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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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박민규의 소설은 단 하나 밖에 읽지 않았지만, 너무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모 인터넷 서점에서 연재를 했던 소설을 책으로 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인터넷 연재에 대해 막연한 거부감이 있어서 읽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친구가 읽어보라고 품에 안기듯 던져줘서 자연스럽게 읽게 되었다.

뭐, 역시 '재미있게' 글쓰는 솜씨는 여전한 것 같다. 하지만 전보다는 조금 덜 가벼운, 나름 진지한 사랑 이야기.

박민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만인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불만족의 시대에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

 

요한은 말했었다. 세계라는 건 말이야, 결국 개인의 경험치야. 평생을 지하에서 근무한 인간에겐 지하가 곧 세계의 전부가 되는 거지. 그러니까 산다는 게 이런 거라는 둥, 다들 이렇게 살잖아... 그 따위 소릴 해선 안 되는 거라구. 너의 세계는 고작 너라는 인간의 경험일 뿐이야. 아무도 너처럼 살지 않고, 누구도 똑같이 살 순 없어. 그딴 소릴 지껄이는 순간부터 인생은 맛이 가는 거라구.

 

  이를테면  집을 다녀오는, 그런 사소하고도 당연한 일이... 서로의 불을 밝힌 인간에게는 더 없이 크고 다행한 일이 될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안해. 무어라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어떤 말도 생각이 안나. 이런 나 자신을 납득하기도 힘들지만... 이해해 줘. 마찬가지로, 말을 잘 못하는 인간도 세상엔 있는 거니까. 대신 그 대답은 아주 먼 훗날에 들려줄게. 천천히, 아주 조금씩 그 대답을 만들어가고 싶어.

 

  영원한 장소도 영원한 인간도 없겠지만, 영원한 기억은 있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느린 마차처럼 서울로 돌아오던 버스와... 그 속의 지친 공기, 누군가 벗어둔 신발의 말똥 냄새마저도 그저 인간이 발할 수 있는 인간의 체온으로 느껴지는 밤이었다. 터미널을 나와 나는 그녀의 단추를 목으로 채워주었고, 밤의 광장과 지하도를 건너 집으로 가는 버스에 우리는 다시 몸을 실었다. 그 어디에도 색색의 조명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더 없이 크리스마스와 비슷한 밤이라고 생각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단순한(단순한 건 또 뭐지?)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추녀를 사랑하는 미남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한 번도 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습니다. 눈물은 더없이 차가운 것이었고, 그때의 제 마음도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있었습니다. 냉대를 받은 인간의 마음은 차가운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관심과... 사랑을 받은 인간의 마음만이 더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저는 언제나 '진행형'의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습니다. 끝없이 덧나고 영원히 이어질... 그런 상처를 안고 사는 여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그런, 흉터를 가진 여자일 뿐이에요.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인지 당신은 모르실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사람의 여자에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도 짐작할 수 없을 겁니다. 말하자면 제게... 당신은 그런 남자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판타지다. 비록 드라마에 등장했던 김삼순이 '현실적'인 캐릭터로 사랑을 받았다지만, 나는 그것이 판타지라고 생각했다.

추남, 혹은 추녀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박민규가 작가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사랑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아니, 내게 진실, 그것이 사랑이 아니던가.

그리고 인간 대 인간으로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꿈꿀 때에도, 그것은 '시시한 것'이 되어야 한다.

 

  부와 아름다움에 강력한 힘을 부여해 준 것은 바로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끝없이 욕망하고 부러워해왔습니다.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래도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그런 세상을 살고 있으며, 누가 뭐래도 그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불변의 진리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을 <시시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70년대의 냉전을 돌아보듯, 마치 지금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은 돈다 믿었던 중세의 인간들을 돌아보듯 말입니다. 물론 그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론 <시시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니 그야말로 시시한걸. 이 시시한 세계를 시시하게 볼 수 있는 네오 아담과 네오 이브를 저는 만들고 싶었습니다. 두려울 것은 없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가능성의 열쇠도 실은 우리가 쥐고 있습니다. 왜?

 

  바로 우리가 절대다수이기 때분입니다.

 

  우리는 진화의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능은 자기 자신, 즉 자기의 힘을 믿는 것이라 고리끼는 말했습니다. 굳이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간은 그런 재능을, 힘을 지닌 존재라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개인처럼, 이제 인류도 스스로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할 때입니다. 이 진화의 계단을 밟고 올라서며 저는 아름다움에 대해, 눈에만 보이는 이 아름다움의 시시함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인간의 얼굴에 대해 말입니다.

