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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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축이 결정되었다고 현수막을 내걸면서 자기가 사는 집과 동네가 헐리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가풍이고 뭐고 없다. 그냥 적당히 살다가 비싼 값에 되팔고 또 다른 투기 현장 속으로 찾아가서 삶을 맡기면 그뿐이다. (57쪽)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꽤 많은 집에 살아봤다.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아이시절을 제외하더라도, 우리집은 지금 부모님께서 사시는 집까지 하면 6번의 이사를 했다. 부모님께서 4번째 이사에서 어렵게 집을 마련하신 덕분에 10년 이상을 한 곳에서 살았던 때를 제외하면, 꽤 이사를 많이 다녔던 셈이다. 꼭 그 뿐만이 아니라 대학 입학 이후 시작된 나 혼자의 이사도 꽤 많았다. 비록 하숙집이라 하더라도 대학시절 살던 곳도 4번을 옮겼고, 제대를 하고 대학원에 입학한 후 결혼생활까지 6번의 이사를 했다. 지금 사는 곳도 전세이니 아직 내 인생의 이사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나이 서른 셋에 14번, 부모님만 사시던 시절의 것 2번을 제외하면 12번. 글쎄 많다면 많겠고 적다면 적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사하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어찌보면 보수적인 생활방식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집이 바뀐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바뀌는 거란 걸 나는 무의식 중에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건축가다. 건축가 하면 '빌딩을 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라고. 그리고 건축은 예술의 한 분야나 공학의 한 분야, 혹은 그 둘의 단순학 섞음이 아니라고. 


우리에게는 건축이라는 말 대신 참 좋은 단어가 있었다. 한자말이긴 하지만 '영조(營造)'가 그것이다. 우리말로는 '지어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다.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시를 짓듯이 집은 지어서 만드는 것이다. 짓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생각과 뜻과 마음을 통하여 전혀 다른 결과로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 운동의 결과와는 그 방법과 과정이 다르며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 (7쪽)


이 평면도를 본다고 하지 않고 읽는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 된다. 그것은 평면도를 선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그림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적혀 있는 건축가의 사유를 읽어내야 그 평면도에 표기된 삶의 조직이 이해가 된다는 뜻이다. 건축가의 그림은 그의 사유를 어떻게 잘 나타내느냐에 그 가치가 있다. 그리는 기술에 소질이 있어 건축을 한다면 오히려 그 소질은 그의 사고 과정을 방해하고 농도를 흐리게 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의 그림은 그의 사유에 대한 기록이 되어야 하며 그 그림이 보편적 언어로 나타난 것이 건축가의 도면이다. 따라서 건축가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단지 그는 그의 생각을 글로 쓰듯이 약속된 기호와 선으로 적어나가면 된다. 어떻게 보면 거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문학적 소질이지 예술적 기예가 결단코 아닌 것이다. (8쪽)


때문에 건축은 인간의 설계하는 것이며, 또 한 편으로는 한정짓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건축은 '인문학'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건축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건축이 아니라 때려 부수고 세우는, 그리고 그 세워진 것도 얼마 안가 또 다시 때려부수는, 그 단순한 패턴만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건축가는 끊임없이 좌절하고 투기를 위한 피괴와 무의미한 토목만이 계속되는 것은 아닌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은 자기 옆에 그 건물을 지었던 건축가와 함께 서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 그의 디자인은 대칭 속에서 명료하며 그 선들은 절제되어 있고 그 속의 공간들은 참으로 기능적입니다. 마치 침묵과 평화의 요구처럼 이 건축은 지면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네 개의 타워는 도시의 심장부인 관장을 만들었습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탄생한 도서관의 산책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현대 도시의 새로운 거처인 넓은 공공 공간에서 우리는 만나고 섞이게 되었습니다. 페로의 이 작업은 일개 건축이 아니라 미래를 예시하는 하나의 도시 계획인 것입니다. 그는 인류의 지식에 대한 굶주림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향해 하나의 위대한 성취를 이룩한 것입니다." (255쪽) 


건축가를 준공식 주인공으로 세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이해하는 행정가를 갖는다는 게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일까? 진심으로, 부러웠다.


