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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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내가 무슨 다른 도시에서 온 이방인이거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친구가 데리고 나타난 특이한 손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다. 나를 낳아 키우고 나와 18년을 한집에서 살았던, 내 반쪽인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기엔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니까 내가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듯이 엄마 역시 여태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우리는 세대와 문화와 언어가 갈라놓은 단층선 반대편에 각각 던져져 기준점도 없이 죽도록 헤매기만 했을 뿐 서로가 서로의 기대를 생판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겨우 요 몇 년 전에 와서야 우리는 불가사의한 문을 열어 서로를 수용할 심리적 공간을 만들어내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며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탐색했다. 그러다 가장 풍성한 이해의 과실을 거둬들여야 했을 시간들이 그만 난폭하게 잘려나가고 말았고, 이제 나는 열쇠도 없이 남은 비밀들을 혼자서 해독해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 P285

엄마의 장례식이 끝나고부터는 우리집이 꼭 우리에게서 등을 돌린 것처럼 보였다. 엄마의 취향이 그대로 반영된 편안했던 공간이 이제는 우리 모두의 실패를 상징하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가구도 장식품도 다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엄마가 살아 계신 동안 넘치게 듣던 이야기들을, 별의별 역경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암환자들을 떠올리게 했다. 누군가의 이웃이 명상과 긍정적인 생각으로 사형선고를 물리친 이야기. 림프샘 구석구석까지 암이 퍼졌지만 깨끗한 신장을 떠올리는 방법으로 기적을 일궈내서 지금은 꽤 차도가 보인다는 이야기. 낙관적인 태도만 가진다면 뭐든지 가능할 것 같았 - P286

다. 어쩌면 우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믿음이 충분치 않았고, 엄마에게 남조류를 억지로라도 충분히 먹게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이 우리를 미워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암과 싸워 승리를 쟁취한 다른 가족들도 있지만 우리는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갖가지 감정이 밀려와 우리 가슴을 찢어놓았지만 그런 패배감 또한 이상할 정도로 당혹스러웠다. - P287

우리는 거의 매일 이른 저녁을 먹고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에 기어들어가서 열네 시간에서 열다섯 시간을 잤다. 우울처럼 슬픔도 가장 간단한 일조차 해내기 힘들게 했다. 이 나라의 온갖 좋은 것이 우리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우리는 멋진 경관에 무감각했고 무감동했으며 조용히 비참했고 서로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 P290

"네 엄마가 나한테 경고하더구나. 네가 날 제멋대로 휘두르게 놔두지 말라고."
아빠는 이제 해서는 안 될 말까지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자기가 나한테 하고 싶던 말을 하려고 죽은 사람의 입까지 빌리다니. - P296

"그래요? 엄마가 아빠 얘기는 얼마나 많이 했게요, 참." 내가맞받아쳤다. "밤을 새워도 다 못 할 정도지만 저는 안 할래요."
엄마는 아빠를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빠를 깨진 접시에 비유했다고도 알려주고 싶었다. 엄마가 언제 이런 말을 했는지,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한 건지는 아느냐고 묻고 싶었다. 머릿속에 그런 말들이 계속 떠다녔다. 나도 안다. 내가 자라면서 받아온 혜택을 당연하게 여기고, 나를 가장 사랑한 사람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어쩌면 별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우울증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것을, 그때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난 6개월 동안 완벽한 딸이 되려고, 10대 때 일으킨 말썽을 벌충하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그런 내게 아빠는 마치 그 말이 엄마가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한 것이다. 그 아이를 조심해, 당신을 제멋대로 휘두르려 할 거야, 라고. 아빠가 편안한 아파트 침대에서 잠자는 3주 동안 병원 소파에서 잠을 잔 사람이 바로 나란 걸 엄마는 알았을까? 요강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해대는 아빠 대신 쭉 그걸 비운 사람이 나라는 것은? 엉엉 우는 아빠 때문에 나는 번번이 감정을 꿀꺽 삼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도? - P297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들을 분류하는 일은 고된 노역처럼 느껴졌지만 다 끝내고 나니 기나긴 고생 끝에 마침내 어떤 출구에 도달한 듯한, 긴 문장에 마침표를 찍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물건이 부모 잃은 아이처럼, 물체, 짐짝처럼 보였다. 한때는 존재이유가 있었던 것들이 거추장스러운 무언가로 변 - P314

해 있었다. 특별한 식사를 위해 고이 모셔둔 볼들은 이제 그냥 정리해야 할 그릇이, 내 갈 길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되었다. 어렸을 때 마법의 단지인 척하면서 갖고 놀던, 내가 상상한 이야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초항아리는 이제 또하나의 버릴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 P315

아주머니가 요리법을 꽁꽁 숨겨 내겐 오묘해 보이기만 하던 음식을 정복하자 기분이 좋아져서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내가 원한 전부였다. 몇 날 며칠을 화려하고 값비싼 - P319

고기 요리와 갑각류 요리 그리고 버터와 치즈와 크림 배합을 달리한 갖가지 감자 요리를 만든 끝에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진짜로 원한 요리는 바로 이것이란 걸. 이 담백한 죽은 난생처음으로 내게 깊은 만족감을 준 요리였다. 망치 여사는 온갖 비법을 한 단계 한 단계 전수해주었다. 마치 어느 때고 의지할 수 있는 디지털 후견인처럼 내가 몰랐던 지식, 의당 내 것이어야 할 지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마지막 숟가락을 떠서 입에 넣고는, 보드라운 죽이 엄마의 갈라진 혀를 살포시 감싸는 순간을 상상했다. 그리고 따뜻한 액체가 천천히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뒷맛을 천천히 음미했다. - P320

나는 이모의 제안을 받아들이기가 망설여졌다. 이모가 유진에 다녀간 뒤로 이모와 좀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지만 언어 - P325

의 장벽이 너무 크게 느껴졌다. 내가 나누고 싶은 감정의 뉘앙스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더는 이모의 생활을 침범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이모와 이모부의 아파트는 죽어가는 손님들을 위한 회전문이 되다시피 했다. 이제 엄마는 돌아가셨고, 이모에게 그 어두운 시간을, 이모가 짊어져야 할 것처럼 느꼈을 그 무거운 짐을 상기시키는 일이야말로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 P326

이제 모두 유령이 되었다. 가운데에 있는 사람만 빼고, 나는 나미 이모의 시선으로 사진을 보려고 했다. 사진에서 가족들의 형체가 서서히 녹아 사라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영화에서 등장인물이 과거로 돌아가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을 바꿔놓았을 때처럼.
엄마는 나미 이모가 점쟁이를 찾아간 이야기를 내게 해준 적이 있다. 점쟁이 말이, 이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사람이라 했다. 다른 이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쉴 곳이 되어주고, 가만히 서서 누구든 자기 아래에 눕는 사람에게 그늘이 되어 - P327

줄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지만 매양 발밑에서 작은 도끼가 밑동을 찍으면서 천천히 이모의 기운을 빼간다고.
그런 말을 들었던 나로서는 내가 그 작은 도끼인가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모는 자기 가정만의 조용하고 고요한 사적인 공간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나는 그걸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모는 유일하게 남은, 내 심경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 P328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져 벽에다 머리를 들이받고 싶은심정이었다.
"울지 마, 미셸."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자 이모가 말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았다.
"엄마가 항상 제 엄마가 죽었을 때나 우는 거라 했거든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도 노상 그렇게 말했어." 이모가 말했다. "너랑 네 엄마 똑같네."
나는 너무 놀라 말문이 막혔다. 항상 말도 못하게 잔인한 말이라고 생각했던 그 모토가, 엄마만의 독특한 양육법에서 나온 거라고 믿었다. 내가 울고불고 떼를 쓸 때마다, 무릎이 까지거나 발목을 접지를 때마다, 남자친구와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헤어지고 내게 온 기회를 놓치고 나의 평범함과 단점과 실패를 마주할 때마다 엄마는 그 좌우명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었다. 라이언 월시가 플라스틱 망치로 내 눈을 가격했을 때도. 전 남자친구가 먼저 내게 이별을 고했을 때도. 우리 밴드가 청중이 한 명도 없는 공연장에서 형편없는 연주를 했을 때도. 엄마가 그 말을 할 때마다 나는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다. 제발 지금 내 기분을 그렇게 뭉개버리지 말아줘, 라고. - P337

제발 나를 안아달라고, 그 기분 속에 빠져 있게 내버려둬달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내가 아이를 키우게 된다면 절대 그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그 비정한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이라면 누구든 나만큼이나 그 말을 싫어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바로 우리 엄마가 밤낮으로 그 말을 듣고 자란 사람이었다니.
"제가 어렸을 때 엄마가 말해줬어요. 아기를 없앤 적이 있다고요." 낙태라는 단어를 몰라 나는 한국말로 이렇게 말했다. "엄마는 비밀이 참 많았어요."
"아이 노우." 이모가 영어로 말했다. "아이 싱크…… 유어 맘싱크…… 컴 투 코리아 투 하드 위드 투 베이비."
이모는 두 아기를 양팔에 하나씩 안고 있는 몸짓을 해 보였다. 오래전에 엄마가 내게 들이퍼붓듯이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내가 낙태의 원흉이라고 절대 믿지 않았지만 그에 상반되는 이유도 찾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나는 그저 어딜 간다는 게 마냥 신나기만 했지 그 여행이 엄마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나라가 엄마의 얼마나 중요한 일부였는지는 까맣게 몰랐다.
나는 궁금해졌다. 만일 엄마를 가장 잘 아는 우리 세 사람, 그러니까 아빠와 나미 이모와 나에게 엄마가 남겨둔 10퍼센의 부분이 제각각 다르다면, 우리가 같이 그 숨겨진 부분을 짜맞추어 엄마의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지. 과연 내가 엄마의 - P338

모든 걸 알게 될 수 있을지, 엄마가 또 무슨 단서를 남겼을지도. - P339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모와 같이 음식 먹는 일이 나에게 얼마나 뜻깊은지를 이모에게 설명하려 애썼다. 음식을 통해 엄마에 대한 기억들을 되살리려고 애써왔다는 것도, 계씨 - P340

아주머니 때문에 내가 진짜 한국인이 아닌 것처럼 느끼던 순간도. 내가 된장찌개와 잣죽을 직접 만들었던 것은, 엄마를 돌보는 데 실패한 기분을 심리적으로 만회해보려는 노력이자 한때 내 안에 깊숙이 새겨져 있다고 느낀 문화가 이제 위협받는 기분이 들어 그것을 보존하려는 노력이었다는 것도. 하지만 적절한 단어들을 찾아낼 수 없었다. 번역 앱에 기대기에는 문장이 너무 길고 복잡했다. 그래서 반쯤 포기하고 그냥 이모의 손만 그러잡았다. 우리 두 사람은 얼음처럼 찬 새콤한 소고기 육수에 담긴 국수만 계속 후루룩거리며 먹었다. - P341

피터와 내가 여행 다닌 장소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고 싶어한 곳이었다. 우리의 마지막 여행이 병원 격리 생활로 - P344

변해버리기 전에 엄마가 나를 데려가려 한 곳이었다. 엄마가 나와 함께 만들려던 마지막 추억이고, 엄마가 나를 키우며 내가 사랑하도록 만든 것의 원천이고, 내가 기억했으면 하는 맛이고, 내가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감정이었다. - P345

대체로 나는 꽤 잘 적응했다. 대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이며 어른의 제대로 된 직업이며 모든 게 너무 낯설었지만, 바꿀 수 없는 일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만 몰입하려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가끔씩 나도 모르게 지난날이 떠올라 괴로웠다. 뜬금없이 고통스러운 생각의 고리에 불이 붙으면 그동안 억누르려 애쓰던 모든 기억이 내 마음 맨 앞자락으로 훌렁 삐져나오기 일쑤였다. 엄마의 희뿌연 혀, 보라색 욕창 자국, 내 손에서 빠져나가는 엄마의 무거운 머리, 저절로 번쩍 떠진 눈, 하지만 내면의 비명이 텅 빈 가슴을 뚫고 나와 온몸을 소용돌이치며 뒤흔들 뿐, 그 감정이 제대로 해소되지는 않았다. - P353

내가 한 음식은 모두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각각의 향과 맛이 잠깐이나마 나를 멀쩡했던 우리집으로 데려다주었다. 닭 - P354

육수를 내서 만든 칼국수는 어느 날 오후 쇼핑을 마치고 명동교자에서 점심을 먹었던 때로 데려다주었다. 줄이 얼마나 길던지 계단을 하나 다 채우고도 문밖으로 나와 건물을 한 바퀴 휘감을 때까지 이어졌다. 그 집 칼국수는 진한 소고기 육수와 전분기 많은 국수 때문에 국물이 어찌나 걸쭉하던지 젤리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엄마는 그 집 특유의, 마늘이 듬뿍 들어간 김치를 자꾸만 더 달라 했고, 이모는 공공장소에서 코를 푼다고 엄마를 야단쳤다.
바삭한 한국식 프라이드치킨은 은미 이모와의 싱글 파티를 떠올리게 했다. 밤마다 우리는 바삭한 치킨 껍질을 와작와작 씹어먹으며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핥고 생맥주와 무피클로 입가심했다. 그렇게 먹으면서 이모는 한국어 숙제를 도와주었다. 짜장면은 우리 한국 가족이 나지막한 거실 탁자에 옹기종기 둘러앉아 배달된 짜장면을 먹을 때, 할머니가 후루룩거리며 드시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주물 냄비에 기름 한 통을 다 부어서 밀가루, 계란, 빵가루를 수북이 묻힌 돼지고기를 튀겨 돈가스도 만들었다. 돈가스는 엄마가 점심 도시락으로 자주 싸주셨던 일본식 튀김 요리다. 나는 삶은 숙주나물과 두부를 꽉 짜서 부드러운 얇은 만두피에 한 숟가락씩 올리고 가장자리를 야무지게 꾹꾹 눌 - P355

