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 얼라이브 - 남자를 살아내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 지음, 김승욱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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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것은 유령 이야기다. 아니, 모험담이다.
내가 어떻게 유령 같은 삶을 그만뒀는지 들려주는 모험담이다. - P17

내가 보기에 세상은 아름답지만 망가진 것들이 있는 장소였고, 나는 그것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었다. - P28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두려움과 나란히 자리한 차분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내가 아빠보다 더 힘이 세다고 되새긴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난폭함과 두려움을 모두 작고 단단하게 꾹꾹 눌렀더니 그것이 내 배 속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져 버렸으며 그 뒤에 아름다운 것이 남았다는 사실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28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나한테 몸을 밀착시켰던 그 쌀쌀맞고 단정치 못한 남자가 어떻게 그 이상하게 눈빛이 텅 빈 것 같은 상태에서 빠져나와 바로 그날 밤에 나와 함께 엔진 모형을 만들 수 있어요? 누구나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그래요?
(...)
"난 네가 평범한 아이처럼 자랐으면 좋겠어." 엄마가 날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엄마의 입에서는 치약 냄새가 났고, 엄 - P34

마의 배는 따스했다. 엄마가 하지 않은 말, 엄마가 하고 싶지 않은 말에 깃든 두려움을 나는 어차피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가 날 걱정한다는 것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자신을 설득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도. - P35

물론 사람이 바뀔 수는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가지 면이 만나면 유령이 생겨날 틈이 생긴다. 불협화음이 얼룩을 만들고, 이야기가 찢어진다. - P36

아빠의 행동은 아프지 않았다. 나를 둘로 갈라놓았다. 아빠가 둘인 것처럼.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선 사람으로 만들었다. - P37

‘나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투명 인간이 되는 법을 알아. 내 몸을 조금씩, 조금씩 잠재울 수 있어. 필요하다면 평생 잠들어 있다가 깨어날 수도 있어." - P53

유령 사냥이야. 나는 파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치 이 말이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는 듯이. 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보고, 우리 집안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가 그런 사람으로 굳어져 버린 이유를 파악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왜 항상 흐릿한 눈으로 날 찾으러 왔는가? 내가 그와는 다른 사람이 된 건 무슨 연유인가?
그래서 나는 짐을 싸서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 행동이 곧 생존의 문제임을 인정한다. - P62

계속 가. 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령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것의 목소리였다. 내 무릎이 성실하게 나를 운반했다. - P63

"도망쳐." 이렇게 말하던 강도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았다. 슬로모션으로 돌아가는 스포츠 필름 같았다. 내 무릎에는 둥글게 원을 그리고 글자를 써 넣어도 될 것이다. "내가 죽은 척하기를 그만둔 곳"이라고. - P65

나는 수돗물을 틀고, 곰팡내 나는 모텔 화장실에서 이를 닦으며 내 얼굴을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내 마음속 모습과 거울에 - P66

비친 모습 사이에서 진동하는 이상한 에너지를 물리치려고 했다. - P67

남자들이란.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왜 이 말로 감정을 폭발시켰는지 이해했지만, 내 꿈속의 수염 난 남자와 이 말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플라스틱 블라인드의 틈새로 빛이 강하게 새어 들어올 무렵, 내 팔다리가 무거워지더니 나는 잠이 들었다. 아버지의 실패를 이해하려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나는 또한 가장 커다란 유령과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완전히 망가진 끔찍한 것이 숨어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 P68

놀라서 소리도 내지 못하는 짐승처럼, 나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총구에,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그 남자에게, 그가 내 목소리를 듣고 죽은 눈을 크게 뜨는 모습에 붙들려 있었다. 나는 그의 좌절감이 점점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자신이 붙잡은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신기하게 푹 꺼져 버리던 모습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내가 위험하다고 평가했던 나의 일면, 그러니까 내가 여성이라는 점, 아니 적어도 남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때 나를 구해 준 것이다. - P70

내 피라. 정말 그런가?
그런 것이 중요한가? 나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답을 찾지 못한 채로 그 의문을 덮어 둔 뒤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내가 겪은 일들을 벗어나 살아가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미국삼나무 숲과 게이 바가 있는 그곳에서 나는 트라우마에 좌우당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나는 ‘평범한 것‘을 나의 북극성으로 삼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새로워진 내 모습에 아버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방금 그린 지저분한 가계도와 내 이름이 들어가야 할 빈 자리를 빤히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내가 내린 답은 역설적이었다. 즉 중요하면서 중요하지 않았다. 생물학적인 관 - P90

계는 내 흉터의 원인도 아니고, 내 흉터를 지워 줄 수도 없었다. 내가누구의 자식이든, 내 몸은 내 것이다. - P91

로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게 그런 짓을 할 만큼 사람이 망가졌을까?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면 내 심장을 가득 메운 검은 재앙을 닦아 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얼마나 순진했는지.
(...)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면 내 이야기가 조리 있게 정리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웃통을 벗고 내 꿈속을 뛰어다니는 수염 난 남자는 어떻게 봐도 나였다. 그 남자는 옛날에 내가 강도 때문에 길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처럼, 자유로이 풀려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 P98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로이와 그의 노새, 특별한 사냥총, 죽어 가는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내가 그려 낸 그의 모습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인간의 모습을 주었다는 점만이 중요했다. - P108

나 자신을 지울 수 없다면, 내 과거도 지울 수 없었다. 토대에서 미끄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산만하게 늘어선 수많은 주택들처럼 나도 형태를 바꿀 거라면, 무너지지 않을 정직한 토대를 갖고 싶었다. - P111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 해도…." 파커가 우리 둘에게 말했다. "난 ‘영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고 싶어. 내가 널 존중하고, 네가 날 존중하고, 우리가 먼저 본연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로 하는 것이 중요해." - P115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리 치료사가 물었다. 나는 내 혈관 속, 턱 근육 속, 발바닥의 두꺼운 피부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애썼다. "지금 어디서 자신이 느껴집니까?"
우리는 호르몬에 좌우되는 존재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스트레스와 섹스가 곧 우리다. 공격을 받았을 때, 얼어붙었을 때, 상대를 한 대도 때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의 공포에 눌려 차갑게 식어 버린다. 거울에 어떤 남자가 보이는데도 그 남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리석은 우주,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우주를 건드리기 싫어서 그대로 멈춰 버린다.
"내 무릎이요." 내가 말했다. 무릎 안에서 힘과 두려움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지고, 내가 달리고 또 달려서 도망칠 때 목 안에 들어찼던 차가운 안개와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텔레비전의 창백한 빛이 생각났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다리를 타고 흐르던 전기와 가능성과 두려움이 생각났다.
내 근육에 내 목숨이 달려 있었다. 41번가까지 계속 나를 따라온 아드레날린의 악취. 내 주먹 속에 내 목숨이 동글게 말려들어가고, 팔 근육 속에서 내 목숨이 수축했다. 내 목숨은 멀고 먼 기억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생생한 동물 같은 부분이었다. 내가 해롭다고 착각했던 포효, 해방을 원하는 본능, 어떻게 해도 파괴할수 없고 변형만이 가능한 에너지였다. - P118

나는 그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며 내가 되고 싶은 모습, 그러니까 복수가 아니라 뭔가 밝은 일을 위해 나온 착한 사람 같은 모습으로 그 옆을 지나쳤다. - P127

"그래도 살았으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지."
(...)
"그런 상황에서 사람이 죽는 건 두려움 때문이 아니야. 두려움으로 인해 하는 행동 때문이지." 마이크가 말했다. - P158

내 몸에는 미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공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우주왕복선이 로켓에서 분리되는 모습을 지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저 무사비행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느낌과 비슷했다. - P162

파커는 우리의 결혼 서약을 인용했다. "난 네가 너로 살아가는 데 결코 방해가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다른 건 전혀 약속할 수 없어."
나는 우주선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아니, 우주에 나가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는 우주 비행사가 된 것 같았다. 이야기의 종류가 둘뿐이라면, 때로는 우리가 동시에 주인공이자 이방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P167

내 몸은 내 몸이고, 점점 좋아질 것이다. 나는 그 몸이 겉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새로운 시작은 없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에 가장 가까운 것 같아." 한참 만에 내가 말했다. "나 자신을 보고 내가 어떤사람인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기대가 돼."
"아마 넌 그냥 너일 거야. 더욱 너다운 모습이 되겠지만."
우리 둘 다 그쪽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 P173

"토머스로 로이를 만날 거야?" 파커가 물었다.
명치가 굳는 느낌이었다. 나는 냅킨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몸이 - P174

풀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 그때 내 몸이 얼음처럼 굳었던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파커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페이지로 그 자리에 나타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한쪽에 있어. 그래야 내가 순전히 옛날에 상처를 입었던 그 아이가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갈 수 있었던 거라고, 나중에 변명할 말이 없어지니까."
"그 아이의 모습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파커가 말했다. 공연히 모질게 굴려는 것이 아니었다. "네 모습이 변한다 해도 그건 바뀌지 않아."
"알아."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정말로 알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정상이 되고 싶은 마음,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남자를 무서워하는 아이도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우리가 녹아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나의 모든 자아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그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로이한테 수술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로이한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자기가 상처를 준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 모습 말이야. 그게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P175

