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문화사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5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은주 옮김 / 르네상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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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이란 시종 일관된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느슨한 관련밖에는 맺지 않는 다양한 현상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얼마 전 완역되었던 4권짜리 대작, '악의 역사'의 저자가 마녀에 관해 쓴 책이다.

('악의 역사'가 처음 나올 때, 이 책 행사로 끼워서 줬더랬지, 아마;; 그 때 혹해서 살까 말까 했었는데. ㅎㅎ)

아무래도 종교사가인만큼, 르박의 저작과는 조금은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르박이 마녀사냥은 왜, 어떤 이유로, 무엇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종교사가인 러셀은 유럽 마술의 기원 자체로부터 출발한다.

각자 다른 범주에 있었던 마술과 이단, 악마숭배가 어떻게 하나로 묶이며 마녀사냥을 낳게 되었는지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영향, 사법기구/고문의 영향에 관한 부분들은 르박과 비슷한 견해를 유지한다.

게다가 재난이나 질병, 기근과 같은 사회적 조건이 마녀사냥의 원인이라는 느슨한 분석에도 르박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재나 그 밖의 재해는 민중의 공포심을 부추겨 속죄양을 요구할 가능성을 높인다. 그렇다고는 해도 화재 뒤에 마녀가 고발당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으며, 아무런 재해가 없었는데 마녀 고발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재해는 마녀 고발의 한 원인이지만 재해가 마녀 고발을 유발하는 것은 일정한 세계관이 우세한 경우뿐이며, 그러한 세계관을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 또한 일정한 사회적, 지적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르박과는 달리 '마술의 기능'에도 주목하고 있다.

즉 단순한 '희생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마녀사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술은 불행에 대한 책임을 추상적이고 불가해한 힘에서 벌줄 수 있는 특정 개인에게로 전가시킨다. 신이, 혹은 운명이 병을 유발한 것이라면 보복을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나 마녀의 책임이라면 상대를 쫓아내거나 그 힘을 저지해 볼 수 있게 된다.......

  마술의 또 다른 주요 기능은 이단의 기능과 동일하다. 즉, 마술은 기독교의 경계선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탄을 최고 지휘자로 하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적들의 군대에 맞설 수 있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단결시켰다.

 

이 책이 르박의 책과 가장 다른 점은 현대의 마녀에도 관심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은 종종 역사학자가 도출한 결론에 비해 조금은 더 폭넓은 결론(혹은 경고)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광기, 인간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일에 대한 열광이 몇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반세기 동안에도 홀로 코스트, 수용소군도, 캄보디아의 대량 학살을 비롯한 무수한 고문과 처형이 비밀리에 자행되었다. 그보다는 700년부터 1000년까지, 1700년부터 1900년까지의 기간과 같은 비교적 멀쩡한 정신의 시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묻는 편이 오히려 더 합당할 것 같다.

 

이 광기 상태에 관해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회적, 지적 유래가 아니다. 마녀사냥은 본질적으로는 중세의 탓도 기독교의 탓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르네상스 주술의 탓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마녀사냥이란 인간성에 내재하는 하나의 결함, 즉 악을 타자에게 투영하여 그 사람들을 국외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을 가차없이 벌하려 하는 빗나간 요구가 취한 하나의 특정 형태였다....... 악이 취하는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지만, 그 형태의 배후에 숨겨진 악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다.

 

러셀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진보에 대한) 독선을 버리고,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양성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역설한다.

 

진보라는 관념은 과학적으로 엔트로피의 법칙 때문에 미덥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마음에 기묘한 신념을 수없이 심어왔다. '야만적인 사회'가 진보해 문명이 되며, 분석적 사고는 종합적 사고에 비해 진보된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또한 실증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주술이 진보해 종교가 되고, 종교가 진보해 과학이 되었다고 가르쳐왔다. 우리는 다신교가 진보해 일신교가 되고, 일신교가 진보해 무신론이 되었다고 믿고 왔으며,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자연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에 비해 진보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일단 이 근거 없는 신념을 내던져 버린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완고하게 거부해 온 대안들 속에 있는 가치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분명히 통합적이고, 직관적인 사고의 가치는 분석적 사고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 무신론이 종교보다 진보한 형태일 리는 없다. 아마도 다신교는 일신교가 잃어버린 진리로 나아가는 여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용어 번역의 문제는, 내가 보기엔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마법, 마술, 마녀술(이 책에 마녀술이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녀 등의 번역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진 않는다.

