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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무척이나 인용이 길고 많아질 것이다. 그만큼 이 책은 최근 몇 년간 내가 읽었던 책 중 가장 인상 깊은 책중 하나고, 또 아픈 책이다.
조지 오웰은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훌륭한 르포기자이자 에세이스트이기도 했다. 이 책이 가장 좋은 증거다.
1936년, 조지 오웰은 한 진보단체의 의뢰를 받아 영국 북부 탄광지역 노동자의 삶을 직접 체험하며 르포를 작성한다.
대부분의 먹물들이 그러하듯, 노동자의 실생활은 매우 낯선 것이다. 또 노동자의 가족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을 최저생계비, 연봉 따위의 숫자로 보는 것과, 그들이 사는 그곳에서 냄새를 맡는 것과는 천지차이인 것이다.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는 이따금 그런 곳들을 찾아가 냄새를 맡아볼(냄새를 맡는 게 특히 중요하다) 의무 같은 게 있다. 가서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 게 낫겠지만 말이다.
나는 태운 기차는 탄광 쓰레기 더미와 굴뚝, 고철 무더기, 지저분한 운하, 그리고 통나무 자국이 가로세로 나 있는 잿빛 진흙탕 길을 지나쳤다. 삼월이지만 날은 끔찍이도 추웠고, 어디나 시커먼 눈 더미가 있었다. 기차가 도시 외곽을 서서히 빠져나갈 때는, 강둑과 직각 방향으로 뻗은 슬럼가의 작은 회색빛 집들이 차례로 줄지어 나타났다. 그중 어느 집 뒤뜰에서는 젊은 여인 하나가 돌바닥에 무릎을 꿇고서 부엌에서 나오는 배수관을 꼬챙이로 찌르고 있었다. 어딘가 막힌 모양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다. 올 굵은 삼베 앞치마, 꼴사나운 나막신, 추위에 빨개진 팔을 놓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차가 지나갈 때 그녀가 올려다보는 바람에 나는 지척에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둥글고 창백한 그녀의 얼굴은, 슬럼가의 젊은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유산과 고역 때문에 스물다섯인데도 마흔은 돼 보이도록 지쳐있었다. 그리고 내가 본 그 순간 동안, 내가 익히 본 적이 없는 어둡고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나는 "우리가 느끼는 것하고 똑같이 그들이 느끼는 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리고 슬럼에서 자란 사람들은 슬럼밖에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건 우리의 오산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때 내가 그녀의 얼굴에서 본 것은, 까닭 모르고 당하는 어느 짐승의 무지한 수난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모진 추위 속에, 슬럼가 뒤뜰의 미끌미끌한 돌바닥에 꿇어앉아 더러운 배수관을 꼬챙이로 찌르고 있다는 게 얼마나 끔찍한 운명인지를, 내가 알듯 그녀도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도 그런 '경험'이 굉장히 강렬해 잊지 못하는 기억으로 남아있다.
대학 때 일했던 공장에서의 기억, 어릴 적 말 그대로의 산동네인 부산 감천 지역에서의 생활,
그리고 반딧불 교사회를 통해 경험한 대학교 뒷 산동네의 풍경.
이 모든 경험이 순진한(혹은 순진한척 하는) 먹물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이었던 것이다.
이 체험들이 간혹 잘못되면 다음과 같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그 경험이 당연하고 그들은 그것을 당연히 감내하는 '인종'이라고.