얼마전, 경복궁 옆 미술관의 화재로 인명까지 피해를 입었다. 화재 직후 책임소재가 있는 기관 및 회사의 입장은 '공기를 맞추는 것'이었다 한다. 누구를 위한 건물인가, 누구를 위한 건축인가. 정말 잘 살고 싶다면, 우리 개개인이 자신이 사는 공간부터 다시 돌아보고 상상을 해야할 때다.


이 책은 건축가 승효상이 자신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20세기 건축물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만한 책이다. 다만 건축물에 대한 설명에 맞는 사진들이 좀 더 많이 적절히 배치가 되었다면, 직접 가보지 못하는 독자들의 이해도를 더 높이고 관심 또한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기는 했다. 여튼, 건축 쪽 대중서를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읽는 책마다 '재미'는 확실히 보장되는 것 같다. 건축, 참 매력있는 학문이다. 영화 속에서 "내가 네집을 지어줄게" 라는 말이 어떻게 하나의 '프로포즈'가 될 수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네 집을 지어줄게"라는 말은 "네 차를 사줄게", "네 집을 사줄게", 아니 "너에게 시를 지어줄게", "너를 위해 노래를 만들어 불러줄게"라는 말들과도 다른 차원에 있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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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의 시대 사계절 만화가 열전 3
박건웅 지음 / 사계절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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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만화작가가 촛불시위에 나갔다가 군화에 짓밟히고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혀 쓰러졌다.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병원이었고, 퇴원 후에도 잠을 잤다. 잠을 깨면 우울증에 시달렸고, 그렇게 반 년 동안 무기력한 생활을 계속 했다. 그러다 풍자만화를 틈틈히 그리기 시작했는데, 우울증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너 그러다 잡혀간다."

  만화를 그리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입니다. 그때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도, 쥐 그림을 그렸다고 잡혀가고 정부를 비판했다고 명예훼손으로 신고 당하는 사례를 보고 있으면 왠지 남의 일 같지 않더군요. 아직 안 잡혀가서 다행이긴 합니다만 창작자에게 정말 무서운 건 잡혀가고 신고 당하는 게 아닙니다. 제일 무서운 건 창작을 하지 못하는 것! 바로 나 자신이 스스로의 감옥을 만드는 것이니까요. (245쪽)

 

'나는 공산주의자다', '노근리 이야기', '꽃' 등을 그려왔던 작가의 풍자만화집. 원래 박건웅의 그림이 마치 둥근칼로 파낸 판화처럼 선이 굵고 어둡기는 하지만, 여기 이 책에 담긴 만화들은 더 어두워서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사실 작가의 개인 블로그에 가서 그가 그렸던 만화를 보곤 했었는데, 그림이 왜 이렇게 점점 어두워질까, 또 왜 이렇게 직설적일까 의아해하기도 했다. 내용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풍자만화가 시대의 산물임을 감안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거기다 개인적인 경험까지 있으니. 그러니 이 책은 하나의 임상치료 보고서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지금 이 괴물을 만든 것이 결국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만화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전염병은 바로 우리가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손만 잘 씻었어도 살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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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회와 다문화주의 - 시앙스포 총서 8
마르코 마르티니엘로 지음, 윤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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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많지 않은 분량에 전형적인 책 제목. 마치 대학 교양 수업의 교재로 쓰여야 할 것만 같은 표지까지 갖춘 책이지만, 의외로 심도있는 논의가 진행되고, 그러면서도 명확함을 잃지 않는 책이다. '다문화'가 유행처럼 회자되고 있는 때라, "한 번 읽어볼만 하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정작 읽다보면, "대체 우리가 '다문화주의'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뭐지?"라는 의문이 들게 된다. 그만큼 우리는 다문화주의에 대해 정말 아무 생각없이 접근하고 있는듯. 그러니 현재 수많은 멍청한 제도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겠지만.

 

다문화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보통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혹은 "농촌공동화로 국제결혼이 늘어나면서..." 따위의 말을 쓰지만, 사실 문화적 다양성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그건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있어왔던 것일뿐.

