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와 향수 - 걸작의 캔버스에 아로새긴 향기들
노인호 지음 / 아멜리에북스 / 2025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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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클럽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도서는 저자가 시각과 후각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감각을 연결해 예술 감상의 지평을 확장하고 있다.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느껴지는 색채와 구도가 단순히 눈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향기를 통해 다시 한 번 깊이 각인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은 10년 넘게 이어온 강연과 전시, 그리고 조향사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 결과물이며, 독자가 작품을 마주할 때 새로운 방식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책의 출발점은 모네의 〈수련〉이었다. 저자가 미국 유학 시절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보았을 때, 눈앞에 펼쳐진 연못의 색채에서 실제로 초록빛 향이 느껴졌다고 한다. 이 경험은 그에게 예술 감상이 단순히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감각 전체를 일깨울 수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이후 그는 명화와 향기를 결합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관람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을 제공했고, 지금까지 900회가 넘는 강연을 이어오고 있다. 《명화와 향수》는 바로 그 과정을 집약해낸 책이다.

책은 여러 장르의 그림을 ‘향조’라는 후각적 분류와 연결한다. 플로럴, 애니멀릭, 우디, 시트러스, 몰트 등 향수의 분류 체계를 작품 감상에 접목시켜 각 그림에 맞는 향기를 대응시키는 방식이다. 예컨대 클림트의 〈키스〉에는 관능과 황금빛의 이미지에 어울리는 일랑일랑을, 르누아르의 인물화에는 장미의 향기를, 샤갈의 〈라일락 속 연인들〉에는 보랏빛 라일락을 매칭한다. 이러한 조합은 단순히 비유적인 차원을 넘어, 그림이 가진 분위기와 작가의 삶을 향기로 풀어내어 독자가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든다.



책의 장점은 특정 화가나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동서양을 아우른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이후 유럽의 거장들뿐 아니라, 겸재 정선, 조희룡, 추사 김정희 같은 조선 화가들의 작품까지 함께 다루고 있다. 이로써 독자는 향기를 매개로 자연스럽게 미술사의 흐름을 훑으며 감각적 이해를 쌓을 수 있다. 특히 조희룡의 〈홍백매화도〉 같은 작품에서는 실제로 매화 향이 풍겨오는 듯한 체험을 제공한다. 이는 단순히 도판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독자가 그림과 신체적으로 교감하는 길을 열어준다.

또한 책은 향수와 미술을 각각 별개의 세계로 다루지 않고, 두 예술의 구조적 유사성을 짚어낸다. 그림이 색채와 명암, 구도와 질감으로 이루어져 있듯, 향수도 탑 노트·미들 노트·베이스 노트가 어우러진 층위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명화와 향수의 만남은 단순한 ‘콜라보레이션’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감각 예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발견되는 본질적 친연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흥미로운 사례들이 이어진다. 반 고흐가 정신적 위기의 순간 붓꽃을 통해 마음을 다잡았던 이야기는 아이리스 향과 연결되며, 독자로 하여금 그의 고독과 희망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호퍼의 작품에서는 도시의 고독을 타바코 향으로 풀어내며, 정선의 산수화에서는 소나무 숲의 청량한 내음을 환기한다. 이처럼 각각의 작품은 향기를 매개로 한층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명화와 향수》는 오늘날 콘텐츠 소비가 점점 더 자극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추구하는 시대에 역행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그림 앞에서 오래 머무르기 어려운 독자에게 향기는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 시간을 붙잡게 하고, 이미 익숙한 그림을 보아온 이들에게는 새로운 감각적 통로를 열어준다.



책장을 덮고 나면, 미술관에서만 가능했던 경험이 집 안에서도 가능해진다. 특정 향수를 맡으며 작품을 떠올릴 때, 우리는 단순히 그림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감정과 분위기까지 다시 소환하게 된다. 예술이란 결국 기억 속에 남아 오래도록 영향을 미치는 힘인데, 이 책은 그 과정을 향기를 통해 더욱 강하게,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미술 애호가와 향수 애호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독창적 시도인 동시에 두 영역 모두에 낯선 이들에게도 새로운 경험을 제안하는 친절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감각이 단절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이 책은 다시금 감각의 문을 열어주는 작은 열쇠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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