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왜 쉬쉬하지? - 죽음을 알아야 삶이 보인다 청소년을 위한 세상읽기 프로젝트 Why Not? 3
실비 보시에 지음, 고아침 옮김, 베로니크 데스 그림 / 개마고원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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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세상 읽기 프로젝트. Why not? 시리즈의 세 번째 책.

100페이지 조금 넘는 책의 분량이나 글씨의 크기 등을 고려하면,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수식이 '깊이가 없다'로 받아들여 질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으며, 오히려 죽음에 대해서 중요한 부분을 빠뜨리지 않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아니, 설명이라기보다는 문제제기에 가깝지만, 사실 '죽음'에 대한 문제제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적은 분량 속에, 그것도 매우 쉽게 이런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저자의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알려준다.

죽음이 일종의 실패로 간주된다는 '금기'서부터 시작하여, 죽음의 처리 방식, 죽는 방식, 타인의 죽음, 자살 등의 폭넓은 주제가 다뤄진다.

따라서 청소년이 아니더라도 죽음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개설서로서도 굉장히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심이 있는 것은, 그 주제 자체가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엄청난 주제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들, 예를 들어 자살, 유서, 안락사, 매장, 화장 등의 주제만이 아니라

폭력, 노화, 이미지, 공포, 타부, 심지어 권력과 계급까지 여러가지 주제를 포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죽음이다.

아직까지도 국내에 죽음에 대한 깊이 있는 저서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게 또 이 주제의 어려움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이 주제를 '다룰' 것인가. 일단은 석사 때 조금 건드렸었던 '화장'의 문제를 발전시켜볼 생각이다.

그리고 박사논문 때는 유서와 유언, 유산, 그리고 매장 방식에 대해서 역사적 고찰도 시도해볼 예정.

음. 써놓고 보니 정말 쉽지 않구만. -_-...

 

어쨌거나 이 책의 마지막에 인용된 다음의 글은 재미있으면서도 꽤나 시사하는 바가 많다.

 

- 의사선생님, 제발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사실을 전부 말해 주세요, 알아야겠어요.

- 말하자면, 나쁜 소식입니다. 어느 검사 결과로 보나, 환자분은, 음... 그... 아주 더디게 진행되는 병에 걸리셨고, 그... 병의 주요 특징은... 그러니까... 세포의 퇴화와....

- 저기요, 분명하게 말해 주세요! 제가 암에 걸렸나요?

- 그러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게 아니고요.

- '돌이킬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죽을병인 거죠? 그러니 암이네요, 솔직히 말해주세요. 저... 저는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을까요?

- 어디 보자, 그 말은 맞습니다. 살날이 한정돼 있으세요. 제가 봤을 때, 아주 운이 좋아도 앞으로 삼사십 년 정도 밖에 더 못 사십니다, 최대한.

- 아니, 암이 아니면 그 병명이 대체 뭡니까?

- 그게... '삶'이란 병입니다.

- '삶'이라고요? 선생님 말씀은 그러니까 제가....

- 네, 살아 있다는 거죠. 유감입니다.

- 아니, 제가 어디서 그따위 잡스런 것에 걸린 거예요?

- 불행히도 유전병입니다. 위로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만, 전세계적으로 굉장히 보편적인 병이랍니다.

 

피에르 데프로주, '죽음을 기다리며 행복하게 삽시다'에서(쇠이유 출판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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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회에는 이견이 필요한가
카스 R. 선스타인 지음, 박지우.송호창 옮김 / 후마니타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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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책상에 올려 놓은 이 책을 보고 후배 녀석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왜 필요하냐고? 당연히 필요한 거 아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당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왜'라는 질문에 논리적/합리적으로 답할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저 '정당성'에 함몰되어 그 타당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에 대한 문제제기. 당위성의 근거 강화를 위한 심화.

 

이 책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는 굉장히 간단하다.

 

많은 경우, 대중의 뜻을 따르는 것은 개인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사회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들은 구성원들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지 않고, 좀 더 활발하게 이견을 제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노력은 부분적으로는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만, 실질적인 목적은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즉, 그 동안 우리가 '소수자의 의견 존중'이라는 당위성의 측면에서 이견을 존중해야 한다고 이야기해왔다면,

이 책의 저자는 이견을 존중하는 것 자체가 결국 사회 전체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동조'의 개념과 '집단 편향성'의 개념을 많이 사용한다.

