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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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재작년 대선 때 이야기되는 것들이 경제 밖에 없고, 또 결국에는 그 논리에 따라 괴물이 뽑힐 것 같은 분위기에 좌절을 느껴 사게 된 책.

하지만 역시, 읽은 것은 이제서야. -_-

 

저자는 '상식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변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즉 결코 변할 수 없는 그 무엇도 바뀔 수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이란 것이 실제로는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제발전론'은 일종의 사고장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사고력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겪었지 않은가. 더러운 놈이면 어때, 경제 발전시킨다는데. 미친 놈이면 어때, 잘먹고 잘살게 해준다는데.

(그 결과를 이미 보고 있지 않은가. 아니, 실은 이것이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더 미칠 일이다.)

결국 실제로 벌어지는 환경파괴, 인간성파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비상식/비현실주의로 받아들여진다.

정부에게 폭력을 양도한 뒤, 훨씬 더 대규모의 학살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더라도 그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또 그는 1949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사용한 발전 개념이 이후 시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데, 경청할만한 이야기이다.

 

  "나라 A는 국가정책으로 나라 B를 발전시킨다(develop), 그것이 나라의 발전(development)이다"라고 하는 것, 이것이 왜 '고쳐 만들어진 말'인가 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어의 '발전'이나 '성장'도 그렇습니다만, 영어의 'develop(발전한다)'는 본래는 자동사입니다. 타동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어로서 정당치 않게 들립니다. 국가 A가 국가 B의 '발전'을 정책으로 삼고 있는데 그 표현은 자동사라니, 이것은 큰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개발'의 공통점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아니라 자기네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즉 유럽이나 미국의 경제제도에 들어와있지 않은 그 '결여'입니다.

 

이 착취 이데올로기는 '발전'이라는 꽤나 긍정적인 단어로 교묘하게 포장된다.

 

내정간섭이 아니라 발전, 착취가 아니라 발전, 폭력적인 변화가 아니라 발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재'개발', 재'건축', '투자'...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의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속임수입니다. 경제발전의 과정에 따라 예전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얼마나 나아'라고 하는 말은, '본래 있었던 빈부의 차를 경제발전이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제로성장을 주장한다. 대신 '정의로운' 부의 분배, 환경과 조화된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보다 '더 못살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역설한다.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지 못하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 이야기가 왜 '더 못살자'라는 비현실적인 말이 되어야하느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현실주의가 비현실주의로 취급받는 상황은, '민주주의'가 왜곡된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의 '민주주의'는 많은 왜곡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평등과 자유에 대한 정의도 고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보라. 결국 '신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되고,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었지 않은가?

 

사회주의는 해결할 수 없었다, 또는 적어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민주적이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의 첫걸음은,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정책결정의 대부분이 실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책이 아주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정책론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논의되어야 할 점은 산적해있다.

그리고 부분부분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특히 맥아더가 전쟁이 없어야한다고 느꼈기에 일본의 군사력을 억제했다는 이야기등.)

하지만 다음의 말은 정말 명심해야만 하는 구절이다.

맨날 욕하다가도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그 보잘 것 없는 권리행사마저 헛되이 날려버리는 상황에서는.

 

  경제발전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는 환상은 로스앤젤레스를 보면 잘못도니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 경제학 공부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배우지 않습니다.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커녕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지금 이 정부가 미디어 장악을 성공적으로 진행한다면, 자신을 포장하고 사실을 왜곡할 것은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은, 정치에 대해 더욱더 '역겨움을 느낄' 더러운 포장을 심화할 것이란 사실이다.

실제로 정치가 그러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고개돌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니 더 심해질 뿐이다.

정치적인 것 하나 생각하지 않고 경제논리로만 대통령 찍어놨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경제논리로 결정한 그 선택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정치적인' 결정이 되고 말았다. (아니, 경제'논리'라도 있기는 했었나?)

정치에 대해 역겨움을 이끌어내는 언론들은, 그 누구보다도 그 역겨움 속에 깊게 발을 담그고 축배를 들고 있지 않던가?

역겹고 유치하고 더럽더라도 무시하지 말라.

당신이나 나나, 모래구덩이 속에 머리를 파뭍어봐야 허약한 몸은 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더글러스 러미스의 주장대로, 진짜 상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상식이 바뀌는 거, 그래 그거 쉽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고작 10년 전의 상식이 지금 얼마만큼 유지되고 있는가를.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어차피 지금 이 '상식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힘들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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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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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를 그렸던 김태권의 신간.

사실 2권에서 멈춘지 너무 오래되어버린 터라, 좀 뜬금 없게 느껴진 책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구입해서 읽었다.

