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
C. 더글러스 러미스 지음, 이반.김종철 옮김 / 녹색평론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재작년 대선 때 이야기되는 것들이 경제 밖에 없고, 또 결국에는 그 논리에 따라 괴물이 뽑힐 것 같은 분위기에 좌절을 느껴 사게 된 책.

하지만 역시, 읽은 것은 이제서야. -_-

 

저자는 '상식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크게 변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즉 결코 변할 수 없는 그 무엇도 바뀔 수 있으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이란 것이 실제로는 상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경제발전론'은 일종의 사고장해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사고력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겪었지 않은가. 더러운 놈이면 어때, 경제 발전시킨다는데. 미친 놈이면 어때, 잘먹고 잘살게 해준다는데.

(그 결과를 이미 보고 있지 않은가. 아니, 실은 이것이 단지 시작일 뿐이라는 것, 그것이 더 미칠 일이다.)

결국 실제로 벌어지는 환경파괴, 인간성파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비상식/비현실주의로 받아들여진다.

정부에게 폭력을 양도한 뒤, 훨씬 더 대규모의 학살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더라도 그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또 그는 1949년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사용한 발전 개념이 이후 시대를 지배했다고 주장하는데, 경청할만한 이야기이다.

 

  "나라 A는 국가정책으로 나라 B를 발전시킨다(develop), 그것이 나라의 발전(development)이다"라고 하는 것, 이것이 왜 '고쳐 만들어진 말'인가 하면 기본적으로 일본어의 '발전'이나 '성장'도 그렇습니다만, 영어의 'develop(발전한다)'는 본래는 자동사입니다. 타동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어로서 정당치 않게 들립니다. 국가 A가 국가 B의 '발전'을 정책으로 삼고 있는데 그 표현은 자동사라니, 이것은 큰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문제가 아니라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미개발'의 공통점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특징이 아니라 자기네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즉 유럽이나 미국의 경제제도에 들어와있지 않은 그 '결여'입니다.

 

이 착취 이데올로기는 '발전'이라는 꽤나 긍정적인 단어로 교묘하게 포장된다.

 

내정간섭이 아니라 발전, 착취가 아니라 발전, 폭력적인 변화가 아니라 발전.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 아닌가? 재'개발', 재'건축', '투자'...

 

경제발전이란 '슬럼세계'를 '고층빌딩의 세계'로 조금씩 변신시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은 착각이자 속임수입니다. 경제발전의 과정에 따라 예전에 있었던 다양한 사회가 '고층빌딩과 슬럼의 세계'로 바뀐 것이 20세기의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도 옛날에 비하면 얼마나 나아'라고 하는 말은, '본래 있었던 빈부의 차를 경제발전이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제로성장을 주장한다. 대신 '정의로운' 부의 분배, 환경과 조화된 삶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보다 '더 못살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역설한다.

앞으로 100년을 내다보지 못하는 이 절박한 상황에서, 이 이야기가 왜 '더 못살자'라는 비현실적인 말이 되어야하느냐고 반문한다.

 

이렇게 현실주의가 비현실주의로 취급받는 상황은, '민주주의'가 왜곡된 것이 무엇보다 큰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미국의 '민주주의'는 많은 왜곡을 거쳐 완성된 것이다.

미 건국의 아버지들이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평등과 자유에 대한 정의도 고치는데 성공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보라. 결국 '신자유주의'가 '자유민주주의'와 동일시되고, '사회주의'는 '민주주의'의 적이 되었지 않은가?

 

사회주의는 해결할 수 없었다, 또는 적어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는 해결하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제도는 민주적이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

  경제제도를 민주화하는 과정의 첫걸음은, 경제적인 결정이라고 말해지는 정책결정의 대부분이 실은 경제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 결정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책이 아주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는 정책론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논의되어야 할 점은 산적해있다.

그리고 부분부분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특히 맥아더가 전쟁이 없어야한다고 느꼈기에 일본의 군사력을 억제했다는 이야기등.)

하지만 다음의 말은 정말 명심해야만 하는 구절이다.

맨날 욕하다가도 몇 년에 한 번 돌아오는 그 보잘 것 없는 권리행사마저 헛되이 날려버리는 상황에서는.

 

  경제발전에 따라 빈부의 차이가 없어진다고 하는 환상은 로스앤젤레스를 보면 잘못도니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빈부의 차이란 경제발전에 따라 해소되는 것이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는 정의(正義)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보면, 빈부의 차이가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정의라는 말은 경제학의 용어가 아닙니다. 경제학 공부에서는 정의라는 말을 배우지 않습니다. 빈부의 차이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은 커녕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정의'란 정치용어입니다. 빈부의 차이는 경제활동으로 고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빈부의 차이를 고치려고 한다면 정치활동, 즉 의논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그것을 없앨 수 있는 사회나 경제구조로 바꾸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해소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지금 이 정부가 미디어 장악을 성공적으로 진행한다면, 자신을 포장하고 사실을 왜곡할 것은 뻔한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무서운 것은, 정치에 대해 더욱더 '역겨움을 느낄' 더러운 포장을 심화할 것이란 사실이다.

실제로 정치가 그러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고개돌린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아니 더 심해질 뿐이다.

정치적인 것 하나 생각하지 않고 경제논리로만 대통령 찍어놨더니 어떻게 되었는가?

경제논리로 결정한 그 선택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정치적인' 결정이 되고 말았다. (아니, 경제'논리'라도 있기는 했었나?)

정치에 대해 역겨움을 이끌어내는 언론들은, 그 누구보다도 그 역겨움 속에 깊게 발을 담그고 축배를 들고 있지 않던가?

역겹고 유치하고 더럽더라도 무시하지 말라.

당신이나 나나, 모래구덩이 속에 머리를 파뭍어봐야 허약한 몸은 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더글러스 러미스의 주장대로, 진짜 상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상식이 바뀌는 거, 그래 그거 쉽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고작 10년 전의 상식이 지금 얼마만큼 유지되고 있는가를.

쉽지 않지만, 불가능하지 않다. 어차피 지금 이 '상식의 세계'에서도 충분히 힘들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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