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무지개집입니다 - 한 지붕 퀴어 대가족
김현경.나영정.정현희 엮음, 가족구성권연구소 기획 / 오월의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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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 김순남은 "불안전한 삶의 핵심은 삶의 장소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며, 강제된 관계에 머물러야 - P9

한다는 것이며, 다른 삶으로의 이동이 봉쇄되는 것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가족이라는 제도 및 혈연가족이라는 관계와 불화할 때 바꿀 것인지, 떠날 것인지, 머무를 것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좌우할 만큼의 절실하고 기본적인 인권이다.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개인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구성한 다양한 관계를 어떻게 호명할 것인지를 열어두면서도, 어떤 가족으로부터 떠날 수 있는 권리와 새로운 가족을 재구성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족구성의 권리로서 정립해왔다. - P10

가족을 구성할 권리의 관점에서 볼 때 무지개집은 가족을 구성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가족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수행과 노력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가족은 규정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증명해주었다. - P11

무지개집은 이성애중심적인 기존의 가족제도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하다고 상상되는 장소로서의 집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집과 대비되는 임시적이고 고립된 장소로서의 집도 아니다. 무지개집은 안전, 정체성과 친밀성 실천, 공동체, 비혈연 돌봄망의 공간으로서 다양한 방식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성소수자들의 대안적 주거공간이다. 하지만 무지개집이 성소수자의 이야기에만 국한되는 공간은 아닐 것이 - P14

다. 이곳의 이야기는 공유와 존중을 통해서 함께 성장하는 삶을 보여주고, 삶에 뿌리내리기가 가능한 공간의 의미와 삶의 정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무지개집 이야기를 통해 지속 가능한 장소로서의 집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 P15

제도가 인지하지도 보장하지도 못하지만, 이러한 돌봄망 안에서 서로의 위기를 방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우 많다. ‘문란한promiscuous 돌봄‘은 바로 이처럼 국가가 허락하고 인정하는 관계를 넘어 스스로 만들어내는 상호 책임을 뜻한다. 이 개념은 오늘날 돌봄이 마주한 다면적이고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해하고 해결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영국의 학술모임 더 케어 콜렉티브The Care Collective가 제안한 것으로, 《돌봄 선언》에서는 ‘난잡한 돌봄‘으로 번역되었다. 에이즈인권활동가 더글러스 크림프가 감염병 위기 시대에 새로운 쾌락의 발명을 통해서 서로를 보호하고자 했던 것을 ‘문란함‘이라고 제시한 데 착안한 개념이기도 한 문란한 돌봄은 국가와 시장이 제시하는 일방향적이고 의무와 소비에 기반한 관계를 넘어서 실험적이고 확장적인 방법으로 돌봄을 실천할 것을 추동한다. 무지개집에 거주하는 퀴어들은 ‘문란한 존재‘라는 사회적 차별과 낙인을 경험한 이들이면서도, 이에 대항하는 방식의 돌봄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이다. 이 비차별적 돌 - P120

봄인 문란함은 퀴어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제도와 시장이 책임지지 못하는 모두의 삶을 위해서 힘을 발휘할 것이다. - P121

인생에서 힘든 순간 나를 도와줄 누군가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삶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자 사람을 사람으로 만드는 조건이다. 관계 속에서 산다는 걸 확인하는 순간은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누군가가 나를 대하는 태도나 대접을 통해서 매우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그러한 순간들을 통해 우리는 사람으로 존중받고 있음을, 사람답게 살고 있음을 체감한다. - P128

성소수자에게 ‘이웃‘과 ‘마을‘은 전혀 다른 말일 수 있다. 편안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관계 맺을 수 있는 이웃들은 이태원, 홍대, 종로의 포장마차, 술집, 인권단체 같은 곳에 있지 ‘마을‘에는 없다. "우리끼리 비밀로 살아도 되는데"라고 말하면서도 무지개집 사람들이 구태여 마을주민으로 어울려 살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마을에서 이웃을 만든다는 건, 이웃에게 자신을 내보인다는 건 누구에게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이 앞에 빌라가 나름 오래된 고급빌라거든요. 예전에 ○○○당 지역의원 했던 사람도 살아요. 그 집의 몇몇 분들은 무지개집 공사할 때 시끄럽다고 매일 민원을 넣었어요. 근데 또 뒷골목으로 가면 다세대주택에 1인 가구들이 좀 사는데 [그쪽에서는] 별 민원이 없었어요. 앞집은 계단실 불이 너무 밝아서 잠을 못 자겠다, 길고양이 밥 주지 마라, 하수구 소리가 시끄럽다, 처음 몇 달 동안 컴플레인을 많이 했고요. (재우)

재우는 "나름 오래된 고급빌라"에 사는 사람들이 동네 원주민이자 터줏대감인 것 같았다고 했다. 익숙히 살아온 환경 - P135

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는 메시지, 이 골목에서 무엇이 용인되지 않는지 알려주는 사람들을 보며 무지개집 사람들은 직감했다. "내가 이 동네에 산다"는 주장이 누구에게나 가능한 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 P136

성소수자들이 ‘가족적인 것‘과 어울리고 경쟁하는 건 다소 낯선 일이었다. 무지개집 사람들은 아이로 완성되는 다른 가족들이 자신들보다 더 ‘주민스럽게‘ 보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젊은 애들=1인 가구=뜨내기들‘이라는 통상적인 인식은 ‘동네 주민‘이라는 말이 환기하는 ‘평범한‘ 가족 이미지의 대척점에 있다. 무지개집의 무대가 동네 사람들의 박수를 받은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는 성소수자 친화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르게 보면 그곳은 반감도 환대도 조화도 분리도 잘 느껴지지 않는, 반응이 유보된 공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날 무대에 섰던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지‘ 해석되지 않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공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성소수자가 주민이자 생활인으로서 받아들여진다는 건 한 동네가 퀴어 혐오적 또는 퀴어 친화적이라는 의미 너머에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성소수자’란 낯섦과 ‘주민‘이라는 친숙함 사이를 연결하는 다양한 접촉이 요구되는 다분히 실천적이고 물질적인 과제인 것이다. - P152

도시에서 지역성을 만들고 다르게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이웃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무지개집 사람들은 고급빌라, 연예기획사, 교회, 시민단체, 작은 가게, 지역 풀뿌리운동 등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는 망원동에서 다양한 규범과 문화가 경합하는 장소로서의 동네를 만났다. 그러면서 동네 공간을 점유한다는 것, 이웃을 만든다는 것, 주민이 된다는 것 모두가 정치적인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끼리 비밀로 사는 것‘과 ‘마을에 어울려 사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경험 세계의 격차 또한 체감했다. 마을에 어울리는 경험이 늘어나는 만큼 지역 안에서 숨 쉴 수 있는 공간 또한 확장된다는 걸 느낀 것이다. 더 많은 퀴어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소소한 일상을 성취해낼 수 있기를 고대한다. - P156

주거정책은 정부가 구사해온 인구정책의 기조 아래에서 특정한 생애주기와 삶의 형태를 ‘정상‘이라고 상정하거나 기대하면서 추진되어왔다. 인구정책은 인구의 구성과 재생산이 국가와 사회의 재생산에 기여하도록 마련되는 정책인데, 1960~1970년대 발전주의 국가 기조 아래에서는 인구를 줄이도록 하는 가족계획 사업과 연동되었다. 반면에 2000년대 이후에는 저출산·고령사회 구조에 직면하여 국가는 혼인과 출산을 장려하면서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국가 운영 기조에 따라 규제 완화와 시장화를 통한 주거정책을 구사해왔다. - P160