내가 수술을 결정하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나 자신 - P178

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긴스는 지금 이 몸에서 나오는 이 목소리를 듣고 총구를 내렸다. 기분이 이상해지졌지만, 이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로이가 내게 남긴 상처와 그 상처에 인질처럼 붙들려 있던 내 삶이 바로 내 목숨을 구해 준 것일 수도 있었다. - P179

남자를 만드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가 내보이는 모습이다. 내게 그것을 가르쳐 줄 아버지가 없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저 문을 열고 내가 직접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P186

이제 아빠와 나만 남았다. 아빠의 얼굴에는 구겨진 희망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나는 슬픔, 반감, 애정 속에서 팔랑개비처럼 돌다가 결국 차의 기어를 후진으로 넣고 조수석 뒤편에 한 팔을 걸친 채 뒤를 돌아보았다. - P131

그가 쏟아 낸 말이 우리 둘 사이에 죽은 시체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계속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작은 것에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아니다. - P190

"나는 네 엄마를 사랑했다." 어쩌면 내가 이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지금도 사랑하고."
"알아요." 나는 두 사람이 복도에서 손을 잡고 소곤거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뒤로 나는 이미 부스러진 내 영역을 지키는 일에 진심을 다하지 않게 되었다. 로이를 감옥에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선택이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만약 로이가 다시 집으로 들어온다면 내가 갈 곳을 선택하는 일. - P190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로이와도 다른 남자와도 재혼하지 않았다. 데이트조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의 집에서 수도사처럼 살았다. 죄책감과 슬픔이 융합되어 그 나름의 정지 화면이 되어 버렸다. - P191

"아빠를 용서하려고 애써 봐." 내가 마지막으로 보모를 보았던 날,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죄책감을 느꼈나 보다." 그녀가 한밤중에 경쾌한 마쯔다 자동차를 몰고 쌩하니 떠나 버렸을 때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내 가슴에 고독이 내려앉았다. 나는 계속 멀리, 멀리 떠가는 우주비행사였다.
사실 나는 엄마가 아빠를 죽여 주었으면 했던 것 같다. 엄마가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엄마를 지켜보았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낯선 얼굴, 내 청바지 무릎에 뚫린 구멍이 신경 쓰였다. 평범한 아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할까?
"혹시 엄마가 곤란해지나요?" 내가 물었다. 엄마가 무너지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얘." 엄마가 너덜너덜한 청바지에서 내 손을 떼어 잡으며 말했다. "이젠 안전해."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의 뒤섞임에 대해, 어떤 단어를 아주 많이 반복하다 보면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안전. 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 - P42

"아빠가 감옥에 가면 좋겠니?"
모든 것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식구들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뇨." 내가 말했다. - P48

그리고 나의 또 다른 일부가 훨훨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경찰관은 엄마가 ‘피곤한 표정‘이라고 말하는 어른의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하니?"
움직이기 시작한 이야기는 계속 움직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관은 내게서 말이 더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나의 침묵이 곧 나의 언어였다. 나의 침묵이 진실을 가려 결국 뭐가 뭔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49

"용서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말했다. "내가 잘 지낸다는 걸 당신은 알아야 해요. 난 행복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진실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세상은 사악하면서 아름답고, 어느 정도는 불가해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망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당신도 아마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를걸요." 질문이 아닌데 마치 질문처럼 들렸다.
그가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계산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중요한것은 그의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었다. 나는 상대를 괴물로 만들 생각이 없는 남자였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들었다. 4월의 그날 밤 내 등에 총이 겨눠진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줄곧 내가 좇던 기분이 바로 이거였다. 나는 시간을 앞지를 수 있고, 내 몸이 나를 해방시키게 할 수 있고, 내 몸의 본능을 믿을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알 수 있었다. - P196

"갈게요, 로이." 내가 마침내 주문을 깨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제 나한테 편지라도 써. 알았지?" 그가 뒤에서 소리쳤다.
절대 안 쓸 거예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글쎄, 봐서요." 내가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환히 웃으며 즐겁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가 안개 속으로 점점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에게 이 순간을 허락해준 것이 일종의 용서였다는 생각을 했다. - P200

나는 점점 흐려지는 내 몸속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점차 실체를 갖추고 있는 남자였다. - P203

아침마다 나는 흡집 난 거울 속 내 모습을 엄격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기로 되어 있는 그달 10일이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남자처럼 ‘구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주유소의 한 칸뿐인 남자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처럼 불안한 순간에는, 남자가 되어도 남자인 척 구는 것처럼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거울을 보며 남자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다.
내 목소리가 굵직해질 수도 있고 갈대처럼 가늘어질 수도 있었다. 대머리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비쩍 마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근육질이 될 수도 있었다. 털이 많아질 수도 있고 여드름투성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나도 나 자신을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내 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P208

"궁금한 게 있는데…." 오래전 성전환 남성인 브랜드 티나가 살해당해 땅에 묻힌 마을을 지나갈 때 파커가 말했다. "왜 그 사람이 계속 거기에 살았던 것 같아? 도시로 이사할 수도 있었잖아. 그랬다면 지주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도망치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금도 살아 있을지 모르는데."
밖은 어스름하고 건조했다. 몇 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보인 것이라고는 가끔 지나가는 픽업트럭 몇 대와 낮게 축 늘어진 광대한 하늘뿐이었다.
"여기가 좋아서 그랬나?"
파커는 설마 그랬겠냐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면···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본연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강제로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게 싫었는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파커는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예전에 피츠버그를 떠나 보스턴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도망치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 - P209

는 한곳에 붙잡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믿었다. 내 본연의 모습이라고 믿는 나의 정체성 또는 내 인생이 마땅히 향해야 한다고 믿는 곳을 지키기 위해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남자를 만드는가? 남자는 스스로 남자가 된다.
파커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쇼핑몰에서 궂은 일을 하며 돈을 모은 덕분에 이렇게 떠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떠날 때를 아는 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일 때가 있다.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파커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난 어떤 의미에서는 용감했다고 보는데." 진심이었다. "주위에서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 말이야."
"난 슬프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파커가 말했다. 우리는 누구도 반드시 그런 식으로 용감해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함께 입을 다물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광대한 하늘 아래에서 그가 힘없이 별을 헤아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것, 즉 중요한 문제는 누가 날 해치거나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용감해졌다.
중요한 문제는, 누구도 해칠 수 없는 나의 일부가 있음을 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 P210

파커는 내게 첫 면도기 세트를 사 주고,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내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내 몸이 점점 커질수록 그녀의 일부가 움츠러드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변화가 너무 빨랐다. 야구 연 - P212

습장에서 야구공이 튀어나오는 속도 같았다.
(...)
"이제 남자가 됐으니까, 항상 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좀 다르게 보여." 파커가 말했다. 그녀의 지친 목소리에 나는 겁을 먹었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혈관이 불룩 튀어나온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도 아니었다.
내 몸은 올바른 모습이 되었지만 나 자신은 잘못된 이야기 속에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파커는 울면서 내 말이 맞다고, 자기가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했다고 말했다. - P213

남자가 되어 가는 과정은 밝으면서도 긴장되게 느껴졌다.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셨을 때처럼 소란스러운 에너지가 달콤 씁쓸한 불꽃을 터뜨렸다. 권투처럼 잔인하면서도 우아했다. 내 몸이 변하는 물리적인 과정이. - P214

나는 껍데기에서 벗어나 노출되었으나 아직 방어책을 마련하지 못한 짐승이었다. - P215

파커와 나는 멕시코에서 사 온 해먹을 뒷마당 전나무 밑에 매어 놓고 거기에 누워 있었다. 우리의 인생처럼 우리 몸이 공중에 떴다. 파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주근깨가 있는 그녀의 코에 입을 맞추며 신혼여행 때의 내 몸과 지금의 몸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다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이런 현실을 감내하며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나 같은 남자는 없다. 나는 성전환 남성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나의 여러 모습이 한꺼번에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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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김규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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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로 살다 보면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절망감이 들어요. 이럴 땐 어떻게 마음을 다잡아야 할까요?" - P7

성미산학교의 남학생에게 내가 했던 답변은 매일매일 구체적이고 작은 승리에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당장 거대한 악을 내가 직접 모두 물리칠 수는 없겠지만 하루하루 작은 차별과 혐오와는 싸워나갈 수 있다. 국가에 소송을 거는 건 무섭지만 회사에 신혼여행 휴가를 요청하는 정도는 할 수 있는 것처럼, 작지만 값진 승리는 내 일상과 직접 맞닿아 있으니 동기부여가 되고, 변화를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어 보람도 크다. - P9

동화 속 공주님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는 결말은 아니더라도, 레즈비언 할머니 부부는 드디어 건강보험료를 같이 낼 수 있게 됐다는 해피엔딩이면 좋겠다. - P10

우리는 지금 웨딩드레스를 입고 하객들 앞에 서 있지만
내일 같이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하면 거절당할 거야.
마일리지 합산도, 신혼부부 대출도, 수술 시 동의도, 사망 시 상속도 안 되겠지. 함께하다 보면 분명 힘든 일이 많을 거야.

하지만 원래 인생이 그런 거 아닌가?

