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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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아렌트를 한 번 읽어보자는 취지에서 읽기 시작했던 책.

한나 아렌트는 이 소고에서 '폭력'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의문은 맑스를 추종한다는 지식인들의 오해에 대한 질문이다. (1장 진보의 역설)

 

문제는, 왜 그렇게 많은 폭력의 새로운 전도자들이 맑스의 가르침과의 결정적인 불일치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여, 왜 그들은 사실의 전개를 통해 잘못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분명하게 자신의 정치 운동과도 조화되지 않는 개념과 원리에 대해 그렇게 완고한 고집을 갖고 집착하는가에 있다.

 

두 번째 의문은 '폭력'의 정의에 관한 의문이다. (2장 폭력과 권력)

 

내 생각에, 정치과학의 현재 상태에 대한 차라리 유감스러운 성찰은 우리의 전문 용어법이 '권력power', '강성strength', '강제력force', '권위authority', 그리고 마지막으로 '폭력'과 같은 핵심단어들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폭력은 본래 도구적'이며 권력은 우수한 수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조직화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지만 결코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인데, 이는 마오쩌뚱을 패러디 한 밑의 말로 요약될 수 있겠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

 

폭력적으로 치닫는 권력은 오히려 권력 약화를 증명한다는 것이다.

즉, 권력의 상실이 권력을 폭력으로 대체하려는 유혹을 일으킨다는 것.

아렌트는 권력과 폭력을 무조건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꼈는지, 극단적인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요컨대, 정치적으로 말한다면, 권력과 폭력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산할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 3장(폭력의 본성)에서는 폭력이 과연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수많은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폭력은 '이성적'으로 행사되었고 분노 없는 폭력이야말로 비인간화의 전형이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는 프리모 레비가 번뜩였다.)

 

분노와 폭력이 아니라, 그것들의 뚜렷한 부재가 비인간화의 가장 분명한 징후이다.

 

군인들은, 누군가 계속해서 그렇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살인자가 아니며, 살인자들-'개인적 공격성'을 갖고 있는 자들-은 아마 훌륭한 군인조차 될 수 없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2장, 3장으로 가면서 논의가 더욱 심화되고 더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하긴.. 1장은 이 책이 발간될 무렵 꽤 많은 논란이 되었을 법 하다. 사르트르와 프란츠 파농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전체적인 논지와는 별개로, 가장 공감이 가던 부분은 이 세 부분.

 

나는 동물학자들의 많은 연구작업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나는 일부 동물이 인간처럼 행위하는 것을 보며 놀라기도 하고 종종 즐거워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인간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비난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나는 왜 우리가 "인간이 집단적 텃세 습성을 가진 종種들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는 것을 승인하도록"-차라리 그 반대로, 어떤 동물 종種이 인간과 아주 유사하게 행위한다가 아니라-요청받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우리는, 동물심리학에서 모든 신인동형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을 "제거"한 후에(실제로 성공했는지는 다른 문제다), 이제 "인간이 얼마나 '반인반수半人半獸인지" 발견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가?

 

"참을 수 없는 비극"에 비추어 볼 때 "초연함과 냉정함"이 오히려 "두려운" 것일 수 있는데, 이를테면 그것이 통제의 결과가 아니라 이해력 결핍의 명백한 징후인 경우에 그렇다. 합리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감동'해야만 하며, 감정적인 것의 대립물은, 어떤 의미에서도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감동에 대한 무감성으로서, 대개 병리적인 현상이거나, 아니면 감상으로서, 느낌의 도착이다.

 

모두가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 말하자면 집단적인 유죄의 고백은 범죄자를 발견하지 못하게 하는 실행 가능한 가장 탁월한 방어수단이며, 그 범죄의 거대한 규모는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대한 가장 탁월한 변명이다.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은, 그 스스로가 점차 그 힘을 잃고 있다는 증거라는 그의 분석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엔 여전히 답답함을 떨칠 수 없다. 모호함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현실에서 다시 모호해진달까.

