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 일기 - 삶의 끝에 선 엄마를 기록하다
최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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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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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좋아하는 강이였지만 막상 눈 위에서 강이는 우 - P11

뚝 서 있기만 했다. 목줄을 끌어당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눈이 제 얼굴에 떨어지는 걸 골똘히 보고만 있었다. 강이는 눈을 이상해했다. 무서워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아했다.
언젠가 강이에게 스노볼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이가 발로 건드릴 때마다 반짝이는 눈이 쏟아질 거였다. 더 먼 언젠가에는 강이와 함께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있는 나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 P12

나도 집을 좋아했다. 우리집 강이가 자기 집을 좋아해 개집 안에 장난감 인형들을 모아놓듯이 나도 그랬다. 우리집 강이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창문에 코를 대고 있듯이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왜 집을 나갔느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받을 때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면 집이 싫으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밥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처럼, 멀리 나가다보면 원하지 않던 곳에 다다르더라도 더 멀리 나아가야만 하는, 그런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먼 곳에서 더 먼 곳으로 갈수록,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더 비참한 느낌이라는 걸, 따뜻한 이불이 포근하고 좋아서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P14

"집에 가만히 있으면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 P14

길에서 아람은 내게 말해주었다.
"뭐가?"
"상처가."
아람은 집이 싫어서, 나는 밖이 좋아서 우리는 함께 집을 나갔다. 집에서 받은 상처를 길에 조금씩 버리듯 아람은 매일매일 자신의 상처를 내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람은 집보다도 길에서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집에서 받은 상처 따위는 어린아이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받는 상처를 시시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집이 아니라 길을 선택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집도 시시하게 여길 수 있었다. - P15

꺼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의 미래처럼 캄캄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해본 적이 없었다. 미래를 다짐해볼 때는 많았다. 언젠가 먼 곳까지 가볼 것이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가며 살 것이다. 이불 속에서 얌전하게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다짐이었다. 다짐으로 점철된 미래를 펼쳐놓았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언이 내게는 다짐뿐이었다. - P21

달라지는 상황 앞에서도 예측이 정확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냄비를 써봐야 어느 냄비를 쓰든 라면 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문제를 풀어봐야 어떤 선생이든 무슨 문제를 낼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꽃을 키워봐야. 얼마나 많이 꽃을 죽여봐야. 다짐을 더 자주 다지는 것밖에는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다짐에 골몰했다. - P22

소영은 가끔씩만 옷을 벗었다. 옷을 벗지 않는 날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 P77

"왜 그래?"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소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았다. 소영은 내 손을 낚아챘다. 손톱을 내 손등에 꽂았다. 그리고 잔뜩 힘을 주었다. 나는 소영의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손을 뺐다.
소영은 몇 시간씩 벽을 쳐다보았다. 하악거리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고양이가 사나워지는 건, 화가 났을 때가 아니야. 겁을 먹었을 때야.‘
나도 소영 때문에 겁을 먹고 있었다. 소영에겐 학교와 집과 멀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나에겐 소영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소영은 날카로워져갔고 나는 소영에게 최대한 무심한 척했다. - P78

"아람이하고 소영이하고 싸우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엄마가 좋아, 노는 게 좋아?"
엄마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대부분 유치했고, 지혜로운 대답은 대부분 비겁했다. 아이들은 아람의 편에 서겠다고 했다. 소영을 따돌리고 싶다기보다는 아람을 보호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은 곧잘 뭉쳤다. 어떤 정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의도 - P87

불사했다.
"아람이는 언제나 우리 편이잖아."
아람은 좋다는 말을 쏟아내왔다. 아이들이 유행처럼 한 아이를 싫어하고 따돌릴 때에도 아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난 걔 좋은데."
소영은 달랐다. 결정을 내리면 결정을 내린 대로 분명히 행동했다.
"내가 안 보기로 한 애랑 노는 건, 나도 안 보겠단 뜻인 거지."
친구와 사이가 나빠질 때마다 소영은 이 말을 강조했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소영을 선택해왔다. 각자 소영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다수의 아이가 소영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다수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소영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소영은 예뻤고, 키도 컸고,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선생들은 우리라는 덩어리를 싫어했지만, 그중 몇몇 선생은 소영이라는 개인을 아꼈다. 몇몇 친구는 소영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했고, 몇몇 친구는 소영을 무서워했다. 어쨌거나 모두 소영의 편이 되어 소영과 함께 몰려다녔다. 소영은 꼭 필요한 아이였다. 싸움이 났을 때 미지근하게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주먹질은 정당방위가 되었고 이 주일의 징계는 일주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만을 원하는 아이는 우리 중 소영뿐이었다. 우리는 다만 최악의 결과가 두려울 뿐이었다. - P88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보호는 치열한 공격이 될 때가 많았다. 치열한 보호가 비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P92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음속 방 한 칸을 들여다.
보았다. 스노볼이 있는 집에서 팔베개를 하고 있는 소영, 경찰에게 당당하게 다가가는 소영, 손톱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소영, 안갯속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소영, 빨간 캐리어를 끌고 유유히 전쟁터를 빠져나가는 소영, 내가 상상해낼 수 있는 온갖 소영이 그 방안에 있었다. 그 방을 나는 ‘소영‘이라 불렀다. 소영의 모든 모습을 그 방에 들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소영은 진짜 소영이 아니라 내 상상에 걸맞은 소영이어야 했다. 우리집 초인종이나 누르고 있는, 한껏 휘어져 있는 소영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병신.‘
소영은 ‘소영의 방‘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아이가 됐다. 계단을내려가던 소영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소영의 비굴함과 보잘것없음을 떠올리며 비웃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았으나 나의 비겁함을 직시할 때보다는 훨씬 편했다. - P96

"좋니."
밥을 입안에 넣으며 아빠가 물었다. 아빠는 더이상 무서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의 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나의 어깨 정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빠는 피곤해 보였다. 사 년 전만 해도 철심처럼 뻣뻣했던 머리카락이 숱도 없이 가늘어진 채 힘없이 이마 위에 늘어져 있었다. 나는 애써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식탁에는 여전히 불고기가 올라와 있었지만, 엄마도 아빠도 내 밥그릇에 불고기를 올려놓지는 않았다. 그게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 P156

엄마는 두 사람으로 지냈다. 낮에는 예전처럼 상냥했고, 뉴스를 보며 혀를 찼고, 조곤조곤 기도를 했다. 밤에는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이상한 목소리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밤의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내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를 대신해서 밤 - P160

마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소영에게 침을 뱉을 때 입안에서 느껴졌던 피맛과 소영의 몸을 핥을 때 입안에서 느껴졌던 짠맛이 동시에 내 입안에서 서걱거렸다. 소파에 누워 벽을 타고 기어가는 불개미들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아무 말 없이 빨래를 개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에도, 자꾸 어디선가 엄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눈을 뜬 채로 꾸는 이 악몽을 나는 ‘센서등‘이라고 이름 붙였다. 센서등은 제멋대로 켜졌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어떤 것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있을수록 어떤 장면은 더 자세해졌고, 어떤 장면은 물감이 번지듯 뭉개져버렸다. 소영 앞에 무릎을 꿇는 내 모습이 센서등의 불빛 아래서 가장 선명했다. 소영의 얼굴에 점점이 맺혀 있던 핏방울들은 가장 아름다웠다. 소영과 싸웠던 날에 들려왔던 명령의 목소리는 가장 웅장했다. 야릇한 증오가 담겨 있던 소영의 입술은 나를 가장 무력하게 했다. 낮잠 속에 묻어나온 성욕처럼 나를 옭아맸다.

우리집은 네 마리의 짐승이 각각 다른 광경에게 말을 걸며 사는 공간이었다. 강이는 아무도 없는 베란다 창문에 대고 귀를 쫑긋거렸고, 나는 방에서 옷장 깊숙이 넣어둔 식칼을 꺼내 보았고, 엄마는 거실에서 무릎 위에 천수경을 펼치고 있었고, 아빠는 안방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우리는 각자의 어항에서 홀로 싸움을 했다. 소영의 목소리가 떠오를 때쯤에 나는 손가락을 팬티 속에 집어넣었다. 엄마의 중얼거림이 빨라지고 격해져서, 발음이 - P161

더욱 뭉개질 즈음에는 흥분 상태가 되었다. 아이들의 시선 속에서 주먹질을 해댔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숲속에서 발가벗겨졌던 나의 몸을 떠올릴 즈음이면 오르가슴이 찾아왔다. 식칼이 나의 살을 뚫고 튀어나온 가시처럼 느껴질 때, 나는 소영을 향해 달려들 것이다. 나를 찌르는 심정으로 소영을 찌를 것이다. 소영의 옷이 피로 물든다. 소영은 쉽게 쓰러진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 소영의 이목구비는 모두 빨간 구멍이 된다. 내 운동화에 붉은 물이 든다.
‘읍내동 사는 주제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갛게 펼쳐지던 강이의 지느러미처럼 몸이 두 배는 부풀어올랐다. 나는 지느러미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방안을 떠다니다 잠이 들었다. - P162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나는 이제 읍내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읍내동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소원도 이상한 방식으로 도래해 있었다. 언제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은, 함박눈이었다. - P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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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비사이드 콜렉티브 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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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트랜스 정치는 애당초 페미니즘의 의제가 아니고, 또한 퀴어 연구의 의제도 아니라고 인식하는 이들에게 페미니즘과 퀴어, 그리고 트랜스 정치학은 어떤 관련도 없다. 그저 자격도 없는 트랜스가 ‘우리도 끼워달라‘며 징징거리는 것일 뿐이며, 페미니즘-퀴어-트랜스 사이의 불화는 트랜스의 불필요한 징징거림과 끼어들기로 야기된 것일 뿐이다. 트랜스만 없다면 불화도, 갈등도, 긴장도 생기지 않으며 여성 범주는 문제가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페미니즘 퀴어-트랜스의 중첩 지대에서 사유하고 활동하는 이들에게 이 불화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정동이며 불화 자체가 역사적 기록이다. 그렇기에 불화는 트랜스페미니즘을 첨예하게 고민하도록 하는 중요한 토대가 된다.
불화, 갈등, 경합으로 기술하는 논의는 무엇을 페미니즘으로, 퀴어 연구로, 트랜스 연구로 규정하는가를 질문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며 이론의 역사를 다시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나는 이 글에서 경합의 역사를 쓰고 있지만, 이것은 트랜스페미니즘의 역사, 혹은 페미니즘의 많은 논의 지형 중 하나의 역사를 기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단 한 번도 단일한 의제로 논의를 전개한 적 없듯 페미니즘이 퀴어 이론, 트랜스 연구와 교차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물론 어떤 퀴어 연구나 트랜스 연구는 페미니즘과 무관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페미니스트가 지적했듯, 가부장제는 이성애 이원젠더 체제를 토대로 여성을 동질하고 단일하고 획일한 형태의 범주로 만드는 작업을 통해 작동한다. 페미니즘 연구의 중요한 관심 주제 중 하나가 가부장제를 재/해석하는 작업일 때 이 작업은 여성 범주를 단일하지 않은 범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통해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퀴어 연구 - P109