'동조'는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 못한 채 집단 혹은 권위에 억눌려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집단 편향성'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토론을 거칠 때 더 극단적인 결정을 하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물론 저자가 이 두 현상이 무조건적으로 나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현상들이 종종 합리적인 판단을 저해한다고 본다.

이럴 때, '적어도 한 명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면 동조로 인한 실수는 모두 극적으로 줄어든다'는 점이 바로 이견의 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이견'의 가치를 최대화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 있을까? 그 방안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조직 안에서 이견을 익명으로 밝힐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방법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집단 편향성이 극단화되지 않도록 소수집단을 소통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환경 조성도 중요하다.

만약 이것에 성공할 경우, 사회전체적으로 이익이 될 뿐만 아니라 소수집단에게도 교조화/극단화되지 않을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비록 소수의 의견이 곧바로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더라도

 

소수의 의견이 사람들의 공적 진술과 의견에는 영향을 미치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종종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사회에서 주류가 아닌 사람들이 '운동'의 한 방편으로서 생각해볼만한 부분이다.

 

저자가 로스쿨 교수인 관계로 법에 관련된 부분도 많이 나오는데, 개인적으로 준비 중인 논문에도 참고할만한 부분을 종종 찾을 수 있었다.

 

법은 당대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보다는 앞서 있지만, 너무 많이 앞서 있지는 않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법의 효율성은 어떤 행동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신호를 주고, 타인들이 어떤 행동을 옳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만일 연방대법원이 성적 취향에 따른 차별이 불법적이라는 판결을 내린다면, 나는 이것이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와 같은 차별이 윤리적으로 부당하다고 생각하게 된 이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판사들이 언제나 선거 결과에 따르는 것은 아니며, 대중의 의견은 많은 경우 사법부가 어느 정도의 재량권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

 

사회적 인식, 혹은 관습과 법의 상관관계는 각 사안마다 차이가 있을 것이고, 또 미국과 한국의 상황이 다를 것이다.

준비 중인 논문에서 이 부분을 고려해 가면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어쨌거나 저자의 결론을 다시 한 번 언급하자면, 사회에 선택 가능한 다양한 정보가 제공되기 위해서 이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선호와 가치관을 밝히는 것은 사회가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중요하다'는 의견에도 100% 동의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적지 않은 의문점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다시 후배의 대답으로 돌아가서, 이 책은 다양한 실험과 사례를 제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왜'라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한다.

각종 실험을 분석해서 나온 결과는 어찌보면 굉장히 뻔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때로는 그 적용에도 문제가 있다.

 

우선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이견으로 인한 이익'의 사례는 단편적일 뿐이다.

이견이 항상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는 '당연한 이유' 때문에 이런 사례의 나열은 사실상 논지의 전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쿠바 침공과 같은 사건을 동조현상이라고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이미 결과를 아는 상태에서(물론 이것은 후회하는 케네디에게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저자는 이 사건을 '잘못된 사건'으로 단정을 지은 채로 사례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쿠바 침공을 잘했다고 이야기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다만 당시 '그들'에게는 쿠바 침공이 나름의 합리적 판단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그들'에게도 어리석은 일이었을까?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또 이 책에서 제시되는 각종 실험에 있어, 각 개인의 판단에 있어 '정보'와 '신호'의 구분이 불명확하며,

개인의 판단이 동조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보상'이 전제된 실험에서는 '비합리적' 선택이 개인에게는 '합리적' 선택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 가지 더. 극단적인 집단 편향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을 보자.

 

여기에서 우리는 배심원단, 성난 폭도들, 정부 등이 어째서 특정 사안에 대해 유난히 엄격한 처벌을 내리는지뿐만 아니라, 분노에 기반을 둔 다른 현상들, 예를 들면 혁명과 폭력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다. 이미 분노할 가능성이 클 뿐만 아니라, 서로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들이 더욱 거세게 분노할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는 짧기는 하지만 테러범을 양성하는 데 있어서 분노와 집단 내의 사회적 역학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많은 논쟁의 중심에 있는 "그들은 어째서 우리를 증오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제공한다. 대부분의 테러범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며, 무엇보다도 전적으로 사회적인 과정을 통해 양성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또한 아주 쉽게 사라질 수도 있다. …… 상대적으로 작은 변화만 있어도, 극심한 민족주의적 대립으로 고통받고 있는 국가에서 나타나는 그와 같은 병폐는 사라질 수 있다. 그리고 테러 역시 이와 같이 쉽게 없어질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글쎄. 과연 쉽게 없어질까? 왜 '사회적인 과정'을 국내적 요인으로 한정하는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던가?

