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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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주의자’라는 단어에 드리운 이미지는 무엇일까? 유약함, 탁상공론, 이상주의자. 아마도 이 세 단어로 정리가 될 듯하다. 실제로 ‘반전주의자’들은 ‘비폭력주의자’만큼이나 비겁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한다. 그렇다. 이미 이 세계는 ‘반전’을 이야기할 때 ‘용기’를 가져야만 하는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이 ‘비겁자’들은 어느 때보다 ‘용감한 자’가 되어 있다.

 

우리는 반전주의자들에게 ‘현실’을 이야기한다. ‘네가 하는 말이 옳은 줄은 알아. 하지만 그건 꿈이라구. 현실은 그렇지 않아. 전쟁에서 사람들이 죽어 나자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야.’ 이 말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더 이상의 전쟁은 안 된다는 외침보다는 ‘전쟁이 다 그런 거지’라는 말이 더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 아닌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쩌겠어. 독재가 다 그런 거지.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자신의 견해를 발언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는 학자들은 종종 이른바 '현실주의'라는 일종의 자기검열을 행한다.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현실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사회의 최고 권력자들이 제시하는 대안들에만 집착한다는 것이다.

 

‘좋은 전쟁’이었던 세계2차 대전에 폭격수로 직접 참전했던 하워드 진의 이 용감한 책을 읽다보면 우리는 금세 불편해진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지금 벌어지는 전쟁들은 다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워드 진이 알리려는 내용이 바로 그 ‘나름의 이유’다. 현대에 벌어진 대부분의 참극은, 그 참극이 일어나기 전에 문제의 해결이 가능한 상황이었으나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그 ‘나름의 이유’ 때문에 참극을 굳이 막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참극을 일으켰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모호하지도 비현실적이지도 않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정당했다는 주장의 실제 효력은 이미 끝난 그 전쟁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전쟁들에 미치는 것이다. …… 아마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최악의 결과는 전쟁이 정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계속 존속시켜 줬다는 점일 것이다.

 

그가 전쟁을 절대악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일단 전쟁이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뒤로는 사고하는 것을 중지한 채 승리를 위해 행해지는 모든 일이 도덕적으로 타당하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워드 진의 고백대로, 자신이 3만 피트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한 것과 파시즘을 제거하는 것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생각해볼 여지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비겁하지 않은 우리가 한 번 답해보자. 과연 어떤 관계가 있을까? 부시가 일으킨 전쟁도, 하다못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마저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전쟁이 ‘절대악’으로 규정되지 않는 한은 그 ‘나름의 이유’로 전쟁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 나름의 이유와 전쟁 사이에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없다. 그리고 군사 행동은 애초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도 우린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워드 진은 연대와 불복종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연대와 불복종이 그저 ‘이상적’인 이야기가 아님을 실례를 들어가며 역설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시민불복종은 구체적으로 어떤 논리와 방법을 가져야만 하는 것일까?

 

이런 하워드 진의 논리에 ‘현실’을 들이대는 것은 결국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는 오늘날의 누군가와 별 다를 것이 없는 태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의 성격은 그리 고민할 것도 없이 노골적이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베블런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옳다”라는 격률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하워드 진이 이야기하는 불복종의 논리는 무엇인가.

 

시민불복종은 정확히 그런 것이다. 법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선언하기 위해 법률을 일시적으로 자기 자신의 손아귀에 장악하는 것 말이다. 그것은 법과 인간적 가치 사이에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사실은 때때로 법률을 어김으로써만 공표될 수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반면, 법률을 모든 상황에서 준수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정신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며 개인의 양심을 전능한 국가에 내맡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듯이, 국가는 ‘자의적으로만’ 전능하다. 때문에 불복종이 필요한 것이다. 하워드 진은 불복종의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2가지 본질적 조건을 제시한다. 하나는 권리 행사를 위한 문제가 ‘생명이나 건강, 자유 같이 근본적인 권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 두 번째로는 ‘불만의 원인을 시정할 수 있는 법적 통로의 불충분함’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작년의 촛불시위야 말로 최근의 사례 중 가장 대표적인 ‘직접행동’일 수 있겠는데, 한국 사회는 직접행동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특이한 것 같다. 촛불시위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생각 없이’ 혹은 ‘남이 하니까 나도’ 거리에 쏟아져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판의 소리를 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거리에 나온 사람들에게 ‘왜 나왔냐’라고 진지하게 물어보지 않았다. 그들도 똑같은 논리로 ‘남이 하니까 나는’ 싫었던 것에 불과하다. 아니면 다른 저의가 있었거나.