 

  하지만 문화와 정체성의 다양성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간사회는 그 다양성의 정도가 달랐을 뿐 언제나 다양화되어 있었다. 문화의 정체성, 혹은 다른 모든 영역의 정체성 - 민족, 문화, 성(性), 계층, 직업상의 정체성 - 과 관련하여 다양성이란 곧 삶의 동의어인 것이다. 완벽하게 단일문화적인 사회, 단일한 정체성을 갖는 사회는 오직 강자들이 강요하는 틀에 맞추어 인간 모두를 획일적으로 키워낼 때에만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는 사회생활이라는 원칙 자체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다. (22쪽)

 

그만큼 '우리'라는 강력한 환상의 힘이 대단했던 것이리라. 대체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 '우리'가 또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우리'는 인식하고 있는가? 아주 좁은 폭으로 논의해보더라도, 이제 조금만 시간이 더 흐르면 이민자들이 '침묵하는 타자'로 순순히 존재(?)할 가능성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이민자들 중 상당수는 자기들이 처한 상황을 일시적인 경제적 유배라고 생각했다. 프랑스나 독일에서 몇 년간 일하고 나서 적은 돈이라도 모으면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바로 그러한 조건에 있었기 때문에 생활에 있어서 상당한 희생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가족이 새로 구성되고 또 고향으로 돌아가리라는 신화 같은 믿음이 사라지면서, 조금씩 변화하게 된다. 새 나라에 완전히 정착하고 또 자녀들이 그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이민자들은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자 자기들의 문화적인 관습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감추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된다. (32쪽)

 

저자는 정부의 정책 모델을 크게 3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다. 동화주의적 접근(프랑스식), 다원주의적 접근(미국식), 차별적 포섭/배제(독일식). 물론 이 모든 모델이 현실적으로 전형적인 적용이 되고 있는 곳은 없다. 동화주의적 접근을 시도하는 정부라할지라도 세부 정책에 있어서는 다원주의적 접근을 시도할 수도(혹은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책에 관심이 있는 분은 동화주의적 접근과 다원주의적 접근이 의미하는 바를 한 번 추측해보시길. '상식'이 무참하게 밟히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한국은 어쩌면 가장 보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는 차별적 포섭/배제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입장 때문에 저자가 가장 경계하고 있는 '문화적 게토화'를 정부가 앞장서서 추진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이 책의 원제는 <문화적 게토를 벗어나기>다). 경제적 필요 혹은 노동력의 필요는 인정하여 그 분야에서는 차별적으로 포섭하지만,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는 받아들이지 않는 배제. 이런 차별적 포섭/배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시행하고 있는 정책이기도 하지만, 이 정책이 가능한 바탕은 대한민국의 구성원 모두가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혈통주의, 문화적 순혈주의 때문에 발생하는 '타문화에 대한 공포'. 아마 사무엘 헌팅턴의 주장이 이렇게나 잘 들어먹힌 건 미국을 제외하곤 한국이 독보적이지 않을까 싶은데, 이런 현상도 모두 여기에서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왜 '문화의 충돌'이 그토록 '한국인'들을 매혹했을까? 그 이유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문화의 충돌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많다.

 

  하지만 세계가 문화의 전면전을 향해 치닫고 있다는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화된 논리일 것이다. 실제 그러한 주장은 어느 곳에서도 증명된 바 없다. 물론 민족적, 문화적 양상을 띠는 갈등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되지만, 문화적 다양성이 현재의 갈등과 난국의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것처럼 보이느느 갈등 뒤에는 흔히 경제적인 문제, 경제적인 이유가 숨어 있다. 이런 점에서 문화적 갈등은 사회, 경제적 갈등과 불평등의 원인이 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결과인 것이다. (50~51쪽)

 

더 큰 문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회의 여러가지 모순을 문화적인 것으로 치환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사회 모순을 은폐하려 한다는 점이다. 외국인 노동자의 범죄를 더욱 강조하여 보도하는 보수 언론의 태도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문화를 사회를 읽는 유일한 열쇠로 삼아 문화, 경제, 사회의 영역간 상호작용을 소홀히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렇게 되면 현대사회에서 작용하고 있는 역학에 대해 단순화되고 편파적인, 부분적인 관점을 가질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프랑크푸르트의 예를 보면 사회, 경제적인 문제를 문화의 문제로 읽어내는 것은 결국 오진(誤診)이며, 무용한 대책이 될 위험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몇몇 형태의 다문화주의가 사회 상황들을 지나치게 '문화화'하는 것은 국가가 새로운 사회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려는 능력이나 의지가 없음을 은폐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123~124쪽) 

 

이 책의 좋은 점은, "현대사회는 다문화주의가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라는 단순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다문화주의의 성격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 문제점도 여러 측면에서 부각시킨다. 다문화주의는 일종의 방법론이지 그 자체가 어떤 절대선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어떤' 다문화주의인가를 면밀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지금 한국 정부가 시행하는 다문화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도 이런 관점에서 가능할 것이다).

