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프로젝트 - SF, 판타지, 블랙코미디 본격 장르만화 단편집
봉봉 지음 / 씨네21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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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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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봉 웹툰 작가님의 <웰다잉 프로젝트>는 6편의 SF.판타지. 블랙코미디가 담긴 본격 장르 만화 단편집이다.

⚀ ANA
불임, 난임 등의 문제로 임신과 출산이 어려운 여성들을 대신해 논란의 '인공 자궁'이 개발된다. 인공 자궁 ANA를 통해 태어난 최초의 태아 Ana는 개발업체의 홍보와 마케팅으로 유명 인사가 되고, 애초의 만든 목적과 다르게 높은 이용 가격으로 인공 자궁은 상류층의 전유물이 된다. 개발업체는 ANA의 유산을 대비해 백업 인공 자궁으로 똑같은 쌍둥이를 만들고, 쓸모 없어진 백업 쌍둥이들은 불법적 경로를 통해 매매된다. 결국 세상에 범죄가 폭로되고 ANA 법이 만들어져 난임부부에게 인공 자궁의 우선권을 주고 불법 아기 생산을 추적하는 특별팀이 만들어진다.

과학과 윤리 문제를 접목시킨 SF 물로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인 단편이었다.

❝ ANA는 태어나지 못했을 아이들을 태어나게 해 준 과학의 승리인가? Vs. 섭리를 거스르고 불행을 안기는 불경한 존재인가?❞

⚁ 웰다잉 프로젝트
가장 완벽한 모습으로, 가장 아름다운 연출로, 가장 원하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도와주는 '웰다잉 프로젝트' 쇼. 세 명의 지원자를 골라 그들이 원하는 방식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대중들에게 보여준다. 먹방, 관찰 예능 등 포르노 예능이 대세를 이루는 요즘 죽음마저도 예능이, 상품이, 될 수 있다는 데 소름이 돋는다.

❝ 체험해보세요. 최고의 죽음을 위한 패션 수의와 관, 웰다잉 단칸방 컬렉션 주문번호는 000-0000, 상담 즉시 사은품을 증정해 드립니다.❞

⚂ 붉은 여왕
유전자 조작으로 똑같은 외모로 태어나기에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평가받은 수 있는 유토피아를 그리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명백한 디스토피아다. 누구든 보통과 다른 사람들이 보통의 모습이 될 수 있는 시술이 개발되지만 시술은 그들을 오히려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버린다. 보통과 다르다는 것, 보통이지만 특별하다는 것, 외적 미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섬뜩하다.

❝ 1세대 인조 육체보다 더욱 아름다워지세요! .. 2세대 인조 육체, 출시 임박! 예약을 받고 있습니다!❞

⚃ 마지막 비행
조회 수와 좋아요가 돈벌이가 되는 세상, 대중은 더욱더 자극적인 콘텐츠를 원하고 크리에이터들은 대중의 입맛에 따라 자극적인 소재를 찾는다. 크리에이터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중들은 콘텐츠를 자신의 입맛대로 해석하고 평가한다. 조회 수와 좋아요의 세상에 진실은 어디에.

❝ 더 튀는 걸 해야 돼~ 톡톡 튀는 거~ ❞

⚄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
손톱을 먹은 쥐가 손톱 주인으로 둔갑해 행세한다는 설화를 차용한 판타지다. 엄마로부터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가스라이팅 당한 주인공이 자신의 손톱을 먹고 도플갱어가 된 햄스터를 통해 자신을 인정하고 자존감을 회복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랑받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은 자존감을 회복시키는 첫 단계다.

❝ 날 사랑해줘서 고마워.❞

⚅ 신은 변기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 자신을 구원한 신의 실체가 변기라니! 변기에는 똥을 싸야지!

❝천국행 티켓은..현금 누적액이 이만큼 되면 구입할 수 있습니다...❞

6편의 단편들 모두 작가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그림도 좋았고 임팩트도 적절했다. SF를 통해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현대 사회와 인간의 탐욕, 욕망과 윤리적 문제를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시리즈로 계속 나오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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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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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에 의해 강제적인 죽음을 맞이한 숲의 나무들에게 이것은, 훼손이고, 파괴이며, 폭발이자, 비극이었다.

