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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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인터뷰 집.

본래 하워드 진은 무겁고 정말 중요한 이야기들을 결코 어렵지 않게 풀어내곤 했지만, 이 책은 더욱 다가기가 쉬운 책이다.

역사, 사회는 물론 문화 및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져 있다. 분량이 많지는 않지만, 하워드 진을 처음 읽는 사람에게 정말 적합한 책.

짧은 분량과 구술 인터뷰라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하워드 진 특유의 설득력을 맛볼 수 있다.

 

  정부가 '안보'라는 말을 어떻게 선전하는지 잘 보십시오. 무척 흥미롭습니다. 안보라는 미명하에 정부는 사람들에게 지문날인을 강요하고 감시합니다. 게다가 한밤중에 잡아가기도 합니다. 시민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주요 대상이지만, 시민권을 가진 미국 국민도 예외는 아닙니다. 미국 국부의 상당한 부분이 군사비에 지출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모두가 안보라는 이름하에 자행되는 짓이지요. 하지만 일상적인 삶에서 국민의 안전은 도외시됩니다. 국민이 노동을 중단하고 싶은 연령에 이르렀을 때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삶이 진정한 안보입니다.

 

자본주의를 찬양하는 사람들은 생산이 증가하고, 국민총생산이 증가하니까요. 하지만 국민총생산(gross national product)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분석해보십시오. 문자 그대로 '천박하기(gross)' 이를 데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나는 계급을 기준으로 사회를 관찰하고, 우리 모두가 공통된 이익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국민은 소속된 계급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애국주의는 공통된 이익을 지향합니다. 국기가 그런 공통된 이익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애국주의는 정부가 흔히 동원하는 그럴듯한 단어와 똑같은 역할을 하면서 공통된 이익이라는 착각을 조장합니다.

 

정말 이상하게도, 하워드 진의 글에는 사람을 일어서게끔 만드는 힘이 있다. 마음만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후방에서 팔짱을 끼고 냉소짓는 것과는 달리, 그는 전장의 최전선에 서서 웃음 짓는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다고. 내가 젋었을 땐 당신이 서있는 그 자리에 있었다고.

그러니 너의 목소리를 내고, 너의 행동을 취하라고.

 

  조용히 하라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진지하게 토론할 때입니다. 밤을 새우면서라도 전쟁의 타당성을 따져봐야 할 때입니다. 입을 다물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부도덕하고 타당한 근거도 없는 전쟁이 아무런 반대도 없이 그대로 진행되도록 놓아둘 수는 없습니다. 전쟁 중이니까 반대의 목소리를 죽이라고요? 정말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태가 위험해졌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뤄야 하니까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인가요? 그런 게 사회적 통념이라고요? 그건 결국 덜 중요한 문제를 다룰 때만 표현의 자유를 갖는다는 뜻입니다. 삶과 죽음의 문제, 가장 절박한 문제를 다뤄야 할 때는 어떤 주장도 하지 말고, 논쟁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민주적인 토론과 논쟁이 필요할 때입니다. 사람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국민이 죽어가고, 미국 국민이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토론의 수위를 높여야 합니다. 전쟁을 중단시킬 정도로 저항의 수위를 높여야 합니다.

 

그의 자신감은 아마도 그가 경험했던 60년대의 기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말 속에는, 어줍짢은 한국의 386, 그러니까 이젠 486들의 패배주의적 우월감이 없다.

(요새 듣고 있는 한 수업 중 하나에서 이런 패배주의적 우월감 때문에 소통의 단절을 절감하는 중. 짜증도 좀 나고.)

그래서 더욱 세대차가 느껴지지 않는 것일지도.

 

시민불복종. 우리가 택한 이 주제는 약간 혼란스럽다. 시민불복종이 주제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 문제는 시민불복종이 된다. 하지만 시민불복종은 우리 문제가 아니다. …… 우리 문제는 시민복종이다. 우리 문제는 정부 지도자들의 지시에 복종해서 전쟁터로 간 사람들의 수(數)다. 정부의 명령에 복종했기 때문에 수백만 명이 죽었다.

 

또 강연이 끝나면 누군가 일어나서 "그래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말로 속수무책인데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그때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여기에만 1500명 가량이 앉아 있습니다. 전쟁을 반대하고 부와 권력의 독점을 반대하는 내 강연에 여러분 모두가 박수를 보냈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부분일 뿐입니다. 미국에는 어딜 가나 여러분과 똑같이 느끼고 나와 똑같이 생각하는 1500명, 아니 2천명이 있습니다. 여러분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느낌을 대신해서 행동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 신문을 비롯한 언론이 보통 사람들의 일은 보도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어제 무엇을 먹었는지는 보도해도 어떤 중요한 쟁점을 갖고 천 명의 보통 사람이 모여 시위한 사건은 보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과 똑같은 걸 걱정하는 수많은 사람이 이 나라에 있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대답합니다.

