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페스×퀴어 - 케이팝, 팬덤, 알페스, 그리고 그 속의 퀴어들과 퀴어함에 대하여 오봄문고 7
권지미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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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은 이제 거의 한국 문학이다"라는 식의 찬사를 늘어놓는 이들도 많지만, 그런 찬사를 보고 있자면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팬픽에는 ‘한국 문학‘이 되지 못하는, 혹은 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나는 팬픽의 바로 그 부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찬사 자체가 ‘팬픽‘과 ‘한국 문학‘ 사이의 위계를 만드는 것 같아서 정말로 ‘한국 문학‘을 심하게 닮은 팬픽이 아닌 이상(그런 팬픽들이 종종 있긴 하다) 나는 그러한 찬사를 자제하는 편이다. - P9

그리고 팬픽은 분명히 여성, 그리고 비남성의 문화이기도 하다. 팬픽은 여성들과 비남성들의 인형놀이 - P12

로, 그들이 어떤 캐릭터를 빌려서 거기에 자기 이야기를 어느 정도 넣어가며 만드는 것이 팬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형‘이 남성 아이돌, 즉 남자라고 해도 결국 넓은 의미에서 팬픽은 여성서사, 혹은 비남성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BL이 여성서사라고 불리는 이유와 마찬가지다(이에 대한 내용은 〈남성 아이돌 알페스와 ‘여성서사‘ 논란에 대하여〉에서 좀더 자세히 다뤘다). 문예 평론가인 사이토 미나코齋藤美奈子가 《요술봉과 분홍 제복》에서 말했듯이, 남성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작품 속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세한 해석에 열을 올리는 것에 반해, 여성 오타쿠들은 ‘이야기를 고쳐 쓴다‘. 사실세상의 많은 이야기는 여성 혹은 비남성의 것이 아닌, 남성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여성 혹은 비남성의 것으로 고쳐 쓰는 건 여성들과 비남성들의 놀이다. 나는 이것을 원본 없는 자들의 애처로움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제시된 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의 창조적 문화라고 해석하고 싶다. 팬픽은 남성의 세계를 남성이 아닌 자들이 고쳐 쓰는,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문화의 전형 중 하나다. - P12

어떤 이들의 욕망은 때때로 파괴적이며, 누군가에게는 공격적이고, 누군가에게는 백래시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되살리는 나쁜 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들은 정말로, 존재한다. 욕망을 가진 이들이 기득권에 속할수록 혹은 기득권의 욕망에 가까울수록 그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고, 기득권에서 벗어난 이의 욕망은 더욱 비판받는 경향이 있다. 여성과 비남성의 문화인 알페스, 그리고 그 알페스의 기묘한 한 갈래인 퀴어페 - P19

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 데는 그런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 P20

퀴어 이론에서는 ‘퀴어‘를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해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추론을 피하는 것‘으 - P29

로 여기고 있으며, 반드시 성적인 것을 다룰 때만 ‘퀴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도 아니다. 퀴어 이론에서는 어떠한 것이 그 자신의 장르 또는 분류의 일반적인 규범에 맞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장르 또는 분류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경우를 ‘퀴어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설명을 들을수록 ‘퀴어‘라는 것이 너무나 모호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사회학자 이나영은 "퀴어를 딱 잘라 정의하기 어렵고 그것이 퀴어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퀴어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건퀴어를 꽤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 P30

이성애 서사가 중심이 되는 팬픽 시장 밖과는 다르게, 동성애 서사가 중심이 되는 팬픽을 읽으며 어떤 이들은 이성애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일시적인 행복과 정서적 구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독자들에게 팬픽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공간에 몰입할 수 있는 도피처일 수 있고, 이는 이성애중심주의적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비교적) 합법적인 방법일 수 있다. 설령 팬픽을 읽는 이가 시스젠더 이성애자라도, 지나치게 융통성 없는 이성애중심적인 현실세계에서 성별규범과 성애에 대한 답답함과 불만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답답함과 불만을 동성애를 다룬 팬픽으로 풀 수도 있다. 그/그녀가 읽고 쓰는 팬픽이 만약에 그저 이성애의 유해한 지점들을 따라 한 것 같은 ‘빻은‘ 팬픽일지라도, 어쨌거나 그것은 이성 간의 사랑과 연대를 다루지 않는 것으로, 분명 ‘규범적인 이성애 서사‘는 아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동성애적 - P34

