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스스로를 정의해 보려고 질문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불완전한 괴물‘이라는 대답이 따라 붙었다. 나라는 존재는 파괴적으로 무능력해서, 자신을 망치는 식으로만 완전해지는 듯했다. 앞으로도 책에 쓰인 대로 망해 가겠지, 충동과 우울을 뭉쳐 공기놀이나 하며 살겠지 싶었다.
스티브 잡스나 에디슨도 ADHD라지만 위안이 되지는 않았다. 내가 아이폰이나 전구에 버금가는 발명을 하지 않는 이상, 그들과 동등해진 느낌에 기쁠 수는 없을 것이었다. 희망이 옅어질 때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싶었다. 작가가 한국의 미혼 여성 ADHD이고, 자기애로 가는 걸음마 중이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없었다. 세상에는 ‘네가 무엇이든 소중하고 아름답다‘라는 식의 낙관이 유행했지만 내게 적합한 안심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혼자 울던 사람은 쉽게 웃는 방법을 경계하게 되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난 괜찮지 않았고, 몇 년째 도망다니며 그저 삶을 유예하는 중이었다.
다른 ADHD들도 나처럼 새하얀 밤과 깜깜한 낮을 보내는지 궁금했다. 친근하고 정중하게 안부를 묻기 위하여, 일단 나의 이야기를 썼다. 모자란 글들을 초대장 삼아 전송할 - P10

수 있다면, 나의 해묵은 패배감도 즐거운 파티의 호스트가 될 것이었다.
책의 마지막은 해피 엔딩이었으면 하는 마음에 내 질환들을 무작정 사랑하려고도 해 보았다. 하지만 긍정은 홍정영역이 아니었다. 책다운 기승전결보다는 내가 여기 있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살아 낸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네모난 책장에서 만난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마모시키며 둥글어진다면 그제야 의문 없이 기쁠 것 같았다.
기뻐 본 적이 별로 없어 기쁨을 설계하려는 시도가 낯설었다. 모든 글을 지우고 숨고 싶은 충동에 자주 시달렸다. 하지만 쓰다 보면 슬픔과 삶의 주종 관계가 전복될 것임을 믿었다. - P11

세상은 양쪽으로 봐야 좀 더 재미있는 곳이다. 자꾸 깜빡깜빡 잊고, 아주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어버리는 내가 예전에는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망각이 신이 주신 선물이고, 나는 남들보다 좀 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든 것 없이 가벼운 인생‘은 관점을 바꾸자 ‘잊음으로써 가뿐해지는 인생‘이 되었다. 나는 계속 사사로이 절망스럽겠지만, 그것들이 지속되지 않기에 결국은 행복해질 것이다. - P19

지금 내 좌우명은 ‘뭐 어때ㅑ용‘이다. ‘뭐가 어때요‘가 아니고 오타 그대로 ‘뭐어때ㅑ용,‘ 별 뜻 없지만 그 어떤 규칙성도 찾아볼 수 없는 배열이 내 인생과 닮은 것 같다. 지금도 심각한 열등감이나 불안이 몰려올 때마다 저 말을 떠올린다.

ADHD라도 뭐 어때ㅑ용.
또 지각했어도 뭐 어때ㅑ용.
맨날 돈이 없어도 뭐 어때ㅑ용.
끝맺을 말이 마땅치 않아도 뭐 어때용! - P49

ADHD 진단 후, 너무 충격을 받아 내게 쏟아지는 타인의 피드백을 전부 수용하려 들었다. 평판 수집가처럼 굴면 - P100

서 시분초 단위로 뭔가를 개선하려 했다. 하지만 나의 큰 실수는, ADHD가 아닌 모든 인류를 정상인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단지 ADHD가 아닐 뿐 다들 제각기 미쳐 있는 세상이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럴 땐 우리의 주특기인 ‘잊기‘와 ‘관심 끄기‘를 사용해 안전해지자. 일단 안전해야 행복도 있으니 말이다. - P101

가끔 ADHD란 존재하지도 않고, 약도 치료도 정신과의 상술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쭈그려 앉아 껌 떼던 순간이 떠오르곤 했다.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는 단체생활을 못 하던 내가, 자기혐오를 방패 삼던 10대의 내가 껌 대신 처방전을 뗐더라면 인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회한이었다. 지금 여상히 삼켜 대는 알약이 그때도 주어졌더라면 나는 밖으로 나도는 대신 내 안으로 내달렸을지 모른다. 어 - P148

차피 내가 뗄 껌을 뱉는 친구한테 "야, 이 시발새끼야 다시 안 처먹어?"라고 하는 대신, 아주 차분하게 올바른 환경 미화에 대한 의견을 전할 수 있었을지도. 그럼 서른 살의 나는 동창회에 떳떳하게 나가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ADHD 약을 먹는다고 갑자기 에디슨이나 아인슈타인이 되진 않았겠지만 누군가의 상냥한 친구나 딸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 P149

난 패 주고 싶지만 차마 그럴 수 없는 유형의 가족, 친구, 애인, 상사, 부하직원, 동료로서 사람들 곁에 머물렀다. 듣기로 나의 최악은 ‘변할 듯 변하지 않으며 끝끝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점이라고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제일 싫어했던 말은 고의성에 대한 오해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부족한 행동에 대고 "너 일부러 그러냐?"라고 물어 댔고,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화가 나 있었다. 그 질문을 들으면 머리 뚜껑을 열고 속을 보여 줘서라도 결백을 증명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P207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가 싫어하는가? 정신과에 얼마만큼의 편견을 갖고 있는가? 나를 좋아하니까 편견을 버릴 것인가? 어쩌면 불쌍히 여길까? 혹여 내 불행을 행복의 재료로 삼진 않을까? 그러나 최우선 과제는 남을 빼고 오롯이 나 스스로 ADHD의 수용 정도를 재 보는 것이었다. ADHD에 대한 내 생각이 불분명하면 타인의 반응에서도 모호함밖에 느낄 수 없었다. 위로도 위로 같지 않고, 침묵은 반드시 비난 같았다. 사실 그것은 왜곡이다. 나에게 어떤 위로도 무효하니까, 침묵엔 빈 공간이 많으니까, 내 생각이 타인의 입을 빌어 힘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ADHD를 수치로 여기던 시절엔 누구에게 내 비밀을 털어놔도 개운하지 않았다. - P212

