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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 하면 효과가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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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
김기봉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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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단어다. 하지만 이 단어가 근대의 발명품이며 더군다나 일본 제국주의의 산물임을 아는 사람은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비해)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아시아라는 단어는 자주 쓰이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더욱 강조되는 추세다. 물론 한국, 중국, 일본 각각의 온도차는 존재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동아시아를 '공동체'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 이 책의 저자가 지적하는대로, 문제는 '당위와 현실의 거리'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 담론이 출현한 지도 벌써 15년 이상이 지났다. 하지만 동아시아란 아직 현실이 아니라 당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계속에서 문제는 당위와 현실의 거리다. 동아시아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한, 중, 일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국가가 일치된 의견이지만, 그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될지에 대해서는 동상이몽을 하고 있다. (6~7쪽)

 

저자의 전공은 서양사이지만, 역사에 대한 여러가지 담론에 관심이 넓은 학자다. 사실 '국사', '동양사', '서양사' 따위의 분류가 너무나도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의 이런 설명은 불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서양사를 전공한 학자가 이런 주제로 책까지 낸다는 것은 익숙한 일은 아니다. 어쨌거나 저자는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이 책에서 '동아시아'를 키워드로 몇 가지 메타비평을 시도하고 있다. 동아시아 담론의 기원을 살펴보고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지, 그리고 역사교육과 '국사' 서술에 있어 동아시아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짚어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느 메타비평이 그렇듯이, 명확한 결론(혹은 저자의 주장)을 찾아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 그나마 색이 명확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교육 분야에서도 '시민교육'을 지향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 '시민'이 무엇인지도 여전히 불명확하다. 또 현재의 '국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에는 백 번 공감하지만, '국사에서 동아시아사로'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거리기가 망설여진다.

 

실은 이 책을 사놓은지는 꽤 되었는데, 이번에 일본에 갈 기회가 생겨 가지고 갔었다. 마침 일본에서 있었던 학술회의의 주제가 '동아시아와 한일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학술회의가 진행될수록, 그리고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동아시아'에 대한 '당위'에 물음표만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이젠 아무리 '동아시아'를 강조하는 입장이라도 단순히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를 당위성으로 꼽지 않기 때문에, 여기저기서 '공통점'을 찾으려 안달인 걸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문화적 공통점, 사상적 공통점, 등등. 국사시간에 배웠던 '한자문화권', '불교', '유교', '율령' 따위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동아시아'를 지향해야한다는 말인가? 이런 '공통점'이 없다면, 우리는 공동체를 지향할 필요도 없고 또 만들어 낼 수도 없다는 말인가?

 

나는 오히려 지금의 정치적/경제적 필요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런 부분을 언급하면 '곡학아세'니 '시류에 영합'한다는 등의 말이 나올테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곡학아세를 피하고 싶다면, 이런 민감한 부분을 먼저 드러낼 필요가 있다. 게다가 공생을 위한 '필요'가 뭐 그리 부끄럽단 말인가? 때문에 나는 '공통점'보다 오히려 '차이점'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본다. 국가 사이의 여러가지 차이를 찬찬히 살펴보고 조명하는 가운데, 현실에서 타협과 협력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를 쓰고 같은 점을 찾아내면서 "그래, 우리는 역시 공동체였어"라고 끼워맞추기 보다는, 차이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인정해 나가는 가운데서 또 다른 시작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공통점만을 강조하고 그것으로만 출발점을 삼으려고 한다면, 국사가 동아시아사로 된다고 하더라도 별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책의 분량상, 방향성이 조금 애매한 부분이 있는 책. 동아시아 담론 자체를 학문적으로 다루는 것인지, 아니면 '동아시아'를 새롭게 이용할 전망을 제시하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물론 이런 부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 더 깊이 있는 논의는 불가능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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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의 과제
요한 호이징하 지음, 김원수 옮김 / 아모르문디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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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호모 루덴스' 등으로 국내에서도 유명한 대가 요한 호이징하의 소품. '문화사의 과제'라는 짧은 논문과 '역사개념의 미적 요소에 대하여'라는 대학교수 취임 연설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시 대가의 글답게, 후학들에게 잊기 쉬운 원칙을 상기시켜 준다. 뿐만 아니라 문화사가 왜 중요한지에 대한 '믿음'을 차분히 설명한다.