서사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지극히성애적인 욕망에서만 비롯된다는 분석은 정말이지 지극히 이성애적인 해석이다. - P35

m팬픽이 실제 동성애자 및 성소수자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고, 지나치게 대상화되었으며, 질 낮은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그것이 그나마 (특히 여성청소년들에게?) 접근 가능성이 높은, 한국어로 쓰인 한국인들의 동성애 및 퀴어 이야기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사실이 무척 비극적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볼 게 없고 소비할 것이 없으면 그런 질 낮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다니!‘ 어떤 이들은 팬픽을 보고 퀴어를 배우게 되면 여러 악효과가 나타난다는 주장까지 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악효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이 - P36

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비퀴어들, 주로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들이 팬픽만 보고 퀴어의 삶을 오해한다." - P37

나는 ‘실제의 퀴어‘를 ‘실제의 퀴어답게‘ 묘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지 고민해보고 싶다. 어떤 단어들이 퀴어의 단어들일까?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느낄까? 그리고 어쩌면 어떤 퀴어들은 정말로 ‘팬픽처럼‘ 섹스할 수도 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 P39

다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일본의 BL 연구자 미조구치 아키코는 "‘진짜 게이 섹스‘를 누가 알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애초부터 성애는 판타지이므로 과장된 판타지가 어떤 표상을 통해 실제 판타지를 구축해 나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섹스는 판타지이고, 판타지와 표상, 현실의 경계는 모호하며 분명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 진짜 퀴어의 섹스는 누가 알고 있는가? 퀴어 ‘당사자‘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섹스를 ‘진짜 퀴어들의 섹스‘로 규정하고 인식하는가? 그것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가?
그리고 팬픽을 읽은 사람이 정말로 퀴어에 대한 어떤 ‘왜곡된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한들, 팬픽의 판타지에 그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나마 퀴어한 것이 팬픽밖에 없는‘ 이성애중심적인 사회구조, 퀴어적인 것을 취급하지 않으려 하는 매스미디어, 성소수자를 비가시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잘못이다. 많은 이들이 말도 안 되는 판타지로 가득한 이성애 로맨스 소설을 읽고 ‘실제의 이성애‘와는 다른 ‘판타지적 이성애‘ - P40

를 학습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판타지적 이성애’뿐 아니라 ‘실제의 이성애‘에 대한 교본이 넘쳐나기 때문에, ‘판타지적 이성애‘ 서사를 즐기는 이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쉽다. 하지만 ‘판타지적 퀴어‘의 서사를 즐기는 이들이 ‘실제 퀴어‘에 대한 교본에 접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 P41

본질적으로 팬픽은 어떤 비퀴어적인 것을 좀더 퀴어하게 해석하며 노는 서사놀이이다. 그것이 이성애의 유해함을 모방한 ‘가짜‘라 불릴지라도, 그리고 ‘실제 퀴어의 삶‘과는 멀고 먼 것일지라도, 어떤 퀴어는 그것을 가지고 놀며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 - P42

나중에 사회적으로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성소수자에 대한 어떤 모델이 잔뜩 생겨나더라도, 어떤 이들은 그러한 ‘교본‘을 보지 않고 따라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하지 말라는 것을 보고 따라 하려는, ‘하면 안 되는‘ 것을 욕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욕망 자체가 퀴 - P45

어하다고 생각한다. 하지 좀 말라는 것을 해버리는, 어떤 ‘청개구리‘ 같은 심보 자체가 퀴어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퀴어의 실제 삶을 그려낸 콘텐츠, 미디어에서 비추는 바람직한 현실의 퀴어들, 건전한 퀴어용 학습만화 같은 것들이 필요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한 것은 엄청나게 필요하고, 퀴어혐오가 가득한 지금 이 시대에는 꽤 시급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원한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퀴어 콘텐츠, ‘아,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라고 느낄 만큼 많은 퀴어 이야기들을 원한다. 현실을 그려낸 것도, 판타지를 그려낸 것도,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호한 것도 모두 원한다. 나는 그러한 수많은 콘텐츠를 당연하게, 당당하게 향유하고 싶고, 동시에 불량식품 같은 팬픽 또한 가지고 놀고 싶다. 퀴어 콘텐츠가 많은 시대에는 그것들을 패러디하는 팬들의 문화나 팬픽 또한 당연하게 더 퀴어해지고, 더 재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더 나은 미래, 더 풍족하다 못해 퀴어 콘텐츠 중독자에게는 거의 사치스럽기까지 한 미래를 꿈꾼다. 아마, 나와 같은 수많은 ‘청개구리‘ 퀴어들도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욕심이 많고, 어쩌면 우리의 그 욕심 자체가, ‘퀴어‘한 것일 수도 있다. - P46

