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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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를 그렸던 김태권의 신간.

사실 2권에서 멈춘지 너무 오래되어버린 터라, 좀 뜬금 없게 느껴진 책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구입해서 읽었다.

10년 정도 여기저기 연재했던 것들을 모아서 낸 책인데, 본인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래서 그림이 들쭉날쭉하다.

어차피 기본 내용과 콘티 정도는 거진 다 짜여져 있는 상태이니 그림을 다시 그렸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매우 아쉽다.

 

어쨌거나 책의 내용은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그 비판을 김태권 특유의 비꼼과 패러디로 풀어내고 있는데, 역시나 정신 없기는 하지만 재치가 넘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음, 길든다는 건 말이지. 이를테면 - 월급이 오후 네 시에 나온다면 나는 오후 세 시부터 설레기 시작할 거야.

그리고 여기! 봉투가 보이지? 난 편지를 쓰지 않으니, 봉투는 내게 소용없는 거야.

그런데 이제 봉투는 월급을 생각나게 하겠지! 그럼 난 봉투를 사랑하게 될 거야.

 

이 부분은 읽다가 진짜 뿜었다.

어쨌거나 만화라는 장르상의 특성(혹은 선입견)에다가 김태권 특유의 산만함 때문에 책이 너무 가벼워질 수도 있었는데

우석훈이 각 챕터마다 간단하고 쉬운 해제를 달아놓아 책의 가벼움에 작은 추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극한까지 가면 시장 이데올로기가 말하듯이 모두가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개별화된 개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 혹은 민족의 이데올로기가 더욱 강조된다. ……

  이런 상태에서 경제적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의 경제적 위치는 계속해서 인종적 위치 혹은 국가적 소속감 같은 이데올로기적 실체로 치환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 정당을 위해서 투표하는 등 경제적 합리성의 눈으로 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들이, 국가주의나 지역주의와 함께 재생산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화된 국가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경제적 상황을 이해시키기보다는, 인종, 국민, 혹은 지역과 같은 상징에 더욱 소속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세계화된 경제에서 사람들은 '세계시민'으로서의 의식을 키우기보다는, 더 인종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의식에 사로잡힌다. ……

  한국에서도 신자유주의가 강화되면서 '국론 분열'이라는 말이 더 많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한 국가 내에 다양한 의견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또한 개개인이 처한 경제적 삶과 경제적 운명이 다르기 때문에 국론이 통일되는 일은 처음부터 있을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 다른 의견들을 조율해나가고, 경제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통해 사회 전체적인 행복 및 후생 수준을 높여나가는 일이다. 그러나 강요된 국론 통일은 비정규직이나 여성과 같은 경제적 약자의 의견을 무시하게 되고, 이미 파편화해 분할통치하에 있는 사람들을 국가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폭압적으로 이끌어 나간다.

 

절대적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분할통치'의 구체적 사례들이 궁금하다면 이 책의 단 몇 페이지가 도움이 될 것이다.

국론이며 국익이며 그런 것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이것부터 찬찬히 따져봐야 한다.

이타적인 삶을 살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이기적이려면 제대로 이기적이자는 이야기. 너무 냉소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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씩씩한 남자 만들기 - 한국의 이상적 남성성의 역사를 파헤치다
박노자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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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적인 남자'하면 떠오르는 가치가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용기', '강인함', '씩씩함' 등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박노자의 이 신간에서는 1890~1900년대 나타나는 '이상적 남성성'의 계보를 살펴보고 있다.

'왠 남성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동안 박노자가 관심을 가져왔던 영역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뜬금 없지도 않다.

박노자는 1900년대 초반 사회진화론, 약육강식, 적자생존, 우승열패와 같은 담론에 관심을 가져왔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대충 감이 오겠지만, 1900년대 강조된 남성성은 전통시대의 그것과는 또 다른 '육체적 강자'로서의 남성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전통과 근대가 그렇게 명확하게 단절되는 지점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뒷부분에 이영아의 발문에도 지적되는 것이지만, 우리는 너무 '근대의 근대성'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닐까?

 

이데올로기는 권력관계 전체를 정당화하는 상징 영역이다. 이데올로기 영역은 사회 곳곳의 완고한 기존 현상(예컨대 가부장적 가족구조)을 포함한 권력 구조 전체와 관련된 것이다. 또한 "전통"은 전체 권력 구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면에서 비할 데 없이 강력한 힘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이데올로기 영역은 대개 혁신성을 가시화하는 데에는 놀라울 만큼 소극적이다. 기의(signified)가 대대적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사용되어 온 기표(signifier)들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예컨대 조선 후기 사회(17~19세기)에서 충신의 전형으로 추앙받았던 이순신은 근대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대담무쌍하고 성공적이며 지능적이고 애국적인 전사의 상징, "조선의 넬슨(Horatio Nelson)"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렇지만 숭배의 내용에 결정적인 변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숭배를 표현하는 방식은 주목할 만한 연속성을 드러낸다.