명백한 오역이 아주 가끔 눈에 띄기는 하지만, 눈에 확 띄는 오역이라면 오히려 봐줄만 하니까.

조금 아쉽다면, 이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따로 부록에 한두 페이지로 정리해서 실어주었다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이 용어들은 지금 학계에서도 어떻게 번역을 해야할지 명확하게 합의가 되지 않은 것들이 대다수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witch, witchcraft, socery, soceror, wizard, warlock, magic, magician

 

당장 witch부터 문제가 되는데, 사실 witch는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번역어인 '마녀'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용어다.

그렇다고 '남자 마녀'도 우스운 말이 되고, '마남'으로 구분을 하자니 이것도 어색하다.

'마인'은 또 demon과 헛갈릴 수가 있어 쓰는게 꺼려진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의 도움-_-...으로 감이 오기는 하는데 무슨 단어로 번역을 해야하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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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사생활
하영휘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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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통에 달하는 행서와 초서의 편지들. 그 편지 속에서 19세기 한 양반의 생활상과 그가 살았던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책이다.

 

책이 새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주문하여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 정말 녹녹한 책이 아니다.

어려운 말로 태반을 채운다거나 하는 일도 없는데도 이 책을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 책이 '노작'이란 점 때문이리라.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건성으로 넘기기엔, 한 학자가 원사료를 보고 해석하고 그 해석을 다시 재구성하여 하나의 글로 만들어내는

그 힘든 과정이 내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사이 나오는 가벼우면서도 자극적인 책들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런 책으로 생각하고 집어들었다가는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뒤에 달려있는 미주들도 꼬박꼬박 챙겨가며 읽었기에 읽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 노력 끝에 짧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해놓고서 그 작업에 타당한 '한계선'을 스스로 긋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사실 남들이 보기엔 아무렇지 않더라도, 자기가 고생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이 가장 큰 착각이며 가장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필자는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끔, 자신의 노고에 대한 '애정'을 툭툭 잘 털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19세기 양반 유학자의 일용품은 대부분 선물에 의하여 조달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중략)...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실생활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미미했음을 의미한다. 선물, 이른바 '도덕경제'가 시장경제의 발달을 강력히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의 삶은 공과 사로 구분되어 있었다. 학문, 벼슬살이, 사회생활은 공에 속했고, 가정생활은 사에 속했다. 그들의 공은 훤히 드러나 있는 반면, 사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에 늘 공을 앞세웠기에, 평소의 말과 행동은 모두 공에 속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감정까지도 공과 사로 구분하고 있었다. 혹 사적인 감정이 드러날 경우, 반드시 '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였다. 가령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적으로' 슬펐고,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사적으로' 기뻤다.

 

  조병덕의 편지를 통하여 살펴 본 19세기 조선사회의 모습이 결코 19세기 전체 조선사회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이 책은 19세기 기호지방 양반에 관한 하나의 사례연구에 불과할 뿐이다....(중략)...

  조병덕의 눈을 통하여 본 19세기 조선 사회가 암울하고 변괴로 가득한 사회였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중략)... 만약 조병덕의 반대편에 서서 19세기 조선 사회를 바라본다면, 조병덕이 '세상의 변괴'라고 한 갖가지 모습은 바로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새로운 몸짓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몸짓은 그 전 시대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음을 조병덕의 편지는 말해주고 있다. 바로 거기에 조병덕 편지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양반'들'의 사생활'이 아니라 '양반의 사생활'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양반의 여유나 멋 같은 것 보다는, 몰락해가는 양반의 서러움과 어려움,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하는 양면성.

