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삶 - 제4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 수상작
임솔아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눈을 좋아하는 강이였지만 막상 눈 위에서 강이는 우 - P11

뚝 서 있기만 했다. 목줄을 끌어당겨도 꿈쩍하지 않았다.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눈이 제 얼굴에 떨어지는 걸 골똘히 보고만 있었다. 강이는 눈을 이상해했다. 무서워했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아했다.
언젠가 강이에게 스노볼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강이가 발로 건드릴 때마다 반짝이는 눈이 쏟아질 거였다. 더 먼 언젠가에는 강이와 함께 사계절 내내 눈이 쌓여 있는 나라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 P12

나도 집을 좋아했다. 우리집 강이가 자기 집을 좋아해 개집 안에 장난감 인형들을 모아놓듯이 나도 그랬다. 우리집 강이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창문에 코를 대고 있듯이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왜 집을 나갔느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받을 때마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아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러면 집이 싫으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고도 그렇지 않다고도 대답할 수 없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처럼,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밥이 먹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처럼, 멀리 나가다보면 원하지 않던 곳에 다다르더라도 더 멀리 나아가야만 하는, 그런 일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먼 곳에서 더 먼 곳으로 갈수록,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이 더 비참한 느낌이라는 걸, 따뜻한 이불이 포근하고 좋아서 무서워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P14

"집에 가만히 있으면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 P14

길에서 아람은 내게 말해주었다.
"뭐가?"
"상처가."
아람은 집이 싫어서, 나는 밖이 좋아서 우리는 함께 집을 나갔다. 집에서 받은 상처를 길에 조금씩 버리듯 아람은 매일매일 자신의 상처를 내게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람은 집보다도 길에서 더 큰 상처를 받았다. 집에서 받은 상처 따위는 어린아이의 것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집에서 받는 상처를 시시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집이 아니라 길을 선택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집도 시시하게 여길 수 있었다. - P15

꺼진 텔레비전 앞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의 미래처럼 캄캄했다. 나는 미래를 예측해본 적이 없었다. 미래를 다짐해볼 때는 많았다. 언젠가 먼 곳까지 가볼 것이다. 먼 곳에서 더 먼 곳을 향해 가며 살 것이다. 이불 속에서 얌전하게 죽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종류의 다짐이었다. 다짐으로 점철된 미래를 펼쳐놓았다. 미래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예언이 내게는 다짐뿐이었다. - P21

달라지는 상황 앞에서도 예측이 정확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처럼 보였다. 얼마나 많은 냄비를 써봐야 어느 냄비를 쓰든 라면 물을 정확히 맞출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문제를 풀어봐야 어떤 선생이든 무슨 문제를 낼지 알아맞힐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꽃을 키워봐야. 얼마나 많이 꽃을 죽여봐야. 다짐을 더 자주 다지는 것밖에는 내가 나의 미래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다짐에 골몰했다. - P22

소영은 가끔씩만 옷을 벗었다. 옷을 벗지 않는 날에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 P77

"왜 그래?"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소영의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았다. 소영은 내 손을 낚아챘다. 손톱을 내 손등에 꽂았다. 그리고 잔뜩 힘을 주었다. 나는 소영의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손을 뺐다.
소영은 몇 시간씩 벽을 쳐다보았다. 하악거리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고양이가 사나워지는 건, 화가 났을 때가 아니야. 겁을 먹었을 때야.‘
나도 소영 때문에 겁을 먹고 있었다. 소영에겐 학교와 집과 멀어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나에겐 소영과 가까워지고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소영은 날카로워져갔고 나는 소영에게 최대한 무심한 척했다. - P78

"아람이하고 소영이하고 싸우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나는 대답을 회피했다.
"엄마가 좋아, 노는 게 좋아?"
엄마가 던지는 질문에 대답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선택을 요구하는 질문은 대부분 유치했고, 지혜로운 대답은 대부분 비겁했다. 아이들은 아람의 편에 서겠다고 했다. 소영을 따돌리고 싶다기보다는 아람을 보호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아이들은 곧잘 뭉쳤다. 어떤 정의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의도 - P87

불사했다.
"아람이는 언제나 우리 편이잖아."
아람은 좋다는 말을 쏟아내왔다. 아이들이 유행처럼 한 아이를 싫어하고 따돌릴 때에도 아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난 걔 좋은데."
소영은 달랐다. 결정을 내리면 결정을 내린 대로 분명히 행동했다.
"내가 안 보기로 한 애랑 노는 건, 나도 안 보겠단 뜻인 거지."
친구와 사이가 나빠질 때마다 소영은 이 말을 강조했다.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 소영을 선택해왔다. 각자 소영을 선택했다기보다는, 다수의 아이가 소영을 선택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다수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소영을 모르는 아이는 없었다. 소영은 예뻤고, 키도 컸고,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선생들은 우리라는 덩어리를 싫어했지만, 그중 몇몇 선생은 소영이라는 개인을 아꼈다. 몇몇 친구는 소영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했고, 몇몇 친구는 소영을 무서워했다. 어쨌거나 모두 소영의 편이 되어 소영과 함께 몰려다녔다. 소영은 꼭 필요한 아이였다. 싸움이 났을 때 미지근하게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주먹질은 정당방위가 되었고 이 주일의 징계는 일주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최선의 결과만을 원하는 아이는 우리 중 소영뿐이었다. 우리는 다만 최악의 결과가 두려울 뿐이었다. - P88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보호는 치열한 공격이 될 때가 많았다. 치열한 보호가 비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P92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는 마음속 방 한 칸을 들여다.
보았다. 스노볼이 있는 집에서 팔베개를 하고 있는 소영, 경찰에게 당당하게 다가가는 소영, 손톱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소영, 안갯속을 성큼성큼 걸어가는 소영, 빨간 캐리어를 끌고 유유히 전쟁터를 빠져나가는 소영, 내가 상상해낼 수 있는 온갖 소영이 그 방안에 있었다. 그 방을 나는 ‘소영‘이라 불렀다. 소영의 모든 모습을 그 방에 들여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소영은 진짜 소영이 아니라 내 상상에 걸맞은 소영이어야 했다. 우리집 초인종이나 누르고 있는, 한껏 휘어져 있는 소영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병신.‘
소영은 ‘소영의 방‘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아이가 됐다. 계단을내려가던 소영의 뒷모습을 떠올렸다. 소영의 비굴함과 보잘것없음을 떠올리며 비웃는 일은 그리 즐겁지 않았으나 나의 비겁함을 직시할 때보다는 훨씬 편했다. - P96