 

여러 자료들과 시대상황을 검토한 후, 저자는 재미있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조선의 경우, "애국적 남성의 훈련된 신체"의 근대적 이상은 최소한 두 가지의 토착적 남성성 패러다임을 혼합, 계승한 것이었다. 하나는 왕조국가와 성리학적인 도덕규범에서 벗어나 점차 "민족의 독립과 자주"라는 새로운 지상 가치로 옮겨가던 고답적 "군자"의 패러다임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대 민족 이념이 들어오기 훨씬 이전부터 겁 없는 협객을 존중해온 김구와 같은 평민들의 패러다임이다. 전통적으로 "고상한 목표", 자기 수양, 도덕적 청렴을 부각시키던 "군자" 패러다임은 최남선 등의 "자기희생" 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반면 세시풍속의 일종으로서 이웃 마을 사이의 돌싸움에서 드러나는 사납고 거친 남성성에 대한 평민드의 애착은 새로운 남성적 에토스의 군사주의적인 양상으로 이어졌다.

 

이런 양상이 '기댈 조국이 없는', 그러면서도 일제에 의해 총동원되어야 했던 식민지적 상황과 맞물리면서 자리를 잡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은 강인함(그러나 국가권력에 순종하는)이 아니다.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 남성상은 '배려하는 남자'. 물론 이 배려와 돌봄은 넓은 의미를 가진다.

약자를 배려하고, 사회차원에서는 각종 사회문제들을 무시하지 않고 직접 참여하는 그런 남성.

세계에서 가장 긴 주당 노동시간에 시달리는 점을 감안하면 '배려하는 남자'가 되기 위해서도,

근대적 이상이었던 '튼튼한 육체'를 발전적 계승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뒷부분에 같은 분야(?)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는 이영아의 비판적 발문이 실려 있어 책을 잘 매조졌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영아의 문제제기 외에 개인적으로 드는 의문도 있다.

 

우선 '정당한 폭력을 "남성만의 고유한 영역"으로 변화시키는 훈육된 남성 투사라는 상투적 이미지는, 개화기와 그 후의 조선사회에서 성차 의식을 "민족화"시키는 과정에서 창출된 것 뿐이다.'라는 저자의 견해.

 

조선시대와 근대를 비교하면서 폭력성에 대한 해석을 할 때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나 싶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은 "국민국가를 위해서 칼을 드는 여성"의 근대적 이미지를 쉽게 수용할 만한 문화적 배경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결론은 다소 성급해 보인다.

일단 그것이 '조선만의 특성'이라고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분석을 위해서는 당시의 '여성관'도 면밀히 살펴봐야만 한다.

조선의 여성들에게 '칼을 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좀 더 자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이런 '적극적'인 행위를 권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기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남성들이 보기에 여성들은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행위를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존재였다.

그나마 여성이 칼을 드는 경우의 대부분은 자신의 정절이나 가문의 명예 혹은 부모의 목숨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국가를 위해 칼을 드는 여성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것이며, 그 상상 또한 현실의 남성을 공격하는데 주로 이용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남성들이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공식적'으로는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막상 자신의 딸, 부인, 어머니와의 관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데 있다.

때문에 이 시대의 '담론'과 '현실'의 괴리 또한 반드시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조금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권장'으로 표상되는 남성성만이 아니라 '금기'로 표상되는 남성성도 함께 살펴봤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쉬운 예로, '남자가 왜 질질 짜고 그러냐'는 금지 혹은 비난. '훈육' 속에는 권장 외에도 금기, 금지가 상당한 영역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당시 남성에게 무엇을 금지하였는지 살펴보는 것도 이상적 남성성을 탐구하는 다른 경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나 더 아쉬운 점은, 머리말에 비해 글이 너무 빨리 끝나버린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일제말기를 거치면서 겨우겨우 일상까지 파고든 이상적인 남성성이, 저자의 말처럼 왜 '변화'했는가?

물론 저자의 관심은 1900~10년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머리말에 이야기한 문제제기는 현대까지 이어진다.

