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리가 들린다. 그가 마리(Mary)를 혼내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그녀는 덜렁대고 품위도 없어서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항상 마리를 혼내면서 나를 흘낏거리는 듯한 저이의 태도는 무엇일까? 나도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그러니까 나도 마찬가지라는 뜻일까? 결혼 생활 3년째로 접어들었지만, 나는 이 황홀한 공간에서 단 한 순간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난 항상 눈치를 봐야만 했고 점점 차가워지는 그를 보아야만 했다.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풀었기에 살이 조금 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의 태도는 더욱 냉담해졌다. 내 외모가 아니었다면 그는 나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지금은 나를 사랑하고 있을까? 물론 결혼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때를 정말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 나를 못 잡아먹어 안달하던 계모와 두 딸에게 시원하게 복수를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닌 것 같다. 나는 그 때보다 행복한 걸까? 그렇겠지?
‘그리하여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맺음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는, 위와 같은 유치한 가정을 하지 않더라도 다들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잘 알고 있는 사실을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자. 멋진 이성을 만났다고 해서,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해서, 혹은 잔인한 복수를 했다고 해서 내면의 상처를 씻은 듯이 없앨 수 있을까?
이 책은 성장기에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우리가 앞서 보았던 ‘그림자’를 단순히 우리 안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내면에 자리 잡은 ‘아이’로 인격화시킨 점이 바로 그것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책의 구성상 절반 정도는 실제적인 치유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만큼 저자는 내면아이의 치유가 왕자와 여주인공의 키스처럼 일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 쉽다고만은 할 수 없는 책이기는 하지만, 이 책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느껴라, 표현하라, 그리고 존재하라.
#2.
인지적인 중독(cognitive addictions)은 감정을 회피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성인아이가 그들의 진짜 고통을 회피하는 방법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다. 이것은 강박적으로 생각하고, 분석하고, 토론하고, 독서하고,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과 관련된다. 두 개의 문을 가진 방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각 문마다 그 위에 표시가 있다. 한쪽 방에는 ‘천국’이라고 쓰여 있고, 다른 방에는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써 있다. 대부분의 상호의존적인 성인아이들은 ‘천국에 대한 강의’라고 쓰인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감정’을 통제할 것을 요구받는다. 물론 감정은 스스로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통제’의 의미 속에는,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감정을 감정으로 다스리는’ 것의 의미가 아닌 ‘억제’의 뜻이 너무나 강하다. 울어서는 ‘안되고’ 화내서는 ‘안되고’ 미워해서는 ‘안되고’. 맥락과 이유와는 상관없이 추상적인 특정 감정을 금지하고 만다. 처음에는 그것이 외부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점차 그 강제는 내면화되어 간다. 이제 남은 것은 ‘감정표출’에 대한 ‘부끄러움’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사람이기에, 즉 ‘아이’라는 본성을 없앨 수가 없기에 그런 강제는 역효과만을 불러올 뿐이다. 때문에 우리는 ‘냄새 맡듯이’ 느낄 필요가 있다. 여기 1년 전 개인 블로그에 올렸던 한 쪽글을 올려본다. ‘내가 나의 비밀들을 나눌 때,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공감한다’는 브래드쇼의 말을 믿어보면서.
시각, 청각, 미각, 촉각, 그리고 후각.
손목시계를 연신 들여다보며 바쁘게 걷는다. 오랜만에 차고 나온 손목시계가 이렇게 자주 쓰일 줄이야. 벌써 계산상 10분은 늦은 것 같다. 약속시간에 늦었을 때, 지하철 환승 구간은 어쩔 수 없이 '더 빨리, 더 빨리'를 외치게 되는 구간이다. 확률이야 꼭 그렇지는 않을테지만, 기억 속엔 닫히는 지하철 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끼어들어가는 장면과 지금 막 출발하는 전철을 탄식 속에 보내야하는 두 가지 모습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타인이 공존하는 지하철 같은 공간에서, 이제 나는 이어폰으로 귀를 막지 않고는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오늘도 역시 귓속에는 음악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각기 다른 복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휙휙 지나치고 있고, 귀에는 음악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입에서는 방금 씹기 시작한 껌의 단물이 느껴지고, 주머니에 질러 넣은 오른손 끝에서는 결코 신선하지 않은 350원 어치의 서늘함이 느껴진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내 감각으로 '느끼고' 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아니,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일 테니 그럴지도. 하긴 이 '무감각한 감각'은 모두 내가 통제한 것들.
환승 구간을 절반 정도 지나쳤을 때일까. 내가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을 번뜩 알아챈다. 델리만주. 그래 이건 델리만주 냄새다. 델리만주 냄새라는 것을 나의 뇌가 알아채기 전에, 나는 이미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전신으로 기억해내고 있었다. 그 아이. 그 아이는 지하철에서 파는 델리만주 냄새를 너무 좋아했다. 물론 그것을 사서 먹는 것도 좋아하긴 했지만, 지나치면서 엉겁결에 맡게 되는 그 냄새를 참 좋아했다. 내가 선별하고 판단하기 이전에, 냄새는 벌써 내 몸 속으로 흘러들어와 기억이 되어 전신에 퍼져나간다. 냄새는 나의 뇌가 더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그 아이의 얼굴, 목소리, 감정, 그 밖의 모든 것을 무시하고 나에게 슬픔이라는 감정을 가슴에 턱하니 올려놓는다.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 장면을 상상하기도 하는 나지만, 후각이 찔러대는 그 힘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토요일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의 문을 열었을 때, 소릇이 방 안을 가득 채웠던 밥 냄새. 수요일 저녁 반주 한 잔을 하시고 들어오신 아버지의 작업복에서 배어나오던 바람 섞인 쇠냄새. 종이에 손을 베어 손가락을 입에 물고 지혈할 때 코로 올라오던 비릿한 피냄새. 수술 후 마취가 풀리는 순간에 접합 부분에서 오는 고통을 낮은 신음 소리로 눌러가며 참으시던 어머니의 땀내와 입냄새. 제초작업 시기만 되면 막사 부근을 뒤덮었던 풀 베는 냄새. 밤새 논쟁을 벌이고 깨지는 머리를 잡고 일어날 때 입안을 가득 메우던 막걸리내.
