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보관소」
♀ 그녀의 경우
당신이 살아있다면, 그리고 상상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사실 이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상상해보는 일이다.
내가 죽은 다음에는 어떻게 될까. 사후 세계란 존재하는 것일까. 나에게 영혼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만약 없다면 어떻게 하지?
그 답을 알고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쪽빛 치맛자락의 한쪽을 석양에 살짝 담근 하늘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겠다. 그래도 당신이 제발 알려주라고 간절히 청한다면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을 토해내겠다. 거기에는 당신뿐만이 아닌 나 자신에 대한 동정도 담겨있다.
나는 당신이 알고 싶다고 말한 사후세계에 대해서 모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나는 분명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후세계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있는 세계의 풍경은 한 마디로 휑하다. 잡초 한 포기 나지 않는 황량한 대지는 언제나 황혼이 찾아오기 전의 햇살이 녹아들어있다. 이곳에 제대로 모습을 갖추고 있는 거라고는 앉을 만한 크기의 평평한 바위와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 한 조각뿐이다. 그나마 바람이라는 것도 내게 손님이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해주는 역할을 하는 터라 시원하다는 느낌조차 없다.
아, 그래. 죽으면 공복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다. 이곳에서 지낸 것도 6개월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그동안 입으로 들어간 음식물의 목록을 제출하라고 말한다면 백지를 낼 수밖에 없다. 심지어 나는 공기조차 마시지 않았다. 생각해봐라. 죽은 사람이 숨을 쉴 필요가 있겠는가. 침조차 만들어지지 않는 가짜 육체는 손가락을 강제로 꺾어도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 처음에는 신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지겹다. 한 번 더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루하다.
인형에 깃든 영혼처럼 무미건조한 삶.
아침은 물론 밤조차 찾아오지 않는 영원한 석양이 계속 되는 풍경.
제대로 된 형체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칙칙한 갈색의 평평한 바위 하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가. 고독을 사랑하는 자는 야수 아니면 신이라고.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야수가 아닐 뿐더러 신은 더더욱 아니다. 고독은 사람을 말려버린다. 육체가 아니다. 정신이 가진 풍요로움을 수분 하나 남기지 않고 증발시켜버린다. 홀로 있는 이 공간에서는 상상하는 힘마저도 탐미적인 고문으로 변해버린다. 혼자 있으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헛된 망상을 마음껏 퍼트리는 일이지만 그것을 토해낼 대상이 없으니 미쳐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미쳐버리지도 못한다.
미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저 막연한 외로움이 코트처럼 몸을 두르고 있다. 그 아래에서 마음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얼어간다. 한없이 냉소적으로 변할 뿐. 더더욱 이성적으로 물들 뿐이다. 결코 미치지는 않는다. 아니, 미치지 않는 게 아닌, 미치지 못하는 게 맞겠지.
이 삭막한 공간에게 조롱당하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비웃고 있겠지. 내 고독, 내 슬픔, 내 분노, 내 망상, 내 갈망, 내 헛된 희망까지도. 박수를 치면서 깔깔 거리고 있겠지.
이쯤 되면 하나 나와야하는 질문이 있다. 죽음 다음의 삶이 이런 것인 줄 알았다면 어떻게든 살려고 발버둥 쳤겠느냐고.
육체적으로 아무런 감각, 심지어 땅을 밟고 있다는 느낌도 없는 세상에서 얼마인지 모르는 억겁의 세월을 견뎌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물론 살고자 했을 것이다. 적어도 삶은 행복 다음에 고통이 오기도 하고, 행복 다음에 불행이 오기도 하니까. 힘들어도 참고 견뎌내면 언젠가는 반드시 웃을 날이 있을 거라는 희망이라도 품을 수 있으니까. 그게 설령 이뤄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마냥 그것이 좋았다는 걸, 이제야 알아버린다.
늦었어. 늦었어. 너무 늦었어.
속으로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을 되뇐다. 그러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속이 후련해지고 만다. 그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한다. 하지만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도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리운 감촉은 전해지지 않는다.
해도, 달도 없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리면 나는 바위 위에 앉아있다. 방금 전까지 분명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순간이동이라니. 내가 초능력이라도 익혔다는 건가.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는 없을까. 아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철저한 무(無)에 풍덩 빠져도 괜찮은데. 나는 웃고 만다.
이런 현상을 리셋(Reset)이라고 부른다. 정신이 붕괴되려하면 어떠한 시스템에 의해서 모든 게 원위치로 돌아온다. 방금 전까지 머릿속을 지배했던 공허함은 어느 순간부터 사라져있고 끊임없는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연결된 번뇌의 첫걸음을 다시 시작한다.