렀다. 만두가 하나하나 완성될수록, 모양이 완벽하게 고른 망치 여사의 만두와 엇비슷해졌다. - P356

2주간 발효된 김치를 꺼내 먹으니 마침맞게 좋았다. 그것은 끼니때마다 내 식사를 완벽하게 해주는 이상적인 반찬이자 나의 역량과 수고를 매일매일 상기시켜주는 음식이었다. 그 모든 과정 덕분에 김치의 진가를 더 제대로 알게 됐다. 어렸을 땐 식사가 끝나고 접시에 김치 몇 조각이 남아 있으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지만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김치를 만들어봤기에 남은 김치를 꼬박꼬박 옹기에 도로 집어넣었다.
그때부터 한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새로운 치유법이었다. 오래된 김치는 찌개나 전이나 볶음밥에 넣어 먹고, 새로 담근 김치는 반찬으로 먹었다. 내가 먹을 양보다 더 많이 김치를 만들었을 땐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부엌에 식료품 유리병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병에 종류별로 담긴 김치는 익은 정도가 제각각 달랐다. 조리대 위에선 담근 지 4일 된 총각김치가 새콤하게 익어갔고, 냉장고에선 갓 담근 깍두기가 수분을 내보내고 있었다. 도마 위에는 커다란 배추 한 포기가 반으로 쩍 갈라진 채 소금물에 절여질 채비 - P360

를 하고 있었다. 멸치액젓, 마늘, 생강, 고춧가루의 풍미 속에 익어가는 향긋한 채소 향이 그린포인트의 작은 부엌에 물씬 풍겼다. 나는 엄마가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절대 사랑에 빠지지 말라고 주야장천 말했던 것을 떠올렸다. 너한테서 항상 김치 냄새가 날 거야. 그 냄새가 네 땀구멍으로 배어나올 테니까.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말했다. "당신이 먹는 것이 곧 당신이다."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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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마트에서 울다
미셸 자우너 지음, 정혜윤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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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나는 H마트에만 가면 운다.
H마트는 아시아 식재료를 전문으로 파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H는 한아름의 줄임말로, 대충 번역하자면 "두 팔로 감싸안을 만큼"이라는 뜻이다. 한국에서 조기 유학 온 아이들은 고국에서 먹던 갖가지 인스턴트 라면을 사러, 한인 가족들은 설날에 해 먹을 떡국 떡을 사러 이곳에 온다. 큼직한 통에 담긴 깐마늘도 여기서만 살 수 있다. 한국 음식을 해 먹는 데 마늘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지를 제대로 알아주는 곳은 이곳뿐이라는 말이다. H마트는 일반 슈퍼마켓 매대 중 달랑 한 칸을 차지하는 ‘세계 전통 식품‘ 코너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이곳에서 - P9

는 스리라차 소스 병 옆에 고야 통조림을 쌓아두지 않는다. 대신 오만 가지 반찬이 있는 냉장식품 코너도 있고, 만두피를 구비해놓은 냉동식품 코너도 있다. 그 앞에서 나는 엄마의 계란 장조림과 동치미 맛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다가, 엄마와 둘이서 식탁에 앉아 얇은 만두피에 다진 돼지고기와 부추 소를 넣고 만두를 빚으며 보낸 그 모든 시간을 떠올리면서 만두피 한 덩이를 집어든다. 그러다가 건조식품 코너에서 훌쩍이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제 전화를 걸어, 우리가 사 먹던 김이 어디 거였냐고 물어볼 사람도 없는데, 내가 여전히 한국인이긴 할까? - P10

나의 슬픔은 뜬금없는 순간에 들이닥치기 일쑤다. 나는 욕조에 엄마의 머리카락이 허다하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게 어떤 기분인지에 대해서는, 5주 동안 날마다 병원에서 밤을 지새운 일에 대해서는 태연한 얼굴로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H마트에서 낯모르는 아이가 뻥튀기를 담은 비닐봉지를 양손에 하나씩 집어드는 모습에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버린다. 원반 모양의 그 앙증맞은 쌀과자는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엄마가 내 곁에 있고, 방과후에 둘이서 동글납작한 스티로폼처럼 생긴 과자를 한입 크기로 입에 넣고 아작아작 - P12

씹으면 그것이 혀 위에서 설탕처럼 사르르 녹아버리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식당가에서 어느 할머니가 해물 짬뽕을 먹다가 새우 머리와 홍합 껍데기를 자기 딸 밥뚜껑에 건져내는 모습을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머리카락은 곱슬곱슬한 반백이고, 양쪽 광대뼈는 복숭아마냥 볼록 솟았고, 눈썹에는 오래된 문신 자국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는 얼굴. 나는 70대의 엄마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한국 여자들이 할머니가 되면 정해진 수순처럼 따르는 그 똑같은 파마머리 대열에 엄마도 동참했을지도, 엄마가 팔짱을 끼고 아담한 몸을 내게 기댄 채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당가로 올라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우리는 둘 다 엄마가 ‘뉴욕 스타일‘이라고 말한 올 블랙 차림일 것이다. 엄마가 생각하는 뉴욕 이미지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유행하던 시절에 영영 머물러 있었으니까. 엄마는 이태원 뒷골목에서 구입한 짝퉁 핸드백이 아니라 평생 그리도 갖고 싶어하던 샤넬 누빔 가죽 진품 핸드백을 들었을 것이다. 손과 얼굴은 QVC 홈쇼핑 채널에서 산 노화 방지 크림 때문에 살짝 끈적일 테고, 내가 이상하게 생겼다고 사지 말라 했던 하이톱 운동화를 신었을 것이다. "미셸, 요즘 한국에서는 연예인들이 다 이걸 신고 다닌단다." 엄마는 내 코트에 생긴 보풀을 - P13

뜯어내면서 잔소리를 해대겠지만―어깨가 굽었다는 등, 신발좀 새로 사라는 등, 자기가 사준 아르간 오일 트리트먼트를 대체 왜 안 쓰냐는 둥―어쨌든 우리는 함께 있을 터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부아가 나서 죽을 지경이다. 내가 생판 알지도 못하는 이 한국 노인에게 짜증이 난다. 이 여인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단 사실에 화가 치밀어오른다. 마치 생면부지의 이 여인이 살아남은 것이 내가 엄마를 잃은 것과 무슨 연관이라도 있는 것처럼, 누군가는 우리 엄마 나이에도 자기 엄마를 곁에 둘 수 있다는 사실에 골이 난다. 저 노인은 여기서 이렇게 매운 짬뽕을 후루룩거리며 먹고 있는데, 어째서 우리 엄마는 그렇지 않은거지? 분명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을까. 인생은 불공평하고, 때로는 분별없이 남 탓을 해보는 게 아주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까. - P14

나는 지난 5년 사이 이모와 엄마를 모두 암으로 잃었다. 그러니 내가 H마트에 가는 것은 갑오징어나 세 단에 1달러짜리 파를 사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을 찾으려고 가는 것이기도 하다. 두 분이 돌아가셨어도, 내 정체성의 절반인 한국인이 죽어버린 건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는 것이다. - P22

그런 내게 H마트는 도무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기억,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뼈만 남은 엄마의 몸과 하이드로코돈 복용량을 기록하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대신 두 분이 그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떠올리게 해준다.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 고리 모양의 달콤한 짱구 과자를 열 손가락에 끼고 흔들어대던 모습, 한국 포도를 먹을 때 껍질에서 알맹이만 쪽 빨아먹고 씨를 훅 뱉는 법을 내게 가르쳐주던 모습을. - P23

나는 한글학교 밖에서는 한국인 친구가 없었다. 저녁식사시간이면 겉도는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그래서 30분 동안 쉬는 시간마다 우리 놀이터가 되어준 주차장만 뱅뱅 돌았다. 농구대도 하나 있었는데 거긴 늘 나이 많은 남자아이들 차지였다. 나머지 아이들은 연석 위에 앉아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려 애썼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가 다 한국인이었다. 나는 그들이 두 이민자의 합동작전으로 갖추게 되었을 순종 - P140

이라는 덕목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고군분투했다. 그들은 자기 엄마가 사준 선캡 모자를 군말 없이 쓰고 다녔고, 일요일이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갔다. 기독교는 좁은 한국 지역사회에서 사실상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엄마는 일찌감치 교회에서 빠져나왔다. 십중팔구 내가 혼혈아로 태어나 자란 탓이었을 텐데, 어쨌든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이 나쁜 아이처럼 느껴져 더 말썽을 피웠던 것 같다. - P141

그날 밤 엄마 옆에 누워 있으려니 어렸을 때 차가운 발을 녹이려고 엄마 넓적다리 사이에 슬며시 발을 끼워넣던 일이 떠올랐다. 엄마는 부르르 떨면서 속삭였다. 널 편안하게 해줄 수만 있다면 엄마는 어떤 고통도 감수할 거라고, 그게 바로 상대가 너를 진짜 사랑하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 부츠가 떠올랐다. 내가 발이 까지지 않고 편안하게 신을 수 있도록 엄마가 미리 신어 길들여놓은 부츠가. 나는 이제 어느 때보다도 간절히 바랐다. 부디 내가 대신 고통받을 방법이 있기를, 내가얼마나 엄마를 사랑하는지 엄마에게 증명할 수 있기를, 엄마의 병상에 기어들어가 엄마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키기만 하 - P149

면 그 무거운 짐을 내가 송두리째 흡수해버릴 수 있기를, 인생.
이 공평하려면 자식 된 도리를 다할 기회가 주어져야 할 것 같았다. 엄마가 나를 자기 안에 품고 다닌 몇 달 동안 엄마의 온 뱃속 장기들이 나라는 존재에 밀려나 한덩어리로 뭉쳐 있었고, 내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동안 엄마는 어마어마한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그 고통을 보상하려면 지금 내가 이 고통을 대신 짊어져야 마땅했다. 그것이 외동딸에게 주어진 의례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가까이에 누워 있는 것밖에 없었다. 엄마의 지원군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규칙적으로 느리게 울리는 기계 신호음과 나지막이 쌔근거리는 엄마 숨소리를 들으면서. - P150

나는 아빠의 팔을 획 뿌리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했다. 연민이든 공감이든, 동지애든 동정심이든 하여간 그 비슷한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원망하는 마음만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빠는 리스크가 크고 승산이 희박한 게임에서 전혀 달갑 - P154

지 않은 파트너였다. 이 사람은 내 아빠였고 나는 아빠가 침착하게 나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나를 들들 볶아대서 이 절망스러운 길을 외롭게 걸어가도록 하는 게 아니라. 나는 아빠 앞에서 울 수조차 없었다. 그렇게 하는 순간 아빠는 분명 내 슬픔에 자기 슬픔을 얹을 터였다. 누가 엄마를 더 사랑하는지, 누가 더 상실감이 클지 경쟁이라도 하듯이 호소하면서. 게다가 아빠는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될 말까지 집이 떠나가라 말해서 내 속을 있는 대로 뒤집어놓았다. 엄마가 이 병을 이겨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어쩌면 이제 엄마 없이 우리 둘만 달랑 남게 될 수도 있다고. - P155

엄마는 주저앉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손을 머리에 대고 죽 훑어내리더니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전신 거울 앞에서, 나는 내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 동안 엄마가 포즈 취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똑같은 거울 앞에서 엄마가 흠잡을 데 없는 팽팽한 피부를 유지하기 위해 크림을 바르고 또 바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똑같은 거울 앞에서 엄마는 이 옷 저 옷을 입어보고, 모델처럼 완벽한 자세로 패션쇼를 하고, 자부심에 가득차서 자기 모습을 점검하고, 새 핸드백을 들거나 가죽 재킷을친 채 포즈를 취했다. 그 거울 앞에서 엄마는 한껏 허영에 들떠 한참을 머물렀다. 그런 거울 속에, 이제는 알아볼 수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는 사람이 있었다. 하나도 달갑지 않은 - P157

낯선 사람이. 엄마는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엄마 옆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고 있는 엄마를 감싸안았다. 나 또한 몰라볼 정도인 거울 속 모습에, 우리 인생에 들어온 이 거대한 악마의 물리적 현현에, 나도 엄마와 같이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는 대신 나는 몸이 뻣뻣해지고, 심장이 단단해지며, 감정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내 안의 목소리가 명령했다. ‘울면 안 돼. 네가 울면 지금 우리가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말아. 네가 울면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않을 거야.‘ 그래서 나는 울음을 삼키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의의 거짓말로 엄마를 달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나 스스로도 진심으로 그걸 믿게 하려고.
"그냥 머리카락이잖아, 엄마. 금방 다시 자랄 거야." - P158