 

동유럽이나 중남미 사회들의 "이상적 남성" 이미지와 비교하면, 한국 사회에서는 완력이나 담력보다는 학력 및 경제 능력 부분이 더 중요시된다. 일부 지식인 사회를 제외하면 동유럽 여성들은 "근육이 없는 남성", 심하면 "주먹질 못하는 남성"에 대해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다르다. "명문대 졸업생"과 "엘리트 대기업 사원"이라면 그 정도의 "결함"(?)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대한민국에서 경제적 측면을 포함한 모든 차원에서의 "인생 성공"은 절대적으로 "학력 자본"에 좌우된다.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남미나 동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확인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한 개인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철저한 학별의 위계질서가 대한민국처럼 공고하게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적 프로젝트로서의 '건강한 남성의 육체만들기'는 멈추었지만, 여전히 각 기업체는 '군인정신'을 강조한다.

극기훈련을하고, 해병대로 가서 '훈련'을 받고 강인한 '정신'을 요구 받는다. 그렇다면 이런 현상은 왜 나타나게 되었는가?

사실 이 부분이야말로 나의 관심이 많았던 부분이라 좀 아쉬웠다.

다소 허망한(?) 저자의 이상적 남성상을 피력할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을 좀 더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영아는 발문에서 여러가지 생산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아무래도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의 몸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문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발문 첫부분에 나오는 연예인 군 입대에 대한 해석은 같은 입장에서 완전히 동의를 하지 못하겠다.

연예인 군문제에 일반 남성들이 그렇게나 민감한 것은,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진짜 남자가 된다"는 사회의 암묵적 합의 때문은 아니다.

(군대를 다녀오면 사회의 제대로된 구성원으로 인정한다는 합의가 있는 것은 100% 맞지만 그것이 '남성성'과 연관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물론 이것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자의 주장처럼 이 요인이 가장 핵심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그가 부차적으로 취급한 '평등'의 문제야말로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평등'이라고 하니 뭔가 고상한 거 같은데, 표현을 좀 바꾸자. '피해의식'이 더 적절하겠다.

요즘 군대 가는 것을 성스러운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안갈 수 있으면 안가는게 좋다. 군대라는 곳은 이제 그런 곳이다.

그런데 정작 안간 이들을 보면 부아가 치민다. 왜? 나는 그런 X같은 곳에 2년 혹은 2년이 넘도록 다녀왔으니까.

나도 다녀왔으니, 너도 가야하는거 아냐?라는 논리가 바로 핵심이다.

어떠한 보장을 위한 평등이 아니라 피해와 불이익의 공유를 위한 '평등'. 때문에 '여자도 군대가라'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1권이 나온 후 한참 나오지 않던 '히스토리아' 시리즈가 다시 시작된 것도 환영할만한 일.

'속편격'으로 집필 중이라는 이영아의 책도 기대가 된다. (근데 이것도 히스토리아 시리즈로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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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
짜오지엔민 지음, 곽복선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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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 말 그대로 대나무 숲의 일곱 현자다. 대나무 숲이라 함은 속세와는 멀리 떨어진, 즉 속세의 반대말로 생각하면 될 터. 즉 죽림칠현이라 함은 속세에서 떨어져 자연과 함께 삶을 보낸 일곱 명의 현자를 일컫는 말쯤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중국 위()·진()의 정권교체기에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을 신봉하였다. 그 풍부한 일화는 그 후 《세설신어()》 등 인물평론이나 회화의 좋은 제재가 되었다.


 

인터넷 상에서 찾을 수 있는 죽림칠현의 '요약'이다. 하지만 '죽림' 조차 세상을 완전히 벗어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구름을 타고 노니는 신선들과는 달리 대나무는 뿌리를 땅에 박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칠현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처럼 대나무 숲을 노니는 유유자적한 모습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세상의 풍파를 꼿꼿이 견디며 부러지진 않았으나 결국엔 잘려나갔으며, 누군가는 속세의 욕망과 죽림의 한가로움 사이에서 고뇌했고, 또 누군가는 '죽림'의 이름값을 바탕으로 속세의 욕망을 채우고자 했다. 속세와 가장 거리가 멀었다는 혜강조차 오히려 속세를 너무나 의식했기에 죽림으로 은둔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속세에 얽혀 잘려나간 대나무가 되고 말았다.

 

사실 죽림칠현의 경우 중국고대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록이 많은 편은 아니다. 이 책의 절반이 혜강와 완적, 두 인물이 중심이 된 이야기인 것은 이에서 비롯한다. 심한 경우, 그러니까 상수의 경우는 공식적인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런 어려움을 주제(술, 기행, 죽림이라는 공간)와 시, 그리고 후대의 평가로 묶어내는 교묘한 방법으로 넘어갈 뿐만 아니라, 그 방법으로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비록 마지막 부분 왕융의 경우, (배경설명을 위해 어쩔 수는 없었겠지만) 지나치게 많은 등장인물로 인해 오히려 흥미가 떨어져버린 아쉬움은 있지만 이 책의 전체적인 재미를 해칠만큼은 아니었다. 깔끔한 책표지와 편집은 읽는 재미를 더해주었다.

