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 이야기 - 피렌체편 - 김태권의 미술지식만화
김태권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지식만화'를 추구하는 작가 김태권의 미술 이야기. 이 책이 2009년에 나왔다는데,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마운 분의 원조로(ㅋㅋ) 책을 얻었고, 재미있게 읽었다.

확실히 십자군 시절의 김태권보다는 훨씬 정리가 되어 있는 느낌(그런 의미에서 십자군 3권이 기대된다).

잘 모르고 있던, 혹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 시대엔 그닥 관심이 없었는데, 메디치가에 대한 책을 한 권 읽어도 꽤 재밌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설마 바사리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어있지 않은 건가?;;;;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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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1-02-03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죽이죠 ㅋ

낮에뜬별 2011-02-10 10:38   좋아요 0 | URL
ㅎㅎ 빨리 후편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홍이 이야기
박건웅 글.그림, 이승민 원작 / 새만화책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나는 공산주의자다'를 보고 나서 박건웅의 책들을 검색 몇 권 구입했다. 그 중 하나.

제주도 출신인 이승민이 쓴 짧은 이야기를 박건웅이 만화로 그린 것이다. 소재는 4.3.

아주 짧은 이야기이지만, 그리고 왠지 알고 있는 이야기같지만, 뭔지 모르게 굉장히 답답하다.

어쩌면 5월 광주보다 훨씬 전에 일어난 일임에도, 그리고 분명히 일어난 일이란 걸 잘 알면서도 모두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책 뒷부분엔 4.3의 개요가 잘 설명되어 있다.

 

어제 밤에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 앞부분에 실린 사진들을 보았는데, 기분이 참 착찹해졌다.

사람들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조준사격자세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 헌병을 보고 있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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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E. H. 카
데이비드 캐너다인 엮음, 문화사학회 옮김 / 푸른역사 / 2005년 4월
평점 :
품절


작년 말에 '역사란 무엇인가'를 다시 정독한 뒤에 곧바로 읽기 시작했던 책.

2001년 '역사란 무엇인가' 출간 4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심포지엄의 글들을 정리하고 모은 책이다.

책의 원제는 'What is history now?'이기 때문에 책 제목이 좀 뜬금 없을 수도 있는데, 읽다보니 출판사의 의도를 알 것 같다.

(하긴 원제를 그대로 번역해서 옮겼다면 임팩트가 아주 떨어졌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란 무엇인가' 출간 기념 심포지엄이지만, 여기 모인 9편의 글이 모두 카에게 집중하고 있진 않다(그래서 일면 다행).

그보다는 오히려 역사학의 각 분과별로 소위 '회고와 전망'을 서술하고 있다. 사회사, 정치사, 종교사, 문화사, 젠더사, 지성사, 제국사.

때문에 책이 굉장히 지루하고 고리타분해보일 수 있는데, 생각보다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각 분야별 현황이 어떠한지 점검도 가능하고, 또 내 논문의 방향을 잡는데도 도움이 될 것 같다.

 

문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문화사를 통해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요컨대 죽은 역사에 생기를 불어넣어 우리와 전혀 다른 믿음과 문화에 대하여 설명하고, 가능하면 인간의 경험과 이해를 풍요롭게 하는데 기여하고, 우리 시대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문화와 믿음 체계에 대한 관용의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킨다는 확신이다.

 

민족지학의 위기는 역사가에게도 상처를 입힐 가능성이 있다. 민족지학자와 마찬가지로 역사가도 어떤 사람들이라도 소박한 자료 제공자가 될 수 있다고 지나칠 정도로 쉽게 믿어왔다.

 

저자와 제작자, 화가는 제아무리 감추려고 노력해도 자신이 만든 텍스트를 통해 자신이 결코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다. 폴 스트롬이 주장하듯, 우리는 '초서가 결코 자신에 대해서 몰랐다'는 사실을 초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다. 초서는 텍스트 속에 자신의 무의식이 떠오르는 것을 통제할 수 없었고, 자기 텍스트가 태어나는 역사적 배경을 알 수 없었으며, 그 작품을 읽는 독자가 자기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는 시대를 초월해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어떻게 변화할지 충분히 알지 못했다. 초서는 기회만 생기면 자기 작품에 대해 더 알고자 했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마지막 에필로그는 런던대학 교수 펠리페 페르난데즈-아메스토가 썼는데, 글이 맛깔난데다 이름도 익숙해서 찾아보니 역시 '밀레니엄'의 저자.