그리고 분노한 사람들이 왜 모이게 되는 지는 생각하지 않는가?

판사들이 집단 편향성과 동조 현상을 보인다는 점을 두고 '충격적'이라고 서술하는 부분과 더불어 이 부분은 굉장히 순진해보일 뿐이다.

미국인 자유주의자에 대한 나의 삐딱한 시선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도 이견이라면 이견?)

 

미국 법조계를 분석대상으로 한 8장과 미국 고등교육의 입시사정을 두고 분석한 9장은 책 전체의 맥락에 어울리지 않아 사족 같았다.

꼼꼼한 주석과 적절한 그림과 편집 등이 마음에 들었지만, 내용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책이다.

 

한 편으로 지금 대한민국을 놓고 생각하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느낌이 사실이라면, 이 책은 그 의의가 더 커질 것이며 그것은 비극이다.

(출판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 책이 그저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 그런 사회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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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리버럴리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가? 트랜스 소시올로지 3
알프레두 사두-필류.데버러 존스턴 지음, 김덕민 옮김 / 그린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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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들어보았지만 그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신자유주의. 이 책은 그 모호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입문서로서 적절한 책이다. 내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특징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탈정치의 외피를 뒤집어쓴 정치기획’이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우선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탈정치가 정치적인 기획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서술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치적 기획’이 ‘경쟁’과 ‘도덕’을 어떻게 왜곡하여 이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1. ‘탈정치’를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는 시장에 대한 열렬한 믿음을 강조한다. 시장은 그 자체로 자기 완결적이며, 소위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경제적 주체들이 건전한 경쟁을 거친다면 모두가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믿음’이다.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에게 ‘개입’이라는 말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정치가들은 장기적인 손실의 대가를 치루더라도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개입을 한다고 생각한다. 즉 정부의 시장 ‘개입’은 정치적인 의도로 시도되는 것이며, 그것은 일종의 ‘악’으로 취급되기 일쑤다. 그리하여 정부의 개입, 공기업, 복지제도 등은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리고 그 부정 속에는 ‘탈정치’라는 논리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 논리’라는 말은 굉장히 부정적인 뉘앙스를 띤다. 정치 논리라는 말은 주로 ‘본질은 외면한 채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지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은 최근 현 대통령의 발언만 살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7일 논란이 되고 있는 세종시 수정 계획과 관련, “실질적 국가발전과 지역발전 관점에서 볼 뿐 정치적 논리는 없다”고 말했다.
(데일리 경제, 2009. 12. 8)


 

  이와 같은 맥락으로 신자유주의는 ‘탈정치’를 고수하며 ‘경제논리’의 지배를 선언한다.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클린턴이 내세웠던 캐치프레이즈는 ‘It's the Economy, stupid!’였다. 미국에서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북풍이니 총풍이니 색깔론이니 하는 말들이 나돌던 기존 대선의 양상과는 차별적으로, 지난 17대 대통령 선거의 유일한 키워드는 ‘경제’였다. 그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든 없든, 국정에 대한 비전이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유권자들은 경제만 살린다면 모든 것을 눈감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실제로 현 대통령은 ‘불도저 정신으로 각종 사업을 일으킨 CEO’라는 이미지로 당선이 되었다. 이제 정치는 경제와 완전히 분리된 영역일 뿐만 아니라, 경제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주가가 얼마인가에 달려있다는 말이 그저 농담일 수만은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와 더불어 특히 공기업과 복지제도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굳건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실제로 그 두 가지가 ‘비효율적’이고 ‘비합리적’인 측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영화된 모든 기업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경제학적’으로 명확히 증명되지 않았음에도, 사영화는 각 분야마다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다. 노동조합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랜드, 기륭전자, 쌍용자동차부터 최근의 철도노조까지, 기존의 ‘노동운동’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제 더할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 파업의 권리를 행사하는 노동자들은, 이제 불법행위로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비합리적’ 집단으로 간주된다. 그에 비해 공권력까지 투입하여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을 진압한 정부는 ‘원칙’을 지켜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허준영 사장 등 코레일(한국철도공사) 경영진과 정부는 이번 노조의 집단행동에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철도노조는 ‘원칙을 지킨 힘’에 손을 든 것이다. 코레일은 파업을 주도한 199명을 경찰에 고소했고 민사상 손해배상도 청구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1일 이번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한 데 이어 다음 날 이명박 대통령이 코레일 비상상황실을 직접 방문해 엄정한 대응을 강조했다. 정부가 쌍용자동차 파업에 이어 철도노조 파업에서도 원칙을 무너뜨리지 않은 것은 우리 사회 일각의 잘못된 노동운동 관행을 바로잡는 중요한 전기(轉機)가 될 수 있다.
(동아일보 사설 ‘철도노조, ‘원칙 지킨 힘’에 손들었다’, 2009. 12. 4)