 

  우리 시대는 죄악을 대량생산하는 데 점점 더 엄청나게 복잡한 분업이 필요하게 된다. 어느 누구도 뒤이어지는 참사를 적극적으로 책임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든 그 기계에 렌치를 던져 작동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소극적으로 책임이 있다. …… 사회라 불리는 이 왜곡된 자연(자연은 각 종에게 저마다 특수한 필요물을 갖춰준다) 속에서는 간섭 능력이 큰 사람일수록 간섭할 필요성을 덜 느낀다.

  필요성은 가장 많이 느끼지만 렌치를 가장 적게 갖고 있는 이들이야말로 당면한(또는 내일의) 희생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사용해야만 한다(왜 반란이 드문 현상인가는 이로써 설명될지도 모른다). 이 사실은 빈손보다 뭔가를 약간 더 갖고 있으며 기계를 멈추는데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진 우리에게도 이 사회적 궁지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유한 역할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해준다.

 

자, 이제 가장 민감한 문제인 ‘폭력’이 남아있다. 시민불복종과 폭력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질까? 사실 ‘폭력’이니 ‘비폭력’이니 하는 말은 모두 부정확한 말이다. ‘그것이 사용되는 정치적, 이념적, 수사적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함의를 지’니기 때문이다. 살인자의 칼과 그로부터 나를 지키려는 칼이 모두 같은 칼로 해석될 수는 없다. 또 공권력이라고 해서 폭력이 아닌 것도 아니고, 무조건 ‘정당한 폭력’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할 때, 소렐의 폭력혁명을 옹호할 수만도 없다. 에이프릴 카터의 말을 들어보자.

 

정치적 가능성과 정치적 영향력이라는 근거로만 계산한다면 원칙적으로 폭력적, 비폭력적 방식 모두를 정치의 도구로 채택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폭력 또는 비폭력을, 항의운동가 자신과 사회 전체의, 정서적 반응과 도덕적 신념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행동을 위한 전술적 사고는 이러한 반응과 신념을 고려해야만 한다.

 

사실 폭력의 사용은 그 효용성(?)에 비해 많은 불리함을 떠안고 있다. 카터의 지적대로 대중의 폭력투쟁은 자유민주주의 또는 부분적인 자유주의 국가에서 ‘정부로 하여금 자유를 제한하도록 유도하기 쉽고 저항자와 사회전체에 더 큰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계층, 계급 및 성별 간의 연대도 어렵게 만든다(폭력시위에서 소외되고 마는 여성을 생각해 보았는가? 투쟁을 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도 집단 내에서 ‘안전’이라는 이름하에 여성을 소외시킬 수밖에 없다).

 

물론 쉬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정당성’을 외치며 주장하는 약자의 입장에서는 폭력으로 맞짱을 뜨는 것이 그리 현명한 전략적 선택이 아님은 분명하다. 힘 대 힘으로 맞붙는 논리는 ‘힘의 논리’를 비난하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약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민주노총의 성폭력 사건을 대하면서, 보수유한계급들을 향해 ‘그러는 너희는 얼마나 깨끗한데!’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짜증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깨끗해야만’ 한다. 저들과 같아지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는데, 하워드 진은 스페인 내전에 자신 참전했던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지 않았다. 즉 그는 모든 폭력과 전쟁을 뭉뚱그려 비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전쟁이 '너와 나'의 싸움으로 생긴 것이 아니건만, 전쟁옹호론자들은 반전주의자들을 비난할 때 항상 '너와 나'의 미시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려고 한다. 즉 반전주의자, 비폭력주의자에게 '그럼 내가 너 때릴 거니까 너 가만히 있어'라는 식으로 비난한다는 거다. 그러나 정작 전쟁옹호 자체 논리는 너무나도 거시적이다. 그러니 이건 분명 의도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동안 하워드 진이 전쟁과 관련하여 기고했거나 썼던 글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재향군인의 날이 이 따위로 전쟁 찬미의 구실이 되서는 안된다고 실명으로 글을 기고하였다. 그 날은 오히려 희생자들을 위로하고 앞으로는 전쟁 희생자와 참전 군인들을 양산하지 않겠다는 국가적 맹세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스스로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왔다.

 

나로서는 주요한 주장들을 모두 널리 읽고 주의 깊게 경청하긴 했지만, 냉정하면서도 거리를 두는 논평가 행세를 하지는 않겠다.