가족구성권연구소는 가족정책이 주거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하는 필요에 대해서 역설해온 바 있다. 가족구성권을 보장하는 가족정책이 시행될 때에야 시민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원하는 방식으로, 상호적인 협조와 부양, 돌봄의 행위 속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는 그러한 정책을 마련해야 할 책임이 있다. 삶을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적절한 주거의 마련과 안정된 정주일 텐데, 이는 단지 금전적인 여력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거문제는 국가가 제도적으로 어떤 존재와 관계성을 무시하고 보호하지 않는지, 어떠한 삶의 방식과 형태를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하는지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가치판단은 공적 자금과 자원을 누구에게 어떠한 이유로 투여할 것인가에 영향을 미친다.
‘집은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라는 간명한 명제에서 가족을 이루지 않거나 이루지 못하는 많은 이들, 사회적으로 가족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관계들, 가족을 이루었다가 자의 혹은 타의로 해체 후 위기에 처한 이들, ‘비정상‘이며 성적으로 문란하다고 낙인찍히는 이들은 쉽게 지워진다. 이들은 - P161

어떻게든 살아가고는 있지만 주거환경이 불안정하거나 안전하지 않거나 물리적으로 취약할 가능성이 높다. 안정된 정주는 자유를 보장하는 조건이다. 성소수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자유롭게 관계 맺는 것. 이러한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소속은 통제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집에서 청소년의 위치, 거주시설에서 수용자의 위치가 바로 그렇다. 그렇다면 성소수자가 안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집, 지속 가능한 삶을 보장하는 장소의 측면에서 무지개집을 살펴볼 수 있지 않을까? 나아가 나 자신으로서의 생애 기획을 가능하게 하는 장소로서의 측면도 중요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 P162

안전하다는 건 집이라는 장소에 기대하는 중요한 감각이다. 그렇다면 안전한 집이란 정확히 어떠한 집을 의미할까? 단순히 보안과 치안의 문제로만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방범창, CCTV로 대표되는 안전은 집 안에서는 무조건 안전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감시와 치안 권력을 강화하고, 집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을 다루지 못하게 한다. 무지개집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 집이 안전하다‘고 표현했는데,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안전한 집이라는 감각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안전이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안전감의 시작점은 무엇보다도 개인의 정체성과 일상에 대한 온전한 인정이다. 이것이 결여된 채 추구되는 안전은 무언가를 조심하거나 어떤 행동은 하지 않는 방식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크며 또한 누군가에게 보호와 감시를 위탁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퀴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도 인정받는 것도 힘든 한국사회에서 무지개집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거리낌 - P167

없이 드러내고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드문 공간이다. 하지만 안전하다는 감각은 정체성을 드러내고 인정받는 것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안전감의 핵심은 혹여나 퀴어라는 정체성 때문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숨기거나 떠나는 방식이 아니라 갈등을 직면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신뢰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재난이나 폭력의 상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도 평등해야 한다고, 평등해야 안전하다고 주장해온 인권활동가들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안전은 모든 위험을 예방하거나 삭제함으로써 실현되는 게 아니라는 전제하에, 어떤 조건에 있는 사람이, 어떤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차별로 인해서 구조적인 위험에 빠지는가를 주목해야 한다. 따라서 퀴어의 안전은 퀴어의 존재 인정을 넘어, 퀴어들이 재난과 불평등의 원인을 제거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사회적 공론장에서 얼마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또한 사람들 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정체성으로 인해 공격받지 않고 문제 해결의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가 관건이 된다.
사생활 보장은 숨김이 아니라 존중으로 가능하다. 즉, 자유롭게 표현했다는 이유로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안전한 집이란 누군가의 보호나 물리적인 장치로 확보될 수 없으며, 집의 구성원들이 자유로움과 편안함을 느끼는가, 이 공간이 나의 역량을 강화한다는 느낌을 주는가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는 뒤 - P169

집어 생각해보면 집에서 폭력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도 보여준다. 가족관계에서, 특히 집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정체성에 대한 부정과 관계에 대한 통제와 간섭, 능력의 무시가 원인이자 결과이다. 여성 구성원들은 특히 안전에 대해 강조했는데, 이때의 안전이란 집 안에서 신체적 자유로움이 확보되는가, 의사 결정 과정에서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무지개집 사람들이 무지개집에 살면서 느끼는 안전과 소속에 대한 감각은 자신이 통합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온전한 존중의 감각이고, 이는 집 바깥에서 성소수자로서 마주하는 삶에도 큰 영향을 준다. 이러한 온전한 존중의 감각은 무지개집이 정체성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 P170

‘혼자 살기‘와 ‘함께 살기‘를 한꺼번에 제시하는 공동주택으로서 다양한 세대가 살아가는 무지개집은 사회적 벽에 갇혀 고립적인 생활을 해야 하는 퀴어에게 삶의 장소를 공동체로 확장하고, 특정하게 구획된 시간대에 분절되어 나타나거나 보이지 않았던 삶을 연속적인 시간성의 맥락으로 펼쳐내는 주거방안이다. 무지개집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성소수자들이 노후 준비에 필요하다고 꼽는 주거안정의 문제가 단지 집을 소유하는 방식의 안정을 이루는 데 한정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 엿보인다.
또한 퀴어의 ‘세대 간 차이‘라는 문제는 단순하게 나이 든 사람과 젊은 사람 간의 의식과 가치관, 경험 등의 차이를 좁히는 문제만은 아니다. 세대가 어우러져 산다는 건 ‘성장과 성숙, 나이 듦‘이라는 미래의 삶을 상상할 때 해상도를 높이는일이기도 하다. 함께 살아가는 나이 든 성소수자가 있다는 것과 ‘한 식구‘가 된 구성원 각각의 삶의 궤적들이 보여주는 입체적인 교차점을 목격하고 이해함으로써 무지개집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나이 듦을 상상한다. 이 집으로부터 시작된 나이 듦에 대한 상상은 또 다른 형식과 토대를 가진 삶으로 향하는 연결점을 중요한 디딤돌처럼 놓는다. 나이 든 성소수자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느 - P177

끼고 자신의 나이 듦을 체감하기도 하는 공간인 무지개집에서는 세대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관계 또한 만들어지고 있다. - P179

‘가족을 이루지 못해서 외롭고 불행하게 늙어갈 것이며 결국은 혼자 죽을 것이다.‘ 성소수자의 삶을 ‘반대’한다는 세상의 말은 늘상 그런 ‘걱정’을 늘어놓는다. 한국사회에서 가족과 직장에 소속되지 못한 자들은 죽어서도 빈소가 차려지지 않고 화환이 오지 않는다. 제사상이 차려지지 않고 애도와 기억이 불가능하다. 앞서와 같은 말은 사실 걱정이 아니라 차별을 정당화하는 말이다. 사실의 진술도 아닐뿐더러 ‘정상성’에서 이탈하여 자유로움을 느끼는 이들에게서 사회적 소속감을 박탈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무지개집 사람들은 자유를 쟁취하면서도 서로가 파편화되지 않는 새로운 소속을 만들어냈다. 정체성과 관계와 정주의 측면에서 성소수자가 안정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방법을 상상하고 실현했다. 또한 제도가 보장하지 않더라도 나름의 관계성을 형성하고 서로를 보호하는 가족실천을 계속해나갔다. 이를 통해 추측해본다면, 성소수자의 주거안정은 소속감과 자유를 확대할 때 가능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존재와 관계가 인정되고 오롯이 기억되는 장소로서의 집, 무지개집은 그러한 집의 실현이 가능하다고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 P184