및 트랜스 연구와 동시적으로 사유될 수밖에 없다. 다른 말로 트랜스를 통해 여성 범주에 위기가 발생하거나 불화가 등장한다고 인식된다면 이것은 단순히 페미니즘의 주체, 페미니스트의 주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반동‘ 행위가 아니다. 페미니즘과 여성 범주를 매우 복잡하고 불화하는 것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가부장제를 가능하게 하는 토대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퀴어 연구 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퀴어 연구에 혹은 LGBT/퀴어 범주에 트랜스가 포함되고 트랜스가 퀴어 연구나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의제라고 인식된다면 이것은 지금까지 안정적 정체성 범주라고 인식한 여러 범주를 근본적으로 회의하고 전면 재검토하는 작업을 동반한다. 이것은 동성애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라기보다 동성애(그리고 반대의 성으로 구성된 이성애)와 같은 정체성 범주가 우발적이고 우연히 형성된 것임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며 때로 정말로 불가능한 범주라는 이해를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랜스와 페미니즘의 관계가 지금까지 지속되는 역사적 불화를 계속해서 사유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라면, 트랜스와 퀴어의 관계는 은폐되거나 누락된 불화를 적극 사유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 범주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는 작업이다. 다른 말로 경합, 중첩, 불화를 사유하는 일은 서로의 긴밀한 관계를 적극 사유하며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 P110

이 ‘낫거나 아니면 죽거나‘ 어느 쪽에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을 - P118

명명하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의료사회학자 아서 프랭크Arthur Frank가 제시한 ‘잠정적 (미)회복인 모remission sociey‘이라는 개념이다. 프랭크는 이 집단에 포함되는 사람들로 "암을 앓았던 사람들, 심장회복치료 하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당뇨병 환자, 알레르기와 환경적 민감함 때문에 식이요법이나 다른 자기관리를 해야 하는 사람들, 인공기관과 기계적 신체조율기와 함께 사는 사람들, 만성질환자, 장애인, 폭력과 중독으로부터 ‘회복 중인‘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걱정과 또 하루를 잘 지냈다는 기쁨을 공유하는 가족"을 예로 든다. - P119

퀴어 장애 활동가이자 작가인 일라이 클레어는 『망명과자긍심』의 2부 1장에서 장애인을 가리키는 여러 단어의 의미와 역사를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 양쪽에서 검토하면서 이 용어들이 ‘퀴어‘처럼 당사자를 위한 이름으로 변환될 수 있는지를 탐구한 바 있다. 클레어는 핸디캡, 장애인, 병신, 절름발이, 지진아, 다른 능력이 있는 사람, 신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 프릭 등의 용어가 어떤 의미로 사용되어왔는지, 다양한 시대와 맥락에서 어떤 용어들이 당사자 용어로 받 - P120

아들여지고 어떤 용어들이 차별과 혐오의 용어로 차용되거나 거부되었는지, 그러한 취사선택에 사회적 차원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의 어떤 역사가 얽혀 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각 용어마다 어떤 정동이 결부되는지를 세심히 살피면서 당사자 용어가 반드시 자긍심으로만 채워져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고, 용어를 자긍심으로만 새로이 덮어버리고자 할 때 그 용어에 담긴 차별과 억압과 수치심과 슬픔의 역사를 당사자들에게서 지워버릴 위험을 경고한다. 이러한 탐구의 연장선상에서 나는 병리화와 낙인의 역사를 완전히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당사자 이름으로 기능할 수 있는 용어, 단지 자긍심의 이름으로서만이 아니라 자긍심과 수치심의 복잡한 얽힘을 품을 이름을 찾으려는 시도로서, 그리고 나의 경험을 서사화하는 이름으로서 ‘아픈 사람‘이라는 이름에 주목한다.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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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
비사이드 콜렉티브 외 지음 /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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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독자라면 아마도 퀴어로 정체화했거나 퀴어에 적대적이지 않은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독자들에게 ‘장애는 - P20

퀴어다‘라는 말이 정치적으로 전복적이고 해체적이고 이론의 첨단을 달리고 규범성에 저항하는 선언처럼 들린다면, 그 반대는 어떠한가? ‘퀴어는 장애다.‘
(...)
이런 불편함의 원인은 장애와 퀴어의 관계가 공통된 억압을 공유하면서도 서로의 낙인을 짊어지지 않기 위한 갈등과 반목의 복잡한 역사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몇 가지를 꼽자면 첫째, 19세기 중반~20세기 초반 유럽과 미국에서 성행했던 프릭 쇼freak show는 인종 · 국적 · 성별 · 성차 · 섹슈얼리티 · 비장애 등에 대한 당대의 규범을 바탕으로 구축된 외양의 정상성에서 어긋나는 모든 차이를 ‘인간이 아닌 괴물‘로 전시하였고, 퀴어와 장애 또한 이 타자성의 표식 아래 묶여 수집되고 볼거리 취급당해왔다. 둘째, 역사적으로 퀴어와 장애는 둘 다 병리적인 것으로 취급되어 감시와 통제를 받아왔다. 동성애는 1973년이 되어서야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DSM』에서 빠지게 되었다. 트랜스젠더는 1980년 DSM 3판에 성별정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 GID란 명칭으로 정신장애 항목에 추가되어 2012년 DSM 5판에서 ‘성별위화감 Gender Dysphoria‘으로 명칭이 한 차례 바뀌 - P21

었고, 1990년 세계보건기구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WHO의 『국제질병분류Interm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s, ICD』 제10차 개정판에서는 ‘성별정체성장애‘, ‘성전환증Transsexualism‘이라는 이름으로 정신장애에 포함되어 있었다가 2018년 11차 개정판에 이르러서야 30여 년 만에 정신장애 항목에서 삭제되었다. 또한 장애를 치료 또는 제거해야 할 생물학적 결함 내지 병리학적 상태로만 간주하는 사회에서 많은 장애인이 시설에 격리되어 심각한 인권침해를 당해왔듯, 많은 퀴어들은 ‘전환 치료‘라는 명목 하에 감금과 고문 등 심각한 인권침해를 겪어왔다.
셋째, 이처럼 유사한 억압의 역사를 지나왔음에도 일반적으로 퀴어 진영과 장애 진영은 서로의 낙인을 기피하느라 껄끄러운 관계였다. 한편으로 주류 장애 운동의 남성 중심적이고 이성애 중심적인 경향으로 인해 퀴어이자 장애인인 사람들 및 퀴어 의제는 장애 정치에서 소외되어왔다. 한편, 다른 사회 영역과 마찬가지로 퀴어 학계와 운동판도 비장애 중심주의에 물들어 있다. 퀴어 이론에서 장애에 관심을 가질 때는 비주류에 일탈적 특성을 보이는 유형의 장애만이 퀴어함의 은유로서 소비될 때, 혹은 가장 비정상적이고 병리적인 비체의 은유로 신체적 · 정신적 장애가 소비될 때일 뿐, 장애와 장애인이 퀴어 이론 및 정치의 전면에 중요하게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무엇보다, 퀴어와 장애가 껄끄러운 관계를 맺게 만든 주된 요인은 병리화의 낙인이다. 정체성의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주류 장애 운동은 장애인들이 장애가 있는 것만 빼면 모든 면에서 ‘남들과 같은 정상‘임을 주장하는 태도를 자주 취해왔다. 그 과정에서 사회에서 병리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특성들과 거리를 두곤 했는데 거기엔 동성애나 젠더 위반 등 퀴어에 - P22

속하는 특성도 포함되어 있다. 주류 성소수자 운동 또한 성소수자들의 특성이 ‘병‘이 아니라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인간 다양성에 속함을 강조하면서 장애 및 질환과 거리를 두어왔다. 이러한 대립은 퀴어와 장애 양쪽에 걸쳐 있는 사람들을 더욱 주변부적인 존재로 만들 뿐만 아니라 때로 이들의 생존까지도 위협한다. 일례로 HIV/AIDS 이슈는 퀴어 이슈인 동시에 장애 및 만성질환 이슈임에도 불구하고 장애운동 및학계에서는 이를 언급하길 꺼려하며 HIV/AIDS를 가진 사람들을 장애 정체성을 공유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HIV/AIDS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요양 및 보건의료 지원이 절실하고 인터섹스와 트랜스젠더들에게는 지속적으로 호르몬제를 지원하는 등의 건강 서비스가 필요하기 때문에 퀴어 진영과 장애 진영 간의 거리 두기는 퀴어와 장애 양쪽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사회의 가장 위태로운 가장자리까지 내몰 수 있다. 그러므로 병리화의 낙인을 부수는 것이 장애와 퀴어의 생산적 연대의 발판을 마련하는 첫번째 과업이 될 것이다. - P23

병리화pathologization 개념은 의료화 medicalization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의료화의 핵심은 무엇보다도 어떤 것이 병리적인 문제인지, 즉 의학의 대상인지를 정의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의료사회학자 피터 콘래드Peter Conrad는 의료화를 "의료적이지 않은 문제들이 의료적인 문제로―보통 병과 장애ilness and disorders로―정의되고 취급되는 과정"이라고 정의한다. 의료화의 첫 번째 문제점은 일상의 거의 모든 영역이 의학의 대상으로 접수되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건강과 질병의 문제로 환원된다는 점이다. 콘래드보다 앞서 의료사회학자이자 장애운동가인 어빙 K. 졸라Irving K. Zola는 의료화를 "의학을, 그리고 ‘건강‘과 ‘병‘이라는 이름표를 인간 존재의 점점 더 많은 부분과 관련되게 만드는" 현상으로 정의하면서 일상생활이 전부 의료화되는 현상을 강하게 비판했다. 더욱이 무엇을 의료적 틀에서 해석하고 기술하며 의료적으로 치료해야 할 문제로 정의할 것인가 하는 사안에서, 그러한 정의와 해석을 내릴 권한을 가진 의료전문가들은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의 삶을 지나치게 좌우해왔다. 의사들은 진단을 내리고 치료법을 처방하는 것뿐만 아니라 "운전능력을 평가하고 휠체어를 처방하고 재정 혜택의 할당을 결정하고 교육 설비를 선택하고 노동할 능력과 잠재력을 측정하는 일에도 관여한다." 물론 병을 근절해야 할 해악이 아니라 평생 더불어 살아가는 다양성의 문제로 접근하는 의사들도 있고, 당면한 증상의 제거에 집중하느라 환자의 전반적인 건강이 관심 사안 - P24

이 아닌 의사들도 있다. 그러나 의료전문가들이 이처럼 광범위한 영역에 개입할 권한을 가질만한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엔 분명하게 답할 수 없는데도 의학이 관할하는 영역이 계속 확장되고 의사들이 점점 더 많은 영역에서 "이익과 불이익, 특권과 배제를 둘 다 수여하는 사회적 기능에 문지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의료화의 ‘정의하는 능력‘은 실제로 그 대상자의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 심각한 만성질환과 더불어 사는 페미니즘 장애학자 수잔 웬델Susan Wendell이 지적했듯이, 아픈 사람이 진단명을 얻지 못하는 경우, 즉 아프다는 본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대해 "의학적 승인"을 받지 못할 경우 아픈 사람은 아픈 몸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모든 지원을 끊길 위험에 처한다. "보험금 청구, 보조금, 복지 수당과 장애 수당 모두가 공식적인 진단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병을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프다고 거짓말하면서 제대로 일도 안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는 인간으로 낙인찍혀 결국 "가족, 친구로부터 버림받는" 일이 드물지 않은 것이다.
의료화의 두 번째 문제점은 건강과 질병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환원시킨다는 것이다. 질병과 장애가 산업재해나 지속적인 폭력에의 노출 등 사회적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지라도, 의학에서는 그러한 맥락을 무시한 채 질병과 장애를 개인적인 불행이자 결함으로 간주하고 개인적인 층위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우세하다. 이는 세번째 문제와 연결되는데, 질병과 장애를 개인화하는 관점은 건강을 좋은 것이자 나아가 보편적인 선으로 규정하는 건강 이데올로기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관점에서는 건강의 반대편에 있는 질병과 장애는 - P25