 

역사적 통찰력의 발전은 원사료의 비판 검토한 후에 행해지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자료를 발굴해내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32쪽)

 

질문이 명료하게 제기되지 못하는 한, 어떤 명료한 대답도 나올 수 없다. 질문이 모호하다면 그 대답은 기껏해야 질문만큼이나 모호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학의 결함은 연구대상의 과도한 전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질문의 모호성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34~35쪽)

 

역사적 관계(문맥)의 개념 속에 덧붙여지는 다양한 가치적 특성을 지닌 새로운 이해 요소들은 꽃다발 속에서 새롭게 발견된 꽃들과 같다. 그리고 그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꽃다발 전체의 외관을 바꿔놓는 것이다. (61쪽)

 

요컨데, 역사학에서 체계적 원리들이 갖는 중요성을 충분히 인정할지라도, 역사연구의 1차적 임무는 개별 사건들을 그 자체로서 탐구하는 것이지 어떤 일반적 범주의 유형이나 특별한 사례로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52쪽)

 

100년도 더 전에 씌여진 글이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문제제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현실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호이징하 특유의 성찰, 통찰이 100년을 넘어서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문화사를 위협하는 어떤 위험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역사가 자신이 전지전능한 조물주처럼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러한 유혹적인 생각에 도사리고 있다. …(중략)… 역사의 확고한 존재근거는 그 애매모호한 성격, 즉 역사는 규범적인 학문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 된다고 하는 바로 그 사실 속에 놓여 있다. (120~121쪽)

 

진지한 역사가들이 그 무엇보다 두려워한 것이 바로 그들의 작업이 예술로 치부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람프레히트가 그것에 반대한 최초의 인물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가 모든 점에서 과학의 규준에 들어맞지 않는다고 해서 또 예술과의 연관성이 뚜렷하다고 해서, 역사를 예술의 하나로 취급해야 할까요? 이 문제는 수차례 제기되고 수차례 답변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동의하고 어떤 사람들은 반대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간과되어온 제3의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말하자면, 과학과 예술에 대한 정의가 오히려 자의적일 수 있으며, 그 둘이 겉보기처럼 그렇게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 그것입니다. (153쪽)

 

여기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의 대중화에 대한 고민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이 고민은 요즘도 어딜가나 제기되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대가의 글을 읽으며 좌절도 하게 되지만, 왠지 위로를 받는 느낌이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런 고민을 모자란 우리들만 하는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역사와 과학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물론 호이징하는 아무리 과학의 시대라할지라도 역사가 과학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한다. 그것은 분명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그보다 후배 학자라고 할 수 있는 존 루이스 개디스보다도 더 현대적인 관점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http://bloody_wings.blog.me/70114328126?Redirect=Log&from=postView) 객관과 과학이 중요한 요소임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역사학에 있어 '직관', '통찰'이 중요하다는 말을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적 성찰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곧장 강력한 지적 작업을 생각하고, 가장 단순한 역사적 구성에조차 이성적 기능과 직관이 함께 작용하고 있음을 쉽게 망각하곤 합니다. 오직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만 역사적 해석을 순수하게 이성적인 '설명'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적 해석은 오히려 "우리의 감성적 힘을 그 주제에 완전히 집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슈프랑어가 썼듯이, "실제 과정은 분석될 수 없"으며, "역사가의 예상과 해석과 육감은 신비로운 직관에 필적할 만한 것"입니다. (160쪽)

 

어떤 역사적 인물을 되살려내기 위해 얼마만큼의 사실을 필요로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오직 역사가의 직관력뿐입니다. (175쪽)

 

인상 깊었던 것은, 한 교수의 취임연설(은퇴연설이 아니다!)이 이렇게 깊은 통찰과 적절한 표현을 통해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가 33살-_- 때 쓴 글이란 점이 또 나를 좌절하게 만들지만, 어쨌거나 대가의 글은 곱씹어 읽을 수록 맛이 난다.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것이 역사가의 일상적 임무는 아닙니다. 우리는 곧 이론의 파노라마에서 머리를 들어 비판적 연구라는 비천한 작업에 뛰어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얼마나 광대하고 또한 아름다운지를 항상 기억합시다. 때대로 우리는 힘겨운 작업의 압박에서 벗어나 쉬면서, 우리의 힘은 한계가 있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음을 새삼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함을 다시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빛에 의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더 깊이 이해하면 할수록, 객관적 진리라는 이상에 자기 마음의 눈을 보다 단단하게 붙들어 맬 수 있는 존재, 역사가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182~183쪽)

 

동료나 후배 역사가들에게 이만큼이나 가슴을 뛰게하는 선동문이 있을까? 역사는 과학 그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어찌보면 기득권을 포기하는 듯한 발언을 이보다 더 이상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 있을까? 혹시나 오랜 후에 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가 생긴다면, 이 연설문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학문적 필요 때문에 차가운 머리로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결국 뜨거운 가슴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던 나의 체험이 모든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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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란 무엇인가 역사도서관 교양 3
피터 버크 지음, 조한욱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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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문화사'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말이 되었지만, 정작 연구자 스스로 자신이 문화사를 전공하고 있다고 표방을 한다거나 문화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작을 내놓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아직까지 문화사는 가볍거나 부수적인 분야로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사실상은 그 가볍고 부수적인 문화사를 다룬다는 것이 결코 녹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녹녹치 않은 작업이 왜 그러한가를 살펴보기 위해, 피터 버크는 고전적인 문화사가들의 관점부터 훑어간다. 고전적인 문화사에 대한 기존 역사가들의 비판 같은 것도 함께.

