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원 일기 - 나무와 꽃을 돌보며 발견한 자연의 질서와 조용한 위안
김민호 지음 / 판미동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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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했습니다.


지난 주말, 모종을 사왔다. 돌계단을 내려가다가 계곡물에서 바위로 샤샤샥 숨는 버들치들을 본다. 돌멩이를 한번 던져 볼까 하다가 발길을 돌린다. 그곳에 면한 자투리땅에 퇴비 흙을 섞고 모종을 심어준다. 버터헤드, 바질, 모닝글로리…그리고 치커리를 마저 심을 계획이다. 올해는 4년 묵은 아스파라거스를 수확하리라. 매년 공작의 날개처럼 한껏 펼쳐진 잎을 보며 '도대체 언제 먹을 수 있어?'라고 묻곤 했는데, 드디어 때가 왔다. 벌써 전원주택에 산 지 5년 차가 되어간다. 처음 이 집을 보고 조경에 반했었다. 담장 하나 없이 탁 트인 공간에 잔디 마당이 있고 경사면으로 자연스럽게 야생화가 심어져 있는 모습이 예뻐 보였다. 한눈에 반한 것이다. 집이 아니라 정원에.


이미 조경이 되어 있는 집이라 손 댈 곳이 거의 없었지만 비어 있던 옆집에 이웃이 들어오면서 경계면을 채워야 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심었다. 꽃을 만지는 일을 4년 넘게 했지만 내가 아는 꽃은 절화였다. 식물마다 폭과 길이가 얼마나 될지, 꽃은 얼마나 오래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데이터가 없었다. 결국 옆집과 경계면은 '예쁜 거 다 나야' 하는 식물들로 다글 다글 욕망의 화단이 되고 말았다. 욕망의 화단 앞에서 나는 아직 균형이 뭔지 몰랐다. 심는 것만 알았지, 여백과 한계를 줄 줄을 몰랐다.


"가지를 자르는 일을 '정원 관리'라는 좁은 틀로만 보지 않고 나무와 내가 서로의 한계 안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매일 반복되는 작은 일들이 조금씩 의미를 갖는다."


이제 시간이 흐르고 나니 알겠다. 나무와 꽃, 그라스들이 제 자리에서 예쁘게 자라려면 그만큼의 노동과 지식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봄에는 묵은 잔디를 긁고 그라스와 꽃대들을 정리해줘야 한다. 그라스를 자르는 때가 오면 "아, 조경 사장님 너무 많이 심으셨어!" 하며 툴툴 대곤 한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까지 최대한 잡초를 뽑아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뜨거운 태양과 함께 폭풍 성장한 넝쿨이 그라스들 머리채를 잡아당길 것이다. 각설이도 아닌데 때 되면 찾아오는 선녀벌레와의 전쟁도 준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내가 하는 듯이 썼지만 사실은 남편이 거의 7할의 일을 한다. '당신이 바깥양반이니까 바깥일은 당신이 해야지.'라는 말도 안 되는 말로 그의 등을 떠밀면서. 우리집 정원은 그렇게 남편의 땀과 손끝으로 가꿔진다. 그러니 저자가 일 년 열두 달의 정원을 빼곡히 기록한 시간을 보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업으로 하는 일이라도, 사랑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노동이다.


퇴비를 어깨에 이고 나르는 일부터 시작해서 나무와 꽃을 식재하는 일도 꽤나 중노동이다. 게다가 비가 잦은 영국의 날씨에서 우비를 쓰고 바깥에서 쪼그리고 굽히고 하는 작업은 분명 녹록치 않으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는 프랑스인 아내와 영국으로 이주한 런던의 정원사이다. 낯선 땅에서 처음 정원에 기댄 것은 외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꽃과 나무의 이름을 하나씩 익혔다. 어려운 라틴어 학명들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정원의 세계로 들어섰고, 영국 왕립원예학회 과정을 이수한 뒤 야생화 씨앗을 넣은 전단지를 집집마다 돌리며 정원사로 홀로서기에 나섰다. 그러다 어느 날, '다프네 오도라'라고만 알던 나무가 천리향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순간을 저자는 이렇게 썼다. "마음 한편에서 무엇인가가 허물어졌다." 학명으로 쌓은 거리가 허물어지는 순간, 이방인의 정원이 조금씩 자기 것이 되어가는 순간이다. 낯선 땅에서 남들과 다르지 않게 동화되고자 했던 그가 마침내 자신의 언어로 나무를 부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반가움과 안도감이 얼마나 컸을지.


