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학문 나남신서 1140
막스 베버 지음, 전성우 옮김 / 나남출판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010년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소리의 연속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역시 대가는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를 연발하게 만든다.

중요한 건, 대가가 썼기 때문에 다르다는 게 아니라 다르기 때문에 대가임을 느끼게 된다는 것!

특히나 학문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혹은 그럴 예정인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

(분량도 엄청 적기 때문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 훗.)

 

무엇을 물어도 '해답'을 들려줄 '현인'을 기대했던 당시의 독일 학생들에게, 베버는 꽤나 시니컬한 답변을 들려준다.

 

이와 같이 학자의 길은 거친 요행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말하자면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고전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이런 능력이 없는 사람은 우리가 학문의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결코 자기 내면에서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진실로 <완성>된 예술품은 능가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또 그것은 낡아 버리지도 않습니다. 개개인은 이러한 완성된 예술품의 의의를 각각 다르게 평가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술적 의미에서 진실로 <완성>된 작품이 다른 하나의, 역시 <완성>된 작품에 의해 <추월당했다>라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학문에서는 자기가 연구한 것이 10년, 20년, 50년이 지나면 낡은 것이 돼 버린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문연구의 운명이며 더 나아가 학문연구의 목표입니다. …… 학문상의 모든 <성취>는 새로운 <질문>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성취>는 <능가>되고 낡아버리기를 원합니다. 학문에 헌신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이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요즘의 나에게 매우 따끔한 충고로 들리는 대목도 줄을 칠 수 밖에 없었다.

 

  존경하는 청중 여러분! 학문영역에서는 순수하게 자신의 주제에 헌신하는 사람만이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

…… 아래와 같은 사람은 분명히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헌신해야 할 과업의 흥행주로서 무대에 함께 나타나는 사람, 체험을 통해 자신을 정당화 하려는 사람, 어떻게 하면 내가 단순한 <전문가>와는 다른 어떤 존재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나는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다른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은 그런 방식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개성>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근대인은 "생에 지칠 수는 있어도, 생에 대해 포만감을 느낄 수는 없"다는 그의 분석과 함께, 나의 뒤통수를 치는 느낌이었다.

 

사실 요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면서 고민만 잔뜩하는 중인데, 100년 전의 선배가 나에게 일갈하는 듯 하다.

대체 너는 학문을 직업으로 생각하기나 하느냐고.

 

이런 꾸중에 눈물 찔끔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지만, 왠지 계속 작아지는 것만 같은 요즘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