굳이 따지자면 ADHD는 개인정보이니 밖을 나돌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는 있다. 메일 주소나 SNS 계정, 휴대폰 번호를 생각하면 공유 대상을 가리기 쉽다. 가족이어도 싫으면 알리지 않고, 처음 본 사람에게도 필요에 따라 말할 수 있다. 정보의 개폐 유무를 내가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중요하다. 내 질환명을 공지 사항처럼, 자유 게시판처럼, 리뷰 이벤트처럼 다룰 것 같은 사람에게는 말을 아껴야 한다. 적재적소에 말을 아끼면 품을 들이지 않고도 나를 아낄 수 있다.
그럼에도 헷갈릴 때는 마지막 관문처럼 나 자신을 돌아본다. ADHD가 탄로날 ‘뻔‘했을 때, ‘실상은 모르지만 왠지‘ 탄로 난 것 같을 때, 나는 내가 믿던 상대방을 끝까지 믿을 수 있는가? "아무한테도 안 말했어."라는 상대의 진술을 집에 와서 되새기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란 물음들이다. 이런 질문들에 명확히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면 비밀을 털어놓지 않는 편이 낫다. 애초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말하고 말한 후에는 그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 P214

마음만 먹으면, 글 속의 나는 천사나 돌고래가 될 수 있었다. 스님이나 노숙자, 다음 대선의 서른 살 대통령도 가능했다. 반대로 대통령이 되길 거부한 서른 살도 쉬울 거였다. 좀 더 넓게 역사를 망가뜨리며 나를 섞자면, 닐 암스트롱 대신 최초로 달에 간 인간이나 여성 걸리버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능하단 생각이 들자, 왠지 절실히도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 그건 이상하게 눈물 나는 감각이었다. 나는 허접하고 추하고 멍청하고 사랑스럽지 않은데 왜 하필 나 자신을 원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남이 되길 원했다면 소설을 시도했을 거다. 하지만 나 자신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에세이를 쓰고 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나를 원했다기보다 나 자신을 구하길 원한 것 같았다. - P217

글을 쓰기 위한 최소한의 여건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내 경우엔 ‘멋짐을 포기하는 태도‘였다. 글에는 별다른 장비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가짐이 곧 장비가 되었다. 나는 예쁜 글이나 화려한 글을 좋아했지만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감수성이나 실력 면에서 가난한 내가 취할 수 있는 강점은 그저 무식한 솔직함 하나인 듯했다. - P218

그래서 나의 부끄러운 글들은 더 시시해지기 위해, 추해지기 위해, 더럽고 서러웠던 기억을 그대로 박제하기 위해 쓰인다. 나쁜 것들은 일단 꺼내어 촘촘히 뜯어봐야만 앞으로 사랑할지 영영 미워할지 결정 내릴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한 번 쓰고 나면, 싫은 것들과 조금 친해진 느낌이 들었다. 두 번 쓰면 악감정과 나는 데면데면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세 번 네 번이 되면 어느새 온갖 부정들도 놓치기 아까운 삶의 일면으로 체화되는 듯했다. - P21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음의 수용소에서 - 개정보급판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2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로이트는 고통을 주는 혼란의 원인을 서로 모순되는 무의식적 동기에서 비롯된 불안에서 찾았다. 반면에 프랭클은 신경 질환을 여러 형태로 분류한 다음, 그중에서 누제닉 노이로제와 같은 몇 가지는 환자가 자기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프로이트가 성적인 욕구 불만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프랭클은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초점을 맞추 - P15

었다. - P16

실제로 담배를 필 수 있는 특권은 카포에게만 주어졌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담배를 배급받았다. 때로는 창고나 작업장 감독으로 일한 사람들이 위험한 일을 한 대가로 담배 몇 개비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 밖의 사람들은 담배를 피울 수 없었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살아갈 의욕을 잃었거나 아니면 남은 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저 ‘즐기려는‘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경우였다. 따라서 어느 날 동료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 P29

수많은 수감자가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 반응이 크게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세 번째 단계는 석방돼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 번째 단계의 특징적인 징후는 충격이다. - P30

정신 의학에는 소위 ‘집행 유예 망상Delusion of reprieve‘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 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불그레한 뺨과 통통한 얼굴을 한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 사람들이 수감자 중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이라는 것과 수년 동안 매일같이 이 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접대반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 P32

이런 일을 당하면서 그때까지 갖고 있던 환상이 하나둘씩 차례로 무너져 갔다. 그다음에는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섬뜩한 농담기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미있게 해 주려고 그야말로 안간힘을 썼다. 어쨌든 샤워기에서 정말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
이런 종류의 이상한 유머 외에 우리를 사로잡는 또 다른 감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궁금증이었다. 그전에도 나는 어떤 낯선 상황에서 제일 먼저 궁금증이 고개를 드는 것을 경험했다. 언젠가 등반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적이 있었는데, 절체절명의 순간 가장 먼 - P40

저 궁금증이 생겼다. 이 위기에서 내가 살아날 수 있을까? 아니면 두개골이 박살날까? 부상을 당한다면 어떤 부상일까?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냉담한 궁금증이 심지어 아우슈비츠에서도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것은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이런 마음가짐을 가꾸었다. 우리에게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결말은 어떻게 될까? 이런 것을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 P41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 조각으로 면도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 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예를 들어 만약 자네들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겼다고 해보자. 나치대원이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면 당장 따로 분류하고, 그다음 날 틀림없이 가스실로 보낼 거야. 자네들은 ‘회교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불쌍하고, 비실비실하고, 병들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고된 육체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회교도‘라고 한다네. 조만간, 아니 대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회교도들은 가스실로 보내지지. 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그러면 더는 가스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 - P45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다음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 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에는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 P47

인간이 더는 어느 것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정서와 감정의 둔화를 의미하는 무감각은 수용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의 두 번째 단계에서 나타나는 징후이다.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은 곧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른다. - P51

당시 나는 막사 맞은편에 있었다.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 P50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 P54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진다. 즉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저녁이 되어 작업장에서 수용소로 돌아올 때 수감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 이제 또 하루가 지났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듣게 된다.
그와 같은 긴장 상태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과제에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필요성과 결합돼 수감자들의 정신세계를 원시적인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밖에서 정신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 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그들의 소원과 욕망은 꿈속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과 케이크,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이런 단순한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꿈속에서나마 소원을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런 꿈들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 P58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나는 동료가 괴로워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던 어느 날 밤의 일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잠을 자면서 몸부림치는 걸 보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평소에도 악몽이나 황홀경에 시달리는 사람을 특히 딱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그 불쌍한 사람을 깨우려고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놀라면서 그를 깨우려던 손을 거두었다. 그 순간 꿈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비록 나쁜 꿈일지라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수용소의 현실만큼이나 끔찍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 끔찍한 곳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이려고 했다니……. - P59