문득 세상을 잡아먹은 고요함 속에 가만히 앉아있는데도 머리카락이 스르륵 움직이는 모습을 보게 되면 드디어 왔다는 생각이 먼저 머리에 들어온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오는 막대한 그리움은 도저히 냉정하게 대처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이성을 헤집어놓는다. 그것은 해일과도 같아서 몸으로 막아보려고 애를 써도 아주 당연한 일인 것처럼 거침없이 밀려버린다.
그가 오고 있다.
눈을 감고 바람이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감촉을 느끼다보면 어느 사이엔가 주변의 공간은 변해있다.
초목이 우거진 언덕을 따라 바람이 타고 올라온다. 시원하다. 아까 만났던 바람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잔디가 깔린 언덕 위에 앉아있었다. 손으로 잔디를 만지면 생생한 풀잎의 감촉이 느껴진다. 그 아래로는 보드라운 흙도 깔려있다. 사각거리며 움직이는 풀잎들이 손가락에 감겨온다. 간지러워서 피식 웃고 만다. 사소한 일에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나는 감정이라는 것에 엄청난 갈증을 느끼고 있었나보다.
후우.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몇 번이나 경험해봤지만 여전히 새롭고 경이롭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다는 실감을 할 수 있는 장소. 무엇인가를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이리도 행복한 일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를 만나는 건 대체로 1주일에 1번이다. 살아있는 그에게 사정이 생겼을 때는 2주일이 지나서야 만날 때도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가 찾아오는 일이 달갑지만은 않다. 이곳을 찾아올 때면 눈에 띄게 그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에게는 1주일에 한 번이지만 그에게 적용되는 시간은 1주일이 아닌 거 같다. 어째서인지 그는 내게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이 언덕에는 거울이 없으니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 전혀 모르는 것이다. 아니면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는 것이겠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내 모습은 20대 중반의 여성. 바람과 함께 언덕을 올라오는 그의 모습은 30대 중반.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강을 만들어버렸다.
“왔구나.”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고 올라온 그는 언덕을 올라오는 동안 가빠진 숨을 고르며 빙긋 웃는다.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닦아주자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내 동작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다녀왔어.”
마치 여기가 자신이 있어야할 자리라는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나는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만다.
고맙기 때문이다. 미안하기 때문이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증오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나를 기억해줘서 고맙다.
살아있는 그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그를 나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영혼을 보내주지 못하고 영혼 보관소에 영구 보존을 의뢰한 그의 사고방식을 증오한다. 만약 그가 순순히 나를 잊어줬다면 이런 고통은 경험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제 그만 찾아오라고 했잖아.”
나는 따뜻한 그의 품에 안겨서 흐느끼며 속삭인다.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은 고작 5분.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이 이 세상으로 오는데 허용된 시간이다.
“너를 잊을 수가 없는걸. 어떻게 너를 잊을 수 있겠어.”
이런 바보 같은 사람. 세상의 절반이 여자라는 데 어째서 나를 잊지 못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내가 있어야할 곳은 당신 옆자리인데.”
그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린다. 나처럼 그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리려고 한다. 그의 품에서 떨어진 나는 손을 올려 그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오래 사는 게 고통스러워?”
진심이 담긴 물음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한다.
“당신 없이 살아가는 게 고통스러울 뿐이야.”
“그러지 마. 제발.”
목이 멘다. 숨이 막힌다. 가슴이 답답하다. 속상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어째서 그는 나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살아있다는 건 정말 소중한 거야.”
이제 곧 돌아가야 한다. 그곳에서 또 홀로 언제 끝나는 지도 모르는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그러니 제발 살아가려고 노력해. 더 이상 찾아오지 마.”
찾아오지 말라고 부탁하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버린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슬픔의 강이 역류해버린 것이다. 찾아오지 말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나는 1주일에 한 번 만끽할 수 있는 이 느낌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를 사랑한다면 놓아줘야한다. 그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한다.
잔인해지자.
몇 번이도 결심했었다. 설령 얼마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억겁의 세월을 홀로 보낸다고 할지라도 독해지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더 이상 찾아오지 마. 당신을 만나는 건 다시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워. 부탁이니 이제 제발 날 놓아줘.”
주저하지 않고 그의 가슴에 있는 힘껏 대못을 박는다. 절대 빠지지 않도록, 이 아픔으로 인해 부디 날 저주하도록 바라면서 그에게 사정한다.
그의 몸이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릿해진다. 이제 정말로 이별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내 눈빛을 보고 자신의 운명을 알아차린 것일까. 그는 손을 들어 자기의 눈으로 직접 흐릿해지는 몸을 확인한다. 그리고 지옥의 나락까지 닿을 법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살짝 고개를 떨어뜨린 그의 얼굴에 나타날 표정을 보는 게 두렵기까지 하다.