마일리지 합산이 안 된다면 내가 언니 카드로 적립을 할게.
신혼부부 대출이 안 되지만 1주택 세금으로 2주택을 보유할 수 있어.
수술 시 동의를 못 하게 하면 아는 사람이 있는 병원으로 가자.
사망 시 상속 순위가 밀린다면 미리 공동명의로 법인을 설립할게.
힘든 일이 많겠지만 함께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을 거야. - P134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냐 묻는 아빠에게는 나 좋고 행복하게 살려고 그런다고 말했다. 한 인터뷰에서 어떻게 신상을 공개하고 언론을 마주할 용기를 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도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며, 모든 일은 내 편의를 위해서 했다고 대답했다. 괘씸한 조카가 내 재산을 가져가지 못하도록(참고로 나와 와이프의 남동생들은 아직 미혼이고 여자친구도 없다), 내가 언니 수술동의서에 서명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료를 따로 내지 않아도 되도록, 그냥 다른 부부들처럼 살 수 있도록, 그런 삶의 편의를 위해서. - P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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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섹스 -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
은하선 지음 / 동녘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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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 당신이 모르는,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43
희정 지음 / 오월의봄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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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 노동자를 만나러 가면, 인터뷰 장소에 아르바이트·계약직·정규직 직원이 나와 있었다. 청년이라 불리는 세대를 만났고, 고졸 학력 취득자와 대학원생, 서울 사람과 ‘지방‘에서 올라온 사회초년‘생‘을 보았다. 오직 자신의 성정체 - P12

성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외적인 몸의 형태를 말하다가 질환 이야기가 나왔고, 직장 문화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나이와 서열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었다.
무엇보다 노동을 말할 때, 여자와 남자를 언급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자가 아니어도, 남자가 아니어도, 다른 무엇이거나 그 무엇도 아닐지라도 세상은 그들을 여자/남자로 호명했다. 치마를 입었을 뿐인데 세상은 ‘여자 옷‘을 입었다고 했다.
이들은 맞지도 않는 여자/남자 옷을 입고 일터로 갔다. 그 모습이 눈에 밟히면서도 반가웠다. 마피아 게임에서 고개를 들어 또 다른 마피아와 눈을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밤이 되었습니다. 마피아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해주세요." - P13

나를 둘러싼 규범이 언제 어디에서든 내 몸에 꼭 맞을까. 퀴어를 경계에 선 사람 혹은 경계 밖에 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기 전에 그 경계가 대체 어디에 그어졌는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어느 곳에 서야 ‘정상인‘일까.
세상에 성소수자이기만 한 사람은 없다. 또한 ‘정상‘이기만 한 사람도 없다. 무수히 많은 정체성이 내 몸에 겹쳐 삶으로 표현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쪽과 저쪽을 철저하게 나눈다. - P14

"애인 있습니까?" 단 여섯 글자로 이뤄진 질문이 이토록 힘을 갖는다. 질문 하나 받았을 뿐인데 누군가(남성)는 한 가정의 부양-책임자로서 책무를 되새긴다. 누군가(여성)는 출산과 육아라는 자신의 역할을 떠올린다. ‘본래‘의 자리를 두고
‘잠시‘ 일터로 나온 것임을 깨닫는다. - P37

나는 다르구나. 그는 동성애자(게이)였다. 이제 다름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고 있 - P46

다. 동시에 ‘다르지 않음‘도 연기하는 중이다. - P47

외모지상주의 사회라 하지만, 외모는 고움과 미움만으로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다. 얼마나 잘 관리하고 계발했는지가 가치의 기준이 된다. 관리된 외모는 그 자체로 경쟁력이 있을뿐 아니라 다른 자원들 또한 제대로 관리하고 있다는 보증으로 여겨진다. 다이어트 성공이 절제, 성실, 끈기를 상징하는 반면, 살찐 몸의 동의어는 의지박약인 것처럼 말이다.

탈락을 거듭하는 여성들도 있다. 이들은 ‘여자처럼’ 입고 말하고 행동하는데도 성별에 적합한 외모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젊음이 없다. 여성이라는 이미지는 젊음을 전제로 한다. 여자가 꾸민다고 해서 ‘여자 꾸밈‘이 될 수는 없다. 여성(꾸밈)이라는 범주는 좁다. 가부장제 사회는 그 범주를 좁히는 방식으로 작동해왔다. ‘여성‘이라는 표준 상에 어긋난 이들은 쉽게 ‘여성‘이란 이름을 빼앗긴다. 여성 장애인은 이 사회에서 여성일까. ‘아줌마‘도 여자가 아니라는 사회다. - P77

지하 세계 저 아래쪽에는 ‘이모님‘ 혹은 ‘고모님‘이 있다. 십수 년이 흘러 이모님 호칭이 붙는 나이가 되면 그제야 세상은 외모 압력에서 이들을 놓아준다. 대신 다른 것을 내놓으라 한다. 여자가 아닌 ‘어머니‘의 역할(이성애 대상이 될 수 없는 여자는 친족 관계로 강제 편입된다). 후덕함의 상징인 살집이 허용된 이에게는 돌봄노동이 적합하다고 한다. ‘모성을 가진 여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여겨지기에 더 낮은 임금이 주어진다. 마치 외모 규범의 중력이 작용하듯 고용 시장은 ‘그녀‘들을 아래로 끌어당긴다. - P78

수화기 너머의 고객은 오직 자신을 응대하는 방식에 대해서만 평가를 내놓는다. 돌이켜보면 서비스 노동자에 대한 실시간 고객평가가 도입될 때, 노동조합 등 노동계가 얼마나 반발했는가. 일하는 사람을 옥죄는 일상적 업무평가는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나 겉모습을 두고 색안경 낀 평가를 수시로 - P79

당해온 마늘 입장에서 수화기 너머 고객평가는 공정함의 상징 ‘블라인드 테스트‘와 다를 바 없다. - P80

라인이 멈추면, 남성 정규직 관리자와 친하게 지내던 하청업체 직원들이 움직인다. 이들은 여자다. 업체에서 가장 ‘어린‘ 채연도 "끌려간다. 웃어주고 비위 맞춰주다보면 라인 멈춘 것이 없던 일이 된다. 좋은 말로 하면 이것도 능력이다. 사회성이고 인맥이다. 노동 현장에서 성별화는 단지 누가 볼트를 조이고 누가 무거운 짐을 드는가로 정해지지 않는다. 말하고 웃는 모든 순간이 이성애 규범에 따른 노동이 된다. - P103

마음껏 소진시킬 수 없어 ‘무능력‘이란 타이틀을 얻은 몸이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소진시키기 좋은 몸이 있다. 쓸모를 증명받기 위해 계속적으로 제 몸을 소진해야 하는(그것을 기대받는) 성별, 효율 좋은 노동자를 원하는 기업은 어떠한 질환도 없는 신체 건강한 노동자를 선별해(채용 건강검진) 입사 - P109

시킨다. ‘가슴도, 호르몬도, 육체도 없는‘ 노동자는 기본값이 된다. 병가나 임시휴직 등 보장제도가 단발성이거나 현실에서 무용한 것은 그 때문이다.
남성 노동자는 ‘육체가 없다고‘ 취급할 수 있어서 선호된다. 그러나 육체 없는 노동자는 없다. ‘건강한‘ 남성 직원이 열
정적으로 쓸모를 증명해도 쉽게 소진되지 않는 까닭은 그가 타인의 노동력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를 먹이고 입히는 ‘집안의 노동자‘, 아내, 어머니, 여자 형제가 있다. 취업 면접장에서 여성들이 ‘여자 냄새‘를 지우겠다고(비혼, 비출산) 답해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기업에게도 ‘집안의 노동자‘는 소중하다. 기업은 누가 최종적으로 비용을 부담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 P110

여성들은 대표적인 공적 공간이라는 일터에 꾸준히 진출하지만, 그곳마저 끝내 공적 영역이 되지 않는 경험을 한다.
‘본디 여자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말이 그녀들의 발목을 잡는다. 반면 남성이 존재하는 곳은 그 어디건 공적 영역이 된다. 심지어 그곳이 은밀하고 사적인 장소일지라도, 접대의 향연이 벌어지는 룸살롱도, 사내 흡연 구역도 마치 비밀 장소처럼 보이지만, 그곳에서 공적인 결정이 이뤄지는 일은 빈번하다("회의에서 결정된 게 없는데도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다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 나오는 거"), ‘출입금지‘를 붙인 것도 아닌데 특정 성별만의 공간이 된다. 사내 옥상에서 담배를 태우는 여성조차 찾을 수 없다. 여성 흡연 인구가 100만 명이라는 통계가 무색하다. - P114

여성의 노동은 보이지 않음에도 어디에나 존재해야 했다. 노동시장은 여자들을 필요에 따라 내쫓거나 비정규직으로 만들기는 해도 아예 내몰진 않는다. 여성 노동은 ‘쓸모‘가 있다. 문제는 그 쓸모가 ‘하위‘ 노동으로서의 쓸모라는 것. 집안의 노동자이자 경제 상황에 따라 임시노동으로 사용되는 편리한 쓸모는 산업예비군(실업군이자 예비노동력)으로 존재해, 사장님들에게 "너 말고 일할 사람 많아" 같은 대사를 선사한다.
노동의 위계란 쓸모에 따라 나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위계가 먼저 존재하고 거기 맞춰 쓸모를 구분하는 경우가 많 - P117