아들에 대한 걱정과 잔소리들, 이 모든 것에서 투영되는 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기기는 한데, 역시 어느 시대나 '아비의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부모 걱정 시키는 자식놈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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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과 열광 - 어느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
한스 U. 굼브레히트 지음, 한창호 옮김 / 돌베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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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스포츠,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혹시 그가 먹물이라면 '나 스포츠 좋아하지;라는 얘기를 잘 하진 않는다.

자본주의, 우민정치의 수단 등으로 자리잡아버린 스포츠의 역할(?)이 찜찜한 탓일까.

 

심지어 스포츠를 사랑하는 학자라도 막상 자신이 갈고 닦은 개념을 적용할 때면 결국 스포츠를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들의 어떤 증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지곤 한다....(중략)...

간단히 말해, 스포츠 찬양이 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한편 지식인들이 스포츠를 찬양하는 데 무능력한 더욱 일반적인(그리고 더욱 설득력있는) 이유는 항상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있다.

 

  스스로를 교양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적 경험이란 오직 몇 가지 규범화된 대상과 상황에 의해서만 유발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즉 '문학적'이라고 내세우는 책에 의해, 연주장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의해,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림에 의해, 혹은 무대에서 공연되는 극예술에 의해서만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엘리트 집단은 정전(正典)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회적 차별화와 특권의 도구가 되어버린 미적 경험에서 이득을 본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즈음 스스로 교양있는 중산층이라 칭하는 사람들은 이 차별화의 기제를 무식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보다는 '그저 돈만 많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볼 때, 그리고 '주변성'이 스포츠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스포츠는 틀림없이 미적 경험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강조한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스포츠를 미학적으로 분석하면 '현존'과 '의미'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의 차원에서 사건은 새롭고 다소간 심오한 변화의 시작을 특징짓는 순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현존의 차원에서는 '모든' 시작이, 심지어 끊임없이 반복되거나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시작조차도 '사건'이라는 지위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의 '세계'에 대한 고찰도 꽤나 탁월하다.

 

운동선수와 관중에게는 오히려 그런 규칙들이 일상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경기중에 강렬하게 집중하여 몰입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이 된다.

 

비록 책의 뒷 부분에 가서는 왠지 처지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 능력은 분명 인문학자로서 반드시 갖춰야할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관심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낼 수 있다는 것.

타인이 어찌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예찬할 수 있다는 것. '도구'와 결합되는 스포츠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라.

 

...정말로 유명한 선수들은 기계적 지식과 육체적 직관의 조합을 통해 그런 셋업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나타낸다....(중략)...그런데 자동차경주에서 관중이 위다함과 마주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실 이 말은 오후 한 나절 내내 경주차량이 단지 몇 번 전속력으로 눈앞을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켄타로우스 같은 경주 선수의 윤곽을 포착한다는 뜻이다.

 

그저 스포츠의 기록과 에피소드만을 담은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밑의 책이랑 정말 비교된다. -_-)

 

오랜만에 '신선함'을 느끼며 재미있게 읽었던 책.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에피스드가 주는 감동이 뭔지 대충은 알 거다.

그리고 이 감동을 대충 아는 사람은, 이 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사카 출신인 내 친구 에이코 후지오카에게 야구와 관련된 가장 소중한 기억은 정확히 패자의 비장미와 관련된다. 그런 우아함은 아레테(탁월성을 향한 노력)가 아곤(경쟁)에 비해 아주 눈에 띌 정도로 우위를 점하게 되는 어떤 수준이 존재하리라고(이것은 당연히 스포츠가 거둔 최고 수준의 성과일 것이다) 희망할 수 있게 해준다.

 