시시때때로 의식을 파고드는 먹는 것과 좋아하는 요리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얼마나 힘든지는 앞에서 얘기했을 것이다. 우리 중에서 정신력이 가장 강한 것으로 알려진 사람도 맛있는 음식을 다시 먹게 될 그날을 그리고 있었다. 단지 맛있는 음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되면 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인간 이하의 상황이 마침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영혼을 파괴시키는 정신적 갈등과 의지력의 충 - P61

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그 사람들은 모른다. 참호 속에서 땅을 파고, 빵이 배급되는(만약 배급이 된다면) 오전 9시 반이나 10시―30분 동안의 점심시간―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를 손꼽아 기다리고, 감독에게―그가 마음씨 좋은 사람일 경우―지금이 몇 시냐고 계속 물어보고, 외투 주머니 안에 있는 빵을 장갑도 끼지 않은 언 손으로 살살 만지다가 손톱만큼 떼어 먹어 보고, 그러다가는 마지막 남은 의지력으로 빵을 도로 호주머니에 넣으면서 오후까지 참겠다고 수없이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는 그런 상황을 말이다. - P62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 - P67

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P68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용소 안에서 행해지는 예술 행위는 어떤 종류의 예술 행위든 간에 어느 정도 기괴한 측면을 띠고 있었다. 수용소 사람들이 예술과 관련된 행위에 깊은 감동을 받는 것은 음울한 현실과 예술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 - P76

이다. - P77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 - P78

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해 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아주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P79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 P82

수용소에서는 자기 목숨이나 친한 친구의 목숨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문제와 관련 없는 그 모든 것들이 가치를 잃었다는 얘기를 이미 했을 것이다. 이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가치가 희생됐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위협하고, 또 그것을 의혹 속으로 내던져 버린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처음에 그를 이용할 대로 이용해 먹다가 육체의 마지막 한 점까지 이용하도록 계획된)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만약 강제 수용소에 있는 사람이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노력으로 이에 대항해서 싸우지 않으면, 그는 자기가 하나의 인간이라는 생각, 마음을 지니고 내적인 자유와 인격적 가치를 지닌 인간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거대한 군중의 한 부분에 불과한 존재로 생각한다. 존재가 짐승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이나 의지가 없는 양떼처럼 무리지어―때로는 여기에 있다가 그다음에는 저기로, 때로는 함께 몰려다니다가 때로는 서 - P86

로 떨어져 다니는―다니게 된다.
그런데 비록 수는 적지만 매우 위험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 무리들은 고문을 하는 것과 남을 괴롭히는 방법에 아주 능통한 자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함치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 대며 무리를 뒤에서 앞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양떼인 우리들은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떼를 지어 무리 한복판으로 슬금슬금 들어가려는 양떼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대오 한가운데로 들어가려고 애썼다. 그러면 행렬 양옆과 앞뒤에 있는 감시병들의 주먹질을 피할 수 있는 여지가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행렬 한가운데에서는 매서운 바람을 덜 맞을 수 있다는 추가적인 이점도 있다.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기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수용소 안에서 가장 절박한 자기 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 법칙은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치 대원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P87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당시 우리에게는 아무런 문서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자기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 환자의 호송을 맡은 사람들이 갖는 관심은 환자의 유일한 소유물, 즉 끔찍한 해골 위에 씌워 놓은 넝마 옷뿐이었다. 호송을 맡은 사람들은 뻔뻔한 호기심으로 호송되는 ‘회교도‘의 외투나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은 것인지를 살폈다. 결국 그들의 운명은 정해진 순서를 따라가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
수용소에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데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 P91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는 일과 어떤 일이든지 앞장서서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운명이 자기를 지배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운명에 영향을 주는 일을 피했고, 대신 운명이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심각한 무감각 현상이 팽배해 있었다. 무감각은 수감자들의 감정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때로는 확실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생사를 가르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때도 운명이 자기 대신 결정해주기를 원했다. 이렇게 어떤 일의 실행을 회피하는 태도는 수감자가 수용소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결정을 내려야 하는 그 몇 분 동안―이런 문제는 항상 몇 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그는 지옥의 고문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다. 탈출을 해야만 할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할까? - P96

수감자들의 무감각이 일종의 방어 기제였다는 것 외에 여기에는 또다른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있었다. 굶주림과 수면 부족(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이 무감각 상태로 그들을 이끌었으며, 수감자들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초조함이 이런 무감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수면 부족은 밤새 이와 벼룩 등에 시달리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전반적으로 보건 - P103

시설과 위생 시설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이와 벼룩이 사람들로 꽉 찬 막사 안에서 무섭게 퍼져 나갔다. 니코틴과 카페인 부족도 이런 무감각과 초조함의 원인이 됐다.
물질적인 요인 외에 정신적인 요인도 있었는데, 그것은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대부분의 수감자들은 열등의식에 시달렸다. 우리는 모두 과거에 ‘대단한 사람‘이었거나 혹은 스스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찮은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일반적인 수감자들은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계층이 하락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현상은 수용소라는 사회의 구조를 관찰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다른 수감자보다 ‘우월한‘ 수감자, 카포, 요리사, 군수 창고 관리인, 보안대원은 대다수 사람들과는 달리 계층이 하락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상승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중 몇몇은 약간의 과대망상 증세까지 보이기도 했다. 혜택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와 불평을 하는 대다수 사람들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것을 표현하는데, 이것이 때로는 농담의 형태를 띠기도 했다. 예를 들어 한번은 어떤 사람이 한 카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는 것을들은 적이 있다.
"상상해 봐! 내가 알고 있기로 저 사람은 그전에 큰 은행 총재에 - P104

불과했거든. 그런데 지금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으니 얼마나 출세한 거야!" - P105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정신 의학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 정신 병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은 인간이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이 만들어 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 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라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소 체험으로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 - P107

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 - P108

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P109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이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 - P110

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예만으로도 인간이 지닌 내면의 힘이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해 그 자신의 존재를 높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비단 강제 수용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난다. - P111

우리는 앞에서 수감자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 - P113

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 안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내적 소유‘를 이룰 수 있으며 또 이루어야만 하는 것일까? - P114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 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정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 현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 감각―내면의 시간―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 역시 기이한 ‘시간 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자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얘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 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이었던가! - P115

삶이 날아간 것 같은 이런 느낌은 다른 요인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갇혀 있어야 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사실 수감자들이 가장 뼈저리게 느끼는 부분이다)과 갇혀 있는 공간이 너무 협소하다는 것이 그 요인이다. 철조망 밖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아주 멀리 떨어있는 것, 손이 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인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정상적인 삶은 수감자에게는 유령과 같은 것이었다. 만약 그가 바깥 세계를 볼 수 있다면, 그에게는 그것이 마치 저세상에서 온 사람이 바라보는 이승과 같이 비쳐졌을 것이다.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과거 - P116

