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것은 유령 이야기다. 아니, 모험담이다. 내가 어떻게 유령 같은 삶을 그만뒀는지 들려주는 모험담이다. - P17
내가 보기에 세상은 아름답지만 망가진 것들이 있는 장소였고, 나는 그것들을 모두 사랑하고 싶었다. - P28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의 것 같았다. 두려움과 나란히 자리한 차분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내가 아빠보다 더 힘이 세다고 되새긴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난폭함과 두려움을 모두 작고 단단하게 꾹꾹 눌렀더니 그것이 내 배 속에서 불꽃놀이처럼 터져 버렸으며 그 뒤에 아름다운 것이 남았다는 사실 또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P28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질문. 나한테 몸을 밀착시켰던 그 쌀쌀맞고 단정치 못한 남자가 어떻게 그 이상하게 눈빛이 텅 빈 것 같은 상태에서 빠져나와 바로 그날 밤에 나와 함께 엔진 모형을 만들 수 있어요? 누구나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도 그래요? (...) "난 네가 평범한 아이처럼 자랐으면 좋겠어." 엄마가 날 가까이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엄마의 입에서는 치약 냄새가 났고, 엄 - P34
마의 배는 따스했다. 엄마가 하지 않은 말, 엄마가 하고 싶지 않은 말에 깃든 두려움을 나는 어차피 이미 알고 있었다. 엄마가 날 걱정한다는 것도, 아직 늦지 않았다고 자신을 설득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도. - P35
물론 사람이 바뀔 수는 있다. 그런데 서로 다른 두 가지 면이 만나면 유령이 생겨날 틈이 생긴다. 불협화음이 얼룩을 만들고, 이야기가 찢어진다. - P36
아빠의 행동은 아프지 않았다. 나를 둘로 갈라놓았다. 아빠가 둘인 것처럼. 나를 나 자신에게 낯선 사람으로 만들었다. - P37
‘나는 아무도 손댈 수 없는 투명 인간이 되는 법을 알아. 내 몸을 조금씩, 조금씩 잠재울 수 있어. 필요하다면 평생 잠들어 있다가 깨어날 수도 있어." - P53
유령 사냥이야. 나는 파커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치 이 말이면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는 듯이. 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을 보고, 우리 집안의 과거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가 그런 사람으로 굳어져 버린 이유를 파악해 보고 싶었다. 아버지는 왜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왜 항상 흐릿한 눈으로 날 찾으러 왔는가? 내가 그와는 다른 사람이 된 건 무슨 연유인가? 그래서 나는 짐을 싸서 비행기에 오른다.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 행동이 곧 생존의 문제임을 인정한다. - P62
계속 가. 내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유령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것의 목소리였다. 내 무릎이 성실하게 나를 운반했다. - P63
"도망쳐." 이렇게 말하던 강도의 목소리가 자꾸만 들리는 것 같았다. 슬로모션으로 돌아가는 스포츠 필름 같았다. 내 무릎에는 둥글게 원을 그리고 글자를 써 넣어도 될 것이다. "내가 죽은 척하기를 그만둔 곳"이라고. - P65
나는 수돗물을 틀고, 곰팡내 나는 모텔 화장실에서 이를 닦으며 내 얼굴을 가능한 한 보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내 마음속 모습과 거울에 - P66
비친 모습 사이에서 진동하는 이상한 에너지를 물리치려고 했다. - P67
남자들이란.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엄마가 왜 이 말로 감정을 폭발시켰는지 이해했지만, 내 꿈속의 수염 난 남자와 이 말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플라스틱 블라인드의 틈새로 빛이 강하게 새어 들어올 무렵, 내 팔다리가 무거워지더니 나는 잠이 들었다. 아버지의 실패를 이해하려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채웠다. 나는 또한 가장 커다란 유령과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내 안에 완전히 망가진 끔찍한 것이 숨어 있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 P68
놀라서 소리도 내지 못하는 짐승처럼, 나는 이리저리 움직이는 총구에, 이리저리 빠르게 움직이는 그 남자에게, 그가 내 목소리를 듣고 죽은 눈을 크게 뜨는 모습에 붙들려 있었다. 나는 그의 좌절감이 점점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자신이 붙잡은 사람의 정체를 알아차린 순간 신기하게 푹 꺼져 버리던 모습을 설명하려고 애썼다. 내가 위험하다고 평가했던 나의 일면, 그러니까 내가 여성이라는 점, 아니 적어도 남자가 아니라는 점이 그때 나를 구해 준 것이다. - P70