 

죽림칠현. 이 어찌 그들만의 이야기겠는가. 그 어찌 13억 중국인들만의 자화상이겠는가. 배운 것이 毒이 되는 시대. 그 毒을 삼켜낼 것인가 아니면 내뿜고 다닐 것인가에 대한 고민. 비록 그 毒은 시대가 부여한 것이지만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몫임을 역사가 보여준다. 죽림칠현으로 묶여 전해오는 저 일곱명의 명사조차 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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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전 -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여덟 인생
김서령 지음 / 푸른역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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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이 우리들의 가장 훌륭한 교과서가 된다.'

 

저자의 말처럼 이 책에 등장하는 아홉 여성의 삶은 나를 그리고 나를 둘러싼 역사를 돌아보게끔 한다.

 

빨치산 할머니와 위안부 할버니, 팔로군 출신 할머니를 지나 춤꾼 이선옥 할머니와 명성황후의 한을 풀려 혼신을 다한 이영숙 할머니의 삶을 읽으면서 가장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들이 전부 '한국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여덟인생'(이 책의 부제)이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빨치산과 위안부, 팔로군의 삶보다 춤꾼, 고아원 선생들은 훨씬 '개인적'으로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금 반성하며 생각했다. 역사와 동떨어진 개인적 삶이 어디 존재하는가. 춤꾼이라 해서, 종가집 며느리라 해서 어찌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오지 않았겠는가. 나는 아직도 내가 늘 비판하던 주류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의 삶을 하나하나 진심으로 만져 살펴보고 또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리고 그 '개인적'인 삶에서 역사적 맥락을 읽어내는 것. 그것이 내가 보고 싶던 역사가 아니던가.

 

이 책이 더욱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히) 여자의 삶, 우리 할머니들의 삶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저자의 서문에서처럼 '같은 시대 같은 나라 같은 성별로 태어났다는 것이야 말로 운명을 결정하는 핵심요소'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정작 나야말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거의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삶도 당신들께서 가끔 이야기해주시는 것 말고는 알지 못한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사료보다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더 급선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이해하는 첩경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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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Q정전.광인일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5
루쉰 지음, 정석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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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처음 읽었을 때는 '아Q정전'이 대표작이라 그것에 치중해서 봤었는데
이번엔 오히려 '광인일기'에 관심이 갔다.
당시 루쉰 선생이 그런 의도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소설은 현재 다른 맥락에서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광인일기'는 말 그대로 미친 자의 일기다. 주변 사람들이 다 자신을 잡아먹으려 한다는 생각을 하는.
그저 미친자의 일기로 볼 수도 있고, 당시 봉건도덕을 비판한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 아름다운 무한경쟁 시대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 글이 다른 맥락으로 읽혔다.
 
......무려 4천 년 동안이나 늘 사람을 잡아먹던 곳, 나 역시 그곳에서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왔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4천 년 간이나 사람을 잡아먹은 경력을 가진 나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진정한 사람을 만나기가 이다지도 어려운가!
  아직도 사람 고기를 못 먹어본 어린이가 있을까?
  아이들을 구하라......
 
'미친 자'의 일기가 이리도 섬뜩하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얼마나 덜 섬뜩한가.
 
그래도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고향'.
드디어 사람에게서 20년만의 고향을 찾은 것 같았던 주인공에게
'주인님....'이라는 한 마디. 현실의 벽이 차갑게 부딪혀 오지만 3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듯한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주인공은 생각한다.
 
  나는 희망을 생각하게 되자 갑자기 무서워졌다. 룬투가 향로와 촛대를 요구할 때 나는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나는 그가 아직도 우상을 숭배하고 있으며 한시도 잊지 않고 있구나 하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희망이라는 것 역시 나 스스로가 만들어낸 우상이 아닐까? 다른 점이라면 그의 희망은 절박한 것인데 비해 나의 희망은 막연하고 아득한 것이라는 점뿐이다.
  몽롱한 가운데 눈 앞에는 해변가의 푸르른 모래밭이 떠올랐다. 짙은 남색 하늘에 바퀴처럼 둥근 황금의 보름달이 떠 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희망은 본디 있다고 할 것도 아니고 또 없다고 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원래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 많은 사람들이 다니면서 저절로 생겨난 것처럼.
 
번역자에 따라 약간씩은 다르지만, 어쨌든 이 구절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어두움 속에서 담담하게 희망의 부재를 이야기하는 저 구절.
그러나 '희망은 반드시 있다'라는 말보다도 저 구절이 더 와닿고, 또 내게 힘을 준다.
희망의 원동력은 '부재'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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