 

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후 처리도 경제적 방법(민사상 손해배상)으로 압박을 가하는 방법이 선택된다.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이 ‘경제논리’라는 교의를 바탕으로 평가되며 처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정치’는 소외된 것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탈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적 글로벌리즘은 '경제적 탈규제' 모델이 전혀 아니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민간 주도'[모델]를 촉진하는 것도 아니다. 비개입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베일 하에서 신자유주의는 모든 사회적 영역에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개입을 하고 있다.

 

2. 신자유주의의 ‘정치논리’

 

  질문에 답하기 전에, 앞서 언급했던 ‘사영화’라는 단어부터 살펴보자.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사영화’라는 단어보다는 ‘민영화’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왜 그러한가? 이것은 하나의 정치적 수사다. 영어를 번역하였을 때 오히려 ‘사영화’가 걸맞지만, ‘民’이라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전체’에게 이익을 줄 것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언어의 문제만이 아니다. 최저임금을 예로 들어보자. 경제논리로만 따지자면 노동에 대한 합당한 임금은 시장이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최저임금 같은 것은 국가가 나서서 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아니, 간단하게 생각해보자. 한 개인의 10시간 노동이 어떻게 화폐와 1:1로 교환될 수 있는가?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과 화폐의 교환은 경제적인 논리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정치적 맥락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때문에 현실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정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과장 / 왜곡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치적인 행위들의 지배를 받는다. 세금에 대한 논쟁이 대표적인 예다. 감세 혜택은 최상위 계층에게만 돌아감에도, 그것을 교묘히 포장하여 이전 정권을 비난하거나 자신들의 정책을 옹호하는 데에 사용한다. 그리고 각종 국방비나 토건비(현재의 4대강 사업이 대표적) 예산의 증액, 그로 인한 보건 복지비의 감액에 대한 설득 또한 전혀 경제적인 근거가 없이 ‘정치적’인 논리로 일관한다. 일부 대기업 (소유주)의 탈세를 무죄 처리하는 것 또한 경제적인 행위라기보다는 정치적인 행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현재 정치적 행위를 통하여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자들은 탈정치를 외친다.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교의조차 지키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아전인수 격으로 포장하고 밀어붙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이 책에도 제시된 농업 분야의 신자유주의에서도 볼 수 있었던 점이다(이 책의 14장).


  따라서 앞서 던졌던 ‘우리는 정말 탈정치의 시대에 살고 있는가?’라는 심각한 질문에, 바보 같은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선거는 경제행위가 아닌 정치행위이다.’ 이 바보 같은 답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비로소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는 그것의 맨 얼굴에 어떠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일까?

 

정치경제학의 논증은 직관과 주장보다는 엄격한 분석에 기초하게 되었지만 정치경제학의 힘은 그들의 분석적 엄격함보다는 이데올로기적 호소에 의존한다.