내 피라. 정말 그런가? 그런 것이 중요한가? 나는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답을 찾지 못한 채로 그 의문을 덮어 둔 뒤 다시 떠올리지 않았다. 내가 겪은 일들을 벗어나 살아가느라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나는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다. 미국삼나무 숲과 게이 바가 있는 그곳에서 나는 트라우마에 좌우당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나는 ‘평범한 것‘을 나의 북극성으로 삼았고, 더 나은 모습으로 새로워진 내 모습에 아버지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내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방금 그린 지저분한 가계도와 내 이름이 들어가야 할 빈 자리를 빤히 바라보면서 나는 내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내가 내린 답은 역설적이었다. 즉 중요하면서 중요하지 않았다. 생물학적인 관 - P90
계는 내 흉터의 원인도 아니고, 내 흉터를 지워 줄 수도 없었다. 내가누구의 자식이든, 내 몸은 내 것이다. - P91
로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내게 그런 짓을 할 만큼 사람이 망가졌을까? 그 원인을 정확히 알아내면 내 심장을 가득 메운 검은 재앙을 닦아 아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니, 얼마나 순진했는지. (...) 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면 내 이야기가 조리 있게 정리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웃통을 벗고 내 꿈속을 뛰어다니는 수염 난 남자는 어떻게 봐도 나였다. 그 남자는 옛날에 내가 강도 때문에 길에서 무릎을 꿇고 있을 때처럼, 자유로이 풀려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 P98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로이와 그의 노새, 특별한 사냥총, 죽어 가는 아버지에 대해 생각했다. 마치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그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내가 그려 낸 그의 모습이 옳은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인간의 모습을 주었다는 점만이 중요했다. - P108
나 자신을 지울 수 없다면, 내 과거도 지울 수 없었다. 토대에서 미끄러질 것 같은 모습으로 산만하게 늘어선 수많은 주택들처럼 나도 형태를 바꿀 거라면, 무너지지 않을 정직한 토대를 갖고 싶었다. - P111
"만약 우리가 결혼한다 해도…." 파커가 우리 둘에게 말했다. "난 ‘영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아. 지금 이 순간만 생각하고 싶어. 내가 널 존중하고, 네가 날 존중하고, 우리가 먼저 본연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로 하는 것이 중요해." - P115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심리 치료사가 물었다. 나는 내 혈관 속, 턱 근육 속, 발바닥의 두꺼운 피부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애썼다. "지금 어디서 자신이 느껴집니까?" 우리는 호르몬에 좌우되는 존재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스트레스와 섹스가 곧 우리다. 공격을 받았을 때, 얼어붙었을 때, 상대를 한 대도 때릴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의 공포에 눌려 차갑게 식어 버린다. 거울에 어떤 남자가 보이는데도 그 남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리석은 우주,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고 있는 우주를 건드리기 싫어서 그대로 멈춰 버린다. "내 무릎이요." 내가 말했다. 무릎 안에서 힘과 두려움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지고, 내가 달리고 또 달려서 도망칠 때 목 안에 들어찼던 차가운 안개와 창문을 통해 새어나오는 텔레비전의 창백한 빛이 생각났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다리를 타고 흐르던 전기와 가능성과 두려움이 생각났다. 내 근육에 내 목숨이 달려 있었다. 41번가까지 계속 나를 따라온 아드레날린의 악취. 내 주먹 속에 내 목숨이 동글게 말려들어가고, 팔 근육 속에서 내 목숨이 수축했다. 내 목숨은 멀고 먼 기억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생생한 동물 같은 부분이었다. 내가 해롭다고 착각했던 포효, 해방을 원하는 본능, 어떻게 해도 파괴할수 없고 변형만이 가능한 에너지였다. - P118
나는 그에게 마주 고개를 끄덕여 주며 내가 되고 싶은 모습, 그러니까 복수가 아니라 뭔가 밝은 일을 위해 나온 착한 사람 같은 모습으로 그 옆을 지나쳤다. - P127
"그래도 살았으니 부끄러워할 필요 없지." (...) "그런 상황에서 사람이 죽는 건 두려움 때문이 아니야. 두려움으로 인해 하는 행동 때문이지." 마이크가 말했다. - P158
내 몸에는 미래가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공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우주왕복선이 로켓에서 분리되는 모습을 지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그저 무사비행을 기도할 수밖에 없는 순간의 느낌과 비슷했다. - P162
파커는 우리의 결혼 서약을 인용했다. "난 네가 너로 살아가는 데 결코 방해가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다른 건 전혀 약속할 수 없어." 나는 우주선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심정이었다. 아니, 우주에 나가 지구에 남은 사람들을 향해 엄지를 들어 보이는 우주 비행사가 된 것 같았다. 이야기의 종류가 둘뿐이라면, 때로는 우리가 동시에 주인공이자 이방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P167
