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이 말하는 식민지 조선
최길성 지음 / 민속원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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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이 포함되어 있어 다각도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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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홀로 죽는다 - 무연사회를 살아가기 위하여
시마다 히로미 지음, 이소담 옮김 / 미래의창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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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연사회란? 말 그대로 인연, 연줄이 없는 사회다.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지역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만이 남아버린 것이다. 이젠 가족마저도 '인연'이라는 말로 부를 어떤 끈끈함이 사라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죽음은 또다른 양태를 보인다.

 

   특히 자의식이 강한 청소년기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강렬하다. 누구나 겪어봤음직한 두려움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지금까지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기보다는 어떻게 죽게 될지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죽음 자체보다도 죽는 방식이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고독한 죽음을 두려워한다. 간병도 받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죽는 것이 두렵다. 이를 고독사라고 부른다. 고독한 사람은 죽은 뒤 며칠이 지나도 발견되지 못할 확률이 높다. 그러면 누군가 내 죽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며칠씩이나 버려진 것처럼 방치된다. 발견했을 때에는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송장 썩는 냄새도 진동할 터이다. 발견 시간이 늦어지면 백골이 도어 있을지도 모른다. (14~15쪽)

 

이 고독한 죽음을 일본에서는 '무연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저렇게 고독하게 죽어가는 모습은 아무래도 처참했던 모양이다. 무연사를 주제로 한 다큐가 NHK에서 방영된 후, 상당한 반영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새로운 방식의 모멘토 모리랄까. 평생 죽음을 잊고(혹은 잊으려하며) 살고 있는 현대인으로서는 이런 방식으로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다. 저자는 무연사회의 반대편에 유연사회를 놓고 설명을 시작한다.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유연사회가 어떻게 무연사회가 되었는지 설명하고, 결국 무연사회가 된 것은 모두 우리(일본인)가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연사회라고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연사회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이며, 고독사 또한 죽기 전까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온 것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나쁠 것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때문에 저자에게 있어 제사나 장례식은 크게 의미가 없는 행사다. 지금처럼 성대하게(?) 치러지는 것은 낭비에 가깝다는 것이다.

 

  관혼상제의 '제'는 원래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를 뜻했다. 조상을 어떻게 공양하는가가 '제'의 원래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관혼상제입분>)에서는 '제'를 연중행사로 취급했다. 본래 뜻과는 조금 다르다. 다도의 세계에서는 계절 변화를 다도에 접목시키는 방법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한 다도 종가 출신 저자였기에 제사를 연중행사로 연결할 수 있었다. 저자는 연중행사가 사회생활의 윤활유가 된다고 보았다. (156쪽)

 

  가족이나 친척이 있더라도 고인이 죽기 전까지 의료나 간병으로 상당한 돈을 썼다면 비싼 장례비용을 감당할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일본의 장례비용은 비싸다. 졸저 <장례식은 필요 없다>에서 서술했듯이 평균적인 장례비용은 약 231만 엔(한화로 약 3천만 원)에 달한다. 한편 관혼상제 상조회인 '쿠라시노토모 생활의 친구'가 10년 만에 시행한 2010년 조사에 따르면 평균 장례비용은 242만~243만 엔이었다. 10년 전인 1999년 조사와 비교하면 124.4만 엔이나 줄었다. 물론 여전히 장례비용은 비싸다. 그러나 10년 만에 2/3 수준으로 줄어들었다는 점은 장례의 간소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조사에 따르면 조문객 수도 줄어드는 추세이며, 회사 동료가 장례식을 도우러 나서는 경우도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176쪽)

 