 

이 책의 미덕은, 하워드 진이 역사학자라는 것에 있다. 폭력과 전쟁은 나쁘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당위적인 외침만을 들려주지 않는다. 그는 각종 자료들을 이용하여 전쟁과 폭력의 '맥락'을 훑어간다. 그리고 그 맥락 속에서 그 침략이, 공습이, 폭격이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혀낸다.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무조건 '국가'를 사랑해야하는가? 우리가 사랑해야할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애국심은 불한당의 마지막 도피처이다"라는 새뮤얼 존슨의 유명한 말때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지속적으로 던져야 한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다(벙커에 들어가는 대통령을 보라). 저들이 왜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지, 왜 위기감을 고조시키려 하는지 냉정하게 바라봐야만 한다. 그리고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을 해야만 한다. 또 다른 희생자가 되기 싫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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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
존 브래드쇼 지음, 오제은 옮김 / 학지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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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리가 들린다. 그가 마리(Mary)를 혼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녀는 덜렁대고 품위도 없어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항상 마리를 혼내면서 나를 흘낏거리는 듯한 저이의 태도는 무엇일까? 나도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나도 마찬가지라는 뜻일까? 결혼 생활 3년째로 접어들었지만, 나는 이 황홀한 공간에서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난 항상 눈치를 봐야만 했고 점점 차가워지는 그를 보아야만 했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었기에 살이 조금 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내 외모가 아니었다면 그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물론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때를 정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계모와 두 딸에게 시원하게 복수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 때보다 행복한 걸까? 그렇겠지?

 

‘그리하여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맺음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는, 위와 같은 유치한 가정을 하지 않더라도 다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멋진 이성을 만났다고 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해서, 혹은 잔인한 복수를 했다고 해서 내면의 상처를 씻은 듯이 없앨 수 있을까?

 

이 책은 성장기에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그림자’를 단순히 우리 안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 잡은 ‘아이’로 인격화시킨 점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상 절반 정도는 실제적인 치유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만큼 저자는 내면아이의 치유가 왕자와 여주인공의 키스처럼 일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 쉽다고만은 할 수 없는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느껴라, 표현하라, 그리고 존재하라.

 

#2.

 

인지적인 중독(cognitive addictions)은 감정을 회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성인아이가 그들의 진짜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은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독서하고,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과 관련된다. 두 개의 문을 가진 방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각 문마다 그 위에 표시가 있다. 한쪽 방에는 ‘천국’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방에는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써 있다. 대부분의 상호의존적인 성인아이들은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쓰인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감정’을 통제할 것을 요구받는다. 물론 감정은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통제’의 의미 속에는,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감정을 감정으로 다스리는’ 것의 의미가 아닌 ‘억제’의 뜻이 너무나 강하다. 울어서는 ‘안되고’ 화내서는 ‘안되고’ 미워해서는 ‘안되고’. 맥락과 이유와는 상관없이 추상적인 특정 감정을 금지하고 만다. 처음에는 그것이 외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점차 그 강제는 내면화되어 간다. 이제 남은 것은 ‘감정표출’에 대한 ‘부끄러움’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즉 ‘아이’라는 본성을 없앨 수가 없기에 그런 강제는 역효과만을 불러올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냄새 맡듯이’ 느낄 필요가 있다. 여기 1년 전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한 쪽글을 올려본다. ‘내가 나의 비밀들을 나눌 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공감한다’는 브래드쇼의 말을 믿어보면서.

 

시각, 청각, 미각, 촉각, 그리고 후각.

 

손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바쁘게 걷는다. 오랜만에 차고 나온 손목시계가 이렇게 자주 쓰일 줄이야. 벌써 계산상 10분은 늦은 것 같다.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 지하철 환승 구간은 어쩔 수 없이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게 되는 구간이다. 확률이야 꼭 그렇지는 않을테지만, 기억 속엔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끼어들어가는 장면과 지금 막 출발하는 전철을 탄식 속에 보내야하는 두 가지 모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타인이 공존하는 지하철 같은 공간에서, 이제 나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지 않고는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오늘도 역시 귓속에는 음악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각기 다른 복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휙휙 지나치고 있고, 귀에는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입에서는 방금 씹기 시작한 껌의 단물이 느껴지고, 주머니에 질러 넣은 오른손 끝에서는 결코 신선하지 않은 350원 어치의 서늘함이 느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감각으로 '느끼고' 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아니,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일 테니 그럴지도. 하긴 이 '무감각한 감각'은 모두 내가 통제한 것들.