“괜찮아.”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내 심장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제발, 그만 말해줘.
“미안해. 나란 녀석은 정말 이기적이야. 네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겠어. 정말 미안해. 인간이 결국 인간이라서.”
나는 사라지는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숨죽여 흐느꼈다. 절대 눈물을 보이지는 않는다. 가슴 속으로는 겨울에 내리는 함박눈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낸다. 이 사람이 없다면 나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난 그를 필사적으로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난 죽었다. 이제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의 흔적은 이제 지워져야한다.
강하게, 정말로 강하게 마음먹자. 결국 그가 사라질 때까지 나는 말하지 못했다. 다시 고독한 갈색의 대지로 돌아왔을 때서야 나는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인간은 죽어서도 인간이라서.
♂ 그의 경우
‘오래 사는 게 고통스러워?’
새까만 눈동자는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을 모조리 쓸어 담은 것처럼 희망을 노래하며 반짝이고 있다. 아름다운, 이런 수식어로 표현하기조차 아까운 눈동자에 내 추악한 모습이 비춰지면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만다. 그러면 그녀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간다.
‘살아있다는 건 정말 소중한 거야.’
살아있다는 건 중요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불길한 징조를 나타내는 검은 안개처럼 스멀거리며 밑바닥에서 올라온다. 아니. 아무렇지도 않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머릿속에 글자를 새겨놓는다. 눈을 감으면 곧장 그 글씨가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새빨간 잉크를 바르고 망막에 찍어놓는다.
‘그러니 제발 살아가려고 노력해. 더 이상 찾아오지 마.’
살아있다는 건 정말로 중요하다. 하지만 거기에 네가 없다면 ‘살아있다는 건 중요하다.’ 라는 공식은 이뤄지지 않아. 이건 전혀 안타깝지 않다. 왜냐면 네가 나타나기 전까지의 내 삶은 가뭄을 만난 논바닥처럼 건조했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리저리 미끄러지는 사막의 많은 모래알갱이들처럼 무의미한 행동들의 연속이었으니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 모든 게 충족된 사람에게 오래 사는 삶이란 천국 직행 티켓을 받은 것처럼 행복할지도 몰라.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옥의 끄트머리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에게 그건 끔찍한 고문보다도 더 잔인한 집행유예에 불과해. 내게 어느 쪽이라고 묻는다면, 내가 어떻게 대답해주기를 원하는지 생각하는 게 더 현명할 거야. 난 이미 정했거든.
잠에서 깨어나면 일단 절대로 눈을 뜨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일단 이게 꿈인지 아닌지 손가락으로 허리를 살짝 꼬집어본다. 전통적인 방식은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효력이 있다고 믿기 마련이니까. 그걸 플라시보 효과라고 하던가.
일단 꿈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면 나는 손을 뻗어 옆자리를 확인한다. 침대에 있는 베개는 두 개. 하나는 주인이 있고, 나머지 하나는 눌린 흔적조차 없다. 그것을 손으로 더듬어 확신하고 나면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한다. 차라리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꿨다면 더 좋았을 텐데. 그리 여기면서 눈을 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본다. 눈을 뜨면, 나보다 먼저 깨어난 그녀가 잠이 덜 깬 얼굴로 빙긋 웃으면서 이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럴 리가 없다는 걸 확신하면서도 나는 옆자리를 확인하는 찰나의 순간까지도 헛된 희망을 품어본다.
없다.
그래. 그녀는 여기에 없다. 다른 곳에 있다. 육신은 여기서 2킬로미터 떨어진 납골당에서 잠들어있고, 영혼은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영혼 연구자 강연수 박사가 설립한 영혼 보관소에 안치되어 있다.
강연수 박사는 인간에게 영혼을 있음을 논문으로 발표했다. 과학자가 비과학적인 소재를 가지고 논문을 썼다는 것에 대해 잠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미친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박사는 지지 않고 그것을 입증하는데 성공한다. 연구 목적으로 만든 기계가 정말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온 것이다.
그리하여 영혼의 존재가 과학으로 입증되었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몇몇 사실이 밝혀졌다. 한때 유명했던 영화 ‘사랑과 영혼(1900)’에서 나왔던 것처럼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을 떠돌거나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가 영혼을 데려간다는―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끔찍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죽은 다음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닌 그저 잠들 뿐이라는 그의 발표는 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어 그는 정부의 지원을 얻어 영혼 보관소를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그곳의 최초 사용자는 국내 경찰이었다. 목적은 미해결로 남은 살인사건을 해결.
영혼 보관소와 연결된 모니터를 통해 법정에 나타난 영혼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죽인 범인들을 지목하는 일에 서슴지 않았고, 그들의 애절한 증언을 들은 유족들의 곡소리 때문에 법정은 삽시간에 눈물바다가 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도 드러났다.