 

너무 진지하고, 재미없고, 구태의연하다고? 그래, 그러면 어디 한 번 쿨하게, 실용적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볼 땐 그래, 그래서 경제력이 좋은 남자를 만난다거나 그런 일들... 그러니까 일단은 그래서 눈에 들어온다는 얘기지. 직업을 본다거나 집안을 따진다거나... 말하자면 그런 배경이 있어야 오우, 케이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그에 맞는 결혼을 한다거나 그에 따른 윤택한 출발을 하는 일은 사랑이 아니라 영리활동이란 말이지. 그것이 좋고 나쁘고의 얘기가 아니라... 뭐랄까, 그런 활동을 통해 어쨌거나 그만큼의 이익을 얻은 거잖아. 그럼 된 거 아닌가? 사랑해 주지 않는다거나, 생일인데도 그냥 넘어갔다거나... 말했듯이 그 언니가 몸이 아픈데도 마쁘다며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거나... 그런 일들 말이야. 그런 건 그야말로 욕심인 셈이지. 즉 이윤을 추구해놓고 자기최면이라고 하듯 이건 연애야, 그래서 우린 결혼한 거야 라고 다들 믿는 게 아닐까 싶어. 그러고는 사랑이 식었다는 둥, 환상이 깨졌다는 둥... 애당초 동기가 된 영리활동에 대해선 끝까지 부정하면서 말이야.

 

그러니, 당신이 너무나 유치하고 뻔하다고 얘기할지라도,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한 삶은

기적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삶도

기적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기적을 잊지 말라. 제발.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중간 부분 늘어지는 설교는 좀 지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하지만 실재할리 없는 그런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솜씨는 인정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 이 판타지를 <시시하다>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시하지 않았다.

그것을 내 삶이 아직은 시시하지 않음의 증거로 생각하고 싶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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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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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승호의 인터뷰를 모은 책. 방학 동안 '시의성'이 떨어지면 읽을 가치가 없는 책들을 우선 '처리'(?)하기로 하고 읽은 첫 번째 책.

표지에 나와있는대로 총 7명의 인터뷰가 담겨있다.

이 책이 2007년도에 출간되었고 인터뷰는 그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판의 날은 주로 개혁세력, 노무현 정권을 향해 있다.

때문에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지금 이 책을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노무현 정권의 가장 큰 과오 중에 하나라면, 바로 '빨갱이'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에 신자유주의를 외치는 빨갱이가 어디에 있는가?

 

노무현 정권은 큰 틀에서 한나라당도 밀어붙이기 쉽지 않은 정책들을 밀어붙여서 관철해왔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까 정치적인 제스처를 제외하고는 굉장히 오른쪽의 두 세력이 경쟁하면서 그 나머지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수 있는 이념을 가진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꼴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요.

  노무현 대통령이 좌파 내지는 진보로 인식되거나 실제 그렇게 자처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현실감각이 없는 외계인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승호)

 

이를테면 노무현 정부는 개혁적 보수라든지 자유주의 보수라든지 이렇게 규정해야 하는데요. 기존의 보수, 진보 이런 나눔, 그런 것에 매몰되면서 잘못된 현상이 나타난 거죠. 그래서 결국은 진보의 가치가 퇴색해 버리는, 동반해서 퇴락해 버리는 이런 현실을 낳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구요. (홍세화)

 

  굉장히 슬픈 일인데, 우리가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요. 더 나은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 믿음 같은 것이 적어요. 그래서 만날 '우리 현실에서 이것만 해도 어딘데'라는 생각이 지배해요. 개혁이라는 것이 진보의 기초적인 부분과 겹치기도 하지만, 개혁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진보를 가로막기 위해 사회를 좀더 합리화하는 데 있죠. 상상력이 없으니 그 부분을 놓치게 되는 거죠. 개혁이 갖는 소박하고 진보적인 경향에 너무 감사하는 거예요. '이것만 해도 어딘데'하면서. 그것은 어리석은 게 아니라 착한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착함 때문에 된통 작살이 나는 거죠. 누가 어떤 놈이 밟았는지도 모르는 채 삶이 너무 고달파지는 거예요. 그래서 "에이, 이제 진보고 개혁이고 뭐고 싫고 무슨 사회, 이념도 다 싫다. 먹고사는 문제가 제일이야. 이명박이 제일이야"하는 식으로 가는거죠. 이명박은 디지털 시대를 토목 건설로 해결하려는 몽상가인데 어떻게 된 게 이 사람이 가장 현실주의자가 되어버렸죠. 이것은 대단한 역사적 반동인데, 정말 슬픈 일입니다.