제사나 장례식의 성격이 시대나 사회에 따라 바뀔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장례식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학문적 영역을 벗어난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책의 성격이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인류학자'인 저자를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인연이나 사회의 관습에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걸 느낄 수 있다. 뒷부분에 그 이유에 대한 약간이 증거가 나오는데, 저자는 오옴진리교 관련 저서 때문에 연구직도 박탈당하고 건강도 나빠지는 등 개인사적으로 고초를 겪었으며 함께 살고 있는 가족도 없다. 이 개인사가 그의 저서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개인의 연구나 이론 등이 개인사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르나, 이 책의 서술들은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그만큼 저자의 생각이나 관점이 이제 굳어질대로 굳어졌거나 혹은 그의 서술방식이 그 모든 것을 독자에게 그대로 드러낼만큼 투박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쨌거나 현재 일본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고할만 하다. 그리고 이 분위기가 한국이라고 별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더욱 생각해볼 문제다. 논문 관련해서 살펴볼만 했던 점은, 화장의 경제성(실은 경제논리). 개인적으로도 이 부분이 결코 작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절대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이 부분을 빼놓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토장일 때에는 마을 공동묘지에 유체를 묻으면 끝이었다. 따로 묘를 세우더라도 집 근처에 세웠기 때문에 일부러 성묘를 하러 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 화장이 보급되면서 반드시 유골이 남기 때문에 어딘가에 안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시 말해 모두 묘지가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일본은 세계에서 화장이 가장 보편화한 나라라고 한다. 99퍼센트에 달하는 화장률을 자랑한다. 화장이 보편화한 이유로 공중위생 문제를 꼽을 수 있긴 하지만 이보다도 토지부족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도시에는 토장을 할 만한 땅이 없다. 마을 공동묘지처럼 마을 사람이기만하면 누구나 무료로 묻힐 만한 땅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183~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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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 첨단 의학 시대에 우리가 알아야 할 죽음의 문화
미하엘 데 리더 지음, 이수영 옮김 / 학고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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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과 같은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어떻게 죽고 싶은가? 아마 그 누구도 처참하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평화롭고 고요하게 고통없이 품위를 유지한채로 죽음을 맞고 싶을 것이다. 오늘날 병실에서,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가? 

 

  생명을 아주 짧은 시간 연장할 수 있다 해도,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치료를 하려 드는 것이 의료계의 일상적인 형태다. 그러나 때로는 실날 같은 가능성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불행을 안겨준다. 다른 말로, 의학적으로 가능한 것과 환자의 행복 중에서 언제나 환자의 행복을 우선해야 하는데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 (25쪽)

 

일말의 가능성만 있어도 치료를 하려 하는 것은 의사의 당연한 책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오히려 고통만을 늘려주는 의료행위일 수 있는 호흡기를 사용하고 영양보충 튜브를 삽입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도 환자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말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의학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의사들의 책임회피 때문이다. 

 

이는 환자와 가족들, 그리고 의사 자신이 자신이 가망 없는 상태에서도 '치료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고 의료상 필요한 행동을 했다며 자위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하면 환자를 포기하지 않고 '치료 행동주의'를 실천했다는 얘긴데, 여기에는 의사와 가족들의 양심을 진정시키는 이점도 있다. 그리하여 관련자들은 죽어가는 사람에 대한 책임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된다. 임종을 맞는 환자에게는 어느 때보다 가족의 친밀함과 애정이 필요한데도 말이다. (82~83쬭)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들 사이에 폭넓게 퍼져 있는 다음 모토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그러면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언제나 올바른 쪽에 서 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자세히 살펴보면 환자의 행복보다는 의사의 행복을 염두에 둔 이러한 의료 행위 자체가 윤리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216쪽)

 

나는,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환자에게 고통을 연장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할까?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는 저자는 이제 의료가 완치 치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완화 치료'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병 자체가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는 거다. 의료 행위는 환자가 고통을 느끼지 않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시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병을 치료하는 이유는 병 자체가 절대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환자가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병은 사라졌지만 고통만이 가득해진 삶이라면 그것을 치료라고 할 수 있는가? 게다가 많은 경우, 그 병조차 사라지게 하지 못한 채로 환자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방치'한다.

 

의대생들의 교육 과정이나 의사들의 일상적인 의료 행위에서는 개별 장기들이며 장기 체계의 기능 회복에 중점을 둔다. 즉 심장박동조율기 이식, 폐 기능 회복, 신장 투석, 담석 등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한 인간으로서 환자가 느끼는 행복은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 (40쪽)

 

한쪽에는 완치 의학과 급성질환 치료 의학이 있고, 다른 쪽에는 완화의학과 만성질환, 노인 간병이 있다. 이 사이에서 발생하는 재정 분배의 뚜렷한 불균형이야말로 이런 사태의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균형은 젊음에 대한 열광과 노인 없는 세상에 대한 숭배에 빠진 정치적, 사회적 실상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99쪽)

 