무지개집이 대안적 공동체 모델이 될 수 있을지를 다시 질문해본다. 무지개집이 공동체살이의 모범 답안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여전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이지만, ‘싸니까 복지다‘가 아닌, 관계망과 친밀성, 돌봄이라는 ‘복지‘가 존재하는 곳이자 그것이 강점인 공동체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사적인 복지‘는 종종 대안적 돌봄과 교류를 촉진하고자 하는 공동체주택정책을 통해 국내외에서 시도되고 있다. 고령자 가구와 영유아를 양육하는 가구가 어울려 살면서 상호 돌봄을 주고받는 공동체주택 모델인 세대 공존형 주택, 노인과 청년이 어울려 살면서 세대 간 소통과 돌봄을 촉진하고자 하는 공동체주택 모델인 세대 교류형 주택 등의 구상은 실제 사회 실험을 거쳐 그 장점과 가능성을 타진해보아야 할 것이지만, 사회시스템 정비가 선행되어야 할 노인 돌봄과 양육의 문제를 사적인 관계망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성급함을 조심스레 엿보게 된다. ‘교류’와 ‘공존’을 전제로 낯선 사람들을 한데 엮어놓기만 하면 관계망과 친밀성이 만들어지고 자연스레 돌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상상은 다소 낭만적이다. 애초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현존하는 수많은 아파트 단지는 왜 공존과 교류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있을까.
이 지점에서 우리는 ‘누구와 함께 살고 싶은지’를 묻지 않는 주거정책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공공임대, 전세 - P188

(매입) 임대, 사회주택 등 각종 주거지원정책은 직계가족, 형제자매만을 동거인으로 인정한다. 친족관계가 아닌 사람들은 ‘1인 가구‘로서 임대주택을 신청할 수밖에 없으며, 딱 1인 가구가 살 만하다고 여겨지는 크기의 주택을 할당받는다. 함께ㅊ살고 있었던, 또는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혈연관계나 법적 부부가 아니라면 함께 거주하는 것은 금지된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다른 한편에서는 1인 가구의 ‘사회적 고립을 해소‘하겠다며 공유형 임대주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제도화된 공유주택은 시민들에게 먼저 1인 가구가 될 것을 요구하고, 전혀 알지 못하는 타인과 친밀성과 돌봄을 주고받을 것을 기대한다.
‘무지개집은 무엇보다도 ‘누구와 함께 살고 싶습니까?‘를 먼저 묻는 집이다. ‘함께 살아가봄 직한 사람들‘을 향한 관계적 소망을 주거를 통해 현실화한 곳이기 때문이다. 무지개집에서 사적인 복지가 가능하다면, 무지개집이 대안적 공동체 모델이 될 수 있다면 바로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주거·주택 모델의 차원뿐 아니라, 시민들의 다양한 가족·공동체 실천을 사회적으로 얼마나 인정하고 받아들일 것인가의 차원과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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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방문
장일호 지음 / 낮은산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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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만한 좋은 기사를 아직 쓰지 못해서, 대신 읽었다. 욕심과 허기가 나를 책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읽는 사람은 자유로웠다. 재능 없음을 탓하지 않아도 좋았다. 책장을 펼치면 누적된 지혜가 고스란히 누워 있었다. 행간에 숨기도 하고, 행과 행 사이를 뛰어다니기도 하면서 세상과 몇 번이고 거듭 화해했다. 무언가를 기어코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읽으면 읽을수록 모르겠는 일이 많아지는 게 좋았다. 경합하는 진실을 따라 나는 기꺼이 변하고, 물들고, 이동하고, 옮겨 갔다.
책에서 취한 살과 뼈에 내 삶의 많은 부분을 마음대로 이어 붙였다. ‘읽기‘는 자주 ‘일기‘가 되었다. 밑줄을 따라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나는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질문을 들고 책 앞에 서곤 했다. 삶도, 세계도, 타인도, 나 자신조차도 책에 포개어 읽었다. 책은 내가 들고 온 슬픔이 쉴 자리를 반드시 만들어 주었다. 슬픔의 얼굴은 구체적이었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 - P9

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프고 다친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고통으로 부서진자리마다 열리는 가능성을 책 속에서 찾았다. 죽고, 아프고, 다치고, 미친람들이 즐비한 책 사이를 헤매며 내 삶의 마디들을 만들어 갔다. - P10

대입 전형에 사활을 걸 수 있는 자원을 가진 사람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과대 대표되어 있다. - P51

나 역시 1인분의 책임이 있는, 이제는 부정할 수 없는 ‘진짜’ 어른이 됐다. 빈부 격차가 가져온 기회의 차이는 단시간에, 단 하나의 정책으로 해소할 수 있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어른인 내가, 또 우리가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의 어린 사람에게 ‘운‘이 되어 주는일은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아이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은 그들의 삶에 ‘얼굴을 내밀어 주는‘ 의지할 만한 어른의 존재다." 너무 빨리 어른인 척해야 했던 스무 해 전 나 같은 사람에게 나는 ‘곁’이 되어 주고 싶다. 그리고 당신도 그랬으면 좋겠다. 그 방법을우리가 각자의 자리에서 찾으면 좋겠다. - P54

어딘가 단단히 고장 난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다. 이 - P68

멀미 나는 격차들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그 숙제를 얼마간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 ‘지식인‘ 세계에 진입했을 때 나는 그들과 되도록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원하는 게 가난을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벗어나고 싶은 것이었음을 그제야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서 좌불안석하면서도 나는 안도했다. 물론 나는 지금도 가난으로 인해 어딘가 부서지고 망가진 내면이 언젠가는 사고를 치고 말 것이라고 긍긍한다.
상업고를 나온 사람이 드물고, 기초수급을 오랫동안 받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든 회사에서 내가 지나온 가난은 ‘자원‘이었다. 다른 시각을 가졌으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나는 내가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의 얼굴 표정을 보기까지는 내 어린 시절이 힘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렇다고 말하기 시작하기까지는 내 인생이, 또는 실로 내가 어떤 식으로든 흥미롭다거나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 - P69

난은 이 사회의 많은 문제가 시작되는 저수지였다. 가난과 관련된 아이템은 흔하고 넘쳤다. 그래서 의미 없을 때가 많았다. 오만함과 절박함과 희망이 범벅된 진창에서 구르는 동안 ‘글‘ 따위는 몇 번이고 무참히 패배했다.