  개혁이 실패했다고들 하는데 사실은 그야말로 대성공을 한 셈이죠. 개혁의 목적은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니까요. (김규항)

 

유연한 진보, 중도, 신진보, 이런 다양한 수식어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수식어야말로 진보답지 않은, 진보로부터 뭔가 얻으려는 태도라고 봅니다.

…… 형식적 민주주의는 YS, DJ를 거치면서 사실은 공고화된 것입니다. 탈권위나 지역주의가 여전히 중요한 과제임에는 틀림 없고 여전히 의미 있는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에게 표를 준 다수 서민들의 가장 핵심적인 요구와 기대였느냐?'라는 점에서는 전혀 아니라는 겁니다. 이미 형식적 민주주의가 공고화된 그 민주주의를 수단으로 해서 다수 서민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해결을 요구한 것이구요. 그것이 노무현 정부의 시대적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오히려 자본의 전면적인 자유화를 도모하면서 서민의 삶을 더욱 벼랑 끝으로 내모는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얘기하는 '유연한 진보'는 사이비 진보고, 오히려 신자유주의의 가장 적극적인 대변자로서 진보의 카운터 파트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심상정)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후, 혼자 많은 생각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제는 정반대로 왜곡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위기감도 들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진보'로 규정하고 싶어했으나, 그는 진보가 아닌 '자유주의자'였다. 그렇게 보는 것이 당연하다.

진보의 핵심 개념인 '계급'을 생각한다면, 노무현 정권을 '진보' 혹은 '빨갱이'라고 부르는 것은 정말 '상식이하'의 일이다.

(여기서 북한을 들먹거릴 수도 있겠는데, 훗. 그가 과연 '친북주의자'였을까? 아니, 그 전에. 북한이 어디 '빨갱이 국가'인가, 왕조국가지)

그럼에도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를 진보였다고 규정해버리는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그는 진정성을 가진 자유주의자였으며, 그들을 둘러싼 일파들은 그보다도 못한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 일파들이 노무현 전 대통령 나름의 진정성을 수없이 왜곡시키고 외롭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랬던 현실을 그의 죽음으로 다 묻어버리고, 살아있는 기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과오를 함께 묻으려 하고 있다.

그, 혹은 그들에 대한 비판을 '죽음'이라는 엄숙함을 내세워 인신공격으로 되받아치는 상황이 된 것은 아닌가 걱정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저 이명박 대통령 같은 괴물과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집단을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이럴 때일 수록 선을 더욱 분명히 그어야하고, 내 자신의 위치를 모호하게 만들어서는 안된다.

 

인터뷰 모음집이다 보니 쉽게 잘 읽히는 편이지만, 인터뷰 대상에 따라 읽는 속도가 떨어지는 부분도 있었다.

예를 들어, 홍세화 씨는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여기 그의 인터뷰를 읽는 것은 왠지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반면 김규항의 인터뷰는 100% 동감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인터뷰를 읽는 내내 많이 생각하고 또 많이 웃기도 했다. ^^;

 

뭐... 지금 굳이 사서 보길 권할 그런 책은 아니지만, 분명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오히려 지금.

현실을 생각하면 이 책의 제목은 틀렸다. '두 개의 대한민국, 하나의 현실'일뿐.

 

글은 제가 보기에는 불편해야 돼요. 그리고 사람이 글을 잘 쓰자면 위험해야 돼요. 위험하지 않은 학문은 이미 죽은 학문입니다. 학문이 위험해야 재미가 있죠. 독자들이 실망했다고 표현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그건 각자 판단의 문제인데 위험하지도 않고 불편하지도 않은 글은 안 쓰는 게 더 낫죠. 자기 연구나 하는 게 낫습니다. (박노자)

 

'시민 사회가 얼마만큼 이 모순 구조를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느냐, 같이 동참할 수 있겠느냐'를 고민하고 나서 비판을 하든지 그래야 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홍세화)

 

부모들은 아이들 때의 인생이라는 것은 나중에 진짜 인생을 위한 준비기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인생은 매순간이 중요하고 매순간 세계와 나의 소통이 있는 것이죠.