사춘기란 그런 것이었다. 중학교라는 사회화 훈련 시설에서 시작되는 하나의 거대한 자학적인 농담. 중학교는 아이들이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민감한 3년이라는 시간을 견디 - P163

는 곳이다. 이미 D컵 브라를 입을 정도로 가슴이 커지고 오럴 섹스를 아는 여자아이들이, 갭에서 산 어린이 브라를 입고 아직도 만화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 있는 여자아이들 옆에 앉아있는 곳이다. 우리의 독특한 부분은, 다수가 생각하는 전형적이고 일반적인 아름다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부분은 고통스러운 마맛자국이 되어 자기부정이 유일한 치료법이 되는 때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화장실에 있었을 때, 달리기의 은총을 받지 못한 수치심에서 아직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를 향해 반 친구가 다가오더니, 나중에 지겹도록 듣게 될 질문을 했다.
"너 중국인이니?"
"아니."
"그럼 일본인이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음, 넌 그럼 뭐야?"
나는 그 아이에게 아시아 대륙에는 두 나라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당황한 나머지 아무 대답도 못했다. 내 얼굴에, 원래 살던 곳에서 추방된 존재로 읽어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무슨 외계인이나 이국적인 과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넌 그럼 뭐야?"는 열두 - P164

살인 내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내가 눈에 띄는 사람이고, 존재를 식별할 수 없는 사람이고,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임을 기정사실화하기 때문이었다. 그전까지 나는 늘 내 절반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지만, 이진 갑자기 그것이 내 본질적 특징이 될까봐 두려워져 그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나는 어머니에게 이제 더는 점심 도시락을 싸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인기 있는 아이들 무리에 끼어 학교 밖 가게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언젠가 나는 커피숍에 같이 간 아이가 내가 주문한 음식으로 나를 판단할까봐 그 아이와 똑같은 음식을 주문한 적도 있었다. 플레인 베이글과 크림치즈 그리고 너무 달지 않은 코코아. 정말이지 밍밍함 그 자체였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조합이었다. 이제 사진을 찍을 때 손가락으로 V 자를 만들지도 않았다. 아시아 관광객처럼 보일까봐 두려워서였다. 친구들이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나는 콤플렉스를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는 건 죄다 아시아인 성애 때문이며,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게 혹시 우리 반 남자애들이 하는 지저분한 농담, 이를테면 아시아 여자는 모로 누운 성기를 가졌고 한번 사귀면 떨어져나갈 생각을 안 한다는 이야기 때문이 아닌지 의심하면서 스스로를 고 - P165

문했다.
최악은 내가 ‘정미‘라는, 엄마의 이름을 딴 미들 네임이 없는 척했다는 점이다. 미셸 자우너 같은 이름은 서류상으로 보면 전혀 튀지 않는다. 나는 그 생략이 세련되고 현대적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극단적인 상황이라도 피하려는 듯이, 이를테면 사람들이 실수로 정미를 ‘차우멘‘이라고 발음하기라도 하면 또다시 느끼게 될 굴욕감을 피하려는 듯이.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냥 한국인이 되는 게 곤혹스러워진 것이었다.
"학교에서 달랑 나 혼자 한국 사람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엄마는 몰라." 나는 엄마한테 불평을 쏟아냈다. 엄마는 그런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근데 너는 한국 사람이 아니야. 너는 미국 사람이잖아." - P166

아주머니는 우리가 아무리 설득해도 휴식을 거부하고 엄마와 온종일 같이 시간을 보냈다. 엄마의 발을 주무르고, 엄마한테 필요한 게 있을 때마다 뭐든지 다 해 바쳤다. 내가 잠깐 엄마와 단둘이 있고 싶다는 눈치를 내비칠 때도 엄마 곁을 떠날 생각을 안 했다. 아주머니가 그럴수록 나는 죄책감만 더 들었다. 운동하러 가느라 한 시간만 집밖에 있어도 마음이 불편했다. 두 분은 한 몸처럼 움직였고, 그래서 아주머니에게 빚진 기분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쩐지 조금씩 내 자리에서 밀려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최악의 상황이 닥치는에 대한 공포를 내 마음속 가장 먼 곳으로 밀어내고 있었지만, 마음속 깊은 곳 한편에서는 지금 이 시간이 엄마와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으리란 걸 알았고, 아직 뭐든 할 수 있을 때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을 정말 소중하게 보내고 싶었다. - P174

"뭐라고 쓰여 있어?" 아빠가 물었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계속 읽어내려갔다. 약기운만 아니었다면 우리가 불편해하고 있단 걸 눈치챘을 테지만, 당시 엄마의 상태로는 우리 마음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그냥 우리끼리 하는 얘기예요."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이분은 왜 여기 있는 거지? 남편이 그립지도 않은가? 60대 여자가 조지아에 있는 집을 두고 여기 와서 아무 보상도 없이 한 달이 넘도록 우리와 같이 사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는 아주머니에게 내가 모르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그냥 망상에 빠진 건지 그보다 더 나쁘게는 이 여인이 나보다 엄마를 더 잘 보살펴서 질투심에 사로잡힌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아, 그처럼 사심 없이 돕겠다고 나선 사람을 그리도 못마땅해했다니, 나란 사람은 대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었던 건지.
갈수록 약이 독해지면서 엄마는 시종일관 졸고 더 둔감해져서 소통하기가 날로 어려워졌다. 엄마는 이제 슬금슬금 모국어로 말을 해서 특히 아빠를 더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30년 동안 능숙한 영어로 말해온 엄마이기에, 엄마가 영어로 바꿔 - P181

말하는 걸 까먹기 시작해 우리가 소외되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시시때때로 아주머니가 영어로 통역해달라는 아빠의 말을 무시하고 한국말로 대답할 때면 아주머니가 그 상황을 이용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 P182

"정말 그렇게 드셔도 괜찮을까요?" 내가 물었다.
나는 원래 노른자가 주르륵 흐르게 조리한 계란을 좋아했지만 그때는 엄마의 병 때문에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우리에게 식중독은 더는 연례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는 도박이었다. 아주머니는 내 말을 무시하고 자기 계란을 깨는 데만 집중했다.
"그냥 걱정돼서 그래요. 지금 면역력이 너무 약한 상태라." 내가 덧붙였다. "엄마가 배탈이라도 나면 안 되니까요."
아주머니는 마시던 물잔에서 작은 이물질이라도 발견한 양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에서는 다들 이렇게 먹어." 아주머니가 말했다. 엄마는 꼭 말 잘 듣는 반려동 - P184

물처럼 아주머니 옆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엄마가 나를 편드는 말을 해주길 바랐지만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희뿌옇게 된 자기 계란만 양손으로 꼭 붙들고 있었다.
나는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어서, 갑자기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꾹꾹 눌러 간신히 참았다. 한때 어떻게든 미국 교외의 또래 사이에 섞이려 안간힘을 쓰며 청소년기를 보냈고, 내 소속을 증명해야 할 무언가로 느끼면서 성인이 되었다. 내가 어느 편에 설지, 누구에게 동조할지 결정하는 일은 번번이 남의 손에 맡겨졌지 내 스스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두 세계 중 어느 세계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었다. 노상 반만 인정받고 반은 이방인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나보다 그 세계의 지분이 더 많은 누군가가, 온전하고 완전한 누군가가 자기 멋대로 날 쫓아낼까봐 전전긍긍하면서. 오랫동안 미국이라는 나라에 속하려고 별짓을 다 했다. 정말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바랐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가 바란 것은 오직, 나를 밀어낸 두 사람에게 한국인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나에게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는 우리 세상 사람이 아니야. 네가 아무리 애써본들 네 엄마한테 필요한 게 뭔지 결코 제대로 알지 못할 거야. - P185

아빠와 나는 인천공항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고 엄마는 서울에 남았다. 은미 이모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버스가 도시를 빠져나가면서 불현듯 서울이 낯설게 느껴졌다. 내 어린 시절의 목가적인 유토피아가 뭔가 다른 곳으로 변해버린 것처럼, 이제 더는 할머니와 은미 이모가 없는 그곳은 내가 속한 곳이라는 느낌이 조금 희미해졌다. - P194

엄마는 처음으로 우는 나를 혼내지 않았다. 아마도 이제 더는 자신 격언을 들먹일 여지가 남아 있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이제야말로 내가 그동안 참고 참아온 눈물을 터뜨려도 될 때가 됐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엄마가 말했다.
내게 너무도 익숙한 한국말. 내가 평생 들어온 그 다정한 속삭임. 어떤 아픔도 결국은 다 지나갈 거라고 내게 장담하는 말. 엄마는 죽어가면서도 나를 위로했다. 엄마의 모성이, 엄마가 느꼈을 테지만 능숙하게 숨겼을 무진장한 공포를 제압해버린 것이다. 엄마는 무슨 일이든 어찌어찌 잘 풀릴 거라고 내게 말해줄 수 있는,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난파선이 소용돌이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담담히 지켜보고 있는 태풍의 눈과도 같았다. - P203

그때까지 나는 살아가기와 죽어가기는 명백히 다르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나는 식물인간으로 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 - P214

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터였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이미 찢겨나간 육체적 자율성의 조각들은 하루하루 누더기 꼴이 되어갔고, 이제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은 그 차이를 분간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엄마는 병상에 묶여 혼자 걸을 수도 없었고 각종 장기도 더는 잘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도 팔에 연결된 수액 주머니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로 섭취하다가 이제는 기계의 도움 없이는 숨도 혼자 못 쉬는 지경에 이르렀다. 살아간다고 할 수 있는 모습에서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 P215

사실 유일하게 확신한 것은, 혹시 내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면 결혼 준비를 빈틈없이 해줄수 있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을 거란 사실이었다. 만일 엄마가 그 자리에 없다면 틀림없이 나는 엄마라면 어떻게 계획했을지 궁금해하면서 하루를 다 보낼 것 같았다. 상차림이 싸구려로 보이진 않는지, 꽃 장식이 그저 그렇진 않은지, 화장이 너 - P218

무 진하진 않은지, 드레스가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닌지 온종일 궁금해하겠지. 엄마의 승인을 받지 않는다면 절대로 내가 예쁘다고 느끼지 못할 텐데. 엄마가 그 자리에 없다면 보나마나 나는 쓸쓸한 신부가 될 것이다. - P219

나미 이모와 성용 오빠는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게 뻔했다. 결혼식 전에 엄마가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너무 아파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면 또 어떡하고? 이미 어수선한 분위기에 중압감을 더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했다. 하지만 내게는 결혼식이 암울한 상황에 한줄기 빛이 되어줄 신의 한 수처럼 느껴졌다. 이제 혈전 용해제와 펜타닐 대 - P220

신 키아바리 의자와 마카롱과 예식 구두를 가지고 갑론을박을 벌일 수 있다. 욕창과 오줌줄 대신 배색과 올림머리와 새우 칵테일을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다. 결혼식은 우리 모두가 반드시 지켜내야 할 무엇이자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될 축하 행사였다. - P221

엄마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을 것이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까운 사이로 새롭게 태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뻔뻔할 정도로 공포에 떨었다. 내게서 좀 떨어져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놓고 겁을 냈다. 어떻게든 이 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쳤고, 종내는 나를 두고 혼자 어디로 가버릴 게 불 보듯 - P257

뻔했다. - P258

‘사랑스럽다‘는 말은 엄마가 굉장히 좋아하는 형용사였다. 엄마는 나를 딱 한 단어로만 표현해야 한다면 ‘사랑스럽다‘는 말을 고를 거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에게는 그 단어가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열정을 아우르는 말처럼 느껴졌나보다. 그것은 엄마의 묘비명에 새겨넣기에도 딱 알맞은 단어였다. 자애로운loving 엄마는 남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지만 사랑스러운lovely 엄마는 온전히 자신만의 매력을 지닌 사람이니까. - P268

"이제 우리가 서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게 돼서 너무 좋지 않아?"
대학생 때 언젠가 집에 와서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내가 10대이던 시절에 서로에게 입힌 어마어마한 상처가 어느정도 가라앉은 뒤였다.
"좋아." 엄마가 말했다. "내가 뭘 깨달았는지 알아? 너 같은 사람은 여태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는 거야." - P284

엄마의 사랑은 엄한 사랑 그 이상이었다. 무자비하고 단단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나약함이 설 자리는 털끝만큼도 내주지 않는 강철 같은 사랑이었다. 제 아이한테 가장 좋은 게 뭔지 열 발짝 앞서서 보는 사랑, 그 과정에서 아이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해도 개의치 않는 사랑이었다. 내가 다쳤을 때 엄마는 자신이 다친 것처럼 내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고, 다만 과잉보호에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 누구도 우리 엄마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나는 그 - P34

사실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울긴 왜 울어! 네 엄마가 죽은 것도 아닌데."
우리집에선 이 표현을 자주 썼다. 엄마는 미국 격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으므로 자기만의 것을 몇 가지 만들어냈다. "오직 엄마만이 너한테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 왜냐면 진짜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엄마뿐이니까 같은 말들을. 엄마가 일찌감치 나에게 가르쳤던 것 중에 지금 생각나는 말은 이런 거다. "너의 10퍼센트는 따로 남겨두어라." 누군가를 아무리 깊이 사랑하더라도, 혹은 깊이 사랑받는다고 믿더라도 절대 네 전부를 내주어서는 안 된다. 항상 10퍼센트는 남겨두어라. 네 자신이 언제든 기댈 곳이 있도록, "나도 네 아빠한테 내 맘을 온전히 다 내어주진 않는단다." 엄마는 이렇게 덧붙였다. - P35

