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픽은 이제 거의 한국 문학이다"라는 식의 찬사를 늘어놓는 이들도 많지만, 그런 찬사를 보고 있자면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팬픽에는 ‘한국 문학‘이 되지 못하는, 혹은 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나는 팬픽의 바로 그 부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찬사 자체가 ‘팬픽‘과 ‘한국 문학‘ 사이의 위계를 만드는 것 같아서 정말로 ‘한국 문학‘을 심하게 닮은 팬픽이 아닌 이상(그런 팬픽들이 종종 있긴 하다) 나는 그러한 찬사를 자제하는 편이다. - P9
그리고 팬픽은 분명히 여성, 그리고 비남성의 문화이기도 하다. 팬픽은 여성들과 비남성들의 인형놀이 - P12
로, 그들이 어떤 캐릭터를 빌려서 거기에 자기 이야기를 어느 정도 넣어가며 만드는 것이 팬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형‘이 남성 아이돌, 즉 남자라고 해도 결국 넓은 의미에서 팬픽은 여성서사, 혹은 비남성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BL이 여성서사라고 불리는 이유와 마찬가지다(이에 대한 내용은 〈남성 아이돌 알페스와 ‘여성서사‘ 논란에 대하여〉에서 좀더 자세히 다뤘다). 문예 평론가인 사이토 미나코齋藤美奈子가 《요술봉과 분홍 제복》에서 말했듯이, 남성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작품 속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세한 해석에 열을 올리는 것에 반해, 여성 오타쿠들은 ‘이야기를 고쳐 쓴다‘. 사실세상의 많은 이야기는 여성 혹은 비남성의 것이 아닌, 남성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여성 혹은 비남성의 것으로 고쳐 쓰는 건 여성들과 비남성들의 놀이다. 나는 이것을 원본 없는 자들의 애처로움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제시된 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의 창조적 문화라고 해석하고 싶다. 팬픽은 남성의 세계를 남성이 아닌 자들이 고쳐 쓰는,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문화의 전형 중 하나다. - P12
어떤 이들의 욕망은 때때로 파괴적이며, 누군가에게는 공격적이고, 누군가에게는 백래시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되살리는 나쁜 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들은 정말로, 존재한다. 욕망을 가진 이들이 기득권에 속할수록 혹은 기득권의 욕망에 가까울수록 그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고, 기득권에서 벗어난 이의 욕망은 더욱 비판받는 경향이 있다. 여성과 비남성의 문화인 알페스, 그리고 그 알페스의 기묘한 한 갈래인 퀴어페 - P19
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 데는 그런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 P20
퀴어 이론에서는 ‘퀴어‘를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해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추론을 피하는 것‘으 - P29
로 여기고 있으며, 반드시 성적인 것을 다룰 때만 ‘퀴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도 아니다. 퀴어 이론에서는 어떠한 것이 그 자신의 장르 또는 분류의 일반적인 규범에 맞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장르 또는 분류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경우를 ‘퀴어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설명을 들을수록 ‘퀴어‘라는 것이 너무나 모호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사회학자 이나영은 "퀴어를 딱 잘라 정의하기 어렵고 그것이 퀴어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퀴어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건퀴어를 꽤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 P30
이성애 서사가 중심이 되는 팬픽 시장 밖과는 다르게, 동성애 서사가 중심이 되는 팬픽을 읽으며 어떤 이들은 이성애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일시적인 행복과 정서적 구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독자들에게 팬픽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공간에 몰입할 수 있는 도피처일 수 있고, 이는 이성애중심주의적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비교적) 합법적인 방법일 수 있다. 설령 팬픽을 읽는 이가 시스젠더 이성애자라도, 지나치게 융통성 없는 이성애중심적인 현실세계에서 성별규범과 성애에 대한 답답함과 불만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답답함과 불만을 동성애를 다룬 팬픽으로 풀 수도 있다. 그/그녀가 읽고 쓰는 팬픽이 만약에 그저 이성애의 유해한 지점들을 따라 한 것 같은 ‘빻은‘ 팬픽일지라도, 어쨌거나 그것은 이성 간의 사랑과 연대를 다루지 않는 것으로, 분명 ‘규범적인 이성애 서사‘는 아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동성애적 - P34
서사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지극히성애적인 욕망에서만 비롯된다는 분석은 정말이지 지극히 이성애적인 해석이다. - P35
m팬픽이 실제 동성애자 및 성소수자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고, 지나치게 대상화되었으며, 질 낮은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그것이 그나마 (특히 여성청소년들에게?) 접근 가능성이 높은, 한국어로 쓰인 한국인들의 동성애 및 퀴어 이야기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사실이 무척 비극적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볼 게 없고 소비할 것이 없으면 그런 질 낮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다니!‘ 어떤 이들은 팬픽을 보고 퀴어를 배우게 되면 여러 악효과가 나타난다는 주장까지 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악효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이 - P36
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비퀴어들, 주로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들이 팬픽만 보고 퀴어의 삶을 오해한다." - P37
나는 ‘실제의 퀴어‘를 ‘실제의 퀴어답게‘ 묘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지 고민해보고 싶다. 어떤 단어들이 퀴어의 단어들일까?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느낄까? 그리고 어쩌면 어떤 퀴어들은 정말로 ‘팬픽처럼‘ 섹스할 수도 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 P39