 

환승 구간을 절반 정도 지나쳤을 때일까.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번뜩 알아챈다. 델리만주. 그래 이건 델리만주 냄새다. 델리만주 냄새라는 것을 나의 뇌가 알아채기 전에, 나는 이미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전신으로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 아이. 그 아이는 지하철에서 파는 델리만주 냄새를 너무 좋아했다. 물론 그것을 사서 먹는 것도 좋아하긴 했지만, 지나치면서 엉겁결에 맡게 되는 그 냄새를 참 좋아했다. 내가 선별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냄새는 벌써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와 기억이 되어 전신에 퍼져나간다. 냄새는 나의 뇌가 더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그 아이의 얼굴, 목소리, 감정, 그 밖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나에게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슴에 턱하니 올려놓는다.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장면을 상상하기도 하는 나지만, 후각이 찔러대는 그 힘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토요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소릇이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밥 냄새. 수요일 저녁 반주 한 잔을 하시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작업복에서 배어나오던 바람 섞인 쇠냄새. 종이에 손을 베어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지혈할 때 코로 올라오던 비릿한 피냄새. 수술 후 마취가 풀리는 순간에 접합 부분에서 오는 고통을 낮은 신음 소리로 눌러가며 참으시던 어머니의 땀내와 입냄새. 제초작업 시기만 되면 막사 부근을 뒤덮었던 풀 베는 냄새. 밤새 논쟁을 벌이고 깨지는 머리를 잡고 일어날 때 입안을 가득 메우던 막걸리내.

 

내가 20년 가까이 한 가지 화장품만을 고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바뀌는 냄새에 새로 적응할 용기가 내겐 없는 것이고, 냄새는 나를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날 저녁의 델리만주 냄새는, 그래서 슬펐다.

 

그렇다. 후각은 다른 감각과는 달리, 우리가 통제하기 힘들다.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복잡한 계산을 거치지 않고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느낌을 글로 표현했을 때, 그 슬픔이 온전히 슬픔이 되었고 나는 그 슬픔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다. 모순적인 표현일지는 모르나 그 감정이 오롯이 보존되고 표현될 수 있을 때, 나는 그 감정이 아닌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려고만 할 때, 우린 인지적 중독이나 감정적 중독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3.

 

탁월한 융분석가인 마리온 우드만(Marion Woodman)은 교황이 토론토를 방문했을 때, 교황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간 한 여성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여자는 교황의 사진을 찍기 위해 복잡한 카메라 도구 세트들을 가득 챙겨 갔다. 그런데 카메라를 조작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교황이 지나갈 때에 간신히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찍을 수 있었다. 정작 자신의 눈으로는 교황을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사진을 현상했을 때, 그 사진에는 그녀가 보러 간 교황은 거기 있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그 사진 속에 없었다. 그녀는 그 경험 속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문단이 ‘공허감(무관심, 우울)’이라는 소제목으로 묶여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공허감, ‘비존재’의 느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3년 전에 금강산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사진기를 뺏겼었다. 당시 사진찍기에 몰두하고 있었던 나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진기를 돌려받은 마지막 날보다도 그 앞의 날들, 그리고 그 날들의 풍경들이 훨씬 더 인상 깊게 남아있다. 비록 그날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지만,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들이대던 시간들은 말 그대로 카메라 앵글에 갇혔을 뿐이었다. 여전히 사진찍기는 내 취미지만, 그 이후로 사진찍기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매우 간단한 사실이다. 사진은 ‘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감정을 나와 동격으로 놓거나 반대로 그 감정을 무시해버릴 때 우린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존재의 상황에서 나의 내면아이는 또 상처 받고 만다. 비록 이 책에서는 내면아이가 상처를 받을 때 공허함을 느낀다고 했지만,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내가 나의 이름으로 역사를 쓰는 것도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역사를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고. 그러나 이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 그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역사-그러니까 국가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버려둔 채, ‘국사’만을 파고드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여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나’가 소외된 역사 속에서 우린 또 상처 받고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주변의 역사’가 소외된 ‘나’ 또한 공허하다).

 

남대문이 잿더미로 변한지 1년이 되었다. 언젠가 남대문은 깨끗하게 복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깨끗한 오늘’이 남대문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복원된 남대문만을 남대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왜곡이다. 왜 지금 이렇게 깨끗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내가 머릿속에서만 만들어왔던 나의 역사를 꼼꼼히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그 ‘더듬음’의 과정 속에서 빛바랜 ‘나’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 여기 서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브래드쇼가 말하는 내면아이 치유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업은 다른 누가 해줄 수 있는 그런 작업이 아니다. 조 코뎃(Jo Courdet)의 표현대로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당신만이 당신을 절대로 떠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다.” 조금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를 절대로 떠나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때문에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내면아이를 위함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나를 위함이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일지라도 진정한 어른의 삶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아이가 미래에 되어야 할 적합한 모델은 어른이다.

