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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사유의 기호 - 승효상이 만난 20세기 불멸의 건축들
승효상 지음 / 돌베개 / 2004년 8월
평점 :
재건축이 결정되었다고 현수막을 내걸면서 자기가 사는 집과 동네가 헐리게 되었다고 좋아하는 나라는 아마도 우리나라밖에 없을 것이다. 가풍이고 뭐고 없다. 그냥 적당히 살다가 비싼 값에 되팔고 또 다른 투기 현장 속으로 찾아가서 삶을 맡기면 그뿐이다. (57쪽)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지금까지 꽤 많은 집에 살아봤다. 잘 기억나지 않는 어린 아이시절을 제외하더라도, 우리집은 지금 부모님께서 사시는 집까지 하면 6번의 이사를 했다. 부모님께서 4번째 이사에서 어렵게 집을 마련하신 덕분에 10년 이상을 한 곳에서 살았던 때를 제외하면, 꽤 이사를 많이 다녔던 셈이다. 꼭 그 뿐만이 아니라 대학 입학 이후 시작된 나 혼자의 이사도 꽤 많았다. 비록 하숙집이라 하더라도 대학시절 살던 곳도 4번을 옮겼고, 제대를 하고 대학원에 입학한 후 결혼생활까지 6번의 이사를 했다. 지금 사는 곳도 전세이니 아직 내 인생의 이사는 아직도 한참 남았다고 봐야할 것이다. 나이 서른 셋에 14번, 부모님만 사시던 시절의 것 2번을 제외하면 12번. 글쎄 많다면 많겠고 적다면 적다고 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사하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는다. 어찌보면 보수적인 생활방식 때문일 수도 있겠는데, 집이 바뀐다는 것은 '삶의 방식'이 바뀌는 거란 걸 나는 무의식 중에 알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저자는 건축가다. 건축가 하면 '빌딩을 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라고. 그리고 건축은 예술의 한 분야나 공학의 한 분야, 혹은 그 둘의 단순학 섞음이 아니라고.
우리에게는 건축이라는 말 대신 참 좋은 단어가 있었다. 한자말이긴 하지만 '영조(營造)'가 그것이다. 우리말로는 '지어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다. 집은 세우는 게 아니라 짓는 것이다. 밥을 짓고 농사를 짓고 시를 짓듯이 집은 지어서 만드는 것이다. 짓는다는 뜻은 무엇인가. 어떤 재료를 가지고 생각과 뜻과 마음을 통하여 전혀 다른 결과로 변화시켜 나타내는 것이다. 단순한 물리적 운동의 결과와는 그 방법과 과정이 다르며 근본적으로 사상이 다르다. (7쪽)
이 평면도를 본다고 하지 않고 읽는다고 해야 정확한 말이 된다. 그것은 평면도를 선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그림으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적혀 있는 건축가의 사유를 읽어내야 그 평면도에 표기된 삶의 조직이 이해가 된다는 뜻이다. 건축가의 그림은 그의 사유를 어떻게 잘 나타내느냐에 그 가치가 있다. 그리는 기술에 소질이 있어 건축을 한다면 오히려 그 소질은 그의 사고 과정을 방해하고 농도를 흐리게 할 뿐이다. 다시 말하면 건축가의 그림은 그의 사유에 대한 기록이 되어야 하며 그 그림이 보편적 언어로 나타난 것이 건축가의 도면이다. 따라서 건축가가 그림에 소질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단지 그는 그의 생각을 글로 쓰듯이 약속된 기호와 선으로 적어나가면 된다. 어떻게 보면 거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문학적 소질이지 예술적 기예가 결단코 아닌 것이다. (8쪽)
때문에 건축은 인간의 설계하는 것이며, 또 한 편으로는 한정짓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건축은 '인문학'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 건축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건축이 아니라 때려 부수고 세우는, 그리고 그 세워진 것도 얼마 안가 또 다시 때려부수는, 그 단순한 패턴만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니 건축가는 끊임없이 좌절하고 투기를 위한 피괴와 무의미한 토목만이 계속되는 것은 아닌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이 완공되었을 때, 당시 대통령이었던 미테랑은 자기 옆에 그 건물을 지었던 건축가와 함께 서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고 한다.
"...... 그의 디자인은 대칭 속에서 명료하며 그 선들은 절제되어 있고 그 속의 공간들은 참으로 기능적입니다. 마치 침묵과 평화의 요구처럼 이 건축은 지면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네 개의 타워는 도시의 심장부인 관장을 만들었습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탄생한 도서관의 산책길은 모두에게 열려있으며 현대 도시의 새로운 거처인 넓은 공공 공간에서 우리는 만나고 섞이게 되었습니다. 페로의 이 작업은 일개 건축이 아니라 미래를 예시하는 하나의 도시 계획인 것입니다. 그는 인류의 지식에 대한 굶주림과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향해 하나의 위대한 성취를 이룩한 것입니다." (255쪽)
건축가를 준공식 주인공으로 세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가 어떤 생각으로 어떤 건물을 지었는지 이해하는 행정가를 갖는다는 게 우리에겐 불가능한 일일까? 진심으로, 부러웠다.
얼마전, 경복궁 옆 미술관의 화재로 인명까지 피해를 입었다. 화재 직후 책임소재가 있는 기관 및 회사의 입장은 '공기를 맞추는 것'이었다 한다. 누구를 위한 건물인가, 누구를 위한 건축인가. 정말 잘 살고 싶다면, 우리 개개인이 자신이 사는 공간부터 다시 돌아보고 상상을 해야할 때다.
이 책은 건축가 승효상이 자신에게 영향을 많이 미친 20세기 건축물들을 설명하고 있는 책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들을 상기시킨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을만한 책이다. 다만 건축물에 대한 설명에 맞는 사진들이 좀 더 많이 적절히 배치가 되었다면, 직접 가보지 못하는 독자들의 이해도를 더 높이고 관심 또한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기는 했다. 여튼, 건축 쪽 대중서를 많이 접하지는 못했지만 읽는 책마다 '재미'는 확실히 보장되는 것 같다. 건축, 참 매력있는 학문이다. 영화 속에서 "내가 네집을 지어줄게" 라는 말이 어떻게 하나의 '프로포즈'가 될 수 있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네 집을 지어줄게"라는 말은 "네 차를 사줄게", "네 집을 사줄게", 아니 "너에게 시를 지어줄게", "너를 위해 노래를 만들어 불러줄게"라는 말들과도 다른 차원에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