나쁘고 심지어 악한 것으로 간주되어 건강의 문제는 도덕적인 가치판단의 문제가 된다. 건강을 절대 선으로 놓고 질병과 장애를 개인화하는 관점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을 때 질병과 장애를 가진 개인의 행실은 모조리 건강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비난받고 감시당한다. 트집 잡을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당신이 아픈 이유는 담배를 피워서, 술을 마셔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놀러 다녀서, 너무 문란해서 혹은 너무 엄격하게 자신을 단속하며 살아서 생긴 스트레스로, 너무 아무거나 먹어서 혹은 너무 가려 먹어서, 너무 못되게 굴어서 혹은 너무 소심해서 속에 있는 말도 못 하고 살아서, 심지어 페미니즘 같은 거 하느라 사회의 모든 것을 삐딱하게 받아들이다보니 병을 자초했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무슨 이유 때문에 병을 얻었든 간에 질병과 장애를 ‘해결‘하는 방법은 개인화된 의료적 치료와 예방이라고 여겨진다. 이 ‘해결책‘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다시 그 이유로 비난을 받으며 질병과 장애의 책임을 개인적으로 짊어지게 된다. 또한 건강 이데올로기의 견지에서는 질병과 장애는 곧 고통과 동의어처럼 여겨지는데, 바로 이 ‘고통‘이 질병과 장애를 계속해서 치료라는 의료적 과정 안에 속박하는 근거로, 나아가 완치가 불가능할 경우 그 장애인의 ‘근절‘을 지지하는 근거로 쓰인다. 장애인으로 사는 것은 고통이나 다름없다는 이유로 장애가 발견된 태아의 낙태는 물론 살아있는 장애인의 안락사가 대중적인 공감과 지지를 받는 것이다.
넷째, 장애 및 기타 소수자 특성의 의료화가 문제인 또 다른 이유는, 의학이 그러한 특성을 가진 이들을 병리적인 문젯거리로 규정하는 관점이 대중의 문화적 인식에 막대한 영향을 미쳐 주류 집단의 구성원 - P26

이 그 소수자 집단의 구성원과 상호작용하는 방법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의료 전문가들이 장애를 결함으로, 만약 태아일 때 발견되었다면 낙태시켜야 하고 장애아동이 태어났다면 하나 더 낳으면 되는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은 장애아동이 부모를 비롯한 주변의 비장애인들에게 학대받을 위험을 증가시킨다. 또한 이런 관점은 퀴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치료‘랍시고 정당화하는 근거로도 동원된다.
장애학자 및 활동가들은 이러한 문제점에 ‘병리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반적으로 의료계에서는 병리화라는 현상 자체를 부인하거나 병리화와 의료화는 무관하다는 입장인 반면, 장애학계에서는 의료화가 적어도 장애 몸과 장애인의 병리화에 기여했다고 본다. - P27

더 중요한 것은 병리화의 작동 방식이다. 강제불임시술을 받았던 정신장애인과 한센인, 교정치료라는 이름의 고문을 받았던 자폐인과 정신장애인과 퀴어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 병리화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아파서 병을 치료하는 문제가 아니다. 병리화는 정상성normalcy을 생산하고 강화하는 기제다. 생물학적 다양성을 정상/병리의 차등적인 위계질서 안에 촘촘하게 줄 세워 배치하면서 ‘정상적인 몸‘을 구성하는 외부constitutive outside(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개념을 빌리자면)로서 병리적인 몸을 생산하는 것이다. 특정 몸이 정상적인 몸의 위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반대되는 비정상으로서 병리화된 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정상성과 장애는 동전의 양면이다. 버틀러가 이분법적 젠더 규범 체계가 인간을 "좀 더 인간적인 것, 좀 덜 인간적인 것, 비인간적인 것, 그리고 인간으로 생각되어질 수 없는 것"을 차별적으로 생산한다고 분석했듯, 병리화의 규범 또한 인간을 차별적으로 생산해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내가 쟤보다는 낫지‘ 이런 식의 줄 세우기를 통해 병리화가 그 자체로 피지배계층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 병리화는 장애인뿐 아니라 다양한 - P30

권력범주의 위계에서 하위로 밀려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낙인으로 소수자들이 겪는 공통된 억압을 표상하지만, 다른 한편 그 소수자들끼리 ‘나만‘ 병리화에서 벗어나자고 서로 반목하고 갈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정상성 체계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역사적으로 장애와 거리 두기는 인종 · 여성 · 퀴어 · 이민자 · 재소자 등 다양한 위치에서 나온 사회운동들이 취해온 전략이었다.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결함 있는 존재로 형상화된다는 점을 비판하고 여성이 겪은 억압과 타자화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장애를 은유로 동원함으로써 장애 몸에 대한 병리화를 묵인 내지 재생산하곤 했다. 비장애인 중심의 퀴어 공동체들도 병리화의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자신들도 건강하고 정상적인 시민임을 어필하면서 병리화의 짐을 장애에 떠넘겨왔다.
지배 담론에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타자의 이름으로 호명되었을 때 ‘나는 정상이다‘를 주장하는 태도는 나를 제외한 다른 타자를 ‘비정상‘이라는 낙인 속에 내버려 두거나 처넣는다는 점에서 정상/비정상의 위계를 계속해서 생산하고 재생산한다. 소수자 집단끼리 서로에게 낙인을 떠넘기는 식으로 병리화를 벗어나려고 할 때, 병리화라는 틀 자체는 건드려지지 않고 계속 재생산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병리화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또한 병리화되는 집단 간의 이러한 거리두기는 양쪽에 속한 사람들을 더욱 고립시킨다는 점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있다. 이 난국에서 빠져나오려면 관점을 달리해야 한다. - P31

썩은 동아줄을 잘라내기 위해, 즉 기존에 만들어진 틀을 깨부수고 다 같이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장애와 퀴어 연구자 및 활동가들은 각자 정상성을 해체하는 노력을 기울여왔다. 정상성에 주목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당연시되고 어쩔 수 없다고 간주되었던 것들이 사실상 강제적인 규범으로 구성된 것임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정상성에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그냥 우리도 ‘정상인‘에 끼워달라는 요구가 아니다. 페미니즘이 기울어진 운동장 자체를 문제시하듯, 퀴어 장애 정치는 인간, 인간의 몸, 인간의 정신, 사회관계 모두를 정의하고 해석하고 재현하는 그 모든 방식에 특정 몸 · 정신 · 인간만 ‘정상‘으로 인식/인정하고 그 외의 것들은 열등하고 일탈적이고 병리적인 것으로 배제하는 위계가 체계적으로 구축되어 있음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한다.
정상성을 깨기 어려운 이유는 특정 존재나 관습이나 규범이 자연의 섭리인 양 당연하게 받아 들여져 왔기 때문이다. 그동안 진보진영에서 주요한 정치적 실천전략으로 채택해왔던 정체성의 정치학은 가시성의 정치를 기반으로 한다. 즉 억압받아왔던 이들이 더 많은 가시 - P32

성을 획득하면 더 큰 힘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가시성과 힘의 상관관계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 그러나 사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관계는 단지 차이의 문제만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다. 이 점을 지적하기 위해 페미니즘 장애학자 로즈메리 갈런드-톰슨Rosemarie Garland-Thomson은 ‘the normate‘라는 신조어를 제안한다. normate는 normal + -ate의 조합으로, -ate는 ‘어떤 직무, 임무, 신분, 지위, 직능을 가진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를 만드는 접미사다. 따라서 normate는 ‘정상인이라는 지위를 차지하는 자‘로 해석될 수 있다(물론 이 긴 설명은 개념 번역어로 적합하지 않기에 한글판에서는 작은따옴표를 사용하여 ‘정상인‘으로 표기했다). 갈런드-톰슨은 이 사회가 ‘정상인‘이라고 부르며 당연시하는 존재 형식이 그 자체로 자명하고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정상‘의 지위에 오 - P33

르도록 구성된 주체 위치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 개념을 만들었다. the normate는 타고나길 정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신체적 외형과 그것이 쥐고 있는 문화 자본을 통해 권위 있는 위치를 수월히 차지할 수 있고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들을 구성하는 정체성"으로 정의된다. 특정 존재들이 ‘정상인‘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른 부류의 존재들이 인간 주체가 될 수 없는 몸으로 규정되고 배척되어야 한다. 이 ‘정상인‘의 위치를 정당화하고 유지하기 위한 구성적 외부로서 갈런드-톰슨이 ‘보통이 아닌 몸extraordinary bodies‘이라 부른 몸들도 함께 생산되는 것이다. 갈런드-톰슨은 기준의 위치를 차지하여 너무도 당연시되는 나머지 눈에 띄지도 않고 굳이 표식을 붙일 필요도 없었던 기득권층에게 the normate라는 표식을 부여함으로써 누가 타자의 이름과 위치와 가치를 규정하고 판을 지배하는지를 드러내고자 했다.
로버트 맥루어Robert McRuer가 제시한 강제적 비장애-신체성compulsory able-bodiedness 개념 또한 정상성을 해체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맥루어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생산하는 체계를 이렇게 명명한다.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은 인간의 특정 몸 형태 및 기능을 자연스럽고 당연한 사물의 질서의 위상에 올려놓고 이 규범적 이상에 맞춰 몸들을 인식하고 명명하고 해석하고 식별하고 차별화하고 훈육하는 강제적 인식 체계라 할 수 있다. 건강하고 장애 없는 몸이야말로 정상성의 신화를 깨뜨리기 너무 힘든 영역이다. 일단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구분이 있다는 것 자체가 강제가 있다는 증거지만, 비장애-신체는 이성애보다도 훨씬 더 당연시되어왔기에 그 강제성을 규명하기가 훨씬 - P34

어렵다. 만성질환 및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너도 사실은 장애가 없었으면(또는 안 아팠으면) 하고 바라잖아?" "이 빨간약을 먹으면 장애가 한 번에 사라진다고 하면 너는 먹을 거야?" 이런 무례한 질문들을 아는 사람에게서든 모르는 사람에게서는 끝없이 받는다. 이 질문들은 모든 사람이 건강한 비장애 몸을 선호하고 그것을 목표로 하리라고 전제한다. 권력이 지속적인 반복과 인용을 통해서만 권력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논증했던 주디스 버틀러의 논의를 가져와서 맥루어는 장애인들에게 이런 질문이 집요하리만큼 반복적으로 도처에서 쏟아진다는 것 자체가 그 질문이 기준 삼는 비장애 몸이 결코 자연스러운 몸이 아니라 그러한 집요한 반복을 통해 그 규범적 위치를 보장받는 구성되고 강제된 허구라는 것을 드러낸다고 분석한다.
나아가 정상성을 구축하는 강제적 체계들은 서로 긴밀히 공조한다. 이성애를 당연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강제하는 이성애 중심주의와 강제적 비장애-신체성은 불가분의 관계로서 서로를 뒷받침하고 의존하며 작동한다. 맥루어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이 강제성의 커넥션에 두 가지를 더 추가할 수 있다. 첫 번째 체계는 젠더 이원론이다. 퀴어 · 페미니즘 · 장애 · 환경운동가이자 저술가인 일라이 클레어Eli Clare가 지적했듯, 젠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비장애 몸을 토대로 한다. ‘진짜‘ 남자나 ‘진짜‘ 여자로 여겨지려면 움직이고 걷고 서고 말하고 발성하는 특정한 코드를 수행해야 하지만 이러한 수행은 많은 장애인에게는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러한 코드들을 수행할 수 없는 장애인들은 섹스도 젠더도 없는 무성적 존재로 간주된다. 이는 장애인을 이중으로 병리화한다. 두 번째 강제적 체계는 건강 중 - P36