 
3. ‘경쟁’이라는 함정 - 개인으로의 환원과 도덕적 비난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강조한다. 대내적으로는,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통하여 우수한 개체들이 살아남는 것이 결국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에 비해 대외적인 무역의 차원에서는, 모든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국제무역으로부터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한다(이 책의 4장). 하지만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이것은 자체 모순을 가진 신화에 불과하다. 만약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로 이익을 얻는다는 주장이 옳다면, 2004년 기준 전 세계 186개국 중 세계무역의 80%를 차지하는 것이 단 25개국이라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경쟁이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옳다면, 신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영국에서 불평등 지수가 가장 커졌다는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때문에 신자유주의자들은 이론적 분석 속에서조차 ‘계급’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 그들이 그것을 인정한다면 ‘공정한 경쟁’이라는 시장의 ‘도덕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주류경제학적 비판들은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적 측면을 인식하면서, 자본주의 시장의 약점에 재주목하는 데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조차도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 계급 분할과 권력의 함의를 인식하는 것을 꺼린다. 그들은 이론적 분석 속에서 사회계급에 대한 단순한 언급조차도 꺼린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자들은 ‘경쟁’이라는 정치적 수사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개인의 몫으로 환원시킨다. 사회에는 다양한 변수-외부요인-가 존재함에도, 그것을 무시한 채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 탓으로‘만’ 돌린다. 취직이 되지 않으면 ‘스펙’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성적이 오르지 않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게으르기 때문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자들의 이 든든한 방패는 다시 매우 효과적인 무기로도 사용된다. 즉 모두 개인의 능력에 달린 일이기 때문에 복지는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세금낭비’는 형평성에 어긋나는 것으로 몰아갈 수 있는 것이다. 최근 경기도지사의 “학교가 무료 급식소는 아니다”(연합뉴스, 김문수 "학교 무료급식이 대표적 포퓰리즘", 2009. 12. 2)라는 발언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비난은 ‘도덕적인 영역’으로 확대된다. 미국과 영국의 경우, 미혼모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전통적인 가정을 수호하려는 신우파의 공격에 의해 축소되었다. 물론 이들 신우파가 모두 신자유주의자들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격이 경제 ․ 복지정책과 연결되는 경우, 도덕적 타락은 경제적 궁핍의 원인으로 왜곡되고, 복지는 개인의 책임과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으로 비난받게 되는 것이다.

 

신우파는 무엇보다 핵가족을 방어하는 데 관심을 기울인다. 도덕개혁조직들은 이 논쟁에서 성도덕의 문제를 중심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시도했다. 낙태에 반대하는, '도덕성' 정치는 '도덕성'의 문제가 신우파의 경제/복지정책과 명확한 연결점을 찾는 경우 신자유주의적 의제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는 대서양을 넘나들며 싱글맘을 복지도둑이라고 매도하는 데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도덕적 비난은 젠더의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앞서 언급된 ‘게으름’ 또한 도덕적 비난과 연결된다. 보수언론들이 여전히 가난한 자의 성공기를 대서특필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것과 연관이 있다. 노년층 부양 또한 이런 방식으로 개인에게 떠밀어질 수 있다. 즉 ‘효’라는 도덕적인 가치를 내세워, 일정 부분 사회가 맡고 있던 노년층 부양을 개인에게 밀어버리고 그것을 맡지 않을 때 도덕적인 비난을 가하는 것이다(위에 언급한 경기도지사의 발언과도 연관이 있다. ‘밥은 집에서 먹이는 거지 학교에서 먹이는 것이냐?’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국가 생산력을 위해 아이를 낳자고 캠페인을 벌인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신자유주의 본연의 모습이다). 이것은 앞 장에서 언급한대로, 경제적인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이 부분은 뒤에 포스팅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도덕적 타락은 경제적 퇴보의 원인으로 비추어졌고 복지 혜택은 개인의 자발적 노력과 책임을 질식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시민이 소비자가 됨에 따라 집산주의와 사회적 책임감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도덕적 비난이 부조리한 사회조건에 대한 비판의 싹을 잘라버린다는 데에 있다. 이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공정한 시장’과 ‘도덕적 비난’을 성공적으로 세뇌시켜 모든 책임을 ‘알아서’ 자신에게 돌리게끔 만드는 경우이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최소한의 정치적 권리조차 자신에게 유리하게끔 행사하지 못하게(혹은 그럴 의지가 없도록) 만든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탈정치’ 전략과 그 맥락을 함께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두 번째 양상은 더욱 심각한 것이다. 사회 혹은 정치에 비판적인 태도를 없애버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거의 동일한 계급 속에서 적을 찾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전체 파이가 부족하다는 위기의식을 (무한 경쟁이라는 수사를 사용하여) 한껏 고양시킨 뒤에 ‘분할’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방법은 노동계에 가장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취업 여부에 따른 분할, 국적에 따른 분할, 직종에 따른 분할, 고용안정 정도의 차이에 따른 분할, 중소기업과 대기업에 따른 분할, 성별에 따른 분할, 지역 분할 등이 그것이다(김태권 지음, 우석훈 해제, 『어린왕자의 귀환』, 돌베개, 2009, 170~181쪽). 노무현 정권 때부터 사용된 ‘귀족 노동자’와 같은 표현은 직종에 따른 분할, 최근의 쌍용자동차 사태는 고용안정 정도를 이용하여 분할의 방법을 사용한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분할 전략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4. 전망

 