그 책을 읽지는 못했고 선배가 권해서 서문만을 읽었었는데, 역시 글을 잘쓰는 사람인듯.

어쨌거나 그의 글이 한 역사가의 비관적인 고백이라는 점에서 꽤나 마음에 든다. 비관 없이는 희망도 없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가 역사가가 된 이유는 내 관심사가 모든 분야게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편리하게 망각한다.

 

비록 모든 사람들이 역사를 할 수 있지만, 언제나 직업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며 보수를 받는 특수한 사람들, 즉 사료에 특권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안내자 혹은 지도자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생각에 현재 우리는 최소한 기회를 상실하고 있으며, 어쩌면 최악의 경우에는 의무를 준수하는 데 실패하게 될 것이다.

 

사실 종교학 분야가 제일 지루하고 따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내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어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지성사 부분이 역시.... -_-....)

 

  내가 선택한 세 번째 연구물은 프랑스의 방대한 박사학위 논문으로 실제 읽히기보다는 주로 인용되는 미셸 보벨의 <바로크적 신앙심과 탈기독교화>이다. (마르크스주의 동조자이자 일급 학자인) 보벨은 프로방스 지방의 유언장 수천 개를 분석하여 (이것은 또 다른 계열사적 연구이다) 탈 기독교화의 시작과 세속화의 징후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켰다. 그는 한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는지를 기준으로 가톨릭 신자를 정의하였다. 그의 연구는 의외로 풍부한 죽음의 예술 연구였다. 이 연구는 무덤이나 장례기념물의 도상을 다루었고, 수천 장에 달하는 유언장의 공식 서문을 분석하고 계량화하였다. 이 유언장들은 도시와 시골, 젠더 등에 따라 분류되었다. 유언장 서문에는 고인의 장례행렬(흔히 관을 뒤따르는 빈민들의 수가 기록된다)과 장례식 당일 내놓을 자선 기부금에 대한 설명뿐만 아니라 연옥에 있는 영혼의 안식을 위해 상당 기간 동안 올려진 미사들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는 자신이 사용한 자료들의 샘플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철저함을 추구하였다.

  나는 보벨의 연구를 다시 읽으면서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대단한 역사 지식을 제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첫 번째로 18세기 바로크 무덤 양식의 붕괴와 장례행렬의 간소화, 1770년대 무렵 도시 남성 엘리트층에서 영혼의 안식을 위한 미사 횟수가 감소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러한 경향을 탈기독교화/세속화의 전조로, 그리고 연옥에 대한 믿음이 쇠퇴하기 시작한 증거로 보았다. 그는 또한 유언장 서문에서 자선 기부금 액수가 다소 줄어들었음을 발견했다.

 

보벨은 죽음을 중심에 놓고 '탈세속화'라는 주제를 다룬 셈인데... 만약 내가 죽음을 중심에 놓는다면 어떤 주제에 접근할 수 있을까?

국가권력과 죽음의 양식 간의 관계를 논해볼 수 있을까? 망딸리떼를 살피겠다는 거창한 욕심보다는 그런 쪽으로 방향을 잡는게 나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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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무선)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 / 예경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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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 없는 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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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52
A.스뜨루가쯔키 외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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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제목의 러시아 소설. 그러고보니 연속으로 러시아 소설을 읽은 셈이 되는데.. ㅎㅎ

SF, 환상문학을 주로 집필했던 스뜨루가츠끼 형제의 대표작이다.

매우 딱딱한 문체로 디스토피아를 그려냈던 자먀찐과는 달리, 이 형제들의 묘사는 매우 자세하고도 적절하다.