"벽이 허물어진 뒤로 정원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꽃과 나무는 이렇게 긴 추위는 너무하지 않냐고 따질 만도 한데 조금이라도 볕이 들면 새순을 낸다.(…) 그러니 나도 꽃과 나무처럼 속없이 실실거리고 살고 싶다. 이해받지 못해도 무얼 탓할 필요 없이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해 나가고 싶다. 작년에 내린 서리의 기억은 거기 두고 지금 온 계절에 꽃을 피워야겠다."


작년에 내린 서리의 기억을 켜켜이 쌓아두고 곱씹는 내 마음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었다. 바다를 좋아하던 내가 나무와 산에 마음이 가던 이유도 비슷하다. 사람의 마음은 물결이 일렁이듯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한다. 그러나 꽃과 나무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제자리를 지킨다. 지나가는 이에게 곁을 내주면서 말이다.


때때로 잡초를 뽑고 비실비실한 나무나 꽃에 관심을 쓰는 일이 귀찮기도 하다. 그러나 그들에게 시간을 내어줄수록 비실하던 나무에도 새 순이 삐죽삐죽 새롭게 올라오고 마르는 것 같았던 잔디도 어느새 파릇해진다.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믿는 이들에게, 정원이 건네는 가장 정직한 위로”라고 한 저자의 말은 사실이다. 그 순간 순간의 아름다움과 위로를 포기할 수 없기에 가드너는 볕이 쨍쨍한 날도 서늘한 늦가을도 손끝에 흙을 묻히고 베이고 긁히면서도 정원으로 나간다. 저자도, 나도, 그렇게 계절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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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밤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48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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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솔직한 서평입니다.

"여기에 집이랑 사람 나무 자유롭게 그려봐."


대학원에서 미술심리를 공부하던 지인이 하얀 종이를 내민다. 나는 기꺼이 피실험자가 되기로 했다. 손이 가는 대로 쓱쓱 그렸다. 집, 나무, 사람 그리고 새 한 마리. 하늘 한가운데를 날아가는. 『전날 밤』을 읽다가 나는 그 새를 다시 떠올렸다. 지인이 그림을 보더니 말했다. 새는 날고자 하는 욕망이라고. 어렴풋이 기억한다, 그 말을. 무엇을 향해 날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원하는 걸까? 내 마음이 왜 이토록 무겁고 괴로울까? 왜 날아다니는 새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까? 새들과 함께 날고 싶다. 어디로 날아갈지는 모르지만, 다만 멀리, 여기서 멀리멀리 날아가고 싶다." (p128)


투르게네프가 이 소설을 발표한 1860년은 러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다. 작품이 발표된 바로 다음 해에 농노해방령이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크림전쟁의 패배 이후 서구 열강에 대한 열등감과 변혁에 대한 열망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러시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두고 격렬히 논쟁했지만, 정작 무언가를 직접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은 드물었다. 열망은 뜨거웠으나 실천은 공허했다. 엘레나의 목마름은 그 시대의 목마름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를 찾아보기 전까지, 나는 중반까지도 그런 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처음엔 그저 청춘들의 연애소설로 읽혔다. 아름답고 총명하며 약한 존재에게 연민의 마음을 품는 엘레나.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예술가 슈빈, 지적이고 성실한 학생 베르세네프, 그리고 조국 불가리아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강인한 인사로프.


삼각관계인 슈빈, 베르세네프, 엘레나는 인사로프의 등장으로 정리된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논쟁에 빠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그들에게는 '말'이 중요했다. 관념과 언어 속에서 겉도는 말들만이 그들 사이를 채웠다. 그러나 인사로프는 달랐다. 그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행동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지 뚜렷이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주어진 환경과 시간 속에서 그저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살아내는 자. 확고한 이상을 가진 인간은 굳이 그것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의 과묵함이 오히려 엘레나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귀족의 안락함과 미래를 버리고 인사로프와 함께 그의 과업을 이루려 러시아를 떠난다. 이 대목에서 그녀의 선택이 용감해 보이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자신의 이상을 찾기보다는 타인의 중력에 이끌려, 그가 내는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의 후반, 인사로프가 병으로 쓰러지고 죽음을 앞두었을 때, 무언가가 변한다.