다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일본의 BL 연구자 미조구치 아키코는 "‘진짜 게이 섹스‘를 누가 알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애초부터 성애는 판타지이므로 과장된 판타지가 어떤 표상을 통해 실제 판타지를 구축해 나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섹스는 판타지이고, 판타지와 표상, 현실의 경계는 모호하며 분명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 진짜 퀴어의 섹스는 누가 알고 있는가? 퀴어 ‘당사자‘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섹스를 ‘진짜 퀴어들의 섹스‘로 규정하고 인식하는가? 그것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가? 그리고 팬픽을 읽은 사람이 정말로 퀴어에 대한 어떤 ‘왜곡된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한들, 팬픽의 판타지에 그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나마 퀴어한 것이 팬픽밖에 없는‘ 이성애중심적인 사회구조, 퀴어적인 것을 취급하지 않으려 하는 매스미디어, 성소수자를 비가시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잘못이다. 많은 이들이 말도 안 되는 판타지로 가득한 이성애 로맨스 소설을 읽고 ‘실제의 이성애‘와는 다른 ‘판타지적 이성애‘ - P40
를 학습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판타지적 이성애’뿐 아니라 ‘실제의 이성애‘에 대한 교본이 넘쳐나기 때문에, ‘판타지적 이성애‘ 서사를 즐기는 이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쉽다. 하지만 ‘판타지적 퀴어‘의 서사를 즐기는 이들이 ‘실제 퀴어‘에 대한 교본에 접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 P41
본질적으로 팬픽은 어떤 비퀴어적인 것을 좀더 퀴어하게 해석하며 노는 서사놀이이다. 그것이 이성애의 유해함을 모방한 ‘가짜‘라 불릴지라도, 그리고 ‘실제 퀴어의 삶‘과는 멀고 먼 것일지라도, 어떤 퀴어는 그것을 가지고 놀며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 - P42
나중에 사회적으로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성소수자에 대한 어떤 모델이 잔뜩 생겨나더라도, 어떤 이들은 그러한 ‘교본‘을 보지 않고 따라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하지 말라는 것을 보고 따라 하려는, ‘하면 안 되는‘ 것을 욕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욕망 자체가 퀴 - P45
어하다고 생각한다. 하지 좀 말라는 것을 해버리는, 어떤 ‘청개구리‘ 같은 심보 자체가 퀴어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퀴어의 실제 삶을 그려낸 콘텐츠, 미디어에서 비추는 바람직한 현실의 퀴어들, 건전한 퀴어용 학습만화 같은 것들이 필요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한 것은 엄청나게 필요하고, 퀴어혐오가 가득한 지금 이 시대에는 꽤 시급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원한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퀴어 콘텐츠, ‘아,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라고 느낄 만큼 많은 퀴어 이야기들을 원한다. 현실을 그려낸 것도, 판타지를 그려낸 것도,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호한 것도 모두 원한다. 나는 그러한 수많은 콘텐츠를 당연하게, 당당하게 향유하고 싶고, 동시에 불량식품 같은 팬픽 또한 가지고 놀고 싶다. 퀴어 콘텐츠가 많은 시대에는 그것들을 패러디하는 팬들의 문화나 팬픽 또한 당연하게 더 퀴어해지고, 더 재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더 나은 미래, 더 풍족하다 못해 퀴어 콘텐츠 중독자에게는 거의 사치스럽기까지 한 미래를 꿈꾼다. 아마, 나와 같은 수많은 ‘청개구리‘ 퀴어들도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욕심이 많고, 어쩌면 우리의 그 욕심 자체가, ‘퀴어‘한 것일 수도 있다. - P46
알페스의 일반적인 규범 속에서 ‘실존 인물‘들이 언제나 비퀴어였고 그들의 비퀴어성이 확대되어 그것을 뒤집는 동성애적 해석이 주가 된 것과 달리, 퀴어페스 속에서는 ‘실존 인물’이 퀴어할 가능성은 훨씬 더 크게 해석되고 그들의 퀴어성은 확대되어 그 확대된 퀴어성으로 인한 다양한 관계들을 탐구하며 동성애뿐만 아니라 ‘더 퀴어한‘ 커플링 놀이를 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리얼 퍼슨, 진짜 사람, 실존 인물이 퀴어이고 퀴어일 수 있는 세계가 바로 퀴어페스의 세계였다. - P52
나는 항상 "내가 퀴어 당사자였기 때문에, 더 퀴어한 것이 읽고 싶어서, 그래서 썼다"라고 답변을 해왔다. 그러나 그 답변은 충분한 것이었는가? 나는 이제 와서 고민한다. - P61
‘퀴어’를 스펙트럼이라고 본다면, 나는 누군가에 비해 엄청나게 퀴어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 비해 엄청나게 퀴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나는 좀더 정상성 범주 내에 있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퀴어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또 당사자성이 없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나는, 내가 당사자성을 가지지 않은 퀴어한 모습들도 무척 사랑한다. 나는 레즈비언에 가깝지만 게이도 사랑스럽고 좋다. 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지만 바이너리인 트랜스 여성이나 트랜스 남성을 보면 반갑고 기쁘다. 나는 젠더교란이 안 되는, 그저 나의 지정성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형이기에 젠더교란적 외모를 가진 이들을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동경하며 그들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런 퀴어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퀴어페스를 썼다. 〈성균관 퀴어들의 나날〉 속에는 바이너리 트랜스젠더에 가깝게 읽을 수 있는 인물들도 나오고, 그들이 자신의 몸에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부분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섹슈얼리티는 에로틱하게 다루어진다. 나는 그런 것을 썼다. 그렇다면 나는 나와는 다른 성적 소수자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러버‘인 걸까?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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