실패는 안팎으로 계속됐다. 다정한 적 없던 가족과 친척은 때로 남보다 멀고, 이제는 각자의 짐을 지며 살고 있지만 애경사로 드물게 만나곤 했다. 나는 그때마다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말을 꼭 한번씩은 듣곤 한다. 내가 그 ‘다른 세계‘에서 얼마나 자주 이방인이 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자꾸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그 말에서 상대가 의도치 않았던 냉소와 비난을 읽는다. 때로는 왜 나를 구분하느냐고 반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은 돈의 많고 적음으로만 구별되지 않는다. 문화와 교양과 취향으로도 드러난다. 나는 그 말에서 내가 빠져나온 - P70

세계를 본다. 그리하여 안온한 세계에서 구경한다. - P71

세상은 모르는 그 애의 최선을 나는 안다. 다만 공업고등학교를 나와 비정규노동의 틈새를 전전해 온 30대 중반의 남성은 ‘작은 성공‘조차 쉽지 않았을 뿐이다. "문제 해결을 위해 뭔가를 하려 할 때 대단히 많은 벽에 부딪친다"는 점은 가난이 가진 질긴 속성이다. 온라인 도박 사이트는 드물게 장벽이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이긴 하지만 성취감을 줬다. 청소년기에는 게임이 그 역할을 했었다. 나는 내 동생의 노동을 딛고 공부할 수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동생 삶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글만 바쁘게 쓰고 있다는 자괴가 몰려왔다. 세상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 같아서 망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74

대런 맥가비는 《가난 사파리》에서 독자에게 한 가지 태도를 제안한다. "나는 우리가 먼저 정직해지는 데서 시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혁명은 없을 것이다. 우리 평생에는 없을 것이다. 이 체제는 다리를 절룩거리며 나갈 것이고 우리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한때 바랐듯 - P75

이 정치권력이나 체제가 바뀌기를 ‘순진하게‘ 기대했다. 이제는 그저 일정 부분 망가진 울퉁불퉁한 길을 일단 걸어가 본다. 내면의 힘을 발견하고 기르는 편에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 보려 한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힘은 누군가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빈곤은 이런 방식으로 산업화되었다) 나에게도 있다는 걸, ‘가난한‘ 우리도 이 세계의 일부이고 책임 있는 구성원이자 시민이라는걸 믿으면서. - P76

무언가를,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굉장한 재능 중 하나다. 꼭 그만큼 삶이 넓고 깊어진다. 싫어하는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고,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을 늘려 가면서 살고 싶다. 좋아하는 것들의 목록이 늘어날 때마다 싫어하는 것들이 나를 침범해 올 때 - P83

숨거나 도망갈 수 있는 요새를 짓는 기분이 든다.
(...)
내 마음에는 할머니 무덤도 있고, 아빠 무덤도 있고, 종현의 무덤도 있다. 살아 있는 일은 마 - P84

음에 그렇게 몇 번이고 무덤을 만드는 일임을, 슬픔은 그 모든 일을 대표하는 감정이되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 P85

바지와 속옷이 차례로 벗겨지는 동안 나는 오줌을 지렸다. 나지막한 소리로 욕하는 그에게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시늉을 했다. 너무 무서우면 목소리도 눈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찾아왔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속옷을 남에게 보인 것이 처음이었다. ‘속옷을 갈아입지 못했다‘는 사실이 퍼뜩 부끄러웠다. 단칸방에는 세면시설이 변변찮았고, 겨울 추위는 씻지 않을 좋은 핑계였다. 토막 쳐진 기억 속에서도 지금까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이 수치심은 오랜 시간 내게 벌어진 일을 해석하는 데 방해가 됐다.

퇴근한 엄마가 내 이야기를 듣고 가장 먼저 물어본 - P87

말은 "잘 씻었니?"였다. 몸을 이리저리 살피고 몇 가지를 더 물어보긴 했지만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았다. 기대 밖의 반응에 몹시 서운했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나는 별일 아닌 것처럼 최대한 의연하게 굴었다. 엄마 등 뒤로 긴 한숨이 이어졌다. 영원히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말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내 존재가 엄마를 불행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그런 이유로 나를 떠나진 않을까 두려웠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 매일 눈뜨면 초조한 마음으로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언제쯤 내 몸에 ‘죽음의 표시‘가 찾아올지 기다렸다. 가해자가 나에게 나쁜 병을 옮겼다고 믿었고, 내 인생은 끝났다고 여겼다. 그 와중에도 나는 자랐다. 그때는 그게 나의 유일한 할 일이었다. 그 학교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3년 더 다녔고, 무사히 졸업했다.
발도 키도 크는데, 몸무게만큼은 좀체 늘지 않았다. 2차 성징은 더디게 왔다. 차라리 남자면 좋겠다고 생 - P88

각했다. 어쩌면 남자가 아닐까 상상했다. 생리를 하지 않는 건 그때의 경험 때문일까 싶었다. 몇 번이고 고쳐 쓴 질문을 들고 보건실에 들어서서 쓸데없는 이야기만ㅜ지껄이다 하릴없이 두통약을 받아 나오곤 했다. ‘지나간다‘는 말 안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이 웅크리고 있는지. 몇 번쯤 죽음을 결심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두고 생리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그걸 작은 신호로 받아들였다. 나는 망가지지 않았다고, 나도 정상 범주안에 속해 있다고 안도했다. - P89

계절이 거듭되는 동안 반복되던 악몽도 잦아들었다. 살아남았으므로 살아 보기로 했다. 이왕이면 ‘잘 살고 싶었다. 뒤늦게 진학한 대학에서 만난 페미니즘은 문자 그대로 복음이었다. 별생각없이 신청한 페미니즘 교양 수업 하나가 삶의 지축을 바닥부터 흔들었다. 교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 보고 나온 기사를 읽고 또 읽었다. 교수는 과거 부천 성고문 사건 속 ‘권 양‘이었다. 내 눈앞에 권인숙 교수가 되어 강단에 서있었다. 자신의 삶이 빠뜨린 함정에서 걸어 나와 마침내 살아남은사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 앞에 서 있었으므로, 나 - P90

는 처음으로 과거가 나를 반드시 망가뜨리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그 뒤에도 내게 벌어진 일을 이해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부인과 도망이 필요했다. 여성으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크고 작은 성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페미니즘 덕분에 삶에서 아주 도망치지 않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생존자‘라는 단어를 처음 알았을 때 몇 번이고 발음하며 입 안에서 굴려봤다.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라니 감격스러웠다. 내가 경험한 폭력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어느 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를 둘러싼 풍경도 달라졌다. 나는 혼자가 아니고, 내가 당한 일은 내 잘못이 아니며, 나는 이 고통을 ‘자원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고통과 더불어 살아갈지, 어디에 서서 고통을바라보아야 할지에 따라 고통은 다르게 해석된다." - P91

말하고 난 후에야 ‘다음‘을 꿈꿀 수 있었다. 다음으로 가고 싶었다.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의 자리로 온전히 이동하고 싶었다. 말하는 동안은, 글로 적는 동안은 그럴 수 있었다. 11살 어린이를 성폭행하고 암매장한 사건으로 떠들썩하던 2006년이었다. 그즈음 나는 용서라는 단어를 만지작거렸다.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있어요‘라고 일기장에 적고 또 적었다. 그건 내가 다시 쓰는 역사였다. 그 안에서 과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소한 일이 됐다. 비참을 기어코 안도할 수 있었다. 내게 벌어진 일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큰 숙제였다. 나는 그 해석을 몇번이고 고쳐 썼다. 증오를 연민으로 바꾸기 위해 애썼다. 그래야 내가 살 것 같았다. 평생 그 기억에 갇혀 살 수는 없었다. 계속 도망칠 수 없었다.
이해를 위한 첫발을 뗐을 때 괴로운 것은 내가 가해자를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성범죄는 면식범 비중이 높은 범죄지만,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했다. 그 - P92

는 나의 영원한 ‘미제 사건‘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행운이었다. 나는 가해자를 나와 같은 복잡한 인간이 아니라 괴물로 상상했다. 마음껏 괴물로 만들었다 부수곤 했다. 하지만 성폭력은 괴물이 저지르는 일이 아니다. 성폭력 가해자를 괴물로 묘사하는 것은 성폭력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떨어뜨리고 해결을 방해할 뿐이라는 것까지, 그즈음 나는 잘 알고 있었다. - P93

이게 다 엄마 때문 - P93

이라고, 엄마가 그때 그 아저씨를 신고하지 않아서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 거라고, 왜 잊어버리라고, 조심하라고 당부했냐고. 짐승처럼 울었다.
한바탕 난장을 피운 뒤돌아누운 내게 엄마는 자신도 성폭력 생존자라고 말했다. 엄마가 고른 단어는 생존자가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번역해 들었다. 엄마는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자원화‘해야 하는지 몰랐고, 입이 있으되 말하지 못했다. 대신 엄마가 배운 건 "그러고도 다 살아"라는 체념이었다. 엄마도 어렸고 약했다는 걸 이해하는 데는 훨씬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날 엄마가 밤마다 했다던 기도 내용도 알게 됐다. 예쁘게 자라지 말아 달라고, 그래서 누구 눈에도 띄지 말아 달라고 빌었다고 했다. - P94

작가는 "이제 언제 어디서든 할 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당당하고 멋진 여성으로 성장"한 딸아이가 아동 성폭력 피해자였음을 밝혀 적는다. 딸은 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놀다가 넘어진 일만큼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라고. 그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 주라고."

