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표류기
허지웅 지음 / 수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허지웅. 필름 2.0을 통해 그의 이름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이렇게 대단한 입담의 소유자인지 몰랐다. -그 동안 라디오 고정 프로도 있었다는데 전혀 몰랐다.. - 마녀사냥과 썰전에서 그가 말할 때마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으로 웃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 그가 2009년에 이미 책을 썼었다.

 

첫 장부터 놀라움의 연속이다. 그는 20대를 고시원과 반지하 전셋방을 전전하며 보냈고 부모님으로부터 완전한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독립을 이룬 사람이었다. 대학생 시절 그의 하루는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가득차 있었고 사회인이 되어서도 이러한 패턴은 변하지 않은듯 했다. 일을 그리 했는데 재산이라 봤자 전세금 2000만 원에 통장 잔고가 전부라는 그의 자조적인 이야기를 통해 그의 삶은 여유와는 거리가 멀었고 흔히들 말하는 고생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에세이를 고생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은 대한민국에서 평범한 20대로 살아 왔고 시작부터 어리석고 반복적으로 어리석고 꾸준하게도 어리석었던 그 10년 동안 때때로 즐겁고 대게 혼란스러웠다고 서술한다.

 

문득 나의 20대는 어떠했는가 떠올려 보게 된다. 나 역시 학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경제적으로 늘 쪼들려 주변 친구들보다 누리지도, 경혐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그것을 고생이라 생각했고, 부끄럽게 생각해왔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힘들었고, 누군가 나의 처지를 보고 동정할까 무서웠다. 아직도 20대는 나에게 고통스런 기억들로 가득찬,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기일 뿐인데..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땀내 나는 현실의 연장선이자 약간의 살 냄새가 더해진 삶의 풍경이다. 스스로의 지리멸렬했던 정신상태, 피해의식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소박한 삶의 참된 가치를 체득한 그는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두 다리로 험난한 길을 걸어왔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거짓이나 가식없이, 자신의 진실된 삶의 경험들을 통해 누구보다 적확하게 자신의 인생과 가치관을 이야기할 수 있나보다. 인생의 7막 7장도 없고 상위 5%가 될 수 있는 성공의 키워드를 알려줄 수 있는 노하우도 없지만 가까스로 삶의 방향성을 찾기까지의 이야기를 이토록 쿨하고 시크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정말 책을 읽다보면 그가 옆에서 말하고 있다는 착각까지 든다. 그의 문장은 그의 어투와 꼭 닮아 있다. 저속하고 과격한 표현, 그가 즐겨쓰는 어휘들까지.  그리고 마녀사냥에서 가끔 그가 이야기하는 그의 일화들이 책에 등장하여 반갑기도 하다.

 

책은 총 세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은 사람들의 나라는 그의 20대의 일상을 다룬 장이고, 큰 사람들의 나라는 그의 정치적 견해가 담긴 장이다. 나는 정치적인 식견이 부족한 사람이므로 두 번째 장에 대해서는 논할 말이 없다. 다만 시민들의 정치 참여와 투표권의 올바른 행사에 관련한 그의 주장들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보수 또는 진보의 정치 가치관이 아닌 실제 계급 정체성, 즉 주머니 사정을 좇아 투표하는 태도다. 자기 주머니 사정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연민하는, 실욕적인 투표 자세가 필요하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자 세상을 바꾸기 위한 시작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늘을 나는 섬의 나라는 영화 평론가로서의 허지웅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이다. 이제는 인터넷을 통해 영화에 대한 개인의 생각과 감상평을 실시간으로 알아볼 수 있다. 별점이나 평점을 통해 좋은 영화, 혹은 재밌는 영화를 판단한다. 그래서 영화 평론가들의 비평이 더 필요하지 않나 싶다. 일반 대중들에게 외면받았지만 훌륭한, 이해하기 힘든 영화에 대한 비평을 찾아봄으로써 우리가 놓쳤던 감독의 의식을 가늠해볼 수 있다. 또한 이렇게 생성된 사람들의 관심은 더욱 많은 예술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허지웅의 비평은 간결하면서 분명하고, 이해하기 쉽게 전달된다. 전문적인 견해와 대중의 이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잘 잡아내는 훌륭한 비평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방송 출연도 반갑지만 영화 평론을 더욱 자주 읽게 되길 바란다.

 

아주 정직하고 온전한 본인이 가진 힘으로 살고 싶은, 삶의 관성을 거스를 줄 아는 그의 삶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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