알페스의 일반적인 규범 속에서 ‘실존 인물‘들이 언제나 비퀴어였고 그들의 비퀴어성이 확대되어 그것을 뒤집는 동성애적 해석이 주가 된 것과 달리, 퀴어페스 속에서는 ‘실존 인물’이 퀴어할 가능성은 훨씬 더 크게 해석되고 그들의 퀴어성은 확대되어 그 확대된 퀴어성으로 인한 다양한 관계들을 탐구하며 동성애뿐만 아니라 ‘더 퀴어한‘ 커플링 놀이를 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리얼 퍼슨, 진짜 사람, 실존 인물이 퀴어이고 퀴어일 수 있는 세계가 바로 퀴어페스의 세계였다. - P52

나는 항상 "내가 퀴어 당사자였기 때문에, 더 퀴어한 것이 읽고 싶어서, 그래서 썼다"라고 답변을 해왔다. 그러나 그 답변은 충분한 것이었는가? 나는 이제 와서 고민한다. - P61

‘퀴어’를 스펙트럼이라고 본다면, 나는 누군가에 비해 엄청나게 퀴어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 비해 엄청나게 퀴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나는 좀더 정상성 범주 내에 있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퀴어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또 당사자성이 없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나는, 내가 당사자성을 가지지 않은 퀴어한 모습들도 무척 사랑한다. 나는 레즈비언에 가깝지만 게이도 사랑스럽고 좋다. 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지만 바이너리인 트랜스 여성이나 트랜스 남성을 보면 반갑고 기쁘다. 나는 젠더교란이 안 되는, 그저 나의 지정성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형이기에 젠더교란적 외모를 가진 이들을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동경하며 그들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런 퀴어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퀴어페스를 썼다. 〈성균관 퀴어들의 나날〉 속에는 바이너리 트랜스젠더에 가깝게 읽을 수 있는 인물들도 나오고, 그들이 자신의 몸에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부분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섹슈얼리티는 에로틱하게 다루어진다. 나는 그런 것을 썼다. 그렇다면 나는 나와는 다른 성적 소수자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러버‘인 걸까?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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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 남성문화에 대한 고백, 페미니즘을 향한 연대
박정훈 지음 / 내인생의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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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바가 귀엽게 웃었다며 "호감 있는 것 맞지?"라고 글 올리는 남자와 부하 직원에게 "네가 꼬리쳤잖아"라면서 만나달라는 남자, 두 남자의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공유하는 정서는 동일하다. ‘여성은 일단 성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주류 남성성이 변하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 가부장제 사회는 지금껏 자기중심적이고 여성과 온전하게 관계 맺을 줄 모르는 남자를 길러 왔다. 그래도 괜찮다고 믿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런 남성들로 인해 여성들이 얼마나 불쾌했는지, 고통받았는지 낱낱이 밝혀졌다. 그러면 남성은 행복했냐고? 아니, 그렇게 자란 남성도 불행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여성과의 소통에 끊임없이 실패하다 끝내 외로워지는 삶이 괜찮을 리 없다.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이론이자 운동이다. 동시에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비뚤어진 남성성을 바로잡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남성을 만들어 가며, 기존의 남성성을 해체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남성들을 착각의 늪에서 구해 내고,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 맺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필요하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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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 삶의 지도를 확장하는 배움의 기록
이길보라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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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경험."
예술가로서 어떻게 지속가능한 삶을 꾸려나가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할 때 이 말을 생각한다. 두 단어로 연결된 짧은 수어이지만, 엄마 아빠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말 그 삶의 방식을 믿었기에 선택의 순간마다 용기내어 직접 부딪칠 수 있었다. - P10

"안녕하세요.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이야기꾼의 선천적 자질이라고 굳게 믿고,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드는 이길보라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굳게 믿는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지 않으면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내 선천적 배경을 긍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유일하게 엄마, 아빠만이 내 배경을 밑도 끝도 없이 긍정했다. 다시 태어나도 농인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표정과 흔들림 없는 그들의 손동작이 나를 그렇게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농인 부모로부터 태어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된 것은 어쩌면 ‘타고난 일‘인지도 모르겠다. 부모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와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세상에 귀기울이는 것은 다른 결을 지니고 있었다. 이 두 가지가 왜, 어떻게, 무엇이 다른지를 들여다보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다. - P17