가해자 이름을 가리면 구분조차 어려운, 판에 박힌 듯한 크고 작은 성폭력 피해 사례를 기어코 직시해 겹쳐 보고 모아 보며 알게 됐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은 ‘살아 있는‘ 일이다. 고통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 사회다. 수치심은 비밀 안에 싸여 있을 때에나 존재한다. 성폭력 생존자를 위한 가이드북 《아주 특별한 용기》의 저 - P95

자들 역시 ‘침묵 깨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많은 생존자들은 다른 생존자들이 보여 주는 용기를 보면서 동기부여가 된다. 생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드러내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책을 쓰고, 가해자(혹은 기관)를 고소할 때 그녀는 다른 생존자들에게 침묵을 깨라고 자극하는 중이다. 많은 여성들이 다른 생존자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치유를 결심하게 된다." 성범죄 특성상 가해자가 피해자의 수치심과 침묵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피해가 가시화되면 추가 피해를 막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도 타인을 살리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를 포함해 많은 여성이 그 깨달음의 폐허 위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지치지 않고 증언을 이어 가고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시절은 없어요. 그런 시절이 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지도않을 거예요. 우리는 행복한 기억으로 살죠. 하지 - P96

만 우리는 불행한 기억으로도 살아요. 상실과 폐허의 힘으로 말입니다." - P97

살아 움직이는 무언가를 기르는 일은 전전긍긍을 동반한다. 그것이 고양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약하고 작은 존재인 아니와 함께 살면서 어린 사람과 함께 사는 타인의 기쁨과 보람과 고단함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됐다. 사랑은 피곤을 동반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일임을 배웠다.
하지만 사람을 기르거나 길렀던 이들은 그 같은 비교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인정을 구하지 않았는데, 인정하지 않았다. 비인간 존재에 대한 나의 배움과 애정은 쉽게 열등한 취급을 받았다.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 그중에서도 아이를 낳지 않은 여자는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선다. "그 마음으로 사람 아이를 키우라"는 말. 나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적절한 대답을 찾고 싶었다. 먼저 고민하고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 헤맸다. "고양이를 돌보다 보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지는 사람이 당연하게도 나뿐만은 아니었다. 통영에서 ‘고양이쌤 책 - P109

방‘을 운영하는 김화수 씨의 이야기에 나는 깊이 마음을 포갰다.

나도 한때는 사람 돌보는 거나 동물 돌보는 거나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사람과 동물은 다르다.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미래지향적이다. 우리는 그 아이가 무언가가 되어 가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공부 잘하는 사람, 재능이 뛰어난 사람, 돈 잘 버는 사람, 꼭 그런 게 아니라도 보통의 시민으로 제 몫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고, 그렇기에 때론 다그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동물은 그렇지 않다. 그저 내 곁에 있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다. 지금 이대로, 매일매일 똑같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동물을 돌본다는 것은 현재지향적이다." - P110

고양이는 내가 선택한 또 다른 가족이다. 《27-10》의 주인공에게도 그랬다. 《27-10》은 가정 내 성폭력 생존자가 스물일곱 살이 되어 비로소 자신의 상처를 직면하는 이야기다. 처음 피해를 입었던 열 살의 ‘나‘로, 스스로를 지키기에는 작고 약했던 어린아이 시절을 돌아보는 구불구불한 길을 그린 만화다. "고통의 시작은 타의였지만 결말은 스스로 내기로" 결심한 주인공에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반드시 필요했지만, 겨우 묻어 둔 상처를 헤집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다행히 스물일곱의 그가 새로 만든 생활 안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벌어진 상처 틈으로 자꾸만 추락하는 주인공을 커다란 고양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받쳐 주는 장면에서 나는 가장 많이 울었다. 주인공은 "일정 - P112

이상 가라앉지 않도록 부드럽게 받쳐" 주는 존재를 통해 "난생처음 겪는 감정"을 느낀다. 그림 속 고양이는 인간의 슬픔을 신경 쓰지 않는다. 충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자신의 공간을 내어 주되,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개입하지 않는다. 고양이의 어떤 무심함이 사람을 살린다는 걸 나는 안다. - P113

결혼은 당연한 걸까. ‘이혼해서는 안 된다‘ 따위 쉽게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을 서약해야 하는 자리에서 나는 가족식 혼배미사를 도와준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아주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해 보고 아니면 그만둘 수도 있는 인생의 ‘과정‘ 중 하나로 생각한다고, 되도록 실패하지 않으면 좋겠고 이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이 관계의 결말이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실패가 내 인생을 흔들도록 두지는 않을 거라고, 그래서 신부님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고. - P118

생활동반자법은 다양한 가족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동성혼 합법화보다 더 급진적인 의제가 될 수 있다. 분명한 한 가지는 "제도는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다.

제도가 금지의 형태를 갖는 것은 다른 이의 자유로운 삶을 훼손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금지 자체가 제도의 목적이어서는 안 되며, 개인이 그려 나가는 삶의 지도를 국가가 대신 그려 줄 수도 없다. 더욱 다양한 욕망으로 다양한 관계로 가족을 꾸리려고 할 때, 제도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 나가야 한다.

정상가족은 오늘날 파산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다양한 상상력은 아직 법과 제도의 이름으로 도착하지 못했다. 그 거친 틈을 비집고 들어온 ‘새로운 가족‘은 - P126

복잡한 맥락 안에서 오늘도 분투하고 있다. 영화 〈가족의 탄생〉(2006)에서 가족은 곧 식구食口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 식구가, 가족이 꼭 혈연일 필요는 없다고, 나이와도 상관없다고 영화는 말한다. - P127

"좀 조심하지"라는 타인의 말에 담긴 염려를 모르지 않지만 그건 따져 보면 ‘내 잘못‘이라는 소리였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사고는 생겼고, 살아갈수록 ‘살아남았다‘는 감각만 자꾸 선명해졌다. 그저 운이 좋아서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자꾸만 삶에 쌓였다. 강화길의 소설 《다른 사람》을 읽다가 이 문장 앞에서 한참을 떠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는 여자애들이었다. 해도 되는 것보다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더 많이 배운 여자애들. 된다는 말보다 안 된다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란 여자애들. - P131