 

사실 이 책은 방법론이 절반 정도된다. 그만큼 '실용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에 비해 생김새는 무슨 대학교재처럼 생겼다. 그래서 선뜻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일 수 있으며, 내용 또한 그리 만만하지 않다. 또 딱히 내 취향과도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한 번쯤 이 책의 1, 2장까지는 빠르게 읽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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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는 시내버스
안건모 지음 / 보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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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에게는 A4 한 장 정도의 글을 쓰는 것이 별일 아닐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아니, 어려운 일을 넘어서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이지만, 글쓰기 또한 많은 노력과 훈련을 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노력’과 ‘훈련’이 주로 정규교육과정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혹은 그렇게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들을 하기 때문에) ‘노동자’와 ‘글쓰기’ 사이에는 적지 않은 거리가 느껴진다. 그 거리감은 노동자를 바라보는 먹물들의 시선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노동자 스스로도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 노동자, 아니 우리 모두가 글을 써야하는 이유가 있다.

 

현대사 연구에 있어 ‘구술사’라는 연구방법이 유행이다. 물론 유행(?)에 걸맞은 성과물이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새로운 연구 방법으로 주목을 받는 것만은 사실이다. 기록을 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하는 주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구술사는, 현대사 연구에 있어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구술사는 오히려 문자화된 역사보다 영상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영상에 직접 담겨 우리에게 보여질 때, 그것은 제3자의 펜으로 기록된 것보다 큰 힘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영상이라는 것도 결국은 제3자의 시선이므로, ‘자신의 목소리’라고 말하기엔 여전히 부족하다. 만약 구술로 증언한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논리와 플롯을 가지고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장 먹물티 나는 ‘글쓰기’야 말로 어찌 보면 가장 손쉬운 목소리내기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놓고 생각해보자. 버스기사였던 저자 안건모의 ‘글’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버스회사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버스기사가 어떤 근로조건 하에서 일을 하는지 알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냉정하게 말해서 애초에 관심도 없었을지 모른다. 택시를 타면 가끔 운전하면서 여러 가지로 툴툴대시는 기사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사실 이 책의 글 또한 그렇게 다가올 수 있는 내용이다. 생각해보라. 버스기사들의 생활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나 하나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그럼에도 이 책의 글들은 우리가 종종 듣곤 하는 불평불만의 수준을 이미 뛰어 넘고 있다. 왜? 저자 안건모가 투철한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전사라서?

 

나 자신도 먹물이기 때문에 가지는 선입견일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엔 이게 바로 글의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생한 목소리로 현장의 불평을 들을 때는 시큰둥했던 것이, 글을 통해 한 가지 소재로 집중하면서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제 책을 다 읽은 독자들은 괜시리 버스기사와 버스회사에 대해 무엇인가 많은 것을 아는 듯한 이상한 ‘의기양양함’마저 생길지도 모르겠다. 책의 뒷부분에 나오는, 저자가 처음 책을 접했던 순간도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 책은 나를 어둠에서 처음으로 끌어내고,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294쪽)

 

세상에서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것은 현장 노동자들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다. 우리도 이 책을 접하게 되면서 세상의 ‘다른 한편’을 볼 수 있게 된다. 내가 이 책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버스 파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평생 알지 못했으리라.

그런데, 내가 왜 버스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위장취업을 해가며 투쟁하고 연대하던 그 시대는 이미 추억으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 1980년대와 2000년대는 분명 다르다. 사회의 분위기도 그러할 것이고 노동현장의 분위기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린 다른 이들이 목소리를 들어야하고 또 나의 목소리를 내야만 한다. 왜?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 꼴’이라 하는가. 정작 싸움 붙인 사람들은 뒤에서 느긋하게 즐기고 있다. 누구인가. 시내버스 사업주와 정부가 싸움을 붙인 장본인이다. 결국 피해자는 시민과 운전사들이다. (25쪽)

 

재벌과 언론들은 ‘1달러 모으기 운동’, ‘금 모으기 운동’으로 우리 서민들을 헷갈리게 하고 있다. 그런 운동은 나라 경제가 이 꼴이 된 게 우리 탓인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76쪽)

 

어느덧 ‘지난 일’이 되어버린 용산참사를 기억하는가? 생존권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명령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이 가장 치열한 순간에 충돌했다. 그 비참한 현장에 있는 이들과 ‘다른’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쏙 빠져있다. 처참한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볼 수밖에 없는 우리는 저 ‘충돌’이 누구와 누구의 충돌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난은, ‘옥상에 올라간 테러리스트’들과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경찰특공대원’들에게 쏟아지게 된다. 아니, 비난을 하는 ‘우리’조차 서로 엉겨 붙어 싸우게 된다. 자, 한 발 떨어져 바라보자. 이것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이게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었던가?(이런 의미에서 ‘경찰노조’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홍구 교수의 견해는 충분히 동의할 만하다.) 어느덧 우리는 우리 스스로도 모르게 잔인한 격투기의 링 위에 올라있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링 위에. 하지만 살아남는다고 해서 결코 ‘강자’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여기 이 ‘링의 법칙’이다.