  그렇다면 앞으로의 전망은 어떠한가? 사실 그 전망이 밝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제 ‘대의’가 설득력을 가지는 시대는 끝난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의 ‘혁명’은 기대하기 힘든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비관적인 상황일수록 ‘국지전’이 중요하다. 우선 자신의 ‘계급’을 명확히 인지하고 그것을 정치적인 행동으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행동’이라고 해서 그렇게 거창한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강남에 거주하는 최상위 계층들이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보수정당에 표를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보수정당이 내세우는 것들과는 무관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에게 표를 던져서는 안 된다. 무엇이 자신에게 유리한지 정말 제대로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제대로 이기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의 맨얼굴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맨얼굴을 볼 수 있게끔 하는 시력은 경제논리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논리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소한 ‘국지전’의 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참호를 점차 넓혀갈 의지가 있을 때에야 비로소 국제적 차원의 ‘현실적인 정치적 프로젝트’(p. 58)가 가능할 것이다. ‘연대’라는 말이 그저 낭만적으로 들릴 뿐이라면, 그것은 아직 우리의 국지전 준비가 덜 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혹은 아직도 절실하지 않거나.

 

이 책은 서른 명에 가까운 학자들이 각자의 관점과 주제를 가지고 신자유주의를 비판/분석한 것이다. 그 비판의 방향이 모두 제각각이라 혼란스러울 수도 있지만, 다양한 분석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굉장히 고무적이다. 번역자가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신자유주의의 비판자들 중에도 포스트 케인즈주의자, 칼레츠키주의자, 마르크스주의자 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며, 이러한 입장차는 신자유주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완전히 판이하게 만든다. 어쨌거나, 모두 안다고 생각하는 '신자유주의'를 한 번쯤 '공부'해본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각 글의 호흡이 짧은 것이 좀 걸리지만, 입문서로서의 기능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읽어보자. 다음과 같은 각 저자들의 결론에 당신이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일단 당신이 '안다'는 것을 전제로 한 후에야 가능한 일이니까.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제학적 비판은 반복적으로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비현실적인지를 드러내 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적 모델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은 다소 초점이 빗나간 것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적 모델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계 자체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이루어져야할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현실세계에 더 적절한 모델을 만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델에 맞게 적절하게 현실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지적인 환상인 것이 아니며, 현실적 프로젝트이다.

 

무관심과 회의주의는 진보적 정치가 극복해야 할 것이다. 정치적 행위에 다시 개입하는 것, 대안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개혁의 언어를 다시 되찾아 오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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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학의 신화 깨뜨리기
데이비드 블랙번.제프 일리 지음, 최용찬.정용숙 옮김 / 푸른역사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사실 책이라기 보다는 두 학자의 논문 하나씩을 모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히려 책보다도 완결성이 있고 명확하다.

근대 역사의 '발전'에 있어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과는 다른 '특수한 길'을 걸어왔다는 기존의 신화를 비판한 글이다.

그 '특수한 길'은 '잘못된' 특수한 길로서, 이런 해석이 후에 등장하는 파시즘을 보는 관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두 학자가 이야기 하는 바는 굉장히 명확하다. '특수한 역사 발전을 거치지 않은 국가가 존재하는가?'

즉, 프랑스나 영국의 역사 진행과정이 비교의 '중심'에 서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나오던 시절만 하더라도(1980년), 그것은 전혀 당연한 사실이 아니었다.

 

이 책의 진정한 매력은 같은 논지를 전개하는 것 같은 두 학자의 '차이'를 음미하는 것에 있다.

조곤조곤 씹어가며 밥 알갱이의 단맛을 느껴가는 것 같은 데이비드 블랙번에 비해,

제프 일리는 냉면을 한 젓가락에 삼켜버리는 시원함을 선사한다. (개인적으로는 제프 일리의 스타일에 좀 더 끌린다.)

이런 '스타일'의 차이는 두 학자의 정치적 성향의 차이에도 영향을 많이 받지 않았을까 미루어 짐작도 해본다.

(제프 일리는 2002년에 유럽 좌파의 역사를 조망하는 매우 두꺼운 책을 내놓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더 레프트'로 번역.

이 책의 저자인 두 학자 사이에는 부르주아지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가 분명히 존재한다.)

물론 여기에는 번역의 문제를 떼놓을 수 없지만, 그래도 스타일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 스타일의 차이가 또 다시 글의 논지 전체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 또한 너무나 흥미롭다.