대학시절 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는 나와 내 주변 여성들에게 벌어진 일에 대해 설명할 언어를 얻었다. 페미니즘은 내게 입이 되어 주고 목소리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외면하고 싶은 고통이었다. 페미니스트로 스스로를 ‘적당히‘ 정체화하고 10년 넘게 살아온 나 역시 강남역 사건으로 많은 것이 변했다. 무엇보다 내 뒤에 오는 여성들이 나보다는 덜 울퉁불퉁한 길을 걷길 바라게 됐다. 그러려면 지금 내 몫으로 주어진 싸움을 피해서는 안 됐다. - P132

우리는 여자애들이 야망을 가질 때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꺾어 버리고 길들여 왔는지 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고 나니까. 나는 유력 정치인과 바람 난 적 없고, 과도한 사이버불링을 당한 적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일을 무수히 겪으며 깎여 나가고 작아졌다. 실수나 실패로 내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페미니즘 - P134

을 팝니다》의 저자 앤디 자이슬러는 성평등을 이렇게 정의한다. "성평등이란 단순히 여성의 지위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도 커다란 실패를 허용하는 것이다." 시장 후보를 뽑는 투표장에 들어간 제인은 자신의 이름에 투표한다. 그 순간 제인은 20대의 자신, 아비바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하나만 물어도 될까? 어떻게 그 스캔들을 극복했어?"
"수치스러워하기를 거부했어."

그 문장을 읽은 이후 나는 또 한번 달라졌다. 실패나 실수를 이전보다 덜 두려워하게 됐다. ‘내가 해도 될까‘ ‘잘할 수 있을까‘ ‘못 할 것 같아‘라는 생각을 물리치는데 저 문장만 한 부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래희망도 생겼다. 모건 부인처럼 ‘같이 망해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실패하고 실수해야 잘하는 방법도 알 수 - P135

있게 된다고, 두렵다면 함께 망해 주겠다고. 그러니 우리 더는 조심하지 말자고 손 내밀 수 있는 사람. 그렇게 나이 먹는다면 뒤에 오는 여성들에게 지금보다는조금 덜 미안할 것 같다. - P136

"할머니는 왜 교회에 다니세요?" 할머니가 지긋이 웃었다. "교회에서는 내가 평생 들어 보지 못했던 예쁜 말만 해 줘." 맥이 풀렸다. 그 할머니도, 어쩌면 엄마도 교회가 아니었다면 삶의 비참을 견딜 수 없었겠구나. 나는 할머니에게 교회에 다니겠다는 약속 대신 "저도 예수를 믿어요"라고 대답했다.
다만 나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니었기 때문에 삶의 비참을 다르게 견디고 싶었을 뿐이다. - P145

눈에 잘 띄는 곳에 늘 꽂아 두는 책이 몇 권 있다. 주로 당사자 목소리가 녹아 있는 책들이다. 장애인 이동권뉴스를 접한 날이면 나는 노들장애인야학 20주년사를 정리한 《노란들판의 꿈》을 다시 펼치곤 한다. 2001년 2월 6일 서울역 이동권 투쟁 장면을 다시 읽고 싶어서다.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은 시위 끝에 연행되면서 이렇게 외친다.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 주더니, - P157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 봅시다!"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을 비롯해 장애인 30여 명이 선로 위에 드러누웠던 이날 시위는 장애인 이동권 역사의 결정적 장면이 된다. 2003년 국어사전에는 ‘이동권‘이라는 낱말이 올랐고, 2005년에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누군가는 단지 지하철을 타기 위해 목숨을 건다.
노들야학 교사이자 저자인 홍은전 씨는 비장애인이다. 그는 자신을 ‘9‘라고 칭한다. "10명 중에 1명은 장애인이다. (……) 1들이 말하는 세상은 야만적이었다. 그러나 내가 자라온 세상은 한번도 1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그들의 가혹한 세상살이를 알면 알수록 나는 내가 1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에 깊이 안도했다. 그 차이가 있는 한 저들에게 일어난 일 - P158

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안전한 9였다."
‘저들에게 일어난 일은 결코 나에게로 넘어오지 않을 것이므로‘라는 문장 앞에서 나는 다시 승욱을 떠올린다. 자신을 ‘9‘라고 고백한 저자의 마음에 나를 겹쳐 본다. 장애인 관련 분야는 ‘더는 새로운 기사가 나올 게 없는‘ 레드오션이다. 아무리 장애를 ‘체험‘하고 또 해도 결국 9의 자리에서 9의 시선으로 쓰게 될. 연민이나 동정에 호소하거나 애써 희망적인 이야기를 찾아 그나마 ‘팔리는(읽히는)‘ 기사를 쓰면 다행이다. 쉬운 길이다. 그래서 많은 기자들이 검증된 그 길을 가거나, 그냥 대충 잊고 지낸다. 세상에는 정말 너무 많은 문제가 있고, 1의 세상은 어차피 잘 보이지 않으니까.
그러나 ‘9‘의 눈으로 ‘1‘의 세상을 쓴 《노란들판의 꿈》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노들야학 소식지 99권과 교사 회의록 40권, 수천 장의 회의록과 20년간의 일지들을 수북이 쌓아 놓고, 그 위에 새 길을 낸다. 20주년 - P159

사를 정리하는 만큼 그 지난하고도 아름다웠던 세월을 포장하고 싶은 마음, 짐작건대 왜 없었을까. 나라면 우리 대견하다고, 이만하면 잘 살아 냈다고 쓰고 싶었을 것 같다. 대신 저자는 이렇게 쓴다. "사람들은 노들에 밝고 희망적인 것을 기대하지만 나는 노들의 어둡고 절망적인 얼굴을 더 많이 알고 있다."
정직한 기록만이 역사가 될 자격이 있다. 그들이 비틀거리며 20년간 걸어온 길이 다름 아닌 한국 장애인 운동사다. 홍은전은 담담히 장애인 운동의 실패를 시인한다. 다만 "연대는 분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무릎이 꺾일 것 같은 순간 힘없이 뒷걸음질치고 고개 돌렸던 우리 자신을 보듬는 힘"이라는 점을 힘주어 강조하면서. - P160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장 꾸준히 들어 온 말은 ‘저널리즘의 위기‘다. 염색공예 작가 유노키 사미로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림은 죽었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럼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건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 같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묘지에서 하는 운동회‘라는 유노키의 말에 밑줄을 그으며 내가 하는 일도 꼭 그와 같다고 생각했다. 잡지야말로 ‘죽어 가는 종이‘에 가까운 것 아닐까 생각하면서.

많은 사람이 단언한다. 언젠가는 종이 매체가 사라질 거라고.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다짐한다. 그 - P163

시대의 안과 밖을 잘 쓸고 닦다가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초단위로 기사가 쏟아지는 시대에 나는 뒷북이나 다름없어 보일 때도 있는 주간지의 느린 박자가 좋았다. 사수는 단독 기사의 의미를 몇 번이고 다시 짚어 줬다. 제일 처음 쓰는 것도 의미 있지만, 마지막까지 쓰는 것도 단독만큼이나 중요하다고. - P164

어떤 정당을, 정치인을, 그리하여 정치를 욕하고 손가락질하기란 때로 매우 쉽고 간편하다. 그사이 민주주의는 위협받고 일상은 무람없이 공격당한다. 정치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한 동시에 참 지루한 일이다. 그 ‘좁은 길‘을 내는 것이야말로 독립언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는다. - P167