다. 위계를 나누기 위해 쓸모의 차이를 부각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시설 보수/정비 기능이나 고객 서비스 업무가 부차적인 일로 인식된 것은 기업들이 ‘아웃소싱(외주화)’ 할 업무를 선별하면서부터였다. "박해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박해일 뿐이네, 고문의 목적도 고문이고 말일세." 조지 오웰이 말한 대로다. "권력의 목적도 권력 그 자체"이고 위계의 목적도 위계다. 위계에 따라 쓸모가 나뉜다. 그러므로 여자/남자로 구분되지 않은 몸은 쓸모가 없다. 다양한 색을 가진 몸은 위계와 비용을 매기는 데 혼란을 줄 뿐이다. 혼란을 주는 몸은 입장 자체가 차단된다. - P118

누군가를 배제하고, 누군가를 위계의 밑바닥으로 끌어내려 유지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최면 걸린 삶을 살아낸다. 잘 버틸 수 있다고 믿는 당신 옆에, 자신의 존재를 숨긴 채 쓸모와 ‘정상‘의 문턱을 넘어 당신의 옆자리에 앉은 성소수자들이 있다. 이들은 ‘퀴어‘로서 지니는 빨강, 주황, 노랑……의 색을 버리고 세상이 칠한 색으로 존재를 썼다 지웠다 반복한다. 그러나 지워지지 않는다. 존재하기 때문이다. - P119

하늘은 자신을 여자 말고는 어떤 것으로도 읽어내지 않는 회사에 다닌다. ‘성별‘에 따른 기대와 역할이 고스란히 하늘 - P123

의 업무로 치부된다. 그 노동에는 남자 직원보다 더 친절하게 말해야 하고 성을 뗀 이름으로 불리고 손님이 오면 다과를 내오는 싹싹함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 자신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을 ‘읽어내는 방식‘에는 ‘성별‘이 있다. 그런 읽어냄이 우리의 노동을 규정한다. - P124

어리게 취급받는 주요한 이유가 ‘여자‘라는 성별 자체임을 알기에 ‘여자 모습‘을 털어내려 한다. 성공한 상사의 표준 모델은 남성이다. - P127

여성이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성소수자의 존재를 모른다 해도, 또는 알게 된 후 어떤 감정을 갖게 될지는 몰라도, 둘 사이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주로 사무직 이야기겠지만) 일터에서 생존하기 위해 비슷한 방법을 사 - P130

용한다는 점이다. ‘쇼잉showing‘ 하고, ‘적응‘하고, ‘경계‘에 선다.
‘쇼잉‘이란 "일을 ‘열심히 하고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래야 성과 싸움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남성 동료에게 밀리지 않는다. 의욕적인 모습만 보여서는 안 된다. 여성 직원에게 기대하는 품성인 친밀과 배려까지 제공해야 한다. 세심하고 사려 깊으면서도 명랑한 모습으로 연출이 필요하다. "○○ 씨가 오니까 사무실이다 밝아지네" 같은 말을 듣는 노동이다.
과장된 노동은 성소수자들의 전략이기도 하다. 존재를 숨기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 일만 해서는 안 된다. 성과를 인정받아야 한다. 그래야 "자를 수 없는 사람"이 된다. 일하는 티를 낸다. 누군가의 표현으로는 ‘나댄다‘. 나서는 동시에 정체성을 들킬까봐 움츠린다. 애매하고 모순적인 상황에 자신을 놓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누군가 전력질주를 해서 80을 하면 나는 최소한 100이나 그 이상은 하자라는 주의로 해요. 그러니 항상 피곤해요. 왜냐면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단지 ‘잘리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밤이 되면 자리에 누워 떠올린다. 혹시라도 ‘존재‘가 밝혀졌을 때 사람들이 자신에게 지을 표정을, 다음 날 회사에서 더 꼼꼼히 일을 챙긴다.
"일을 더 잘하려는 게 있는 거 같아요. 나중에 제 정체가 - P131

밝혀졌을 때, ‘쟤가 그거라서...…‘라는 생각은 무의식적으로라도 눈곱만큼도 안 들게 하고 싶어요."
(...)
이들은 온전히 적응하지도 벗어나지도 못한 채 ‘경계에 선다‘. 동료이자 ‘꽃‘이면서 ‘여자애‘이고 ‘꼬맹이‘인 ‘여자‘, 그러나 동시에 ‘여자‘여서는 안 되는 여자(사내 스캔들, 성폭력 피해자인 여자). 이 많은 이름들 사이를 헤매는 여성 직원들 옆에, 패싱으로 ‘퀴어‘와 ‘정상‘의 경계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성소 - P132

수자들이 있다.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무게를 모두 짊어진 채 일해야 하는 이도 있다. 어쨌거나 모두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 P133

상사는 ‘또라이‘로 치부되는 동시에 ‘형님‘이 된다. 형님 연대가 굳건해지는 사이 여성들은 배제된다. 그 위계의 밑바닥에 ‘어린 여자‘ 직원이 있다. 그 옆에서 말 못할 비밀을 가진 성소수자는 자신이 선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쓴다. - P134

프리터로 살아간다는 규원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말하고 잘리면 그만이니까". 무엇을 말하면 잘리나? ‘나란 사람‘이다. - P154

정체성으로 인해 빚을 진다. 밥벌이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는 내내 자주 들은 단어는 ‘빈곤‘이 아니었다. 진짜 빈곤하면 인터뷰조차 할 수 없다. 빈곤에 갇힌다. 마음 내서 인터뷰를 한다 해도 가난이라는 것은 남에게 쉽게 보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대신 자주 들은 단어는 ‘운‘이었다. "운이 너무 작용하는 거 같아요", "저는 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지인 덕에 직장을 구하게 된 것도, 커밍아웃 후에도 회사에 계속 다닐 수 있는 것도 ‘운이 좋아‘라고 표현됐다. 운이 자꾸 거론된다는 것 자체가 시스템의 부재를 말해준다. "운이 너무 작용한다"는 말을 처음 들은 건 청소년 성소수자에게서 - P156

였다. 학교에서 정체성이 드러났을 때 폭력과 징계의 대상이 될지, 그냥 넘어갈지, 이해받을지 알 수 없다. 오직 ‘운‘에 달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건 없다. 어떤 교사와 친구를 만날지는 복불복이다. 학교가 성소수자 학생을 대하는 매뉴얼을 갖고 있지 않기에, 모든 것을 ‘운‘이 결정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을 내세운 차별을 금지하는 법적 제도가 우리 사회에 없다. 커밍아웃 이후 발생하는 일터 괴롭힘을 예방할 수 있는 교육이나 내부 규약도 없다. 해고, 괴롭힘, 불이익을 피했다면 그것은 ‘운‘의 작용이다. 제도와 안전망이 없을 때 운이 거론된다.
그리고 또 하나. ‘운‘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는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정성별이 남성이거나 표현성별과 지정성별이 일치해 패싱이 가능한 몸을 지닌 경우가 많았다. ‘운‘은 운이 아니다. 운이라 표현되는 또 하나의 자원이다. - P157

생의 모든 비용이 ‘개인‘에게 전가되고 있다. 취업 준비 기간은 ‘적합한 노동력‘이 되기 위한 훈련의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 시간의 비용을 오롯이 개인이 부담하도록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사회에 입장하려면 성별 정정은 필수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수술비 전부를 개인이 지불하는 일은 당연한가. 우리 삶의 다른 무수한 비용들도 마찬가지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본다. 무엇이 삶을 지원받을 ‘자격‘을 만드는가. - P161

지금도 인생이 우울한 시기에는 밥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자격을 묻는 쌀밥앞에 당당할 만큼의 기운이 없을 땐 굶는다고 했다. 혐오의 세상에서 자신을 긍정하고 사는 일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요한다. 도대체 살아갈 ‘자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그 자격이 ‘존재‘ 자체는 아닌게 분명하다. ‘정상‘으로 태어나자마자 ‘공동체‘에 속해 공짜성원권을 받을 것 같은 이들도 사실은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사회는 존재할 자격을 자꾸 쓸모로 증명하게 했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공들여 사들인 것을 우리는 ‘스펙’이라 부른다. 모든 것이 비용으로 치환되는 시대. 면접장 입장권 하나를 얻기 위해 20~30대가 감당해야 하는 비용은 너무 크다. 젊음을 갖다 바쳐야 한다. - P162

마늘은 말했다. "내 나름대로 삶을 살 거고, 상황에 맞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내 모습을 이끌어내는 방법으로 살 거"라고.
비슷한 말을 몇 번이나 해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마늘이 아무리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살 것이라 이야기해도, 이득을 보는 쪽은 그 자신이 아닌 것 같다. 마늘이 덧붙인 말 때문이다.
"회사는 이익이 우선인 곳이고, 내가 회사에 이익이 되는 사람이라면 나를 자르거나 하진 못할 거예요."
마늘은 ‘내가 잘했다면‘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 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해고될 위험을 염두에 둔 채 일한다. - P170

마늘과 또래들은 고용 절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라는 자본(상품성)을 확대해 위기를 극복하는 중이다. 배워온 대로.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발생할 (고용)불안마저 유용성으로 극복하려 한다. - P171

능력은 성소수자들이 노동 현장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고 - P174

용을 유지하고, 협상력을 발휘하고, 동료와 관계를 맺게 하는 숨쉴 구멍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터는 진공 상태가 아니다. 몸의 자산에 영향받지 않은 능력이란 없다. - P175