 

'프랑스혁명은 너무도 거대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일 수가 없었다'는 E.P 톰슨의 지적과 함께,

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리고 여기 멀리 한국에서도, 다음과 같은 서술들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조선과 식민지 조선, 그리고 대한민국을 둘러싼 '근대화' 논쟁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의 오버일 뿐인 걸까?

 

그런데도(독일의 역사가들이 시민혁명에 대해 갖고 있는 근본 개념 자체에 문제가 있음에도: 인용자) 독일 제국은 부르지아지에게 별 볼일 없는 지위만을 허락했던 "전산업적 지배"였다는 특이한 해석이 또 다시 나온다. 이는 "시민혁명"을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만큼의 민주주의 수준과 나란히 놓기 때문이다. 즉 성숙한 자유민주주의라는 척도로 과거를 되돌아보기 때문에 제정 독일은 어쩔 수 없이 "후진" 국가로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화"를 유럽의 역사 전개에 내재된 주요 목표로 보는 한, 진보된 사회구조와 퇴행적 정치 사이의 "불일치"를 발견하는 일은 계속된다. …… 이 테제에는 "올바른" 발전이라는 관념, 즉 "근대적"인 사회는 어떻게 전개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규범적 이해가 깔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독일 자유주의의 성숙이나 반동성 여부를 확인하는 데 외국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수상쩍다. 도대체 왜 한 나라에서 특별한 정치적 전통이나 정치운동이 형성될 때 그것들이 어떤 이상형과 일치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영국이든 독일이든 입헌 정부형태의 정치적 모델에 해당하는 자유주의가 상승하는 부르주아지의 필연적 이해 내지는 자본의 관철로부터 직접 나와야만 할 이유는 없다. 영국 역사의 전개 과정을 "산업화"와 "민주화"의 조화로 보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은 구체적인 역사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전승된 도그마의 문제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동일시하는 것은 "자유주의적"인 것이 "부르주아적"인 것이라는 개념상의 혼란을 부추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 분명히 말해두지만 민주화에 관한 모든 공식적 기준에 의하면 "시민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확립과는 직접적으로도, 인과적으로도 관계가 없었다. …… 달리 말하며 민주주의 정치로 가는 기회들은 부르주아지의 성공을 위한 조건이었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불거진 모순에서 나온 것으로, 자본주의 발전이 만들어낸 새로운 상호 적대 세력들로부터 생긴 것이었다.

 

여기까지가 제프 일리. 이 다음부터는 데이비드 블랙번.

 

  "실제로 일어난 그대로"라는 랑케의 유명한 글귀는 역사가 어떻게 서술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수많은 역사가들이 19세기의 독일 역사를 서술해 온 방식은 "실제 일어나지 않은 그대로"라는 말로 특징짓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 더 중요한 것처럼 취급되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핵심은 자유방임정치나 영국의 길을 발전된 자본주의 사회로 나아가는 정상적인 길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에서 논의를 출발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이다.

  그와는 정반대로 상업이윤을 통한 자본의 장기적인 축적, 완전히 자본주의화 되고 상업화된 농업부문, 그리고 기업방식에 대한 전문지식의 점차적인 성장이란 특징을 갖는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역사적으로 볼 때 도리어 흔하지 않은 경우였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자의식적이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투하는 부르주아지라는 발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즉 그 발상을 말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의 이념형을 상정하고 그것과 대조하여 일정한 민족적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행동을 평가하려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부르주아지에게 권력이 이행된 것과 시민혁명을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세기 유럽 부르주아지의 정치를 간단히 주가株價 우위의 문제로 환원시켜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연속성과 관련된 실질적인 문제는 연속성의 "유무"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시각에서" 이 문제를 고찰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뜬금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학사'라는 분야는 정말 한 단계 위의 지적 놀이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기대보다 훨씬 재미있었던 책. 이제 '파시즘'을 읽으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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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 정도 두께의 책은 읽기 전부터 부담이 생겨서 잘 시작을 못하는 게 사실이다.

물론 전체 600페이지 중에 각주 빼고 참고문헌 빼면 500페이지 정도지만.

하지만 예상 밖으로 이 책은 매우 읽기가 편했고 또 흥미진진했다.

 

저자인 팩스턴은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간단히 내릴 수 없으니 일단 파시즘의 행적을 살펴보자고 말한다.