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 낸다.
평범하고 의욕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 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 P117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인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 병리적 상처를 정신 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 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수감자 중에 몇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스스로 그런 목표를 찾아내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Sub specie aeternitatis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 P118

미래―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수용소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은 이런 징후에 아주 익숙해져 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별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친구 때문에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간청과 주먹질, 위협도 효과가 없다. 그냥 누워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만약 이런 위기가 병 때문에 생긴 것일 경우 그는 병실로 옮겨지는 것을 거부하고, 그 밖에 도움에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 P120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이 말은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심리 치료와 정신 위생학적 치료를 하려는 사람에게 귀감이 되는 말이다. 수감자를 치료할 기회가 있을 때 그들이 처한 끔찍한 현실을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려면 그들에게 살아야 할 이유, 즉 목표를 얘기해 주어야 한다. 슬프도다! 자기 삶에 더 이상의 느낌이 없는 사람, 이루어야 할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그리고 의미도 없는 사람이여! 그런 사람은 곧 파멸했다. 모든 충고와 격려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하는 전형적인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 P123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 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 P124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그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
우리 같은 수감자에게 이런 생각들은 현실과 아주 동떨어진 사색적인 이론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이 생각들은 우리가 살아서 그곳을 나올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때에도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었다. 오래전에 우리는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단계를 통과했다. 그 순수한 물음은 가치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통해 어떤 목표를 성 - P125

취하는 것으로 삶을 이해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받는 것과 죽어 가는 것까지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 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됐다.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P126

나는 아직도 두 개의 자살 미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두 사건은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자살 동기를 털어 놓았다. 그것은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내세우는 것, 즉 삶으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할 게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두 사람에게 인생이 그들로부터 여전히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그중 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의 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이는 지금 다른 나라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또 다른 사람에게 그 대상은 사람이 아닌 일이었다. 과학자였던 그 사람은 책을 써 왔고 아직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또 다른 사람의 - P127

아이, 그 아이에게 애정을 베푸는 데 있어서 아버지 자리를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각각의 개인을 구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런 독자성과 유일성은 인간에 대한 사랑처럼 창조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일단 깨닫게 되면, 생존에 대한 책임과 그것을 계속 지켜야 한다는 책임이 아주 중요한 의미로 부각된다. 사랑으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나, 혹은 아직 완성하지 못한 일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자기 삶을 던져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 P128

이제 강제 수용소에서의 정신 의학,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됐다. 풀려난 사람들의 심리이다. 해방의 체험을 얘기하는 것은 당연히 개인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극도로 긴장했던 며칠이 지난 후 수용소 정문 위에 흰 깃발이 펄럭였던 그날 아침의 경험담 중에서 하나를 소개하겠다.
정신적 흥분 상태에 이어 전체적인 긴장이완 상태가 찾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미친 듯이 기뻐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그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는 피곤한 발걸음으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수용소 밖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보았다. 우리에게 고함을 치며 명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피하려고 자맥질하는 오리처럼 몸을 움츠릴 필요도 없었다. 세상에! 감시병들이 우리에게 담배를 권하고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그들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재빠르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 - P137

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천히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곧 다리가 아프고 구부러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절뚝거리며 걸었다. 자유인의 눈으로 그전까지 미처 보지 못했던 수용소 주위를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면서 얼마나자주 이 단어를 입에 올렸는지 이제는 그것이 의미를 잃고 말았다.
현실이 우리 의식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자유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드디어 꽃이 만발한 초원에 이르렀다. 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을눈으로 보고 알았지만, 거기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으로 불꽃 튀는 것 같은 기쁨을 느낀 것은 꼬리에 여러 가지 색깔의 깃털을 단 수탉을 보았을 때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모두 막사에 모였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밀하게 물었다.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부끄러운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 P1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 청년 김원영의 과감한 사랑과 합당한 분노에 관하여
김원영 지음 / 푸른숲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장애인은 바로 그 ‘미물‘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사회적 계급이 없어진 시대에 아름답고 건강한 몸은 모든 것을 지배한다. 그렇지 못한 몸의 극단에 장애인이 있고, 그 가운데 무수히 많은 몸들이 있다. 유약한 몸, 병에 걸린 몸, 추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몸, 가난에 찌든 몸, 그러한 몸을 가진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 또한 그 모든 낙인이 빨간 도장으로 새겨진 몸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주 오랜 기간 노력했다. 그 결과 대학에 왔고, 대학원에 들어왔으며, 지금 이 순간도 ‘미물론‘의 객체가 되지 않기 위해 불안에 떨고 있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할 수밖에 없다. 나의 몸, 우리의 몸, - P6

가난과 질병과 추함에 빠져들까 불안해하는 몸을 우리는 극복할 수 있는가? 나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음에도 여전히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알게 된 것 한 가지는 장애인은 장애를 결코 극복할 수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순간 이미 장애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누군가 나에게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나는 모순된 존재가 될 것이다. 장애를 극복했다면서 왜 나는 여전히 장애인인가.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장애인인 상태로 존재하면서도 내가 세상의 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서는 왜 안 되는가.
나는 헬렌 켈러나 스티븐 호킹 같은 사람이 전혀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대부분이 그렇다. 우리는 대개 자기 삶에 주어진 여러 조건들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외모, 성장 환경, 부모의 가난, 질병, 장애, 성별 등은 우리가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종종 그런 조건들을 극복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세상은 그들을 가리키며 왜 너희는 그들처럼 극복하지 못하느냐고 손가락질을 한다. 하지만 극복하는 것만이 우리가 그런 조건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우리의 조건들을 세상의 중심에 오게 하는 도전과 연대, 상상력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부분은 아무런 도움 없이 장애와 가난을 극복하고 철저한 자기 관리와 다이어트로 미인의 대열에 끼어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 P7

이 세상에서 ‘미물‘로 분류된 많은 사람들은 언제나 ‘쿨하게‘ 세상과 대면해왔다. 장애인들은 장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태도로, "나는 장애인이지만 얼마든지 행복하고 내 장애를 사랑하며 내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한다" 라고 말하며 살아왔다. 우리가 자기 마음을 단련하고, 타인에게 감사하며 사는 삶은 분명 아름답다. 그런 태도는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이 순간도 어딘가에서 작성되고 있는 미물의 목록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나는 이제 우리가 우리 내부에서 끓고 있는 어떤 뜨거운 것들과 정면으로 마주했으면 좋겠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 나아가 이 사회에서 열등하고 가진 것 없는 자로 묘사되는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순수함‘, 어떤 모욕과 시선에도 항상 당당하고 ‘쿨해야‘ 한다는 우리 내부와 외부의 요구. 그것들이 정말 우리를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것인가?
장애인 그리고 이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는 수많은 ‘미물‘들은 모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존재다. 연애를 하고, 섹스를 하고, 성공을 욕망하고, 상대의 멸시와 모욕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인간의 욕망과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상대가 한쪽 뺨을 때리면, 그 힘에 굴복해 나머지 뺨을 내밀면서도 "그래, 나는 참 쿨하고 착한 사람이다" 라고 위안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세계는 병약하고 느린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주제넘게 굴지 말라고 충고했다.
나는 이제 ‘야한‘ 장애인, 뜨거운 인간이 되고자 한다. 내 피는 지금 이순간도 찬란한 태양 아래서 세상과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세상과 모든 것 - P8