 

수업시간에는 교수의 정치적 입장을 절대 드러내서는 안된다는 막스 베버와는 달리,

하워드 진은 교실 밖에서 선생의 삶이 어떠한 지를 분명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막스 베버의 말도 이해는 가지만, 나는 하워드 진의 태도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달리는 기차위에 중립은 없으니까.

 

  나는 선생들에게 개인적인 경험을 교실에서 쏟아내는 데 망설이지 말라고 자주 말합니다. 선생들은 그런 점에서 무척 소심한 편입니다. 선생답지 못한 짓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강의 진도표에 맞춰 교과서를 가르치고, 본인이 가르쳐주고 싶은 내용만 가르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삶이나 개인적인 경험은 좀처럼 언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모든 선생이 나와 똑같은 경험을 했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선생은 나름대로 어떤 세계를 경험했을 테고, 그런 경험 덕분에 현재 위치에 있는 것 아닐까요? 선생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경험을 통해 선생의 의식이 변하기 시작했는지 학생들은 알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모든 걸 아는 건 아니라는 걸 분명히 밝힙니다.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나도 배워서 아는 거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지식을 태어나면서부터 알았던 게 아니고, 신이나 역사가 거저 준 게 아니라, 학생들도 얼마든지 터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배운 거라고 말합니다.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선생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걸 학생들에게 알려줘야 합니다.

 

여기까지야 흔히 들을 수도 있는 이야기. 그러나.

 

  이런 자세는 나 자신을 위해서 중요합니다. 내가 세상을 분석하는 관점은 부분적일 수박에 없습니다. 내 나름대로 옳다고 선택한 관점에서 본 세계일 뿐입니다. 따라서 내 관점을 진리처럼 받아들이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신신당부합니다. 내 관점은 그저 내 관점에 불과한 거라고요. 지식은 주관적이고 역사도 주관적이어서 수많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내 해석은 그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관점, 즉 '생각을 파는 시장'에서 내 관점은 한 모퉁이를 차지할 뿐이라고요. 물론 '생각 시장'은 자유 시장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실물경제 시장처럼 '생각 시장'도 소수의 강력한 집단이 지배하고, 나는 그 시장에서 작은 수레를 밀고 다니며 학생 손님들에게 "이걸 맛보세요. 괜찮은 맛보세요!"라고 외칠 뿐이라고 말합니다.

 

16살의 여학생이 자신을 초청하는 편지를 받고 달려가 강연을 했다는 하워드 진.

그가 이렇게 헌신적으로 활동을 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때문에 그의 말에는 신솔함이 담겨있고, 그의 관점에는 항상 밝음이 담겨져 있었을지도.

학생의 입장에서도, 또 앞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도 있는 선생의 입장에서도.

내겐 그야말로 '스승'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다.

 

편히 쉬시지 마시고, 여전히 제 머리와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저를 다그치고 용기를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아직 하워드 진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다면, 추전한다. 그리고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필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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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꼬프스끼 선집 열린책들 세계문학 64
블라디미르 마야코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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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책들에서 나오던 세계문학 시리즈 'Mr. Know'가 절판됐다.

물론 같은 내용의 책이 양장의 형태로 나오기는 하지만, 요새 나는 양장보다는 페이퍼 북 형태의 저가책이 맘에 들어서 아쉽다.

종이가격도 오른데다가 우리나라에선 이런 형태의 책이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하니 안타까울뿐.

특히 이 시리즈는 다른 전집들과는 달리 각 책의 표지가 다른 컨셉으로 그려져있어 외양상으로도 맘에 딱 들었었는데. 

'20세기 위대한 혁명 시인'으로 불리는 블라지미르 마야꼬프스키의 선집이다.

해외문학, 특히 시 종류는 거의 읽어보질 못했는데, 그 중에서도 러시아 문학을 완독한 건 거의 처음이다.

짧은 산문도 수록되어 있는데, '어떻게 시를 만들 것인가'라는 글을 보면 이 시인이 한 줄을 완성하는데 얼마나 고민하는지 엿볼 수 있다.

'번역시'로는 아무래도 그러한 각운이나 운율을 제대로 맛볼 수가 없기에 좀 아쉽기도.

어쨌거나 마야꼬프스키는 혁명 뿐만 아니라 사랑도 노래했다. 역자가 '혁명의 시인'이라는 말 중 후자를 주목해야한다고 말했듯이.

 

사람들이 킁킁거린다 -

무언가 타는 냄새!

불자동차의 출동

번쩍이는 방화복!

철모!

장화는 안 돼!

소방대원에게 말해

심장에 붙은 불은 애무로 꺼야 한다고.

