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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 ㅣ 창비청소년문학 145
김민서 지음 / 창비 / 2026년 3월
평점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착하게 살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일까. 우리는 종종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착하게, 성실하게 버티다 보면 행복이라는 보상이 따라올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느 순간 이 전제들은 나를 옭매어온다. 내 삶이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느낄 땐 더욱 숨통을 쥐여오는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버티고 있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사는지를 묻고, 약한 사람으로 정의한다.
『율의 시선』으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김민서 작가의 신작 『호구』가 그 지점에서 시작한다. 큰 사람이 되라는 말을 들으며 가족을 위해 착한 아이로 살아온 윤수가 더 이상 벼랑으로 밀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바둑판 위에 돌을 올려놓기 시작하는 순간. 그리고 윤수의 한 수 한 수는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된다.
소설은 총 5장 그리고 아주 짧은 에필로그로 구성되어 있다. 제목인 ‘호구’는 어수룩하고 이용하기 쉬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의미로 자주 쓰이지만, 바둑에서 바둑돌 석 점이 둘러싸고 한쪽만이 트인 모습이 범의 아가리와 같다고 붙여진 바둑 용어이다. 『호구』에서는 바둑이 이 소설의 전체 맥락을 따라간다. 그리고 챕터 제목 또한 바둑 용어다. 1장 호구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2장 축, 3장 사활, 4장 불계패 그리고 5장 신의 한 수로 마무리된다.
『호구』는 각 장의 제목으로 쓰인 바둑 용어가 윤수의 심리와 선택의 단계를 함축적으로 알려준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바둑판 위의 돌처럼, 매 순간 놓이는 자리와 방향에 따라 계속해서 다음 수를 고민하고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
1장 호구에서 윤수는 자신을 백돌에 비유한다. 자신은 흐름을 주도하지 못하고 상대에게 끌려다닌다고 생각한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자기 멋대로 사는 흑돌 같은 인생을 가진 권이철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윤수는 무력해지다가도 이철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천천히 자신도 흑돌이 되기 위해서.
2장 축에서는 관찰을 토대로 몇 가지를 시행해 본다. 축이라는 용어는 지그재그로 도망가도 계속 단수가 되어 결국은 잡히는 행태를 의미한다. 더 쉽게 말하면 정해진 방향으로 계속해서 몰아넣는 수이다. 지금의 자신을 바꿔보고자 이리저리 머리도 노랗게 탈색해 보고 하지만 흑돌이 되기는커녕 할아버지의 병이라는 현실이 돌아오며 마치 정해진 방향대로 윤수를 몰아넣기 시작한다.
3장 사활에서 윤수는 더 이상 흉내 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몰아질 대로 몰아진 윤수는 몸을 만들고 폭력도 써본다. 호구 잡히는 삶보다는 개새끼가 되는 편이 낫다는 마인드로. 3장에서 윤수는 점점 승기를 잡아가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학교에서의 위치도 변화한다.
이후 4장, 5장에서는 단순히 승패의 문제를 두지 않는다. 바둑에서는 승부가 끝났을 때도 무언가가 남는다. 판의 모양을 보며 어떻게 전개가 되었는지, 흐름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남는다. 그리고 한 수 한 수 되짚어볼 수 있다. 결과가 정해졌더라도 그 판은 다시 읽히고 해석되기도 한다. 기권하며 불계패를 기록하더라도. 윤수는 그 만의 신의 한 수를 찾아낼 것이다. 어떤 수가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을까. 강해지는 것, 아니면 나다워지는 것.
『호구』를 읽고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행복한 것이 잘 사는 것인지. 행복하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하는 것인지. 글쎄 어느 쪽도 완전한 답이 아니다. 선인이 되든 악인이 되든, 그것이 억지로 된 상태라면 계속해서 버티기 힘들 것이다. 윤수를 통해 『호구』는 선인이 악인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우리에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행복이 우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행복해서 사는 것이 아닌 그냥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살아낼 때야말로 우리를 밥 먹게 하고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강해진다는 것은 남을 이기는 것이 아닌 자신의 삶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상태일 것이다. 삶은 거창한 선택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차근차근 다음 수를 읽어내는 것에 가깝다. 내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때그때의 선택을 하는 것.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행복은 우리를 스쳐 지나갈 것이다. 아주 잠깐이지만 분명하게.
#호구 #김민서 #텍스트Z

하지만 가난하니까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장돌뱅이 짓을 하며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껴 왔을 거면서, 나한테 거짓말을 했다. 마치 내가 자유로운 양 할아버지는 나룰 속이려 들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원망하지는 않는다. 할아버지거 말하는 자유라는 것을 나도 할아버지도 제대로 가져본 적 없으니. 자유는 모호하고 허무맹랑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유 따위가 아니다. 더 현실적이고,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것. 힘. - P21
하지만 행복은 얄궂다. 남과 비교하지 않으면 내가 행복한지 알 수 없으니. - P30
큰 것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점점 움츠러든다. 견뎌 내야 하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내게 나를 견뎌 낼 힘이 조금 더 있었으면, 혹은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 딱 그만큼만 삶이 내게 밀려왔으면.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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