심주의다. 앞서 말했듯 건강은 단순히 몸이나 정신의 상태를 설명하는 중립적인 용어가 아니다. 건강은 건강/건강하지 않음을 좋음/나쁨, 심지어 선/악으로 재단하는 도덕적 가치 체계로서, 거의 성역이나 다름없는 위상을 차지하고 있기에 그 강제성을 알아차리기가 더 어렵다. 건강관리 담론은 병리화 담론과 맞물려 ‘정상성‘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강제적이고 규범적이다. 사실 ‘아픈 사람‘이라는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라도 완벽하게 건강한 건 아니다. 건강은 어느 정도는 항상 상대적인 특성을 띤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건강은 철저히 자본주의적 노동생산성을 기준으로 구성된다. 건강관리 담론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이상에 맞춰 규범적 정상성에 자신을 맞추라고 사람들에게 끝없이 강요한다. 성공 아니면 실패라는 평가에 평생 시달리면서 모두가 생명력을 쏟아 부어 초과노동을 해야 하는 현실에서는 건강의 ‘성공‘이란 평생 노력한들 그 누구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일 뿐이다. 그러나 이상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은폐하기 위해서는 몸을 관리하라는(특정 규범에 맞게, 자본주의에 쓸모 있는 존재-부속품이 되게) 정언명령을 따르는 데 실패한 사람들을 본보기로 처벌하고 낙인찍을 필요가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병리화의 낙인이 찍힌다. ‘건강한 사람은 ‘아픈 사람‘이라는 구성적 외부가 있어야만 ‘정상인thenormate‘의 지위를 차지하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더욱이 퀴어에 병리화의 낙인을 찍는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퀴어는 이중으로 비난받는 위치에 있다. 앞서 이야기했듯 만성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병을 당 사자 탓으로 돌리는 온갖 비난 담론에 평생 시달리는데, 아픈 사람이 퀴어라면 ‘네가 퀴어라서 병에 걸렸다‘는 비난도 추가되는 것이다(이때 - P36

병은 천벌이나 인과응보의 의미로 해석된다). - P37

정리하자면, 오랫동안 섹슈얼리티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이자 모든 인간이 갖추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본능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모든 섹슈얼리티가 그런 인정을 받지는 못했다. 누구의 섹슈얼리티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인간다운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누구의슈얼리티는 불편하거나 역겹고 있어서는 안 되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것이 되는가를 따져볼 때, 섹슈얼리티는 그 자체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이 아니라 누가 "이상적이고 규범적인 시민"인지를, 나아가 누가 ‘진짜 인간‘인지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규범적인 강제로 작동한다는이 드러난다. 모든 인간 존재는 성적인 본능을 갖는다는 전제가 당연시되는 사회에서 탈성애화는 장애인이 성적 존재로 있을 가능성도 자 - P44

격도 부인함으로써 장애인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탈인간화‘의 형식인것이다.
장애인과 섹슈얼리티의 관계를 탐구함에 있어 탈성애화란 틀은 몇 가지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첫째, 외부에서 부과되는 에이섹슈얼리티와 당사자가 자신의 이름으로 탐색하고 받아들이는 에이섹슈얼리티를 구분할 수 있다. 뒤에서 논하겠지만 이는 무성애자 당사자 단체와 장애 공동체 간의 갈등을 구조적인 층위에서 풀어나갈 방법을 제공해준다. 둘째, 장애인이 무성적 존재로 취급되는 것과 과잉성애화된 존재로 취급되는 것 둘 다를 설명하고 문제시할 수 있다. 셋째, 탈성애화를 프로세스로 본다면 성애화sexualization 또한 프로세스임을 드러낼수 있다. 성애화 또한 특권을 가진 비장애인 위치에 적용되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장치를 통해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구축하고 가능케 하는 하나의 프로세스이자 역사적인 형성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 P45

퀴어 이론가 주디스/잭 핼버스탬Judith/Jack Halberstam은 사회를 직조하는 규범적인 시간성의 서사가 있으며 그것이 이성애 - P47

적 각본에 맞춰 구성되었음을 폭로한다. 출생 시 여성으로 성별을 지정받은 아이는 어렸을 땐 선머슴처럼 굴더라도 자랄수록 여성성을 체득해야 하고, 반드시 남자를 좋아해야 하고, 이성애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가족 제도에 들어온 다음에는 임신-출산-양육을 차례로 완수한 뒤 마지막으로 자손에게 유형 · 무형의 유산을 상속하는 재생산 코스를 따라가야 한다는 강제가 암시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인간들의 삶을 지배하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퀴어 이론가 리 에델만Lee Edelman은 ‘재생산 미래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성애 규범적사회에서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고 규정하고 정치 담론의 틀을 짜는 내적 논리를 형성하는 기준은 ‘아이‘라는 이미지이고, ‘아이‘를 기준으로 구축된 인식 틀은 퀴어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즉 사회정치 영역의 철저한 외부로 상정함으로써 이성애 규범성에 절대적인 특권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에델만과 핼버스탬은 이성애 규범적인 재생산 시간성에 대항하는 다른 시간성이 퀴어들에게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해야 함을 역설하면서 이러한 시간성에 맞서는 모든 이들을 퀴어라고 명명한다. 장애학자들은 이런 견지에서는 장애인도 퀴어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말했듯 비장애 중심적 사회는 장애인의 재생산을 탄압한다. 재생산 미래주의에서 원하는 ‘아이‘는 건강한 비장애인 아동이고 젠더이원론과 이성애체계에도 부합하는 아이다. 때문에 장애인들은 퀴어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사회가 재생산 미래주의의 수호를 위해 적극적으로 배제해야 할 비체로서 사회정치 영역의 바깥으로 쫓겨나게 된다. 그 다음엔 쫓겨난 존재로서 이성애 규범적 시간성을 따를 수 없다는 점이 다시금 사회가 이 추방을 정당화하는 근 - P48

거로 쓰인다. 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장애인은 이성애 규범적이지 않은 대안적인 시간성을 살아가고 대안적인 성적 실천을 만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 P49

미국의 역사학자며 트랜스젠더 이론가인 수잔 스트라이커Susan Stryker는 「트랜스젠더 연구: 퀴어 이론의 사악한 쌍생아Transgender Studies: Queer Theory‘s Evil Twin」라는 논문에서, 최소 1950년대부터 트랜스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후 활발한 사회 저항 운동 및 시민권 운동의 일부로 트랜스 운동이 진행되었음에도 1990년대 들어 트랜스 이론이 구성될 수 있었던 배경을 네 가지로 나눠 설명한다. 그 중 중요하게꼽히는 배경 중 하나는 1990년대 출판된 주디스 버틀러의 책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이다. 버틀러는 그 책에서 태어날 때 ‘여성‘으로 지정받았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젠더범주를 필연적으로 ‘여성‘으로 가정할 이유는 없으며 만약 태어날 때 - P79

지정받은 젠더와 그 개인의 젠더 범주 사이의 강제적 일치를 가정한다면 이는 섹스가 아니라 젠더가 타고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버틀러는 그의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트랜스섹슈얼/트랜스젠더의 젠더 재구성 및 몸 변경 경험, 드랙킹과 드랙퀸의 무대 공연 실천을 예로 들기도 하며 젠더를 수행성으로, 트러블로 재개념화했다.
버틀러가 젠더를 트러블로, 불안정하고 우발적 범주로 재개념화하는 작업은 1990년대 이후 젠더 논의에 있어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고 젠더를 중요한 의제로 만들었다. 한편으로 버틀러가 젠더를 트러블로, 수행성으로 재개념화한 작업은 트랜스젠더퀴어 이론가뿐만 아니라 개개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는데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 개념은 그 자체로 트랜스젠더퀴어의 일상 경험으로 독해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 P80

트랜스젠더퀴어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거나, 트랜스젠더퀴어 인식론을 모색하는 연구는 젠더 연구가 아닌가? 트랜스젠더의 젠더와 페미니즘의 젠더는 다른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인가? 트랜스젠더퀴어와 관련한 글은 젠더 연구가 아니라(!) 트랜스젠더 연구며, 트랜스젠더의 젠더와 페미니즘의 젠더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인식은 과거에도 지금도 여전히 팽배하다. 2015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이 대중화되고 그 과정에서 트랜스를 향한 혐오가 폭발적으로 가시화되면서, 젠더는 트랜스젠더퀴어를 부르는 은어일 뿐이고 그렇기에 젠더는 폐기시켜야 할 대상이라는 발언도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여성의 ‘진짜‘ 삶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을 설명할 수 없게 하는 개념이라는 비판을 받기도한다.
그런데 버틀러의 젠더 논의에 대해 페미니즘의 논의라기보다는 - P81

퀴어 논의에 더 가깝다, 혹은 페미니즘 논의가 아니라 퀴어 연구다라는 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제2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하고 여성 주체 개념 혹은 젠더 개념을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지속적으로 경계 분쟁을 일으켰고 이 분쟁은 여성 범주를 구성함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이 역사가 누락된다. 둘째, 버틀러 이전부터 이미 젠더를 트러블로 이해하거나 젠더를 여성 아니면 남성의 합으로만 다룰 수 없음을 지적한 페미니즘 이론의 역사적 계보를 망각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마치 버틀러 이전의 페미니즘 논의는 젠더를 여성의 관점, 여성과 남성의 관계로만 다루고 있었고 따라서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겪는 차별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버틀러가 ‘여성 문제‘를 등한시 하도록 망쳤다는 식이다. 바로 이 두 가지 문제점을 꼼꼼하게 살피는 작업은 페미니즘과 트랜스젠더퀴어 정치학 사이의 긴장과 불화를 살피는 작업이기도 하다.
1960년대 즈음 제2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한 이후 mtf/트랜스여성의 존재는 페미니즘에서 지속적으로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대표적 사건을 언급할 수 있다. 하나는 레즈비언-페미니즘 단체에서 활동했던 레즈비언 트랜스섹슈얼 가수인 베스 엘리엇Beth Eliott이 페미니즘 공동체에서 추방된 사건이며, 다른 하나는 여성만을 위한 운동에 참가해서 활동하던 트랜스섹슈얼 샌디 스톤Sandy Stone이 그가 속해 있던 공동체에서 떠났던 사건이다. - P82

트랜스젠더 혹은 mtf/트랜스여성이 인공물이라는 인식은 트랜스젠더가 성전환 수술을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꾸고 젠더화된 외형을 갖춘다는 이해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이해는 인공물인 트랜스젠더퀴어와 자연스러운 진짜 여성이라는 이항 대립 구도를 구축한다. 그리하여 트랜스젠더퀴어의 젠더 실천은 부자연스럽고 무엇을 해도 과잉이거나 부족해서 의심스러운 반면 비트랜스의 젠더 실천은 성역할 규범을 위 - P84

반하거나 전복할 수는 있어도 과잉으로 독해되지는 않으며, 성역할 규범에 부합할 때도 그 삶은 가부장제 사회의 억압 구조를 말해주는 것으로 설명되지, 성역할에 부합한다는 점이 가부장제의 최전선에서 여성 억압을 재생산하는 존재라고 설명되지는 않는다. 엘리엇과 스톤이 겪은 추방 사건은 페미니즘의 주체 구성에서 트랜스젠더퀴어가 매우 중요한 의제였음을 역설한다. 제2물결 페미니즘은 여성을 생물학적 본질로 규정하는 본질주의 해석에 도전하며 등장했다. "여성은 원래 가사 노동을 잘 하고 아동 양육에 적합하며, 남성은 원래 가사 노동을 못하고 성욕을 못 참는다"와 같은 언설은 여성과 남성을 본질화하고 이는 가부장제가 여성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전형적 논리였다. 페미니즘은 바로 이런 본질주의를 문제 삼으며 등장했다. 그렇기에 여성은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가부장제가 주장하는 그런 여성의 본질적 속성, 본질적 역할은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질문하는 데에선 논쟁적이었다.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는 당연한 본질이라고 생각했으며 단지 사회적 성역할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이었다. 트랜스는 인공물이라는 언설은 바로 이처럼 여성 범주를 질문하지 않는 흐름에 토대를 둔다.
반-트랜스 입장을 취한 일군의 페미니스트 진영(적극적으로 반-트랜스 입장을 취하지 않아도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이들을 포함한다)은 트랜스를 끊임없이 추방하고 트랜스여성은 여성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생물학적 본질주의를 다시 동원하며 경험을 본질적 공통 토대로 만들고 이 토대를 근거로 여성을 규정하고자 했다. 분리주의 페미니즘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은 권력자이자 가해자며, 여 - P85