아들의 손에 맞아죽은 노부부, 아내가 음식에 탄 독약을 마시고 죽은 남편, 치정싸움으로 끝나버린 의문의 교통사고, 키우기 힘들다는 이유로 아이를 목 졸라 죽인 어머니, 아무런 단서도 잡히지 않았던 연쇄살인범의 정체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모두가 혀를 차면서 신문 기사를 읽어 내릴 때 오직 한 사람만이 괴로워했다. 바로 강연수 박사였다. 자신의 연구가 추악한 인간의 본성을 들춰내는데 계속 사용되자 참지 못했던 모양이다. 결국 그는 정부의 지원을 거절하면서까지 영혼 보관소의 이용을 제한한다. 경찰의 수사를 위한 건 1년에 단 한 번으로 제한한 그는 다른 방식으로 영혼 보관소를 운용하였다.
‘뜻밖의 사고로 잃은 가족, 친구, 연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보관합니다. 정부의 지원이 거의 끊긴 관계로 보관료는 상담 후에 결정합니다.’
강연수 박사는 사람들의 마음에 남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영혼 보관소를 사용하기로 결심한다. 발표가 난 이후 나는 19번째로 영혼 보관소를 찾은 손님이 되었다.
집에 강도가 침입했었다. 지문을 인식하는 자물쇠를 용케 열고 들어온 그는 아주 조용한 작업을 좋아했다. 필요한 것만 챙기면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는 자신의 손장난에 꽤 자신이 있었고, 그러한 점이 자신을 특별하게 만들어준다는 망상을 갖게 만들었다. 나보다 민감한 그녀는 도둑이 방문을 여는 작은 소리에 깼고 비명을 질렀다. 그런 행동은 그의 자부심에 대단한 상처를 안겨줬다. 조용한 작업이 끝났다고 여긴 도둑은 망설이지 않고 권총을 쐈다. 그때 권총에서 발사된 총알은 모두 6발. 그 중 5발이 그녀의 장기와 뼈에 박혔고 나머지 한 발은 내 왼팔을 관통했다.
그녀는 강했고 나는 나약했다.
범인은 그녀에게 2발을 발사했고, 4발은 뒤늦게 일어난 나를 없앨 용도로 쓰려고 했다. 하지만 가슴에 총알을 맞고도 그녀는 연약한 몸으로 나를 감쌌다. 그 동안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했다.
범인은 현재 종신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죗값을 치루고 있는 중이다. 평소 그 빌어먹을 개새끼가 조용한 범죄를 선호했던 이유는 자신이 경찰의 손에서 도망칠만한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성을 들은 이웃집의 빠른 신고 덕분에 제때 출동한 경찰은 근처를 배회하고 있던 범인을 어렵지 않게 붙잡았다.
나는 뒤늦게 집으로 들어온 경찰의 목소리 덕분에 정신을 되찾았다. 떨리는 손으로 끌어안은 그녀는 이불을 새빨갛게 물들인 선혈처럼 붉은 꽃이 되어활짝 피어올랐다.
여기까지.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자.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리고 있는 살구색 커튼을 걷어내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아침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머리카락에게 입을 맞춘다. 어린아이처럼 깔깔 웃으며 안으로 들어온 바람은 금세 침실에 가득한 탁한 공기들을 내쫓아버린다. 약간 서늘한 아침공기 때문인지 몸을 부르르 떨고 만다.
그녀가 사용하던 화장대 위에는 권총 한 자루가 놓여있다. 그것을 잊지 않고 손에 쥔다. 낯선 금속의 매끄러움이 잠에 취한 신경을 바싹 긴장하게 만든다. 3중 잠금장치를 모조리 해제하고 문을 열고 나간다.
호흡을 멈추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나서야 나는 권총을 내려놓는다. 제길. 땀이 나려고 한다. 거실에 있는 테이블에 권총을 내려놓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다. 벌써 4년이나 지났거늘. 가슴의 아픔은 결코 잊지 않으려고 고동을 통해 내게 하소연한다. 그날의 아픔을 절대 잊지 말라고.
비어있는 두 손을 활짝 펴본다. 그리고 공기와 떠도는 먼지들을 움켜쥔다. 그녀가 곁에 있었을 때는 이 손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는데. 지금은 모든 게 빠져나갈 정도로 엉성한 그물이 되어버렸다.
한숨을 토해낸다. 그리고 손을 올려 눈을 덮어버린다. 하품 때문에 나오는 거야. 그러니 신경 쓰지 말자.