하나의 경제 주체로, 선택도 성취도 실패도 모두 개인의 몫이라 하는 사회지만 아무래도 밑지는 기분이다. 마늘이 왜 자신에게 그런 선택(콜센터 취업)을 했는지 묻지 않느냐고 했지만, 물을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선택‘이라 말하기에 의심스러운 지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마늘에게 콜센터 일밖에 주지 않으면서, 콜센터 안팎에서 개인의 능력을 활용해 살아보라 한다. 마늘이 감당하게 된 결과는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자신을 기계로 대하는 직장에 마늘은 ‘공정‘이란 이름을 붙였지만, 기계는 가동만이 존재의 이유. 가동은 점점 빨라지고 기계는 고장났다. 마늘은 야간근무를 하다가 건강을 해쳤다. 노동은 중단됐다.
마늘이 그곳에서 능력으로 승부를 보려 했을 때부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지 않았을까 싶다. 콜센터 업체는 능력주의를 가동할 자원이 없다. 2000년대 이후 기업들은 고객서비스 - P175

업무를 외주화했고, 그 덕에 크고 작은 콜센터 업체가 우후죽순 생겨났다. 15년 사이 생겨난 콜센터만 1,000여 개, 3만여명에 달한다는 종사자 대부분은 여성, 저임금, 불안정 노동자. 능력에 따른 보상을 할 수 없다. 콜센터 업체가 원하는 것은 능력자가 아니다. 일회용 노동을 원한다. - P176

잦은 이직은 자칫하면 실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런데도 퇴사를 선택한다. ‘일반‘ 세계에서 도무지 행복하지 않아서다. - P179

문식의 진짜 삶은 회사 바깥에 있다. 주말이면 지방 도시에서 서울까지 이동하는 일이 잦다. 사람들한테는 대학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한다. 문식은 주말이면 퀴어 행사에 참석한다. 성소수자 인권활동을 하고 있다. 인권활동을 하려면 업무와 책임이 늘어나선 곤란하다. 이직으로 낮은 지위를 유지할 생각이다. 그러나 만년 대리로 있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몇 년단위로 회사를 옮겨 다닌 이력을 면접관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재취업할 때마다 경쟁력은 계속 낮아질 것이다. - P180

쉬운 일은 아니다. 수연은 스트레스로 인해 협심증까지 앓았다. 직장 동료들과의 적대와 화해 과정이 반복됐다. 그럼에도 해당 논문의 연구자는 트랜스여성 노동자인 수연이 "고통을 감내하며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젠더실천의 범위를 협상적으로 확장해"가는 과정에 주목한다. 성소수자들은 숨어 있거나 피해자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일터와 사회에서 설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협상하고, 적응하고, 요구한다. "상황에 맞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자신을 변모시킬 것이라 했던 마늘의 말 또한 어쩌면 회사에 돈 벌어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의미를 넘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오는 ‘협상‘의 주체로 살겠다는 말. 적어도 이를 시도해볼 시간은 확보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 P184

"지금 성소수자 노동자들이 가는 곳은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이직률 높은 곳. 수틀리면 떠난다는 생각이 강해요. 이들도 노조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해요. 그런데도 자기 인생에 노조는 없을 거라 생각해요. 주변에서 노조를 본 적이 없어. 노조가 있으면 좋지만, 자기 인생과는 별개 문제이고." - P189

비정규직이 노동조합 문을 두드리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사람들은 짧게 머물 직장에서 무언가를 도모하지 않는다.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할 거라는 생각을 할 때 사람은 관계를 맺고 무언가를 한다.
인터뷰를 한 성소수자들에게 자신의 노동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쓰는 어휘는 조금씩 달랐지만 이들의 답은 결국
"없는 노동"이었다. 없으니 성소수자들은 해고되지 않는다.
다만 불안정 노동자 한 명이 오늘도 직장을 잃을 뿐이다. - P190

성소수자들이 항상 겁에 질린, 불쌍한, 어딘가 문제가 있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일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지만 그렇다고 숨죽여 일하지만은 않는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분투한다. 그렇게 고용을 지키고 스스로를 보호하려 한다. 협상력을 높이는 방법은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일 수도, 더 ‘정상‘ 처럼 보이는 것일 수도, 진짜 사나이‘의 질서에 뛰어드는 것일 수도, 퇴준생의 길을 선택하는 것일수도 있다. - P190

현실은 복합적인 장치로 구성된 무대라, 무엇이 업무 능력에 대한 평가이고 무엇이 정체성에서 비롯된 차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직장인 남성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여성은 능력이나 책임감이 없다고 말하고, 직장인 여성은 육아와 직장일을 분리할 수 없는 성 역할의 불평등을 이야기한다. 불평등과 무능력은 현실에서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다. 그 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평등하지 않은 구조를 인식하는 힘이다. 공정에 대한 감각만으로는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성소수자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성소수자로 차별받은 적 없는데요. 회사에는 숨기고 다녀서요" 정도의 답변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제 성소수자 직장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퀴어인 걸 사람들이 모르잖아요. 그게 차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차별을 자각할 때 차별적 요소를 없앨 수 있다. 지난 시기 차별을 제기하고 제도로 규제하려는 움직임(그것을 운동이라 부른다)이 차별을 자각시켰다. 차별을 제재하는 행동들이 동 - P192

등함을 만든다.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을 동등한 자격, 능력을 인정받을 자격, 해고되지 않을 자격 등 그 어떤 자격도 공정한 평가로만은 얻어지지 않는다.
직장 내 구성원들을 동등하게 하는 여러 장치들이 마련될때, 협상력은 현실적 힘을 가진다. 법과 제도, 조직 등 어떤 장치를 이용하는 개별적이지 않은 대응, 동등한 지위하에서의 협의만이 협상자로서 온전한 힘과 위치를 갖게 할 것이다. 이제 평등과 공정은 서로 구분되지 않을뿐더러 평등 역시 어딘가 낡은 단어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평등하지 않은 개별의 너와 나는 존재조차 인정받기 힘들다. - P193

"잘 사는 나이 든 트랜스젠더 한 명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회에서 좋은 삶이라고 상상하는 여지가 넓어져야 하는 거 - P197

지요. 60대의 좋은 삶이라고 하면 돈 많은 삶밖에 안 떠오르잖아요. 살 만한 좋은 삶에 대한 이 사회의 상상력이 너무 좁은 거예요."
세상의 상상력은 빤하다. ‘비성소수자‘라 하더라도 흔히 떠오르는 노년의 모습은 파고다공원을 서성이는 외로운 노인이다(여성 노인이라면 손주를 돌보거나 박스를 줍는 모습이 떠오른다). 노년은 보통 두 글자로 상상된다. ‘빈곤‘ 또는 부양‘, 부양할 사람이 없으면 빈곤해지는 거다. 그러니 노년의 다른 이름은 ‘부담‘이다.
특정 나이대를 부담스러운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그 부담에서 벗어나려면 부가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가 떠올리는 좋은 노년은 ‘돈 많은 삶‘일 수밖에 없다. ‘건강한 노후‘라는 주제를 달고 나오는 잡지를 펼치면 연금/보험 정보만 가득하다.
빈곤한 상상이 노년에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생애주기 전반이 빈곤함으로 가득 차 있다. 아이는 보호받고, 청소년은 학습하고, 성인은 결혼 적령기에 가정을 꾸려, 자녀를 낳아 키우고, 노년이 되면 그 자녀에게 부양을 받는다. 이것이 ‘자연스러운‘ 생애주기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일탈이다. - P198

3포는 누구의 기준에서 포기인가. "지금 20대 불안정 노동자에게 가장 큰 고통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것‘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결혼-육아의 포기는 기성세대가 안타까워하기 좋은 소재일 뿐이다.
"좋은 직장을 얻은 후, 연애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생각은 전통적인 중산층 남성의 가치관이다."
지금의 20대는 ‘사랑만 있다면‘을 외칠 만큼 순진하진 않다. ‘낳으면 저절로 큰다‘는 말에 코웃음 친다. ‘즐거운 나의 집’은 강남 등지에 제법 평수 있는 아파트로 신혼을 시작할수 있는 이들의 로망일 뿐이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에게 가장 큰 고통이 ‘3포’란 이야기는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연애-결혼-출산으로 대표되는 ‘가족‘은 ‘안정‘의 동일어이기 때문이다. - P200

우리 사회는 안정과 가족을 혼동해 사용해왔다("결혼해서 얼른 정착해야지). 모든 정서적 지원과 돌봄, 복지가 이뤄지는 곳을 ‘안정‘이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딱히 없기도 하다.
그럼에도 젊은 세대는 섣불리 혼인신고서를 작성하지 않는다. 결혼에는 이 질문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소는 누가 키우냐." 자녀를 낳아 키우고, 부모를 부양해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 모든 돌봄이 이뤄지는 공간에는 누군가의 노동이 따르기 마련이다. - P201