을 걸고 사랑하라고 부추긴다. 절대로 ‘싸가지 없이‘ 굴지 못했던 미약한 존재들, 세상에서 영원히 찾아주지 않을까 봐 자신을 숨겨야 했던 존재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것조차 쉽게 할 수 없었던 존재가 이제 감히 ‘섹시함‘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우리는 쿨하기(cool)보다는 오히려 뜨거운(hot) 존재가 되어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그 권리를 획득한 자만이 ‘야한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야한 장애인이 되려는 자만이 그 권리를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분명 과거에 비해 진보한 시각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 즉 장애인을 비롯해 가난하고 질병에 시달리며 추한 외모와 유약한 체력 때문에 사회의 무대 중앙으로 영원히 오르지 못하는 존재들이 우리 사회의 지하와 구석구석에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의, 아니 우리의 본격적인 ‘무대 등장‘을 위해서 나는 이제 야한 미물들의 시대를 열망한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의 내면적 투쟁, 뜨거운 열정과 관용, 연대의 감정으로 타인을 지지해온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함께했다. 나는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가난과 질병과 장애를 지닌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야한 이야기를. - P9

외부에서 누군가를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은 한없이 친절하고 헌신적이지만 자신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법이다. 그저 잠시 자기 세계의 문제들을 미루어두고 새로운 공간 - P45

의 정취를 즐긴다. 도시인들이 여름 한때 시골 마을에 찾아와 풍경을 즐기며 순박하고 한적한 삶에 향수를 느끼지만 그 마을에 정착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처럼, 그들에게 그곳은 ‘풍경‘으로 남아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 풍경을 현실로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바람처럼 휘몰아쳐 왔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외지인들의 방문은 삶의 빈자리들을 뒤로하고 다시 ‘현실‘을 힘겹게 살아내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오히려 외지인들의 친절함이 자신을 다른 세계의 인간으로 전제했을 때만 나올 수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더욱더 멀어지는 두 세계의 간극만을 체험할 뿐이다. - P46

무엇보다 나는 장애를 이해한다는 것이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와 지식을 몸에 익히거나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한 헌신과 배려에 기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세상에 대해 특별히 이타적이거나 헌신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신과 다른 존재들이 함께 만들어갈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가치를 찾아내는 데 능숙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강력한 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는 명륜이와 함께 보낸 고교 생활에서 그러한 가능성을 발견했고, 사람을 섣불리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 대학에 진학해 온갖 봉사활동을 찾아다니고 진보적인 정치 담론을 떠들어도 내가 전혀 다가갈 수 없는 확고한 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내가 그다지 당황하지 않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 P106

기자들은 남들에게 들려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 계단 앞에서 위를 바라보며 탄식하는 모습 등을 카메라에 담기 원했다. 그래야만 문제가 제대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왜 내가 어차피 올라가지도 못할 계단 앞에서 하염없이 위를 바라보며 탄식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연출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거짓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비극을 꾸며내 세상을 울리고, 거기서 일정한 감동을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살아야 하는지 나는 답답했다. - P115

나는 장애인이 맞다. 그러나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과 "나는 장애인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나는 장애인 중 50퍼센트가 초등학교만 졸업하는 대한민국에서 서울대학교에 다니는 대학생이었다. 나의 자부심과 나의 꿈 앞에서 또다시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고 싶지는 않았다. 추락 - P116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장애와 아무런 관련 없이 살 수 없을까. 그냥 휠체어를 타고 다니기는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내가 장애인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의 능력, 직업, 학식, 유머, 경쾌함 같은 것을 갖출 수는 없을까.
그러나 세상은 내게 끊임없이 "나는 장애인이에요. 학교에 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요" 라는 말을 듣기 원했다. 그리고 몇몇 선배들이 찾아와 내게 그런 목소리를 함께 내자고 제안했다. 나는 연극 동아리에서 연극을 하고 싶었고, 밴드부에도 들고 싶었으며, 두꺼운 전공 책을 옆구리에 끼고 캠퍼스를 활보하면서 저녁엔 과외를 하고 여자 친구의 집 앞에서 몇 시간이고 그녀를 기다리고 싶은 스물두 살의 신입생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그토록 어려운 ‘커밍아웃‘을 강요당해야 하는가. 그러나 내게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나는 연극이나 연애는커녕 기숙사에서 컵라면을 사먹을 수조차 없었다. - P117

장애인은 사회적 소수자들 중에서 최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장애인 인구는 공식적으로 2백만 명이 넘고, 비공식적으로는 전체 인구의 10퍼센트에 달할 것이라는 보고가 있다. 게다가 장애인의 범주는 확정적이지 않다. 장애와 건강한 몸의 구분은 그 자체가 모호하며 그 가운데에는 무수히 많은 몸의 상태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장애인 인권 운동은 사실 특정한 사회 집단의 인권에 대한 운동이라기보다는 취약한 몸, 불균형한 몸, 병약한 몸, 노화한 몸을 포함한 우리 모두의 일반적인 몸에 대한 새로운 권리를 확보하는 과정이다. 장애인 인권 운동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정당성에 동의한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게 해달라는 주장은 동성애 부부가 아이를 입양하게 해달라고 하거나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병역 거부권을 달라는 주장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더 온건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장애인들이 그 권리를 위해 버스나 지하철을 멈췄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시위에 참여한 비장애인들을 연행한 후 "왜 순진한 장애인들을 꼬여서 이런 일을 하게 만드느냐"라고 따지던 경찰들도, 이제는 장애인들을 직접 끌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휠체어로 갈 수 있는 화장실도 없는 경찰서에서 장애인들이 밤을 새는 일이 빈번해졌다.
그럼에도 장애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2006년에는 중증 장애인들의일상생활을 지원하는 활동 보조인 제도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한강대 - P123