그리하여 함께 일하는 친구들에게 당부하게 되는 건 언제나 결과보다는 태도다. 내가 잊지 않으려 하는건 이런 것들이다. 기자는 기본적으로 2차 생산자라는 점. 우리 일은 기본적으로 사건과 사람에서 출발한다. 누군가에게 빚지지 않고 쓸 수 있는 기사는 없다. 기사란 대부분 누군가의 불행과 불편에서 출발한다. 그렇게 때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현실에 개입하게 된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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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농담이(아니)야 리:플레이
이은용 지음 / 제철소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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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봄 어느 날, 이은용은 「변신 혹은 메타몰포시스」 초고를 보여주었습니다. 스물여덟 살 트랜스젠더 남성이 열여섯 살 소년으로 변신하여 살아가는 그 이야기를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그대로의 이은용을 사랑했고 최선을 다해 도달한 현재의 삶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왜 지금의 자신과 가장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고 싶은 걸까. 이 - P6

은용은 말했습니다. 나는 그 시간이 꼭 필요해요. (...) 이은용의 희곡은 인생의 대부분을 자기가 누군지 말하기 위해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은용의 희곡 쓰기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 P7

희수> (...) 우리 엄마도 나한테 손 꼭 붙잡고 말했어. 대학 못 보내서 미안하다. 다음에는 꼭 가게 해주마.
준영> 다음?
희수> 동생 다음에.
준영> (방백) 그리고 또 동생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그리고 나중에 나중은 영영 오지 않는다. (희수에게) 진심이었을까, 너희 엄마. - P174

희수> 우리 엄마는 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왜냐면 온 가족이 나를 희생시켜서 각자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준영> 나는 그런 엄마한테 내 인생에서 나가버리라고 말했다!
희수> 나는 엄마한테 그런 말도 하지 못했다! - 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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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페스×퀴어 - 케이팝, 팬덤, 알페스, 그리고 그 속의 퀴어들과 퀴어함에 대하여 오봄문고 7
권지미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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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은 이제 거의 한국 문학이다"라는 식의 찬사를 늘어놓는 이들도 많지만, 그런 찬사를 보고 있자면 어느 정도는 동의하면서도 어느 정도는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팬픽에는 ‘한국 문학‘이 되지 못하는, 혹은 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나는 팬픽의 바로 그 부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찬사 자체가 ‘팬픽‘과 ‘한국 문학‘ 사이의 위계를 만드는 것 같아서 정말로 ‘한국 문학‘을 심하게 닮은 팬픽이 아닌 이상(그런 팬픽들이 종종 있긴 하다) 나는 그러한 찬사를 자제하는 편이다. - P9

그리고 팬픽은 분명히 여성, 그리고 비남성의 문화이기도 하다. 팬픽은 여성들과 비남성들의 인형놀이 - P12

로, 그들이 어떤 캐릭터를 빌려서 거기에 자기 이야기를 어느 정도 넣어가며 만드는 것이 팬픽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형‘이 남성 아이돌, 즉 남자라고 해도 결국 넓은 의미에서 팬픽은 여성서사, 혹은 비남성서사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BL이 여성서사라고 불리는 이유와 마찬가지다(이에 대한 내용은 〈남성 아이돌 알페스와 ‘여성서사‘ 논란에 대하여〉에서 좀더 자세히 다뤘다). 문예 평론가인 사이토 미나코齋藤美奈子가 《요술봉과 분홍 제복》에서 말했듯이, 남성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작품 속 세계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세한 해석에 열을 올리는 것에 반해, 여성 오타쿠들은 ‘이야기를 고쳐 쓴다‘. 사실세상의 많은 이야기는 여성 혹은 비남성의 것이 아닌, 남성의 것이다. 그 이야기를 여성 혹은 비남성의 것으로 고쳐 쓰는 건 여성들과 비남성들의 놀이다. 나는 이것을 원본 없는 자들의 애처로움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제시된 것을 재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의 창조적 문화라고 해석하고 싶다. 팬픽은 남성의 세계를 남성이 아닌 자들이 고쳐 쓰는, 대안적이고 창조적인 문화의 전형 중 하나다. - P12

어떤 이들의 욕망은 때때로 파괴적이며, 누군가에게는 공격적이고, 누군가에게는 백래시일 것이며, 누군가에게는 누군가를 배제하는 것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되살리는 나쁜 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욕망들은 정말로, 존재한다. 욕망을 가진 이들이 기득권에 속할수록 혹은 기득권의 욕망에 가까울수록 그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받고, 기득권에서 벗어난 이의 욕망은 더욱 비판받는 경향이 있다. 여성과 비남성의 문화인 알페스, 그리고 그 알페스의 기묘한 한 갈래인 퀴어페 - P19

스에 대한 비판이 거세진 데는 그런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본다. - P20

퀴어 이론에서는 ‘퀴어‘를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에 관해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인 추론을 피하는 것‘으 - P29

로 여기고 있으며, 반드시 성적인 것을 다룰 때만 ‘퀴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도 아니다. 퀴어 이론에서는 어떠한 것이 그 자신의 장르 또는 분류의 일반적인 규범에 맞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장르 또는 분류의 일부가 되어 있는 경우를 ‘퀴어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설명을 들을수록 ‘퀴어‘라는 것이 너무나 모호하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사회학자 이나영은 "퀴어를 딱 잘라 정의하기 어렵고 그것이 퀴어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라고 말한 바 있다. 퀴어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다고 느껴진다면, 그건퀴어를 꽤 잘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 P30

이성애 서사가 중심이 되는 팬픽 시장 밖과는 다르게, 동성애 서사가 중심이 되는 팬픽을 읽으며 어떤 이들은 이성애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어 일시적인 행복과 정서적 구원을 느낄 수 있다. 어떤 독자들에게 팬픽은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공간에 몰입할 수 있는 도피처일 수 있고, 이는 이성애중심주의적 현실을 부정할 수 있는(비교적) 합법적인 방법일 수 있다. 설령 팬픽을 읽는 이가 시스젠더 이성애자라도, 지나치게 융통성 없는 이성애중심적인 현실세계에서 성별규범과 성애에 대한 답답함과 불만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러한 답답함과 불만을 동성애를 다룬 팬픽으로 풀 수도 있다. 그/그녀가 읽고 쓰는 팬픽이 만약에 그저 이성애의 유해한 지점들을 따라 한 것 같은 ‘빻은‘ 팬픽일지라도, 어쨌거나 그것은 이성 간의 사랑과 연대를 다루지 않는 것으로, 분명 ‘규범적인 이성애 서사‘는 아니다.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동성애적 - P34

서사를 적극적으로 생산하고 유통하는 것이 지극히성애적인 욕망에서만 비롯된다는 분석은 정말이지 지극히 이성애적인 해석이다. - P35

m팬픽이 실제 동성애자 및 성소수자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고, 지나치게 대상화되었으며, 질 낮은 포르노그래피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그것이 그나마 (특히 여성청소년들에게?) 접근 가능성이 높은, 한국어로 쓰인 한국인들의 동성애 및 퀴어 이야기일 수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이 사실이 무척 비극적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볼 게 없고 소비할 것이 없으면 그런 질 낮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되다니!‘ 어떤 이들은 팬픽을 보고 퀴어를 배우게 되면 여러 악효과가 나타난다는 주장까지 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악효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이 - P36

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비퀴어들, 주로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들이 팬픽만 보고 퀴어의 삶을 오해한다." - P37

나는 ‘실제의 퀴어‘를 ‘실제의 퀴어답게‘ 묘사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여겨지는지 고민해보고 싶다. 어떤 단어들이 퀴어의 단어들일까?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느낄까? 그리고 어쩌면 어떤 퀴어들은 정말로 ‘팬픽처럼‘ 섹스할 수도 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여겨진 - P39