내 몸은 내 몸이고, 점점 좋아질 것이다. 나는 그 몸이 겉으로 나올 수 있게 해 주기만 하면 되었다. "새로운 시작은 없다는 말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에 가장 가까운 것 같아." 한참 만에 내가 말했다. "나 자신을 보고 내가 어떤사람인지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정말 기대가 돼." "아마 넌 그냥 너일 거야. 더욱 너다운 모습이 되겠지만." 우리 둘 다 그쪽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 P173
"토머스로 로이를 만날 거야?" 파커가 물었다. 명치가 굳는 느낌이었다. 나는 냅킨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몸이 - P174
풀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 그때 내 몸이 얼음처럼 굳었던 것에 대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파커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살펴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페이지로 그 자리에 나타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마음 한쪽에 있어. 그래야 내가 순전히 옛날에 상처를 입었던 그 아이가 아니라 다른 존재로 변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갈 수 있었던 거라고, 나중에 변명할 말이 없어지니까." "그 아이의 모습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야." 파커가 말했다. 공연히 모질게 굴려는 것이 아니었다. "네 모습이 변한다 해도 그건 바뀌지 않아." "알아." 나는 이렇게 말했지만, 정말로 알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내 안에는 정상이 되고 싶은 마음, 다시 태어나고 싶은 마음이 아직 조금이나마 남아 있었다. 남자를 무서워하는 아이도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우리가 녹아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음을, 나의 모든 자아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그 아이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내가 로이한테 수술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이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로이한테 지금의 내 모습을 보여 주고 싶어. 자기가 상처를 준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된 모습 말이야. 그게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 P175
내가 수술을 결정하는 데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나 자신 - P178
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허긴스는 지금 이 몸에서 나오는 이 목소리를 듣고 총구를 내렸다. 기분이 이상해지졌지만, 이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로이가 내게 남긴 상처와 그 상처에 인질처럼 붙들려 있던 내 삶이 바로 내 목숨을 구해 준 것일 수도 있었다. - P179
남자를 만드는 것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그가 내보이는 모습이다. 내게 그것을 가르쳐 줄 아버지가 없어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저 문을 열고 내가 직접 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 P186
이제 아빠와 나만 남았다. 아빠의 얼굴에는 구겨진 희망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나는 슬픔, 반감, 애정 속에서 팔랑개비처럼 돌다가 결국 차의 기어를 후진으로 넣고 조수석 뒤편에 한 팔을 걸친 채 뒤를 돌아보았다. - P131
그가 쏟아 낸 말이 우리 둘 사이에 죽은 시체처럼 걸려 있었다. 나는 계속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나보다 작은 것에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아니다. - P190
"나는 네 엄마를 사랑했다." 어쩌면 내가 이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지금도 사랑하고." "알아요." 나는 두 사람이 복도에서 손을 잡고 소곤거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 뒤로 나는 이미 부스러진 내 영역을 지키는 일에 진심을 다하지 않게 되었다. 로이를 감옥에 보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선택이 다가올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만약 로이가 다시 집으로 들어온다면 내가 갈 곳을 선택하는 일. - P190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로이와도 다른 남자와도 재혼하지 않았다. 데이트조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의 집에서 수도사처럼 살았다. 죄책감과 슬픔이 융합되어 그 나름의 정지 화면이 되어 버렸다. - P191