사람에게 파괴된 적이 있는 나무는 자신을 살린 나무의 뿌리와 이어지고 다시 살아난다. 그러나 자신을 살린 나무는 인간에 의해 죽고 만다. 홀로 살아난 나무는 다시 죽을 수 없다. 숲의 모든 존재가 죽음을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나무는 자신이 파괴되었던 자리에서 사람을 파괴한 적이 있다.'

🌲🌳
장미수와 신복일의 5남매 일화, 월화, 금화, 목화, 목수 중 금화와 이란성 쌍둥이인 목화, 목수가 산에 놀러 갔다가 기이한 사고를 당한다. 금화는 실종되고 목수는 그날의 기억을 잃고 겨우 목숨을 건지고, 목화는 사고 이후 기이한 꿈에 시달린다. 그날 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날의 사고와 금화의 실종은 겪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 목격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일, 기억하지만 가능하지 않은 일, 일어났으나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산에서의 사건을 함께 겪은 신목화와 신목수는 신금화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것은 그 믿음에 관한 이야기다.

임천자와 그의 딸 장미수, 손녀 목화에게 대물림된 악몽은 꿈이 아니다. 증명할 수 없으나 존재하는 세계이며 이 세계로 소환되면 단 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투신자살을 하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와중에 오로지 단 한 사람만을 구할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의 죽음은 그저 지켜봐야만 한다. 소환을 당하고도 목소리의 명을 거부하면 여지없이 두통 같은 신체에 이상이 찾아온다. 이 목소리는 신이 아니다. 나무다.

어째서 이들인가...그것은 죽어가는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과도 같다.

대물림을 이어받은 목화는 앞으로 운명의 고리를 끊을 수 있는지..실종된 금화는 찾을 수 있는지..이와 같은 운명을 짊어진 사람들은 또 있는건지...

📍최진영 작가님의 따끈한 최신작 '단 한 사람' 가제본은 원작의 1/3, 약 95페이지 정도 수록됐는데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너무 재밌다. 판타지가 곁들어진 이번 소설에서 최진영 작가는 '삶과 죽음, 신과 인간의 틈에서 피어나는 최진영식 사랑의 세계를 보여준다'.

#단한사람 #최진영 #가제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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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맛집 산책 - 식민지 시대 소설로 만나는 경성의 줄 서는 식당들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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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공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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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일제 강점기 시대(1930-40년대)의 서울, 경성의 유명한 열 곳의 맛집과 인기 메뉴를 소개한다.

지금의 남대문 근처는 당시 '본정'이라고 불렸는데 그곳에 조선 최초의 서양요리점 '청목당'이 있었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도 종종 등장하는 도쿄 청목당 본점의 경성 지점인 셈이다. 비프스테이크, 프라이드 피시 같은 서양요리와 돈가스, 고로케같은 '화양절충'이라 하여 일본인의 입맛에 맞춘 서양식 요리들이 주를 이뤘다.

그 외, 본정에는 가족 나들이 장소였던 미쓰코시 백화점 식당, 일본요리옥인 '화월', 과일 디저트 가게이며 후르츠 파르페로 유명한 '가네보 프루츠팔러'가 있었다. 서양요리 코스보다 다소 저렴하게 제공됐던 '런치'가 인기 있었다. 이들 식당에선 조선요리가 제공되지 않았는데 식당 손님들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당시 국밥 가격의 몇 배나 되는 가격을 치르고 가긴엔 부담스럽기도 했다.

조금도 프라이빗 한 공간을 제공했던 일본요리옥들은 이후 해방 후, '조선요릿집','요정'으로 변해가며 술과 음식을 접대하는 공간이 되었지만 지금은 '요정'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비슷한 기능의 업장들이 있다.

종로엔 경성 유일의 조선 음식점인 화신백화점 식당, 김두한윽 단골 설렁탕(조선인의 소울푸드)집인 이문식당, 경성냉면을 제공한 동양루가 있었다. 이문식당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일본인 회사와 거주지가 밀집해 있던 본정의 서북쪽인 장곡천정엔 조선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점인 조선호텔 식당이 있었다. 프랑스 코스요리(서민들의 한 달 식비보다 비싼)를 제공했으며 숙박비도 상당히 비쌌다.