"나 있어! 나 쌍꺼풀 있다고!"
"한국 여자들 중에 그걸 가지려고 수술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은미 이모랑 나미 이모도 했지. 근데 이모들한테 내가 이 말 했단 말은 하지 마."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깨닫지 못했지만, 엄마가 알려준 그 이야기는 엄마가 왜 그렇게 외모에 강박적으로 매달렸는지, 왜 그토록 브랜드를 애호하고 피부 관리에 그렇게 많은 시간을 썼는지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간의 행동이 엄마라는 사람의 얄팍한 불평과 변덕 탓이라기보다 엄연한 문화적 차이 때문이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음식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움 역시 엄마 나라 문화의 핵심 요소였다. 지금 한국은 성형수술 하는 사람의 비율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다. 20대 여자 세 명 중 한 명이 성형 시술 또는 수술을 받고, 그런 환경의 씨앗이 언어며 다른 문화 곳곳에 깊숙이 파묻혀 있다. 내가 잘 먹거나 어른들에게 제대로 인사하면 친척들은 - P59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예뻐." 예쁘다는 말이 착하다, 예의바르다는 말과 동의어로까지 사용되는 곳이다. 이렇게 도덕과 미학을 뒤섞어놓은 말은, 아름다움을 가치 있게 여기고 소비하는 문화로 일찌감치 자리잡았다.
사실 그때 당시 내 안에서는 백인이 되고 싶다는 복잡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그 정체가 무엇인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보게끔 해줄 도구가 없었다. 유진에서 나는 그저 학교에서 몇 안 되는 다인종 아이 중 하나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아시아인으로 생각했다. 나는 뭔가 다르고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처럼 느껴졌고, 내 외모를 칭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서울에서는, 내 옆에 있는 엄마의 모습을 내게서 설핏 찾아내고 고개를 끄덕이기 전까지는 대부분 내가 백인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내 ‘이국적인‘ 외모가 칭송할 만한 무언가가 된 것이다. - P60

때를 다 밀고 나서 엄마는 나와 함께 집에 가는 길에 H마트에 들러서 장을 보고 가자고 했다. 갈비를 좀 재워놓고 가면 엄마가 유진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은 고향의 맛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 거라면서. 나는 엄마가 다 쓰러져가는 우리집에 들어오는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엄마가 우리집의 온갖 누추함을 조목조목 집어내어 비판하거나 내가 해고됐을 때 그랬듯 신랄하 - P82

기 짝이 없는 직언을 날리면 받아들일 준비를 하면서. 하지만 엄마는 일언반구 평가의 말도 없이 그냥 부엌으로 갔다. 엄마는 벽에 기대어둔 자전거 컬렉션을 건드리지도 않고 좁은 통로를 용케 빠져나가고, 심지어 부엌 뒷벽에 뻥 뚫린 구멍을 못 본 체하는 아량까지 베풀었다. 그 구멍은 집주인이 자기 딴에는 꽁꽁 언 파이프를 녹인답시고 벽을 망치로 부수는 바람에 생겨난 것으로, 그때 분홍 단열재 솜을 뜯어내어 휑뎅그렁한 상태 그대로였다.
엄마는 부엌 찬장이 저마다 따로 놀고, 그릇은 하나같이 중고 할인점에서 구입한 것들 아니면 내 룸메이트 부모님 집에서 안 쓰는 걸 가져온 것들이라는 점에 대해서도 아무 논평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엄마가 내게 선물한 물건들―오렌지색 락앤락 통, 캘파론 팬―을 찾아냈고,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H마트에서 사온 고기를 도마 위에 펼친 다음 조리용 망치로 콩콩 두드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내게 뭐라 중얼거릴지 계속 기다렸다. 허름한 가구와 구석구석 쌓인 먼지와 이가 나가고 짝이 하나도 안 맞는 접시 외에도 엄마는 분명 내 눈에 들어온 것 이상을 보았을 텐데, 예전에 내 몸무게와 얼굴 주름과 자세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꿰뚫어보며 낱낱이 평가하고 지적하던 엄마니까. - P83

엄마는 내가 딱 이렇게 살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느라 평생토록 안간힘을 써왔다. 그랬던 엄마가 지금은 그냥 미소 띤 얼굴로 부엌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이다. 파를 썰고, 믹싱 볼에 사이다와 간장을 콸콸 붓고, 손가락으로 콕 찍어 맛을 보면서, 싱크대에 줄줄이 붙여놓은 바퀴벌레 덫에도 냉장고 손자국에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 듯, 그저 집밥의 맛을 남기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는 그동안 내가 원치 않는 무언가로 나를 만들어보려 한 자신의 노력이 결국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더이상 노력하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어차피 내가 이런 식으론 1년도 더 못 버티고 결국 엄마가 옳았다고 생각할 거라 믿고 전략을 더 세련된 걸로 바꿨는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 사이에 벌어진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 때문에 그저 나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기뻤는지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나만의 길을 개척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누군가를 찾았음을 비로소 받아들이고, 마침내 내가 어떻게든 잘해낼 거라고 믿게 된 건지도 모른다. - P84

"내가 거기 있고 싶다고." 나는 우겼다.
"엄만 네가 오면 둘이 싸우게 될까봐 그런 거야." 아빠가 나중에 털어놓았다. "어찌됐든 지금은 오로지 병을 낫게 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하니까."
내가 집을 떠나 살아온 7년이라는 세월이 우리가 서로에게 입힌 상처를 모두 치유해주었으리라고, 내 10대 시절을 짓누르던 엄마의 중압감을 깡그리 잊게 해주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엄마는 유진과 필라델피아 사이의 5천 킬로미터라는 거리에서 자신의 권위를 내려놓을 충분한 공간을 찾아냈고, 나 역시 줄기찬 비판의 목소리에서 벗어나 원 없이 창작 욕구를 발 - P87

산한 덕분에 그간 엄마가 한 모든 수고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결국 그 수고의 끝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야 뚜렷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됐건만 아빠의 고백은, 그럼에도 엄마에겐 도저히 내려놓을 수 없는 기억이 있음을 내비쳤다. - P88

그렇게 콜레트 아주머니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니 엄마의 꿈이 궁금해졌다. 아무 목적도 없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는 엄마가 갈수록 이상해 보이고 미심쩍고 심지어 반페미니스트로까지 보였다. 그때 나는 엄마 인생의 주축이던, 나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엄마를 매도하기 바빴다. 그 보이지 않는 고된 노동을, 자신만의 열정에 헌신하지도 않고 실용적인 기술 개발도 소홀히 한 전업주부가 남 뒷바라지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했다. 가정을 이룬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내가 그 속에서 받은 보살핌을 그동안 얼마나 당연하게 여겼는지를 이해하기 시작한 때는 집을 떠나 대학에 가고서 몇 년이 지난 뒤였다. - P92

꼭 나처럼 생긴 가수 캐런 오는 내가 숭배한 음악 세계의 첫 아이콘이었다. 캐런 오는 절반은 한국인 절반은 백인으로, 유순한 아시아인이라는 고정관념을 깡그리 잊게 만드는 독보적인 쇼맨십을 선보였다. 캐런은 거칠고 익살스러운 무대 매너로 유명 - P96

했다. 허공으로 물을 내뿜거나 껑충껑충 뛰어서 무대 양끝을 오가는가 하면, 마이크를 입안에 쑥 집어넣었다가 다시 빼서 마이크 줄을 길게 잡고 머리 위로 휙 던져 올렸다. 그런 모습에 입이 떡 벌어졌지만 묘한 양가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저렇게 할 수 있을까였고, 두번째로 든 생각은 이런 걸 하는 아시아 여자가 이미 있으니 내가 설 자리는 이제 없겠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소수자 정서가 뭔지 몰랐다. 음악계에서 대표성을 둘러싼 토론은 이제 막 시작되던 참이었다. 나는 음악을 하는 다른 여자들은 잘 몰랐기에, 실은 내가 느끼는 감정과 똑같은 문제로 씨름하는 여자들이 제법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 같은 처지의 백인 남자는 어떨지 상상해 유추해볼 능력도 없었다. 그 남자가 이를테면 스투지스의 라이브 공연 DVD를 보면서, 이미 이기 팝이 있는데 음악계에 또다른 백인 남자가 설 자리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 P97

"나는 너 낳고 낙태까지 했어. 네가 너무 속을 썩여서!"
엄마는 손에 힘을 빼고 벌떡 일어서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그러면서 문득 수치심이 밀려온 듯 혀를 쯧 하고 찼다. 마치 - P115

아름답게 지어진 건물이 다 허물어져가는 꼴이라도 목격한 사람처럼.
그랬다. 그렇게 굉장한 비밀을 여태 숨기고 있다가 하필 이럴 때 밝히다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낙태 자체에 대해서 내가 뭐라 할 게 못 된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별의별 악랄한 짓을 다 해서 엄마를 마음 아프게 했듯이 엄마가 그저 나를 마음 아프게 하려고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점이었다. 무엇보다도 엄마가 그토록 중대한 사실을 숨겨왔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엄마가 어떤 문제를 그처럼 오랫동안 숨기고 살 수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내가 지키려 했던 비밀은 모두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기만 했다. 하지만 엄마는 비밀을 지키는 데 희한한 재주가 있었다. 심지어 나한테까지도. 엄마는 아무도 필요치 않았다. 엄마는 자신에게 내가 얼마나 필요치 않은지를 보여주어 나를 충격에 빠뜨릴 수 있었다. 자기가 그러듯 항상 나만의 10퍼센트를 따로 남겨두라고 평생을 내게 가르쳐온 엄마지만, 그게 나한테까지 따로 남겨둔 부분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고는 그때까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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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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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회고록이면서 회고록이 아니기도 합니다. 나는 이 책에 나 개인의 경험을 담았지만, 그것을 모든 여성이 겪는 집단적 경험의 맥락 속에서 서술했습니다. 이 책에는 내가 작가가 되고자 걸어온 길, 즉 나만의 목소리를 만들고 그 목소리를 세상에 들려줄 방법을 찾는 과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여성이 침묵하기를 바라고 여성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기를 선호하는 사회에서 이뤄진 것이었으므로, 이 책은 그런 사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자 하는 분투가 여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말하는 책이고, 우리가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팬데믹과도 같은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문제와 뗄 수 없는 일임을 말하는 책입니다. - P6

만약 여성이 동등한 목소리, 권리, 신뢰성, 기타 등등의 힘을 가진 사회라면, 그런 폭력은 훨씬 드물 것입니다. 그 폭력은 원인인 동시에 결과입니다. 불평등 때문에 생긴 결과이면서도 그 불평등을 강화하고 지속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내게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이 목소리를 갖기 위해서, 나는 내가 젊은이로 살았던 그 추하고 낡은 세상에서 싸워야 했습니다. 이제 나는 다른 목소리들이 말할 수 있는 공간을 열고 아직 충분히 들리지 않은 그목소리들을 증폭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바람에서, 이 목소리를 씁니다.
물론, 여성혐오는 여러 불평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젊을 때 흑인 이웃들과 게이 친구들과 살았던 이야기, 좀더 나중에 자신들의 토지권과 문화 보전을 위해서 싸우는 아메리카원주민들과 함께했던 이야기도 적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는 그들이 겪는 억압뿐 아니라 그들의 뛰어남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내게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 물려받은 이야기들을 의심하고 더 나은 이야기들을 찾는 법을 아주 많이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여성이 겪는 폭력에 관해서 쓰기 시작한 것은 나 자신도 젊은 여성이었던 1980년대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폭력이 여성에게 막대하고 끔찍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아만줘도 좋겠다는 심정으로 썼습니다. 여성은 폭력의 직접적 피해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 폭력이 여성의 자유와 평등과 자신감과 온전한 참여를 저해하기 때문에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받습니다. 내 - P7

