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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랜드
천선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6월
평점 :
SF소설인 '나인'을 통해 자연과 인간의 교감을 이야기하면서 '학교폭력'의 문제를 보여주었던 천선란 작가의 '노랜드' 또한 10편의 SF나 판타지, 호러 등 장르소설들을 통해 환경, 유전자조작, 동물권, 인격장애, 여성권, 가정폭력 등 이 사회가 가진 여러 문제들을 보여준다. 이런 문제들을 고발하고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들이지만, 그 속에서 작가님이 서서히 보여주시는,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용기와 희망, 마지막에 보석처럼 빛을 발한다.
지구를 침략한 외계인과의 공생을 위해 인간 스스로가 가축화한 <바티카>의 문명 인간들을 인간으로 봐야 하는지, <옥수수밭과 형>에서는 유전자 복제로 만들어진 형을 죽은 형과 같은 사람이라고 봐야 하는지, <재,제> 에서 해리성 인격 장애를 겪는 주인공이 결국 한 자아를 죽이게 되는 과정과, 이란성 쌍둥이 자매의 정반대의 서로 다른 삶의 가치관, 그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담은 <두 세계> 등 매 단편들이 던지는 화두는 깊게 생각해볼만하다.
특히, 가장 좋았던 SF 단편들 사이에 놓인 호러 좀비물 <이름 없는 몸>은 남자라는 이유로 이름조차 갖지 못하고 불리지도 못하는 여자들과 어린 여자아이들을 지배하고 유린하며 살아가는 한 폐쇄적인 마을이 어떻게 자멸돼 가는지 보여준다. 끈질기게 숨을 이어가는 좀비가 된 이장의 모습은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성범죄 사건의 범인들을 보는 것 같이 끔찍하고 혐오스럽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에 땀을 쥐며 읽었다.
단편집을 이렇게 곱씹어 읽은 적이 있었던가. 단편집이 아니라 장편집처럼 한 편마다 묵직하게 다가왔다. 느낌을 곱씹느라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다. 다시 톺아 읽으면 지나쳐간 문장들이 눈에 들어오고 읽을수록 인덱스가 불어나는, 멋진 경험을 하게 만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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