10년 정도 여기저기 연재했던 것들을 모아서 낸 책인데, 본인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래서 그림이 들쭉날쭉하다.

어차피 기본 내용과 콘티 정도는 거진 다 짜여져 있는 상태이니 그림을 다시 그렸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아쉽다.

 

어쨌거나 책의 내용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을 김태권 특유의 비꼼과 패러디로 풀어내고 있는데, 역시나 정신 없기는 하지만 재치가 넘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음, 길든다는 건 말이지. 이를테면 - 월급이 오후 네 시에 나온다면 나는 오후 세 시부터 설레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여기! 봉투가 보이지? 난 편지를 쓰지 않으니, 봉투는 내게 소용없는 거야.

그런데 이제 봉투는 월급을 생각나게 하겠지! 그럼 난 봉투를 사랑하게 될 거야.

 

이 부분은 읽다가 진짜 뿜었다.

어쨌거나 만화라는 장르상의 특성(혹은 선입견)에다가 김태권 특유의 산만함 때문에 책이 너무 가벼워질 수도 있었는데

우석훈이 각 챕터마다 간단하고 쉬운 해제를 달아놓아 책의 가벼움에 작은 추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극한까지 가면 시장 이데올로기가 말하듯이 모두가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개별화된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혹은 민족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강조된다. ……

  이런 상태에서 경제적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는 계속해서 인종적 위치 혹은 국가적 소속감 같은 이데올로기적 실체로 치환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정당을 위해서 투표하는 등 경제적 합리성의 눈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국가주의나 지역주의와 함께 재생산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화된 국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인종, 국민, 혹은 지역과 같은 상징에 더욱 소속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세계화된 경제에서 사람들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을 키우기보다는, 더 인종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의식에 사로잡힌다. ……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국론 분열'이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국가 내에 다양한 의견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한 개개인이 처한 경제적 삶과 경제적 운명이 다르기 때문에 국론이 통일되는 일은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해나가고,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회 전체적인 행복 및 후생 수준을 높여나가는 일이다. 그러나 강요된 국론 통일은 비정규직이나 여성과 같은 경제적 약자의 의견을 무시하게 되고, 이미 파편화해 분할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을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폭압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절대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분할통치'의 구체적 사례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의 단 몇 페이지가 도움이 될 것이다.

국론이며 국익이며 그런 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부터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

이타적인 삶을 살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기적이려면 제대로 이기적이자는 이야기. 너무 냉소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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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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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1-2

 

2005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출연하면서 주목을 받았고, 각종 광고와 영화 등에 출연하면서 이제는 명실상부 ‘스타’ 반열에 올라선 다니엘 헤니(Daniel Phillip Henney). 그의 ‘서구적’인 마스크와 체격, 그러면서도 ‘동양적’인 외모를 유지한 그의 외모는 스타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는 한국어를 거의 할 줄 몰랐지만, 한국 드라마에 출연(그것도 대사가 중요한 연애드라마!)하는 것에 큰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모국어(?)인 영어를 쓰면 되는 것이었고, 방송에는 알아서 친절하게 자막을 깔아주었으니까.


그런 그가 한국에서의 인기를 바탕으로 헐리우드까지 진출했다. 좋은 조건이지 않은가. 외모도 준수하고 무엇보다 ‘영어’가 되니까. 그의 출연작은 <엑스맨 탄생 : 울버린>. 그는 ‘에이전트 제로’라는 배역을 맡아 출연하였다. 비록 단역 수준이기는 하지만, 그가 등장하는 씬은 꽤 많았다. 하지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이국적인 외모의 그 배우는, 영화 속에서 단지 ‘동양인’일 뿐이었다. 그는 특히 헐리우드 액션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전형적인 동양인이었다. 총검술이나 무술의 달인이지만 냉혹한 악역, 하지만 그 악역 중에서 주역은 되지 못한 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말이 없는 자’.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그가 영어를 잘하고 말고는 애초에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여자 캐릭터의 경우 그 이미지는 더욱 고정적이다. 찢어진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무술은 기본, 그러면서도 왠지 다도와 어울리고 또 그러면서도 팜므파탈적인 이미지를 가진 여성. 국적이 그리 문제될 것이 없는 이런 헐리우드 액션 영화에서도 ‘동양’은 그만의 고정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세계적으로 유명한 동양인 패션 모델을 보라). 그리고 그 이미지는 항상 ‘소외’되어 있는 타자의 이미지였다(이렇게 소외를 시키면서도 아시아 시장을 위해 동양인 배우를 출연시킨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1-3

 

사이드는 말한다. 동양은 ‘유럽인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난 타자’였다고. 원칙적으로 말하자면, 서양뿐만 아니라 모든 주체가 타자를 만들 수밖에 없다. 내가 아닌 것은 타자가 될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사이드가 주장하는 것은 그런 단순한 수준의 인식론이 아니다. 그는 오리엔탈리즘을 하나의 지식담론으로 보고, 그것이 현상에서 작용하는 지점에 주목한다.