 

  이 책의 목표는 파시즘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찾아냄으로써 파시즘이 지닌 고유한 매력과 그것의 복잡한 역사적 경로, 그리고 파시즘이 지닌 극단의 공포를 더욱 명료하게 설명하고, 이를 통해 파시즘이란 개념을 의미의 남용으로부터 구출하는 것이다.

 

사실 2000년 즈음에 일었던 '일상적 파시즘' 등의 용어나, 촛불시위를 바라보는 걱정에서 언급되는 파시즘에 불만이 있었던 터라,

팩스턴의 이러한 집필 의도는 꽤 마음에 들었다.

팩스턴의 지적대로 그렇게 '개나소나' 다 파시즘이면, 진정한 파시즘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상한 결과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을 중심으로 기타 지역의 파시즘을 총체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파시즘의 가장 큰 특성은 '무정형성'이다. 그렇기에 파시즘을 단순하게 정의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이데올로기적으로 순수한 파시즘 체제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등장 과정과 정착 과정에 있어, 파시즘(혹은 그 지도자) 단독의 힘으로만 파시즘이 일어서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 주변 정황과 타 세력들과의 관계, 그들의 반응 등을 면밀하게 관찰해야만 한다.

 

파시스트들이 대중의 승인을 얻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쳐야 했던 단계는 법과 질서를 존중하는 보수주의자들과 중간계급을 설득해 파시스트의 폭력은 좌파의 도발을 막기 위한 필요악이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것이다.

 

  비교를 통해 살펴보면 파시스트들의 집권 성공 여부는 파시즘 지식인층의 명민함이나 파시즘 지도자들의 자질보다는 위기의 심각성이나 잠재적인 동맹 세력의 절박함 정도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파시즘은 '정상화'의 과정을 거친다. 보수주의자들의 눈에 '좌파만큼은 위험하지 않은' 정상적 모습을 보이는 과정이다.

때문에 오늘날에도 위험한 것은 과격한 네오나치나 스킨헤드들, 인종차별주의자들이 아니다.

 

오히려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쪽은 표현 수위를 조절하고 고전적인 파시즘 상징을 버림으로써 '정상적'으로 보이는 법을 배운 극우 운동이다.

 

아쉬운 점은 실패한 정상화인 무솔리니의 모습만을 자세히 보여줄 뿐, 그들의 성공과정은 그리 자세히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팩스턴은 매우 조심스러운 자세로 파시즘을 더듬어 간다.

한 인물이나 주변 정황만이 영향을 미친 것도 아니라, '인간의 선택'이라는 변수도 있음을 강조하면서.

 

총통 개인의 기벽보다는 독일 국민이 그를 통해 이루려 한 것은 무엇이며 그가 거의 최후의 순간까지 수행했던 역할은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포이케르트의 저작과 같은 연구들과 연결고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파시즘엔 미시적 연구가 필수인듯.

 

이렇게 '정의 내리기 어렵다'라는 논지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극적인 회피로 끝나지는 않는다.

'명목론을 피한답시고 '단계'와 '과정'이라는 또 다른 명목론에 빠져버리는 위험'을 저지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파시즘에 대한 팩스턴의 간략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욕,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앞서 거의 500페이지에 달하는 꼼꼼한 성찰을 통해 이끌어낸 탁월한 정의이기는 하지만,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팩스턴은 책의 뒷부분에서 기타 권위주의, 독재, 군부독재 등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이들이 왜 파시즘이 아닌지를 서술한다.

특히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는 부분은 '민주주의 성립 이전의 독재에는 '파시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부분이다.

팩스턴이 의도한 바는, 파시즘엔 '대중정치'가 필수적이므로 '민주주의'라는 기반이 없으면 파시즘도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칫 '서구중심주의'라는 오해를 살 여지가 충분히 있어보인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이유로 파시즘이 아니라고 가지쳐낸 독재, 군부독재 정부들을 제외하면 남는 것은 독일과 이탈리아다.

저자가 제기하는 이유들이 나름의 타당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사실 이렇게 접근하면 독재 또한 각 국가/정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파시즘'이라는 용어의 남용은 막을 수 있겠으나,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극단적으로 특수화시켜 버릴 위험이 생긴다.

 

미시적 연구가 절실히 필요하겠다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적어도 최근 출판된 파시즘 연구서 중 몇 안되는 탁월한 저서임은 틀림 없다.

게다가 어렵지도 않고 재미까지 있으니 추천. 덤으로 노력에 비해 두꺼운 책을 읽었다는 자기만족도 크니 또 한 번 추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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