성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받은 피해와 상처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남성 없는 세상, 남성 없는 공동체를 만들고 그곳에서 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본질주의 페미니즘(때로 영성 페미니즘, 에코 페미니즘 형태로 등장함)은 여성만의 공간을 구성하고 여성의 진정한 자아, 가부장제에 상처받지 않은 본질을 되찾고 회복하는 데 집중했다. 가부장제에 오염되지 않은 진정한 여성의 본질을 가정한 결과였다. 여성만의 공간, 여성의 진정한 본질 회복이라는 아이디어에서 mtf/트랜스여성은 즉각 논쟁거리가 되었다. 누가 여성인가? 누가 여성일 수 있는가? 누가 분리주의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 여성인가? 만약 여성은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여성과 동일시 하는 여성woman-identified woman이라고 정의한다면 이때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여성과 동일시하는 mtf/트랜스여성은 분리주의 공간에 참가할 자격을 갖는가? 만약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것만으로는 여성 공간에 참여할 자격이 부여되지 않는다면, 태어날 때 의사가 여성이라고 지정/인정한 사람만이 분리주의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가? 현재의 신분증이 보장하는 성별 표기가 아니라 출생신고서가 보장하는 성별 표기가 유일하게 권위있는 참가 자격증인가? 그렇다면 여성 분리주의 공간에 참가할 자격은 사실상 의사가 결정하는가? ftm/트랜스남성은 분리주의 공간에 참여할 수 있는 존재인가? 참가할 수 있다면 남성임에도 ‘여성으로 태어났기‘ 때문인가, 남성이라서인가? 이런 일련의 질문을 야기하는 여성 분리주의 정치학은 섹스를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성, 젠더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성으로 구분하는 설명 방식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제2물결 페미니즘이 등장하고 이론의 기틀을 잡기 시작할 당시 섹 - P86

스와 젠더를 구분하는 논의는 페미니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은 여성이 여성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여성이라는 성역할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는 주장의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즉 여성이라는 섹스로 태어난다고 해도 여성 성역할이라는 젠더는 사회문화적 특징을 반영하지 그것이 여성의 타고나는 특징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성역할을 근거로 여성을 억압하는 많은 논리를 비판할 근거가 되었다. 예를 들어 앤 오클리Ann Oakley 같은 페미니스트는 1970년대 섹스의 불변성을 인정하듯 젠더의 가변성도 인정해야 하며, 섹스는 내용물을 담는 그릇이며 젠더는 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섹스와 젠더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여성이 겪는 여러 억압 중 특정 형태의 억압은 설명할 수 있기에 유의미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트랜스젠더퀴어의 섹스변형 가능성을 부인하는 해석이기도 하다. 섹스는 변하지 않는다는 해석은 신체는 변할 수 없지만, 그 신체에 부여되는 의미/성질은 다양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mtf/트랜스여성이라면 신체는 변하지 않기에 여성일 수 없으며 기껏해야 여성스러운 남성이 될 수 있을 뿐이다. 섹스와 젠더를 구분할 때 등장하는 흔한 설명인 섹스-젠더 구분 공식은 그것이 해방 정치와 비판 이론의 중요한 분석 도구로 등장했다고 해도 여성을 생물학적 결정론에 복속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로 이것이 버틀러가 섹스-젠더 구분 공식에 따른 이원젠더 체제에서는 섹스뿐만 아니라 젠더도 본질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 이유다.
페미니즘에서 트랜스의 추방과 배제는 트랜스 없는 페미니즘을 - P87

구축하는 작업이 아니라 트랜스를 통해 페미니즘 젠더 정치의 경계를 구성하는 과정이다. 물론 누가 여성인가, 어떤 여성인가라는 정치적 논쟁은 페미니즘에서 늘 존재했고 이 논쟁은 페미니즘이 정치적 지형을 확장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인종이나 장애와 같은 범주는 ‘결국 여성‘이라고 할 때의 여성이라는 범주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서구 사회에서 비백인(피부색 혹은 인종)은 ‘인간‘으로 ‘인정‘받고 ‘대우‘받는 데 오랜 시간의 투쟁이 필요했지만, 현재 흑인 여성을 비롯한 비백인 여성 역시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말이 논란거리가 되지는 않는다. 페미니스트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가 한 인터뷰에서 mtf/트랜스여성과비트랜스여성은 결코 동일한 경험을 하지 않았기에 mtf/트랜스여성은 ‘여성‘일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인종이나 장애가 ‘여성으로 태어났음‘을 부정하는 범주로 기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인종이 여성 범주를 의심하는 권력 장치로 작동한다면, 한국 여성은 한국이라는 상상적 국경 내부에서는 ‘여성‘이라는 범주를 주장할 수 있겠지만 전지구적 차원에서는 그 어떤 ‘한국 여성‘도 결코 ‘여성‘일 수 없다. 인종이나 장애가 여성 범주를 다시 사유하도록 하지만 여성 범주 자체를 완전히 흔들지는 않는다면, mtf/트랜스여성은 여성 범주 자체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확신하고 단언할 수 없는 범주로 재구축한다. 이 사회에서 작동하는 많은 권력 작동 장치 중 거의 유일하게 젠더/젠더 정체성이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문구를 부정하는 데 쓰인다.
젠더는 사회문화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섹스에 근거하여 결국 변하지 않는 여성이라는 개념으로 되돌아가고 마는 방식에 강 - P88

력히 문제제기하는 이론들이 트랜스에만 의지해서 젠더 개념을 수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문제제기가 버틀러가 젠더를 트러블로 재개념화한 작업 이전부터 페미니즘 이론가들의 논의가 축적된 성과이기도 했음을 이제 살펴보고자 한다.
섹스와 젠더의 관계 자체를 재규정하려한 시도는 제인 플랙스Jane Flax의 1987년 작업에서 찾을 수 있다. 플랙스는 페미니즘의 근본 목적이 젠더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논의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플랙스는 우리가 젠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질문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생각하길 회피하거나 생각하지 않는 방법도 같이 질문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즉 젠더를 어떻게 생각하고 겪는지를 분석하는 작업에서는 젠더를 어떻게 오직 둘 뿐인 것으로 생각하는가, 어떻게 젠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가, 젠더에 대해 생각하기를 회피하거나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가를 분석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플랙스는 당시의 페미니즘에서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던 질문 "젠더란 무엇인가?", "젠더는 해부학적 성차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젠더는 오직 둘 뿐인가?"와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P89

젠더가 상호 관계적이라는 측면에만 주목하면 이 언설은 결국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상호 관계라고 수렴될 수 있다. 하지만 젠더가 상호 관계적이라는 측면을 생각하는 동시에 젠더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측면도 같이 생각한다면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 범주는 또한 그것으로 수렴될 수 없는 다른 많은 젠더를 통해 구성된다는 점, 그리고 그런 비규범적 젠더와의 관계를 통해 ‘여성‘과 ‘남성‘이라는 범주가 구성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물론 플랙스는 트랜스젠더퀴어를 직접 언급하거나 논하지는 않고 있다. 당시 트랜스 정치학에서 주류 용어인 트랜스섹슈얼 역시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플랙스의 주장은 최소한 젠더를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사유하는 방식에 문제제기를 하고 젠더를 통해 사유하지 않는 측면을 생각하도록 요청했다는 점에서 트랜스 논의와 어떤 접점을 형성한다. 남성과 여성의 위계 질서 및 여성성에 모든 부정적 속성을 귀속시키는 가부장제의 작동 양상은 한편으로 여성성을 확장시키고 여성성을 퀴어하게 만드는 역설을 낳지만 동시에 여성/여성성에 모든 비규범적 속성, 부정적 속성을 귀속시키면서 트랜스를 삭제하고 사유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만든다. 전자는 퀴어함 혹은 비규범적 실천이 비규범적 속성을 정당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언제나 규범 자체를 문제 삼고 규범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논의가 흐를 수 있도록 한다. 후자는 남성성-여성성(혹은 남성성-비남성성)이 결국 이원젠더 체계를 강화하고 트랜스 등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명명 - P90

할 수 없는 많은 실천을 사유와 인식의 가능성에서 삭제하는 문제를 야기한다. 즉 트랜스나 퀴어가 별개의 정치학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을 때도 그 필요가 무시된다. 그런데 전자와 후자는 서로 무관하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며 언제나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트랜스는 젠더를 논함에 있어 언제나 사유와 인식의 외부로 추방되고 이 추방을 통해 여성과 남성을 자연스러운 젠더 범주로 구축한다. 여성과 남성을 자연화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트랜스/퀴어가 이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라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한다.
한편으로 플랙스는 섹스 젠더 구분 공식 역시 다시 사유하고자 한다. 만약 섹스가 해부학적 차이이자 생물학적으로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면 이때 생물학은 "전-사회pre-social" 혹은 "비-사회non-social" 현상이 된다. 이럴 경우 ‘성차란 과학적 사실이다‘ 혹은 ‘성차는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는 주장은 결국 성차를 여성과 남성의 해부학적 운명으로 만든다. 무엇보다 섹스를 생물학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하고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언설을 반복하고 강조하는 행위는 많은페미니스트 과학자가 과학적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학적 사실, 객관적 사실이 부분적 진실, 당파적 사실이라고 지적했다는 점을 전적으로 부정할 위험이 있다. 생물학과 같은 과학의 부분성, 당파성을 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왜 근대 사회는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범주를 필요로 했는가를 질문할 수 있음에도, 생물학적 여성과 같은 섹스 본질주의 논의에서 이 질문은 가당찮은 헛소리가 될 뿐이다. 섹스-젠더 구분 공식을 반복할 때, 젠더 배치를 바꾸려는 시도는 가능하지 않으며 인간 활동에서 젠더 경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설명하 - P91

려는 시도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젠더 개념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환원하지 않으려는 페미니스트의 시도는 플랙스만이 아니었다. 프랑스 페미니스트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는 1991년 발표한 논문에서 젠더를 이야기할 때 "섹스의 언어로 젠더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질문하며 우리가 정말 섹스와 젠더를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는가를 질문한다. 이보다 훨씬 앞서 조안 스콧Joan W. Scott은 젠더 분석을 여성에 대한 분석이 아니라 역사를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분석틀, 인식론으로 사유할 것을 주장했다. 페미니스트 생물학자 앤 포스터-스털링 Anne Fausto-Stering은 아예 인간은 오직 둘 중 하나로만 태어나는 것이 생물학적 사실이라는 가정 자체에 문제제기하면서 생물학적 사실에 따르면 인간은 두 가지 섹스로 태어나지 않음을 지적한다. 즉 인간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라는 오직 둘 뿐인 섹스로 태어난다는 해석, 인간이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게 사실이니 의문시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인식은 그 자체로 인간은 남성 아니면 여성이어야 한다는 젠더 인식에 따른 것이다. 생물학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생물학적 본질주의에 대한 지속적 문제제기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존재했던 여러 페미니스트가 각자의 방식으로 계속해서 제기했던 질문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섹스-젠더 개념을 다시 사유해야 한다는 논의는 버틀러가 처음 제기한 것이 아니라 페미니즘 내부에 팽배한 논의였다. 즉, 버틀러 한 명을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퀴어 이론가로 추방하면 페미니즘 내부에서 발생한 여성 범주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는 사라지고 여성의 몸을 본질화할 수 있다는 인식은 크나큰 착각이자 페미니즘 역사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일일 - P92