저 폭력적인 이명박 정권이 실제로 권력을 '잃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너무 비관적인가?)

낮은 지지도와 권력의 힘이 줄어드는 것. 이 둘이 별 상관 없어 보이는 현실이 그저 내가 눈이 나쁜 탓일까.

물론 권력 상실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지만.

프란츠 파농을 한 번 읽어봐야겠다.

 

본문이 120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책이지만 읽는데 꽤 오래 걸렸다.

한나 아렌트의 글이 원래 좀 어렵다고는 하지만, 이건 번역의 탓도 있는 것 같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닌 내가, 번역을 읽으면서 영문 구조가 보일 정도니 -_-...

쉼표를 쓰는 것을 뜻을 명확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사용하면 흐름을 턱턱 끊어놓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너무 많은 쉼표를 찍어대고 거기에 또 너무 많은 줄표를 사용하는데,

번역할 때야 명확해지기는 하겠지만 읽는 입장에서는 별로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또 하나. 이 책 제목이 '폭력의 세기'인데, 원제는 'On Violence'다. 왜 이렇게 번역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투박하게 느껴져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책의 내용을 생각한다면 그냥 '폭력에 대하여' 정도록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낫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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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마녀 사냥
브라이언 P. 르박 지음, 김동순 옮김 / 소나무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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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마녀 사냥. 이젠 이 용어가 역사적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건을 가리키는 하나의 관용어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유럽에서 일어난 마녀 사냥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정작 많지 않다.

이 책은 마녀 사냥에 관한 일종의 개설서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유럽을 이야기할 때 마녀 사냥은 빼놓을 수 없는 문제지만, 이 책의 필자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제대로 정리가 되어 있지는 않다.

 

이 책의 특징은 한 가지 주장을 결코 단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무엇인가를 주장하려는 듯 하다가 결국에는 주저한다.

그만큼 마녀 사냥이란 주제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일 수도 있고, 저자가 아주 조심스럽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조금 웃기다고 생각했던 것은, 매장마다 '단언할 수 없다', '쉽게 판단해서는 안된다' 등의 표현으로

조심에 또 조심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 머리 속에는 몇 가지 키워드가 담박 떠올랐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미 짜여진 저자의 논리체계에 복잡하다는 마녀 사냥을 집어 넣어 단순한 결론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르박이 강조하는 키워드는 1대1로 매치가 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마녀술 - 악마숭배, 중앙정부 - 지방사법기관, 엄격한 사법처리 절차 - 고문, 유도심문 등의 사용, 종교적 열정 - 이성적, 회의적 사고

 

이렇게 대비되는 요소들이 마녀 사냥의 확대 및 쇠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르박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사법제도'다. 현대의 마녀 사냥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사법제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저자의 분석에 크게 반대하는 바는 아니지만, 애초에 그가 꺼냈던 화두-마녀 사냥은 지역, 시대에 따라 너무나 복잡한 문제라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단순화된 도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앞서 그가 주저하고 조심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학문적 가장'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그 밖에 마녀들이 당시 사회의 '희생양'이었다는 주장은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진 사실이므로 생략.)

 

어쨌거나.

이 책을 읽으면서 계속 '국보법' 같은 것들이 생각났는데, 마침 르박도 거기에 대한 언급을 빼놓지 않는다.

 

1678년 교황의 반란 음모에 경악한 영국인이나, 1919~1920년 그리고 1947~1954년의 미국 시민이 겪은 적색 공포처럼, 촌락민과 도시인은 이웃 가운데 점차 많은 사람이 심지어 지배층까지 마녀로 고발되자 공포에 빠지게 되었다. 즉 가장 가까운 친구나 이웃이 마녀일지 모르고, 사회가 완전히 악마의 수중에 들어갔을지도 모르며,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마녀로 고발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우리사회에서 여전히 힘을 가지고 있는 '빨갱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얼마전 국보법을 들이대서 모 단체와 모 교수에게 딴지를 걸었다가 법원에서 퇴짜를 맞은 사건을 알고 계시는지?