거실에 있는 벽걸이 텔레비전을 켜서 뉴스를 틀어놓는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면 늘 뉴스를 틀어 잠든 사이에 일어난 일이나 오늘의 날씨를 확인했다.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얼굴을 가진 홀로그램이 진짜 사람인척 연기를 하며 오늘은 고기압의 영향으로 무척 맑을 거라는 얘기를 해준다. 정오에는 1시간 동안 예정된 비가 내릴 예정이니 그 시간에 활동할 사람은 우산을 꼭 챙기라는 친절한 멘트도 잊지 않는다.
날씨 예보가 끝난다. 나는 부엌으로 간다. 아침을 챙겨먹자고 말한 것은 내가 제안한 거였다. 집에서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나와 달리 그녀는 다른 사람의 밑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하루를 시작하는 원동력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침으로는 간단한 토스트를 먹자고 말한 것도 나고, 아침거리를 가게에서 사오고 이것저것 토스트기와 같은 기계를 구입한 것도 나였지만 막상 시작하니 늘 아침을 준비하는 건 내가 아닌 그녀가 되고 말았다. 꽤나 미안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 일을 즐겼다.
‘에이, 괜찮아. 당신이 부엌에 출입하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으니까.’
과거에 국을 데운답시고 부엌의 일부를 홀라당 태웠던 적이 있었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지.
오늘은 내가 부엌에서 식사를 준비한다. 오늘 뿐만이 아니다. 어제도 그랬고, 그제도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아침에 토스트를 굽는다. 어제 저녁에 장을 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면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도 준비하겠지. 딸기잼과 버터는 미리 꺼내서 식탁에 올려놓는다. 그렇게 준비한 아침. 내 접시에 담긴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 3조각, 약간의 샐러드. 잘 구운 토스트는 두 개다. 그리고 그녀가 먹을 접시에는 계란 프라이와 베이컨 한 조각. 샐러드에는 그녀가 특히 좋아하는 발사믹 식초를 베이스로 재현한 드레싱을 뿌려놓는다. 마지막으로는 막 구워 내 것보다 따뜻한 토스트 두 개를 올려놓는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녀가 잘 먹겠다고 말하는 걸 기다리다가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올린다. 나는 식사를 천천히 시작한다. 항상 이렇게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는다. 되도록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오래 볼 수 있도록. 하지만 그녀는 식욕이 없는지 오늘도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아니. 외면하지 말자. 나는 알고 있다. 여기에 없다는 걸. 이 집에 없다는 걸. 그리고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시간이 지나도 내 앞에 놓인 음식이 사라지지 않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면 정말로 실감이 난다. 그러다가 둥근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있는 파란색 머그컵을 바라본다. 자기 직전에 사용한 그녀가 사용했던 머그컵과 같은 색이다. 4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머그컵을 보며 그녀의 빈자리를 실감한다.
식사를 마치면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머그컵을 제외한 설거지 할 접시들은 자동세척기에 넣어둔다. 자동세척기가 접시를 씻고 건조하는 동안 나는 거실로 돌아와서 오늘의 날씨를 확인한다. 날씨에 비가 올 거라는 말이 나오면 현관문의 손잡이에 우산을 걸어놓는다. 잊지 말고 가져가라는 의미로. 그녀는 우산을 챙기는 걸 싫어하지만 내가 꼭 가져가라고 말하면 투덜거리면서도 챙겨간다.
그녀가 집을 나서면 나는 발코니로 나가는 문을 활짝 열어놓은 다음 텔레비전을 끄고 대신 오디오를 켠다.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이 시작되는 부분을 맞춰놓고 볼륨을 올린다. 밖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발코니로 나가면 작은 분재들 속에 테이블과 의자 두 개가 있다. 테이블과 의자는 항상 닦기 때문에 먼지가 잘 쌓이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바깥에 있기 때문에 사용하기 전이면 늘 바닥에 있는 나무상자에 보관된 수건으로 닦아놓는다.
달과 별이 아스라이 빛나는 밤이 찾아오면 그녀는 이곳에서 일기를 쓰곤 했다. 오늘 밤에는 구름하나 없는 맑은 날씨라고 한다. 분명 별도 보이고 달도 보이겠지. 그리고 나는 유리에 비치는 그녀의 환영을 바라보겠지.
이제 그만. 그녀를 그리워하는 건 이제 그만. 그녀가 바라는 건 내가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다. 추억 속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괴로워하는 게 아닌 미래를 바라보는 눈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거다.
알고 있다.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까. 제발 눈앞에서 사라져.
빌어먹을.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정리하려고 놔둔 창고에서 10년이나 함께 해온 기타 케이스를 들고 집을 나선다. 뒷마당에 있는 작업실의 문은 땅바닥에 붙어있다. 신고 온 슬리퍼를 벗고 문에 발을 갖다 대면 하얀 불빛이 발바닥 전체를 스캔한다.
찰칵.