그래서 '소설'읽는 재미가 느껴진다. 솔직히 '환상문학'류를 그닥 즐기는 편은 아니라 기대는 안했는데 굉장히 재미있었다.

어떻게 이런 설정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 상상력에도 박수.

 

하지만 이 가벼울 것만 같은 소설은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를 턱하니 던져 놓고 끝나버린다.

간단하게 말하면 '너의 행복은 어느 쪽이냐'는 너무나 회피하고 싶은 질문.

 

  "그러면 너는 스네고보이도 비난하겠구나?" 내가 물었다.

  "나는 아무도 비난 안 해."

  "그렇지만 너는 글루호프에게 화내고 있잖아."

  "아직도 못 알아듣는구나." 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화를 내는 것은 글루호프의 선택 때문이 아니라니까. 내가 무슨 권리로 아무 도움도 없이 아무 희망도 없이 혼자 남겨진 인간이 선택한 길에 화를 내겠니. 나는 다만 결정 후의 그의 태도에 짜증이 나는 것뿐이야. 다시 말하자면, 그자는 자신의 선택에 수치스러워 하고 있어. 그래서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똑같이 되기를 원해. 알아들어? 그는 자신의 추한 모습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는 거야."

 

당신이 하고 있는 연구가 10억년 뒤 인류에게 큰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는 이유로 중단할 것을 강요 받는다면, 당신의 선택은?

재앙을 핑게 삼아 위협 앞에서 양심을 버릴 것인가, 아니면 소소한 행복을 과장하며 '나'를 포기할 것인가.

(물론 그 재앙이 실제로 올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은 다름이 아니고 이 항상성 우주가 인류의 4차원화되려는 이성을 저지하기 위해 반응을 보인거라 할 수 있어. 우주가 자기 방어를 하고 있는 거지.

  나한테 어째서 너나 글루호프가 다가올 대혼돈의 제1차 희생물로 선택되었는지 묻지 마. 너와 글루호프의 연구의 어떤 점이 우주의 항상성을 위협하는 거냐고 묻지 마. 그리고 항상성 우주의 그 어떤 메커니즘에 대해서도 묻지 마. 나는 아무것도 몰라. 에너지 보존 법칙이 어떻게 유지되는가를 우리가 모르듯이. 모든 일은 에너지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발생될 뿐인 거지. 그리고 모든 일은 너와 글루호프의 연구가 10억년쯤 후에 수백만의 다른 연구와 결합되어 마침내 지구의 종말을 유도해 내는 일이 없도록 진행될 거야. 물론 이건 추상적인 의미에서의 지구의 종말이 아니고, 우리가 오늘날 관찰하고 있는 이 세상, 10억 년 동안 존재해 온 이 세상, 그리고 너와 글루호프가 엔트로피의 정복을 위해 미시적인 안목으로 너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위협하고 있는 이 세상에 관한 문제야."

 

결국 누군가는 '나'를 버리고, 또 누군가는 그것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안고 간다.

이건 마치 컵에 물이 반이 비었는가 반이 찼는가라는 말장난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10억 년이 남은 것을 '아직'이라고 할 수도 있고, 10억년 뒤에는 결국 '끝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테니.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10억 년 따위의 숫자가 아니다. '세상이 끝나는 것' 따위도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결코 수긍하지 못할 위협에 내가 복종할 것인가 아닌가인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두꺼운 렌즈의 이면에는 긴장감도, 위대한 대담함도, 가짜 순교자의 표정도 더 이상 안 보였다. 차분하고 불그스름한, 확신, 모든 것은 순리대로 되어야만한다는, 그리고 그 밖에는 아무 다른 해결책도 없다는 확신.

  그는 더 이상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가 계속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서둘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의 세월이 있다고 그가 말하고 있었다.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10억 년 동안 많은 일들이,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수많은 풍자와 알레고리로 범벅이 된 환상소설.

 

이런 디스토피아적 환상소설이 러시아 문학의 일맥을 이루는 걸 어떻게 생각해야할까 싶다.

혹자는 그것을 사회주의의 실패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후쿠야마 식의 '역사의 종말'과 같은 대책 없는 낙관주의보단 낫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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