"아빠를 용서하려고 애써 봐." 내가 마지막으로 보모를 보았던 날,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죄책감을 느꼈나 보다." 그녀가 한밤중에 경쾌한 마쯔다 자동차를 몰고 쌩하니 떠나 버렸을 때 엄마는 한숨을 내쉬며 이렇게 말했다. 내 가슴에 고독이 내려앉았다. 나는 계속 멀리, 멀리 떠가는 우주비행사였다. 사실 나는 엄마가 아빠를 죽여 주었으면 했던 것 같다. 엄마가 그러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엄마를 지켜보았다. 나는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잔뜩 힘이 들어간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낯선 얼굴, 내 청바지 무릎에 뚫린 구멍이 신경 쓰였다. 평범한 아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할까? "혹시 엄마가 곤란해지나요?" 내가 물었다. 엄마가 무너지는 얼굴로 나를 보았다. "얘." 엄마가 너덜너덜한 청바지에서 내 손을 떼어 잡으며 말했다. "이젠 안전해."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나는 단어의 뒤섞임에 대해, 어떤 단어를 아주 많이 반복하다 보면 그 의미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안전. 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안전. - P42
"아빠가 감옥에 가면 좋겠니?" 모든 것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 식구들이 내게 원하는 게 뭔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뇨." 내가 말했다. - P48
그리고 나의 또 다른 일부가 훨훨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경찰관은 엄마가 ‘피곤한 표정‘이라고 말하는 어른의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확실하니?" 움직이기 시작한 이야기는 계속 움직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관은 내게서 말이 더 이어지기를 기다렸지만, 나의 침묵이 곧 나의 언어였다. 나의 침묵이 진실을 가려 결국 뭐가 뭔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 P49
"용서가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말했다. "내가 잘 지낸다는 걸 당신은 알아야 해요. 난 행복해요." 이 말을 하는 순간 진실이라는 깨달음이 왔다. 세상은 사악하면서 아름답고, 어느 정도는 불가해하다. 하지만 그로 인해 이야기를 원하는 우리의 소망이 사그라들지는 않는다. "당신도 아마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모를걸요." 질문이 아닌데 마치 질문처럼 들렸다. 그가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지 계산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중요한것은 그의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었다. 나는 상대를 괴물로 만들 생각이 없는 남자였다. 지금의 내 모습이 마음에들었다. 4월의 그날 밤 내 등에 총이 겨눠진 것을 깨달은 그 순간부터 줄곧 내가 좇던 기분이 바로 이거였다. 나는 시간을 앞지를 수 있고, 내 몸이 나를 해방시키게 할 수 있고, 내 몸의 본능을 믿을 수 있었다. 나 자신을 알 수 있었다. - P196
"갈게요, 로이." 내가 마침내 주문을 깨듯이 입을 열었다. "그래. 언제 나한테 편지라도 써. 알았지?" 그가 뒤에서 소리쳤다. 절대 안 쓸 거예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글쎄, 봐서요." 내가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듣고 환히 웃으며 즐겁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그가 안개 속으로 점점 물러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에게 이 순간을 허락해준 것이 일종의 용서였다는 생각을 했다. - P200
나는 점점 흐려지는 내 몸속에 보이지 않게 숨어서 점차 실체를 갖추고 있는 남자였다. - P203
아침마다 나는 흡집 난 거울 속 내 모습을 엄격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처음으로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맞기로 되어 있는 그달 10일이 이제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남자처럼 ‘구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주유소의 한 칸뿐인 남자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처럼 불안한 순간에는, 남자가 되어도 남자인 척 구는 것처럼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거울을 보며 남자가 된 내 모습을 상상해 보려고 했다. 내 목소리가 굵직해질 수도 있고 갈대처럼 가늘어질 수도 있었다. 대머리가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비쩍 마른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근육질이 될 수도 있었다. 털이 많아질 수도 있고 여드름투성이가 될 수도 있었다. 나도 나 자신을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은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었다. 내 몸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P208