"사랑하는 부모님, 영원히 작별을 고합니다. 저를 다시는 보지 못하실 거예요. 어제 드미트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로서는 모든 게 끝났습니다. …… 이미 저에겐 D의 조국 외에 다른 조국은 없습니다. …… D가 죽은 후에도 저는 그의 기억과 그가 평생 추구한 대의에 충실할 겁니다. …… 저는 행복을 찾았고, 아마 죽음도 찾을 겁니다." (p271)


엘레나는 그의 옛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의 과업을 이어받기로 한다. 그 결심의 순간, 그녀는 더 이상 반사체가 아니다. 타인의 이상에 기대어 형태를 찾던 여성이, 그 이상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스스로 빛을 내는 주체로 변모한다. 투르게네프는 이 각성을 소란스럽지 않게 그려낸다. 엘레나는 선언하지 않는다. 다만, 남는다. 불가리아로 향하는 배를 타고 그녀는 조용히 그 다음 날을 향해 나아간다.


러시아가 아닌 끝내 사랑하는 이의 땅으로 건너가 이방인이 되기로 한 그녀. 소설 초반에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방향성 없음에 괴로워하던 그녀는 결국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소설의 제목 '전날 밤'은 무엇의 전날일까. 러시아의 시대적 상황으로 보면 변혁의 전야이고, 개인에게 있어서는 삶의 방향을 선택하기 직전의 밤이다. 투르게네프는 인사로프라는 인물을 통해 강인한 행동력을 삶으로 증명하는 인간의 초상을 그려낸다. 그러나 내가 인사로프라는 인물에게서 부러운 것은 단 하나였다. 그의 확고한 목적과 이상. 행동은 그 다음의 일이다.


신과 별들이 죽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절대적 가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살까'라는 질문보다 '어떻게 하면 이 시스템에서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까'라는 질문이 먼저다. 누구도 누구에게 강요할 수 없다. 다만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이 바로 삶의 방향이 아닐까. 우리는 세상의 시스템이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을 좀 더 ‘의미 있게’ 만들 수도 있는 존재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을 위해. 창 밖에 보슬비가 내린다. 마당 위로 박새 한 쌍이 비를 맞으며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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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들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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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강변을 따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인스타그램 피드마다 벚꽃 사진이 넘친다.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눈길을 보낼 때, 벚나무는 꽃이 피는 동안 귀한 존재가 된다. 그렇다면 길가에 흔하게 피는 애기똥풀은 어떨까. 누군가 멈춰서 그 작은 꽃을 감탄하며 들여다볼 때, 애기똥풀도 벚꽃 못지않게 귀한 존재가 된다. 어떤 존재가 귀해지는 것은 그 자체의 속성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눈과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프레드릭 배크만의 『나의 친구들』에는 그런 눈빛이 결핍된 아이들이 있다. 어느 바닷가 마을, 부모의 폭력과 무관심과 따돌림 속에서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버티는 아이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는 눈으로, 서로를 귀한 존재로 만들어간다.


술만 마시면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둔 요아르, 부모로부터 정상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자란 화가, 암 투병 중인 아버지로 인해 숨죽여 지내는 테드, 잦은 이사 중에 아버지의 지인에게 성폭력을 당하지만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고통을 삼키던 소녀 알리.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네 아이들은 바닷가 잔교와 테드의 지하실방에서 서로의 상처를 아파하고 무너지지 않게 지켜준다.


그러나 열네 살의 여름을 요아르도 화가도 버텨낼 자신이 없다. 요아르는 가방에 칼을 넣고 다니고, 화가는 약통에 약을 모으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들은 신문에서 미술 공모전 소식을 발견한다. 부서지기 쉬운 화가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친구들은 그에게 작품을 내라고 설득한다. 요아르는 어머니에게 생일 선물로 받은 자전거를 팔아 물감과 재료를 마련해준다.