교를 다섯 시간 동안 기어서 건너는 시위를 감행했다. 이처럼 위험하고 과격한 시위를 만드는 힘은 무엇인가? 장애인 운동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리더이자 지체장애인인 박경석은 장애인 이동권 운동 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물러서지 맙시다. 지금 여기서 물러서면 또 집구석에서 수십 년씩 처박혀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중증 장애인들이 왜 엄청난 사회적 비난과 법적인 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리로 나와 버스와 지하철을 세우고, 한강대교를 다섯 시간 동안 기어서 건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물러서면 "수십 년씩" 집구석에 처박혀야 하는 삶이 기다린다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이유다. 그 어떤 것보다 절박한 이유 앞에서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 P124

위와 같은 근거를 바탕으로 장애의사회적 모델에 우리의 관점을 고정시 - P128

켜보면, 이제 더 이상 장애는 누군가의 배려로 간신히 극복할 수 있는 개인의 슬픈 비극이 아니다. 장애인은 병원이나 수용 시설에서 살아가야 할 ‘환자‘가 아니라, 그 상태 자체가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정체성이 된다. 그러므로 장애인도 세계 속에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주체적인 권리를 갖는다. 이렇게 장애를 사회적 모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장애인들을 사회로부터 분리하지 않고 통합해야 한다는 것, 치료사나 사회복지사의 지시가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 장애가 단지 개인이나 가족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공동으로 노력해야 할 문제라는 것 등이 전 세계의 장애인 운동과 사회과학적 연구들이 성취한 장애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었다.
지금까지 소개한 장애를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거리로 뛰쳐나올 용기를 주었다. 장애가 개인의 운명적인 비극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사실, 그래서 나는 누구의 동정이나 구휼에 의지해 살아가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사실은 장애인들을 뜨겁게 만들었다. 나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 힘입어 장애인들이 "장애는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사회로 뛰쳐나오는 시기에 대학에 입학했고, 그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다.
여전히 나 혼자서는 옴짝달싹할 수도 없는 캠퍼스의 한가운데서 나는 그렇게 중증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덩그러니 놓여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나는 슈퍼맨이 되고 싶었다. 지체 1급 장애 - P129

인으로서 서울대를 졸업하고 보란 듯이 성공하는 것, 삶을 극복하고, 장애를 극복하고, 희망과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기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적을 일으키는 동안 타야 할 대중교통이 필요하고, 기적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이 필요하며, 기적을 만들어내는 동안 먹어야 할 컵라면도 필요하다. 나는 결국 장애인권연대사업팀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는 꿈과 희망보다 당장 앞에 놓인 계단과 턱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나는 세상으로 뛰쳐나온 그 시점의 중증 장애인들처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P130

학교의 시설 몇 가지를 바꾼 건 우리가 얻은 것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더 중요한 건 서울대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 그리고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장애를 극복했다"라며 보내는 찬사에 취해 있던 장애 학생들이 자신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과연 장애를 ‘극복‘ 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극복할 수 있기나 한 것인가. 장애는 삶에서 명백히 불편하고 어려운 과제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히 나와 나의 부모가 져야 할 전생의 ‘업’과 같은 것인가. 이러한 질문과 독서를 거듭하면서 우리는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원칙들을 나누었고 사회 곳곳에서 장애인들의 현실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는 중증 장애인들과 만났다. 우리는 점차 각자의 몸을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시작 - P131

했다. 이것은 단지 장애 학생들에게만 나타난 변화는 아니었다. 비장애 학생들, 발목이 다쳐서 혹은 체력이 약해서, 여성이어서 경험했던 각종 억압이 작은 동아리방의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나왔고 우리는 그것을 다양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했다.
장애인권연대사업팀의 활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장애 학생들도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 그 권리는 대학이 베푸는 시혜가 아니므로 장애 학생들도 일반 학생들처럼 학교에 자신의 교육적 요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전제가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그 핵심 원칙은 바로 전 세계의 수많은 장애인들이 제시했던 것과 일치했다. ‘장애 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통합된 교육 환경에서 독립적으로 자신의 생활을 결정할 수 있어야 하며, 학교는 이러한 것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게 나는 ‘슈퍼 장애인‘이 되고자 했던 욕망을 점차 버렸다. - P132

골형성부전증 또는 장애 그 자체는 이미 내 몸이며 나 자신이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이것 자체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투쟁 끝에 위험하고 심각한 상태를 벗어났고,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내 몸의 독특한 운용 방식을 구성했으며, 그 자체로 나 자신이 되었다. 이것은 비정상적인 위험 상태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나‘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과 신체를 이분법적으로 가르는 데카르트의 사유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는 몸 그 자체이고, 몸의 경험과 기억에 의해 기질, 재능, 성격, 감정의 일부가 결정된다. 나는 팔꿈치에 새겨진 검은색 굳은살로 내 과거를 기억한다. 휘어진 내 다리가 곧 내 삶이다. 골형성부전증이 아닌 몸은, 더 이상 김원영이 아니다. - P139

우리는 장애와 질병으로부터 건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질병의 경험을 건강의 담론으로부터 지켜야 한다. 모든 인류는 질병에 상시적으로 노출되며, 노인이 되면 결국 ‘장애‘라고 공인될 정도의 몸 상태로 변화한다. 이 모든 것이 ‘비정상적인 일탈‘이라고 규정되고, 제거되어야 할 상태가 된다면 인간은 자기 몸을 긍정할 순간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 모두 예비 장애인입니다"라는 표어를 통해 장애 문제를 보편화하려는 것은 개인적으로 촌스러운 접근이라고 생각하지만(우리가 장애인이 될 ‘가능성‘ 때문에 장애인의 권리를 생각해야 한다는, 다소 비굴한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이 사실상 우리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장애와 질병을 소거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현실적인 가정 하에 이상적인 몸을 상상하고, 그것에서 다소라도 어긋나는 순간 사회의 외부로 떨어져나가는 이 불안정한 세 - P140

계에 대한 반성이 절실하다. 많은 사람의 협력, 몸의 특별한 운용방식에 대한 관용과 유연한 인식이야말로 질병과 장애를 건강이라는 단어의 대척점에 서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 P141

친절하게 웃음을 흘리며 봉사활동을 오던 기업과 길에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이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어느 순간 진한 펜을 들고 내 앞에 선 하나를 분명하게 긋는다. 학교는 받아주지 않는다. 직장은 면접의 기회조차 주지않는다. 장애인 관련 기관이 설치된다고 하면 엄청난 반대가 지역 전체에 휘몰아친다.
길을 가다 만나는 장애인에게 천 원짜리를 쥐어주며 어깨를 두드리고, TV에 등장하는 딱한 사정을 가진 이들에게 ARS로 성금을 보내는 - P154