물론 이 '행복한 삶'에는 '행복한 죽음'도 포함된다. 여기서 또 한 가지의 문제가 발생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와 현대의학의 시선이다. "치료 수단이 끊임없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그와 더불어 실패의 위험도 커졌다.(29쪽)"는 저자의 지적대로, 현대의학은 치료가 가능한 범주를 끊임없이 넓혀오면서, 이젠 죽음 또한 하나의 '질병'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죽음은 의학의 패배를 의미하며, 그 자체로 불쾌한 것이 되었다. "과학적 의학의 초창기만 해도 삶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던 죽음이 이제는 의학의 실패로, 심지어는 통계상의 방해 인자로 여겨지는 것이다.(263쪽)" 애초에 이 불가능한 싸움을 시작하게 된 것은 현대 의학의, 그리고 현대인들의 오만 때문이다.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물론 그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을 수야 있겠지만)으로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상, 의사들은 끝없이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피할 수는 없는데 싫기만 하니 눈돌려 외면할 밖에. 또 그러하니 '죽어가는' 환자는 이미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의료행위의 목적이 단순히 질병과 싸우는 것일까? 우리의 발상 자체를 바꿀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 의료계와 대중은 거의 매일 새 진단법과 치료법의 등장에 환호하고 언론 매체들은 기적이라며 대서특필한다. 의사들은 이런 시대에 의료 행위의 실패와 불가능성 문제를 거론하는 자체를 불쾌하고 부적절한 행위로 여기는 듯하고, 어떤 의사들은 심지어 이를 약점이나 무능의 징표로 받아들인다. 의사는 환자를 포기했던 경험을 결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개념들의 의미를 포괄하는 것은 무엇일까? 병이 일정한 단계를 넘어서면 의사가 치료cure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의사의 관심, 배려, 보살핌care은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 (38쪽)

 

(기술만 더 발전한다면) 모든 질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오만함은 하늘을 찌르면서, 늙어가고 죽어가는 이들에게는 철저하게 무관심하다. 늙음과 죽음은 의료 행위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는 거다. 이런 태도가 단순히 병원 안에서만 벌어지는가? 병원 밖도 마찬가지다. 젊음만을 찬양한다. 하다 못해 공익 광고에 등장하는 노인들도 모두 힘차게 수영을 하고 러닝머신 위를 달리는 '젊은이'들이다. 마치 모든 이들이 영원히 젊고 또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늙음과 죽음은 어느 누구나 필연적으로 마주해야할 숙명이다. 그것은 죄악도 아니며 전염병처럼 격리 수용해야할 대상도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늙음과 죽음을 애써 외면하고, 그것에 마주해 있는 사람들, 정말로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 못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그렇게 관심을 끊어버리면서 늙어가거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사회적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이제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육체적인 죽음보다 사회적인 죽음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의학의 발전과 젊음에 대한 찬양이, 인간이 죽음으로 겪는 고통의 길이를 더욱 늘여 놓았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죽음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어야할 인생의 마지막 부분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죽어감은 모든 피조물 특유의 과정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모든 사람에게 제2의 본성이 되어야 한다. 죽음 자체는 결코 생물학적 재난도 의학적 실패도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있었고, 가장 훌륭한 의학적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불가피하게 찾아오는 생명의 소멸이다. 의학이 가능한 모든 수낟을 동원해서 막아야 할 것은 때 이른 죽음, 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죽음, 고통스럽고 끔찍한 죽음이나 너무 질질 끌면서 다가오는 죽음이다. (325~326쪽)

 

죽음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그리고 의학이 죽음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바꾼다면, 우리는 주변 사람과 의학의 도움으로 용기-나의 죽음을 내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얻어 더 평온하고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다운 죽음'을.

 

  N 부인과 나는 처음부터 무언의 약속을 했다. 우리는 알렉산더의 죽음이 온전히 그의 일이 되게 하고 싶었다. 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지휘하는 사람은 알렉산더 자신이어야지 우리여서는 안 된다. (183쪽)

 

실제 의사가 쓴 책이라 굉장히 많은 실례가 담겨 있고 그래서 더 실감이 난다. 완화 치료라는 범주는 굉장히 넓기 때문에 안락사나 노인복지에 대한 부분도 다뤄지고 있다. '임상'의 필요성과 의미가 확실히 느껴질 수 있는 책이다. 저자의 주장대로 임상은 어떤 차가운 통계나 패턴을 이끌어내기 위함만이 아니라, 의사의 경험을 쌓게하고 궁극적으로는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마음의 평화 등을 운운하며 '웰 다잉'을 말하는 책들은 꽤 많지만, 그 또한 모든 책임을 죽음에 직면한 한 개인에게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태도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사회의 시스템 또한 중요하다.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복지가 잘 되어 있을 거라고 예상되는 독일에서 쓰여진 책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저자의 외침이 독일에만 해당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병에 걸린 사람이 아니라 병 자체를 중심에 두는 의술을 버려야 한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생명을 유지시키려는 태도에서 벗어나라! 환자에 대한 '공감'이 생소한 말이 된 의료 행위에서 벗어나자! 죽어가는 환자를 의료 능력의 실패와 동일시하는 잘못된 생가겡서 벗어나자! 자신의 유한성과 대면하기를 꺼리는 의사들의 태도를 버리자! 대신 병든 장기가 아니라 병든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되는 의료의 길로 나아가자! 의미 있는 생명 연장과 고통스러운 죽음의 연기를 구분하는 의료 행위를 실천하자! 의술의 중심 과제는 완화적 치료이고, 완치는 하위 과제라는 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자! 마음이 움직이는 의사가 되자! (252~253쪽)