"궁금한 게 있는데…." 오래전 성전환 남성인 브랜드 티나가 살해당해 땅에 묻힌 마을을 지나갈 때 파커가 말했다. "왜 그 사람이 계속 거기에 살았던 것 같아? 도시로 이사할 수도 있었잖아. 그랬다면 지주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도망치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금도 살아 있을지 모르는데." 밖은 어스름하고 건조했다. 몇 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보인 것이라고는 가끔 지나가는 픽업트럭 몇 대와 낮게 축 늘어진 광대한 하늘뿐이었다. "여기가 좋아서 그랬나?" 파커는 설마 그랬겠냐는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니면··· 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본연의 모습으로 살기 위해 강제로 이곳을 떠나야 하는 게 싫었는지도 모르지." 내가 말했다. 파커는 똑바로 앞을 바라보았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예전에 피츠버그를 떠나 보스턴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도망치기 위해 동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 - P209
는 한곳에 붙잡히지 않는 편이 좋다고 믿었다. 내 본연의 모습이라고 믿는 나의 정체성 또는 내 인생이 마땅히 향해야 한다고 믿는 곳을 지키기 위해 망가지고 싶지 않았다. 무엇이 남자를 만드는가? 남자는 스스로 남자가 된다. 파커가 입술을 깨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쇼핑몰에서 궂은 일을 하며 돈을 모은 덕분에 이렇게 떠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때로는 떠날 때를 아는 것만이 내게 남은 유일한 선택지일 때가 있다. "그런 건 아무 의미가 없어." 파커가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난 어떤 의미에서는 용감했다고 보는데." 진심이었다. "주위에서 위협을 받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지키는 일에 헌신하는 것 말이야." "난 슬프다는 생각이 들 뿐이야." 파커가 말했다. 우리는 누구도 반드시 그런 식으로 용감해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함께 입을 다물었다. 이 나라에서 가장 광대한 하늘 아래에서 그가 힘없이 별을 헤아리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이제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 것, 즉 중요한 문제는 누가 날 해치거나 해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했기 때문에 용감해졌다. 중요한 문제는, 누구도 해칠 수 없는 나의 일부가 있음을 알고 무슨 일이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었다. - P210
파커는 내게 첫 면도기 세트를 사 주고, 수염이 자라기 시작한 내 턱을 손으로 문질렀다. 하지만 내 몸이 점점 커질수록 그녀의 일부가 움츠러드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변화가 너무 빨랐다. 야구 연 - P212
습장에서 야구공이 튀어나오는 속도 같았다. (...) "이제 남자가 됐으니까, 항상 너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좀 다르게 보여." 파커가 말했다. 그녀의 지친 목소리에 나는 겁을 먹었다. "네가 잘 몰라서 그래!"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분노를 어쩌지 못해 혈관이 불룩 튀어나온 남자가 아니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남자도 아니었다. 내 몸은 올바른 모습이 되었지만 나 자신은 잘못된 이야기 속에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파커는 울면서 내 말이 맞다고, 자기가 잘 몰라서 그런 소리를 했다고 말했다. - P213
남자가 되어 가는 과정은 밝으면서도 긴장되게 느껴졌다.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셨을 때처럼 소란스러운 에너지가 달콤 씁쓸한 불꽃을 터뜨렸다. 권투처럼 잔인하면서도 우아했다. 내 몸이 변하는 물리적인 과정이. - P214
나는 껍데기에서 벗어나 노출되었으나 아직 방어책을 마련하지 못한 짐승이었다. - P215
파커와 나는 멕시코에서 사 온 해먹을 뒷마당 전나무 밑에 매어 놓고 거기에 누워 있었다. 우리의 인생처럼 우리 몸이 공중에 떴다. 파커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주근깨가 있는 그녀의 코에 입을 맞추며 신혼여행 때의 내 몸과 지금의 몸은 서로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다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이런 현실을 감내하며 사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나 같은 남자는 없다. 나는 성전환 남성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남자였다. 나의 여러 모습이 한꺼번에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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