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들
저스틴 토레스 지음, 송섬별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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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가장자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언어를 빼앗긴다. 빼앗긴 언어는 마치 그들이 자발적으로 침묵한 것 처럼 가려지고, 그러는 사이에 존재는 삭제된다. 분명히 이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암전들』은 그런 퀴어들의 목소리를 위로 끌어올린다. 마커로 삭제된 과거의 문장들을 그들의 목소리로 채워넣는다. 암전된 공간에 켜진 작은 플래시가 가장 구석진 곳에 소외된 사람들의 소매 끝자락부터 천천히 비추듯이.


이 이야기는 삭제당한 과거에 현재의 언어를 덧씌우는 대화로 가득하다. 당신의 과거는 나의 현재이기도 하며, '뒤틀고, 거짓말하고, 지어내서 비활성인 것'(147)이더라도 존재를 복원하는 과정. 이 메시지는 마지막에 거울을 보고 싶다는 후안을 위해 거울 틀에 자신의 얼굴을 대어 후안의 얼굴이 되어주는 나를 보여주는 데에서 드러난다.


즉, 우리는 그 대화들의 진위를 따져볼 수 없다. 노인 후안과 청년의 대화에서 드러나는 진상들이 실재하는지 이 책의 마지막까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뭐가 중요하겠는가, "모호한 것이 모조리 해소될 필요는 없"(275)으니. 우리가 대다수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따지고 들지 않듯이, 그들의 이야기 역시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침묵과 누락, 공백 속을 비집고 나온 작은 목소리의 진실성을 파헤칠 이유란 굳이 없으므로. 그들의 역사를 그저 들어주고, 말하기를 멈추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삭제된 텍스트는 서서히 다른 문장으로 채워져간다. 모두가 회복될 수 있는 방향으로.


삭제된 텍스트. 기분이 좋다기보다는 심연의 놀라움, 강렬한 흥미가 일었다. 나는 후안에게 그 삭제는 도발이었다고, 하지만 남은 단어들은 어긋난 음조로 울려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 p.68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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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다 하다 앤솔러지 2
김솔 외 지음 / 열린책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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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다'라는 행위는 뭘까.

질문을 던짐으로서 세계를 보는 눈을 확장시키는 행위에 가깝지 않을까. 정말 관심이 없다면, 어찌되든 상관 없다면 묻는 행위조차 나오지 않는다. 타인의 답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니 물음에 관련된 이야기들은 그 행위로 독자가 보지 못했던 시야 사각의 세계를 깨부수는 행위가 되어야 할터다.


그런 의미에서 「고도를 묻다」(김솔)는 첫번째에 위치해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고도가 무엇인지, 왜 지금 고도에 대해 서로 묻고 말해야하는지. 아니, 고도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어떻게 질문을 끊임없이 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하므로. 나는 이것이 이 앤솔러지가 전하고 싶은 주제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읽기에는 다소 어려움)


내 기준 이 앤솔러지에서 가장 그 기대를 충족시킨 작품은 「개와 꿀」(박지영) 이었다. 평균이란 단어의 무정함, 정상성이라는 함정. 경계성 지적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날카롭고 서늘한 시선이 비수처럼 쏟아진다. 작가는 독자에게 묻고 독자는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너는 무언가 다른지. 이 이야기를 보고도 귀가 붉어지는 경험을 하지 않는지.

모든 문장에 줄을 긋고 싶다던 다른 SNS 이웃들의 말에 강하게 동감한다. 사는 내내 이런 부분을 기억하며 살고 싶은, 그런 사람이 많아질 수록 분명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문장들.


앤솔러지 특성상 모든 작품을 만족하기란 굉장히 어렵다. 물론 이 책도 그렇다. 하지만 한개라도 기획 의도가 명확히 전달되며 독자의 마음에 크게 와닿는 단편을 만난다면 그걸로 만족하며 덮는 타입이라 나는 이 책도 나름 만족스럽게 읽었다. 왜냐면 저 한 작품으로 인해 어떤 경계를 보는 시야각이 트인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으므로.