 

무엇보다도 오리엔탈리즘이란 하나의 담론, 곧 살아 있는 정치권력과 직접적인 대응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양한 권력과의 불균형적인 교환과정 속에서 생산되고, 또한 그 과정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동양인’이라는 것을 날조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으로서 그를 말살시키는 지식과 권력의 결부를, 나는 단순히 학문상의 문제로만 생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 결부는 지극히 명백한 중요성을 갖는 지적인 문제이다.

/

또 그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이 오리엔탈리즘이란 기제가 억제력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기도 하다’는 점이다(이 지점은 아마도 푸코를 선용한 것이리라). 서양인들은 동양을 알아야 하고, 그 앎에 대한 생산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스스로에게 불어넣었는데, 그 ‘앎’의 대상은 항상 고정적이었다. ‘동양인은 어디에서도 같았기 때문’이다(이건 우리가 보는 중동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13세기, 1940년대, 1960년대, 1990년대를 차례차례 상상해보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고전적 이슬람과 중세적인 이슬람 또는 이슬람 일반 사이에는 아무 차이도 없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의' 이슬람사회, '하나의' 아랍적인 정신, '하나의' 동양적 심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 이슬람 또는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구성된 그 7세기적인 이상형은, 최근의 식민지주의, 제국주의, 통상의 정책으로부터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통일성을 유지한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들에게 동양인은 동물과 같다. 동양인은 유전적이며 선천적인 한계를 가지고, 그 한계는 개선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이드의 선언대로, ‘동양인이 동양인이라고 하는 점이야말로 바로 범죄’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이드가 강조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이 단순히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히 식민지 지배를 합리화하는 수단이라고 단정해 버리면, 오리엔탈리즘이 식민지 지배라는 사실을 추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에 앞서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한 것이라는 차원을 간과하게 된다.

 

오리엔탈리즘은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나름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그 전통은 ‘이미 그들(제국주의자)을 위하여 어휘, 이미지, 수사법, 형상을 준비’하였던 것이다. 이 ‘준비’를 통하여 동양은 하나의 이미지를 부여받게 되었다. 동양과 직면하기 이전에 그들만의 ‘실체’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양의 ‘이미지’가 이미지인 이유는, 서양인이 본래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산만한, 하나의 거대한 실체를 표상하거나 대변함으로써 이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가시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이미지’는 교정되고 처벌되어야 하는 ‘동양화된’ 대상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이미 불가능한, 실패한 임무이다. 그리고 서양인의 입장에서, 그 ‘불가능’과 ‘실패’는 임무 자체에 오히려 더욱 강한 사명감의 아우라를 제공하고 비장감마저 감돌게 한다. 이 사명감과 비장감은 기왕에 구축된 오리엔탈리즘을, 선험적이고 ‘반경험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 다시 오리엔탈리즘을 강화시키는 일종의 ‘재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는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적인 것이라고 여겨지는 문제 ․ 대상 ․ 특질 ․ 지역을 다루는 경우의 습관으로서,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스스로 말하고 생각하는 대상을 어떤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지시하고 명명하며 고정시키는 것이다. 이어 다음에는 그 단어와 문장이 현실성을 확보하고, 또는 더욱 단순하게 그것이 현실 그 자체라고 인정하게 된다.

 

#1-4

 

글의 처음에 제시한 김춘수의 시가 이런 의미에서 창작되지는 않았겠지만, 나는 서양인들에게 동양이 마치 저 시의 ‘꽃’처럼 인식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자의적으로 지어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으며(‘인간과 장소 및 경험이 한 권의 책에 의해 언제나 묘사될 수 잇다는 사고방식이며’, 내가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그 결과 책(텍스트)이 그 속에 묘사된 현실보다도 더욱 큰 권위를 얻어 더욱 널리 이용된다’). 이 자의적이면서도 이기적인 태도는, 내가 직접 가지 않고 ‘그’를 이름 지어 ‘오게끔’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왔는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왔다고 내가 인지’하기만 하면 끝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가 스스로 ‘나 여기 왔소’라고 말할 것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는 애초에 그렇게 할 수조차 없는 존재이니까.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에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는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되어있다. 어찌 보면 오리엔탈리즘은 ‘자아가 없는 자폐증’에 비유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아 중심적인 사고를 통해 수많은 타자를 생산해내지만, 결국 자아의 실체는 없는. 때문에 서양 초기의 인류학은 매우 공허한 울림만을 남긴다. 인류를 연구하긴 하는데, 그 인류를 연구하는 자신(그 또한 인류)에 대한 관심은 적은('‘상이점’을 말하면서 ‘무엇과의’ 차이인지가 완전히 무시된다면, 이 상이점이란 말은 어떤 의미를 담는 것일까?'). 이렇게 타자만을 생산해내는 구조 속에서, 타자에 대한 텍스트의 초점도 왜곡된다.

