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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ㅣ 포션 1
정보라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평점 :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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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는 '저주토끼'의 정보라 작가님이 쓴 초창기 소설이다. 익숙한 구미호 이야기를 현대판 판타지 로맨스 소설로 둔갑시켰다.
🔖"지은 씨가 원한다면, 평생 다른 사람들한테 지은 씨 얘기 절대로 안 할게. 자신 있어."(44p)
여우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기를 빨려가면서도, 구미호 황지은을 사랑한 남자, 최기준. 외모와 잠자리에 홀려 결혼까지 하자고 매달린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구미호(이 때는 과거 구미호와의 기억을 잃은 후)의 결심을 얻어낸 기준은 그녀와의 악속을 지키지 못해 결혼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무한의 삶을 사는 구미호가 유한의 삶을 사는 인간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비밀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는 것인데도 기준은 그 약속을 기억조차 못 하고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조차 모른다. 구미호 앞에서 자신의 100%를 다 줄 거라고 말했던 기준, 애초 그런 약속 그렇게 쉽게 하는 거 아니었다. 기준으로서는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나중에 제정신이 들면, 목숨이 아까워지는 날이 있을거야. 그러니까 그런 약속은 함부로 하지 마."(45p)
전설엔 없는 캐릭터가 기준의 할머니인데, 여우에 홀린 손주 기준을 살리겠다고 구미호와의 결혼을 반대하고 부적까지 만든다. 구미호의 심기를 건드린 할머니에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벌어지고, 기준은 소중한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다. 그것은 '구미호와의 기억'. 그래서 기준은 구미호의 약속을 저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개가 대가로 받아 가겠다고 했던 '소중한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 내게 소중하다고 할 만한 것은 할머니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깨어나시지 않는다는 현실 자체가 '소중한 것'을 빼앗겼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순환 논리였다. 뭔지도 모를 소중한 것은 할머니를 살리기 위한 대가가 아니었던가? (146)
기준의 사랑은(사랑에 빠지기만 하면 결혼을 밀어붙이려는 게 좀 이기적이기도 함) 맹목적이고(때론, 사랑이 구미호보다 무섭기도하다.), 구미호 지은이 '현재를 살아가는 여자'로서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고민하는 모습은 지금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저주토끼를 아직 읽지 않은 나는 사실 매운맛 공포를 기대했는데 예상 가능한 익숙한 장치들 때문인지 가볍게 읽었다. 장편이라고 하기엔 애매한 2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가독성이 좋고 호흡이 짧아 속도감 있게 한자리에서 읽을 수 있다.
🔖"약속한 것도 기억 못 하는 구나 .."
"정말 약한 게 인간이구나. 믿은 내가 바보였어."(19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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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정보라 #소설 #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