  15년 전쯤 당시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뛰던 코지 아키야마의 팬이었을 때가 정말이지 앚혀지지 않아. 난 텔레비전으로 일본 챔피언전을 시청하고 있었지, 두 명 아니면 세 명쯤 주자가 진루해 있고 투아웃 상황에서 아키야마가 타자석에 들어섰어. 또 한 점 얻을 수 있는 기회였지. 볼카운트는 투스트라이크였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된 상황이었는데 그 다음 투구에 아키야마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어. 그런데 그만 스트라이크가 돼버린 거야. 삼진을 당해버린 거지. 이런 아주 중요한 경기에서 자기 팀에 또 한 점을 올려줄 기회를 그만 잃고 말았던 거야. 경기장은 실망한 라이온스 팬들의 큰 한숨 소리로 가득 찼어. 이런 상황에서 아키야마는 타자석에 평소보다 잠깐 더 오래 머물러 있더니 진정으로 아름다운 웃음을 투수에게 보내지 않겠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키야마의 웃음은 상대 투수가 그날 야구 시합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느낌, 그리고 경쟁에서 패했지만 그 자신도 이러한 성취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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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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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지식인과 지성인은 분명히 다른 개념이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던가,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지식인이 단순히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라면, 지성인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걸맞은 인격을 가지고 지식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쉽게 감동하고 쉽게 흥분하던 그 신입생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그 말에 수긍했다. 하긴 ‘대학생은 지성인’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쓰이던 시절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제 그 때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그 단어들을 사전에서 뒤적거려 본다(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지성인 [知性人]

[명사]

1 지성을 지닌 사람.

지성인의 면모를 갖추다

대학 교육을 받은 지성인이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에티켓쯤 지니란다.≪이청준, 조율사≫

2 <철학>=호모 사피엔스.




지식인 [知識人]

[명사]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또는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

우리나라의 경우는 그 전문가가 좀처럼 지식인으로 발전하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전문가의 그것에 머물러 버리는 것이 한 특징이라고 그는 말한다.≪이청준, 조율사≫

지식이 인격과 단절될 때 그 지식인은 사이비요 위선자가 되고 만다.≪법정, 무소유≫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건대, 지성인과 지식인의 개념 사이에는 그처럼 심오한 간극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도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그 간극을 쉽사리 인정했던 것은 그가 순진무구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가 아직 ‘쿨’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쨌거나 이제 시대는 더 이상 지성인과 지식인의 차이를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지식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쿡쿡 찔러볼 뿐이다. 이 현상은 ‘지식인’의 개념 혹은 위상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했다는 것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이 ‘섹시’해야 책이 어느 정도 팔린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에 속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다시, 지식인을 묻는다’ 따위의 제목보다는 ‘지식인의 죽음’이라고 선언하고 들어가는 것이 더 ‘섹시’하다(실제로 이 책/기획의 최초 제목은 ‘우리시대 지식인의 초상(肖像)’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지식인의 죽음’ 앞에 ‘민주화 20년’이라는 말이 붙어있다는 점이다. 민주화하면 생각나는 인물들이 있다. 물론 권력에 항거했던 ‘민중’들이 생각날 수도 있겠지만, 민중은 얼굴도 이름도 없다. 때문에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인물들은 ‘지식인’들이다.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저항적 지식인들. 그런데 민주화가 ‘된’ 지 20년이 지나, 정작 그것을 앞장서서 추구했던 지식인들이 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일까?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이라는 책에 대한 나의 리뷰는, 때문에 매우 근본적인 곳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지식인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2.

  이 책에도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다. ‘지식인 위기론’에 관련된 질문을 받은 ‘지식인들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로 답변을 시작했다’(71쪽). 그들(그러니까 경향신문사에서 지식인이라고 찾아갔던 이들)이 위기에 처했다고 평한 지식인상은 ‘인텔리겐치아형 지식인’이었다. 인텔리겐치아는 러시아어 intelligentsia에서 유래한 용어로 그 원래 뜻은 말 그대로 ‘지식인’이다. 하지만 인텔리겐치아는 단순히 지식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성향을 내포한 개념이었다. 사회에 비판적이고 혁명적 성향을 지닌 인물들을 인텔리겐치아라고 칭했던 것이다(두산백과사전 참조).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지식인들이 이런 개념으로서 지식인의 죽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뒤집어 생각하면 지식인의 삶 혹은 ‘살아있는 지식인’이 어떤 개념인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이 접근하고 있는 지식인의 ‘생명’은 사회순응이 아니라 사회비판에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지식인’이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바로 ‘권력’이다. 목차만 찬찬히 뜯어봐도 그러하다. ‘정치권력과 지식인’, ‘경제권력과 지식인’, ‘문화권력과 지식인’…. 책의 전체 내용을 한 마디로 무리해서 요약하자면, 지식인과 권력, 이 두 단어를 사용하면 될 것 같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장소이든 간에,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지 않았던 시대가 있던가?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대부분의 펜은 칼에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칼의 첨병이 되어, 칼이 묻힌 피를 닦아주거나 이제는 자리를 잡은 칼이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도록 잉크를 함부로 튀기고 다녔다. 그것은 어찌 보면 ‘펜’의 숙명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도 여전히 지식인에 관련된 문제제기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그렇다면 권력에게 있다는 말인가?