"열어라! 열어라!"
모든 참가자들이 목소리 높여 구호를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에 앉아야 할지 몰라 고민하던 이들과 자리가 없어 뒤쪽으로 길게 줄을 섰던 사람들이 차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주행하던 차량의 운전자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경찰 역시 그랬다. 그렇게 집회 대오는 넓게 확장된 도로로 옮겨갔다. 드디어 차도를 점거했다. 누군가는 불편할 터였지만 그들이 불편함을 깨닫는 것 자체가 이 집회의 목적이었다. 여성은 단지 성별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평생 불편함을 겪어왔으니 말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여성참정권운동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에 이런 대사가 있다.
"우리는 창문을 깨고 불을 질러요. 남자들이 들어주는 유일한 언어가 전쟁이니까요."
여성에게도 투표할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던 이들이 길거리의 창문을 무차별적으로 깨고 집에 불을 지르자 그제야 듣기 시작한다. 남성이 인식하는 방식, 미러링을 통해 여성은 스스로 가시적인 존재가 되기를 택한 것이다. 그렇게 오랜 투쟁 끝에 그들은 참정권을 얻는다. <서프러제트>는 권리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여성들의 연대를 다룬 영화다. - P250

졸업 연구 주제는 ‘몸짓과 움직임을 통한 역사 다시 쓰기―우리의 몸의 침묵과 기억 읽기‘로 잡았다. 실험이 중심이었던 3학기와 개념화에 집중했던 4학기를 통해 연구 주제를 명확하게 잡을 수 있었다. 초기 연구 주제 ‘여성의 기억은 남성 · 국가의 기억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추상적인 질문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헤맸는데 2학기에 제작한 영상 <국민체조 및 국기에 대한 경례>가 전환점이 되었다. 내가 말하는 여성의 기억은 ‘몸의 기억‘이고, 몸에 새겨진 기억을 파고들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몸, 내 몸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의 몸은 국민체조와 국기에 대한 경례, 학교에서 배운 깜지 쓰기, 국가 및 사회가 요구하 - P266

는 (여성의) 몸이 되기 위한 동작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동작들은 모두 국가, 사회로부터 훈련되고 주입된 것이었으며 한국과 멀리 떠어진 이곳에서 몸이 기억하는 동작들을 통해 그 기억이 무엇인지, 그사이에 숨겨진 침묵의 기억은 어떤 것인지 영화를 통해 살펴보는 것이 내가 프로젝트를 통해 하고 싶은 연구였다.
연구 주제를 잡은 후 학기마다 짧은 영상을 제작했다. 네덜란드의 큰 공원에 테이블과 의자 하나를 가져다 두고 긴 롤페이퍼에 깜지를 썼다. 캄캄해져 주변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종이를 작은 글씨로 채웠다. 한 시간 정도 촬영했는데 실제 물리적 시간을 보여주고 싶어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상영했다. 깜지 쓰기는 실제로 내가 좋아했던 공부 방법이기도 했는데 네덜란드의 공원 한복판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롤페이퍼에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무엇보다 내몸은 정확하게 그 동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글씨로 오랜 시간 종이 채우기. 읽고 쓰기를 장시간 반복하는 학습법그후 내가 한국에서 습득한 몸의 동작들을 돌아보았다. 늘 주변을 신경쓸 것, 겉모습을 단정히 할 것, 다리를 벌리지 않고 앉을 것, 남들과 끊임없이 비교할 것, 화장할 것, 치마를 입을 것, 긴 머리 스타일을 고수할 것, 성별에 맞게 행동할 것. 이른바 정상성의 몸 되기. 내 몸이 체화하고 있는 동작들은 결국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는 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나 혹은 우리의 몸은 그걸 - P267