지금의 을지로인 황금정엔 일본 미술학교를 졸업한 이준석이 '낙랑파라'를 개업했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로 잘 알려진 이곳은, 갈 곳 없는 목일회, 구인회 등 예술가들의 모임 공간이 되었다. 일종의 아지트인 셈이다. 커피를 주력으로 팔았지만 맛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황금정엔 조선공산당의 창립총회가 열렸던 중화요리점, 아서원도 있었다.

식당과 요리를 소개하는 신문기사와 광고, 방인근의 <마도의 향불>,심훈의 <불사조>,김말봉의 <찔레꽃>, 이무영의 <명일포도> 등 식민지 시대의 소설에서 재현된 식당들과 요리들이 그 당시를 더 생생하게 보여주는듯 더 재밌게 읽었다.

🔖그들은 하던 말을 잠시 끊고 곁에서 와서 주문을 받으려는 여급 아이에게, "정히 씨는 무얼 잡수시렵니까?" 채필수는 메뉴를 들여다보며, "글
세, 나는 런치를 먹지." (...) 정희는 아이더러 "저, 밀크하고 팡을 가져와." "팡은 빠타를 발라요?" 아이가 물었다. "음! 그러구.... 좋아, 그것만 가져 와?"
"그걸로 점심이 됩니까?" "아까 나올 때 무얼 먹엇세요"
_ 동아일보에 연재된 장혁주의 <삼곡선>

식민지를 긍정하는 경험으로 이런 소개가 조심스러울 수도 있으나 저자는 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당시 조선에서의 외식문화의 정착과 분화를 보여 주며, 맛집에 드리워진 식민지의 그늘과, 지금 우리 외식문화의 유래를 되짚어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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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듀엣
김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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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조개껍데기들이 세상 어디에나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물체, 아니 존재들처럼 보여. 마치 우리처럼.(255p)

11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고스트 듀엣'에는 있으나 보이지 않는 존재들과 세상을 먼저 떠난 이들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사회가 소수자들과 힘없는 자들에게 행하는 크고 작은 폭력 속에서도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려고 안간힘을 쓰며 서로 연대하며 보듬는 모습에서,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그 힘이라는 것은 결국 사랑이 바탕이 된다. 그 사랑이란 것은 부족한 나의 것도 나눠주는 것이고, 있는 상대의 모습 그대로를 품에 안는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자격을 갖는 것이다.

작가는 이야기 속에서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강자들의 폭력을 드러내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약자와 소수자들의 투쟁을 보여준다. 그 투쟁이란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속한 현실이 우울할지라도 결국 이 삶을 살아내겠다는 의지, 그것들이 연결돼 단단히 힘을 갖는 것이다. 그들은 귀신이나 고스트가 되어서도 때론 홀로그램으로, 가상현실 속에서 나타나서라도 그들과 함께 한다.

내가 읽은 단편집 중에서 가장 많은 이름들이 등장한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있나'를 읽으면서 인물관계도를 그렸는데 그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하나로 이어져 커다란 원을 이룰 때 적잖은 감동을 느꼈다. 우리는 혼자 살(할) 수 없고, 연결될 때 완성된다.

🔖형우의 소설에는 항상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누가 누구를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누가 누구를 선불리 보듬지도 않으면서. 아니 어쩔 땐 섣부르게 보듬으면서 인간이 인간을 생각하며 인간에게 손 내미는 것을 보여줬다. 이 정도면 휴머니즘도 병이라는 말을 들어도 형우는 존재가 존재를 쉬이 저버리지 않는 이야기를 쓰려 애썼다. (78p)

형우의 소설, 결국 김현 작가님의 소설이지 않을까.
김현 작가님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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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시간 앞에서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 바란다. 너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너의 시간을 빼앗아 가게 두지 않았음 좋겠어.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시간을 되돌려보고 싶을 땐 시계를 열고 닫아보는 것도 좋더구나. (48-49p)

🔖남들이 사람 취급을 안 해준다고 해서 내가 사람인 것까지 포기하면 안 돼요. (53p)

🔖말을 줄이며 상민은 조용히 그녀와 눈빛을 나눴다. 눈빛. 그것은 죽음을 데리고 다니는 이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드는 언어였다. 눈빛은 이무런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많은 말을 했고, 꼭 해야 할 말을 하도록 했다. 그들이 살아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82-83p)