하지만 위에 인용한 글처럼, 그들 또한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광부들은 그런 것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기 쉽다. 확실히, 그들이 당신이나 내가 느끼는 것하고 똑같이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그래 왔고, 그만큼 단단한 근육을 갖고 있으며, 너무 놀라워서 섬뜩할 정도로 민첩하게 땅속을 오갈 수 있다. 나는 겨우 비틀비틀 갈 수 있는 곳을 광부는 고개를 숙인 채 크고 활기찬 걸음으로 '달리듯' 간다. 막장에서는 갱도 지주 주변을 개처럼 네 발로 뛰어다니며 일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걸 즐긴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나는 수십 명의 광부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모두 하나같이 '여행'이 고역임을 인정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자기네끼리 갱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면, '여행'이 언제나 중요한 화젯거리 가운데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광부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노라면, 다른 세상에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고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저 아래 누가 석탄을 캐고 있는 곳은, 그런 곳이 있는 줄 들어본 적 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이곳과는 다른 세상이다. 아마 대다수 사람들은 그런 곳 얘기는 안 듣는 게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세계는 지상에 있는 우리의 세계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나머지 반쪽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들이 중요하니 중요하게 여겨져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누군가는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치워버리는 게 더 쉬운 일이다.
탄광의 여건이 지금보다 열악했던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젊을 때 땅속에서 허리에 마구(馬具)같은 띠를 차고 두 다리를 사슬로 이은 채, 팔다리로 기고 광고를 끌며 일하던 할머니들이 아직도 더러 살아 있다. 그들은 임신한 상태로도 그런 일을 하곤 했다. 나는 심지어 지금도 만일 임신한 여자들이 땅속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석탄을 얻을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석탄 없이 살기 보다는 그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리라 생각한다. 어떤 육체노동이든 다 그렇다. 그것 덕분에 살면서도 우리는 그것의 존재를 망각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지적 무지함과 정돈되지 않은 삶을 '도덕적으로' 비난하기까지 한다.
냉정히말해, 이건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죄책감을 죄없는 이들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올 여름 폭우 때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감전사한 청소노동자에게 취한, 강남의 '중산층'들의 태도를 보라.
"너는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인간일 뿐이야", "그러게 열심히 좀 살지, 왜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해"
이제 '누군가는 해야할 일'에서 '무능력한 인간들이 해야할 일'로 심화된 것이다.
문제는 이런 심화논리(?)가 당사자에게도 효과적으로 주입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분노보다는 반성의 탈을 쓴 자책이 권장된다.
그러다 처음으로 가까운 주거지에서 실업자들을 보았을 때, 몹시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중 많은 사람들이 실직한 것을 '수치스러워'한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대단히 무지했으나 해외시장을 잃어 200만 명이 일자리에서 밀려났다고 해서 그 200만 명을 인도 도박판에서 패가망신한 사람들보다 더 잘못됐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지는 안핟. 하지만 그 당시에는 누구도 실업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실업이 계속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중산층은 여전히 "실업수당이나 타먹고 사는 게으름뱅이"란 말을 썼으며 "그런 자들은 원하기만 하면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노동 계급 자신에게도 스며들었다.
대량해고로 생긴 수많은 실직자들을 보며 되뇌인다. '저런 사람이 어디 한 둘이겠어', '다들 저래도 먹고 살잖아'
그러나 오웰의 지적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하나의 통계 단위로 보기는 쉽지 않다".
이 모든 문제는 '계급'에서 유래하는 것인데, 오웰은 그 계급이 단순히 경제적인 조건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경제적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문화와 교육의 문제가 훨씬 더 뿌리 깊은 것이며, 그것은 종종 유전되기까지 한다는 거다.
내가 보기엔 피부색에 대한 편견이 아무리 지독한 사람일지라도 그 점에 있어서는 같았다. 하인이 많으면 사람이 금세 게을러지기 마련인데, 내 경우엔 이를테면 옷을 입고 벗는 일을 버마인 소년에게 맡기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것은 그가 버마인이고 역겁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인 하인이었다면 그렇게 친밀한 일을 맡긴다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육체노동을 하고 난 사람에게 당연히 나는 땀냄새와 얼룩이 묻은 옷 따위를 보며 인상을 찡그린다.