뿐이다. 물론 최근 들어 델피가 젠더는 가부장제나 성차별주의를 은폐하기에 폐기되어야 할 용어라는 주장에 동조하고, 포스터-스털링이 트랜스 혐오 발화에 동의하는 발언을 하여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섹스와 젠더의 관계를 재구성하고자 한 역사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페미니즘은 한두 명의 유명한 이론가의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짚어야 할 지점이 있다. 1990년대 트랜스젠더퀴어 이론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젠더 개념 논쟁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과 함께 페미니즘에서 젠더 개념을 구성하고 여성 범주를 사유할 때 트랜스젠더퀴어가 상상적 경계, 구성적 외부로 작동했다는 점이다. 앞서 나는 스트라이커가 트랜스 연구를 퀴어 이론의 쌍생아로 표현한 논문을 언급했다. 그런데 쌍생아는 부모 혹은 어떤 조상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 부모 혹은 조상은 페미니즘이다. 페미니즘은 퀴어 이론과 트랜스 이론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런데 트랜스 이론을 페미니즘의 사악한 쌍생아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젠더 개념 논쟁에 있다. 만약 트랜스를 기본 인식론으로 삼는다면, 젠더를 논함에 있어 타고나는 여성을 가정하지 않고 여성 범주 자체를 우발적이고 우연한 사건/행위라는 점을 분명하게 재인식한다면, 이때 페미니즘의 주체인 여성은 임의로 가정할 수 없는 특성이 된다. 무엇보다 여성의 어떤 공통점을 함부로 구성하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그리하여 페미니즘의 주체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뿐이다. 바로 이것이 트랜스 연구가 사악한 이유다. 트랜스를 사유하기 전에는 문제가 없다고 혹은 트랜스만 추방하면 된다고 여겼던 여 - P93

성 범주가 가장 논쟁적이고 문제가 많은 범주가 되기 때문이다. 많은 분리주의 페미니스트가 트랜스를 그토록 추방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트랜스 연구는 페미니즘의 사악한 쌍생아(자식?)일 뿐만아니라 퀴어 이론의 사악한 쌍생아(형제자매남매?)이기도 하다. 퀴어이론의 토대 역시 흔들기 때문이다. - P94

퀴어 이론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이론적 축적은 무시할 수 없는 큰 역할을 하지만 그럼에도 퀴어 이론은 그 자체로 독자적 연구 분야를 형성하고 있다고 인식된다. 무엇보다 퀴어 이론을 하나의 단독 학제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에 몇몇 연구자는 퀴어 연구에서 젠더 연구를 분리시키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가장 대표적 논의는 헨리 아벨로브Henry Abelove, 미셸 에이나 버레일Michele Aina Barale, 데이비드 할퍼린David Halperin이 함께 편집하고 1993년 처음 출판된 책 『레즈비언과 게이 연구 선집Lesbian and Gay Studies Reader』의 서론이다. 이 책 서론에서 세 편저자는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혹은 퀴어 연구)의 목적을 선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즘이 젠더를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혹은 퀴어 연구)는 섹스와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혹은 퀴어 연구)를 하나의 연구 분야로, 분과 학문으로 설정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페미니즘 연구와 퀴어 연구의 성격 및 한계를 모두 규정하는 주장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에일로브 등이 편집한 책의 서론은 출간 이후, 페미니즘은 젠더만 연구하는 학제인가라는 비판, 섹스는 단지 성행위, 성관계만 지칭하는가라는 비판 등 여러 측면에서 다양한비판을 받았다. 그럼에도 퀴어 연구는 섹슈얼리티를 주로 다룬다는 - P95

인식은 만연하고 게일 루빈을 퀴어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는 인식 역시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퀴어 연구는 섹슈얼리티만 혹은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다룬다는 인식은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퀴어 이론과 젠더의 관계는 퀴어 이론이 등장한 이후 지속적으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일단 퀴어 이론은 동성애와 같은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인간의 삶을 정체성이나 다른 여러 범주로 구획하는 권력 작동 양식 자체를 문제 삼기 위해 등장한 이론이다. 그렇기에 퀴어 이론의 등장 배경을 설명하는 많은 논의는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 등을 계속해서 언급한다. 하지만 퀴어 이론이 하나의 이론으로, 연구 분야로 등장한 이후 그 논의가 실제 전개되는 방식은 상당 부분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특히 동성애 정체성을 중심에 두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초반 진행한 행사의 경우, 행사 제목에는 퀴어 이론이라고 적혀 있는데 행사 부제는 레즈비언과 게이만 적시되는 식이었다. 이것은 퀴어 이론이 단순히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다는 주장과도 충돌하는데 왜냐면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 것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정말로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분야로 삼는다면 섹슈얼리티의 주요 의제인 낙태, 임신과 출산, 성폭력 등도 중요하게 논의해야 하지만 이러한 의제는 퀴어 연구에서 주로 다루지 않으며 소수의 연구자만이 다루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퀴어 이론이 등장한 초기부터 퀴어 이론의 한계, 즉 백인 중산층 중심의 논의라는 지적, 섹슈얼리티가 동성애와 거의 등치된다는 비판 등을 담은 많은 글이 등장했다. - P96

퀴어 이론의 연구 대상에서 젠더 논의를 삭제하는 것은 레즈비언과 게이 사이의 차이를 삭제하는 것과 같은 익히 알려진 의제 등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고자 하는 논쟁은 트랜스젠더퀴어와 퀴어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이다.
(...)
트랜스를 환영하지 않거나 꺼리는 퀴어 커뮤니티에서 퀴어와 트랜스의 관계를 가장 첨예하게 논의한 트랜스 이론가는 수잔 스트라이커다. 1998년 퀴어 학술지 『GLQ』의 트랜스젠더 연구 특집호를 책임 편집한 스트라이커는 서문에서 당시까지 등장한 트랜스 연구의 다양한 주제를 소개하는 동시에 ‘트랜스젠더는 퀴어인가‘라는 주제를 논했다. 만약 퀴어 연구가 섹슈얼리티를 주요 연구 주제로 삼는 연구라면, 젠더 정치학을 가장 첨예하게 논하는 트랜스 연구는 퀴어 연구의 - P97

일부일 수 있을까? 이 주제를 논하기 위해 스트라이커는 그 자신의 생애 경험을 통해 설명하며, 많은 트랜스젠더가 퀴어 공동체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그 자신을 퀴어로 설명하는 트랜스 역시 상당했음을 지적한다. 즉 트랜스젠더는 퀴어 커뮤니티의 구성원이었지만 퀴어 이론의 연구 영역이 섹슈얼리티 연구로 재/규정될 때 퀴어 이론은 트랜스 연구를 다룰 필요가 없어지고 트랜스는 퀴어가 아니라는 인식을 생산하게 된다.
하지만 퀴어 이론과 트랜스 이론의 중첩을 중요하게 논하는 이유는 단순히 퀴어 커뮤니티에 트랜스가 있었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한편으로 퀴어 커뮤니티나 연구에서 퀴어함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라는 질문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퀴어와 트랜스를 구분하는 것 혹은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명징하게 구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전자를 살펴보자. 스트라이커가 퀴어 커뮤니티에 트랜스는 언제나 존재했고 적극 활동했다고 지적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지분을 요구하고 존재의 가시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주장이 아니다. 이것은 퀴어 정치학에서 퀴어함, 즉 권력에 저항하고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기존 권력 작동이 자연 질서로 구축되었다는 점을 드러내는 실천에 어떤 위계가 존재하는가와 관련한 질문이기도 하다. 트랜스는 퀴어가 아니라는 식의 언설에서, 퀴어는 권력에 저항하고 권력 작동 양상 자체를 질문하는 실천인 반면 트랜스는 그렇지 않다는 구분이 만들어진다. 즉 동성애자의 성적 지향이나 성적 실천은 이성애규범성을 질문하고 문제 삼는 행동이지만, 트랜스가 젠더를 재구성하는 실천은 기존 - P98

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반복하고 재생산하는 행동이라는 식이다(이런 식의 논의에서 양성애자는 이성애규범성을 질문하는 실천이 아니라 이성애규범성을 강화하는 실천으로 취급된다). 트랜스를 규범의 재생산 행위로 이해할 때 ‘인간은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태어나고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를 일평생 유지하고 각 젠더에 부여된 불균형하고 불평등한 위계 관계가 자연스럽다‘는 지배 규범적 인식은 질문의 대상이되기 어렵다. 여성은 남성스러울 수 있고 남성은 여성스러울 수 있지만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아이디어 자체는 자연 질서로 남는다. 그리하여 퀴어 커뮤니티에 트랜스가 있다는 말은 권력이 자연 질서로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고자 할 때 무엇을 권력 작동으로 인식하고 사유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며 무엇을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이해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인간은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태어나지 않으며, 태어날 때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지정받았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따라야 할 절대 진리나 숙명은 아니다. 만약 태어날 때 지정받은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면 이것은 이성애가 아닌 다른 성적 지향 역시 불가능해짐을 의미한다. 인간을 여성 아니면 남성으로만 지정하는 규범은 단순히 젠더 정체성만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이성애자여야만 하고 이성애 관계에서 임신과 출산을 통한 인구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 질서라고 규정한다. 트랜스는 퀴어인가, 퀴어 연구는 트랜스를 어떤 식으로 사유하는가와 관련한 질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후자의 질문은 주로 범주를 둘러싼 경계 분쟁 논의로 많이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트랜스를 둘러싼 경계 분쟁은 크게 여성 범주를 둘러 - P99

싼 논쟁과 트랜스 및 비트랜스-비이성애자 사이의 범주를 둘러싼 논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트랜스와 비트랜스-비이성애자 사이의 범주를 둘러싼 논의만 다룰 것이다. 흔히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별개의 정치적 분석 범주이자 연구 분야라는 이해가 있다. 이것이 앞서 아벨로브 등이 페미니즘은 젠더,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는 섹슈얼리티를 연구한다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레즈비언 및 게이 연구 혹은 퀴어 연구가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때 그럼 트랜스는 어떻게 될까? 흔히 트랜스는 젠더 정체성을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는 범주며 비이성애자는 성적 지향 혹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논의를 전개하는 범주라는 이해가 만연하다. 물론 (특히 한국의) 많은 페미니스트와 성소수자 커뮤니티에 속한 일부에게 트랜스젠더퀴어는 또 다른 성적 지향, 동성애와는 다른 새로운 성적 지향으로 인식되고 그리하여 젠더 의제로 인식되지 않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적어도 LGBT 혹은 퀴어 의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트랜스 의제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이들 사이에서 트랜스와 비트랜스-비이성애자는 구분되는 실천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트랜스와 동성애자 양성애자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범주일까?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예를 들어 mtf/트랜스여성과 게이 남성, ftm/트랜스남성과 레즈비언 부치는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범주일까? 예를 들어 어떤 부치는 레즈비언 분리주의 커뮤니티에서 오랜 시간 활동하다 자신을 남성으로 재정체화하고 ftm/트랜스남성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물론 어떤 부치는 평생 부치로 살아가고 어떤 ftm/트랜스남성은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했다고 말한다. 또한 - P100