지속하며 이 시스템을 지탱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묻어야만 했던 기억들을 떠올렸다. 그건 여성의 몸에 대한 질문이었고,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와 연결되었다. 나는 나와 엄마, 할머니의 임신중지 경험을 소재로 영화를 통해 우리 몸의 기억을 드러내기로 했다.
작업은 쉽지 않았다. 마지막 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촬영을 하러 한국에 갔다. 스튜디오에 엄마와 할머니를 불러 인터뷰를 했다. 꼭 하고 싶은 작업이었지만 동시에 정말 하고 싶지 않은 작업이었다. 감독으로서 꼭 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딸이자 손녀로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몸에 대한 질문을 던졌고 그들의 임신중지 경험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박정희 정권 때는 실제로 인구 조절을 하기 위해 낙태 수술이 빈번하게 이루어졌고 당시에는 쉬쉬하지 않고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고 했지만 엄마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나는 그럼에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했지만 사실 그러고 싶지 않기도 했다. 나는 나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했다. 할머니는 놀랐고 엄마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나는 질문했다.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태어난 여성들이고 나는 엄마의 몸으로부터, 할머니의 몸으로부터 나왔는데 왜 우리는 각자의 임신중지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지, 여태껏 발화되지 않고 몸 어딘가에 묻어둔 기억들은 이상적인 몸을 갖추기를 요구하는 국가 ·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나는 인터뷰 영상 - P268

과 국민체조, 국기에 대한 경례, 이상적인 여성의 신체상을 주입했던 아카이브 영상들과 섞어 편집했다. 마지막 프로젝트의 제목은 ‘우리의 몸‘이었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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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1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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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왜그렇게 출세를 못해 안달하는지 아니? 다 외로워서 그런 거야. 사람들 ‘속에서‘ 폼나게 살고 싶으니까 돈이나 권력으로 사람들을 계속 자기 옆에 묶어두려고 하는 게지. 헌데, 실제론 출세를 하면 할수록 더더욱 ‘왕따‘가 된다는 게 문제란 말이야. 그건 또 왠 줄 아니? 열심히 돈과 권력을 좇아 살다 보니, 친구들의 존재를 홀라당 까먹어버린 거야. 한마디로 ‘재수없어‘ 지는 거지. 다 공부를 엉터리로 했기 때문이야. 그런 사람은 공부를 백날 해봐야, 아니, 최고등급을 받아봤자 잔챙이밖엔 안 돼. 잔챙이를 누가 친구로 사귀고 싶어하겠어? 또 자기 자신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그따위 공부가 어찌 세상을 이롭게 하겠냐구? - P10

그런 시각에서 보면 대학로는 정말 밋밋하기 짝이 없다. 거리의 대부분이 패스트푸드점과 카페로 가득하고, 극장들은 소비적 상권에 압도되어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나를 포함하여 모 - P43

두들 그곳을 문화의 거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건 문화란 세련되고 소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참, 그러고 보면 문화라는 말처럼 오염된 단어도 없지 싶다. 단어 본래의 뜻으로 치자면야 인간이 누리는 삶의 다양한 표현방식이 되겠지만 시대를 잘못 만난 탓으로 지금은 ‘삶‘은 쏙 빠져버리고 뭔가 삐까번쩍한 표현형식이라는 의미만 남고 말았다. 그러자니 자연 ‘다양성‘마저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남은 건 오직 눈앞을 휙휙 지나가는유행뿐. - P44

밥을 먹고 물을 마시듯 꾸준히 밀고 가는 항심(恒心)과 늘 처음으로 돌아가 배움의 태세를 갖추는하심(下心), 공부에 필요한 건 오직 이 두 가지뿐이다. - P49

아무리 즐거워도 돈이 되지 않으면 ‘인생에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아무리 싫어하는 것이라도 돈이 되면 ‘몹시 유용한‘ 일이 된다. 돈이 깊이 개입하는 순간, 어떤 활동이든 졸지에 타율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다 남을 이겨야 한다는 강박증까지 작동하기 시작하면, 그 활동 속에 들어 있는 모든 생명력은 완전 잠식되고 만다. - P53

독서를 외면하는 대안학교라? 언어도단! 상식적인 말이지만, 그런 다양한 활동이 신체와 ‘통‘하려면 무엇보다 근기(根器)가 튼실해야 한다. 근기란 쉽게 말하면 그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에너지의 분포도‘ 같은 것이다. 그릇이라고도 하고, 카리스마라고도 한다.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성적이나 학벌이 아니라, 바로 이 근기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충전할 수 있는 길은 단언컨대 독서밖에 없다! - P57