 

계급이라는 말은 어떤 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체라는 겁니다. 우리가 계급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현실을 바라보자는 말일 뿐이예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불편함과 똑같은 양의 위로를 주는 글을 나는 혐오한다. 내 글이 담는 불편함은 '과시'가 아니라 '권유'다. '글이나 읽고 해소하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함께 실천을 고민해야죠' 하는 권유 말이다. (김규항)

 

꼭 누굴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우리는 처벌하려는 게 아니거든. 우리는 진실을 밝히려고 하는 거야"라는 얘기를 너무 쉽게 했단 말이죠. ……

  처벌이란 부분을 너무 쉽게 포기했어요. 처벌이 안 되니까 보복이 생기는 거예요. 처벌과 화해는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보복과 처벌이 대립하는 개념이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사람을 책임지지 못했을 때 그 가족들은, 남아 있는 당사자들은 그 한을 어떻게 풉니까? 우리가 피해자의 유가족들이 보복하는 것을 막는 이유가 뭡니까? '보복하지 마라. 대신 사회가 처벌해준다'고 하니까 비로소 막을 명분이 생기는 거죠. 이걸 포기해놓고 뭘 한다는 게 말이 안 되죠.

 

  우리는 화해를 구걸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화해를 구걸해서는 안된다고 봐요. (한홍구)

 

최종적으로 해방된 사회의 상을 그리고 나머지 운동들을 그쪽으로 나가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별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는 거죠. (진중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학생들이 워낙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는 환경에 있다는 게 문제라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학생들의 보수화를 걱정하기에 앞서서 교수들의 보수화를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손석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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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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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를 그렸던 김태권의 신간.

사실 2권에서 멈춘지 너무 오래되어버린 터라, 좀 뜬금 없게 느껴진 책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구입해서 읽었다.

10년 정도 여기저기 연재했던 것들을 모아서 낸 책인데, 본인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래서 그림이 들쭉날쭉하다.

어차피 기본 내용과 콘티 정도는 거진 다 짜여져 있는 상태이니 그림을 다시 그렸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아쉽다.

 

어쨌거나 책의 내용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을 김태권 특유의 비꼼과 패러디로 풀어내고 있는데, 역시나 정신 없기는 하지만 재치가 넘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음, 길든다는 건 말이지. 이를테면 - 월급이 오후 네 시에 나온다면 나는 오후 세 시부터 설레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여기! 봉투가 보이지? 난 편지를 쓰지 않으니, 봉투는 내게 소용없는 거야.

그런데 이제 봉투는 월급을 생각나게 하겠지! 그럼 난 봉투를 사랑하게 될 거야.

 

이 부분은 읽다가 진짜 뿜었다.

어쨌거나 만화라는 장르상의 특성(혹은 선입견)에다가 김태권 특유의 산만함 때문에 책이 너무 가벼워질 수도 있었는데

우석훈이 각 챕터마다 간단하고 쉬운 해제를 달아놓아 책의 가벼움에 작은 추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극한까지 가면 시장 이데올로기가 말하듯이 모두가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개별화된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혹은 민족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강조된다. ……

  이런 상태에서 경제적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는 계속해서 인종적 위치 혹은 국가적 소속감 같은 이데올로기적 실체로 치환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정당을 위해서 투표하는 등 경제적 합리성의 눈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국가주의나 지역주의와 함께 재생산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화된 국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인종, 국민, 혹은 지역과 같은 상징에 더욱 소속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세계화된 경제에서 사람들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을 키우기보다는, 더 인종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의식에 사로잡힌다. ……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국론 분열'이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국가 내에 다양한 의견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한 개개인이 처한 경제적 삶과 경제적 운명이 다르기 때문에 국론이 통일되는 일은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해나가고,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회 전체적인 행복 및 후생 수준을 높여나가는 일이다. 그러나 강요된 국론 통일은 비정규직이나 여성과 같은 경제적 약자의 의견을 무시하게 되고, 이미 파편화해 분할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을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폭압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절대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분할통치'의 구체적 사례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의 단 몇 페이지가 도움이 될 것이다.

국론이며 국익이며 그런 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부터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

이타적인 삶을 살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기적이려면 제대로 이기적이자는 이야기. 너무 냉소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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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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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남자'하면 떠오르는 가치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용기', '강인함', '씩씩함' 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의 이 신간에서는 1890~1900년대 나타나는 '이상적 남성성'의 계보를 살펴보고 있다.

'왠 남성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박노자가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뜬금 없지도 않다.