 

텍스트의 초점이 사자(lion) 일반이 아니라 그 사나움이라는 주제에 더욱 모아짐에 따라, 사나운 사자를 취급하기 위하여 권장된 방법, 실제로는 사자의 사나움을 더욱더 강화하고, 사자를 반드시 사나워야 하는 것으로 만들게 되리라. 왜냐하면 사나움은 실제 사자의 성질이며, 또 그것이 사자에 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의 본질이고, 또는 알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중략)…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텍스트가 단지 지식만이 아니라, 그 텍스트가 서술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그 현실 자체도 창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꽃은 존재자체로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추상화된 개념 혹은 이념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개념과 이념은 불변의 것이다.

 

동양에 관한 하나의 사고체계로서 그것은, 언제나 특수한 인간적 세부로부터 출발하여, 초인간적인 일반화로 상승했다. …… 오리엔탈리즘이 전제로 삼은 것은, 서양과는 완전히 상이하고(상이한 이유는 시대에 따라 변했다) 언제나 변함없는 동양이었다.

 

자신의 노래와 꿈 속에서만이 아닌, 실제의 꽃을 만나게 되면서-때로는 가시에 찔리기도하면서-‘나’는 실망도 하게 되고 그에 따른 비난도 하게 된다. 그리고는 비참한 현실을 도피하기 위하여, 다시 오리엔탈리즘의 ‘전통’에 매달린다. 그리하여, ‘좋은 동양’은 고대에 쓸어 담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좋은 동양’은 현재의 ‘나쁜 동양’을 말하기 위함이리라. ‘특히 당신을 가리켜 얘기하는 것이 아니야. 그 민족과 종교를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이다’라는 ‘발빼기’가 바로 여기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동양인이고, 그 다음에 한 사람의 인간이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동양인으로 돌아온다.

 

결국 ‘꽃은 무엇보다도 먼저 꽃이고, 그 다음에 한 식물이지만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꽃으로 돌아온다’. 오리엔탈리즘의 범위는 이처럼 지적이면서 인식론적인 측면까지 침투해있는 것이다. 때문에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오리엔탈리즘을 단순히 제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사이드와는 다른 맥락에 위치하지만, 왠지 프란츠 파농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은 오버일까?(그렇게 오버는 아닌 모양이다. 역자도 후기에서 종종 파농을 이야기하고 있으니)

 



#2-1

 

매미는 꽤 오래 사는 곤충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미를 ‘한 철’ 곤충으로 기억한다. 실로 ‘메뚜기도 한 철’이 아니라 ‘매미도 한 철’인 셈이다.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17년까지 땅 속에서 유충으로 있다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비록 짧은 한 철이지만 긴 세월을 ‘참아낸’ 매미를 보고 감탄하기도 하고, 긴 세월을 감내하다가 드디어 성공을 이루어낸 사람들을 매미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말 매미가 땅 속에 ‘갇혀’ 17년이란 세월을 ‘참으면서’ 지냈을까? 왜 우리는 항상 ‘전지적 작가 시점’에 익숙한 것일까?


사이드는 ‘문헌학’이 구성한 초기 오리엔탈리즘에 주목한다. 문헌학은 말 그대로 문헌에 대한 정보를 캐내고 그 속에서 시대적 의미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아니 ‘시대적 의미’보다는 문헌을 연구함으로써 하나의 ‘계보’를 만들어내는 것이 문헌학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양을 대상으로 하는 문헌학이 단순히 물질적인 ‘문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문헌을 바탕으로 ‘동쪽의 인간’들을 규정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방대한 양의 자료를 ‘밝혀내고, 조명하여, 구출’하여 ‘학생 앞에 보’였다. 그리고 그 ‘구출된’ 지식은 ‘텍스트로부터 텍스트로 복사’되어 ‘문자 그대로 상투적 관념’이 되었다. 하나하나의 개인(주로 지식인)이 오리엔탈리즘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오리엔탈리즘에 ‘상투적’인 것이야말로 가공할만한 힘을 가진 것이었다.