어떤 게이 남성은 오랜 시간 게이로 살다가 mtf/트랜스여성으로 재정체화하기도 한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고 mtf/트랜스여성으로 인식하며 살아가다 게이로 재정체화하기도 한다. 이것은 한국 사회에서 매우 흔한(하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은) 경험이기도하다.
다른 한편 게일 루빈이 자세하게 논했듯 부치의 실천은 그것이 온전히 섹슈얼리티 실천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부치 젠더를 실천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존재, 자신의 정체성을 재현한다. 여성스러운 게이 역시, 그 실천은 섹슈얼리티 혹은 성적 지향을 표현하는 방식인 동시에 젠더를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젠더와 섹슈얼리티는 얼마나 분명하게 구분되는 분석 범주일까? 이것을 지속적으로 구분하는 태도가 트랜스를 퀴어 커뮤니티에서 추방하고 트랜스를 사유할 필요가 없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에 트랜스를 퀴어 커뮤니티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것은, 트랜스의 경험과 비트랜스-비이성애자의 경험 사이에 상당히 다른 지점이 존재하지만 트랜스와 비트랜스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어떤 중첩지점이 존재하고, 이를 통해 젠더와섹슈얼리티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겠다는 것이다. 섹슈얼리티 실천과 젠더 실천 사이의 경계가 중첩되어 있으며 정체성 범주를 경험하는 방식은 매우 모호하지만 명확하다고 여기는 서사 형식을 통해 구성된다는 지적이다. 이를 통해 퀴어 연구에 트랜스젠더퀴어 연구를 배치하고 퀴어와 트랜스 사이의 중첩 지대를 그려나가고자 했다.
그런데 스트라이커를 비롯한 일군의 트랜스 연구자들이 트랜스 연구를 퀴어 연구의 일부로 배치하려고 했다면 비비안 나마스테 - P101

Viviane Namaste나 제이 프로서Jay Prosser는 퀴어 이론이 트랜스섹슈얼을 부정적 대상으로 만든다는 측면에서 비판적이었다. 나마스테와 프로서는 모두 트랜스섹슈얼, 즉 의료적 조치를 통해 몸의 형태를 바꾼 mtf/트랜스여성이라면 여성으로 통하는 삶을 살고자 하고, ftm/E랜스남성이라면 남성으로 통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 논의를 전개한다. 이것은 1990년대 초반 트랜스젠더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이 용어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지만 트랜스젠더 중에서도 의료적 조치를 겪은 이들의 경험을 누락하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트랜스섹슈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측면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트랜스 중 일부의 평범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을 체제 순응이라고 비난하는 비트랜스 페미니스트나 비트랜스-퀴어 활동가 및 연구자의 언설에 반발하고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트랜스섹슈얼이라는 용어를 채택하기도 했다. 체제 순응이다, 체제 저항이다와 같은 판단은 그 자체로 매우 체제 순응적이고 기존의 지배 권력을 재강화하고 기존 지배 규범을 자연질서로 만드는 행위임에도 이 사실은 언제나 은폐된다.
나마스테와 프로서는 퀴어 이론이 전복과 저항만 강조하면서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은 기존 질서에 부합하고자 하는 동화 실천이라는 이분법 구도를 사용한다고 비판한다. 이들은 퀴어 이론이 트랜스젠더를 진보와 저항에 포함시키고 트랜스섹슈얼을 퇴보와 보수에 배치시킨다며, 바로 이런 구분을 문제 삼는다.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을 동화주의로 설명하는 방식, 트랜스가 여성성을 강화하고 여성을 억압한다는 식의 논의는 일상에서 더욱 빈번하게 만날 수 있고 최근 한국에선 트랜스 혐오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기도 하다. 물론, 나마스 - P102

테나 프로서의 비판 작업은 퀴어 이론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도식적 이항 대립으로 사유한다는 점에서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다. 퀴어 이론은 정말로 이분법에 기반한 논의인가? 기존의 이분법 자체를 문제삼는 논의는 언제나 기존의 이분법으로 수렴되어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버틀러의 몸 논의는 몸 자체를 부정하며 초월적 주체를 강조한다는 식의 비판을 받거나,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이 젠더를 옷장에서 꺼내 입을 수 있는 것이라는 논의의 근거로 쓰이는 식이다.
그럼에도 나마스테와 프로서가 트랜스섹슈얼을 중심에 둔 논의는 매우 중요한데, 기존 질서에 동화하는 것처럼 인식되는 실천이 기존 질서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이 동화주의 욕망이라면 이 욕망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젠더 범주를 더욱 불안하고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만약 여성으로 통하는 사람이 비트랜스여성인지 트랜스여성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이때 여성이라는 범주는 어떻게 될까? 남성으로 통하는 사람이 자신을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있으며 여성으로 통하는 외모로 살기 위한 방법을 이제 막 채택한 단계에 있다면, 그 사람의 젠더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만약 남성으로 통하는 사람이 트랜스여성인지, 비트랜스남성인지, 트랜스남성인지 확정할 수 없다면 남성이라는 범주는 어떻게 그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 트랜스섹슈얼의 욕망이 동화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한들 그 동화주의 실천은 동화하고자 하는 바로 그 규범을 위기에 몰아 넣으며 규범이 자연 질서가 되는 인위적 과정을 폭로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일부 사람들이 트랜스를 지독하게 혐오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103

퀴어 이론은 트랜스 이론과 젠더라는 범주를 통해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고, 꽤나 오랫동안 트랜스 연구를 퀴어 연구의 일부로 구성하고자 하는 흐름이 있었다. 이런 흐름은 최근 변하고 있는데 그것은 트랜스 연구가 퀴어 이론의 사악한 쌍생아라는 바로 그 표현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때 사악함은 퀴어 이론, 더 정확하게는 게이와 레즈비언이라는 범주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통상 비트랜스를 전제하는 레즈비언과 게이 같은 동성애 정체성은 그 범주가 성립되기 위해 동성 혹은 같은 젠더라는 젠더 범주가 성립되어야 한다. 게이 남성이라면 나의 젠더 범주가 남성인 동시에 상대의 젠더 범주 역시 남성이며, 레즈비언이라면 나의 젠더 범주가 여성인 동시에 상대의 젠더 범주 역시 여성이어야 한다. 이것은 나와 상대의 젠더가 동성일 - P104

수 있다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 인식은 이성애에서도 비슷한데 나와 상대의 젠더가 반드시 이성이어야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나의 반대 성이 존재한다는 이성애적 상상력, 나와 같은 성이 존재한다는 (관습적)동성애적 상상력은 모두 성적 지향과 관련한 논의지만 성적 지향이 성적 지향만으로 존립할 수 없으며 젠더 정체성을 통해 비로소 성적 지향이 성립하게 됨을 말해준다.
그런데 나와 타인의 젠더가 동성이거나 이성(반대의 성)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명한 범주일까? 예를 들어 동성이나 이성의 ‘성‘이 섹스를 지칭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그 섹스가 생물학적 특질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만약 염색체가 XXY로 태어난 사람의 동성은 누구고 이성 혹은 반대의 성은 누구일까? 염색체는 XY인데 안드로겐 불감증 증후군Androgen Insensitivity Syndrome, AIS이어서 여성으로 통하는 몸으로 살고 있다면 이 사람의 동성은 누구고 이성/반대의 성은 누구일까? 혹은 다른 예를 들어 동성이나 이성의 ‘성‘이 젠더를 지칭한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젠더가 자신의 젠더 인식 혹은 젠더 정체성이라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자신을 여성이나 남성이 아니라 트랜스젠더퀴어로만 설명하는 사람에게 동성은 누구고 이성/반대의 성은 누구일까? 젠더가 없다고 말하는 에이젠더agender인 사람의 동성은 누구고 이성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은 동성이나 이성/반대의 성이라는 범주가 자명하다기보다 모든 사람은 당연하게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 태어나고 이것이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하다고 여기는 인식에서 비롯함을 폭로한다. 엄밀하게 말해서 자신의 젠더 정체성은 오랜 시간 고민의 결과로 혹은 그냥 당연히 그런 것이라는 결과로 분명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 - P105

지만 ‘성‘이 섹스 혹은 생물학적 성을 지칭할 때 이것은 얼마나 분명할까? 트랜스를 혐오하고 트랜스 범주를 부정할 때 가장 많이 동원하는 근거는 염색체다. 그렇다면 자신의 염색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특별한 목적으로 염색체 검사를 하지 않는 이상 대부분은 자신의 염색체를 정확하게 모르고 지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염색체를 안다고 가정한다. 그리고 이 가정을 근거로 자신이 ‘생물학적 여자다‘와 같은 발언을 자신있게 한다. 혹여 자신의 염색체는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럼 내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의 염색체는 알고 있을까? 같은 화장실, 같은 목욕탕을 사용하는 사람의 염색체는 모두 알고 있거나 어떤 근거를 가지고 확신하는 것일까? 염색체는 누구도 질문하지 않고, 알 필요도 없고,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정보다. 누구도 모르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는 바로 그 인식을 통해 염색체는 지배 규범으로 작동한다. 질문할 필요가 없고,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염색체는 자연 질서, 지배 규범의 지위를 유지한다. 이성/반대의 성이나 동성과 같은 젠더 범주는 자명한 범주가 아니라 우발적이고 임의로 선택된 범주이며 우연한 사건에 가깝다. 그리하여 트랜스를 하나의 분석 범주이자 인식론으로 이해한다면 트랜스 연구는 퀴어 연구와 완전히 별개의 다른 연구가 되는 것이 아니다. 퀴어 연구 혹은 레즈비언과 게이 연구의 어떤 특정 토대, 페미니즘의 어떤 특정 토대를 근본적으로 허물고 완전히 다른 사유를 요구하는 이론이 된다. 이 지점에서 트랜스 연구는 퀴어 이론의 일부거나 젠더 연구의 일부라기보다는 트랜스 연구라는 별도의 연구로 구성된다.
트랜스 연구가 트랜스라는 분석틀, 인식론을 토대로 독자적 연구 - P106

를 구성하는 측면은 이른바 LGBT라는 용어를 다시 사유하는 작업과 괘를 같이 한다. LGBT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그리고 트랜스전더퀴어의 축약어인데 이런 방식의 축약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트랜스젠더퀴어는 동성애나 양성애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성적 지향인가? 둘째, 트랜스젠더퀴어는 트랜스젠더퀴어이기만 하거나 모든 트랜스는 이성애자인가? 실제, 나는 어느 자리에서 강의를 하고 질의응답을 진행하던 중, ‘트랜스젠더는 이성애자가 되려고 수술을 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성적 지향과 젠더 정체성을 구분하지 못 하는 이 질문은 다양한 판본으로 빈번하게 등장한다. 어떤 트랜스는 이성애자로 정체화하지만, 다른 어떤 트랜스는 동성애자거나 바이섹슈얼, 판섹슈얼 혹은 무성애자 등 다른 여러 성적 지향의 언어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런데 LGBT라는 명명 방식은 트랜스와 동성애, 양성애가 각각 별개의 성적 지향이나 성적 실천인 것처럼 인식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동성애와 양성애, 트랜스젠더퀴어는 마치 ‘성소수자의 의제‘라고 불리는 어떤 의제가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을 만들기도 한다. 트랜스젠더퀴어는 동성애 운동이나 이론과 어떤 공통의 의제가 있을까? 예를 들어 미국에서 9.11 사건 이후 국경이나 주 경계를 이동할 때 많은 제약이 발생했다. 이 제약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민과 미국으로 입국하고자 하는 외국인이 주 타겟이었지만, 트랜스젠더퀴어 역시 제약의 대상이 되었다. 신분증이 보장하는 젠더/외모와 트랜스젠더퀴어가 실천하는 젠더/외모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인지될 때, 항공기를 이용하는 등 신분증이 필요한 일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때로 시민권 자체를 박탈하거나 부정하는 사건 - P107