 

  개인이 꼭 어떤 문화에, 단 하나의 문화에 소속되어야 한다고 간주하여 문화적 소속에 있어서 배타적 개념에 집착하는 '다문화주의자'들이 있다. 그것은 다원주의의 영향을 받은 '다문화주의'로, 정체성에 있어서 개인의 고립을 조장할 위험이 있다. 이러한 입장은 멸종 위기에 놓인 동물을 보호하듯이 민족, 문화, 인종집단을 보호하고 존속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하고 그 집단간의 경계를 명확하게 유지함으로써, 개인을 그 집단 중 어느 하나에 자동적으로 소속시키게 된다. 그때 기준이 되는 것은 물론 조상과 혈통으로, 개인들이 정체성을 바꾸고 싶어한다든가 혹은 실제 사회적 여정을 통해 그러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사회적인 시행의 문제이건 정체 혹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건, 이러한 다문화주의는 개인을 한 문화적 집단에 귀속시키며 한 가지 정체성을 강제로 부과하는 것이다. 개인이 그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질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117쪽)

 

  결국 관용의 원칙에 근거하는 모든 상징적 인정은 오히려 다르다고 간주되는 개인과 집단들이 배제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사실 관용은 타자에 대한, 타자의 정체성과 문화에 대한 전적인 무시가 될 수 있다. (141쪽)

 

  법적이고 정치적인 도구들은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결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때로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약간의 양식과 선의만으로도 시민적 다문화주의의 발전에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147~148쪽)

 

논술 문제의 모범 답안마냥, 제도적 접근과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뻔한 결론에 도착할 수 밖에 없지만, 이 결론을 하나의 '원칙'으로 삼고 접근을 한다면 그 '뻔한 결론'이 조금 더 쉽게 그리고 더 빨리 현실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프랑스 쪽의 사회학/철학 책은 내 취향과 맞지 않아서 이 책도 긴가민가 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읽는 '명징'한 책이다. 분량이 많지 않으면서도 많은 논의를 진행시키고 있고, 또 그러면서도 다문화주의에 대한 기본 개념을 확실히 잡을 수 있는 가이드가 된다. 말버릇처럼 다문화를 떠들기 전에 한 번쯤은 읽어봐야할 책이다. 특히 정책입안자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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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심리
귀스타브 르 봉 지음, 김성균 옮김 / 이레미디어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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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의 콘서트 장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 있다. 가수가 몇 곡을 끝내고 잠시 이야기를 해야할 무렵, "잘생겼어요", "너무 이뻐요" 등의 말이 한 마디 툭 튀어나오고 다들 하하하 웃는. 물론 사람마다 다르기야 하겠지만, 콘서트장의 관객'들' 중의 하나가 아니었다면 이런 장난기도 쉽게 발휘하진 못할 것이다. 그만큼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상황이 되면, 혼자일 때의 '나', 그리고 몇몇 지인들 속의 '나'와는 또 다른 '나'가 툭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평소에 차분하던 사람도 축구장이나 야구장에서 극도의 흥분상태에 도달하듯이. 이런 알듯 모를듯한 상태를 '군중심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귀스타브 르 봉은 1841년 생으로서, 이미 100년도 전에 이런 군중심리로 인한 현상을 분석해냈다.

 

귀스타브 르 봉은 '대중'의 등장이 당시 사회의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하고, 이 대중의 '심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현상의 분석을 시도한다. 얼핏 생각하면 쉽지 않을 것 같은 작업을 상당히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특히 군중이 어떤 부분에 민감하고 또 어떤 부분에는 무감각한지 꽤 정확히 분석해내고 있으며, 대중을 향한 프로파간다에 대한 언급 또한 현재의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 다음 인용한 부분만을 읽어봐도 전혀 낯설지 않은 얘기들이다. 특히나 요즘처럼 선거를 앞둔 시절이라면.