 

  사람이 죽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 수사는 누가 그를 죽였는가라는 ‘책임론’에서 출발하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은 죽은 이가 타살‘당했는가’ 아니면 자살‘했는가’하는 지점이다. 자살과 타살의 판단이 선 이후에야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그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유독 지식인의 죽음을 논할 때는 그 죽음이 타살인가 자살인가를 묻지 않는다. 지식인은 힘이 없으므로 타살당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마감하면 또 다른 영생이 열릴 경우, 우리는 자살을 의심해야만 한다. 하지만 과연, 이것을 자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권력으로 돌아가 보자. 정치권력/경제권력/문화권력에 ‘굴복’하거나 ‘종속’된 지식인이 권력을 ‘잃었는가?’ 내가 보기에 그들은 권력을 잃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권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은 지식인임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지식인계에서 권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자들 중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를 대중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노동’을 먹고 살기 위한 다른 ‘노동’과 동급으로 놓지도 않을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교수님’이며 ‘박사님’이고 ‘선생님’이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지식인은 권력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다’라고. 배운 자가 아니면 권력을 얻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것이 경제적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문화적 권력이든 간에. 권력을 얻기 위해 혹은 권력을 유지/세습하기 위해 간판으로 걸 학위를 받아내고 자식을 유학보내고. 이런 현상이 지식인이 권력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인가? 천만에.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권력이 지식인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지식인’을 추구할 뿐이다.




#3.

  지식인은 죽지 않았다. 지식인의 죽음이라니, 가당치도 않다. 그들은 더욱 강성하게 살아있다. ‘잡초와 같은 생명력’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민중? 맞다. 흔히들 잡초를 민중에 비유하고는 한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민중의 것이 아니다. 그 끈질긴 생명력의 주인은 민중이 아니라 먹물들의 것이다. 그들은 시대의 변화를 제일 빨리 감지하고는 그것에 적응할 준비를 시작하고는 했다. 변화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지식인들의 능력은 더 힘을 발휘하고, 그들의 ‘세습’은 더욱 견고해진다.

 

  그런데도 지식인의 죽음이 언급되는 것은, 지식인들을 만족시켜줄 그 무엇이 약해진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그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주는 그것. 존경심. 그렇다. 이제 그 누구도 지식인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젠 더 이상 ‘이상적 지식인’(그러니까 저 10년 전의 대학 신입생이 바라보았던 ‘지성인’)을 믿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당연한데도 지식인들은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도 관심 없는 지식인의 생사를 논하고 있을 수밖에. 그러므로 이처럼 웃긴 기획이 또 있을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자들이 자신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니. 마치 자신은 죽었다고 여겨지는 ‘지식인’이 아닌 것처럼.

 

  그럼에도 이 기획은 웃기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람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먹물들이 더 ‘쿨’해질 징조가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젊은 지식인들은 굳이 ‘존경’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모든 것에 대한 변명이 가능해질 것만 같다. 그것만이 지식인의 전부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기엔, 되돌아올 답변이 너무나도 차갑고도 단순명료하다. ‘그럼 난 뭐 먹고 살라고?’ 그러니 한 때 ‘쿨가이’였던 푸코의 말도 이제 우리 젊은 지식인들에게는 너무나 무겁게 느껴진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 두 세기가 경과하는 동안 지식인들이 공식화해 왔던 모든 예측과 전망, 지령, 그리고 프로그램들을 기억해 보십시오. 지식인의 역할은 다른 이들의 정치적 의지를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식인의 역할은, 그 혹은 그녀 자신의 영역에서 분석을 수행하면서, 자명해 보이는 원리들에 대해서 새롭게 질문하고, 행위와 사고의 방식 및 습성을 흔들어 놓으며, 상투적인 믿음을 일소하고, 규칙과 제도들을 새롭게 파악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것은 [지식인들이] 시민으로서의 역할을 행할 것을 요구받는 곳에서, 정치적 의지의 형성에 참여하는 문제입니다.” (푸코 · 둣치오 뜨롬바도리, 『푸코의 맑스』, 이승철 옮김, 갈무리, 2004, 26쪽. )