"요아르는 이렇게 속삭이면 되는 줄 몰랐다. 젠장, 아무거나 그리기만 하면 돼. 안그러면 널 잃을까 봐 겁이 나서 그래. "


늘 남의 것을 훔쳐 타던 요아르에게 그 자전거는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것이었다. 그걸 아낌없이 팔아버린 것이다.


25년 뒤 화가는 친구들의 바람대로 세계적인 거장이 된다. 열네 살에 그린 「바다의 초상」은 경매장에서 최고가로 낙찰된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화가는 전 재산을 털어 그 그림을 되찾고, 경매장 하얀 벽에 낙서를 하던 소녀 루이사에게 유산으로 남긴다.


화가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데는 또 다른 눈빛이 있었다. 미술관 침입으로 경찰서에 끌려갈뻔한 아이들을 보증해준 크리스티앙의 어머니. 마약으로 아들을 잃은 그녀는 화가에게서 죽은 아들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를 예술학교에 추천한다. 그녀가 화가에게 건넨 것은 기회가 아니라 시선이었다. 이 소설에서 시선은 일방적이거나 단절되지 않는다. 물처럼 흘러 다음 사람에게 가 닿는다.


훗날 화가는 경매장 뒷벽에 낙서하는 루이사를 발견하며 그 시선을 돌려준다. 값비싼 그림이 아니라 루이사 자체가 그의 유산이라는 그의 말은 이 소설 전체의 논리를 압축한다.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사람이 유산이 될 수 있는 것은, 누군가의 시선이 그를 처음으로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기적으로 가득하지만, 한 소년을 저 멀리 날려 보낼 수 있는 어떤 이의 믿음보다 더 위대한 기적은 없다.”


화가가 빛나는 이유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책장을 덮고 나서 깨달았다.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전거를 기꺼이 팔아 치운 친구들의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사람이 빛날 수 있는 힘은 내면에서만 솟구치는 것이 아니다. 그를 믿어주고 응원하는 타인의 사랑과 지지라는 연료가 더해질 때 비로소 환하게 타오른다.


결국 화가의 친구들과 화가에게서 시작된 이 다정한 시선은 루이사를 거쳐, 다시 어느 길가 벽에 낙서하는 이름 모를 아이에게로 이어진다.


500페이지가 넘는 꽤나 두꺼운 이야기는 상처받고 부서지기 쉬운 우리도 누군가에게 ‘처마’가 되어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벚꽃처럼 화려하게 주목 받지 못해도, 길가에 핀 애기똥풀 같은 존재를 서로 들여다봐주는 것.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대하듯 그렇게 바라봐줄 때 누군가는 하루를 버티고, 마침내 세상을 향해 날아갈 힘을 얻는다.


강변의 벚꽃은 곧 지고 사람들의 마음에서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귀한 존재가 된 애기똥풀은 언제까지나 예쁘게 빛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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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세상에서 까마귀가 사라진다면
마쓰바라 하지메 지음, 정한뉘 옮김 / 나무의마음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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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도시에 살 때 까마귀는 보기 힘든 새였다. 몇 년 전 전원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기고 나서야 비로소 까마귀를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정해진 날 집 앞 벚나무 아래에 쓰레기를 내놓으면 수거해 가는데, 문제는 그사이에 까마귀가 귀신같이 알고 날아와 봉투를 헤집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쓰레기를 새 봉투에 다시 담으며 까마귀를 원망하기도 했다.


시골 길을 운전하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장면이 있다. 도로 한가운데 까마귀들이 모여 로드킬 당한 사체를 쪼아 먹고 있는 모습이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 같은 장르에서 왜 까마귀를 죽음의 전조나 불길함의 상징으로 그토록 자주 소환하는지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까마귀 덕후' 마쓰바라 교수는 이처럼 미움과 혐오의 대상인 까마귀를 위해 여러 권의 책을 펴냈지만, 세간의 인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그는 방향을 바꿨다. '그렇게 싫다면 차라리 없애보자'는 생각으로 『만약 세상에서 까마귀가 사라진다면』을 집필한 것이다.