 



혁명이 되거나, 착취가 아닌, 수탈 구조가 돼요. …(중략)… 정상적인 계급 구조와는 좀 달라요. 전통적인 구조는 위에 있는 놈들이 밑에 있는 사람들한테 일을 시키고 임금을 안 주는 건데, 여기는 일도 안시키려고 해요. “놀아”. 착취를 할 게 없잖아요. 비정규직이라도 해야 뭘 착취당할 거 아니예요. 죽거나 말거나 관심 없어요. 사실 지배, 피지배 구조만 되도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을 텐데. ‘열심히 일해라’가 아니고, ‘열심히 공부하고 싫으면 놀아라.’ 그러면 사람들은 ‘아, 내가 놀아서 계속 놀게 된 거구나’ 생각하게 되겠죠. (《작은책》2008년 12월호 기획특집 ‘신자유주의가 어디까지 갈까 - 우석훈 강의’)

 

위에서 억압하는 자들은 따로 있는데, 우리는 현장에서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싸운다. 아니 오히려 더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과 싸운다. 손님은 버스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고 멱살을 잡는다. 기사는 니가 뭔데 막말이냐며 욕을 내뱉는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싸워야할 근본적인 이유가 과연 나와 당신에게만 있는 것일까? 안건모의 말대로 그건 핑계일 뿐이다.

 

내가 기사들한테 왜 우리가 누려야 할 당연한 우리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냐고 하면 대개 이런다.

“건모 형은 나이가 많고 고참이잖아. 나 같은 쫄따구랑 어떻게 같아?” “안건모 씨는 그래도 집이 안정돼 있잖아.” “건모는 아는 게 많잖아.”

…(중략)…

하지만 노동조합이 힘이 있다는 것은 조합원들 하나하나가 그런 권리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는 회사에 찍힐까 봐 뒤로 빠지고 지부장한테 다 미뤄 버리면 지부장은 어쩌란 말인가. 이를테면 연 ․ 월차휴가를 회사가 안 받아 주면 “우리 노동자들 권리인데 왜 안 받아 주는 거야?”하고 싸워야지 회사한테 네! 알았어요. 하고 나온 뒤 “씨발, 노동조합이 약해서 그래!”하면 장땡인가?

나는 내 권리를 노동조합이나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지금 고참이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 나이보다 더 어릴 때부터 부당한 대우에 맞서 싸웠고, 지금보다 생활이 더 어려울 때도 싸웠다. 그리고 노동법이니 근로기준법이니 아무것도 모를 때도 싸웠다. 기사들이 말하는 건 다 핑계다.(179쪽)

 

물론 기사의 입장에서 쓴 글을 기사가 아닌 내가 모두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아니, 같은 기사라고 할지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미 ‘글쓰기’라는 권력의 도구를 선점한 셈이다. 다른 생각이 있는 기사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만할 뿐, 실체는 알 수 없으니). 하지만 기사와 손님이 제대로 싸우려면 뭔가 알아야할 것이 아닌가? 그래야만 서로를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싸움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는 글을 써야 한다. 그리고 정말 웃긴 이야기지만, 글을 쓰는 우리도 노동자가 되어야 한다. 직업적 글쓰기도 노동의 한 종류라는 것을 모른척하지 말아야 한다. 너와 나의 같음과 다름을 인지하는 것. ‘연대’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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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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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문학을 전공한 세 명의 여성이 쓴 조선시대 14명의 여성에 대한 글을 모은 책.

사실 이런 류의 책에 실망한 적이 많아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대를 안해서인지는 몰라도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가장 기억이 남는 여성은 이옥봉.

 

강은 갈매기 꿈을 품어 넓고                  江涵鷗夢闊

하늘은 기러기 슬픔에 들어와 멀다          天入雁愁長

 