 

인도회사와 같은 대규모 조직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여행자의 이야기로부터도 식민지가 창조되었고, 자민족 중심의 원근법이 확보되었다.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이론과 실천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동양에 관한 객관적 지식에 별안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문헌학과 같은 학문 분야에 의해 변형된 한 세트의 구조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힘은 그 자체로 현실에서 위력을 자랑하였으며, 그 힘이 만들어낸 ‘현실’은 또 다시 그 ‘힘’을 증폭시켰다. 방대한 자료를 통해 구축한 ‘다가가지 않은 피라미드’에 그들은 간접적으로 이름을 새겼으며, 이름을 새기는 순간 그제야 피라미드(동양)는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사시는 아라비아 시와 같은 것에 나타난 유용성과 흥미로움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말한 것은, 오리엔탈리스트에 의해 적절하게 변형되어야 비로소 아라비아 시는 감상의 대상으로 평가 받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피라미드는 서양에 의해 풀어져야 할 하나의 ‘원초적’ 수수께끼인 셈이다.

 

퀴네의 정식에 의하면, 동양은 문제를 제기하고 서양은 그것을 해결한다. 곧 아시아는 예언자를 가지며 유럽은 전문가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초적 수수께끼는 동서양이 함께 발을 딛고 있는 ‘인류’의 기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애초에 동양은 미숙하고 야만적이며 여성적(수동적)인 존재이므로. 때문에 바벨탑을 세움으로써 공통의 언어가 분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결국 르낭을 비롯한 근대의 학자들은 문화적 타락을 증명할 동양의 ‘고어’를 창조했다. 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셈어였던 것이다.

 

#2-2

 

어떠한 비정상이라고 하여도, 불필요한 예외로 고찰될 수는 없다. 도리어 비정상이야말로, 동일한 계층에 속하는 모든 구성요소

를 하나로 묶는 규칙적인 구조의 존재를 확인시키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이 책에서는 ‘우리’)이 모든 것을 창조하여 하나의 지식 체계를 구성하고, 그 체계 속에서 부단한 재생산을 해왔던 것은 바로 저 이유 때문이다. 하나의 ‘완벽한’ 타자를 설정함으로서 ‘완벽한’ 자아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며, 그 속에서 ‘권력’이 창출된다.


 

이 구조는 비단 동서양 간, 인종 간의 문제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밖에 나가 열심히 일하는 남성적 ‘도시’를, 뒤에서 말없이 수수한 모습으로 뒷바라지하는 여성적 ‘농촌’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오히려 농촌이야 말로 ‘자족’이 가능한 곳이고, 도시야말로 오염에 찌든 곳이지만, 도시가 바라보는 농촌은 지저분하고 게으르며 수동적이다. 기껏해야 공기 좋고 물 맑은, 명상하기 좋은 곳. 그곳에서 ‘생활’은 없다. 아룬다티 로이는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도사인 체하는 사람들은 강연을 하면서 진짜 인도, 인도의 정신은 시골에 살아 있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이 무슨 허튼 소리란 말인가. 손가락만 한 무화과 잎 하나로 색색의 화려한 물건들이 터질 듯 꽉 들어찬 정부의 수납장을 가려 보겠다는 수작이 아닌가. 인도가 시골에 살아 있다고? 그렇지 않다. 인도는 시골에서 죽어가고 있다. 인도는 시골에서 학대를 받는다. 인도는 도시에 살고 있다. 인도의 시골은 오로지 도시를 섬기기 위해 산다. 인도의 시골 사람들은 도시 사람들의 노예나 다름없다. 따라서 이들은 지배를 받아야 하고, 계속 살아 있되 겨우, 그리고 간신히 살아가야만 한다. <아룬다티 로이, 『생존의 비용』 중>

 

오리엔탈리즘도 마찬가지다. 서양인들은 그들 나름의 지식체계를 확고하게 다져가면서 동양을 ‘예속’시키고 ‘학대’하며, 그들 위에 군림한다. 사이드의 지적대로 그들의 ‘학문 속에 권력에 대한 이기적 의지가 숨어 있고, 그것이 그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이자 그의 야심을 부패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식은 말 그대로 ‘믿음’으로 체화되었기에 그들 스스로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아니,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시대와 자민족중심주의적인 문화에 의해 생겨난 창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혀 자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미가 땅 속에서 ‘정말’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가, 인간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수많은 자료를 인용하며 지식체계를 구축했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믿음은 복잡할 필요가 없었다. 단순할수록 타자의 생성엔 유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동양에게 복잡할 수 있는 능력 따위는 없었다.