가 살아온 세월의 대부분의 기간에, 그 폭력은 무시되거나 사소히게 치부되거나 피해자의 탓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폭력의 사례 하나하나가 수수께끼 같고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사건으로 여겨졌을 뿐, 그 모두가 이 사회와 오래된 불평등들의 구조에 깊이 엮여든 한가지 패턴의 일부라는 이해는 공유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세계는 이 만연한 폭력을 예전보다 훨씬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와 언어에서, 언론 보도와 문화적 재현에서, 사법 체계와 우리가 사는 공간의 규제에서, 그 밖의 여러 측면에서 그랬습니다. 내가 젊을 때 바랐던 대화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나 또한 가끔 열렬히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에 참여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폭력은 예외적인 것, 규범을 벗어난 것, 일상의 여느 원칙과 관습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어 많은 여성 독자에게 읽힌 페미니스트 회고록 중 일부는 끔찍하고 예외적인 폭력을 직접 겪은 여성이 쓴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책들이 자칫 폭력은 우리 중 일부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사실로만들까봐 걱정되었습니다. 폭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을 받은 여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나는 30년 넘게 그 폭력에 대해서 써왔으면서도 그 폭력의 한가지 측면만큼은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느꼈습니다. 바로 - P8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다치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한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살해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살해당하는 일을 끊임없이 상상해보아야 합니다. 설령 자신이 공식적인 피해자가 되지는 않더라도, 여성에 대한 폭력이 성적이고 성애화된 방식으로 묘사되는 것을 늘 영화에서 보고 책에서 읽으면, 여성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끔찍한 일을 겪었다는 소식을 늘 신문에서 보면, 그런 일이 언제고 자기 주변의 여자들에게도 자신에게도 벌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수 없습니다.
페미니스트 활동가 앤 스니토Ann Snitow는 2016년에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1969년에 만들어져서 널리 인용된 페미니즘 슬로건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원래 의미는 "이 구조는 개개인의 개별적 삶보다 훨씬 더 큰 것이며, 여기에 대해 개인적 해법은 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라고요. 영어권의 회고록은 개인적으로 어떤 역경을, 가령 끔찍했던 유년기나 중독이나 질병을 극복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 회고록은 세상을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인 문제를 중심에 놓고 말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 Pessoa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길에 돌이 있다고? 나는 그것을 일일이 주워 간직한다. 그랬다가 언젠가 성을 지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 P9

나도 변했다. 21세기에 그 집을 나온 사람은 오래전 그 집에 들어갔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물론 연속성은 있다. 아이는 어른의 어머니인 법이니까. 그러나 워낙 많은 일이 있었고 워낙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그때 그 깡마르고 불안정했던 젊은 여성은 나라기보다는 내가 한때 친했던 사람, 좀더 챙겨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싶은 사람, 요즘 만나는 그 또래 여성들에게 그런 것처럼 자꾸 마음이 쓰이는 사람으로 느껴진다. 오래전 그는 정확히 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여러 결정적인 측면에서 그는 나와 달랐다. - P24

그래도 그는 나였다. 세상에 서툰 부적응자, 몽상가, 쉴 새 없이 떠도는 방랑자였다. - P25

는 나이 지긋한 그 주민들은 뭐든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들은 시골 사람이었다. 오가는 사람을 구경하면서 아는 사람에게 인사했고, 지나치게 까분다 싶은 아이가 있으면 야단쳤다. 나는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선물이자 일종의 스포츠라는 사실, 온기와 농담과 덕담과 유머를 나눌 기회라는 사실, 말이 우리를 따스하게 덥히는 작은 불꽃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배웠다. - P36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사람들은 이른바 도심 쇠퇴blight 현상을 핑계로 우리 동네 동쪽의 많은 건물을 허물었다. 도시의 살갗에는 상처와 같은 공터들이 남았다. 어떤 공터에는 칙칙한 임대주택 단지가 세워졌지만, 너무나 소외되고 갑갑한 설계였던 탓에 더러는 지어진 지 10~20년 만에 도로 허물어졌다. 틸 씨가 한때 활기찬 문화 지구였다고 회상했던 필모어 지구의 건물 터들은 1980년대에도 대부분 철책 너머 빈터로 남아 있었다. 장소들이 살해되었고, 한번 살해된 장소는 다시는 온전히 살아나지 못했다. - P43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성에 따르는 놀라움과 좌절을 겪었고 그것을 더 잘 견뎠다. 왜냐하면, 이 역시 지나고 나서야 깨달은 바로, 그 시절은 시간이 폭포를 만나서 우리 모두를 싣고 급류로 떨어지기 전이었던지라 꼭 초원을 흐르는 강물처럼 느릿느릿 흘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디지털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낯선 사람과 접촉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주었지만, 그 시절에 우리는 낯선 사람과 다양한 방식으로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보다 좀더 예측 불가능한 접촉과 좀더 깊은 고독이 있던 시절이었다. - P44

그 시절의 도시는 낡고 쭈글쭈글하고 그 틈에 먼지와 보물이 끼어 있는 무언가로 느껴졌다. 그랬던 도시가 차츰 반반하고 깨끗하게 변했고, 살던 사람 중 일부도 그 과정에서 먼지처럼 쓸려 나갔다. - P45

나는 한창 가난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경제적 여유는 나중에야 서서히 생길 터였다. 가난에서도 나는 새 이방인이었지만, 그 속에서 적잖은 시간을 보내고 났더니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정신적 가난으로서의 가난은 내가 태어난 때부터 죽 겪은 것이었다. 내 부모는 대공황 시절과 유년기에 겪었던 부족 때문에 깊은 결핍감을 몸에 새긴 사람들이었고, 훗날 자신들이 확보한 중산층의 안락을 남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었다. 내게는 만약에 내가 끔찍한 일에 발목이 잡히더라도 부모가 나를 구해주리라는 믿음이 없었다. 정말로 그런지 확인해보고자 시험 삼아 망해볼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내 가난은 쉽게 가난을 선택한 것처럼 원한다면 쉽게 벗어날 수도 있는 다른 많은 백인 청년의 가난과는 좀 달랐다. 결국에는 나도 가난을 벗어났다. 하지만 천천히 내 힘으로 벗어났다. 또 비록 나중에서야 제대로 깨우친 사실이지만, 내 피부색과 출신이 내게 유리하게 작용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런 속성 덕 - P49

분에 나 자신도 남들도 나를 공부와 화이트칼라 노동에 적합한 사람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 P50

그리고 내가 무엇보다도 원한 것은 나 자신의 변화가 아니라 내 처지의 변화였다.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는 아직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떠나온 곳으로부터 더 멀어지고 싶다는 사실만큼은 똑똑히 알았다. 어쩌면 그것은 갈망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반대, 즉 무언가를 싫어하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문제였다. 내게 걷기가 그토록 중요한 일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걸으면 아무튼 어디로든 가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 P51

그곳이 아직 내 집이었을 때, 그 집 속에서 다른 방이나 다른 문을 발견하는 꿈도 여러번 꿨다. 어떤 면에서는 그 집이 나였고 내가 그 집이었으니, 그때 발견한 것은 당연히 내 안의 다른 나였다. 꿈에서 어린 시절 집을 볼 때는 늘 내가 그곳에 갇힌 상황이었던 데 비해, 이 집은 나를 가두기는커녕 내게 다른 가능성들을 열어주었다. 꿈에서 집은 더 컸고, 방이 더 많았고, 현실에는 없는 벽난로며 숨은 공간이며 아름다움이 있었다. 한번은 뒷문을 열었더니 현실에 있던 칙칙한 잡동사니가 아니라 환히 빛나는 들판이 펼쳐졌다. - P54

광대한 하늘, 바다, 먼 수평선, 창공을 맴도는 야생 새들에 견주면 내 근심과 고뇌가 하찮아진다는 점에서, 출렁이는 바다와 긴 백사장은 또다른 집이자 피난처였다. 그 작은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 집은 내 피난처였고, 인큐베이터였고, 껍데기였고, 닻이었고, 출발대였으며, 낯선 이가 준 선물이었다. - P55

책상은 나와 함께 세번 이사했다. 그동안 내가 이 위에서 쓴 단어가 수백만개는 될 것이다. 스무권이 넘는 책, 리뷰, 에세이, 연애편지, 친구 티나와 거의 매일 편지를 주고받던 때 쓴 수천통의 이메일, 다른 수십만통의 이메일, 내 부모의 것을 포함하여 몇편의 추도사와 부고, 이 책상에서 나는 처음에는 학생으로서 다음에는 선생으로서 숙제를 했다. 책상은 세상으로 난 문이자 내가 바깥으로 도약하거나 내면으로 잠수할 때 딛는 단상이었다. - P59

나 또한 내 할머니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잘린 나무들로 만들어졌을 내 책상에서 시작하여 그로부터 만나게 될 숲을 상상할 수 있고, 기왕이면 내 책상으로부터 내 젠더가 겪는 폭력보다는 그 숲을 떠올리고 싶다.
하지만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은 남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여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나와 같은 이들이 죽거나 침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자라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였는가, 내가 어떻게 목소리를 갖게 되었고 어떻게 그 목소리를—홀로 책상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묵묵히 말할 때 가장 유창해지는 목소리를—써서 이전에 말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말하려고 애쓰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할 시점인 듯하다.
통상적인 회고록은 대개 극복하는 이야기, 끝내 성공하는 이 - P63

야기, 개인의 변화와 결심으로 개인의 문제를 해결한 이야기다. 나는 많은 남자가 여자를 특히 젊은 여자를 해치고 싶어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 그 피해를 즐기는 사람이 많거니와 그저 무시하는 사람은 더 많다는 사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한 치료법은 개인적인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내 생각이나 생활을 조정하는 것만으로 이 문제를 용납할 만한 수준으로 바꾸거나 아예 근절할 수 있는 도리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그냥 놓아두고서는 어디로도 나아갈 수 없었다.
이 문제는 내가 몸담은 사회에, 아마도 더 나아가서 세상에 뿌리박은 문제였다. 이 문제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우선 문제를 이해해야 했고, 궁극적으로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상황을 바꿔야 했다. 그런데 고통의 일부이기도 한 침묵을 깨뜨릴 방법이라면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 나와 남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항이었고, 생기를 되찾는 일이었고, 힘을 얻는 일이었다. 그것은 나무들의 숲이 아니라 이야기들의 숲이었고, 글쓰기는 그 숲을 통과할 길을 그리는 일이었다. - P64

다른 여자들이 여자라서 겪은 최악의 일이 역시 여자인 내게도 다 벌어질 수 있었다. 비록 죽임을 당하지는 않더라도, 내 안의 무언가가 죽었다. 자유와 평등과 자신감의 감각이 죽었다.
최근에 친구 헤더 스미스Heather Smith가 내게 말했듯이, 세상은 젊은 여자들에게 "자신이 살해될 가능성을 늘 그려보게끔" 만든다. 여자는 어릴 때부터 줄곧 이런저런 일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듣는다. 여기에 가지 마라, 거기서 일하지 마라, 이런 시각에 밖에 나가거나 그런 사람들과 말하거나 이 원피스를 입거나 이 술을 마시거나 모험과 독립과 고독에 참가하지 마라. 죽임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전 조치는 여자가 스스로 삼가는 것뿐이라고 했다. - P65

젠더폭력의 트라우마를 논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단 한번의 끔찍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나 관계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별안간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평생 물속을 헤엄쳐왔다면 어떨까? 뭍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면 어떨까?
많디많은 여성이 영화에서, 노래에서, 소설에서, 세상에서 살해되었다. 그 죽음 하나하나가 내게는 작은 상처, 작은 짐,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작은 메시지였다. 언젠가 만났던 어느 불교 성자는 신자들이 준 동전을 모두 옷에 매달고 다녔다. 동전들은 그의 짐이 되었다. 작은 동전이 하나둘 더해져서, 결국 그는 수백 킬로그램의 쨍그랑거리는 번뇌를 끌고 다니게 되었다. 우리도 그랬다. 우리도 그런 무서운 이야기들을 보이지 않는 추나 족쇄처럼 걸치고 어디든 끌고 다녔다. 그것들이 쨍그랑거리는 소리는 우리에게 "그게 너일 수도 있었어" 하고 늘 말해주었다. - P67

여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늘 공격당했는데, 그들의 행동 때문이 아니라 마침 그들 가까이 있던 웬 남자가 그들을… 벌하고punish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표현이 맨 먼저 떠오르지만, 그렇다면 대체 무엇에 대한 벌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이라서가 아니라 여자라서였다. 우리가 여자라서. 하지만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은 그가 그라서였다. 그가 자신에게 여자를 해칠 권리가 있다고 믿고 그러기를 욕망한 남자라서. 그가 자신의 힘이 여자의 무력함만큼이나 무한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 P68

앞선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 힘의 문제이지 성적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분명 세상에는 자신의 힘과 여자의 무력함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에로틱한 일로 여기는 남자들이 있다. 여자들 중에서도 소수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무력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에로틱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에 따르는 자아 감각과 서사를 받아들여야 할지 물리쳐야 할지 고민한다. - P71

그것은 일종의 집단적 가스라이팅이었다. 주변 사람 누구도 전쟁으로 인식하지 않는 전쟁을 치르며 사는 것은… ‘미칠 노릇이었다‘하고 말할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그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여자의 증언 능력과 여자가 증언하는 현실을 깎아내릴 의도로 그를 미친 여자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하도 많으니까. 게다가 이 경우에 미치겠다는 말은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완곡하게 표현한 말일 때가 많다. 그런 뜻이라면 나는 미칠 것 같지 않았다. 다만 참기 힘들 만큼 불안했고, 골몰했고, 분개했고, 지쳤다.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자유를 미리 포기하거나, 아니면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끔찍한 방식으로 그것을 잃을 위험을 감수하거나, 사람을 진짜 미치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겪은 일이 실제로는 벌어지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그를 옥죈 상황 - P72

이 현실이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 것, 그것은 그의 상상에 불과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 그런 문제로 괴로워하면 지는 것이고 입 다물거나 아는 사실을 알지 않기로 선택해야만 이기는 것이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 난감한 궁지에서 어떤 사람은 실패와 위험을 선택함으로써 반항자가 되지만, 어떤 사람은 순응을 선택함으로써 죄수가 된다.
(...)
내가 당한 부당한 일을 남들이 인식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의 분한 기분을 나는 안다. 피해자가 그 트라우마 때문에 자신에게는 결코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강박적으로 늘어놓는 이야기꾼이 되기 쉽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 그의 말을 듣고 믿음으로써 저주를 - P73