  번역하기 어려운 시란 이런 시일 것이다. 어려운 글자도 없건만, 번역을 해놓으면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비문이거나 반쪽이 된다. 워낙 교묘하게 말을 놓았다. 강이 갈매기의 꿈을 적시고 하늘이 기러기의 슬픔으로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고, 거꾸로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이 강과 하늘에 들어와 담기는 것을 수도 있는 문법구조이다. 그래서 넓고 먼 것이 갈매기의 꿈과 기러기의 슬픔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강과 하늘일 수도 있게 만들어놓았다. 넓고 먼 강과 하늘은 철새인 갈매기나 기러기와 사슬처럼 얽히며 더욱더 넓고 멀어진다. 동시에 물에 젖은 꿈도, 하늘에 번진 슬픔도 아득히 넓고 멀어진다. 가을 하늘에 깔리는 깃털 구름처럼 여러 겹의 정서적 결이 서로 약간씩 어긋나며 잔잔히 이어지도록,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문법구조 속에 짜 넣었다. 표의문자인 한자의 특징을 시적인 애매성으로 기막히게 살려낸 경우이다. 가를 모를 쓸쓸함과 맑고 유장한 호흡이 이런 의도적 모호성과 다의성 속에 녹아 있다. 이런 시를 두고, 읽으면 읽을수록 말 밖에 무한한 정취가 있다고 하는 것일 터이다.

 

이렇게 멋진 시를 지어낼 문재가 있었던 여성은, 그러나 조선의 여성이었다. 하긴 굳이 조선이 아니더라도 상황이 크게 다르진 않았을테지만.

저자는 이옥봉의 도도함 속에서 컴플렉스를 발견해낸다. 아니, 직접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옥봉은 그(정실의 아들 조희철)를 향해, 그대의 글씨는 바람도 놀래키고, 내 시는 귀신도 울린다고, 그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나란히 부각시킨다. '귀신도 울린다'는 것이 애당초 이태백의 시를 지칭하는 말이니, 그녀 자신, 이태백에 필적하는 시인이라는 도도한 자부심의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비록 소실이지만 예술적 재능으로 집안의 명성을 드높인다는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이 도도한 선언에서는 역설적으로 옥봉의 신분적 컴플렉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이 교유한 인물들과 조원(남편)의 나이 차이가 그다지 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보면, 아마도 옥봉은 조원과 나이 차가 많았을 것이다. 오히려 세대로는 조희철의 세대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더할 나위 없는 명예가 모두 어린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일 것이다. 그 적자를 향해 '모자'라고 내세우는 그녀의 힘겨운 자존심이 안타깝다. 소실을 자처해 예술가로서 삶을 선택했던 그녀의 자의식에 놓인 분열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그밖에 열녀의 '현실적' 모습을 보여주는 풍양 조씨의 '자긔록'이나, 현실과 욕망의 뒤얽힘을 보여주는 김삼의당의 경우도 매우 흥미롭다.

 

아무래도 이 책의 저자들이 여성이라는 점이 꽤 긍정적으로 작용한듯 싶다.

'나'로부터 출발하는 문제의식은 언제나 진지하고, 보통 이상의 것을 끌어내는 법.

때문에, 나에게 가장 솔직한 것이 타인들의 동감을 얻어내기에도 쉬운 방법인 셈이다.

 

책 표지를 검은색으로 하는 것은 종종 도박일 때가 많다. 그만큼 예쁘고 깔끔하게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듯.

그런 의미에서 표지도 그럭저럭 괜찮은데, 아쉬운 것은 제목. 내용에 비해 다른 그런저런 책들과 차별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너무 섹시한 제목을 뽑으려 노력한 탓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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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
오주석 지음 / 솔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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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놓은지 백만년은 된 것 같은데, 이제서야 읽게 된 책.

 

어느새 '한국의 미', '우리 문화의 힘' 따위의 말에 근거 없는 거부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래서 저자의 머리말도 그닥 와닿지 않았었다. '월드컵 4강', '조상들의 문화와 예술', '자긍심' 따위의 단어들은 되려 거부감만 들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특강'을 듣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이런 거부감을 일소에 없애버릴만큼 재미가 있다.

재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 '배웠다'라는 느낌을 분명히 받을 수 있는 책이다.

저자가 알려주는 그림을 볼 때 알고 있어야할 기본적인 요령을 알고 그림을 보니, 정말 저자의 말대로 보이는 신기한 체험을 했다.

왼쪽위에서 오른쪽 아래로 그림을 훑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즉 옛사람들의 방식대로 그림을 보니 감상 또한 물흐르듯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안목'이란 것을 생각하게 되고, 알아야 그리고 사랑해야 볼 수 있다는 말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시이불견視而不見'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볼 시視 자에 볼 견見 자, "보기는 보는데  보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청이불문聽而不聞', 들을 청聽 자, 들을 聞 자, "듣기는 듣는데 들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보고 듣는데 왜 안 보이고 안 들릴까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애초 찬찬히 보고 들을 마음에 없이 건성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앞 글자 둘을 합하면 시청각 교실이라고 할 때 시청視聽이 되죠? 뒤 글자를 합하면 체험한다는 견문見聞이 됩니다. 아무리 시청각 교실에 앉아 있어도 마음이 다른 데 가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고 들리지 않습니다.