박노자는 1900년대 초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와 같은 담론에 관심을 가져왔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대충 감이 오겠지만, 1900년대 강조된 남성성은 전통시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육체적 강자'로서의 남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과 근대가 그렇게 명확하게 단절되는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뒷부분에 이영아의 발문에도 지적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너무 '근대의 근대성'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는 권력관계 전체를 정당화하는 상징 영역이다. 이데올로기 영역은 사회 곳곳의 완고한 기존 현상(예컨대 가부장적 가족구조)을 포함한 권력 구조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또한 "전통"은 전체 권력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에서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 영역은 대개 혁신성을 가시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만큼 소극적이다. 기의(signified)가 대대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기표(signifier)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후기 사회(17~19세기)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던 이순신은 근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대담무쌍하고 성공적이며 지능적이고 애국적인 전사의 상징, "조선의 넬슨(Horatio Nelson)"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렇지만 숭배의 내용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숭배를 표현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 연속성을 드러낸다.

 

여러 자료들과 시대상황을 검토한 후, 저자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조선의 경우, "애국적 남성의 훈련된 신체"의 근대적 이상은 최소한 두 가지의 토착적 남성성 패러다임을 혼합, 계승한 것이었다. 하나는 왕조국가와 성리학적인 도덕규범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의 독립과 자주"라는 새로운 지상 가치로 옮겨가던 고답적 "군자"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민족 이념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겁 없는 협객을 존중해온 김구와 같은 평민들의 패러다임이다. 전통적으로 "고상한 목표", 자기 수양, 도덕적 청렴을 부각시키던 "군자" 패러다임은 최남선 등의 "자기희생" 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세시풍속의 일종으로서 이웃 마을 사이의 돌싸움에서 드러나는 사납고 거친 남성성에 대한 평민드의 애착은 새로운 남성적 에토스의 군사주의적인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런 양상이 '기댈 조국이 없는', 그러면서도 일제에 의해 총동원되어야 했던 식민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은 강인함(그러나 국가권력에 순종하는)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물론 이 배려와 돌봄은 넓은 의미를 가진다.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차원에서는 각종 사회문제들을 무시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는 그런 남성.

세계에서 가장 긴 주당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점을 감안하면 '배려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도,

근대적 이상이었던 '튼튼한 육체'를 발전적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뒷부분에 같은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는 이영아의 비판적 발문이 실려 있어 책을 잘 매조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영아의 문제제기 외에 개인적으로 드는 의문도 있다.

 

우선 '정당한 폭력을 "남성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훈육된 남성 투사라는 상투적 이미지는, 개화기와 그 후의 조선사회에서 성차 의식을 "민족화"시키는 과정에서 창출된 것 뿐이다.'라는 저자의 견해.

 

조선시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폭력성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은 "국민국가를 위해서 칼을 드는 여성"의 근대적 이미지를 쉽게 수용할 만한 문화적 배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결론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일단 그것이 '조선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분석을 위해서는 당시의 '여성관'도 면밀히 살펴봐야만 한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칼을 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좀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이런 '적극적'인 행위를 권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들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존재였다.

그나마 여성이 칼을 드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의 정절이나 가문의 명예 혹은 부모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국가를 위해 칼을 드는 여성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며, 그 상상 또한 현실의 남성을 공격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딸, 부인,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문에 이 시대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권장'으로 표상되는 남성성만이 아니라 '금기'로 표상되는 남성성도 함께 살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쉬운 예로, '남자가 왜 질질 짜고 그러냐'는 금지 혹은 비난. '훈육' 속에는 권장 외에도 금기, 금지가 상당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당시 남성에게 무엇을 금지하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상적 남성성을 탐구하는 다른 경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더 아쉬운 점은, 머리말에 비해 글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제말기를 거치면서 겨우겨우 일상까지 파고든 이상적인 남성성이, 저자의 말처럼 왜 '변화'했는가?

물론 저자의 관심은 1900~1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머리말에 이야기한 문제제기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유럽이나 중남미 사회들의 "이상적 남성" 이미지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완력이나 담력보다는 학력 및 경제 능력 부분이 더 중요시된다. 일부 지식인 사회를 제외하면 동유럽 여성들은 "근육이 없는 남성", 심하면 "주먹질 못하는 남성"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르다. "명문대 졸업생"과 "엘리트 대기업 사원"이라면 그 정도의 "결함"(?)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의 "인생 성공"은 절대적으로 "학력 자본"에 좌우된다.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남미나 동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한 개인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철저한 학별의 위계질서가 대한민국처럼 공고하게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적 프로젝트로서의 '건강한 남성의 육체만들기'는 멈추었지만, 여전히 각 기업체는 '군인정신'을 강조한다.