이 세계는 자신의 영역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오는 이질적인 존재들에게는 그 앞에 선을 그어 ‘분리‘의 뜻을 확실히 한다. 그곳에서 바로 비정상의 세계가 구축된다. 정상과 비정상은 이처럼 분명하게 다른 두 세계로 분류된다. 이렇게 분류된 세계는 자체적으로 그 체계를 반복 재생산하면서 완전히 다른 인간들의 삶을 만들어낸다. 그 한쪽에 건강하고 열정적이며 좋은 직업과 매력적인 연인을 가진 내 친구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무 곳에도 갈 수가 없어 집을 지키는 나의 또 다른 친구들이 있다. - P1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언니네 방 -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 갤리온 / 2006년 3월
평점 :
품절


비밀을 공유하는 특별한 몇 명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것이 비밀이 되는 순간부터 관계의 밀도는 너무 높아져 서로를 종종 질식시키기도 했다.
(...)
비밀은 아주 특별하고 소중해서 혹은 너무 충격적이고 놀라워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니라, 편견과 사심 없이 진심으로 내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비밀이 되는 이야기들이다. 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이야기를 들어 줄 적당한 사람을 만나기가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서 비밀은 점점 무거워진다. 하지만 만약 잘 들어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그 이야기들은 비밀도, 나를 설명하는 유일하고도 특별한 것이 되지도 않으면서, 그 이야기들을 가만히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게 될 것이다. - P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다른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친구가 데리고 나타난 특이한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낳아 키우고 나와 18년을 한집에서 살았던, 내 반쪽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85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 - P286

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다른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 P287

우리는 거의 매일 이른 저녁을 먹고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기어들어가서 열네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을 잤다. 우울처럼 슬픔도 가장 간단한 일조차 해내기 힘들게 했다. 이 나라의 온갖 좋은 것이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우리는 멋진 경관에 무감각했고 무감동했으며 조용히 비참했고 서로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 P290

"네 엄마가 나한테 경고하더구나. 네가 날 제멋대로 휘두르게 놔두지 말라고."
아빠는 이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자기가 나한테 하고 싶던 말을 하려고 죽은 사람의 입까지 빌리다니. - P296

"그래요? 엄마가 아빠 얘기는 얼마나 많이 했게요, 참." 내가맞받아쳤다. "밤을 새워도 다 못 할 정도지만 저는 안 할래요."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빠를 깨진 접시에 비유했다고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지는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머릿속에 그런 말들이 계속 떠다녔다. 나도 안다. 내가 자라면서 받아온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를 가장 사랑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어쩌면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을, 그때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6개월 동안 완벽한 딸이 되려고, 10대 때 일으킨 말썽을 벌충하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그런 내게 아빠는 마치 그 말이 엄마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한 것이다. 그 아이를 조심해, 당신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할 거야, 라고. 아빠가 편안한 아파트 침대에서 잠자는 3주 동안 병원 소파에서 잠을 잔 사람이 바로 나란 걸 엄마는 알았을까? 요강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해대는 아빠 대신 쭉 그걸 비운 사람이 나라는 것은? 엉엉 우는 아빠 때문에 나는 번번이 감정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 P297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분류하는 일은 고된 노역처럼 느껴졌지만 다 끝내고 나니 기나긴 고생 끝에 마침내 어떤 출구에 도달한 듯한, 긴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물건이 부모 잃은 아이처럼, 물체, 짐짝처럼 보였다. 한때는 존재이유가 있었던 것들이 거추장스러운 무언가로 변 - P314

해 있었다. 특별한 식사를 위해 고이 모셔둔 볼들은 이제 그냥 정리해야 할 그릇이, 내 갈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었다. 어렸을 때 마법의 단지인 척하면서 갖고 놀던, 내가 상상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초항아리는 이제 또하나의 버릴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 P315

아주머니가 요리법을 꽁꽁 숨겨 내겐 오묘해 보이기만 하던 음식을 정복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원한 전부였다. 몇 날 며칠을 화려하고 값비싼 - P319

고기 요리와 갑각류 요리 그리고 버터와 치즈와 크림 배합을 달리한 갖가지 감자 요리를 만든 끝에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진짜로 원한 요리는 바로 이것이란 걸. 이 담백한 죽은 난생처음으로 내게 깊은 만족감을 준 요리였다. 망치 여사는 온갖 비법을 한 단계 한 단계 전수해주었다. 마치 어느 때고 의지할 수 있는 디지털 후견인처럼 내가 몰랐던 지식, 의당 내 것이어야 할 지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고는, 보드라운 죽이 엄마의 갈라진 혀를 살포시 감싸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따뜻한 액체가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뒷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 P320

나는 이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졌다. 이모가 유진에 다녀간 뒤로 이모와 좀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언어 - P325

의 장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내가 나누고 싶은 감정의 뉘앙스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더는 이모의 생활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이모와 이모부의 아파트는 죽어가는 손님들을 위한 회전문이 되다시피 했다. 이제 엄마는 돌아가셨고, 이모에게 그 어두운 시간을, 이모가 짊어져야 할 것처럼 느꼈을 그 무거운 짐을 상기시키는 일이야말로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 P326

이제 모두 유령이 되었다. 가운데에 있는 사람만 빼고, 나는 나미 이모의 시선으로 사진을 보려고 했다. 사진에서 가족들의 형체가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과거로 돌아가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꿔놓았을 때처럼.
엄마는 나미 이모가 점쟁이를 찾아간 이야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점쟁이 말이, 이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이라 했다.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쉴 곳이 되어주고, 가만히 서서 누구든 자기 아래에 눕는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 - P327

줄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매양 발밑에서 작은 도끼가 밑동을 찍으면서 천천히 이모의 기운을 빼간다고.
그런 말을 들었던 나로서는 내가 그 작은 도끼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모는 자기 가정만의 조용하고 고요한 사적인 공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나는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모는 유일하게 남은, 내 심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 P328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벽에다 머리를 들이받고 싶은심정이었다.
"울지 마, 미셸."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자 이모가 말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엄마가 항상 제 엄마가 죽었을 때나 우는 거라 했거든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도 노상 그렇게 말했어." 이모가 말했다. "너랑 네 엄마 똑같네."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항상 말도 못하게 잔인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토가, 엄마만의 독특한 양육법에서 나온 거라고 믿었다. 내가 울고불고 떼를 쓸 때마다, 무릎이 까지거나 발목을 접지를 때마다, 남자친구와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헤어지고 내게 온 기회를 놓치고 나의 평범함과 단점과 실패를 마주할 때마다 엄마는 그 좌우명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다. 라이언 월시가 플라스틱 망치로 내 눈을 가격했을 때도. 전 남자친구가 먼저 내게 이별을 고했을 때도. 우리 밴드가 청중이 한 명도 없는 공연장에서 형편없는 연주를 했을 때도. 엄마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다. 제발 지금 내 기분을 그렇게 뭉개버리지 말아줘, 라고. - P337