저들의 목적이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아직 빨갱이가 너네 주위에 있다는 걸 알아둬!'

고소가 기각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레드바이러스가 아직도 주변에 맴돌고 있다는 '믿음'이 중요할 뿐.

(거기에다, '빨갱이가 대학교수까지 하고 있었다니!'라는 충격!)

지목되면 부정해야하고 부정하지 않으면 처벌 받는, 이 프레임 자체를 깨부수어야 한다.

국보법 철폐가 바로 그 시작이다.

 

마녀 사냥에 관련된 사법 절차는 모두 임시로 긴급하게, 그리고 예외적으로 마련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사회를 '정화'한다는 엄숙한 사명하에 '잔인하게',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진행되었다.

무엇보다 마녀와 그들의 의식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마녀가 아니라 마녀를 처벌한 종교인, 사법관들이었다.

어떤가. 임시 법안 국보법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빨갱이를 너무나도 잘 아시는 극우보수와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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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문화사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5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은주 옮김 / 르네상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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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이란 시종 일관된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서로 느슨한 관련밖에는 맺지 않는 다양한 현상들을 포괄하는 말이다.

 

얼마 전 완역되었던 4권짜리 대작, '악의 역사'의 저자가 마녀에 관해 쓴 책이다.

('악의 역사'가 처음 나올 때, 이 책 행사로 끼워서 줬더랬지, 아마;; 그 때 혹해서 살까 말까 했었는데. ㅎㅎ)

아무래도 종교사가인만큼, 르박의 저작과는 조금은 다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역사학자인 르박이 마녀사냥은 왜, 어떤 이유로, 무엇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종교사가인 러셀은 유럽 마술의 기원 자체로부터 출발한다.

각자 다른 범주에 있었던 마술과 이단, 악마숭배가 어떻게 하나로 묶이며 마녀사냥을 낳게 되었는지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교개혁의 영향, 사법기구/고문의 영향에 관한 부분들은 르박과 비슷한 견해를 유지한다.

게다가 재난이나 질병, 기근과 같은 사회적 조건이 마녀사냥의 원인이라는 느슨한 분석에도 르박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화재나 그 밖의 재해는 민중의 공포심을 부추겨 속죄양을 요구할 가능성을 높인다. 그렇다고는 해도 화재 뒤에 마녀가 고발당하지 않은 경우도 많았으며, 아무런 재해가 없었는데 마녀 고발이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재해는 마녀 고발의 한 원인이지만 재해가 마녀 고발을 유발하는 것은 일정한 세계관이 우세한 경우뿐이며, 그러한 세계관을 존재하게끔 만드는 것 또한 일정한 사회적, 지적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러셀은 르박과는 달리 '마술의 기능'에도 주목하고 있다.

즉 단순한 '희생양'이 아니었다는 것이다(물론 그렇다고 마녀사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마술은 불행에 대한 책임을 추상적이고 불가해한 힘에서 벌줄 수 있는 특정 개인에게로 전가시킨다. 신이, 혹은 운명이 병을 유발한 것이라면 보복을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나 마녀의 책임이라면 상대를 쫓아내거나 그 힘을 저지해 볼 수 있게 된다.......

  마술의 또 다른 주요 기능은 이단의 기능과 동일하다. 즉, 마술은 기독교의 경계선을 분명히 함으로써 사탄을 최고 지휘자로 하는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적들의 군대에 맞설 수 있도록 기독교 공동체를 단결시켰다.

 

이 책이 르박의 책과 가장 다른 점은 현대의 마녀에도 관심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관점은 종종 역사학자가 도출한 결론에 비해 조금은 더 폭넓은 결론(혹은 경고)을 제시하기도 한다.

