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 사실을 재구성하는 역사 글쓰기의 모든 것
리처드 마리우스 & 멜빈 E. 페이지 지음, 남경태 옮김 / 휴머니스트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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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논문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단계에서... (실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_-) 읽었던 책.
글쓰기에 대한 책들은 정말 셀 수 도 없이 많고 지금도 계속 쏟아지지만, 역사 글쓰기에 대한 책은 거의 처음이 아닐까?
역사 서술은 과거의 자료에서 증거를 찾아내고 개연성 있는 역사적 상상력으로 증거 사이의 간극을 메우는 작업이다.
때문에 자칫 잘못했다가는 사실의 나열이 되거나 혹은 반대로 근거 없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될 수도 있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한 저자들의 조언.

증거에서 뭔가 까다로운 문제를 찾아내 그것을 해결하거나 그게 왜 문제인지 설명하라. 질문을 던지고 답하도록 노력하라. 그러나 논점에 곧장 접근하라. 

오슬랜더가 결론에서 말하듯이, 역사가의 목표는 "문헌이나 대상 너머의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나아가 설명하는데 있다."

  역사가는 구체적인 시기에 구체적인 장소에서 살아가는 인간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간이 행동하는 동기는 어느 시대에나 복잡하고, 불가사의하고, 때로는 부조리하다. 어느 나라든 이유도 없이 광기에 휩싸이고 파괴적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히스테리에 빠진 지도자는 국가적 재앙에 부딪히면 희생양을 만들거나 상상의 적을 꾸며내 책임을 지우고 학살한다. '합리적인' 사람은 생드니가 자신의 잘린 머리를 손으로 들고 걸어갔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20세기 초 아르메니아나, 세기 말 르완다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량학살극을 묵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야기가 공상적일수록 실제로 공상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문체에 대한 조언도 빠질 수 없다. 

말은 간단하고 명료하기는 커녕 모호하고 거칠고 복잡하고 장황하다. 특히 말이 장황하다는 것은 녹음된 대화를 글로 풀어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글로 줄이라"고 말한다. 말하는 것처럼 글을 쓰라고 하면, 말을 아주 잘하는 사람일 경우 말하고 싶은 대로 글을 쓰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거창하고 거만하고 과장된 글이 좋은 글이라는 말은 아니다. 좋은 글은 '간단명료한 글'이다.

역사 글쓰기에서는 그렇게 현재 시제를 남발하기보다 평범한 과거 시제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낫다.

이제 논문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눈길이 가는 부분들.

다른 견해를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견해와 상반되는 주장까지도 알고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논지를 강화해야 한다.

역사가의 평판을 가장 크게 해치는 것은 과거의 의미를 객관적으로 통찰하지 못하고 자료를 쉽게 믿어버리는 게으른 자세와 수동적으로 연구하는 자세다.

아무리 전자기술이 여러가지 편의를 가져다준다 해도 여전히 역사 글쓰기의 근본은 신중한 질문 구성, 정성 어린 연구, 성실한 평가, 세심한 편집이다.

거의, 약간, 보통 같은 표현이 별로 없고 완전히, 결코, 언제나 같은 표현이 많은 주장은 글의 저자가 해당 주제의 모든 분야를 연구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지표다.

그리고 지금 이 시기에 정곡을 찌르는 아픈 말들.

어떤 시점에 이르면 조사와 준비를 마치고 글쓰기에 들어가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되도록 글쓰기를 일찌감치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동안에는 여러분의 목표에 도움이 되는 자료만 읽는 게 좋다.

초고를 쓰는 데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실제로 글을 쓰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질문을 회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질문에 관해 뭔가를 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의 개념을 지금 방식으로 정의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저자가 예로 들고 있는 '저명한' 역사가 프레더릭 잭슨 터너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아픈 이야기다.
중요한 여러 권의 책을 쓸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와는 달리(몇몇 출판사와 계약까지 했다) 그는 책을 거의 완성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터너는 과제의 완성을 가로막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기계적 장애물을 만들었다. 학술권에 있는 사람에게는 낯익은 현상이다. 여기에는 일종의 완벽주의가 있다. 알고 싶은 사실이나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면 그것을 토대로 이미 써놓은 초고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이후 2개월이나 12~18개월 동안은 대단히 낙관적인 자세로 계획을 추진하지만, 아무 것도 실현하지 못하면 또다시 절망에 빠져든다. 섣부른 호기심, 모든 것에 대한 탐욕스럽고 쉴 새 없는 관심, 무엇이든 성취하려는 각오는 대단했지만,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날아다니면서 일시적인 탐구의 즐거움에 편승해 글쓰기의 어려움으로부터 멀어지려 한 것이다.