 

논리적으로 구축되고 동양이라고 불린 그 영역 속에서는, 어떤 종류의 단정은 모두 동일한 역학적 일반성과 문화적 유효성을 갖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유럽’과 ‘아시아’ 또는 ‘서양’과 ‘동양’이라고 하는 해묵은 구분은, 인간의 다양성에 유래하는 있을 수 있는 모든 차이에 대해 지극히 광범한 꼬리표로 가축 무리를 나누는 것과 같이 작용하여, 그 과정에서 인간을 한 가지나 두 가지의 궁극적이고 집합적인 추상개념으로 환원시킨다. 마르크스도 예외가 아니다. 그에게도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실존적인 정체성보다 집합적 개념으로 동양을 사용하는 것이 용이했다.

 

매미도 종류에 따라 1년에서 17년의, 매우 다양한 길이의 유충 시절을 거쳐 성충이 된다. 그러나 그것인 인간에게 중요하지 않다. 이건 아마도 너무나도 당연한 ‘종의 이기성’에 기원하는 것이리라. 우리 눈에 매미든, 붕어든, 사자든 크기를 제외하고 모든 생김새가 비슷해 보이는 것처럼. 아, 그런데 잠깐. ‘종’이라고? 그렇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종’이 달랐던 것이다. 이보다 깔끔하고 명확한 구분이 어디있겠는가? 이 깔끔한 구분으로 인해 ‘한 사람의 인간이 스스로에게는 초시간적인 능력을 부여하고 사회와 민중에게는 한 개인의 수명 전체를 강제하는’ 전도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구성된 ‘체계’는 이제 동양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그 모든 것을 ‘예외’로 만들어버린다. 드디어, 선험이 경험을 압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2-4

 

그 제국의 지도제작술은 완벽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주의 지도는 도시만큼 컸고, 제국의 지도는 주만큼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대한 지도들도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게 되자 지도제작자들은 제국만큼 크고 한 점 한 점이 그대로 일치하는 제국의 지도를 만들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과학에 대한 열정」중)

 

보르헤스가 풍자하려던 지점은 좀 다른 것이지만, 어쨌든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간접적 지식’이 실재를 덮어버린 현상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연구한 오리엔탈리스트들은, 그 제국주의적 의도(혹은 무의식)는 차치하더라도 결국 오리엔트를 덮어버리고 없애버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오리엔탈리즘’의 당연한 전제조건일지도 모르겠다.

 

동양이 논의의 대상인 경우에도 동양은 완전히 부재하며 그 대신 오리엔탈리스트와 그들의 언어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오리엔탈리스트의 실재란 동양의 실질적 부재에 의해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사이드도 그것을 대체할 그 무엇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는 이 차별과 소외의 메커니즘을 타파하고 ‘그 무엇’이 아예 없는 이상향을 지향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을 지향하는 그의 목소리는 크고 높다.

 

하나의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현상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나의 관심이 시작되었던 그 원한과 불평등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지만, 이제 이런 것들은 영구적인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그 종말 혹은 부분적인 완화는 가까운 곳에 있을 수 있는 역사적 경험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는, 최소한의 보편적인 수용자세가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면서 이 글을 간단히 맺고자 한다.

 

이 세계에 부시, 샤론, 빈 라덴, 럼스펠드에 이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반대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몽과 해방에 대한 인간적이고 휴머니즘 적인 소망을 쉽게 미루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이에 대하여 하나마나한 이상론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니그로 정신’이라든가 ‘유대인의 인격’에 관하여 학술적인 글을 쓰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 상황’을 우리가 만들어왔음을 생각할 때, 이것을 ‘이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되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 특히 어떤 ‘한계’에 대한 믿음이 어디까지 유효한 것인가 생각해야 하며, 그 생각이 우리를 포기가 아닌 희망에 대한 의지로 이끌 것이다. 아룬다티 로이는 이야기한다. 희망을 위해 당신의 믿음을 깨뜨리라고. 슬프지만 그 믿음의 파괴 없이는 아무 것도 달라질 수 없다고. 우리가 믿는, 아니 믿고 싶어 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이드가 인용했던 니체의 말 한 구절을 다시 읽어 본다.

 

곧 진리란 그것이 착각임을 망각하고 있는 착각이다.