 

이런 광기, 인간을 고문하고 살해하는 일에 대한 열광이 몇 세기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근 반세기 동안에도 홀로 코스트, 수용소군도, 캄보디아의 대량 학살을 비롯한 무수한 고문과 처형이 비밀리에 자행되었다. 그보다는 700년부터 1000년까지, 1700년부터 1900년까지의 기간과 같은 비교적 멀쩡한 정신의 시대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묻는 편이 오히려 더 합당할 것 같다.

 

이 광기 상태에 관해 기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사회적, 지적 유래가 아니다. 마녀사냥은 본질적으로는 중세의 탓도 기독교의 탓도 아니며, 그렇다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나 르네상스 주술의 탓도 아니다. 기본적으로 마녀사냥이란 인간성에 내재하는 하나의 결함, 즉 악을 타자에게 투영하여 그 사람들을 국외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들을 가차없이 벌하려 하는 빗나간 요구가 취한 하나의 특정 형태였다....... 악이 취하는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지만, 그 형태의 배후에 숨겨진 악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다.

 

러셀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진보에 대한) 독선을 버리고,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다양성을 되찾아야 할 때라고 역설한다.

 

진보라는 관념은 과학적으로 엔트로피의 법칙 때문에 미덥지 않고, 역사적으로도 터무니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마음에 기묘한 신념을 수없이 심어왔다. '야만적인 사회'가 진보해 문명이 되며, 분석적 사고는 종합적 사고에 비해 진보된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다. 또한 실증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주술이 진보해 종교가 되고, 종교가 진보해 과학이 되었다고 가르쳐왔다. 우리는 다신교가 진보해 일신교가 되고, 일신교가 진보해 무신론이 되었다고 믿고 왔으며, 자연을 이용하는 것은 자연과 조화를 도모하는 것에 비해 진보한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일단 이 근거 없는 신념을 내던져 버린다면 우리는 이제까지 완고하게 거부해 온 대안들 속에 있는 가치를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분명히 통합적이고, 직관적인 사고의 가치는 분석적 사고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분명 무신론이 종교보다 진보한 형태일 리는 없다. 아마도 다신교는 일신교가 잃어버린 진리로 나아가는 여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용어 번역의 문제는, 내가 보기엔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마법, 마술, 마녀술(이 책에 마녀술이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녀 등의 번역이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진 않는다.

명백한 오역이 아주 가끔 눈에 띄기는 하지만, 눈에 확 띄는 오역이라면 오히려 봐줄만 하니까.

조금 아쉽다면, 이 용어들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따로 부록에 한두 페이지로 정리해서 실어주었다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이 용어들은 지금 학계에서도 어떻게 번역을 해야할지 명확하게 합의가 되지 않은 것들이 대다수다. 예를 들면 이런 것들.

 

witch, witchcraft, socery, soceror, wizard, warlock, magic, magician

 

당장 witch부터 문제가 되는데, 사실 witch는 여성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번역어인 '마녀'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용어다.

그렇다고 '남자 마녀'도 우스운 말이 되고, '마남'으로 구분을 하자니 이것도 어색하다.

'마인'은 또 demon과 헛갈릴 수가 있어 쓰는게 꺼려진다.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의 도움-_-...으로 감이 오기는 하는데 무슨 단어로 번역을 해야하는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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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반의 사생활
하영휘 지음 / 푸른역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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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0통에 달하는 행서와 초서의 편지들. 그 편지 속에서 19세기 한 양반의 생활상과 그가 살았던 사회의 모습을 그려낸 책이다.

 

책이 새로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자 마자 주문하여 읽기 시작했는데, 이 책, 정말 녹녹한 책이 아니다.