잠금장치가 해제되면 강화 불투명 유리로 만들어진 문은 좌우로 펼쳐진다. 작업실은 지하에 있다. 계단을 따라 설치해놓은 작은 전구들이 내 발걸음에 맞춰 불을 밝혀준다. 균형감각을 벌레가 좀먹지 않은 이상 실족할 우려가 없을 정도로 넓고 완만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초록색으로 칠한 문이 있다. 이웃집에 피해가 될 거 같아서 지하실에다 작업실을 만든 것으로 모자라 문에 방음처리까지 했다.
‘이웃집? 아,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그것보다 자기가 일을 하다가 방해받으면 내가 화날 거 같아서 그래. 이제 자기의 꿈에 온힘을 쏟아 부을 수 있겠지?’
이것 역시 그녀의 배려. 이쪽 문에는 잠금장치가 없다. 진짜 문은 바로 안에 있으니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세 번째 문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작업실로 향하는 진짜 문. 어차피 이곳을 들어오는 첫 번째 문은 나와 그녀의 발만을 인식하게끔 되어 있지만 보다 확실한 안전을 위해서 만들어놓은 문이라고 설비업자가 설명해줬다. 이 문은 로봇이나 사이보그의 파괴력으로도 부술 수 없는 특수합금으로 만들어졌다.
‘누군가가 당신을 죽이라고 사주할지도 모르잖아. 아직 빛을 발하지 못한 엄청난 재능이 두려운 나머지…….’
핫. 나는 실소를 터트리고 만다. 손잡이를 잡고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그대로 문 앞에 주저앉아버린다.
내가 가는 모든 곳마다 그녀의 흔적이 있다. 침대 위의 미소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남아있고, 그녀가 즐겨보던 뉴스는 여전히 같은 시간에 방송하고,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2인분의 식사를 준비하는 멍청이도 살아있고, 상쾌한 아침공기에 어울리는 음악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노래하며, 매일같이 일기를 썼던 자리에 남아 연필로 종이를 사각사각 긁어대는 그녀의 환영마저 여전히 존재한다.
그녀가 상상하고, 설계하고, 최종적으로 마무리한 이곳이야말로 내게는 천국과 다를 게 없다. 죄를 지은 자는 하느님의 성지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녀의 육신을 저 하늘로 보내고도 아직까지 살아있는 나는 죄인이다. 영원히 함께하자는 맹세조차 지키지 못하는 못난 한 남자에 불과하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문 앞에 앉아 기타를 케이스에서 꺼내고 생전 그녀가 좋아했던 음악들을 하나씩 연주한다. 몇 번이고 되풀이한 곡들의 악보는 머릿속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어 절대로 틀릴 일은 없다. 기계처럼, 그러나 혼신의 힘을 다한 진혼곡들을 연주를 하고나면 손가락 끝이 마비되고 다리는 저려온다. 입은 메마르고 갈증과 함께 깊은 허기가 찾아오지만 나는 그런 일련의 증상을 느끼고서야 웃을 수 있다.
나는 절대 그녀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녀는 내게 그만 자기를 잊으라고 말한다.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시시할 정도로 간단하다. 그녀는 강하고, 나는 나약하기 때문이다.
∞ 다시, 그녀의 경우
“저기, 난 우리 어머니를 만나러 온 겁니다만?”
나는 알고 있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반반한 얼굴이다. 무엇보다도 젊다. 좋아. 이 정도면 훌륭해. 강연수 박사에게 내 결심을 털어놓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알고 있어요.”
지금 우리는 공간이 아닌 모니터를 통해서 얘기하고 있다.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을 죽은 사람의 세계로 실체화시키는 일은 꽤 많은 금액의 돈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서 영혼 보관소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모니터를 통해 죽은 사람과 얘기를 나눈다. 내가 이 남자를 만난 이유는 간단하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결심은 확고해졌기 때문이다.
언제까지고 그를 나처럼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내가 진짜로 그를 사랑한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놔야한다. 자신의 재능에 대한 열정이 가득하던 옛날 그 시절로 말이다.
“강연수 박사님께 들었어요. 당신 심리학자라고요? 죽은 사람들의 심리 상태가 변할 수 있는 지를 연구한다죠. 그것도 돌아가신 어머니를 통해서.”
담담한 내 말투를 들은 남자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냐면 내가 말하는 태도가 마치 자신의 연구를 위해 어머니를 이용한다는 사실에 대한 도덕적 양심을 지적하는 것과 같았기 문이다.
“나를 비난하는 겁니까?”
“아마도요. 하지만 난 당신이 필요해요. 그리고 당신도 날 필요로 하죠.”
“하. 내가 당신을요?”