극기훈련을하고, 해병대로 가서 '훈련'을 받고 강인한 '정신'을 요구 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나의 관심이 많았던 부분이라 좀 아쉬웠다.

다소 허망한(?) 저자의 이상적 남성상을 피력할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을 좀 더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영아는 발문에서 여러가지 생산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문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발문 첫부분에 나오는 연예인 군 입대에 대한 해석은 같은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를 하지 못하겠다.

연예인 군문제에 일반 남성들이 그렇게나 민감한 것은,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 때문은 아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사회의 제대로된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합의가 있는 것은 100% 맞지만 그것이 '남성성'과 연관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물론 이것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주장처럼 이 요인이 가장 핵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가 부차적으로 취급한 '평등'의 문제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평등'이라고 하니 뭔가 고상한 거 같은데, 표현을 좀 바꾸자. '피해의식'이 더 적절하겠다.

요즘 군대 가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갈 수 있으면 안가는게 좋다. 군대라는 곳은 이제 그런 곳이다.

그런데 정작 안간 이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왜? 나는 그런 X같은 곳에 2년 혹은 2년이 넘도록 다녀왔으니까.

나도 다녀왔으니, 너도 가야하는거 아냐?라는 논리가 바로 핵심이다.

어떠한 보장을 위한 평등이 아니라 피해와 불이익의 공유를 위한 '평등'. 때문에 '여자도 군대가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1권이 나온 후 한참 나오지 않던 '히스토리아' 시리즈가 다시 시작된 것도 환영할만한 일.

'속편격'으로 집필 중이라는 이영아의 책도 기대가 된다. (근데 이것도 히스토리아 시리즈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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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
짜오지엔민 지음, 곽복선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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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 말 그대로 대나무 숲의 일곱 현자다. 대나무 숲이라 함은 속세와는 멀리 떨어진, 즉 속세의 반대말로 생각하면 될 터. 즉 죽림칠현이라 함은 속세에서 떨어져 자연과 함께 삶을 보낸 일곱 명의 현자를 일컫는 말쯤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중국 위()·진()의 정권교체기에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을 신봉하였다. 그 풍부한 일화는 그 후 《세설신어()》 등 인물평론이나 회화의 좋은 제재가 되었다.


 

인터넷 상에서 찾을 수 있는 죽림칠현의 '요약'이다. 하지만 '죽림' 조차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구름을 타고 노니는 신선들과는 달리 대나무는 뿌리를 땅에 박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칠현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처럼 대나무 숲을 노니는 유유자적한 모습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세상의 풍파를 꼿꼿이 견디며 부러지진 않았으나 결국엔 잘려나갔으며, 누군가는 속세의 욕망과 죽림의 한가로움 사이에서 고뇌했고, 또 누군가는 '죽림'의 이름값을 바탕으로 속세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다. 속세와 가장 거리가 멀었다는 혜강조차 오히려 속세를 너무나 의식했기에 죽림으로 은둔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속세에 얽혀 잘려나간 대나무가 되고 말았다.

 

사실 죽림칠현의 경우 중국고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록이 많은 편은 아니다. 이 책의 절반이 혜강와 완적, 두 인물이 중심이 된 이야기인 것은 이에서 비롯한다. 심한 경우, 그러니까 상수의 경우는 공식적인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어려움을 주제(술, 기행, 죽림이라는 공간)와 시, 그리고 후대의 평가로 묶어내는 교묘한 방법으로 넘어갈 뿐만 아니라, 그 방법으로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비록 마지막 부분 왕융의 경우, (배경설명을 위해 어쩔 수는 없었겠지만) 지나치게 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오히려 흥미가 떨어져버린 아쉬움은 있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재미를 해칠만큼은 아니었다. 깔끔한 책표지와 편집은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죽림칠현. 이 어찌 그들만의 이야기겠는가. 그 어찌 13억 중국인들만의 자화상이겠는가. 배운 것이 毒이 되는 시대. 그 毒을 삼켜낼 것인가 아니면 내뿜고 다닐 것인가에 대한 고민. 비록 그 毒은 시대가 부여한 것이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몫임을 역사가 보여준다. 죽림칠현으로 묶여 전해오는 저 일곱명의 명사조차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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