 

#3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내가 읽은 이 책은 오리엔탈리즘 발간 25주년을 기념하여 2007년에 다시 나온 판본이다. 두께에 비해 가격도 싼편이고, 개정 증보판답게 이전 판본에서 사용된 어색한 단어들이나 문장들도 수정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이드의 후기 2편이 실려 있고 역자의 후기도 100페이지에 달한다. 하지만 문학비평가였던 사이드답게 글이 쉽지는 않다. 번역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내가 보기엔 원문 자체도 그리 녹녹치 않은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역주가 굉장히 많고 긴 편이라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겠다. 하지만 읽기 싫다면 그냥 지나치면 될 일이기 때문에 역주가 없는 것도 아니고 많은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은 현실을 생각하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그것보다도 재미있는 것은 100페이지에 달하는 역자의 후기다. 대부분의 역자후기가 책 내용의 요약이나 저자의 약력 정리, 혹은 개인적인 감상에 그치는 것을 감안하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래도 역자가 지금보다 훨씬 젊을 때 쓴 후기이므로 굉장히 서슬이 시퍼런 문장이 가득한데, 여기에 대해서는 100% 동감을 절대 할 수 없지만 논쟁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예를들어 '모든 민족과 개인이 공존하고 공생하는 사회, 서로의 존엄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사회를 이룩하고 투쟁과 소유가 아니라 대화와 존재의 삶의 터를 이룩'하는 것이 과연 후기 중간에 보이는 서양(특히 영국)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적대감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의 적대감의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나, 마지막에 제시하는 '이상향'을 이루기 위한 전략적 수단으로서 '증오'는 에드워드 사이드 또한 고개를 저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특이한 후기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보기보다는 오히려 책을 읽기 전에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서슬이 시퍼렇기 때문에(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문제가 되는 지점과 내가 현재 서있는 지점을 확실하게(그리고 사이드의 글보다 훨씬 쉽게) 확인한 후에 책을 읽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면서도 정작 이 용어를 '유행'시킨 이 책을 읽지 못했다는 것이 항상 맘에 걸렸는데, 읽는다고 고생 깨나 했지만 어쨌거나 다 읽어서 속은 시원하다. 물론 내 독서 능력에 다시 한 번 좌절하기도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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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이상적인 남자'하면 떠오르는 가치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용기', '강인함', '씩씩함' 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의 이 신간에서는 1890~1900년대 나타나는 '이상적 남성성'의 계보를 살펴보고 있다.

'왠 남성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박노자가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뜬금 없지도 않다.

박노자는 1900년대 초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와 같은 담론에 관심을 가져왔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대충 감이 오겠지만, 1900년대 강조된 남성성은 전통시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육체적 강자'로서의 남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과 근대가 그렇게 명확하게 단절되는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뒷부분에 이영아의 발문에도 지적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너무 '근대의 근대성'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는 권력관계 전체를 정당화하는 상징 영역이다. 이데올로기 영역은 사회 곳곳의 완고한 기존 현상(예컨대 가부장적 가족구조)을 포함한 권력 구조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또한 "전통"은 전체 권력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에서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 영역은 대개 혁신성을 가시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만큼 소극적이다. 기의(signified)가 대대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기표(signifier)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후기 사회(17~19세기)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던 이순신은 근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대담무쌍하고 성공적이며 지능적이고 애국적인 전사의 상징, "조선의 넬슨(Horatio Nelson)"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렇지만 숭배의 내용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숭배를 표현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 연속성을 드러낸다.

 

여러 자료들과 시대상황을 검토한 후, 저자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조선의 경우, "애국적 남성의 훈련된 신체"의 근대적 이상은 최소한 두 가지의 토착적 남성성 패러다임을 혼합, 계승한 것이었다. 하나는 왕조국가와 성리학적인 도덕규범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의 독립과 자주"라는 새로운 지상 가치로 옮겨가던 고답적 "군자"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민족 이념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겁 없는 협객을 존중해온 김구와 같은 평민들의 패러다임이다. 전통적으로 "고상한 목표", 자기 수양, 도덕적 청렴을 부각시키던 "군자" 패러다임은 최남선 등의 "자기희생" 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세시풍속의 일종으로서 이웃 마을 사이의 돌싸움에서 드러나는 사납고 거친 남성성에 대한 평민드의 애착은 새로운 남성적 에토스의 군사주의적인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런 양상이 '기댈 조국이 없는', 그러면서도 일제에 의해 총동원되어야 했던 식민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은 강인함(그러나 국가권력에 순종하는)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물론 이 배려와 돌봄은 넓은 의미를 가진다.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차원에서는 각종 사회문제들을 무시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는 그런 남성.

세계에서 가장 긴 주당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점을 감안하면 '배려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도,

근대적 이상이었던 '튼튼한 육체'를 발전적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뒷부분에 같은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는 이영아의 비판적 발문이 실려 있어 책을 잘 매조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영아의 문제제기 외에 개인적으로 드는 의문도 있다.

 

우선 '정당한 폭력을 "남성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훈육된 남성 투사라는 상투적 이미지는, 개화기와 그 후의 조선사회에서 성차 의식을 "민족화"시키는 과정에서 창출된 것 뿐이다.'라는 저자의 견해.