 

정치인들의 가장 기본적인 역할 가운데 하나는 국민에 세례명을 부여하거나, 군중이 싫증을 느낀 사건사물의 명칭을 조금이라도 참신한 명칭으로 바꾸어주는 것이었다. 단어들은 잘 선정되기만 하면 가장 불쾌한 사건사물에 부여되어도 군중이 수용할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지녔다. (92)

 

  그러나 확언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최다한 동일한 용어로 반복되지 않으면 실질적인 효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나는 나폴레옹이라면 결정적으로 중요한 유일한 수사법은 오직 반복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확언된 것은 반복됨으로써 끝내 증명된 진실로 인지되어 군중의 정신에 각인될 수 있다. (107쪽)

 

그런 흑색선전을 실증할 증거 같은 것을 제시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만약 경쟁후보자가 군중심리학을 전혀 몰라서 또다른 확언과 반복을로 흑색선전에 대응하지 않고 논증으로 반론하려 든다면 결코 당선되지 못할 것이다.

  후보자가 전단지에 명시한 공약은 경쟁자로부터 반격당할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에 지나치게 거창한 과장은 금물이지만, 연설로 하는 공약은 과장하고 남발해도 무방하다. 가장 거창한 개혁을 서슴없이 공약으로 제시해야 한다. 그렇게 거창한 공약은 대단한 효과를 발휘할 뿐 아니라 실현 가능여부와도 무관하다. 유권자들은 자신들이 지시하고 환호한 선거공약 덕분에 당선된 후보자가 공약을 실현시킬지 여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150쪽)

 

뿐만 아니라 '이미지 시대'에 대한 예고도 꽤 놀랍다. 지금에 비하면 당시를 '이미지의 범람'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텐데도, 저자는 마치 2012년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서술하고 있다.

 

군중의 상상력에 충격을 주는 것은 사건들 자체가 아니라 그런 사건들이 발생하는 경우와 군중에게 알려지는 방식이다. 요컨대 그것들이 군중의 마음을 완전하고 확실하게 사로잡으려면 반드시 경악할 이미지를 생산해야 한다. 군중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기술을 아는 것이 곧 그들을 지배하는 기술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61)

 

현상의 파악이나 문제의식은 분명 날카롭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했던 고민은, 당대인으로서 저자의 한계를 인정하고 책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그마저도 모두 비판의 핵심에 두어야 하나라는 것이었다. 동시대의 인물이 쓴 책이 아니라면 이런 고민은 언제나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겠지만, 유독 이 책은 이런 고민이 더 심했다. 저자의 비판과 분석이 매우 날카로운 반면에, 또 그만의 선입견과 위험함도 동시에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일단 다음과 같은 시선들은 당대 서구인들의 일반적인 한계라고 치고 넘어가자.

 

군중의 추론방식은 에스키모나 식인종이나 노동자의 추론방식과 닮아 있다. (57)

 

주목할만한 것은 군중의 고유한 특성들 가운데는 열등한 진화유형에 속하는-여성, 미개인, 어린이 같은-인간들을 관찰하면 거의 언제나 발견할 수 있는 여러 특성들-충동성, 과잉반응성, 추론력 결핍, 판단력과 비판정신 부재, 과장된 감정표현을 포함하는 특성들-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32쪽) 

 

하지만 '군중'이라는 핵심 논제를 가지고 접근을 하더라도, 저자의 서술이나 관점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우선 저자는 대중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때문에 대중에 대한 분석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생긴다. 예를 들어 대중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해져서 정부의 의원들이 대변인 정도로 '전락'했다는 평을 내리는 한 편,

 

  정치생활에 민중계급이 진출했다는 사실-그러니까 현실적으로도 민중계급이 지배계급으로 차츰 변이하고 있다는 사실-은 과도기인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인상적인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중략).... 군중은 이권단체들을 속속 설립하면서 기존의 권력기관들을 차례로 항복시키는 중이고, 모든 경제적 법률을 무릅쓰고라도 노동조건과 임금을 자체적으로 규제하려는 노동조합들도 조직하는 중이다. 그런 단체나 조합들은 창의력과 독립성을 완전히 결여한 자들을 대의원으로 선출하여 정부가 귀속된 의회에 진출시켰는데, 그런 대의원들은 대부분 자신들을 선출한 위원들의 대변인 노릇밖에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16쪽)