🔖형석은 사과할 자격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자신을 만만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승우는 사과하지 못했음을 평생 기억하는 사람이야말로 누군가를 만만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누구도 하루를 허투루 보냈다고 여기지 않았다. (115p)

🔖나는 '그런데도 인생'을 살면서도 살자고 반복해서 말한다. 믿는다. 나와 영수는, 아마도, 아니 분명히 이후로도 오랫동안 꿈이 있는 사람으로서. 가난한 연인들로서 각자의 삶과 우리라는 삶을 동시에 살아내고자 애쓰게 될 것이다. 나는 그런 우리에게 주고 싶었다. 그게 무엇이든 줄수만 있다면, 주어야 한다면. 주는 행위만으로도 사랑은 생생한 색채를 띠기도 하니까. (127p)

🔖내가 진짜로 묻고 싶었던 건 정규가 쓰는 소설의 미래가 아니라 소설을 쓰는 정규의 미래가 아니었을까. 어떻게든 쓰더라도 어떻게 쓸지를 고민하고, 어떻게든 살아지더라도 어떻게 살지를 계속 자문하는 사람이 돼야지. 작가라면. (212p)

🔖인생이란 다짐의 연속이다. 다짐이란 부질없는 것. 다짐하다 인생 다지는 거다. (2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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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주화운동에서 시민군을 도왔던 황금동 성매매 여성들, 성매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이야기가 폄훼되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관련 내용을 쓴 소설 '황금동 여인들'이라는 책을 읽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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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p 14째줄 '상민은 조금만 힘내자,'->'승남'으로 수정돼야 할 것 같아요.

#고스트듀엣 #김현 #소설
#한겨레출판사 #하니포터 #하니포터7기
#독서 #서평 #북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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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션 1
정보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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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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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저주토끼'의 정보라 작가님이 쓴 초창기 소설이다. 익숙한 구미호 이야기를 현대판 판타지 로맨스 소설로 둔갑시켰다.

🔖"지은 씨가 원한다면, 평생 다른 사람들한테 지은 씨 얘기 절대로 안 할게. 자신 있어."(44p)

여우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기를 빨려가면서도, 구미호 황지은을 사랑한 남자, 최기준. 외모와 잠자리에 홀려 결혼까지 하자고 매달린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구미호(이 때는 과거 구미호와의 기억을 잃은 후)의 결심을 얻어낸 기준은 그녀와의 악속을 지키지 못해 결혼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무한의 삶을 사는 구미호가 유한의 삶을 사는 인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인데도 기준은 그 약속을 기억조차 못 하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 구미호 앞에서 자신의 100%를 다 줄 거라고 말했던 기준, 애초 그런 약속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었다. 기준으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나중에 제정신이 들면, 목숨이 아까워지는 날이 있을거야. 그러니까 그런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마."(45p)

전설엔 없는 캐릭터가 기준의 할머니인데, 여우에 홀린 손주 기준을 살리겠다고 구미호와의 결혼을 반대하고 부적까지 만든다. 구미호의 심기를 건드린 할머니에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기준은 소중한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다. 그것은 '구미호와의 기억'. 그래서 기준은 구미호의 약속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개가 대가로 받아 가겠다고 했던 '소중한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 내게 소중하다고 할 만한 것은 할머니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깨어나시지 않는다는 현실 자체가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환 논리였다. 뭔지도 모를 소중한 것은 할머니를 살리기 위한 대가가 아니었던가? (146)

기준의 사랑은(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결혼을 밀어붙이려는 게 좀 이기적이기도 함) 맹목적이고(때론, 사랑이 구미호보다 무섭기도하다.), 구미호 지은이 '현재를 살아가는 여자'로서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고민하는 모습은 지금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저주토끼를 아직 읽지 않은 나는 사실 매운맛 공포를 기대했는데 예상 가능한 익숙한 장치들 때문인지 가볍게 읽었다. 장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2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가독성이 좋고 호흡이 짧아 속도감 있게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다.

🔖"약속한 것도 기억 못 하는 구나 .."
"정말 약한 게 인간이구나. 믿은 내가 바보였어."(1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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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정보라 #소설 #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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