 

그러나 역자의 지적대로 '시대는 그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범속했고 그는 시대를 받아들이기에 너무 민감했다'.

 

  어제 내 동무 한 사람이 전장에서 돌아왔다. 그는 위생병이었다. 그는 보잘것없긴 하지만 아름다움을 무척 사랑하는 예술가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캐스터네츠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 집 파티에 온 그 친구에게 한 곡 부탁했다. 그는 연주를 시작했으나 도중에 그만두어 버렸다. 나는 그의 손가락을 관찰했다. 그의 손은 불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부상자에게서 총알을 뽑다가 유산탄 조각에 찔려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는 또한 포탄이 비 오듯이 날고 있는 장면을 말해 주었고 사흘간 붕대를 감느라고 한잠도 못 자 쓰러진 자신에게 사람들이 피비린내 나는 비슬라 강물 한 컵을 갖다주었다는 얘기도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그건 그의 <직업>이 아니지 않은가. 그러다가 죽을 수도 있었지 않은가. 그는 화를 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연대가 공격할 때 한꺼번에 울려 퍼지는 우렁찬 <만세> 소리 중 어떤 목소리가 이반의 목소리인지 가려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수없이 발생하는 전사 중 어떤 것이 내 죽음이고 어떤 것이 다른 이의 죽음인지 가려낼 수 없다. 죽음은 전군을 공격한다. 그러나 죽음은 무력하기 때문에 전체의 극히 일부만을 놀라게 할 뿐이다. 공동의 육신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전장에서 하나가 되어 숨쉬고 있다. 따라서 그곳에 있는 것은 불멸이다. 그것이 내 친구의 생각이었다.

 

개인의 감성과 혁명이라는 사회적 책무 사이에서 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죽는다는 일은 새로울 게 없다.

그러나 산다는 것 또한 더 새로울 게 없다.

 

라는 글을 남기고 자살한 예세닌의 사회적 여파에 대항하여 그는 시를 지었는데, 그럴 때조차 그는 진지하고도 신중했다.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자살자와 자살에 반대하는 자들의 이 논리는 오늘날도 그대로 적용된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러나 결국 이 시를 작성한지 5년이 채되지 않아, 마야꼬프스끼 또한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이 또한 상징적이다.

 

뒷부분에 옮긴이 석영중 교수의 글은, 최근 내가 본 옮긴이의 글 중에 가장 인상 깊었다.

자세한 설명에 적절한 표현과 비유 등이 독자에게 앞서 읽어온 책을 다시 뒤적이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이렇게 훌륭한 옮긴이의 후기는, 그의 번역에도 신뢰를 가지게끔 만든다.

 

진정어린 관심과 애정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결과물에서 드러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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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지음 / 사회평론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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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하는 게 다 그런 거 아냐? 에이 뭐, 검찰이 다그렇지. 경찰이 그랬던거, 몰랐어?

 

어쩌면 우리는 그런 말을 너무나도 쉽게 해왔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쉬움'에는 비판보다는 '나도 그럴 수 있지 뭐'라는 이상한 관용이 묻어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내부고발자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배반'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것일지도.

 

나의 문제제기를 배신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그는 배신당한 사람의 입장에 선 것이니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대체, 내가 무엇을 배신당했다는 말인가? 당신은 김용철에게 무엇을 배신당했는가?

순간 말문이 막히는 나를 보며, 이 책은 삼성을 생각하는 책이자, 나를 다시 생각하는 책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힘없는 사람 한두 명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처벌하되, 힘있는 이들이 똘똘 뭉쳐서 오랫동안 조직적으로 저질러 온 범죄는 처벌하지 않는 사법기관을 신뢰할 사람은 없다. 한국의 사법정의는 한때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하는 수준까지 도달했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성공한 재벌'의 경제범죄는 처벌하지 못했다. 삼성 비리에 대해 면죄부가 나온 이후, 경제범죄로 처벌받는다면 그는 '실패한 재벌'이거나 '재벌이 되지 못한 자'가 되는 셈이다. 이런 사례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간명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한 재벌'이 돼라. 그 과정에서 저지른 죄는 저절로 사면 받는다"라는 것.

 

다 그렇다는 거 몰랐냐고? 그렇다면, 그거 알고 있는 당신은, 나는, 우리는, 대체 무엇을 했는가?

너무 서슬이 시퍼런 질문일지는 몰라도, 이젠 싸가지 없게 이렇게 되물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침묵이 마냥 중립이 될 수만은 없으니까.