문제는 자신의 삶을 다르게 서사화할 자원이 이들에게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몇 살 때쯤 결혼하고 육아하고 은퇴하고 저축하고 이런 계획이라는 게 있고 그것에 맞춰 사회적 제도들이 있고. 그에 따라 지원제도를 신청하고 포기하고, 이런 선택지들. 우리(퀴어)는 선택지 앞에서 막히는 부분이 많죠."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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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외로움 없는 삼십대 모임
유성원 지음 / 난다 / 202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그 게이들의 게이스러움을 보면서 저들이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구나. 옷차림, 손동작, 목소리 등에서 이질감을 느꼈다는 게 아니고 그들이 여럿이라는 점, 그들은 누군가와 어울려 있는 상태라는 게 나는 해결할 수 없는, 풀지 못할 숙제처럼 느껴졌다. - P17

나는 중년 남자들 좆을 빨거나 남자와 항문으로 섹스해서 죽고싶은 게 아니다. 그런 일들은 누구라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선택에 불과하다. 죽고 싶어지는 것은 이런 일을 모르고 살 수 있거나 사람들과 함께여서 ‘외로워 보이지 않는 것만 같은‘ 이들을 볼 때다. - P18

나는 ‘행복하다‘ ‘건강하다‘라는 단어가 도무지 실감 안 난다. 그것보다 라면의 조리예나 광고 속 다듬어진 이미지들이 더 진짜 같다. 실제로 그것들은 거의 달성 가능하다. 노력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노력에는 뭔가 빠져 있다. 노력이 아니고 애초에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인데, 해낸 사람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노력하니까 행복해지고 건강해졌는데 다른 무슨 비결이 있냐고 물으면 뭐라 하지? 의문을 품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될 수 없고 건강해질 수 없고 행복해질 수 없다. 그는 ‘건강해진‘ ‘행복해진‘ 사람을 흉내내보려 그의 방법을 따라 하지만 그에게 맞는 방법이 아니다. 그는 실패하고 실패를 반복한다. 그 실패 중에도 성공 사례는 있다. 그게 그를 고통스럽게 하고 자신을 의심하게 한다. - P27

사람과 만나면 화가 난다. 상대방에 의해 내 말이 교정되어서다. - P40

누군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말의 내용을 바꾸고 화법을 바꾸게 되듯이 어떤 위치에 누군가가 일시적으로 놓여 있었다는 것, 눈 감거나 잊었으면 되는데 거기에 영향받는 순간이 생긴다. 영향받는다. 모른 척할 수 없게 된다. - P41

자살 안 하고 싶다. 안 자살이 나를 찾아서 나를 자살 안 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안 자살은 구리지도 않고 백화점에서 파는 물건처럼 고급일 것이다. 자살은 뭔가? 경기 지방 휴게텔의 목 부분이 해진 가운, 거기에 코를 대었을 때 나는 구린내다. 뽀뽀하고 싶어, 하고 다정하게 네게 코를 갖다댈 때 풍기는. - P50

나도 잘살 수 있는 방법이 있었겠지? 그게 어떤 느낌이냐면 출발선이 나는 전주쯤이고 다른 사람은 대전이거나 수원인데 서울까지 같은 시간에 도착하자! 도착지가 같으니 공평하지? 하는 것 같다. 그럴 때면 서울에 도착한 사람들 말고 서울에 안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 P55

자살하고 싶다라는 말은, 아저씨들의 좆을 빨아주고 그들의 정액을 먹고 항문에 사정되고 나서도 제정신이거나 나를 견딜 수있느냐? 가끔씩 그 사실이 힘이 들며 자살하고 싶다는 말이다.
감정은 내가 찜방이나 사우나에서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그 행위를 나무라는 게 아니고 네가 바라는 일 중에 다른 방법도 있었을 텐데 술을 마시고 이렇게 아무나와 하는 것 말고도 혼자이지 않을 방법이 있지 않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는 신호다. 내가 혼자이지 않을 방법이 있다면 그건 박살났고 파괴당했으며 물에 적셔졌고 종이였다면 찢어졌다는 느낌이 ‘죽고 싶다‘ 이다. - P56

견딘다는 건 아주 뜨거운 걸 맨손으로 잠깐 잡는 거다. 충분히 쥐고 있을 수 없다. 화상을 입는 일이니까. 하지만 저걸 놓칠 수 없다는 느낌, 이걸 손에서 놓아버릴 수 없다는 느낌이 견딘다이다. - P59

안 견디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것도 안 견디고 싶다. 하면 하는 사람, 안 하면 안 함을 이해하는 사람, 이해할 필요도 없이 바로 수행해버리는 사람이고 싶다. 생각 안 함을 이중으로 생각할 필요 없이, 아무것도 안 보는 사람, 본 것도 안 본 사람이 되고 싶다. 기억을 선택해서 보관하고, 보관한 기억은 영영 떠오르지 않기로 했으면 좋겠다. 그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인데, 그 기억 속 상황이 재현되는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내가 기억하는 건 상상뿐인데 상상은 일어날 수 없는 일들만을보여주니까. - P68

자살 충동에 저항하게 하는 건 억울함이다. 주변의 누구와 연결되기라도 했어야 죽음이 뭔가를 파열시킨다든지 일시적으로든 충격을 주든지 할 텐데 도무지 주변에 사람이라고는 없고 가족이라고 해봐야 내가 무얼 겪고 뭘 느끼고 무엇에 고통받는지 모르는 이들뿐이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죽을 수가 없다. - P78

나는 내가 부끄럽다.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불가능하다고까지 느낀다. 지금은 밖에서 남자들이 큰 소리로 와하하 웃으면서 술 마시고 있다. 나는 저런 자리에 있고 싶어하면서도 그럴 수 없음만을 느낀다. 다들 맨몸으로 달리기를 하는데 나만 모래주머니를 덕지덕지 달고 달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누구도 내게 모래주머니를 차라고 한 적 없고 모래주머니를 달고 있다는 것은 나만의 느낌이기에 나는 이 기분을 해결해야 하며 이 문제에 고립되어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달리기‘라면 나는 달리기를 하고 싶지만 몸에 달고 있는 이 모래주머니를 떼어내기 전까지는 달리지 못하겠어, 안 되겠어, 왜냐면 이건 부당하며 이 부당함은 공감받을 수 없는 것이니까.
흑흑이다. 나는 정말 흑흑 운다고 자판을 두들겨서 친다. 안 울면서! 하지만 내겐 이게 흑흑 우는 것이야. 감정을 참았고 안 표현 - P81

하였지만 그 감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란다. 정말 흑흑 운다, 흑흑 안 울었더라도 말이다. 실제로 운다, 안 운다와 상관없이 나는 흑흑 하였다. 흑흑중이었기 때문이다. - P82

나는 혼자이고 혼자라면 아무것이나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 사람들에게 나를 판단할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럽다. 혼자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된다. 저는 혼자입니다. 혼자라고 생각하면 덜 부끄럽다. 나는 ‘나‘라고 생각되지 않는 내가 ‘나‘로 전시되어 있는 상황이 힘이 든다. 나는 ‘아닌데요‘라고 말하고 싶고 늘 ‘아닌데요‘라고 말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 - P102

하고 싶은 것은 목으로 소리 내어 말하고 만질 수 있는 실물 호모를 만나 그의 손을 잡거나 몸을 껴안는 것이다. 후자는 찜방 가 - P102

면 할 수 있지만 목으로 소리 내어 말하기는 그보다 좀더 어렵다. - P103

나는 말하고 싶다. 성대를 사용해 목소리를 내고 싶다. 내 목소리를 눈앞에 있는 상대의 귀에 전달시키고 싶다. 항문섹스나 오랄섹스, 정액 먹기 같은 건 얼마든지 한다. 그런 건 얼마든지 해. 그런데 말해진 적이 없다. 말해진 지 오래되었다. 말없이 자판을 두드리며 생각할 뿐이다. 말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서로 말할 수 있고 들을 상대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마주보고 있는, 엇갈렸더라도 한 테이블에 있는,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러면 나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 P105

회복해도 이전과 같을 순 없다, 그건 건강한 삶도 뛰어난 삶도 아니다, 라는 말을 책에서 읽을 땐 기뻤다. 회복하면 너는 뛰어나지고 건강해져, 라는 말을 했더라면 더 깊은 실망과 벽을 느꼈을것이다. - P128

안녕하세요. 천 줄의 문장을 왜 쓰나요? 그 사이사이에 있는 한 줄, 세 줄의 문장을 가리기 위해서다. 보여주려고 쓰는 게 아니고 감춰주려고 쓴다. 어떤 한 문장만 읽으면 되는데 그걸 허락할 수는 없고 읽으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믿음으로. - P143

안 건강이의 문제는 마치 그가 노력할 수 있다면 건강이처럼 될지도 모른다고 착각하고 싶어서 생긴다. 안녕하세요? 세상엔 건강이가 있고 건강이가 안 건강이가 될 순 있지만 안 건강이가 건강이가 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당신이 안 건강이라면 너는 안 건강이입니다. 죽을 때까지. 왜냐면 너는 건강이였던 적이 없었거나 건강이여본 적이 없고 안 건강이로 존재하는 법밖에 몰라서 안 건강이로 있을 수밖에 없어요. 여보세요?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돈이 많아지겠죠. 그 정도라고요.
살아 있음을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에너지, 이걸 스스로 과소평가했거나 측정해본 적 없으니까 상상 속에서, 나는 에너지가 백있으니까 그중 삼십이나 사십 정도를 나를 수정하는 데 사용할수 있을 거야, 믿고 싶어지죠. 하지만 대부분의 안 건강이들은 존 - P157

