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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사란 무엇인가 ㅣ 역사도서관 교양 3
피터 버크 지음, 조한욱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턴가 '문화사'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말이 되었지만, 정작 연구자 스스로 자신이 문화사를 전공하고 있다고 표방을 한다거나 문화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저작을 내놓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아직까지 문화사는 가볍거나 부수적인 분야로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사실상은 그 가볍고 부수적인 문화사를 다룬다는 것이 결코 녹녹치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녹녹치 않은 작업이 왜 그러한가를 살펴보기 위해, 피터 버크는 고전적인 문화사가들의 관점부터 훑어간다. 고전적인 문화사에 대한 기존 역사가들의 비판 같은 것도 함께.
고전적인 문화사가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두 번째 비판은 문화적 동질성을 과대평가한 반면 문화적 충돌은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 가운데 기억해야 할 정도로 신랄한 것은 에드워드 톰슨의 한 논고에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 그는 문화를 '두루뭉수리 용어'(clumpish term)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차이를 감추고 "우리를 부추겨 지나친 동의와 전체론적(holistic) 관념으로 향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러 사회 계급의 문화들 사이의, 남성과 여성의 문화들 사이의, 같은 사회에 살고 있는 다른 세대의 문화들 사이의 차이에 선이 그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50쪽)
언제나 그렇듯 비판자들에게 '문화'라는 용어는 좋은 떡밥이다. 그들에게 '문화'라는 건 애매모호의 극치일테니까. 피터 버크는 이런 관점과 비판이 '고전적'이라고 표현했지만, 적어도 한국에서 이것은 고전적인 것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것으로 보인다. 이 큰 함정을 벗어나려면, 좀 쿨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화'가 두루뭉실하다는 비판에 발끈해서 문화를 이리저리 정의하려고 들 것이 아니라, 문화가 두루뭉실하다는 사실을 문화사가 스스로가 인정할 필요가 있다. 문화가 그렇다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래서 매력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굳이 이런 비판에 발끈할 필요가 있는가? 그런 도발에 넘어갈 필요가 없이, 그 두리뭉실한 것의 다양한 양태를 구체적인 연구로 보여주면 되지 않을까? 그 도중에 경제사가나 사회사가, 정치사가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즐겁게 이용하면 그만이다.
여러 반발과 비판이 있음에도 문화사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자명하다. "문화사에 대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예측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 문화적 만남이 중요성을 갖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의 문화적 만남을 이해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194쪽) 때문에 최근의 연구에선 '문화적 번역'과 같은 개념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상이한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어떤 번역(여기에는 의도적/비의도적 '오역', '번역거부' 등이 모두 포함된다는 것이 중요하다)이 일어나고 그 결과는 어떠한가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해진 것이다. 두 문화의 '공통점'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차이점'을 인지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예를 들어 'beautiful'이란 단어를 번역한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1) 이 단어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군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2) 그 단어들 사이에서 잘라내서 버리는 작업을 하게 될 것이다(이미 (1)의 과정에도 잘라내서 버리는 작업이 포함되어 있다). '아름답다'라는 말은 되지만 '귀엽다'라는 말은 좀 결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 살아남은 '아름답다'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1), (2)의 과정에 더 주목해서 '잘라내고 버리는' 그 나름의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화적 차이만이 아니라 계급적/정치적 차이 등의 관점도 동시에 포함되어야 한다. 문화사가 말처럼 가볍거나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매력이 있는 이유도 또 바로 여기에 있다.
관점의 다양성을 표현하는 복합적인 내러티브는 앞서 말한 파편화의 경향을 거부하는 동시에 충돌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한 방편이다. (201쪽)
그것에 더하여 나는 '클리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동시대의 예술작품 등에 대한 '클리셰'라는 평은 창조성의 결여로 여겨지지만, 역사연구, 문화연구에 있어 클리셰만큼 중요한 것을 찾기는 힘들다. 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을 이해하려고 할 때 클리셰는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다. 그 클리셰 자체를 분석함으로서 당시 사회와 인간들의 사고체계를 알아낼 수 있고, 클리셰에서 벗어난 유형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문화권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관행이나 규칙을 고려하는 접근으로서, (명예로운 귀족, 정숙한 아내 또는 영감을 받은 예술가와 같은) 어떤 구실을 기준으로 자아를 인식하거나 (거지에서 부자로의 성장 또는 죄인의 회개나 개종과 같은) 어떤 플롯을 기준으로 삶을 인식하는 관행이나 규칙을 말한다. (150쪽)
나를 포함한 젊은 학자들에게 문화사는 여전히 매력있는 분야이지만, 본격적으로 그것을 시작하기는 쉽지 않다. 그럴 때 하나의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다. 역사의 역사, 즉 '사학사'를 고찰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역사연구일 뿐만 아니라, 자기성찰의 기회를 마련해준다. 또 해당분야의 역사를 통해 특정 관점의 약점과 장점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피터 버크의 이 저작은, 이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할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준다. 게다가 분량이 과도하게 많다거나 난이도가 너무 높지도 않기 때문에, 하루 정도 시간을 내면 충분히 소화가 가능하다. 문화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틀리의 말,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에서 사람들은 다르게 행동한다"(77쪽)라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이다. 아니, 이것은 비단 문화사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가가 기억해야할 말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