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북동부에서 태어난 실레는 어린 시절 그림에 재능이 발견되어, 16세 때 비엔나의 미술학교에 들어갔지만 극단적 보수주의 교수에게 실망한 실레는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1907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를 만나게 되어 도움을 받게 되고 멘토 역할을 하여준 클림트의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으로 초기에 클림트를 연상케하는 우아한 장식적 양식을 선보였다. 1908년 빈 분리파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으며, 1909년에는 신예술가그룹(New Art Group)을 결성한다. 1910년 프라하, 1912년 부다페스트, 1912년 쾰른 등에서 열린 수 차례의 분리주의 전시회에 참여하였다. 작품의 명료성이 혼란을 보이던 쉴레는 그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발전시켜 성과 죽음을 자신의 그림에 표현하였고, 여인과 소녀들을 그린 누드화는 외설적이고 적나라한 자극적 묘사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이로 인해 1912년 노이렝바흐(Neulengbach)에서 구속되어 24일 동안 옥중생활을 겪게 된다. 1913년 클림트의 주도로 결성된 ‘오스트리아 예술가 동맹’의 회원이 되었으며, 1913년 뮌헨, 1914년 파리에서 단독 전시회를 열었다. 1915년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결혼 3일 후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군에 징집되지만, 상관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그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실레의 생활과 작업에 큰 영향을 준 전시 중에도 베를린, 취리히, 프라하, 드레스덴 등에의 전시회에 참가하면서 재정적 안정과 함께 예술계의 주목을 끌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