  그렇다고 해서 젊은 지식인들이 권력에 소탈한 도인들인가?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존경을 바라지 않지만 그들 또한 지식인이고 싶어 한다. 아니 지식인이라는 애매한 칭호가 결코 ‘직업’이 될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러니 ‘어떤 지식인도 지식인인 채로 대중이 되고자 하지는 않았다’라는 고병권의 지적(219쪽)은, 또 다른 의미에서 촌철살인인 셈이다.




#4.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 누구도 우리를 먹여살려주지는 않으니 이제 지식을 ‘파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일까? 어차피 먹물들의 자아비판인만큼, 솔직하게 '까놓고' 얘기해보자. 그래,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하니 지식을 파는 행위를 무슨 버러지 보듯이 하지는 말자. 우린 ‘아마추어’가 아니니까. 이제 ‘존경’따위도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으니 그런 허영에 넘치는 것도 얘기하지 말자(아직까지 존경에 미련을 둔 촌스러운 사람이라면, 존경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 달라.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어떤 물건을 팔았는데 그것이 만든 이가 광고한 것만큼의 품질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당연히 소비자에게 보상을 해줘야 한다. 품질만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었다면 배상을 해줘야 한다. 아무리 신자유주의 시대라지만, 이런 상황에서 배상/보상을 하지 않을 자유를 외칠 정도는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상도(商道)를 지키지 않는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지식인이다. 대운하가 말도 안 된다고 자신의 권위에 기대어 주장하다가 순식간에 말을 바꾼다면, 자신이 앞서 기댔던 권위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것을 민영화해야한다고 강력 주장하는 교수라면, 자신이 속해있는 ‘국립대’부터 민영화하고 ‘고객’인 학생 앞에서 머리 숙여야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이 먹물들은 자신들이 시장논리와는 상관이 없는 ‘선비’인 줄 아는 모양이다.

 

  네이버 지식in에서 한 네티즌이 잘못된 답변을 내놓았다고 그에게 보상을 요구할 수는 없다. 그의 답변은 ‘무료’였으니까. 하지만 대학 교수는 무보수 명예직종이 아니다. 하다못해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더라도 그에게 지불되는 출연료의 일부에는 시청자가 납부하는 시청료가 들어가 있다. 그러니 이제 지식인들은, 그들이 결코 속한 적이 없는 ‘대중’들이 요구하는 ‘그 무엇’에 대해 쿨한 척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남보다 조금 더 배웠다는 이유로 생계를 보장 받는 사람이라면, 지식인이 아닌 척 쿨해서도 안될 것이다. 만약 자신의 변명대로 자신이 지식인이 아니라면, 그의 생계는 보장될 필요가 없다. 너무 먹고 사는 문제, 돈이 오고 가는 문제로만 ‘지식인의 죽음’을 논하고 있다고? 앞서서 얘기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고상한 지식인에 걸맞는 지식과 실천을 보여달라고.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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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읽기
프란츠 파농 지음, 이석호 옮김 / 인간사랑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52년 파란츠 파농이 그의 나이 27살에 쓴 저작. 프란츠 파농의 첫 저서이기도 하다.

파농은 서인도 제도의 마르티니크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알제리 혁명에 가담한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

한국에선 이 책이 '제3세계 문학'으로 분류가 되어 있지만,

사실 문학이나 사회과학서적이라기 보다는 정신병리학에 관한 임상보고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피부색', 즉 인종이 인간에게 어떠한 병리적 상흔을 남기는지 관찰하고 있다.