창의성? 참 좋은 말이다. 이걸 나쁘다고 할 사람은 세상에 없다. 문제는 창의성의 구체적 내용이다.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어떤 창의성인가가 문제라는 거다.
가장 두드러진 건 시설과 서비스의 세련됨을 창의성과 그대로 오버랩시키는 경향이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사회는 학교가 주는 칙칙하고 낙후된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어딜 가도 시설 하나는 끝내준다. 전국 구석구석마다 - P61

영상 시설이 갖추어지고, 인터넷이 연결되었다. 특히 대학은 거의 몇 년간을 리모델링에 올인했다. 한 대학은 화장실을 리모델링하는데 10억을 썼다고 한다. 시설만 바꾸면 창의적 역량이 절로 고양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술진흥재단의 연구비 지원도 만만치 않다. 그 덕분에 온갖 종류의 학회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고, 전국 규모의 학술지 또한 차고 넘친다. 그런데, 참 기이하게도 이런 외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창의적인 담론이 제출되었다는 소문은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표절에 복제에 몰주체적이고 기형적인 풍토가 만연되고 있는 실정이다. - P62

결국 우리는 모두 속은 것이다. 여건만 좋으면, 지원만 충분하면 활동은 저절로 굴러가리라는 발상, 이것이 바로 학교가 퍼뜨리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수락한 거짓말의 덫이다. 즉 창의성에 대해 전혀 ‘창의적으로‘ 사유하지 못한 것. 진정한 창의성은 폼나는 공간에 들어앉아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그 공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학습 주체와 공간이 어우러져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아주 강도 높은 학습의 장을 연출하는 것, 창의성이란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한다. - P65

독재 정권 시절엔 대량생산의 시대였고, 그때는 창의성 따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똑같은 것을 반복적으로 찍어내면 되니까. 그에 반해, 지금은 상품이 시장에서 먹히려면 차별성이 뚜렷해야 한다. 쉽게 말해 튀어야 한다. 그러자니 사회 전체가 온통 창의성, 개성, 사고력 따위를 떠들어대기에 바쁜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창의성이란 새로운 유행을 선도하는 기획력, 신상품 개발의 아이디어 따위를 의미한다.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아니라, 포장과 이미지를 적당히 바꿀 줄 아는 능력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간 학교들이 거죽을 바꾸는 데 그토록 치중했던 것도 나름 이해할 만하다. - P66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으면 자신의 문체를 주의 깊게 살펴보라. 거울보다 더 투명하게 자신을 비춰줄 것이다. 아마 탁월한 직관력을 가진 점쟁이라면, 문체만 보고도 그 사람의 운명을 다 점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전의 시대엔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문장에 흐르는 기세나 빛깔만 보고도 장차 어떤 인물이 될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충분히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지금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다면, 운명의 궤적을 변경하고 싶다면, 문체를 바꾸면 된다. 거꾸로, 문체를 바꾸고 싶으면 모름지기 표정을, 몸을, 삶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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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 한 여자의 일생
김인선 지음 / 나무연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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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나는 70여 년 살아온 내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내 인생 가운데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운명처럼 주어진 부분이 있다. 가령 부모님이 원치 않았건만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을 나는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이후 나는 낯선 독일에 와서 간호사로 일했고, 신학을 공부했고, 독일로 이주해서 살아가다가 죽음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단체를 만들었다. 또한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했다가 이혼했고, 지금은 나를 사랑해주는 한 여성과 - P9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러한 나의 삶은 어느 정도 내 의지로 만들어온 것이리라. 한편 내 앞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의 시간이 놓여 있다. 이 시간은 인간이 정하는 걸까, 신이 정하는 걸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다면 인간의 선택일 수 있겠지만, 많은 이들에게 죽음의 시간은 신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아직 당도하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나에게 닥칠 일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운명이 무엇이고, 내가 결정해온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도 있겠지만, 내가 살아가는 동안 어떤 선택을 해왔는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그것이 이 글을 쓰는 데로 나를 이끌었다. - P10

그러니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나는 나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나 자신을 무례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에게 성내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소중한 것처럼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렇게 나에 대한 마음을 타인에게 확장시켜나갈 것이다. 그것이 곧 세상을 아름답게 이끄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 P11

이런 사연은 가난하고 척박했던 당시의 한국에서 흔히 있을 법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는 일흔 살 인생을 살아온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서러움의 세월이다. 과거의 아픔은 나이를 먹으며 잊히는 게 아니라 더욱 선명하게 되살아나곤 한다. 그만큼 인생에 깊이 각인된 것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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