어려운 말로 태반을 채운다거나 하는 일도 없는데도 이 책을 읽는 속도가 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이 책이 '노작'이란 점 때문이리라.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건성으로 넘기기엔, 한 학자가 원사료를 보고 해석하고 그 해석을 다시 재구성하여 하나의 글로 만들어내는

그 힘든 과정이 내게도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사이 나오는 가벼우면서도 자극적인 책들과는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런 책으로 생각하고 집어들었다가는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뒤에 달려있는 미주들도 꼬박꼬박 챙겨가며 읽었기에 읽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 노력 끝에 짧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데,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힘든 작업을 해놓고서 그 작업에 타당한 '한계선'을 스스로 긋는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사실 남들이 보기엔 아무렇지 않더라도, 자기가 고생한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지점이 가장 큰 착각이며 가장 위험한 지점이기도 하다.

필자는 자신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게끔, 자신의 노고에 대한 '애정'을 툭툭 잘 털어낸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런 책이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19세기 양반 유학자의 일용품은 대부분 선물에 의하여 조달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중략)...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실생활에서 시장경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지극히 미미했음을 의미한다. 선물, 이른바 '도덕경제'가 시장경제의 발달을 강력히 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양반의 삶은 공과 사로 구분되어 있었다. 학문, 벼슬살이, 사회생활은 공에 속했고, 가정생활은 사에 속했다. 그들의 공은 훤히 드러나 있는 반면, 사는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에 늘 공을 앞세웠기에, 평소의 말과 행동은 모두 공에 속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감정까지도 공과 사로 구분하고 있었다. 혹 사적인 감정이 드러날 경우, 반드시 '사적인'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붙였다. 가령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사적으로' 슬펐고,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면 '사적으로' 기뻤다.

 

  조병덕의 편지를 통하여 살펴 본 19세기 조선사회의 모습이 결코 19세기 전체 조선사회의 모습을 대표한다고 할 수 없다. 이 책은 19세기 기호지방 양반에 관한 하나의 사례연구에 불과할 뿐이다....(중략)...

  조병덕의 눈을 통하여 본 19세기 조선 사회가 암울하고 변괴로 가득한 사회였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중략)... 만약 조병덕의 반대편에 서서 19세기 조선 사회를 바라본다면, 조병덕이 '세상의 변괴'라고 한 갖가지 모습은 바로 새로운 사회를 준비하는 새로운 몸짓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몸짓은 그 전 시대와는 비교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했음을 조병덕의 편지는 말해주고 있다. 바로 거기에 조병덕 편지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양반'들'의 사생활'이 아니라 '양반의 사생활'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양반의 여유나 멋 같은 것 보다는, 몰락해가는 양반의 서러움과 어려움,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지키고 싶어하는 양면성.

아들에 대한 걱정과 잔소리들, 이 모든 것에서 투영되는 19세기 조선의 사회상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이건 좀 다른 얘기기는 한데, 역시 어느 시대나 '아비의 마음'은 다 똑같은 모양이다. 부모 걱정 시키는 자식놈도 마찬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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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과 열광 - 어느 인문학자의 스포츠 예찬
한스 U. 굼브레히트 지음, 한창호 옮김 / 돌베개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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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하면 뭐가 떠오르는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좋아하는 사람일지라도 혹시 그가 먹물이라면 '나 스포츠 좋아하지;라는 얘기를 잘 하진 않는다.

자본주의, 우민정치의 수단 등으로 자리잡아버린 스포츠의 역할(?)이 찜찜한 탓일까.

 

심지어 스포츠를 사랑하는 학자라도 막상 자신이 갈고 닦은 개념을 적용할 때면 결국 스포츠를 바람직하지 않은 경향들의 어떤 증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지곤 한다....(중략)...

간단히 말해, 스포츠 찬양이 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한편 지식인들이 스포츠를 찬양하는 데 무능력한 더욱 일반적인(그리고 더욱 설득력있는) 이유는 항상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강박에 있다.