오죽하면 겨우겨우 한 권의 책 원고를 얻어낸 까다로운 편집자가 이런 말까지 했을까.

"내 묘비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터너에게서 책이라고 불릴 만한 분량의 원고를 얻어낸 사람이라는 문구가 새겨져야 합니다."

글쓰기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 간의 상호 비평에 대한 조언도 포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자의 어조는 긍정적이어야 한다. 오로지 잘못된 점만 지적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잘한 점을 찾아내야 저자가 어떻게 작업을 계속할지 알게 된다.

이런 글쓰기의 기본 지침 뿐만 아니라 자료 찾는 방법, 파일 관리법 등등의 실용적인 부분까지 다뤄지고 있다.
사학과 전공 대학생, 대학원 초년생, 혹은 논문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 같다. 나도 그래서 읽은 거고.
어쨌거나. 최종 목적지는 글쓰기임을 잊지 말자. 원고가 없는 완벽주의 따위 존재할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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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던 용산 평화 발자국 2
김성희 외 지음 / 보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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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90년대 중반쯤 벌어졌던 살인 사건이 화제가 되었던 적이 있었다.
교수 아버지를 죽인 아들의 이야기였는데 당시 당연히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지만,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했다.
실은 나도 그 전 주에 다른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들은 뒤, '아, 맞아. 그런 일이 있었지'했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잊는다.

용산참사가 일어난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그저 지나간 일로 생각하거나, 혹은 아예 잊어버렸다.
도심 한 복판에서 공권력이 시민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었지만, 사람들은 재범의 일, 타블로의 일만큼도 분노하지 않았다.
나의 일이 아니었고, 나의 일이 아니었으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6명의 만화가들이 망루에서 목숨을 잃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그려냈다.
그들이 테러범이 아니었음을, 우리의 이웃이었음을, 매우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그저 사람이었음을.
그들은 살려고 올랐으나, 죽어서 내려왔다.
 
정말 묻고 싶은 요즘이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G20이, FTA가, 4대강이, 살기위해 목숨을 걸어야하는 기현상을 멈추게 할 수 있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하지만 그 속사정은 자세히 알지 못한다면, 당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한다면, 권한다.

앙꼬는 '새만화책' 때부터 눈여겨보던 작가인데, 왠지 실감나는 10대의 시선이라는 점에서 기대되는 작가다.

조금 호흡이 긴 중장편을 그려낼 수 있다면 훨씬 더 '작가'가 될 것 같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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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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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이 많은 건 아니지만, 설렁설렁 읽어나가다가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책.

게다가 내가 주관심사인 노년과 죽음을 직접 다룬 책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한 사람의 인생을 탄생이 아닌 죽음에서부터 출발하여 되돌아보다 보면, 느낌이 조금은 다르기 마련.

'죽을 고비'를 넘기는 순간에 대한 느낌도 그렇고, '평범하게' 건강히(혹은 방탕하게) 살아가는 순간의 느낌도 그렇다.

이 소설은 주인공의 장례식으로부터 시작한다. 예정된(?) 죽음을 상정해놓은 채로 한 인물을 삶을 훑어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가가 첫 장면에 띄운 죽음이라는 韻은 책 전체를 지배하고 만다.

하지만 읽는 내내, 독자인 나는 주인공을 소외시키고 있었다.

그건 아마도 죽음이 결코 함께 체험할 수 없는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고독이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죽음 그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이미지에도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죽음을 패배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당연하게도, 노년은 패배로 향하는 수치스러운 길이 되고 만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죽음과 가까워지고, 신체적 기능이 점차 파괴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건만(물론 당연하다고 슬프지 않은 건 아니다),

그 당연한 일에 슬픔을 넘어선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건강하지 않음은 일종의 죄악이 되었다.

