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는 그리스의 호메로스, 영국의 셰익스피어, 이탈리아의 단테와 더불어 세계 4대 시성으로 불리운다.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한 후 법률가의 길을 걷고 있던 중에도 그는 20대 중반의 나이에 자신의 체험을 살려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모방 자살까지 일어날 정도의 큰 인기를 얻으며 유명 작가가 된다. 그의 소설로 인해 바이마르 공국에 초정 되게 되어 군주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의 전적인 신임 아래 국정을 담당하며 성공적인 공직생활을 하게 되지만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예술을 향한 열정적인 갈증은 이탈리아로 3년간의 여행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때의 경험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으로 작용하였고 미적 기준을 삼는 예술관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1773년 초고를 완성한 이래 사망하기 전 해인 1831년에 완성한 대작으로 60여 년간의 생애 전반에 걸쳐 쓰인 작품으로 독일문학의 최고 걸작인 괴테의 '파우스트'는 연금술과 기독교의 교리, 그리스·로마의 신화 등 풍부하고도 다양한 상징적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는 그의 문학과 철학 세계가 모두 반영하고 있다. 예상치 못한 일에 충격과 조종당하는 어리석음으로 겉모양만 번듯하고 깃털처럼 가벼워 상대하기 쉬운 것들을 좋아하는 문물로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끈기와 인내의 작품으로 그 놀라운 가치를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괴테는 80년 넘는 생애 동안 30여 가지가 넘는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전문적이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의 정열과 노력을 다 바친 인물이었다. 그중 하나로 그가 바이마르 공국(公國)에서 산업부 장관도 맡았던 은광(銀鑛)을 살리기 위해 1만 8000종의 광물을 수집해 연구하는 놀라운 열정과 탐구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바이마르 국립극장의 감독으로 25년간을 일했던 괴테를 떠올릴 때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독일 문학의 거장이 있다. 1794년부터 그는 실러와의 본격적인 교류와 우정을 통해 작가로서 발전을 거듭했는데, 둘의 우정은 실러를 바이마르로 이주하게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독려하며 풍자시를 공저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며 함께 성장해나갔다. 두 사나이의 우정에 대한 정도를 보여주는 괴테와 실러가 함께 서있는 동상이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 세워져 있으며, 평생의 역작을 완성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난 후, 바이마르 시가지의 묘지에 나란히 묻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