 

   고전적인 문화사가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두 번째 비판은 문화적 동질성을 과대평가한 반면 문화적 충돌은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 가운데 기억해야 할 정도로 신랄한 것은 에드워드 톰슨의 한 논고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 그는 문화를 '두루뭉수리 용어'(clumpish term)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차이를 감추고 "우리를 부추겨 지나친 동의와 전체론적(holistic) 관념으로 향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사회 계급의 문화들 사이의, 남성과 여성의 문화들 사이의,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다른 세대의 문화들 사이의 차이에 선이 그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50쪽)

 

언제나 그렇듯 비판자들에게 '문화'라는 용어는 좋은 떡밥이다. 그들에게 '문화'라는 건 애매모호의 극치일테니까. 피터 버크는 이런 관점과 비판이 '고전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이것은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보인다. 이 큰 함정을 벗어나려면, 좀 쿨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가 두루뭉실하다는 비판에 발끈해서 문화를 이리저리 정의하려고 들 것이 아니라, 문화가 두루뭉실하다는 사실을 문화사가 스스로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문화가 그렇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래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굳이 이런 비판에 발끈할 필요가 있는가? 그런 도발에 넘어갈 필요가 없이, 그 두리뭉실한 것의 다양한 양태를 구체적인 연구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 도중에 경제사가나 사회사가, 정치사가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즐겁게 이용하면 그만이다.

 

여러 반발과 비판이 있음에도 문화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문화사에 대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예측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 문화적 만남이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문화적 만남을 이해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194쪽) 때문에 최근의 연구에선 '문화적 번역'과 같은 개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이한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어떤 번역(여기에는 의도적/비의도적 '오역', '번역거부' 등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 중요하다)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두 문화의 '공통점'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이점'을 인지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beautiful'이란 단어를 번역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1) 이 단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군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2) 그 단어들 사이에서 잘라내서 버리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이미 (1)의 과정에도 잘라내서 버리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되지만 '귀엽다'라는 말은 좀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살아남은 '아름답다'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 (2)의 과정에 더 주목해서 '잘라내고 버리는' 그 나름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화적 차이만이 아니라 계급적/정치적 차이 등의 관점도 동시에 포함되어야 한다. 문화사가 말처럼 가볍거나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매력이 있는 이유도 또 바로 여기에 있다.

 

관점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복합적인 내러티브는 앞서 말한 파편화의 경향을 거부하는 동시에 충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한 방편이다. (201쪽)

 

그것에 더하여 나는 '클리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동시대의 예술작품 등에 대한 '클리셰'라는 평은 창조성의 결여로 여겨지지만, 역사연구, 문화연구에 있어 클리셰만큼 중요한 것을 찾기는 힘들다. 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을 이해하려고 할 때 클리셰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그 클리셰 자체를 분석함으로서 당시 사회와 인간들의 사고체계를 알아낼 수 있고, 클리셰에서 벗어난 유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문화권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관행이나 규칙을 고려하는 접근으로서, (명예로운 귀족, 정숙한 아내 또는 영감을 받은 예술가와 같은) 어떤 구실을 기준으로 자아를 인식하거나 (거지에서 부자로의 성장 또는 죄인의 회개나 개종과 같은) 어떤 플롯을 기준으로 삶을 인식하는 관행이나 규칙을 말한다. (150쪽)

 

나를 포함한 젊은 학자들에게 문화사는 여전히 매력있는 분야이지만, 본격적으로 그것을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럴 때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역사의 역사, 즉 '사학사'를 고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역사연구일 뿐만 아니라,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또 해당분야의 역사를 통해 특정 관점의 약점과 장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피터 버크의 이 저작은, 이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할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게다가 분량이 과도하게 많다거나 난이도가 너무 높지도 않기 때문에, 하루 정도 시간을 내면 충분히 소화가 가능하다. 문화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틀리의 말,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다르게 행동한다"(77쪽)라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아니, 이것은 비단 문화사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가가 기억해야할 말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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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춘 & 박은옥 - 11집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박은옥 외 노래 / 유니버설(Universal)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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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뭍어 더 많은 울림을 남기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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