 

  각 반에는 학생이 열 명 정도씩 있었으며, 그들은 그의 환한 작업실에서 만나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대체로 그림을 배우는 것은 그 방에 오기 위한 핑계였으며, 그들 대부분이 그가 이런 일을 시작한 것과 같은 이유로 수업에 참여했다. 다른 사람들과 만족스럽게 접촉할 방법을 찾으려는 것이었다. 둘을 빼면 모두 그보다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매주 동지적인 명랑한 분위기에서 만났음에도, 대화는 어김없이 병과 건강문제로 흘러갔다. 그 나이가 되면 그들의 개인 이력이란 의학적 이력과 똑같은 것이 되었으며, 의학적 정보 교환이 다른 모든 일을 밀쳐냈다. 그의 작업실에서도 그들은 그림보다는 병으로 서로를 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당은 어떤가요?" "혈압은 어때요?" "의사는 뭐래요?" "내 이웃 얘기는 들었나요? 간으로 퍼졌다는 군요."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녀는 그가 떠나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 "통증이 사람을 정말 외롭게 만드네요." 그러면서 다시 허물어지며 그녀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정말 창피해요."

  "창피할 일 전혀 없습니다."

  "있어요, 있어요." 그녀는 울었다. "자신을 돌볼 수 없다는 거, 궁상맞게 위로를 받아야 한다는 거......"

 

이제 죽음은 물론이고 노년마저 은폐가 되어야할 대상이 된다. 죽음과 노년은 불김함이다.

현대 의학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기분 나쁜 패배이며 인간에게 다가오는 최대의 무력감이다.

 

노년은 전투가 아니다. 노년은 대학살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현대의 특이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노년과 죽음이 완전히 밀착한 것은 의학의 발달로 가능해진 일일테니.

하지만 그 바람에 우린 또 다시 혼란스러움을 느낀다. '천수'를 누리는 것은 이제 몇 살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죽음과 노년이 패배라면, 삶과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 승리가 될 수 있는 걸까?

 

제목처럼, 모든 사람들이 마주해야하는(혹은 마주할 것으로 기대하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짧은 단상.

맛깔나는 번역 덕분에 쉽게 쉽게 읽으면서도, 왠지 답이 없는 문제를 풀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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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 후마니타스의 문학
아서 쾨슬러 지음, 문광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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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어둠'이라는 의미심장한 제목과 함께 깔끔한 책표지가 인상적인 이 책은, 혁명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혁명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함께 했던 이들이, 왜 혁명의 성공 이후 서로를 죽이고 적이 되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성찰.

등장 인물 모두가 가상의 인물이고 이야기가 진행되는 배경도 '저 너머'등으로 모호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저 너머'는 구 소련, '넘버원'은 스탈린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해서 소설이 허구라기 보다는 하나의 수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인류 최대의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것이 이르는 길이라면 수단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 목표나 그것에 이르는 길에 대한 일말의 의심이라도 가진다면 반혁명분자로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 되는 사회.

그러나 과연, 모든 인간이 그 어떤 목적만을 가지고 태어난 것일까?

50세에 목표를 성취하게 된다면, 49세까지의 인생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아세 쾨슬러는 이러한 모순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진다.

당시 너무나 커져버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려하지 않았던(혹은 보지 못했던) 모순을.

 

그들은 권력 철폐를 지향하는 권력을 꿈꾸었고, 사람들의 지배받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지배하는 일을 꿈꾸었다.

 

개인의 동기는 당의 활동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양심도 문제 되지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느끼는지도 상관하지 않았다. 당은 한 가지 죄, 곧 계획된 노선에서 벗어나는 것만 알았다. 그리고 한 가지 처벌, 즉 죽음만 알았다. 죽음은 당의 활동에서 신비로운 것이 아니었다. 의기양양해할 어떤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정치적 일탈에 대한 논리적 해결책일 뿐이었다.