 

  스스로를 교양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미적 경험이란 오직 몇 가지 규범화된 대상과 상황에 의해서만 유발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즉 '문학적'이라고 내세우는 책에 의해, 연주장에서 연주되는 음악에 의해, 박물관에 걸려 있는 그림에 의해, 혹은 무대에서 공연되는 극예술에 의해서만 미적 경험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엘리트 집단은 정전(正典)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회적 차별화와 특권의 도구가 되어버린 미적 경험에서 이득을 본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요즈음 스스로 교양있는 중산층이라 칭하는 사람들은 이 차별화의 기제를 무식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 보다는 '그저 돈만 많은 사람들'을 공격하는 무기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저자는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기준을 통해서 볼 때, 그리고 '주변성'이 스포츠만 가지고 있는 특성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스포츠는 틀림없이 미적 경험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강조한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스포츠를 미학적으로 분석하면 '현존'과 '의미'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의미의 차원에서 사건은 새롭고 다소간 심오한 변화의 시작을 특징짓는 순간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현존의 차원에서는 '모든' 시작이, 심지어 끊임없이 반복되거나 오래전부터 예상했던 시작조차도 '사건'이라는 지위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의 '세계'에 대한 고찰도 꽤나 탁월하다.

 

운동선수와 관중에게는 오히려 그런 규칙들이 일상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경기중에 강렬하게 집중하여 몰입하게 만드는 전제조건이 된다.

 

비록 책의 뒷 부분에 가서는 왠지 처지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렇게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이 능력은 분명 인문학자로서 반드시 갖춰야할 것이 아닌가 싶다. 내 관심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낼 수 있다는 것.

타인이 어찌보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예찬할 수 있다는 것. '도구'와 결합되는 스포츠를 설명하는 장면을 보라.

 

...정말로 유명한 선수들은 기계적 지식과 육체적 직관의 조합을 통해 그런 셋업에서 결정적인 우위를 나타낸다....(중략)...그런데 자동차경주에서 관중이 위다함과 마주하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실 이 말은 오후 한 나절 내내 경주차량이 단지 몇 번 전속력으로 눈앞을 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켄타로우스 같은 경주 선수의 윤곽을 포착한다는 뜻이다.

 

그저 스포츠의 기록과 에피소드만을 담은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다.(밑의 책이랑 정말 비교된다. -_-)

 

오랜만에 '신선함'을 느끼며 재미있게 읽었던 책.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야 어쩔 수 없지만) 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에피스드가 주는 감동이 뭔지 대충은 알 거다.

그리고 이 감동을 대충 아는 사람은, 이 책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오사카 출신인 내 친구 에이코 후지오카에게 야구와 관련된 가장 소중한 기억은 정확히 패자의 비장미와 관련된다. 그런 우아함은 아레테(탁월성을 향한 노력)가 아곤(경쟁)에 비해 아주 눈에 띌 정도로 우위를 점하게 되는 어떤 수준이 존재하리라고(이것은 당연히 스포츠가 거둔 최고 수준의 성과일 것이다) 희망할 수 있게 해준다.

 

  15년 전쯤 당시 세이부 라이온스에서 뛰던 코지 아키야마의 팬이었을 때가 정말이지 앚혀지지 않아. 난 텔레비전으로 일본 챔피언전을 시청하고 있었지, 두 명 아니면 세 명쯤 주자가 진루해 있고 투아웃 상황에서 아키야마가 타자석에 들어섰어. 또 한 점 얻을 수 있는 기회였지. 볼카운트는 투스트라이크였어.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된 상황이었는데 그 다음 투구에 아키야마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어. 그런데 그만 스트라이크가 돼버린 거야. 삼진을 당해버린 거지. 이런 아주 중요한 경기에서 자기 팀에 또 한 점을 올려줄 기회를 그만 잃고 말았던 거야. 경기장은 실망한 라이온스 팬들의 큰 한숨 소리로 가득 찼어. 이런 상황에서 아키야마는 타자석에 평소보다 잠깐 더 오래 머물러 있더니 진정으로 아름다운 웃음을 투수에게 보내지 않겠어!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키야마의 웃음은 상대 투수가 그날 야구 시합을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느낌, 그리고 경쟁에서 패했지만 그 자신도 이러한 성취의 일부가 되었다는 느낌에서 나왔음에 틀림없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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