 

이 책은 앞서 얘기했듯 독일 의사가 쓴 책이기 때문에 다소 생소한 부분도 등장한다. 특히 '사전의료지시서' 같은 것은 정말 생소한데, 독일에서는 꽤 일반화되어 있는 모양이다. 사전의료지시서라는 것은 자신이 의사표현을 하지 못할 정도로 위급하고도 회복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경우, 비인간적이고 무의미한 특정 치료 행위를 거부하겠다는 의사표현을 미리하는 것이다. 이 지시서를 작성할 때의 조건이 꽤 상세하고 까다롭기 때문에, 이 지시서가 있을 경우 힘든 상황에서 의사와 환자의 가족들이 어떤 결정을 하기가 훨씬 손쉬워진다. 이런 부분도 참고하여 법적, 제도적으로 보완을 해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이 리뷰는 서평 이벤트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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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순환선 - 최호철 이야기 그림
최호철 지음 / 거북이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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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컷의 그림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압축되어 들어가 있다. '여백의 미'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태도의 그림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호철이 그리는 그림의 시선이 그 높이가 높지 않고 항상 현장에 있음을 감안한다면, 이 막대한 양의 정보를 어안렌즈를 사용하여 사진 찍듯 그려내는 그의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진 찍는 일의 어려움을 가볍게 보는 바는 아니지만, 사진처럼 사실 그대로를 담아내려는 하이퍼 리얼리즘과는 완전히 다른 지점에 서있다. 그대로의 풍경을 볼 것이라면 을지로 순환선을 타고 창밖을 내다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 일상적인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다. 그의 그림에서는 순간을 담아내기 위한 정성이 빛난다기보다는, 조그마한 한 구석을 바라보는 시선의 따스함이 빛난다. 이것이 바로 최호철 스스로가 말하는 '본 걸 그린다'의 의미일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다 할지라도, 그의 그림은 이제 하나의 기록이 될 것이다. 평론가 박인하는 만화라기 보다 회화에 가까워지는 그의 그림에 아쉬움을 표하지만, 모든 만화가가 만화처럼 그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박인하가 표하는 아쉬움, 그것이 최호철만이 가질 수 있는 강점이기도 하다. 최근 창작과 비평 블로그에서 전국의 도시나 시골의 풍경을 담고 있는데, 이 또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프로젝트다. 경기도 광주시 송정동을 그려낸 그의 그림을 보았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바로 이런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http://blog.changbi.com/lit/?p=3450&cat=12

 

도시의 전경을 그린 것만이 아니라 삶의 현장을 스케치하듯 따스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소장가치가 충분한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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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들 : 총을 든 사제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이성엽 옮김 / 씨네21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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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든 사제들'이란 부제가 달린 그래픽 노블. 군부정부에 대항하던 니카라과의 게릴라를 다루고 있다.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책의 제목과는 달리 꽤나 중층적으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계급의 문제, 민중신앙의 문제, 그리고 동성애. 책의 표지나 제목, 부제들과는 달리 오히려 동성애에 가장 큰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책을 다시 뒤적거리면 그런 코드들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책의 제목에 선입견을 가지고 보면 놓치지 쉬운 부분들이다. 혁명 이야기에 왠 동성애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무엇을 위해 혁명을 꿈꾸는가는 사실 그리 단순하지 않다. 2부에서 그래픽 노블 특유의 자세한 묘사가 정글과 정말 잘 어울려 '아름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익숙하지 않은 구성을 보여주면서도 결코 무리하지 않는 결말, 아름다운 그림체가 어울려 있는 수작. 콘셉시온이 라이터를 켜는 순간의 장면은 잊혀지지 않을 장면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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