 

  백인에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스스로를 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실말이다. 흑인에게도 하나의 사실이 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그들 사상사의 풍요로움과 그들 지성사의 뒤떨어지지 않는 가치를 백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말이다.

 

물론 그는 흑인이기에 흑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끌어간다. 백인이 되고 싶어하는, 흑인을 부정하는 흑인을 보라.

그리고 오륀지라고 혀를 굴려야만 하는, 오륀지를 위해 아이의 혀를 찢기까지 하는 한국인을 보라.

 

  자의적이면서 보편적인 흑인 신화의 노예인 교육받은 엘리트 흑인은 어느 단계에 이르면 자신의 종족이 자신을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흑인들의 끊임 없는 자기부정은 바로 백인들의 끊임 없는 타자화에서 비롯한다. 그들은 이제 그것이 '병'인지도 알지 못한다.

'흑인은 백인과의 관계에서만 흑인'이 된다.

 

  그가 말라가시인인 이유는 백인의 출현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한 특정단계에서 그가 그 자신에게 진정 그가 인간인지 아닌지를 자문해야만 하는 이유도 인간으로서 그 자신의 실체가 도전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꼼짝달싹할 수 없는 코너에 몰려있다.

 

  아, 이 부끄러움, 수치, 지기 경멸, 그리고 오역질.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 간의 관계를 분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 때문에 파농은 6, 70년대 이후 페미니스트들에게 심한 공격을 받았다.

나도 '흑인에게 강간 당하고 싶어하는 백인 여성'에 대한 묘사는 충분히 그런 비난의 빌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백인의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카페시아의 소설에 대한 분석을 가지고 그런 비난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파농과는 별개로 식민주의에 관한 논의를 할 때, 항상 '강간'이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것은 비판적으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백인들이 가지고 있는 흑인에 대한 '환상' 혹은 '공포'다.

 

유태인들은 역사적으로 그들 자신의 선조 및 후손과의 관계에서 그들 인종의 종교적 정체성이 가학당한 것이다. 따라서 유태인들을 가학할 때, 가학자들은 주로 그들의 정체성의 뿌리를 거세한다. 박해받는 한 유태인, 그는 박해받는 한 개인이 아니라 박해받는 한 인종인 것이다. 그러나 흑인이 박해를 당하는 곳은 그의 신체이다. 흑인 자신의 구체적 인성의 상징으로서 신체가 고문을 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백인들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흑인들의 성기는 거대하고, 그들의 성적 능력은 뛰어나다.

흑인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백인 남성들은 자신들의 백인 여성들을 흑인 남성들이 강간할 것이라고 두려워한다.

반대로 백인 여성들은 흑인 남성에 대한 '공포'와 '욕망'이 마구 뒤엉켜 갈팡질팡 한다(바로 이 부분이 논쟁적인 부분이다).

 

첫 저작인만큼 표현이 좀 장황하고 굉장히 흥분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만, 그의 논지는 매우 명확하다.

 

  도구가 인간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예화는 영원히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 한 인종에 의한 다른 인종의 노예화는 반드시 중단되어야 한다는 것. 인간, 그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가 그를 찾아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아마도 파농은 자신의 임상관찰 결과, 흑인들의 이러한 정신병리적 현상은 단순한 의료적 치료로 해결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이런 병들을 생산해내는 환경, 즉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뒤집지 않고서는 이 병을 이겨낼 수 없을테니까.

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는 것 또한 그가 아직 '현장'에 들어가기 전이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도 '인간사랑' 출판사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아마 푸코의 '광기의 역사'였던듯), 이 출판사, 좀 특이하다.

어째 역자의 약력이 전혀 나와있지 않고, 역주는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건지;;

이 책을 역주 없이 읽으려면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 마르티니크라 하면 대체 몇 명이나 그게 어디에 붙어있는 건지 알겠는가?;

그리고 '피진'이니 '크레올'이니 하는 것들이 괄호에 묶인 원어조차 명시되지 않고 마구 쓰인다면, 과연 몇 명이나 이해할 수 있을까?

번역상으로는 크게 걸리는 부분은 없었지만(분명 번역이 쉬운 책은 아니었을 거다), 하지만 역주 없는 번역은 여전히 성의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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