 

꼼꼼이 뜯어보고 곱씹어보고, 그러면서 그림을 느끼고 사랑하게 된 저자가 그대로 드러나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

이제 나의 근거 없는 거부감에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나의 냉소가 선생의 애정에 비할 가치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때문에 강좌의 끝맺음에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제가 이십대 후반에 호암미술관에서 큐레이터(박물관 학예연구직)로 근무했을 때 일을 소개하면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그때 중국회화사의 세계적 대가인 제임스 캐힐James Cahill 박사가 캘리포니아 대학에서 오셨어요. 당시 나이가 벌써 육십이 넘으셨는데 정말 세계적인 학자이기 때문에 "아, 그분은 우리나라의 명화들을 과연 어떻게 감상하실까? 대학자니까 뭔가 보는 눈빛부터 다르겠지"하고는 2,3일 전부터 잔뜩 긴장해 가지고 목욕도 깨끗이 하고 옷도 쫙 빼입고, 그러고서 손님을 기다렸습니다. 저는 그분이 적어도 한 두세 시간은 꼬박 그림을 볼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아니, 이분이 그림을 별로 오래 보지 않는 겁니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동안에 벌써 이쪽 코너를 돌아서 다시 저쪽 구석으로 또 꺾어졌습니다. 즐비한 국보, 김홍도의 <군선도>며 정선의 <금강전도>며 <인왕제색도>며, 그야말로 눈부신 우리 명작들을 너무 짧은 시간에 대충 보고 지나가고 또 보곤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서화실을 거의 다 둘러봤을 무렵에는 제 속이 부글부글 끓어가지고, 정말이지, 막말로 쌍시옷 자가 튀어나올 지경이 되었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중국 그림은 그렇게 대단하고, 우리 것은 하찮다는 것이냐? 머릿속에 별별 생각이 다 들더군요. 그런데 마지막 그림을 지나쳐서 도자실로 막 넘어가기 직전에, 이분이 갑자기 우뚝 섰습니다. 그러더니 아주 정색을 하고는 마지막 그림을 꽤 긴 시간 유심히 보는 거예요. 그래서 그만 저의, 불같이 솟았던 화가 눈녹듯 싹 풀렸습니다. 그것이 무슨 그림이었느냐 하면 추사 선생님의 제자 중에 고람 전기(1825~1854)라는 분이 그린 <귀거래도>라는 그림인데, 이 작품은 그 전시실 안에 있던 그림 중에서도 가장 중국풍이 두드러진 그림이었어요. 가장 중국적인 그림, 말을 뒤집으면 가장 한국적이지 않은 그림! 캐힐 박사 이 양반은 중국 그림을 연구하는 분이니까 바로 그것을 주목했던 것입니다. 박사의 눈에는 오직 중국 그림과 닮은 것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 분에게 마냥 주눅이 들어 있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국 그림은 이러저러한 풍토와 역사 환경 속에서 탄생한 것으로서, 우리 옛 그림은 중국이나 일본과는 다르게 이러저러한 독특한 장점이 있는 예술품이다, 하고 오히려 가르쳐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당시 제가 나이는 어렸지만, 마땅히 또 당당히 그렇게 설명 드렸어야 했어요. 예를 들어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흔히 음악의 제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카라얀이야 서양 음악의 제왕이면 제왕이지, 판소리의 제왕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전통 음악에 대해서는 저만큼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옛 그림을 보고도 느끼셨겠지만 건축이며, 도자기며, 옷이며, 춤이며,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한국의 전통 문화는 중국, 일본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실은 완전히 속내가 다릅니다. 춤을 춰도 춤사위가 아주 걸지고 씩씩하며, 음악도 삼박자에 농현이 출렁출렁해서 속 맛이 아주 깊습니다. 전혀 차원이 다른 예술 세계입니다. 사실 세상에 예술이며 문화만큼 울타리가 높은 것은 없습니다. 예술에 국경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술의 국경이야말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습니다.

 

얼핏 단순한 국수주의자의 말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림 하나를 꼼꼼하게 '공부'하고 '분석'하여 그림을 그리고 화가를 느끼는 태도.

또 그것을 쉽게 풀어내는 오주석 선생의 '강의'를 듣다보면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정말 재미있게, 천천히 곱씹으면서 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편집 또한 굉장히 맘에 든다.

 

대상을 사랑하는 진지한 마음, 그것 하나만으로도 제3자를 충분히 끌어들일 수 있다는 진리를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 다시 묻게 된다. 지금 너는, 무엇을 사랑하느냐고.

 

너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안타깝다. 틈틈이 선생의 다른 책들도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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