 

권력의 유지가 목적이 되어버린 상황(물론 권력을 유지해야 전지구적 혁명을 지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에서,

권력은 공포에 의지하려는 매혹에 쉽게 넘어가기 마련.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는 외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다. 모든 관습과 크리켓 도덕성을 배 밖으로 던져버렸으므로 우리의 유일한 지침 원리는 필연적 논리의 원리다. 우리는 우리의 사고를 최후의 논리적 귀결에 이르게 한 뒤 그것에 맞게 행동하고자 하는 끔찍한 강박관념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바닥짐 없이 항해하고 있다. 그러므로 키를 조금만 건드리는 것도 생사가 달린 문제가 된다.

 

이제 게임의 룰은 정해졌고, 권력은 세부사항의 변주만을 허용한다.

누군가 어떤 죄로 처벌받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지, 누가 어디에 앉아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책에 등장하는 그 누구를 주인공 루바쇼프의 위치에 놓더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심지어, '넘버원에 대한 그의 충성심이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논리적인 기반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제거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논리는 언제든 충돌할 수 있는 것이고, 또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혹은 그래야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사회의 개인들은 일개 부속품, 하나의 세포로 전락한다. 언제든지 제거될 수 있으며,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다.

 

  당에서는 죽음이 신비로운 것이 아니었고,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요소도 없었다. 죽음은 논리적 결과였고, 사람이 평가하는 다소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 한 요소에 불과했다. 그래서 죽음은 잘 얘기되지 않았고, '처형'이란 말도 거의 사용된 적이 없었다. 관습적 표현은 '물리적 제거'였다. '물리적 제거'란 말은 정치 활동의 중단을 의미했다. 죽는다는 행위는 특별히 관심을 끌만한 것이 없는, 그저 기술적이고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논리적 방적식의 한 요소로서, 죽음은 그 어떤 친밀한 육체적 속성도 잃고 있었다.

 

아서 쾨슬러가 이 책을 쓰게된 시점을 생각하면, 이 책이 단순히 스탈린의 소련을 비판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지 오웰의 책이 그러하듯, 이 경고가 그 시대, 특정지역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본다면 그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행위의 통제, 사상의 통제, 자유의 압살은 공산주의의 반대편에서도 쉽게 일어났던 일이었고, 또 쉽게 잊혀졌다.

(실은 잊혀진다는 것이 더 무섭다)

독재는 공산주의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박물관에 들어앉은 화석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에겐 고요함보다는 소란스러움을 참을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하고, 조금 피곤하더라도 '길 없는 목표'를 항상 경계해야만 한다.

 

우리에게 길 없는 목표를 보여주지 말라.

땅위의 목적과 수단은 너무도 얽혀 있어서

하나를 바꾸면 다른 하나도 바꾸어야 한다.

다른 길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갖는다.          - 페르디난트 라살레, <프란츠 폰 지킹겐>

 

지쳐있던 루바쇼프는,

 

  "그 당시 우리는 역사를 만들었네. 지금 자네들은 정치를 하고 있고, 그것이 차이야."

 

라고 말했지만, 우리에겐 여전히 정치가 필요하고 또 그것을 해야만 한다.

때문에 혁명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시점에서도 고민은 필요하다.

혁명은 역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정치의 또다른 형태이기 때문에.

 

저자 자신이 수인 생활을 체험했던 터라, 그것에 대한 묘사나 사고도 굉장히 탁월하다.

물론 '토론'으로 진행되는 주요 장면들이 조금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소설로 읽는 켄 로치랄까 그런 느낌도 괜찮았다.

 

후마니타스에서 출간한 첫 문학책.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주제도 마음에 든다.

이런 깔끔한 디자인을 유지한채로 꾸준히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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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의 문화사 - 역사는 미술과 어떻게 만나는가, 심산 픽처링 히스토리 1
피터 버크 지음, 박광식 옮김 / 심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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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부제가 책의 내용을 더 잘 설명해주고 있다 - 역사는 미술과 어떻게 만나는가?

 

사실 역사가에게 사료의 분야가 넓어진다는 것은 일면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어찌됐거나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다.