남자는 헛웃음을 터트렸지만 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남자는 이미 나에게 넘어왔다.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 당신 앞에 있어요. 내가 바라는 건 연기력이 가미된 가벼운 거짓말과 당신이 투자하는 시간. 그것만 충족시켜준다면 당신은 새로운 데이터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종류의 데이터입니까?”
기세등등하게 밀어붙이던 나는 망설였다. 과연 이 사람이 내 말에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까. 죽은 사람에게는 주도권이라는 게 없다. 갇혀있다는 제한적인 요소만으로도 인간의 지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릴 수 있는 많은 권리를 포기해야한다. 다시 말해 그가 거절한다면 이 모든 게 헛수고인 셈이다.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시간은 얼마 없다. 모가 아니면 도다.
“사랑이요.”
“과연.”
그는 한 순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답했다.
“선배님이 당신을 내게 소개시켜줄만 하군요. 난 어머니의 사랑이 죽은 이후에도 계속 되는 지를 연구하고 있었죠. 당신의 사랑은 연인에 관한 겁니까?”
“네.”
어미가 죽어서도 자식에 대해 헌신적인지를 연구하고 있단 말인가. 정말 인간이란……. 난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그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해야만 한다. 그게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방식이니까.
“좋아요. 부족할지도 모르는 내 연기력과 당신의 계획에 투자하는 시간.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군요.”
남자는 내가 비치는 모니터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며 말했다. 이미 어머니의 존재는 잊은 모양이다.
나는 방에 거울을 갖다 줄 것을 부탁했다. 이미 강연수 박사에게 말해둔 터라 가져오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내 남자가 오면 의자에서 비켜 거울의 반대편에 있어주라고 말했다.
“대화는?”
“그냥 웃어주면 되요. 실제로 당신이 하는 일은 별로 없을 테니까.”
너무 냉정하게 잘라 말해서인지 남자는 처음으로 당황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감독이 직접 고른 배우의 연기력을 의심하는 겁니까?”
“세상만사는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게 딱 좋은 겁니다. 필요 이상의 의욕을 싹둑 잘라버리는 것도 감독의 의무입니다.”
남자는 투덜거리면서도 내 말을 따라줬다.
30분. 이제 30분이 지나면 그는 강연수 박사의 안내를 따라 이곳으로 오게 된다. 무슨 말을 할지는 다 정했다. 그의 반응도 대충 예상을 한다. 나는 그를 너무 잘 알고 있고, 그 역시 나를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쪽에서 먼저 치고 나가야한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사람들의 환상을 이용하는 거다.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 틀려. 절대적으로 틀리다고. 여자뿐만이 아니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상황에 맞춰 대처하려는 학습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욕망이 첨가되면 뒤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받게 될 상처는 떠올리지 못하는 것이다. 욕망이 충족된 다음에야 생각하고 후회한다. 이미 늦었으면서도……. 사람은 그런 동물이다.
30분이 거의 지나자 내가 있는 공간 뒤로 작은 화면이 나오면서 그곳에 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강연수 박사의 조수였다. 그녀는 그가 영혼 보관소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해줬다.
나는 남자에게 내 앞에 앉으라고 얘기했다. 애인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남자라는 설정을 말해주면서 최대한 밝게 웃으라고 명령한다. 그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내 남자의 뒤에 있는 문의 옆에 있는 램프의 불빛이 붉은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하자 우리는 약속한 연기를 시작했다. 남녀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연기하기 시작했고 강연수 박사의 안내를 받아 이곳으로 온 그는 이상한 남자가 있다는 사실에 언짢았는지 조용히 화를 냈다.
“강연수 박사님. 아무래도 잘못 안내하신 거 같습니다.”
“아니. 이곳이 맞네. 섣부른 판단으로 진실을 회피하지 말고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시게.”
처음 남자만 보고서 다짜고짜 화를 냈던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그의 다리가 심하게 휘청거린다. 오직 그의 자리에만 강도 높은 지진이 형성된 것 같다.
좋아.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그의 심리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는 사실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내가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기쁜 것이고, 그를 아프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한 번 호흡을 고른 다음 그는 모니터에 나와 있는 내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눈은 이게 어떻게 된 것인지 묻고 싶어 한다. 그러나 먼저 입으로 꺼내지 않는다. 진실을 알기가 두려운 것이다.
“나 당신이 싫어졌어.”
나는 다짜고짜 본 목적을 꺼냈다. 그에게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줘선 안 된다.
“……저 남자는?”
그가 거울의 반대편에 서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 나는 남자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그에 맞춰 빙긋 웃으며 소심한 동작으로 손을 살짝 들어올린다.
“여기서 알게 된 남자야.”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싫어졌다는 거야?”