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또한 트랜스젠더퀴어가 여전히 정신병 진단 편람(DSM)에 속해 있는 질병의 하나로 취급되고 있을 때, 트랜스 연구는 동성애 연구보다는 장에 연구나 정신 질환 관련 연구와 더 많은 접점을 형성한다. 이럴 때 LGBT라는 용어는 어떤 측면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LGBT라는 명명 방식은 여전히 유효하고 유의미할까?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것은 어떤 측면에서 일까? 이 질문과 문제 의식은 트랜스 연구와 퀴어 연구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하도록 하고 트랜스 정치학, 트랜스페미니즘을 모색하는 작업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
트랜스 연구는 페미니즘의 젠더 연구를 구성하고 젠더와 여성 범주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면서 등장했고, 퀴어 이론의 일부로 그 논의가 전개되길 바라는 이론적 시도를 하며 논의를 전개해왔다. 하지만 트랜스젠더 연구에서 강조점이 젠더에서 트랜스로 이동하고, 트랜스젠더퀴어의 복잡한 젠더 경험을 바탕으로 기존의 다양한 범주를 다시 사유하기 시작하면서 논의는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것은 트랜스 연구가 더 이상 페미니즘과 무관하거나 퀴어 이론과 무관한 연구라는 뜻이 아니다. 트랜스 연구에서 젠더 연구 및 퀴어 연구는 여전히 중요한 논의 의제이며 강한 교차성을 형성한다. 바로 이러한 교차점 혹은 겹침은 젠더 개념, 퀴어 개념, 트랜스 개념 자체를 완전히 다시 사유할 것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요청은 삶의 복잡성을 복잡하게 사유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하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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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지 않을 권리 - 혼자도 결혼도 아닌 생활동반자
황두영 지음 / 시사IN북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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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아니면 결혼, 내키지 않는 두 선택지를 넘어서기 위해서 생활동반자법이 필요하다. 생활동반자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결혼에 이르기 전에 서로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연인일 수도 있다. 또 이혼과 사별 후에 더 이상 친족 관계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는 사람도, 노인과 장애인처럼 특히 돌봄이 필요한 이들도 긴요하게 쓸 수 있는 제도다. 흔히 ‘동거‘를 무책임하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사연으로 함께 살고 있고, 또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 생활동반자법은 혼인과 혈연 이외의 사람들이 함께 살 때 필요한 사회복지혜택과 제도적 권리를 보장하고, 둘이 동거생활을 시작하고 해소할 때 필요한 공정한 절차를 규정하는 법이다. - P8

생활동반자법 논의의 핵심은 ‘고독‘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외롭다. 국가는 국민이 외롭게 살도록 방치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폭증하는 1인 가구를 자유와 낭만을 갖춘 새로운 생활방식처럼 꾸미지만 실제로 불안정한 경제적 상황, 누구와 같이 사는 게 민폐가 되는 여러 환경, 너무 높은 결혼의장벽, 가부장적 가족문화 등으로 ‘어쩌다 보니‘ 비자발적으로 1인 가구가 되는 경우가 대다수다. 가족 간에 물리적, 감정적으로 서로 돌보지 못하거나 돌봄을 거부하는 상황도 빈번해 가족과 함께 살아도 외로운 경우가 많다.
‘고독‘은 일시적으로 지나가는 개인의 기분이 아니라 실재한다. 객관적 조건으로 인해 너무 많은 사람이 고독한 상태가 되면 그건 사회적 문제이자 정책적 과제다. 지속적인 고독을 해결하기 위해 돌봄을 제공하는 자원이 필요하다.
나는 고독이, 외로움이, 돌봄을 주지도 받지도 못하는 많은 - P10

사람이 어쩌면 한국의 가장 큰 정책적 과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고독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기껏해야 상담을 해주고 정신과 치료에 대한 보험수혜를 늘려주는 정도다. 물론 경제 정책, 복지 정책, 노동 정책을 통해 사회적 고독을 만드는 요소를 줄여 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외로움 자체를 해소하려면 더욱 직접적인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
생활동반자법은 고독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돌봄‘에 대한 법이다. 우리는 누구나 돌봄이 필요하다. 화장실에서 넘어졌을 때 구급차를 불러줄 사람은 누구에게나 필요하지 않은가. 돌봄은 좁은 의미의 간호나 가사노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험난한 세상에 맞서기 위해 늘 격려와 위로가 필요하다. 바쁜 친구와 밖에서 만나 얘기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내일의 건강한 출근을 위해서 오늘 털고 가야 할 이야기도 있다. 치킨을 주문하거나 라면을 끓일 핑계가 되어줄 사람도 필요하다. 눈송이만한 외로움이 밤새 몸을굴려 눈사태가 되지 않도록 그저 누군가의 잠자는 숨소리가 필요할 때도 있다.
물론 누군가와 같이 산다 해도 내 몫의 돌봄은 내가 해야 한다. 하지만 품앗이는 할 수 있다. 내가 힘들고 바쁠 땐 상대가 도와주고, 아플 땐 서로 보살피고 집안일도 대신 해출 수 있어야 한다. 피곤하고 아파도 어쩔 수 없이 출근은 해야 하는데, 빨아놓은 셔츠가 한 장도 없을 때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묻게 된다. 우리에겐 연대와 협동, 상호돌봄이 필 - P11

요하다.
한국은 돌봄을 이미 상당 부분 공공서비스와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많은 복지비용을 들여 공공산후조리원, 아이 돌보미부터 치매 간병까지 일생에 걸쳐 돌봄 서비스를 지원한다. 물론 돈이 있다면 시장에서 더 좋은 서비스를 구입할 수도 있다. 시장에서 제공하는 돌봄은 청소, 아이 보기, 간호하기 등 구체적 행위뿐 아니라 감정노동까지 포함한다. 외로운 사람은 누군가 나를 아껴주는 기분을 느끼고자 적지 않은 돈을 쓴다.
이러한 돌봄을 정부와 시장이 다 해줄 수 있을까? 다시 말해 가족 대신 정부와 시장이면 충분할까? 돌봄은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인격 모두와 연결되어 있는 전인적이고 감정적인 부분이다. 아무리 많은 자원을 들여 각종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해도 채울 수 없는 여지가 있다.
가령 노인 1인 가구가 오늘도 건강히 잘 지내는지, 영양가 있는 식사를 했는지, 사회적으로 단절된 곳에서 인지기능이 떨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회복지비용을 들여야 한다. 더구나 이런 서비스는 해당 노인을 연명시킬 수 있을지언정 외롭지 않게 하기는 어렵다. 이 노인이 믿을 수 있는 친구와 살아갈 수 있는 제도가 있고, 이를 장려하기 위해 임대주택과 수당도 준다면 어떨까? 우리 사회는 ‘특별한 한 사람‘만 내 옆에 있으면 되는 간단한문제를 너무 어렵게 풀어가고 있다. - P12

일부에서는 생활동반자법이 가족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동거 관계를 법적으로 인정하면 더더욱 결혼을 안 할 것이고, 출산율이 떨어지며, 우리 사회의 근간이 무너질 것이라고 한다. 우리 법이 허용한 동거의 방식이 결혼뿐이라 누군가와 같이 살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결혼하는 것이라면 정말로 진지하게 가족법의 재건축이 필요하다.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가족의 위기가 아니라 ‘가족법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보여준다.
가족을 이루도록 장려하는 법, 서로에게 더 책임을 갖고 정착하도록 독려하는 법, 가족의 믿음과 사랑을 느끼게 하는 법인 생활동반자법은 당연히 ‘보수적인 법‘이다.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정시킨다는 의미에서 보수적이다. 생활동반자법은 기존의 경직된 가족제도를 떠난 사람들을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는 법이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서 탈락하지 않고 사회를 더 신뢰하고 함께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우리가 만들어 온 사회복지제도에 더 많은 사람을 포함시키고, 개인으로서, 또 가족구성원으로서 보장받아야 한다고 여겨온 권리를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도록하는 법이다. - P15

한국 사회의 아들딸로 사는 우리에게 ‘부모에 대한 부담감‘이 보편적 - P27

으로 와닿기 때문인 것 같다. 부모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고,
부모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한국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꼭 모셔서 정신건강 특강을 듣고 싶다. 경연 프로그램에서 인순이의 〈아버지〉, 자이언티(Zion.T)의 〈양화대교〉, 라디(Ra.D)의 〈엄마〉 같은 노래가 필승카드로 쓰이는 한 이 원망과 미안함의 이중적 감정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용돈을 드리고 자주 찾아가서 뵈어도 부모님에 대한 감정은 밑 빠진 독과 같다. 쓰고 넘칠 정도로 돈이 많아서부모님께 경제적 지원을 충분히 해드리면 괜찮을까? 그럴정도로 돈이 많지 않기도 하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녀의 경제력이 충분하다면 아마 부모의 경제력은 넘치게 충분할 가능성이 크고, 한국 사회의 효도는 단순히 경제적 부양을 넘어서 감정적 충만함이라는 좀처럼 완성되기 어려운 목표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처럼 관직을 버리고 3년상을 치르는 게 현대식 효도는 아니다. 우리 사회의 효도는 자랑할 만한 아들딸이 되는 것이다. 해외로 효도여행을 보내서 동창들이모여 있는 네이버 밴드에 자랑할 사진을 찍게 해주고, 면세점에서 세상을 덮을 만한 샤넬 로고가 박힌 핸드백과 아버지 손목 관절에 무리를 줄 만큼 무거워 보이는 롤렉스 시계를 사드리는 것이다. 부모님 지인이 듣고 단박에 알 만한 직업을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효도가 될 만한 직장을 잡으려면 부모님의 노후자금을 털어 지원을 받아야 한다. 효도 - P28

를 하려면 불효를 해야 하는 딜레마다. 지금의 불효를 만회하기 위해 더 큰 성공을 이뤄 부모님의 노후까지 책임져야한다. 이렇게 한국 사회 청춘들은 효도를 향한 피의 레이스를 진행하고 있다.
미안하다가도 가끔은 화가 난다. ‘좋은 직장도 못 갖고 돈도 못 버는 게 누구 탓인데‘ 생각하다가도 죄스러운 마음에 얼른 지운다. 미안하다가 원망했다가 잘 해야지 하다가 부담스럽다가 부모에 대한 감정이 널뛴다.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부모 덕으로 사장이네 대표네 갑질을 할 때면 더 좋은 위치에 나를 올려다주지 못한 부모가 원망스럽다. 재벌기업까진 물려주지 않더라도 그때 내게 조금 더 투자를 해줬더라면, 딸이라고 학원비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내게도 학자금 대출이 없었다면, 전세금만 보태줬다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자식을 좋은 위치에 보내기 위해 과잉 투자한 부모에 대한 원망도 있다. 학업 성취만 요구하고 내 마음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원망이다. - P29

결국 자식에게 ‘올인‘한 후 부양을 받는 게 이들의 노후대책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악화된 노동 환경에서 자녀는 부모를 부양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지 못 한다. 정부는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사회복지제도를 급히 만들었지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부 역시 국민연금처럼 돈을 미리 쌓아 놓지 않은 상황에서 노인 대상자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이중고에 시달린다. 굶어 죽지 않을 수준의 노인 복지, 그나마 잘 갖춰진 의료제도와 기술로 한국의 노인은 아프고 가난하게 오래 산다. 그 결과 한국의 노인은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많이 일하는데도 가장 가난하고 압도적으로 많이 자살한다.
노인일자리 사업을 나가거나 폐지를 주워 돈을 벌고, 기초노령연금을 적게나마 받고, 자녀가 조금이라도 용돈을 - P32

주면 간신히 살 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조그만 돌부리도 너무나 버거운 절벽이 된다. 국민건강보험이 허락하지 않는 병을 오래 앓는 것, 노인복지센터나 경로당을 가지 못할 정도로 다쳐 밥과 여가를 해결할 수ㅠ없는 것, 오랫동안 살던 동네가 재개발 되는 것, 자녀가 실직을 하는 것 모두 준비되지 않은 돌부리다. 노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자녀의 생활도 도미노처럼 함께 무너진다. - P33

현재의 부양의무제는 착하고 가난한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원망하고 미안해하도록 한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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