 

  한편 일부 언론의 왜곡과 많은 지식인들의 침묵과 냉소는 용기 있는 증언자들을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지연되고 있는 경제민주주의의 배후에는 언론과 지식인들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습니다. 또한 경제라는 이름의 물신을 위해 모든 가치를 뒤로 미루는 오늘의 국민정서 또한 재벌의 범죄를 방관하거나 관대하게 대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공범이기도 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김용철 씨가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분명 삼성의 비리를 도왔고, 그만큼 부를 누렸'던' 사람이다.

하지만, 김용철 씨 그 자신 또한,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양심고백을 하는 대부분의 내부고발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만큼의 벌은 달게 받을 각오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이들을 두고 '단물 다 먹고서는 버림 받으니 뒷통수 친다'라고 한다.

단물은 누가 다 먹은 걸까? 배신은 누가 먼저 한 걸까? 뒷골목의 의리를 이야기한다더라도, 이건 순서가 잘못됐다.

게다가 그 빌어먹을 의리는 그들 사이의 이야기이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란 말이다.

 

삼성을 생각하자. 그것은 단순히 한 재벌을 생각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건 우리 사회를 생각하는 것이며, 또 나를 생각하는 것이다.

더불어 나는 앞으로 삼성의 제품을 단 하나도 구매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안사봐야.. 라는 생각은 일단 버린다. 나라도 안쓰겠다. 작은 소비 하나라도 가치 중립적으로 하지 않을 것이다.

 

내 공연 보고 싶으면 표 끊고 공연장에 와서 보라는 나훈아 형님의 자존심을, 왜 나는 가지지 못하는가?

남이 누굴 배신했는가 묻기 전에, 나 스스로가 나를 배신하지는 않았는지 묻는 것이 순서다. 조그마한 자존심이라도 있다면.

 

중간중간 사족 같은 부분이 많고, 표현상 조금은 자기방어적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그건 어차피 이런 회고록 류의 책에서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특성이니 감안하고 보시길. 그러나 기회가 된다면 꼭 일독하시길.

'삼성이 다 그렇지 뭐'... 그 이상을 보여준다. 당신이 '다 그렇다'고 알고 있는 것은 정말 얼마되지 않는다.

 

"A라는 사람이 어찌어찌해서 죽었대!"라는 말에, "사람은 다 죽는 거지 뭐"라는 대답만큼 멍청한 대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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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신서 1140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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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소리의 연속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역시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를 연발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대가가 썼기 때문에 다르다는 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대가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

특히나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혹은 그럴 예정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

(분량도 엄청 적기 때문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 훗.)

 

무엇을 물어도 '해답'을 들려줄 '현인'을 기대했던 당시의 독일 학생들에게, 베버는 꽤나 시니컬한 답변을 들려준다.

 

이와 같이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고전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 버리지도 않습니다. 개개인은 이러한 완성된 예술품의 의의를 각각 다르게 평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술적 의미에서 진실로 <완성>된 작품이 다른 하나의, 역시 <완성>된 작품에 의해 <추월당했다>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학문에서는 자기가 연구한 것이 10년, 20년, 50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돼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문연구의 운명이며 더 나아가 학문연구의 목표입니다. …… 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학문에 헌신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요즘의 나에게 매우 따끔한 충고로 들리는 대목도 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학문영역에서는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 아래와 같은 사람은 분명히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헌신해야 할 과업의 흥행주로서 무대에 함께 나타나는 사람, 체험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사람, 어떻게 하면 내가 단순한 <전문가>와는 다른 어떤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나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다른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은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근대인은 "생에 지칠 수는 있어도, 생에 대해 포만감을 느낄 수는 없"다는 그의 분석과 함께, 나의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었다.

 

사실 요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고민만 잔뜩하는 중인데, 100년 전의 선배가 나에게 일갈하는 듯 하다.

대체 너는 학문을 직업으로 생각하기나 하느냐고.

 

이런 꾸중에 눈물 찔끔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지만, 왠지 계속 작아지는 것만 같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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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퐁 세트 - 전5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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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류의 그림체에는 익숙하지 않은데, 컷 구성이나 장면의 묘사 등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집어든 책.

 

내용은 아주 흔해빠진 버디물이긴한데, 캐릭터들이 평면적이지 않아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처음엔 꽤나 거부감이 들던 캐릭터까지 정감이 갈 정도로.

 

컷마다 마치 렌즈를 들이댄듯한 왜곡 효과가 탁구의 속도감을 더해주고, 적절하게 절제된 대사들은 나름의 가오-_-를 잡아준다.

왜곡과 과장이 이런 효과를 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만화.

 

버디물하면 역시 H2지만, 사실 '스포츠의 탈을 쓴 연애만화'라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어서 '팬'까지는 되지 못했는데.

그에 비해 마츠모토 타이요의 다른 작품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첫 서브를 반대쪽 코너로 받아쳐 찔러 넣던 스마일과 그것을 지켜보던 버터플라이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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