 

조선시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폭력성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은 "국민국가를 위해서 칼을 드는 여성"의 근대적 이미지를 쉽게 수용할 만한 문화적 배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결론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일단 그것이 '조선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분석을 위해서는 당시의 '여성관'도 면밀히 살펴봐야만 한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칼을 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좀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이런 '적극적'인 행위를 권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들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존재였다.

그나마 여성이 칼을 드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의 정절이나 가문의 명예 혹은 부모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국가를 위해 칼을 드는 여성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며, 그 상상 또한 현실의 남성을 공격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딸, 부인,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문에 이 시대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권장'으로 표상되는 남성성만이 아니라 '금기'로 표상되는 남성성도 함께 살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쉬운 예로, '남자가 왜 질질 짜고 그러냐'는 금지 혹은 비난. '훈육' 속에는 권장 외에도 금기, 금지가 상당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당시 남성에게 무엇을 금지하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상적 남성성을 탐구하는 다른 경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더 아쉬운 점은, 머리말에 비해 글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제말기를 거치면서 겨우겨우 일상까지 파고든 이상적인 남성성이, 저자의 말처럼 왜 '변화'했는가?

물론 저자의 관심은 1900~1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머리말에 이야기한 문제제기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유럽이나 중남미 사회들의 "이상적 남성" 이미지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완력이나 담력보다는 학력 및 경제 능력 부분이 더 중요시된다. 일부 지식인 사회를 제외하면 동유럽 여성들은 "근육이 없는 남성", 심하면 "주먹질 못하는 남성"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르다. "명문대 졸업생"과 "엘리트 대기업 사원"이라면 그 정도의 "결함"(?)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의 "인생 성공"은 절대적으로 "학력 자본"에 좌우된다.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남미나 동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한 개인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철저한 학별의 위계질서가 대한민국처럼 공고하게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적 프로젝트로서의 '건강한 남성의 육체만들기'는 멈추었지만, 여전히 각 기업체는 '군인정신'을 강조한다.

극기훈련을하고, 해병대로 가서 '훈련'을 받고 강인한 '정신'을 요구 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나의 관심이 많았던 부분이라 좀 아쉬웠다.

다소 허망한(?) 저자의 이상적 남성상을 피력할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을 좀 더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영아는 발문에서 여러가지 생산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문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발문 첫부분에 나오는 연예인 군 입대에 대한 해석은 같은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를 하지 못하겠다.

연예인 군문제에 일반 남성들이 그렇게나 민감한 것은,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 때문은 아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사회의 제대로된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합의가 있는 것은 100% 맞지만 그것이 '남성성'과 연관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물론 이것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주장처럼 이 요인이 가장 핵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가 부차적으로 취급한 '평등'의 문제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평등'이라고 하니 뭔가 고상한 거 같은데, 표현을 좀 바꾸자. '피해의식'이 더 적절하겠다.

요즘 군대 가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갈 수 있으면 안가는게 좋다. 군대라는 곳은 이제 그런 곳이다.

그런데 정작 안간 이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왜? 나는 그런 X같은 곳에 2년 혹은 2년이 넘도록 다녀왔으니까.

나도 다녀왔으니, 너도 가야하는거 아냐?라는 논리가 바로 핵심이다.

어떠한 보장을 위한 평등이 아니라 피해와 불이익의 공유를 위한 '평등'. 때문에 '여자도 군대가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1권이 나온 후 한참 나오지 않던 '히스토리아' 시리즈가 다시 시작된 것도 환영할만한 일.

'속편격'으로 집필 중이라는 이영아의 책도 기대가 된다. (근데 이것도 히스토리아 시리즈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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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 - 누구나 꿈 꾸는 세상
후루타 야스시 지음, 요리후지 분페이 그림, 이종훈 옮김 / 서해문집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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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우화인 줄 알았는데, 실제 이야기였다.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들어진 나라 나우루 공화국.

바티칸과 모나코에 이어 세번째로 작은 독립국.

이 책은 이 나라에서 벌어진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정말 단 10분이면 다 읽을 분량이지만, 이 콩알만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에게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얻은 것과 잃은 것,

어느 쪽이 많은지는

인광석의 섬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금부터 생각해야겠지요.

그렇게 보통 생활, 보통 수준의 국가란

어떤 것인지를 배워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보통'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우루 사람도 한국 사람도 미국 사람도

다 모를 겁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고, 또 그 '이런 일'이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님도 느낄 수 있다.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두고 그저 제국주의의 잘못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부족한 느낌이랄까?

 

절반은 그림으로 되어 있는데, 원화에 잘 묻어갈 수 있도록 레터링을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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