다면,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일까? 일본의 BL 연구자 미조구치 아키코는 "‘진짜 게이 섹스‘를 누가 알고 있는가"에 대해 말하면서, "애초부터 성애는 판타지이므로 과장된 판타지가 어떤 표상을 통해 실제 판타지를 구축해 나가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섹스는 판타지이고, 판타지와 표상, 현실의 경계는 모호하며 분명 불가해한 부분이 있다. 진짜 퀴어의 섹스는 누가 알고 있는가? 퀴어 ‘당사자‘는 그것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어떠한 섹스를 ‘진짜 퀴어들의 섹스‘로 규정하고 인식하는가? 그것을 규정하고 인식하는 권한은 누구에게 주어져 있는가?
그리고 팬픽을 읽은 사람이 정말로 퀴어에 대한 어떤 ‘왜곡된 인식‘을 하게 되었다 한들, 팬픽의 판타지에 그 잘못이 있는 건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나마 퀴어한 것이 팬픽밖에 없는‘ 이성애중심적인 사회구조, 퀴어적인 것을 취급하지 않으려 하는 매스미디어, 성소수자를 비가시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잘못이다. 많은 이들이 말도 안 되는 판타지로 가득한 이성애 로맨스 소설을 읽고 ‘실제의 이성애‘와는 다른 ‘판타지적 이성애‘ - P40

를 학습한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판타지적 이성애’뿐 아니라 ‘실제의 이성애‘에 대한 교본이 넘쳐나기 때문에, ‘판타지적 이성애‘ 서사를 즐기는 이들은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쉽다. 하지만 ‘판타지적 퀴어‘의 서사를 즐기는 이들이 ‘실제 퀴어‘에 대한 교본에 접근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 P41

본질적으로 팬픽은 어떤 비퀴어적인 것을 좀더 퀴어하게 해석하며 노는 서사놀이이다. 그것이 이성애의 유해함을 모방한 ‘가짜‘라 불릴지라도, 그리고 ‘실제 퀴어의 삶‘과는 멀고 먼 것일지라도, 어떤 퀴어는 그것을 가지고 놀며 무언가를 배울 수도 있다. - P42

나중에 사회적으로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성소수자에 대한 어떤 모델이 잔뜩 생겨나더라도, 어떤 이들은 그러한 ‘교본‘을 보지 않고 따라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하지 말라는 것을 보고 따라 하려는, ‘하면 안 되는‘ 것을 욕망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욕망 자체가 퀴 - P45

어하다고 생각한다. 하지 좀 말라는 것을 해버리는, 어떤 ‘청개구리‘ 같은 심보 자체가 퀴어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퀴어의 실제 삶을 그려낸 콘텐츠, 미디어에서 비추는 바람직한 현실의 퀴어들, 건전한 퀴어용 학습만화 같은 것들이 필요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그러한 것은 엄청나게 필요하고, 퀴어혐오가 가득한 지금 이 시대에는 꽤 시급하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그것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나는 정말 많은 것을 원한다.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퀴어 콘텐츠, ‘아,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라고 느낄 만큼 많은 퀴어 이야기들을 원한다. 현실을 그려낸 것도, 판타지를 그려낸 것도, 현실인지 판타지인지 모호한 것도 모두 원한다. 나는 그러한 수많은 콘텐츠를 당연하게, 당당하게 향유하고 싶고, 동시에 불량식품 같은 팬픽 또한 가지고 놀고 싶다. 퀴어 콘텐츠가 많은 시대에는 그것들을 패러디하는 팬들의 문화나 팬픽 또한 당연하게 더 퀴어해지고, 더 재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더 나은 미래, 더 풍족하다 못해 퀴어 콘텐츠 중독자에게는 거의 사치스럽기까지 한 미래를 꿈꾼다. 아마, 나와 같은 수많은 ‘청개구리‘ 퀴어들도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욕심이 많고, 어쩌면 우리의 그 욕심 자체가, ‘퀴어‘한 것일 수도 있다. - P46

알페스의 일반적인 규범 속에서 ‘실존 인물‘들이 언제나 비퀴어였고 그들의 비퀴어성이 확대되어 그것을 뒤집는 동성애적 해석이 주가 된 것과 달리, 퀴어페스 속에서는 ‘실존 인물’이 퀴어할 가능성은 훨씬 더 크게 해석되고 그들의 퀴어성은 확대되어 그 확대된 퀴어성으로 인한 다양한 관계들을 탐구하며 동성애뿐만 아니라 ‘더 퀴어한‘ 커플링 놀이를 하는 것이 주가 되었다. 리얼 퍼슨, 진짜 사람, 실존 인물이 퀴어이고 퀴어일 수 있는 세계가 바로 퀴어페스의 세계였다. - P52

나는 항상 "내가 퀴어 당사자였기 때문에, 더 퀴어한 것이 읽고 싶어서, 그래서 썼다"라고 답변을 해왔다. 그러나 그 답변은 충분한 것이었는가? 나는 이제 와서 고민한다. - P61

‘퀴어’를 스펙트럼이라고 본다면, 나는 누군가에 비해 엄청나게 퀴어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 비해 엄청나게 퀴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나는 좀더 정상성 범주 내에 있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않다. 나는 퀴어 당사자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또 당사자성이 없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나 또한 그렇다. 그런데 나는, 내가 당사자성을 가지지 않은 퀴어한 모습들도 무척 사랑한다. 나는 레즈비언에 가깝지만 게이도 사랑스럽고 좋다. 나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지만 바이너리인 트랜스 여성이나 트랜스 남성을 보면 반갑고 기쁘다. 나는 젠더교란이 안 되는, 그저 나의 지정성별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형이기에 젠더교란적 외모를 가진 이들을 (그들이 자신을 어떻게 설명하든 간에) 동경하며 그들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런 퀴어함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퀴어페스를 썼다. 〈성균관 퀴어들의 나날〉 속에는 바이너리 트랜스젠더에 가깝게 읽을 수 있는 인물들도 나오고, 그들이 자신의 몸에 디스포리아를 느끼는 부분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섹슈얼리티는 에로틱하게 다루어진다. 나는 그런 것을 썼다. 그렇다면 나는 나와는 다른 성적 소수자들을 성적 대상화하는 ‘러버‘인 걸까?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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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 남성문화에 대한 고백, 페미니즘을 향한 연대
박정훈 지음 / 내인생의책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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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바가 귀엽게 웃었다며 "호감 있는 것 맞지?"라고 글 올리는 남자와 부하 직원에게 "네가 꼬리쳤잖아"라면서 만나달라는 남자, 두 남자의 거리는 멀어 보이지만, 공유하는 정서는 동일하다. ‘여성은 일단 성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주류 남성성이 변하지 않으면 이 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 가부장제 사회는 지금껏 자기중심적이고 여성과 온전하게 관계 맺을 줄 모르는 남자를 길러 왔다. 그래도 괜찮다고 믿었다. 하지만 페미니즘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그런 남성들로 인해 여성들이 얼마나 불쾌했는지, 고통받았는지 낱낱이 밝혀졌다. 그러면 남성은 행복했냐고? 아니, 그렇게 자란 남성도 불행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여성과의 소통에 끊임없이 실패하다 끝내 외로워지는 삶이 괜찮을 리 없다.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이론이자 운동이다. 동시에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비뚤어진 남성성을 바로잡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여성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남성을 만들어 가며, 기존의 남성성을 해체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남성들을 착각의 늪에서 구해 내고,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 맺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필요하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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