"좋니."
밥을 입안에 넣으며 아빠가 물었다. 아빠는 더이상 무서운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의 눈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나의 어깨 정도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아빠는 피곤해 보였다. 사 년 전만 해도 철심처럼 뻣뻣했던 머리카락이 숱도 없이 가늘어진 채 힘없이 이마 위에 늘어져 있었다. 나는 애써 대답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지도 가로젓지도 않았다. 식탁에는 여전히 불고기가 올라와 있었지만, 엄마도 아빠도 내 밥그릇에 불고기를 올려놓지는 않았다. 그게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묵묵히 밥을 먹었다. - P156

엄마는 두 사람으로 지냈다. 낮에는 예전처럼 상냥했고, 뉴스를 보며 혀를 찼고, 조곤조곤 기도를 했다. 밤에는 불 꺼진 거실에 앉아 이상한 목소리로 이상한 소리를 냈다. 밤의 목소리는 엄마의 목소리라기보다는 내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나를 대신해서 밤 - P160

마다 엄마는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소영에게 침을 뱉을 때 입안에서 느껴졌던 피맛과 소영의 몸을 핥을 때 입안에서 느껴졌던 짠맛이 동시에 내 입안에서 서걱거렸다. 소파에 누워 벽을 타고 기어가는 불개미들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아무 말 없이 빨래를 개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에도, 자꾸 어디선가 엄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눈을 뜬 채로 꾸는 이 악몽을 나는 ‘센서등‘이라고 이름 붙였다. 센서등은 제멋대로 켜졌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어떤 것들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있을수록 어떤 장면은 더 자세해졌고, 어떤 장면은 물감이 번지듯 뭉개져버렸다. 소영 앞에 무릎을 꿇는 내 모습이 센서등의 불빛 아래서 가장 선명했다. 소영의 얼굴에 점점이 맺혀 있던 핏방울들은 가장 아름다웠다. 소영과 싸웠던 날에 들려왔던 명령의 목소리는 가장 웅장했다. 야릇한 증오가 담겨 있던 소영의 입술은 나를 가장 무력하게 했다. 낮잠 속에 묻어나온 성욕처럼 나를 옭아맸다.

우리집은 네 마리의 짐승이 각각 다른 광경에게 말을 걸며 사는 공간이었다. 강이는 아무도 없는 베란다 창문에 대고 귀를 쫑긋거렸고, 나는 방에서 옷장 깊숙이 넣어둔 식칼을 꺼내 보았고, 엄마는 거실에서 무릎 위에 천수경을 펼치고 있었고, 아빠는 안방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잤다. 우리는 각자의 어항에서 홀로 싸움을 했다. 소영의 목소리가 떠오를 때쯤에 나는 손가락을 팬티 속에 집어넣었다. 엄마의 중얼거림이 빨라지고 격해져서, 발음이 - P161

더욱 뭉개질 즈음에는 흥분 상태가 되었다. 아이들의 시선 속에서 주먹질을 해댔던 나의 모습을 떠올리다가, 숲속에서 발가벗겨졌던 나의 몸을 떠올릴 즈음이면 오르가슴이 찾아왔다. 식칼이 나의 살을 뚫고 튀어나온 가시처럼 느껴질 때, 나는 소영을 향해 달려들 것이다. 나를 찌르는 심정으로 소영을 찌를 것이다. 소영의 옷이 피로 물든다. 소영은 쉽게 쓰러진다. 나는 멈추지 않는다. 소영의 이목구비는 모두 빨간 구멍이 된다. 내 운동화에 붉은 물이 든다.
‘읍내동 사는 주제에.‘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빨갛게 펼쳐지던 강이의 지느러미처럼 몸이 두 배는 부풀어올랐다. 나는 지느러미로 방안을 가득 채웠다. 방안을 떠다니다 잠이 들었다. - P162

나는 최선을 다했다. 소영도 그랬다. 아람도 그랬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떠나거나 버려지거나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 이게 우리의 최선이었다. 나는 이제 읍내동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읍내동을 벗어나고 싶었던 나의 소원도 이상한 방식으로 도래해 있었다. 언제 그칠지는 알 수 없지만, 쉽게 녹아 사라지진 않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이상하고, 무섭고,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좋은, 함박눈이었다. - P17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