까마귀가 없는 세상을 채울 새는 어떤 새일까. 콘도르, 솔개, 카라카라, 찌르레기, 바다직박구리… 수많은 후보가 등장하지만, 까마귀의 빈자리를 온전히 메울 수 있는 새는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청소동물로서의 역할, 종자를 퍼뜨리는 역할, 수역과 육역을 잇는 물질 순환까지. 까마귀는 그 하나가 빠지면 전체가 흔들리는 생태계의 '키스톤'이었다. 미워하고 쫓아내고 싶었던 그 새가 사라진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그 존재의 무게를 가늠하게 된다.


나는 이사 온 지 몇 주 만에 까마귀와의 신경전을 포기했다. 번거롭더라도 쓰레기 수거장에 직접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 뒤로 나에게 까마귀는 해조도 익조도 아닌 그저 '까마귀'가 되었다. 산책을 하다 마주치는 까마귀를 관찰하다 보니 의외로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가끔은 전깃줄 위에 앉은 까마귀 소리를 흉내 내 보기도 한다. 까마귀가 '악악' 울면 나도 '악악' 하고 받아친다. 녀석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아래에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날아가 버린다. 올블랙에 덩치도 크지만 보기보다 까마귀는 겁이 많다. 동네 깡패 까치에게 밀려 도망 다니는 장면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물론 번식기에 예민해지는 것만 조심한다면 꽤 흥미로운 이웃이다.


그렇게 전깃줄 위의 까마귀와 실없는 대화를 시도하고 편견 없이 관찰하다 보니, 마쓰바라 교수가 왜 그토록 까마귀를 사랑하는 '덕후'가 되었는지 알 것도 같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좋고 싫음, 선과 악이라는 편견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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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잘하고 있다고, 심리학이 말했다 -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탐색하는 자존감 수업
슈테파니 슈탈 지음, 김시형 옮김 / 갈매나무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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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한때는 자존심과 자존감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막연히 내 자존감이 높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회사 생활이 그 착각을 깨줬다. 친절하게도. 내가 믿어온 자존감은 사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존심에 불과했음을. 그리고 생각보다 나의 자존감은 훨씬 더 취약했다는 사실을.


슈테파니 슈탈은 거의 모든 심리적 문제의 뿌리에 자존감 결핍이 있다고 단언한다. 불안, 공포, 강박은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일 뿐이다. 자존감은 이 모든 현상을 결정짓는 마음의 '근본 축'이다. 축이 휘어지면 삶의 모든 궤적이 어긋나듯, 자존감을 바로 세우지 않고서는 그 어떤 심리적 방어기제도 우리를 온전히 지켜줄 수 없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약점을 포함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느냐의 여부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부족함을 감추려 애쓰지 않는다. 약점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기에 타인의 비판에 흔들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기불안이라는 왜곡된 안경을 쓴 채 세상을 바라본다. 이 대목에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니 늘 불안이 앞서고, 그 불안을 메우고자 다시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열심히 해내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열심히 산다'고 믿었던 모습 뒤에, 사실은 상처받지 않기 위한 처절한 분투가 숨어 있었다. 그 사실을 아프게 직면하게 된다.


저자는 내면아이, 내적 통제신념, 나르시시즘 등 심리학적 개념으로 우리 마음의 지도를 그려낸다. 그 분석의 끝은 결국 자기수용이라는 목적지에 닿아 있다.


자존감이 낮은 이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는, 불안해하는 자신을 다시 자책하는 일이다. 저자는 이제 자신과 싸우는 일을 그만두라고 말한다. 불안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저 유년기의 절망적인 경험이 남긴 흔적일 뿐이다. "난 왜 이 모양일까" 채찍질하는 대신, "그래, 내가 지금 이렇구나" 친한 친구를 대하듯 자신을 다정하게 품어주어야 한다고.


다만 거의 모든 심리적 문제의 뿌리가 자존감 결핍이라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인간의 심리는 때로 생물학적 요인이나 환경적 제약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무엇보다 사회 구조가 주는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그럼에도 자존감은 내 마음의 불필요한 소음을 끄고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데 가장 강력한 출발점이 된다. "당신은 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는 저자의 말이 유독 마음에 와 닿았다. 나를 향한 다정함이 쌓일 때, 삶은 그때서야 내 편이 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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