제발 나를 안아달라고, 그 기분 속에 빠져 있게 내버려둬달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절대 그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 비정한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든 나만큼이나 그 말을 싫어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바로 우리 엄마가 밤낮으로 그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이었다니.
"제가 어렸을 때 엄마가 말해줬어요. 아기를 없앤 적이 있다고요." 낙태라는 단어를 몰라 나는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비밀이 참 많았어요."
"아이 노우." 이모가 영어로 말했다. "아이 싱크…… 유어 맘싱크…… 컴 투 코리아 투 하드 위드 투 베이비."
이모는 두 아기를 양팔에 하나씩 안고 있는 몸짓을 해 보였다. 오래전에 엄마가 내게 들이퍼붓듯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내가 낙태의 원흉이라고 절대 믿지 않았지만 그에 상반되는 이유도 찾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나는 그저 어딜 간다는 게 마냥 신나기만 했지 그 여행이 엄마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나라가 엄마의 얼마나 중요한 일부였는지는 까맣게 몰랐다.
나는 궁금해졌다. 만일 엄마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세 사람, 그러니까 아빠와 나미 이모와 나에게 엄마가 남겨둔 10퍼센의 부분이 제각각 다르다면, 우리가 같이 그 숨겨진 부분을 짜맞추어 엄마의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지. 과연 내가 엄마의 - P338

모든 걸 알게 될 수 있을지, 엄마가 또 무슨 단서를 남겼을지도. - P339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모와 같이 음식 먹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뜻깊은지를 이모에게 설명하려 애썼다. 음식을 통해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되살리려고 애써왔다는 것도, 계씨 - P340

아주머니 때문에 내가 진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느끼던 순간도. 내가 된장찌개와 잣죽을 직접 만들었던 것은, 엄마를 돌보는 데 실패한 기분을 심리적으로 만회해보려는 노력이자 한때 내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고 느낀 문화가 이제 위협받는 기분이 들어 그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것도. 하지만 적절한 단어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번역 앱에 기대기에는 문장이 너무 길고 복잡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그냥 이모의 손만 그러잡았다. 우리 두 사람은 얼음처럼 찬 새콤한 소고기 육수에 담긴 국수만 계속 후루룩거리며 먹었다. - P341

피터와 내가 여행 다닌 장소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고 싶어한 곳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병원 격리 생활로 - P344

변해버리기 전에 엄마가 나를 데려가려 한 곳이었다. 엄마가 나와 함께 만들려던 마지막 추억이고, 엄마가 나를 키우며 내가 사랑하도록 만든 것의 원천이고, 내가 기억했으면 하는 맛이고, 내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었다. - P345

대체로 나는 꽤 잘 적응했다. 대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이며 어른의 제대로 된 직업이며 모든 게 너무 낯설었지만, 바꿀 수 없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몰입하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지난날이 떠올라 괴로웠다. 뜬금없이 고통스러운 생각의 고리에 불이 붙으면 그동안 억누르려 애쓰던 모든 기억이 내 마음 맨 앞자락으로 훌렁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엄마의 희뿌연 혀, 보라색 욕창 자국,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엄마의 무거운 머리, 저절로 번쩍 떠진 눈, 하지만 내면의 비명이 텅 빈 가슴을 뚫고 나와 온몸을 소용돌이치며 뒤흔들 뿐, 그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 P353

내가 한 음식은 모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각각의 향과 맛이 잠깐이나마 나를 멀쩡했던 우리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닭 - P354

육수를 내서 만든 칼국수는 어느 날 오후 쇼핑을 마치고 명동교자에서 점심을 먹었던 때로 데려다주었다. 줄이 얼마나 길던지 계단을 하나 다 채우고도 문밖으로 나와 건물을 한 바퀴 휘감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 집 칼국수는 진한 소고기 육수와 전분기 많은 국수 때문에 국물이 어찌나 걸쭉하던지 젤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그 집 특유의, 마늘이 듬뿍 들어간 김치를 자꾸만 더 달라 했고, 이모는 공공장소에서 코를 푼다고 엄마를 야단쳤다.
바삭한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은 은미 이모와의 싱글 파티를 떠올리게 했다. 밤마다 우리는 바삭한 치킨 껍질을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핥고 생맥주와 무피클로 입가심했다. 그렇게 먹으면서 이모는 한국어 숙제를 도와주었다. 짜장면은 우리 한국 가족이 나지막한 거실 탁자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배달된 짜장면을 먹을 때, 할머니가 후루룩거리며 드시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주물 냄비에 기름 한 통을 다 부어서 밀가루, 계란, 빵가루를 수북이 묻힌 돼지고기를 튀겨 돈가스도 만들었다. 돈가스는 엄마가 점심 도시락으로 자주 싸주셨던 일본식 튀김 요리다. 나는 삶은 숙주나물과 두부를 꽉 짜서 부드러운 얇은 만두피에 한 숟가락씩 올리고 가장자리를 야무지게 꾹꾹 눌 - P355

렀다. 만두가 하나하나 완성될수록, 모양이 완벽하게 고른 망치 여사의 만두와 엇비슷해졌다. - P356

2주간 발효된 김치를 꺼내 먹으니 마침맞게 좋았다. 그것은 끼니때마다 내 식사를 완벽하게 해주는 이상적인 반찬이자 나의 역량과 수고를 매일매일 상기시켜주는 음식이었다. 그 모든 과정 덕분에 김치의 진가를 더 제대로 알게 됐다. 어렸을 땐 식사가 끝나고 접시에 김치 몇 조각이 남아 있으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김치를 만들어봤기에 남은 김치를 꼬박꼬박 옹기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오래된 김치는 찌개나 전이나 볶음밥에 넣어 먹고, 새로 담근 김치는 반찬으로 먹었다. 내가 먹을 양보다 더 많이 김치를 만들었을 땐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부엌에 식료품 유리병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병에 종류별로 담긴 김치는 익은 정도가 제각각 달랐다. 조리대 위에선 담근 지 4일 된 총각김치가 새콤하게 익어갔고, 냉장고에선 갓 담근 깍두기가 수분을 내보내고 있었다. 도마 위에는 커다란 배추 한 포기가 반으로 쩍 갈라진 채 소금물에 절여질 채비 - P360

를 하고 있었다. 멸치액젓, 마늘, 생강, 고춧가루의 풍미 속에 익어가는 향긋한 채소 향이 그린포인트의 작은 부엌에 물씬 풍겼다. 나는 엄마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주야장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나올 테니까.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했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 P3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