내가 20년 가까이 한 가지 화장품만을 고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바뀌는 냄새에 새로 적응할 용기가 내겐 없는 것이고, 냄새는 나를 필요 이상으로 민감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날 저녁의 델리만주 냄새는, 그래서 슬펐다.
그렇다. 후각은 다른 감각과는 달리, 우리가 통제하기 힘들다. 익숙해질 수는 있지만 복잡한 계산을 거치지 않고 바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느낌을 글로 표현했을 때, 그 슬픔이 온전히 슬픔이 되었고 나는 그 슬픔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다. 모순적인 표현일지는 모르나 그 감정이 오롯이 보존되고 표현될 수 있을 때, 나는 그 감정이 아닌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이런 과정을 무시하거나 억누르려고만 할 때, 우린 인지적 중독이나 감정적 중독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3.
탁월한 융분석가인 마리온 우드만(Marion Woodman)은 교황이 토론토를 방문했을 때, 교황을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간 한 여성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여자는 교황의 사진을 찍기 위해 복잡한 카메라 도구 세트들을 가득 챙겨 갔다. 그런데 카메라를 조작하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교황이 지나갈 때에 간신히 단 한 장의 사진만을 찍을 수 있었다. 정작 자신의 눈으로는 교황을 보지도 못한 채 말이다. 사진을 현상했을 때, 그 사진에는 그녀가 보러 간 교황은 거기 있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그 사진 속에 없었다. 그녀는 그 경험 속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문단이 ‘공허감(무관심, 우울)’이라는 소제목으로 묶여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공허감, ‘비존재’의 느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3년 전에 금강산을 갈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사진기를 뺏겼었다. 당시 사진찍기에 몰두하고 있었던 나는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사진기를 돌려받은 마지막 날보다도 그 앞의 날들, 그리고 그 날들의 풍경들이 훨씬 더 인상 깊게 남아있다. 비록 그날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지만,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들이대던 시간들은 말 그대로 카메라 앵글에 갇혔을 뿐이었다. 여전히 사진찍기는 내 취미지만, 그 이후로 사진찍기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매우 간단한 사실이다. 사진은 ‘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감정을 감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감정을 나와 동격으로 놓거나 반대로 그 감정을 무시해버릴 때 우린 존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비존재의 상황에서 나의 내면아이는 또 상처 받고 만다. 비록 이 책에서는 내면아이가 상처를 받을 때 공허함을 느낀다고 했지만, 그 반대의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내가 나의 이름으로 역사를 쓰는 것도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역사를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나’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알아야만 한다고. 그러나 이 말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아는 것과 나를 아는 것, 그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물론 역사-그러니까 국가의 역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얘길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버려둔 채, ‘국사’만을 파고드는 것이 ‘나를 알아가는 여정’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나’가 소외된 역사 속에서 우린 또 상처 받고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주변의 역사’가 소외된 ‘나’ 또한 공허하다).
남대문이 잿더미로 변한지 1년이 되었다. 언젠가 남대문은 깨끗하게 복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깨끗한 오늘’이 남대문 그 자체가 될 수 있을까. 복원된 남대문만을 남대문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왜곡이다. 왜 지금 이렇게 깨끗한 고풍스러운 건물이 서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동안 내가 머릿속에서만 만들어왔던 나의 역사를 꼼꼼히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그 ‘더듬음’의 과정 속에서 빛바랜 ‘나’가 아니라, 오히려 오늘 여기 서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브래드쇼가 말하는 내면아이 치유가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작업은 다른 누가 해줄 수 있는 그런 작업이 아니다. 조 코뎃(Jo Courdet)의 표현대로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 중에서 당신만이 당신을 절대로 떠나거나 잃어버리지 않을 유일한 사람이다.” 조금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나를 절대로 떠나거나 잃어버릴 수 없다’. 때문에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것은 내면아이를 위함이 아니라 바로 오늘의 나를 위함이다.
아무리 훌륭한 아이일지라도 진정한 어른의 삶의 모델이 될 수는 없다. 아이가 미래에 되어야 할 적합한 모델은 어른이다.
사실 이 책은 방법론이 절반 정도된다. 그만큼 '실용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에 비해 생김새는 무슨 대학교재처럼 생겼다. 그래서 선뜻 손이 잘 가지 않는 책일 수 있으며, 내용 또한 그리 만만하지 않다. 또 딱히 내 취향과도 맞지 않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래도 한 번쯤 이 책의 1, 2장까지는 빠르게 읽을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