재하는 것에 백을 다 써버려서 남은 힘이 없어요. 여보세요? 내가 어떤 재질의 옷을 구입하거나 착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죽을 때까지라고요. 제가 살아 있음에 에너지를 덜 써도 되게 살아왔다면(컴플렉스 관리, 기억 관리, 생활 관리, 감정 관리 등) 당연히 그 여분의 에너지를 곳곳에 투자하면서 지내왔겠죠. 그런 경험 자체가 전무하다고요. 해왔던 대로밖에 살 수가 없어요. 뭘 바꿀 수가 없다고요. 왜냐면 자신이 바뀌는 게 아니고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어서. 생활을 저 혼자 감당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도움이 생긴다, 같은 거라고요, 그걸 바라는 순간 감정은 악화되니까 관리 비용이 늘어나겠죠.
물에 사는 참치랑 땅에 사는 염소는 친구할 수 없어요(해도 되겠죠. 상상 속에서는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연결감을 가지며) 혼자 뭘 해내는 것과 (고립감을 느끼며 고립된 채로) 혼자 뭘 해내는 건 정말 다르다고요. 살아간다는 건 타인과 감정적 신호를 끊임없이 주고받는 일인데 그것이 가능한 사람과 그게 거듭 벽에 부딪힌다고 느끼는 사람의 현실은 다르겠죠. 계속해서 고립 비용을 지불해야 하니까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간다는 행위도 안 고립된 사람은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비용만 발생하지만 고립된 사람은 자신이 고립되었다는 감정 비용이 줄줄 새고 있는 것이죠. - P158

나도 모른다. 몰라도 행동할 순 있으니까. 내 행동에 왜, 하고 물으면 할말이 없다. 상대방이 어떤 답을 듣길 원하는지와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다퉈서. 누군가를 좋아할수록 이 다툼이 세지고 나는 후회한다. - P165

............
안녕하세요? 점 오천 개 찍을 수 있지만 안 찍는 것처럼 살고 있다.
.......................................... 키보드로 점 오천 개 찍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죽을 때까지 아마 할 기회 없을 것이다. 내가 안 할 테니까. 인생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거 같다. 점오천 개 찍기. - P181

안녕하세요? 용기는 작은 구슬이고요. 그것들은 쌓아올려지지않는답니다. 수시로 퍼지고 흩어지는 감정에 불과하다. 한데 모아놓아도 높이 쌓을 순 없다. 늘 굴러다니기만 한다. 나는 그 성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쌓으려 했다. 그걸 노력이라고도 생각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인데…… - P203

외로움이 뭘까?
죽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인생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정말 알고 싶고 그 ‘어떻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 인생 뭔지 알 수 없는 중에서 혼자 노력했지만 그건 정말 어리둥절 속에서의 노력이었다. - P219

외로움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나요? 일단 외로움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럼 외로움이 해결됩니다. 외로움을 해결하려면 외로움을 해결해야 한다라고 써보면 알 수 있다. 외로움을 해결하려변 고추 빨아야 한다가 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외로움을 해결하려면 외로움을 해결해야 한다. 여기서 이 문장을 어떻게 실천할수 있는지는 고민 말아야 한다. 나는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제발 해야 하는 일은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동어반복을 외움으로써 가능해진다. 그것이나에게 책상이 책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가 책상을 다른 것이라 믿고 싶을 때에도 말이다. - P230

이 회사에서 일하면서 속상한 것, 그리고 배우게 되는 것은, 우리가 기분이 좋고 고통이 없을 때 남에게 친절하기가 얼마나 쉬운가다. - P240

타인을 대하는 건 쉽다. 내가 아니니 무시해도 되고 상관없는데 나를 대하는 것이 어렵다. 내가 나에게 하는 요구들(나를 위험하게 하지 마라, 슬프게 하지 마라, 외롭게 두지 마라, 나를 십 년 뒤에도 살아 있게 해라)의 방향이 사실 괄호 안에 열거한 내용과 대립하는 경우가 있어서다. 내가 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달달 외워서 누군가가 나에게 당신은 이러한 이유로 사랑받을 만합니다 하며 다가오더라도, 심지어 그것이 내가 그렇게 보여지고 싶었던 모습이더라도 사랑은, 존재는, 자격의 문제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내가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하루하루 살다가 어느 날 정말 더 못하겠네 싶으면 거기까지 하면 된다. - P242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니까 할 수 있는 걸 오늘 하면서 산다. 이를테면 고추 오십 개 빨기. 정액 받아먹기. 노콘으로 항문섹스하기. 하고 싶지 않은데 할 수 있어서 해야 한다고 느낀다. 아무도 나처럼 이렇게는 하지 않을 테니까 이렇게 내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거 아닐까? 내 감정은 없는 것처럼 나는 판단하지 않는 것처럼 두려움이 없는 것처럼.
나는 안 건강한데 달리 방법이 없으니 안 건강하다는 사실을 최선을 다해 잊어버리거나 아파가지고 팔짝 뛰고 하는 수밖에다. 할 수 있을 때 안 하기가 정말 어렵다. 쓰레기를 버려도 되고 욕해도 되고 죽여도 되고 때려도 될 때 안 그러기가 안 쉽다. - P256

언젠가는 폭식하지 않아도 될 만큼 ‘건강‘해지겠죠. 지금은 방법이 없다고 느끼지만요. 다른 행동을 안 하려면 이 방법을 택해야 한다고 느끼는 상황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까? 도와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통제하려는 노력은 그 시도만으로도 나를 곤경에 빠뜨린다. 그간의 경험으로 나는 뭘 해야 한다(하고 싶다가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걸 하지 않을 방법이 혼자서는 없고 (나에게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혼자가 아닐 방법이 없어서 결국 해야한다고 느끼는 일들을 하게 된다. 이것을 혼자 막아보려고 하거나 스스로 속이려 하면(한 시간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반드시 보복당했다. 뭘 해야 한다고 느끼면 빨리 해야 한다. 그후에도 감정이 진정 안 되면 빨리 뭘 먹어서 몸을 마비시킬 필요가 있다. 외로움보다는 폭식 후 겪는 불쾌감과 깨달음(나는 폭식했구나!)이 좀더 견딜 만해서? - P258

더 많은 사람이 읽는다면 좋겠죠. 그게 훨씬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해서만 쓴다. 누구에게 이걸 봐! 하는 게 아니고 내게 보여주는 것이 첫째 목적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글은 이미 많다. 그들은 그걸 보면 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써야 한다. 인생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고추 빨고 - P268

정액 먹고 싶은 마음과 여러 남자와 노콘으로 항문섹스하고 싶은마음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걸까요?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야겠죠. 그것이 저에겐 ‘행복‘이니까요. - P269

왜 어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이나 충동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데 누군가는 그러한 감정이나 충동에 ‘시달려야‘ 할까. - P276

사람들이 많이 있는 모습을 보면 왜 힘이 들까? 그들이 여럿이고 나는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들이 멍청해 보인다는 생각은 나만의 것이어서? 그 사람들이 왜 멍청하냐? 모를 뿐이다. 어떤 걸 알 필요가 없어서 그렇게 산다. 나도 모르는 게 있으니까 알아야 한다고 강요할 수도 없다. 오랜만에 홍대에 - P284

젊은이들이 무리지어 있는 모습을 보니까 그 사실이 무섭고 겁이 났고 내가 확실하게 잘못 살고 있다고 깨닫게 되었다. 파주에 산다는 사실이 얼마나 많은 자극으로부터 나를 떨어뜨려두었는지 새삼 느꼈다. 종로는 괜찮은데 영등포는 괜찮은데 홍대는 안 괜찮은 이유가 뭘까요? 이들이 나와 다르다고 느껴서.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이 그 어느 곳에서도 교차할 일 없이 죽는 날까지 보내지리라고 예감해서. 나는 어떤 것이 싫어서 그게 싫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지 않아야 하는 게 규칙일 때, 그래야 돈을 (더 많이) 벌 수있을 때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얼 직업으로 삼아야 할까? 어떤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끔찍하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자신감이 생기고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분에서 잠시라도 떨어져나오면 이건 다 거짓말이고 내 판단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느낌에 충실하려면 우울해져야 하고 그걸 감당하는 것이 불편하니까 포기한다. 최대한 피해야 해요. 자극하는 것들을 상대하거나 맞서면 안 되고 피해야 합니다. - P285

나는 ‘변태‘고 문제가 있고 ‘사랑‘을 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사랑이 아닌 사람. 욕정뿐이고 지저분하고 더럽고 욕할 수 있고 침 뱉고 자기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속고 있는 거야. 이렇게 살면 안 된다고 주변에서 혼내는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막 사는 거야. 망하고 있는 거야.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거야. 그러다가도 그것은 생각의 영역이고 나는 생각만으로 살 수 없다. 생각 가지고 밥 먹을 수 없고 생각만 가지고 행복할 수 없다. 나한테는 몸이 있고 고추가 있고 입이랑 항문이 있고 남자를 껴안고 싶다. 남자의 정액을 먹고 싶고 그것이 나인데 내가 아닐 방법이 없다고요. - P293