풀어줄 때까지, 그는 그 이야기를 계속 말한다. 나도 가끔은 그렇듯 직접 체험한 일을 말하는 이야기꾼이었지만, 다른 여성들이 겪는 폭력에 대해서 내가 느낀 감정도 나의 체험이었다.
성희롱이 내게도 직접적인 골칫거리였던 시절에, 사람들은 내게 말했다. 더 부유한 동네로 이사하라고(하지만 내가 겪은 가장 악질적인 성희롱 중 몇가지는 그런 동네에서 겪었다), 차를 사라고, 쓰려야 쓸 돈이 없었건만 아무튼 돈을 써서 택시를 타라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라고, 옷을 남자처럼 입거나 남자와 늘 붙어 다니라고, 혼자서는 아무 데도 가지 말라고, 총을 구하라고, 무술을 배우라고, 현실에 적응하라고,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자연스러운 것 혹은 날씨처럼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날씨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불가피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였다. 특정 사람들의 행동을 용인하고, 못 본 척하고, 성애화하여 해석하고, 봐주고, 무시하고, 묵살하고, 경시하는 사회 구조였다. 내가 볼 때 적절한 대응책은 문화와 상황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기 운명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 삶이 자기 것이 아닌 순간에 처한 여성은 어쩌면 나일 수도 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쫓기듯이 살았다. 그 탓에 정신 구조가 달라졌는데, 이 변화는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폭력의 핵심은 피해자에게 그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날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게끔 하는 것 - P74

인지도 모른다. 그런 폭력은 주로 어린 여자들에게 마치 누구나 겪는 통과의례인 양 가해지는데, 일단 그것을 경험한 여자는 폭력의 주된 표적이라는 처지에서 벗어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이 취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한 여자의 죽음은 다른 모든 여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 시절에 나는 여자들이 전쟁으로 선언되지 않은 전쟁을 겪으며 산다는 사실을 발견한 충격과 두려움을 안은 채 일단 살아남는 데 전념했지만, 언젠가는 이 전쟁이 전쟁으로 선언되기를 바랐고 가끔은 능력이 닿는 대로 스스로 그렇게 선언했다. - P75

언젠가 글에서도 썼는데, 나는 집 말고 모든 곳이 안전한, 안팎이 뒤집힌 세상에서 자랐다. 시골에 맞닿은 주택 단지에서 자란 내게는 집 말고 모든 곳이 안전해 보였다. 문밖을 나서면 바로 도시도 산도 있었다. 나는 늘 집을 빠져나가서 그런 곳을 쏘다녔다. 나이가 한 자릿수였을 때부터 집을 떠나기를 열망했고,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웠다. 달아나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물을 생각해보았다. 일단 그 집을 떠난 뒤로는 내 집 안에서 위험하다고 느낀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러자 이제는 거꾸로 세상에서 안전한 곳이 집뿐인 듯했다. - P77

남자들은 내게 대화를 트자고 제안하고 요구하고 노력했고, 노력은 금세 분노로 변했다. 나는 상대의 화를 돋우지 않는 방식으로 아뇨 나는 관심 없어요 하고 말하는 방법을 몰랐으므로, 달리 할말이 없었다. 말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 내게는 말이 없었다.
나는 보통 눈을 깔고, 아무 말도 않고, 눈맞춤을 피하고, 최대한 그 자리에 없는 듯이, 나서지 않고, 미미한—눈에 띄지 않을뿐더러 소리도 내지 않는—존재가 되려고 애썼다. 상대의 격앙이 무서워서였다. 내 눈조차 경계를 공손히 지키는 법을 배웠다. 나는 최대한 나를 지우려고 애썼다. 나로 존재하는 것은 표적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얄궂게도 그런 남자들은 자신의 욕망이 결국 충족되지 않을 - P80

테고 내가 퇴짜 놓을 게 분명하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고, 그래서 미리 적개심과 분노를 느끼는 듯했다. 그들이 건네는 음란하면서도 상대를 깔보는 말에서는 그래서 욕망과 분노가 동시에 드러났다. 그들의 언어는 그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권리가 있고 내게는 모욕을 피할 힘이 없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분노는 내가 낯선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셈이었고,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에게 속한다고 말하는 셈이었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아무나 나를 소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었다. 말, 그것은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많고 내게는 없는 것이었다. 이후에는 내가 평생 말을 위해서 말로써 살게 되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 P81

사람들은 내게 그런 일은 내 상상이라고, 혹은 과장이라고, 내 말은 믿을 만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렇듯 나를 표현하는 능력과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불신받는 것은 내가 존재할 공간을, 자신감을, 세상에 나를 위한 장소가 있을 테고 내게도 남들이 들어볼만한 말이 있으리라는 희망을 갉아먹는 요소였다. 아무도 나를 믿지 않을 때는 나도 나를 믿기가 어렵다. 그래도 끝내 자신을 믿는다면, 그것은 다른 모두와 대립하겠다는 뜻이다. 둘 중 어느 쪽을 택하든 나는 미칠 것 같을 테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게다가 누구에게나 그럴 근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 몸이 내 것이 - P82

아니고 진실도 내 것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내 것일까? - P83

그러나 내 친구 중에서는 많은 수가 강간을 겪었고, 직접 겪었든 아니든 모두가 그 위협을 피하는 일에 젊음을 허비했으며, 지금도 세상 대부분의 장소에서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러고 있다. 설령 당신이 붙잡히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을 붙잡는다. 오랫동안 나는 지켜보았다. 신체를 절단당한 성 노동자나 살해된 아이나 고문당한 젊은 여자나 장기간 억류된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혹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죽인 아내나 자식이나 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신문 한 귀퉁이에 단신으로 보도되거나 방송에 지나가는 말로만 언급되는 것을. 각각의 사건이 마치 독립적인 사건인 양, 이름 붙여 호명할 가치가 있는 더 큰 현상의 일부가 아닌 양 취급되는 것을. 나는 그 흩어진 점들을 이었다. 그랬더니 하나의 전염병이 보였다. 내가 본 그 현상을 나는 말하고 썼다. 그러면서 그것이 공개적인 대화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30년을 기다렸다. - P86

소하일라 압둘알리sohaila Abdulali가 강간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쓴 책 『강간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쌤앤파커스 2020에는 목소리에 관하여 이런 말이 나온다. "이야기를 매끄러운 하나의 서사로 말하는 방식. 사무적으로, 높낮이는 있되 진정한 감정은 없는 채로 말하는 방식… 우리가 남들에게 아무리 자세히 이야기를 들려주더라도, 그런 방식에는 늘 우리가 견딜 수 없고 남들이 아무도 듣고 싶어하지 않는 세부가 빠져 있다." - P89

요즘도 가끔은 그렇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로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고 안을 보호하는 갑옷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자칫 그 갑옷의 표면에만 몰두하기 쉽다. 즉 기지와 경계심을 발휘하여 공격에 대비하는 데에만 몰두하기 쉽다. 혹은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은 나머지 근육이 딱딱해지고 마음이 속박되는 지경에 이르기 쉽다. 자신에게 부드러운 깊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대개 표면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스스로 갑옷이 되기란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스스로 죽는다. - P91

전쟁을 치르는 병사처럼 진격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퇴각하지도 않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자신이 어딘가에 있을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런데 그 어딘가가 고작해야 자신이 사는 공간뿐이라면? 약간의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 가장 무의식적인 반응과 감정의 가장 깊은 수준에서도 그 공간을 자신의 것으로 느낀다는 건 어떤 것일까? 전쟁을 치르지 않고 산다는 것, 전쟁에 대비할 필요가 없이 산다는 건 어떤 것일까? - P98

내가 젊을 때 치렀던 싸움 중 하나는 내 몸이라는 영토가 내 관할인가 아니면 타인―어떤 사람 혹은 누군가 혹은 모든 이들―의 관할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싸움이었다. 그 영토의 국경을 내가 통제할 수 있는가, 그 영토가 적대적 침입을 당할 것인가, 내가 나의 책임자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싸움이었다. 강간이란 어떤 남자의 공간적 권리가, 한발 더 나아가 암묵적으로 모든 남자의 공간적

권리가 어느 여자의 몸 내부까지 미친다고 주장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자의 관할권은 여자 자신의 몸이라는 영토조차 온전히 다스리지 못한다는 주장이 아니겠는가? 길거리에서 나를 괴롭혔던 남자들은 나를 다스릴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고 나는 그들의 종속국이라고 주장한 셈이었다. 그로부터 살아남으려고 내가 택한 방법은 눈에 띄지 않는 나라, 점점 더 작아지는 나라, 비밀스러운 나라가 되는 것이었다.
(...)
대화도 그런 영토다. 누가 공간을 차지할 것인가, 누가 발언을 저지당하거나 괴롭힘에 시달린 나머지 말의 공간을 전혀 확보하지 못한 상태인 침묵으로 빠져들 것인가 하는 질문들이 일어나는 영토다. 최선의 경우에 대화는 즐거운 합작품이다. 생각과 통찰 - P100

을 만들고 경험을 나누는 일이다. 최악의 경우에 대화는 영역 다툼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 영토에서 밀려난 경험, 혹은 입장 자체가 허락되지 않은 경험, 혹은 참여하기에는 자격이 부족하다고 간주된 경험을 갖고 있다. 이런 문제도 나는 나중에 글로 쓸 터였다. - P101

우리 문화는 몸에 집착했다. 그 시절에는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정밀한 측정과 사이즈로 계량했다. 우리에게 그 기준을 만족시키면 한없는 보상이 따를 테지만 만족시키지 못하면 끝없는 처벌이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결국에는 모두를 처벌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또한 수많은 젊은 여자가 처한 곤경에 처했다. 매력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멸시나 따돌림을 당하는 처지와 매력적 - P103

이라는 이유로 위협이나 미움을 받는 처지의 중간 지점에 있어야 한다는 곤경. 두가지 처벌의 영역 사이에 과연 줄타기할 공간이 있는지나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중간에 있어야 한다는 곤경. 내가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는 호감을 얻되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부터는 안전하고 싶다는 불가능한 균형을 달성해야 한다는 곤경.
우리는 남자를 만족시키도록 교육받았고, 그 탓에 스스로를 만족시키기가 어려웠다. 세상은 우리에게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욕망은 거부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내 몸은 외로운 집이었다. - P104

10 가장 혹독하게 관습적인 형태의 여성성, 그것은 끊임없이 사라지는 행위다. 남자들에게 더 많은 공간을 내주기 위해서 여자가 삭제되고 침묵하는 행위다. 그 공간에서 여자의 존재는 공격으로 간주되고, 여자의 비존재는 우아한 순응으로 간주된다.
(...)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침묵당했 - P110

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에는 그 누군가가 말하려 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우리는 또 무언가가 사라졌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표현에는 그 무언가가―사람이든, 장소든, 물건이든―나타났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애당초 말해지지 못한 것, 드러나지 못한 것, 입장을 거절당했기에 강제로 퇴장당할 기회조차 누리지 못한 것이 많다. 누군가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꺼냈으나 사람들이 보아주지 않고 들어주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가 침묵하지 않았어도 그의 증언은 무시되었고, 그가 나타나기를 꺼리지않았어도 그의 존재는 경시되었다. - P111

내가 정보 수집에 다람쥐처럼 열중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지옥 같은 심문에 대한 불안이었다. 만약에 내가 갑옷을 구성하는 부속물의 이름을 안다면, 단어들의 어원을 안다면, 장미전쟁의 등장인물을 안다면, 순례자들이 밟았던 길을 안다면, 혹고니와 흑고니를 구별할 줄 안다면, 새벽말이라는 뜻의 에오히푸스가 현대의 말의 선조에 해당하는 자그마한 종이었다는사실을 안다면―어려서부터 부적처럼 간직해왔지만 통 쓸모라곤 없었던 또 하나의 정보다―그 지식 덕분에 가혹하고 비합리적인 세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였다.
어쩌면 정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 그 자체가 적을 물 - P116

리쳐주는 것은 아니다. 지식 덕분에 우리가 더 큰 경향성과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에, 우리의 독특한 관심사를 공유하는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에 그렇다. 혹은 자신의 호기심과, 그리고 호기심이 알아낸 사실들과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알리바바가 동굴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옳은 단어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가끔은 생각들, 문장들, 사실들 자체가 친구가 되어준다.
나는 열성적으로 읽었고, 몽상했고, 도시를 쏘다녔다. 그것은 생각 속을 쏘다니는 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내 생각 자체가 늘 쏘다녔다. 대화, 식사, 수업, 일, 놀이, 춤, 파티 도중에도 생각은 자꾸만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한곳에 머물면서 사고하고, 숙고하고, 분석하고, 상상하고, 희망하고, 관련성을 쫓고, 새로운 의견을 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생각은 자꾸만 내 덜미를 붙잡아서 처한 상황으로부터 멀리 함께 달아났다. - P117

