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처럼 서로 다른 세 배역이 한 명의 인간인 내 안에 함께 존재합니다. 남이 가진 하나가 없어서 간절히 목말라하는 나, 그 부족함을 극복하고자 하는 나, 그와 반대로 왜 쓸데없는 짓을 하느냐고 말하는 또 다른 나. 이 세 배역 모두 내안에 있는 나입니다. 여기에서 "건강해지고 싶으냐?"라는 말이왜 "온전해지고 싶으냐?"라는 의미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인간은 병이 낫고 싶지만 동시에 그대로 머물고 싶은 마음도 있기때문입니다. 지금의 환경이나 조건이 좋지는 않지만 익숙한 것에서 떠나기 싫은 마음이 동시에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고,
그래서 인간은 온전해질 수 없는 존재인 것이지요. 그리고 그불온전함이 우리가 가진 아픔이 ‘들것일 겁니다. 그렇기에우리는 예수의 질문과 답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요한 5,6-8)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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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 없다고 느꼈을 때 저는 저를 둘러싼 문제들이 한 번에 해결되기를 바랐던 적이 참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 어떤 문제도 한 번에, 단칼에 해결된 적은 없었습니다. 특히 타인과 관계된 문제이면 더욱 더 그랬습니다. 관계에 의한 문제는 과거나 지금이나, 저나 다른 누구나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어떤 문제에 있어 저 자신이진보와 성장이 전혀 없는 것 같을 때, 제 마음에 들어온 성경구절은 ‘길을 걷다가 지친 예수‘였으며, 그가 ‘마음이 북받쳐눈물을 흘리는 모습‘(요한 11, 28-37)이었습니다.
그도 나처럼.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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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유익했는지 아닌지는 기간에 달린 것이 아니라삶을 어떻게 썼느냐에 달렸다.
어떤 자는 오래 살고도 조금 살았다.
미셀 드 몽테뉴, 『에세 1』, 1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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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잘것없는 인간인 저는제 뜻을 쉽게 내려놓지 못합니다. 그 차이로 인해 제 침묵은고요하지 않고, 제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도 고요하지 않게 됩니다. 아마도 사람들 대부분이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때 한 가지를 더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위와 같은 이유로 인해 마음은 평화로울 수 없는데 그 때문에 거짓 평화를갈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종교 생활을 하며, 성경 혹은 경전을 읽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길 기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말씀을 제대로 만나고 그 말씀에 눈이열리면 처음에는 감격스럽지만 그 감동이 지나간 후에는 평화가 아닌 ‘고요하지 않은 침묵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평화로 나아가는 첫 단계입니다.
이는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들여다보고 마주하는 시간은 어두운 밤을 보내는 것과 같고, 그 시간을 인내하고 자기 내면을 계속 들여다보는 일은 몹시 아프고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 어둠을 서둘러 외면한채술과 수다, 취미 같은 것으로 그 고통을 덮어버리고 들여다보려 하지 않습니다. 이때 느끼는 마음의 갈등 없음이 바로 거짓 평화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평화와 거짓 평화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고, 진짜 평화로 이르는 길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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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교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람 보는 ‘눈‘이란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는 능력이라는 것과 가능성이란 단어가 종종 믿음의 동의어로 쓰인다는 것을.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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