이건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의 수입과 노동자의 수입차가 엄청나기 때문이 아니다. 이건 문화의 문제고 교육의 문제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회주의자 먹물들은 두 팔 벌려 노동자를 안아야만 한다고 외친다. 동정이 연대의 가장 큰 무기인냥 착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동정은 현실에 마주하자마자 확 겁에 질리게 되고, 결국 정 반대의 길로 치닫게 된다.
우리 모두 계급 차별을 맹렬히 비난하지만 그것이 정말 없어지기를 진지하게 바라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와 맞닥뜨린다. 그것은 모든 혁명적 소신이 갖는 힘의 일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은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내가 정말 그것을 원하는가를 물어야하고, 그것에 대한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다른 것은 별도로 치더라도, 영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높은 생활수준은 우리가 제국을, 그중에서도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열대 지역에 대한 지배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영국인이 상대적으로 안락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인도인 500만 명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여야만 한다. 그것은 참으로 못된 일이지만, 우리가 택시에 발을 들여놓거나 딸기 곁들인 크림 한 접시를 먹을 때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이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이런 말을 쓰곤 한다.
"실은 나도 보수 쪽에 가까운데..." 그리고서는 그 뒤에 (우리 사회에서) 보수가 아닌 말을 덧붙인다.
이건 정말 치명적인 자기 변명이다. "내 생각은 이러이러하지만 나는 보수니까 행동은 그렇게 하지 않아. 내가 욕먹을 이유는 없어."
이건 오웰이 표현한대로 "제국의 단물은 다 빨아들일 테세이면서, 제국을 지키는 사람들을 조롱함으로써 자기 영혼을 구제"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계급 차별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만으로는 아무 진전도 있을 수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없어지기를 바랄 '필요'는 있되, 그만한 대가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그 바람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지 오웰이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패배주의? 허무주의? 냉소주의?
그렇지 않다. 그가 사회주의자(사회주의가 아닌)들을 비판하는 바탕은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며,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이다.
때문에 그는 '정반합'이니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니 '투쟁'이니 하는 말들을 쓰는 것은 되려 좋지 않다고 말한다.
물론 앞에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어떤 운동을 그 신봉자들로만 판단한다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통념이 사회주의자는 따분하거나 비위에 안 맞는 사람이란 관념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는 점이다.
그런 것 따위에 영향을 받는 게 유치한 일일까? 아니면 어리석은 일일까? 심지어 경멸할 만한 일일까? 전부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일이 '실제' 벌어지고 있으니, 명심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해고당하는 꿈을 자주 꾸는 모든 은행원은, 파산 직전을 오가는 모든 가게주인은 본질적으로 같은 처지이다. 그들은 침몰하는 중산층이며, 그들 대부분은 세련됨이 그들을 띄워주는 부표인 양 세련됨에 매달린다. 그러니 구명기구를 던져버리라는 말부터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앞으로 몇 년 안에 중산층 가운데 상당 부분이 갑자기 우파 쪽으로 대거 몰려갈 위험이 상당히 크다. 지금까지 중산층의 약점은 단결하는 법을 전혀 못 배웠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을 경악하게 하여 우리에게 '맞서' 단결하게 만든다면, 악마를 길러내는 셈이다.
이상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봐야만 하고, 그 현실을 보는 것은 매우 간단한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한다.
최근 탈당을 앞두고 당게시판에 가서 짜증이 정말 가슴부터 밀려올라오던 것이 왜였는지, 명확한 답을 얻은 것 같다.
사회주의자들은 앞으로 큰 과제를 남겨두고 있다. 그들은 착취자와 피착취자를 가르는 선이 정확히 어디부터인지를 확실히 밝혀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도 본질을 고수하는 게 중요한데, 여기서 핵심은 수입이 적고 불안정한 모든 사람은 한 배를 탄 이들이며 한편이 되어 싸워야 한다는 점이다.
정말 간만에 줄을 벅벅 그어가며 본 책.
현장감 넘치는 묘사, 뼈아픈 자기성찰, 거기에 오지 오웰 특유의 유머감각과 필력이 더해진 이 책은 '필독서'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