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나도 궁금했다. 어떤 때는 꿈이 조바심을 부려서 그런 것 같았다. 여기서 저기로 넘어갈 때 그 사이의 공간을 지우고 순식간에 장면을 전환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탈출인 것 같았다. 또 어떤 때는 그것이 재능이었다. 그리고 재능이란 것이 간혹 그렇듯이, 그 재능 때문에 나는 남들과 동떨어진 존재가 되었다. 보통은 문자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날 줄 아는 사람인데다가 보통 혼자 날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남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거나 남을 데리고 날기도 했다.
그것은 일상적인 세상에 속하지 않고 일상의 한계에 구속되 - P119

지 않는 경험이었다. 그것이 글쓰기와 관계있지 않을까, 작가가 된다는 것과 관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이제 돌아보니, 왜 그것을 읽기의 은유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다. 내가 읽는 법을 배운 뒤로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바쳐서 쉼 없이 만성적으로 수행한 활동이 바로 읽기였는데 말이다. 읽기란 곧 내가 책 속에 있는 것, 이야기 속에 있는 것, 내 삶과 내 세계가 아니라 아니라 타인의 삶과 상상의 세계에 있는 것, 내 몸과 인생과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어쩌면 문제는 땅으로 내려오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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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몸 1 - 몸의 기억과 마주하는 여성들 말하는 몸 1
박선영.유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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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을 왜 하느냐고 누군가 제게 묻는다면, ‘씹으면서 괴로워진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씹는 동안에 괴로워진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할 때 한 가지 생각만 하지는 않아요. 한 가지 생각과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한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우리 엄마가 골을 굉장히 좋아해요. 그런데 엄마가 아프다거나 해서 귤을 먹을 수가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면요, 귤을 먹을 때는 귤 맛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엄마가 귤 좋아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 괴로워지죠. ‘귤 맛있다‘와 동시에 ‘나는 귤을 먹는데, 귤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는 귤을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고 그 사실 때문에 슬퍼져요. 그런 현상이 제게 발생한 거예요.
저는 원래 구박덩어리였어요. 늘 가려 먹고 깨작거리면서 먹었어요. 삐쩍 마르고 병약한, 그런 이미지들이 초등학교 때 저를 따라다녔어요. 한번은 제가 김치찌개를 먹는데 김치 밑에 돼지고기가 있었어요. 검사를 마쳤다는 보라색 도장이 찍힌 돼지가 김치 밑에 있었어요. 그때 살덩어리가 확대되면서 마치 살아 있는 돼지의 등판처럼 보인 거죠. 그뒤로 고기를 씹으면 괴로워졌죠. 또 한번은 누군가 제게 닭 잡는 걸 보여줬어요. 푸드덕거리던 닭의 목을 딱 부러뜨렸는데 바로 죽더라고요. 그뒤로는 닭을 먹지 못한 것 같아요. 닭고기를 보면 그 생각이 나서 마음이 불편해졌어요. 고기가 살아 있던 생명으로 보이는 거죠. 점점 더 씹다가 불편해졌다. 씹다가 괴로워졌다, 씹다가 슬 - P25

퍼졌다……
살다보면 떳떳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좀 불편해져도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게 되는 일들이 있어요. 괴롭죠. 저는 어딘가에서 그 무게를 줄이고 싶었어요. 에잇! 나 안 할래. 그런 게 필요했어요. 저는 먹는 것에서 그랬어요. 마음이 불편해지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마음이 편해지는 어떤 장소를 찾은 것이죠. 그게 형태로는 편식이었죠. 요즘처럼 ‘비건‘이라는 말로 확장될 줄 모르고 언제부터인가 그저 내 마음이 편한 식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 P26

채식하는 사람들은 "너 그러면 채소도 먹지 말지. 채소는 안 아픈가"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요. 그것도 중요한 질문이에요. 식물은 뭘 느낄까. 알면 너무 좋겠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건, 무엇을 바꾸지 않기 위한 근거로 어떤 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어떤 말을 할 때 그것이 변화를 막는 도구로 이용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너 고기 안 먹어? 나도 안 먹어볼까" "사실 우리 고기 좀 많이 먹지?" 이렇게 말한다는 건 대단히 훌륭한 일이에요." - P27

엄청 홀가분한 경험이었어요. 누드모델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알몸을 보게 됐어요. 몸이라는 게 각각 다른 느낌과 에너지와 힘을 갖고 있더라고요. 모두가 조금씩 초라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예쁘다.
고 이야기되는 몸이나 뚱뚱한 몸이나 깡마른 몸이나 문신이 있는 몸이나, 체형이 어떻든 몸이라는 건 다 각각 다르게 예쁘고 각각 다르게 초라하다는 걸 느꼈던 것 같아요. 몸에 대해 생각을 너무너무 많이 하면서 자라다가 누드모델이 되면서 생각이 없어졌어요. 무던해진 느낌이 들었고 그 경험이 제겐 소중했습니다. - P52

다른 것에 대한 허기도 많죠. 넉넉한 생활비와 전세자금 모으기에 대한 욕망이 많아서 열심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면에서 욕망덩어리라고 생각해요. 인스타그램도 많이 하고, 운동도 많이 하고, 연애도 왕성하게 해요. 여러 가지 욕망을 따라가다가 어쩔 수 없이 부지런히 살게 된 케이스인 것 같아요. 그 욕망이 계속될 것 같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건강하고 싶은 사람이고요. 크게 상처받지 않는 몸과 부서지지 않는 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 P56

제모 시술은 아직 안 해봤어요. 의외로 많은 분들이 겨드랑이털 제모 시술을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해본 적이 없어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데요. 감당하기 힘들지만 이 수치심을 내가 그대로 안고 가는 게 미완성인 나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처럼 느껴져서요. 이상한 반항심인 것 같아요.
(...)
극복은 못 했는데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털이 부끄럽다‘는 마음 - P63

과 ‘이걸 왜 부끄러워해야 하지‘라는 마음 중에 그래도 두번째 마음이 몸안에서 힘을 받고 있어요. 부끄럽지만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극복할 필요도 없다, 이게 지금 제 안에서 응원받고 있는 문장입니다. 적어도 저의 페미니즘은 털에서 시작됐거든요. - P64

폴댄스는 대상화되기 쉬운 운동이에요. 그런데 폴댄스를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대상화에서 자유로워지는 경험을 많이 해요. 전에는 보들보들하고 가느다란 몸이 예쁘다고 생각했다가 이제는 피부도 하는 일이 있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피부 표면으로 폴에서 버티고 내 몸의 모든 부위가 폴 위에서 기능하기 때문에 대상화에서 굉장히 자유로워져요. - P69

내 몸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 해, 이런 말들 많이 하죠. 어떻게 보면 공허하잖아요. 저는 항상 저를 하체비만이라고 생각했어요. 친구들끼리 농담으로 "나는 하비야" 라는 말을 달고 살았는데, 저는 허벅 - P70

지가 굵은 편이기 때문에 허벅지로 버티는 자세를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빨리 배웠어요. 실제로 온몸이 하는 일이 있고 기능이 있으니까 마음에서 우러나서 믿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허벅지도 하는 일이 있는데 누가 제게 "네 허벅지 못생겼어"라고 하면 ‘넌 이게 어떤 일을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라는 생각이 들 것 같거든요. 편해지더라고요.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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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출구 1
허새로미 지음 / 봄알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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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안다. 딸이 겪는 가족은 아들이 겪는 가족과는 다르다. 마치 같은 얼굴의 왼쪽과 오른쪽이 미묘하게 다른 것처럼, 그 미묘한 차이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소름이 끼치는 것처럼. 그렇게 얻은 기억들은 극복하기 힘든 결절이 된다. 마땅한 내 것을 달라고 말하면서도 송구해하는 비굴한 인간이 되거나 파워 게임에 귀신같이 능한 학대자가 되기 딱 좋은 토양이다. 그러 - P15

나 나는 나의 결핍이 곧 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나의 피해를, 나의 슬픔을, 나의 역경을 고발하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한 발짝만 내디디면 돌이킬 수 없는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았던 그때, 도박 빚을 진 것도 아니고 사람을 때린 적도 없건만 내 옷차림이나 성적 때문에 내 인생이 망할 것이라는 주문을 내가 가장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매일같이 듣던 그때, 바로 그때 지금 내가 아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덜 죽고 싶었을까.
가족이 하는 말을 곧이듣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를 겁주는 사람들을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불안에 떨지 않고 보낼 수 있었을까. 그 얘기를 딸들에게 하고 싶다. 원가족을 벗어나 김장철에 김치 얻을 데가 없고 명절에 전화할 데가 없어도 큰일 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종류의 외로움은 골백번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이들에게 책임을 요구하라. 책임의 이행을 요구하라. 사랑을 구걸하지 말라. 사랑을 인질로 잡은 어떤 관계도 나를 살리는 관계가 될 수는 없다. 그 밖에도 세상이 있다고, 훨씬 넓고 깊고 무섭 - P16

물론 세상에는 조건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 이만큼의 세월 동안 얼마큼을 내가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돌려 - P28

받아야 한다는, 그게 아니라면 감사하고 황송해하는 모습을 보여달라는 그런 종류의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 네가 거기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확인한다는 유의 사랑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것이 목적인 사랑도 있다. 그러나 조건 없는 사랑은 조건이 없기 때문에 혈연을 조건으로 삼지 않는다. 너는 내가 세상에 존재했다는 증거이므로 무언가를 증명함으로써 살아 있는 값을 하라는 치졸한 욕망을 투사하는 것을 조건 없는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조건 없는 사랑은 사실 혈연관계에 제한되는 사랑과 가장 거리가 먼 사랑이다. 우리가 인생의 가장 험난한 계곡에서 난데없이 신의 자비를 갈구하듯이, 갑자기 맥락 없이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를 바라듯이, 조건 없는 사랑은 상대가 나와 얼마나 DNA를 공유했나를 따지는 것과는 많이 다른 무언가이다.
가족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와 겹칠 수밖에 없다. 혈육에 대한 애정을 다른 거룩한 것으로 포장해서는 안된다. 그 터무니없는 기대에 다치는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 P29

똑같이 아침을 못 먹고 출근하는데 누나는 등짝을 맞으며 빨리 시집가라는 소리를 듣고 연달아 현관을 나서는 아들은 빈속으로 출근하는 게 안쓰러워 죽겠다는 식의 어리둥절한 대비가 아무렇지도 않게 비쳐진다. 엄마를 끔찍이 위하며 그를 위해 목에 핏대 올리며 맞서 싸워주는 딸 캐릭터 역시 너무도 많다. 대단한 불균형이 아닐 수 없다. 드라마가 현실을 반영하는지 아니면 견인하는지 몰라도 ‘캐주얼하게 학대받는‘ 그룹이 널리 딸 집단으로 묘사되는 게으른 사회에서 실제 딸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염려를 빙자하여 가하는 언어 학대를 일상화하는 것은 사실 한국의 유구한 전통이기도 하다. - P31

아들의 집밥에 대한 그리움이란 얼마나 단단하고 평온한 것일지 상상해본다. 식탁이나 저녁상의 자기 자리를, 자기 발언권을, 혹은 자기의 음식에 대한 권리를 기각당하거나 미리 양보해야 한다는 염려를 조금도 하지 않고, 모자란 반찬이 있거나 누군가 음식을 흘렸을 때에 식사하다 말고 일어나야 한다는 지각이 전혀 없이, 아무 말이나 해도 혹은 아무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음식에 집중할 수 있는 자가 누릴 온전한 감각. 그런 상태에서 누릴 맛과 냄새 그리고 위장이 채워지는 행복감. 그는 자기 바로 옆에 앉은 누이와는 딴판으로 다른 식사를 매일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상의 아들들이 제 손으로 마늘 한 번 까보지 않고 집밥 집 - P34

밥 노래를 부르는 데엔 이유가 있다. 상상력을 동원하니 어렴풋이나마 이해가 된다. 그리고 그 옆에서 언제나 할 일이 생기면 재빨리 일어나야 했던, 혹은 신경 안 쓰는 척 앉아서 버텨보지만 뒷덜미가 따가웠던 딸들에게 혼자 먹는 밥이 왜 그렇게 편안했는지도 이해할 일이다. 남자들이 혼자 먹는 밥에 난리 법석을 떨며 스스로를 가여워하고 집밥이 사람 살린다며 가당찮은 공치사를 해댈 때 한 번도 공감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집밥은 그저 한 끼 식사가 아니고 커뮤니티가 고추 달린 존재에게 주는 승인을 재차 수확해가는 자리인 것이다. - P35

지금에 와서는 누가 "왜 혼자 가르치기 시작했냐"고 물으면 "나만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었다"고 대답하지만 당시에 나를 정말 그만두게 만든 마지막 버튼은 모욕감과 좌절과 배신감이었다. - P41

내가 원가족과 항상 다투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나의 모부는 나에게 먹을 것과 쉴 곳을 제공했으며 성인이 되기까지 자신들의 방식으로 나를 보호했다. 여름이면 가족끼리 차에 올라 며칠이고 사람 없는 깊숙한 계곡을 찾아 헤맸다. 아빠가 내비게이션도 없이 전국 지도를 보고 길을 잡는 덜컹이는 차를 타고 밤새 달리다가 경치가 좋은 곳이면 어디고 멈춰서 텐트를 치고 얼음장처럼 찬 물에 수박을 담갔던 그런 소중한 기억도 많이 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엄마가 예절 수업 선생님으로 학교에 방문하는 날은 "너네 엄마 너무 예쁘고 젊다"며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엄마에게 떨떠름하게 아는 척 한 번 하는 것이 참 뿌듯한 기억이었다. 나는 죽거 - P55