내가 누군지 잊어버릴까봐 무섭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떠하다 느끼는지 그 실감을 외부를 통해 설계하거나 상상하고 싶지 않다. 고통을 느끼는 것은 나인데 어째서 그 얼굴을 비출 거울이 필요한가. 누군가가 너 아프구나 라고 말해야만 고통이 승인되는 것도 아니고 외부의 평가나 반영 없이도 그것은 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신체 일부를 어딘가에 부딪혔을 때 듣는 사람이 없어서 신음할 수도 없이 입 다물고을 때의 통과가 있다. 반드시. - P294

편견 없이 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그건 그 상황에 놓이지 않았거나 아직 그런 대상을 못 마주쳤을 뿐이지 그러한 상황에 놓이고 그런 사람과 마주치게 된다면 그가 누구라도 편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될걸! 그런 일을 당해도 되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일을 당해도 호소할 수 없고 저항할 수 없고 그런 일을 당했다는 이유로 그 행위자에게 같은 수준의 고통을 줄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있다. - P323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폭식하지 말고 밤에 일찍 자고 야채 많이 먹고 이런 건 알고 있지만 우리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폭식을 하고 뭔가 나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하게 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이게 어디서 오는 걸까. 만약에 이 위험을, 열 가지 위험 중에 하나라도 줄일 수 있다면 방법은 뭘까. 저는 그중 하나로 게이들이 사회에서 받고 있는 차별이나 이런 걸 일시에 없앨 순 없지만 그런 것이 개인에게 위험 행동으로 나타날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지금 트루바다나 프렙이 등장했다고 생각하거든요." - P328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내가 그 일에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보여준 합리성으로 사람들이 설득되리라고 낙관적인 착각을 하게 된다. 어떤 일은 막상 겪고나면 회복이 안 되고 뭐가 부러졌으면 부러진 채로 살아야 한다.
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는. - P341

멀리 무대의 그애를 휴대폰 줌으로 잡아당기면서 액정 속 흐릿한 얼굴을 손끝으로 문질러보았다. 얘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나 하는 마음과 그것이 얼마나 나만의 것인지 생각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을 남에게 책임져달라고 할 수 있어? 없으니까… 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 P344

남자랑 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왜 특정한 집단의 사람들이 그만 사는 걸 선택하는지 알 것 같다. 무엇이든 지속되는 건 없고 끝난다는 사실이 가르쳐주는 것.
희망하고 소망하는 게 있다면 좋겠지. 살아 있는 데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가 지긋지긋하지만 이걸 견뎌야 한다. 나는 아무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데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보이는 상태를 참기 힘들다. 뭐가 잘된다면 이유가 있는 게 아니고 운이 좋았을 뿐이다. 듣기 좋은 말 하기는 쉽다. 옳은 말 하기도 쉽다. 그렇게 살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내가 겪은 일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점에서 탈출하려면 더 기다려야 한다. 지나가야 할 것들이 지나갈 때까지는. 작은 것은 작고 큰 것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는 알고 있어야 한다.
다 흘러가는 중이고 흘러가는 중이다. 바라는 건 뭘까? 스스로
‘너는 이런 걸 원하지?‘ 물을 때마다 나한테는 입이 없다고 느낀다. - P348

노콘 항문섹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실제로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으나 어떤 젊은이들, 아름다운 청년들을 인스타 등에서 목격하면 저들이 정말 게이구나 나와는 다르구나, 하는 감각을 느끼게 된다.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이 동성애자, 양성애자, 이성애자 이렇게 있는 게 아니라 신체나 외모 조건, 삶의 양식에 따른 분류를 더 강하게 느낀다. 나는 동성애자로서 남성과 섹스하는 남성이라 생각하고 있으나 그러한 나의 성행동, 내가 섹스하는 것과, 저 미청년이나 젊은이들이 동성과 관계맺는 것은 다른 질감이라 느낀다. 나의 질문은 어디로 발전해야 할까? 회의에서는 이제 정해주자고, 우리가 답할 가치가 없는 질문, 안에 싸도 돼요?라는 말에는 안에 싸도 된다, 이런 식으로 불필요한 논쟁은 과학적인 합의에 도달했다면 그 논의의 출발선을 그어주자고 한다. 그렇다면 그다음에 오는 게 뭘까. 누가 늙은, 늙어간 혹은 외모 자원이 부족한 내 입에 싸줄 것인가 혹은 자기 입에 싸게 해줄 것인가, 이것은 정말 다음 질문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들. 내가 다르게 경험하는 특정 형태의 만남들, 관계들, 사람들을 어떻게 언어로 정의해야 할지 오늘 어렴풋하게나마 어쩌면 이것이 ‘안개‘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하게 되었던 거 같다. 뒤늦게 글로 쓰면서. - P364

내가 폭식을 할 때 양배추나 샐러리를 먹진 않았던 것처럼 항문섹스 역시 기호가 반영된 행동이다.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니고 있는 외로움과 관계맺기의 어려움의 결과로 위험행동을 했다는 인과관계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더라도 그것만이 행동을 결정하진 않는다. 모든 게이 남성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하여 다른 남성의 정액을 먹거나 다른 남성의 성기를 자신의 항문에 삽입하진 않으니까. 이성애자라고 하여 똑같은 생애각본을 따르진 않듯 게이 남성으로 정체화했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존재하는 욕구에 대한 차이가 나를 만든다. 동시에 이러한 욕구는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게 가려지며 나아가 과잉대표되고 왜곡당한다. 어떤 행동이나 말들은 세상에 없는 것처럼 숨겨져 있다. 나는 공적 공간에서 항문섹스, 노콘 섹스 등의 단어가 노출돼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혐오세력이 아닌 당사자의 경험과 언어로. 어떤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취급당할 때, 그의 얼굴을, 표정을 상상할 수 없을 때 그 삶의 토대와 조건은 취약해지기 쉽다.
일부 게이 남성에게 만남의 통로가 되는 어플 혹은 사우나 등의 공간에서의 문법은 그에게 관계의 형태와 질을 결정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성애자와 달리 아직은 제한적인 선택지 안에서 친밀함을 발견하려는 노력은 시대와 사회, 공간의 한계를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바라보게끔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이렇듯 차별과 - P369

불평등은 개인의 특성이나 문제행동의 결과처럼 보이도록 강제된다. 구조적 취약성을 소수자 개인이 떠안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세계에서 그 환경을 개선하는 것은 다수에게 늘 ‘비용‘이라는 부담으로 인식되어 변화를 저지시킨다. 소수자 개인이 처한 환경의 선택지를 다양하게 만들지 못하면 그는 동일한 선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 P370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나는 어떤 방식으로 관계하고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고 있는가, 그리고 나에게 친구가 있다면 누구인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내가 편안함을 느낀 곳은 남자와 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이 모이는 공원 화장실 같은 곳이었다. 거기는 상대를 인격적으로 기대하지도 않고 이 사람의 이름이 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오로지 싸고 싶어서 오거나 싸려고 가는 곳.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사용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오는 곳이었다. 거기를 이용하는 사람들, 다니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비난하는 방식은 질병 혐오였다. 저렇게 하면 병 걸려, 우릴 욕먹게 하는 걸레 같은 애들.
공원 화장실에서 섹스하면 성병에 걸리고 집이나 호텔에서 섹 - P370

스하면 성병에 걸리지 않는가? 성병을 비롯한 여러 위험을 감소시키는 일과 내가 섹스하는 상대가 누구인가라는 관계성, 해당 공간에 대한 낙인은 다른 결의 문제임에도 이것들을 한데 섞어 사고하는 적극적인 무지는 생산적인 논의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렇게 ‘더러운‘ 사람을 낙인찍음으로써 ‘건강한‘ 사람을 분리해내려는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영역이 HIV/AIDS였다. 나는(예)비감염인으로 언제든 HIV감염인(이하 감염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성관계를 하는 이상 성정체성이나 성행동의 형태에 관계없이 HIV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P371

남자와 섹스하는 남자를 뜻하는 MSM은 HIV 감염취약군으로 분류된다. 이 말은 기존 주류질서에 맞게 설계된 사회에서 배제되고 드러나지 않아서 이들이 위험에 노출되는 구조적인 취약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HIV감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은 해당 집단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이유가 아니라 이에 걸맞은 접근법과 정책을 세워야 할 근거가 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해당 집단을 낙인찍고 주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집단의 특성에 맞는 의료 조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이 용어는 동성애자라고 자신을 정체화했거나 표현하는 사람만이 동성과 섹스하는 게 아니라 이성애자, 혹은 나의 남편도 남자와 섹스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맥락에서 나온 용어이기도 하다. 성행동의 결과인 HIV감염을 이성애/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의 문제로 환원하는 혐오세력의 선동은 정작 사람들을 HIV감염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 HIV는 동성애, 혹은 항문섹스를 한다고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라 하여 모두 동일한 형태로 성관계를 맺고 살아가진 - P376

않는다. 관계의 형태와 질감은 개개인에게 다르게 경험된다. 이성애, 동성애 등은 누군가의 삶을 이야기하는 한 조건일 뿐이다. 두군가는 성적 끌림을 적게 느끼고, 누군가는 활발한 성적 실천을 한다. 불특정 다수와 무수히 ‘위험한 섹스를 하였어도 HIV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고, 단 한 번의 성관계로도 HIV에 감염될 수 있다. 이때 이 ‘위험‘을 무엇이라 정의하느냐에 따라 접근방식이 달라질 것이다. -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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