“꼭 그것만은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거울을 가리켰다. “당신 꼬락서니를 봐. 4년째 같은 옷만 입고, 새로운 곡도 만들어내지 못해서 수입도 끊겼지? 그렇게 가난해서야 날 유지할 수 있겠어? 당신을 믿다가 소멸되느니 차라리 딴 남자를 만나는 게 당연하잖아.” 논리적이고 현실적이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말에 사고회로가 정지해버렸는지 그는 딱히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나는 그런 당신의 미지근한 태도도 싫어. 도대체가 발전이 없잖아? 후― 언제까지고 당신만 바라봐주기를 원해? 그래서 날 이런 곳에 가둬놓고 영원히 소유하기를 원한거야? 자기만족을 위해?”
그는 내 시선을 회피한다. 꽉 움켜쥔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분해서가 아니다. 내가 말한 사실들을 납득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 내 거짓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의 마음은 뿌리째 흔들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자체가 무리다.
“더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만둬. 우리 사랑에는 돈이 드니까.”
흡혈귀 퇴치를 위해 심장에 말뚝을 박아버리는 것처럼 나도 그의 가슴에 커다란 못을 쑤셔 박았다. 몇 번이고 못의 머리를 때려 그의 가슴에 단단히 고정시킨 나는 북극의 얼마 남지 않은 빙하를 담은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거울을 봐.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지.”
그래서 거울을 가져다놓았다. 겨우 4년 밖에 지나지 않았으면서 10년은 늙어버린 것 같은 얼굴을 확인시켜주기 위해서. 이곳에 내 영혼을 보관하는 대신 부담하는 비용이 얼마나 그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드는지 깨닫고 해주려고.
내 예상대로, 그는 거울 앞에 다가가지 않았다. 절망을 쓸어 담은 눈동자로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을 정도로 멋진 반응이다.
“그를 만나서 행복해?”
잔잔한 파문으로 요동치면 호수의 표면이 조용해졌다. 그는 침착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응. 행복해. 하지만 널 보면 불행해져.”
아니. 전혀 행복하지 않아. 하지만 널 보면 행복해져.
“그만 가버려. 이제 필요 없으니까.”
내일도 올 거야? 당신이 정말 보고 싶은데.
나는 만면에 활짝 핀 장미처럼 정열적이고 아름다운 미소를 떠올렸다.
나는 마음에 시들어버린 한 송이 국화처럼 침울하고 고독한 눈물을 흘려보냈다.
“안녕.”
안녕, 내 사랑.
강철과도 같은 단단함을 지닌 굳은 결의를 전면에 내세우자 그는 진심인지 거짓인지 이제야 판단하려고 노력했다. 이를 악물고 눈에 잔뜩 힘을 주지만 소용없다. 나는 이미 마음먹었고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생각은 절대 없다.
잠시 후, 그는 결국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말없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이별의 짧은 인사도 없이 그렇게 사라졌다.
남자는 벽에 기대서서 나를 쳐다보고는 흠칫 놀란다.
“왜 놀라죠?”
“……임의의 장소로 소환되지 않은 영혼은 울 수 없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거죠?”
그는 내 물음에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방을 가로질러 거울을 가져와 모니터 앞에 둔다. 거울에 비친 나는 울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건 불가능하다.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면 나는 절대 울 수가 없는데. 거울 속에 비친 내 볼에 흐르는 투명한 액체는 눈물이 확실했다.
“설마…….”
나는 그를 떠올렸다. 말없이 나간 그는 이것을 보았을까. 내 심리를 읽기라도 했는지 그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긴 한숨을 내뱉은 다음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안심해요. 보지 못했으니까. 그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적어도 내가 관찰한 바로는.”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그는 석연치 않다는 얼굴을 하고서 내게 질문했다.
“당신은 이걸로 만족합니까?”
“아니요.”
내가 바로 답하자 그는 잠시 호흡을 짧게 들이마시더니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만 했었죠?”
남자의 물음에 숨이 멎는다. 절대적으로 내가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어느 누구도 감히 그렇게 주장할 수는 없다. 애초부터 사랑 같은 비과학적인 것에 논리적인 사고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잖아. 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면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게나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다.
“네. 맞아요. 사랑은 모순덩이죠. 설령 상대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준다고 해도 내가 만족하지 않으면 안 돼요. 그게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하죠. 당신은 만족했나요?”
내 물음에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거울을 옆으로 밀어내고 의자에 앉아 나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을 모니터에 갖다 대며 내 눈물을 닦아주는 시늉을 했다.
“저 남자, 아마도 다시 일어설 겁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이에요.”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빙긋 웃었다.
“당신처럼 강하고 멋진 여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다시 분명히 일어서서 자신의 두 발로 나아갈 겁니다. 그게 인간이니까요.”
그것이 바로 인간.
그의 말에― 나도 마지막으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 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