고 싶다.

"네가 영어를 가르치지만, 꼭 인생과 연결시켜 가르치도록해라."
"아아! 네······."
"경험과 엮어서 가르치는 게 중요해. 영어도 인생이랑 연결시켜서 가르쳐, 꼭. 그래야 사람들이 귀 기울여 듣는다."
"명심할게요."

‘영어를 인생으로 가르치기엔 제가 참 모자라네요.
하지만 영어를 인생이랑 가르치기 위해서
좀 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과목이 무엇이든
모든 선생님들이 삶을 나누고 풍성하게 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가르치는 일은 곧 삶을 나누는 일,
그러다 보면 가르치는 일과 배우는 일의
경계가 사라지겠죠.‘ - P55

세월이 갈수록
꿈을 이룬 사람들보다
꿈을 미룬 사람들을 사랑한다. - P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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