 

그러면서도 저자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대중의 지능이 엄청나게 낮으며 판단능력이 전혀 없다고 비난을 서슴치 않는다. 다음의 인용 문구처럼, 인류의 문명을 창조하고 지도한 자들이 오직 소수의 엘리트였다면, 그들이 지금은 왜 그렇게 멍청하고 판단능력도 없으며 기억력조차 없는 대중에게 밀릴대로 밀려 전락하고 말았는가? 그리고 앞서 언급한 프로파간다 등으로 대중을 조종할 줄 아는 지도자들의 존재는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럴지라도 지금까지 문명들을 창조하고 지도한 자들은 오직 소수의 지식귀족들이었지 결코 군중은 아니었다. 군중은 오직 파괴력밖에 발휘하지 못한다. 군중의 규칙은 언제나 야만적인 수준에 머문다. 하나의 문명은 정립된 법규와 규율, 본능적 상태를 이성적 상태로 전환시키는 절차, 미래에 대한 예상, 고도화된 문명을 조건으로 삼는다. 스스로를 방치하는 군중들은 이 모든 조건을 실현할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을 지금까지 변함없는 사실로 입증했다. (18쪽)

 

여기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이성을 상대로 줄기차게 투쟁해온 감정은 결코 이성에 굴복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65)"라는 서술조차 대중에 대한 저자의 공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서의 이 '대중'은 시대 정황상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저자가 공포에 떨고 있다는 의심은 확신에 가까워진다. 공포가 개입하는 순간, 저자 특유의 명철한 분석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억측과 '감정적'인 대응만이 남게 된다. 각종 교육이 보편화되면서 범죄발생률도 증가했다는 억지 주장이나(80쪽), 교육제도가 사람들에게 "삶의 여건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심어주고 그런 여건으로부터 탈출하려는 강렬한 욕망을 자극"(81쪽)한다는 주장이 '우려'로 읽힌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교육에 대해 한다는 주장이, 왠지 몇 년 전 누군가가 이야기한 것과 꼭 닮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경험만이 우리의 가증스러운 교과서들과 가련한 시험절차들을 대신하여 산업교육을 도입할 필요성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산업교육은 우리의 젊은이들을 그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피하려고 드는 농촌이나 공장이나 식민지의 사업장으로 유인할 수 있을 것이다. (82) 

 

오늘날 사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발견되는 곳도 교실이고 라틴족들이 쉽사리 타락의 길로 빠져드는 곳도 교실이다. (87)

 

일반적이고 원론적인 비판도 충분히 가능하다. 저자는 '군중'에 대해 여러가지 특성을 분석해내고 있지만, 군중이 어디 하나의 '생명체'던가? 군중이 일개 엘리트보다 훨씬 낮은 '지능'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군중이라는 집단이 가진 특성이라고 볼 수 없다. 여러 '개인'이 모였을 때, 하나의 결론이나 행동방침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지극히 비효율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설사 군중이 됨으로서 여러가지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인 특성이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 또한 각 개인들이 '군중'의 일원이 될 때 나타나는 '인간' 개체의 문제인 것이지, 그것이 '군중'의 특징이자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저자는 군중들이 현혹되는 '이미지'의 위험성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저자가 말하고 있는 군중 또한 군중의 '이미지'에 불과한 것 아니던가?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사람들이 여럿 모였기 '때문에'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그들을 모이게 한 사회적/문화적/경제적 환경 또한 군중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저자는 군중심리가 촉발되는 이유를 군중에서만 찾고 있다. 그들이 '왜' 모이게 되었고 그들의 낮은 지능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지독한 엘리트주의가 거슬리지만, 대중(여론) 정치를 한 번 고찰해본다는 측면에서 읽어볼만한 책. 하지만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라 책장 넘기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처음으로 완독한 전자책. 이 또한 완독하는 게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이래저래 다 읽는데 꽤 힘들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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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놀라운 팝업왕
로버트 사부다 팝업제작, 루이스 캐롤 원작, 존 테니엘 그림, 홍승수 옮김 / 넥서스 / 200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역시 로버트 사부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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