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광고인이 인문학 강독회를 한다?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아니, 아닐 수도 있겠다. 저자는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사람이니까.
인문학 계열의 모든 교수들이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이 정도 수준의 강의를 할 수 있을까?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내 생각은 부정적이다.
전공 강의가 아니라 폭넓은 인문학, 그리고 그것을 너무도 쉽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이 책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가령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을 풀어내는 장면들.
우리 모두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해서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 알랭 드 보통
사실 상대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으면 사랑에 빠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대상이 있으면 그 사람의 어떤 한 면을 봅니다. 말한 마디의 한 컷, 그 사람이 나에게 얘기했던 한순간만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예쁘다, 멋지다 매력적이고 좋다고 생각한 뒤 나머지 부분은 다 상상으로 채우죠. 그 상상은 나의 욕망으로 채워집니다. 예를 들면 사랑에 빠질 나이에 누군가를 발견했는데 호감이 가면 상상을 하는 겁니다. 상대가 밥을 먹을 때는 이렇게 먹고, 지적 수준은 어느 정도일거라는 등 두세 가지만 확인한 후 상대에게 빠져들어요. 그리고 나머지는 다 나의 욕망으로 채운다는 말이죠. 그리고 실제로 상대가 내 욕망으로 채워진 부분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화를 내요. 내가 상상한 사람은 그러면 안 되거든요. 욕망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정작 사랑에 빠지고 연인이 되면, 너는 왜 그런 사람이냐고 말하죠. 내가 알던 너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면서요. 하지만 원래 그런 사람이었어요.
보통 권력이라는 건 '뭔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임에서만큼은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것', 그게 권력입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둘 중 영화를 보고 싶거나 여행을 가고 싶거나 뭘 더 하고 싶은 쪽이 상대를 더 사랑한다는 겁니다. 사실 덜 사랑하는 쪽은 상관이 없는 거죠. "하고 싶은 거 해, 뭘 하든 상관 없어"라고 적당히 무관심한 듯 물러서서 아무 의견을 내지 않아요. 그래서 사랑에서의 권력은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해도 되는 것이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영역에서와는 달리, 사랑에서는 상대에게 아무 의도도 없고, 바라는 것도 구하는 것도 없는 사람이 강자다. - 알랭 드 보통
저자는 '다독'에 대한 강박증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이 부분에 정말 많이 찔렸다. 빨리 읽어야할 책도 있지만 되씹어야할 책도 있는 법.
많이 읽는게 능사는 아니다. 책을 천천히 되씹는 즐거움을, 그리고 그 효과를 이 책이 잘 알려준다.
'인문학'이라고 하면 권위가 있어야 하고, 무거워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그 분야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래놓고는 같은 입으로 '인문학의 위기'니 '인문학의 대중화'니 이야기한다.
쉽게 접근한다는 것이 곧바로 경박을 의미하지 않는다. "광고장이가 왠 인문학이냐"라고 하고 싶다면 스스로 써서 증명해야 한다.
증명하지 못한다면 "허풍쟁이가 왠 인문학이냐"라는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는 거다.
어쨌거나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러나 매우 재미있는 인문학 강독회 강연록이다.
개인적으로는 다음 부분을 읽으며 '역사서술'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봤다.
그러니까 우리가 중요성을 부여해야 하는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게 만들고 들여다보기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신문이라는 설명입니다. 알랭 드 보통이 이에 대해 굉장히 시니컬하게 쓴 글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어떤 소설을 말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 베로나의 연인들의 비극적 결말. 연인이 죽었다고 오인 후에 청년이 목숨을 끊음. 그의 운명을 확인한 후 처녀도 자살.
- 젊은 주부가 가정불화를 이유로 열차 밑으로 몸을 던져 사망.
- 젊은 주부가 가정불화를 이유로 프랑스 지방 도시에서 비소를 음독하고 사망.
아시겠어요? 첫번째 기사는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두번째 기사는 <안나 카레니나>입니다. 세번째는 <보바리 부인>이고요. 정말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신문에는 이렇게밖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겨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드라마는 대단한 거죠. 그래서 신문을 읽으려면 하나부터 열까지 놓치지 않고 봐야한다, 그 안에 무궁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다는 뜻입니다.
근현대사 연구의 경우 신문기사를 꽤 많이 인용하게 되는데, 신문이라는 매체, 사료의 맹점을 많이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닌가?
그리하여 또 다시 신문기사와 똑같은 글을 생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왜 역사서술은 '인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는가?
그리고 다음 부분에선 '사건사'에 접근할 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다 싶었다. '미시적 우연이지만 거시적 필연'.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저는 이것이 톨스토이의 힘 같았습니다. 우리는 단호한 결정을 잘하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쉴까 영화를 볼까, 이 남자를 사귈까 말까, 중국집에 갈까 이탈리아 레스토랑에 갈까,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한단 말이죠. 이런 작은 결정만이 아니에요. 큰 결정할 때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일을 해야 할까, 이 사람과 결혼을 해야 할까, 집을 옮겨야 할까 등이 그렇죠. 책에서처럼 자살의 경우는 더욱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정말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니까. 그래서 더 충동적일 수밖에 없어요. 톨스토이가 아주 정확하게 사람 심리를 따라간 거죠. 안나의 자살은 충동적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음식 메뉴를 두고도 한참을 고민하는 게 인간인데, 하물며 자신의 목숨을 던지는 것에는 얼마나 갈등이 심하겠어요. 생각은 있지만 실천하기는 힘든 일이죠. 그러니까 하나 둘 셋, 준비해서 가는 게 아니라, 순간적으로 뛰어내리는 겁니다. 모든 자살은 충동적이에요. 다만 개연성은 있어요. 미시적 우연이지만 거시적 필연인 것이죠. 미시적으로는 충동적인 것이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늘 자살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안나도 마찬가지로 이미 자살을 생각했어요. 언젠가 내가 죽어버리면 브론스키가 고통을 받겠지, 하는 마음이었죠. 그런데 돌아보니 아이가 있고 사랑하는 연인 브론스키도 있어서 결정을 못 하고 생각만으로 지나가죠. 그런데 기차역에서 충동적으로 결정해버린 거예요.
깔끔하게 정리된 현실이란 없다. 결국은 서술자가 재구성하는 것이고, 독자를 설득해 나가는 것이다. 각자의 목적에 맞춰서.
그리고 그 설득에는 이성적 설명도 중요하지만 감성적 서술과 압축도 필요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