나 다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대학 교육도 받았다. 겨우겨우 사회 구성원으로 기능하는 방법도 뒤늦게나마 찾아냈다. 여기에 나의 가족이 공헌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공동체로서 성공하지 못했다. 너무 많은 것이 말하지 않고도 전달되어야 했고 너무 많은 감정이 그저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로맨스 혹은 사랑으로 시작한 것이 가족만큼 무거운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비명을 엄마는 평생 질렀다. 아빠는 그 비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로맨스에 납치당해 삶을 걸머진 여자가 지르는 크고 작은 비명을,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가 당연히 하는 잔소리나 푸념 같은 것이라고 온 세상이 이해했다. 엄마와 아빠 모두 왜 이렇게까지 삶이 무거운지, 미래가 두려운지, 실체도 없는 불특정인에게서 꾸중을 듣거나 경멸을 당할 거라는 환청을 들으며 사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 그렇게 사니까‘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세월을 보내고 나서는 다음 세대에게도 ‘다 그렇게 산다‘는 주문을 반복했다. 정확한 대상도 없는데 속도는 너무도 빠른 분노와 더께가 얹힌 억울이 집안 공기에 항상 흘렀다. 그걸 배운 나도 주변에 화풀이를 했다. - P56

언젠가는 당하지 않을 만큼 강해져야지, 보호자가 자원을 통제해서 나를 학대하는 방법을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해야지, 내 돈으로 먹고 노는 인간들을 벌 줘야지, 나에게 속죄하게 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자식들이 나에게 보상하게 만들어야지, 내 몸을 상하게 해서 나온 내 자식의 돈을 쓰는 여자에게도 벌을 줘야지, 돈을 받지 못한다면 두려움과 존경을 얻어내야지………. 누구도 이런 것들을 견디면서 제정신으로 오래 생존하지는 못한다. 정말 많은 ‘정상가족‘이 서로에게 분노하고 복수하며 매일을 살아간다. 사랑은 분명 어디에나 있고 아주 강력하지만, 여자를 조금씩 돌게 만들면서 진군하는 가족의 삶은 더 이상 사랑만으로 지탱할 수 없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캐낸, 놀라운 사랑의 힘에 대한 맹신은 대체 무엇인가. 에너지 총량이 일정하다는 준엄한 물리 세계에서도, 물이 증발하면 대기 중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 현대 세계에서도 여자의 사랑과 헌신은 당연히 자연발생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여자는 언젠가는 지친다. 혹은 곧잘 학대와 가스라이팅의 영역으로 납치당한다. 일상은 로맨스가 아니다. 대화는 프리젠테이션이 아니다. 삶은, 정말이지 드라마가 아니다. 끝나지 않는 매일의 삶 - P57

안에서 유한한 것의 무한한 공급을 책임지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여자가 한때 사랑으로 혹은 노력으로 기운차게 구축해 기능시킨 것은 그게 무엇이든 영구히 지속할 수 없다. 내가 생각하는 가족의 불가능성이다. - P58

딸들에게는 보통 소속이 없다. 가끔 주어지는 따뜻한 소속감은 보통 조건부다. 주변의 눈치를 수시로 살피며 뭔가를 관리하고 유지하고 보수하면서 내 자리를 벌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꾸준히 수신한다. 여자들과 식사하러 갔을 때 번개같이 내 앞에 물이 그득한 잔과 반듯하게 줄을 맞춘 수저가 놓여 있는 일이 잦은 것도 이 때문이라 믿는다. 딸들은 암묵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스스로를 부정 및 교정당하며 살았기 때문에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환경에 편안하게 놓여본 경험이 드물다. 그래서 언젠가 원가정을 떠나 ‘내 집‘을 찾아야 한다고 어렴풋이 생각하지만 인류 역사의 오랜동안 갈 곳 없는 딸들이 달아날 곳은 오로지 또 다른 가 - P76

부장이 있는 가정이었다. 아버지가 남편에게로 넘겨주는 여자의 손. 남자들의 손을 뿌리치고 달아나는 여자들은 대체로 마녀가 되거나 미친 여자가 되었다. 거의 반드시 가난해지고 사회적 안전망도 희박한 처지가 되었다. - P77

이 가족들로부터 떠나온 딸들이 해야 할 일은 이해하고 용서하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대 잊지 않고 절대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다. 죽는 날까지 내가 받았어야 할 더 나은 대우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다. 나와 똑같이 느낄 누군가를 절대 만들지 않는 일이다. 용서받을 자격이 없는 너무 많은 남자가 사랑의 이름 아래, 가족의 비호 아래 두루뭉술 용서받고 도덕적 모호함 속에 몽롱하게 행복해하다가 갔다. 그 행복을 질투해야 한다. 이를 갈고 원한을 품어야 한다. 부술 생각으로 덤벼야 한다. 혹은 그런 부조리로부터 실낱만큼의 승인도 구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딸들은 사회적 승인이라는 면에서 아직도 수천 년간 공고했던 림보에 - P82

갇혀 있다. 우리는 누굴 용서할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의 승인도 용서도 바라지 않는다. 기대하는 상대도 없는데 용서를 베푸는 것부터가 자기 기만이다. 딸들은 누구도 용서할 필요가 없다. - P83

복수하기 위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계속 접촉하는 것이 서로에게 해롭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이다. - P85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언은 저주와 앙심을 품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최소한의 자기방어에 가깝다. - P88

다른 관대하고 훌륭한 딸들과 나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 용서하지 않고 살아지는 삶도 숭고한 것이다. 용서하지 않고 잊어버리지 않아서 외로워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존엄은 혼자 죽기 위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합당한 존중을 주지 않는, 언제나 꿍한 채 내가 자신들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고 믿는 가까운 이들에게 투항하느니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편이 낫다. 남이 나를 한 대 치는 것은 용서해도 내가 남을 한 대 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딸들의 불균형한 정신은 세상의 온갖 가스라이팅에 취약한 토대다. 나는 남의 정강이를 걷어차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나의 정강이를 걷어찬 인간도 용서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거기부터 출발해야 한다. - P89

아무도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나를 세상에 내놓은 사람들이라도 그렇다. - P90

나는 최근까지 이 글을 쓰지 못했다. 집을 떠나 가족 혹은 친척 중 그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은 지 한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고 일 년이 흐르고 마침내 삼 년이 되기까지 나는 언젠가 아무렇지 않은 듯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아마 용서하는 법에 대해 쓰게 될 거라고, 많은 이가 그렇듯 이해와 존중과 그리고 마침내 용서와 합일로 가는 위대하고도 사적인 여정에 대해 쓰게 되리라 믿었다. 그래서 그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느라 혼자인 삶에 대해 함부로 쓰기 시작할 수 없었다. 언젠가 상담을 받고 책을 읽고 먼 나라의 해변에 앉아 모든 진실을 깨달은 후에 편안해지리라, 많은 영화에서 그렇듯 홀가분하게 응어리를 내려놓고 ‘건강한거리‘를 유지하는 가족이 되리라고 상상했다. 엄마와 - P90

싸우고 남동생에게 쌍욕을 퍼붓는 악몽을 꾸지 않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때 내가 어렴풋이 환상처럼 그렸던 화해와 이해와 용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아는 것은 가족을 용서하고 가족에게 이해받고 딸로서 어떤 승인을 얻으려는 노력을 온전히 포기한 후에 내가 잠을 잘 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상상해온 고급하고 성스러운 용서와 사랑 같은 장면은 나에게 영영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나는 혼자서 그들을 이해하려 분투하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평화를 얻었다. - P91

여자가 망하지 않고 그냥 사는 이야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남자 - P113

와 서사를 섞지 않아도, 그리고 또 눈부시게 성공하지 않더라도 여자가 안 망하고 삼시 세끼 잘 먹고 편안하게 따뜻하게 잘 자고 쫓기지 않고 친구와 잘 지내는 이야기를 해야 한다. 여자 안 망하는 이야기를 앞으로 백 번이고 천 번이고 해야 한다. - P114

딸에게 끊임없는 쓸모의 증명을 요구하는 곳을 떠나온 여자들은 항상 빼어난 인간일 필요가 없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줄 것‘을 들고 나타나는 빼어난 여자들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다. 그런 이들끼리 서로에게 무엇도 증명할 필요 없이 맺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 P138

지긋지긋한 이사가 끝나고 내가 쟁취한 테라스에서 하늘을 보게 되었을 때 생각했다. 마동석 백 명이 와도 우리를 구할 수 없다. 우리가 우리를 구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들여다보고 함께 분노하고 비상 연락망에 전화번호를 빌려주고 네게 그런 해코지가 일어나지 않도록 감시하고 보살피면서 서로의 바위가 될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을 당하는지, 누가 우리에게 어떤 좌절을, 무시를, 혼란을 일으키고 또 그것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기각하고 삭제하려 했는지 기억하고 기록할 것이다. 그들을 현장에서 잡아 불러낼 것이다. 서로에게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골목 끝에 혼자 살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미친 여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여자에게 무엇 때문에 분노했냐고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는 옆집 여자가 될 것이다. 젊어서는 방긋방긋 웃고 나이 들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겨우 돌아버리지는 않은 - P152

여자라며 생존을 허락받는 세상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 P153

나를 다시 살고 싶게 만든 것은 여자들이다. 젊은 나이에 억대 연봉을 받는다며, 사업체를 차렸다며, 외제차를 여럿 타봤다며 이 모든 게 정말 대단하고 칭송받을 일이니 너희도 나에 대해 잘 알아두라며 이름이며 얼굴을 드러내고 떠벌리는 또래 남자들과는 달리 정말 빼어난 능력을 갖고도 주변의 시기를 받을까 봐, 누가 해칠까 봐 조용히 사는 똑똑한 여자들이 있었다. 남의 외모나 나이를 헐뜯지 않고서는 농담 비슷한 것도 지어낼 수 없는 남자들이 지긋지긋했을 때, 저들이 정말로 인간의 평균을 대표하는가 하고 좌절했을 때 여자들이 있었다. 익명 뒤에서 진짜 알짜배기 충고를 해주는 능력자들이, 떠벌리지 않고 후원 계좌에 조용히 입금을 쏴 - P184

주는 ‘히어로‘들이 다 여자였다. 십오 년 전에는 떠들썩하게 제가 세상을 바꿀 기술을 개발해냈다고 하다가 이제는 자기들이 만들어낸 세상이 사람들을 외롭게 한다고 비장하게 평가를 놓으며 또 세상을 바꾸자고 하는 실리콘밸리의 남자 백만장자들에 신물이 날 때, 억대 연봉을 포기하고 직함을 버리면서 자기가 했던 일을 고백하고 회사가 하는 일을 고발하며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 여성 테크 거인의 기사를 읽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천천히 손을 바닥에 짚고 일어났다. 고개 돌려 어깨 너머를 힐끗 볼 생각도 못 할 만큼 무섭다가, 길을 건너다가도 ‘그럼 죽지 뭐‘ 하다가, 아주 천천히 내 호흡이 돌아왔다. - P185

원가정의 36평 집에서 신혼의 28평 아파트로 옮긴, 그런 인생을 사는 평행우주의 내가 있다면 지금의 나를 보고 인생 망했다고 슬퍼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 - P186

는 매트리스에서 침대로의 변화가 인생의 분수령이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짓겠다는, 지금 여기서부터 진짜 집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이다. - P187

아무리 일상이 평온하고 날씨가 좋고 벚꽃이 떨어지고 하는 날이라도 가방 속에 맥주병을 품고 걸었다. 가부장이나 가부장 트랙의 로맨틱한 관계가 나를 도와주기는커녕 되레 그 무능력을 숨기기 위해 나를 제물 삼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포식자가 아무리 잔인했어도 그들이 "그런데……" 하고 돌아서서 나를 손가락질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울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술을 먹었기 때문에, 내가 씨발놈아 좆같은 새끼야 큰 소리로 욕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분노하는 여자이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 내가 살아남았다고 확신한다. - P192

갈등이 생길 때마다 나는 사정을 정확히 설명하고 분명히 사과하고 무엇보다 상대에게 충분한 거리를 제공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나를 빨리 용서하라고 닥달하지 않고 혹은 어떻게 하면 좀 과장을 보태 전부 내 책임은 아닌 것처럼 만들까, 어떻게 하면 불쌍하게 보일 수 있을까 하는 비열한 트릭을 쓰지 않고 오직 정직하게 나의 과오를 마주하기로, 반대의 경우라면 화가 났을 때 바로 반응하지 않고 최소 하루 침묵의 시간을 갖기로. - P197

다 늦어 가족을 떠났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제때를 넘긴 후였다. 분노를 이해받거나, 상으로 주어지지 않는 종류의 순수한 친밀함을 제공받거나, 노력이나 성과에 대한 승인을 끝내 쟁취하지 못한 채로 사춘기를 지나 신체의 노화가 찾아오는 시점까지 그 갈구를 질질 끌었고, 내가 영영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원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그제서야, 귀엽지도 안쓰럽지도 않은 나이에 집을 나왔다. 모두와 연락을 끊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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