제대로 된 역사가라면 사료가 풍부해지는 것은 그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자 기록만이 아닌 '이미지'가 사료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은 혁명에 가깝다.

하지만 실제로 이미지가 본격적으로 사료로 이용되는 사례는 그리 많이 찾아보기가 힘들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의 보수성을 운운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이미지의 사용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물론 문자 기록을 사료로 사용할 때에도 엄정한 사료 비판이 필수적이지만, 이미지에 대한 비판은 무척이나 중층적이다.

 

  1. 역사가들의 처지에서 반가울 얘기를 먼저한다면, 고대 이집트의 사냥 광경처럼 최소한 몇몇 지역과 시대뿐일지라도 예술은 문서자료들이 지나쳐 버리는 사회적 현실의 단면들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2. 나쁜 소식은 재현 예술은 겉보기보다 현실적이지 않고, 사회현실을 반영한다기보다는 왜곡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후원자들이나 고객은 말할 것도 없고) 화가나 사진가들의 다양한 의도를 계산에 넣지 않는 역사가들은 심각한 오해를 하게 될 수도 있다.

  3. 하지만 다시 반가운 소식이 있는데, 왜곡의 과정 그 자체가 많은 역사가들이 연구하고 싶어하는 현상들의 증거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사고방식이나 이데올로기, 정체성 따위가 여기에 해당한다. 구체적인 또는 현실에 충실한 이미지는 사람이 자신이나 타인에 대해 갖고 있는 심리적 또는 은유적 이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증거가 된다.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상징이므로 어찌보면 장황한 설명보다도 훨씬 직관적으로 역사가가 원하는 그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사회를 다루고 있는 이미지들을 사회의 단순한 반영이나 스냅사진 정도로 읽는' '명백한 오독'을 하지 않는다면,

이미지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자 기록을 버려야 한다는 양자택일의 논리로 치닫는 건 바보짓.

 

타자를 왜곡한 이미지들, 예를 들어 극도의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의 경우에도, 그것을 '사료가 아니다'고만 치부하는 것은

한없이 열려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내차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좀 더 심층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런 그림들은 서구에 대해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줄 수도 있다. 여기서 살펴본 이미지에 표현된 타자는 바로 자아의 전도물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자를 보는 관점이 정형과 편견을 통해 중개된다고 했을 때, 이런 이미지들이 함축하고 있는 자아에 대한 관점은 한층 더 우회적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것들을 읽어내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이 이미지들은 귀중한 증거가 될 터이다. 루스 멜린코프가 중세 말의 북유럽을 두고 했던 언급은 분명히 훨씬 더 폭넓게 적용될 수 있다. "한 사회의 정수와 그 심리 상태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사회가 내부인과 외부인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어디에 긋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한 지역과 시대에서 사람들이 '인간 이하'라고 여겼던 것들을 분석해 보면, 그들이 인간의 조건을 바라보았던 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

 

결국은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주어진 과거의 자료들을 어떻게 이용하는가의 문제다. 그것의 형태가 어떻던 간에.

보수적인 역사가는 사진이나 그림의 경우 조작의 가능성이 너무 크다는 비판을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문자 기록도 마찬가지이며, 어떤 면에서는 자신의 '부지런하지 못함'에 대한 변명일지도 모른다.

조작된 것이 분명한 사료를 그냥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재활용할 수도, 아니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조작과 거짓 속에는, 역사가들이 열광하는 그 어떤 '전형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러고 보면, 나도 석사논문을 쓸 때 나름 이미지가 주된 소재 중 하나였는데, 정말 발톱만큼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여튼, 요새 논문 쓸 자세를 잡기 위해서 나름 노력 중인데. 이 책도 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좀 아쉬운 점이라면, 편집. 도판들이 죄다 흑백인 건 그렇다치더라도, 그림을 찾아보는 것이 굉장히 불편하게 편집이 되어 있다.

하다 못해, 사진 번호 뒤에 그 도판이 실려있는 페이지 정도는 적어줄 수 있는 건 아니었나 싶다.

 

이상하게 맘 잡는 것이 힘든데, 다음 주부터는 정말 시작해야할 것 같다. 한 권만 더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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