 명칭을 붙이고 널리 알리는 것은 혼란을 혼란에 머물게 하지 않고 확실한 정체성을 부여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고요. / p.111


+ 개인적으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단편은 오한기 작가의 단편으로 아이 설정이 이게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너무 어른스러운 단어를 구사하며 어른들의 어려운 말을 이해하는 8살. 차라리 애늙은이, 빠르게 성숙해진 아이 이런 거면 모르겠는데 또 행동은 거실을 콩콩 뛰어다니는 어린이라 언밸런스한 느낌.. 요즘 8살들 '비율'이라는 단어를 정확하게 아나요..? 내가 너무 아이를 어리게 보는건가.. 주변에 어린이가 없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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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분 위픽
신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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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레이스에 참가했다. 앞서가는 자들의 등을 바라볼 수 있었던 건 내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주역이 아니더라도, 우승자의 영광을 누린 적 없어도, 트로피를 받지 못했다고 해도 내가 달렸다는 사실은 변합없다. / p.73

솔직히 기대 1도 없이 폈다가 덮는 순간 위픽 1등으로 올려버림.

심지어 이거 저번달 말에 다 읽었는데 오늘 또 읽느라 이제야 후기를 쓴다.


어떤 장면 하나가 좋았다기 보다 그냥 모든 장면들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면서 너무 좋았음. 내 친구를 힘들게 하는 타인을 지켜보는 모난 마음, 다른 사람을 쉽게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사람이 내게 퍼붓는 마음을 '폭력적인 포옹'이라고 표현하는 섬세함, 그러면서도 '미움과 원망은 수명이 터무니없이 짧았다'(52) 라고 하는 반짝거림.


짧은 분량임에도 상당히 성찰적이다. 작가는 그냥 상처에서 거리를 두고 직시한다거나 현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 보다는 계속 들여다보고 골라낸다. 불행이나 상처는 이런 열등감이나 작은 마음들에서 기인한거야, 이 정도의 고통은 살아가는 데 필요해, 이건 회복할 수 있을거야, 이런 감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아. 이런 식으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추분처럼 무언가 잃은 자리에 그만큼의 또 다른 좋은 것들이 채워지는 기분의 책이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모난 마음들만 안고 갈 수 있게끔.


+ 이 책 다 읽으면 남는 거 ? 인덱스가 덕지덕지 붙은 책 한 권과 이걸 끌어안고 우는 여자 한 명

++ 줄거리 설명에 '포켓몬GO를 켜고 호수 공원을 걷던 ‘신진’에게 죽은 은조의 의식이 달라붙는다' 라길래 귀신 나오는 이야기인가봐! 하고 기대했는데 아니었음. 근데 더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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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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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자 네티즌은 되고 싶지만 될 수 없는 여자 롤 모델을 우상화하는 반면, 젊은 남자 네티즌은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여자들을 파괴하고 싶어 한다. / p.191

띠지부터 말도 안됨

몇 안 되는 작가가 사랑하는 캐릭터들이 전부 여기에 있는 것 같대...이런 띠지 문구 듣도보도 못했음. 기대 안 할 수가 없잖아요.


신촌의 '뤼미에르 빌딩'에서 거주하는 이들의 이야기로 그 빌딩은 정말로 작은 세계의 축소판이다. 가출 청소년, 무당, 인터넷 여론 조작팀 등 약간은 평범하지 않지만 분명히 곁에서 같이 살고 있는 이들. 완전히 판타지도 아니고 완전히 현실에 발을 붙인 것도 아닌, 이상하게 땅에서 부유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야기들이 현실의 수많은 이슈들을 한번에 꿰뚫어버린다.


어쩌면 '뤼미에르 빌딩'은 작은 사회 실험의 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내일 죽을지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인간들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완전히 빌딩의 외부인인 내가 이들의 이야기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분명히 곁에 있다는 걸 알지만 마치 유령처럼 변해버린 사람들, 그림자 속에서 빛을 향해 응시하는 시선들을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감각적으로 탐구하는 작가 특유의 시선이 뤼미에르 빌딩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날카롭게 빛난다.



+ 사실 인터넷 여론 조작팀의 이야기를 하는 게 굉장히 장강명 작가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약간 오래된 느낌은 나는데 여전히 현실에 어느 정도 통용되는 것이...ㅎ....

+++ 개인적으로는 808호 쥐들의 지하 왕국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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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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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가장 재미있는 건 정사보다 야사, 정설보다는 속설이 아니던가.


고흐는 평생 그림을 하나도 못 팔았다는 흔히 알려진 말부터, 반려동물로 개미핥기(..!!)를 키웠다는 달리, '무직' 모리조(...ㅋ), 흔히 아는 <절규> 속 인물은 사실 절규가 아니라는 이야기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교양 미술사의 단락들을 재검토해보는 이야기는 재미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다.


미술 작품만큼이나 공간도 시대의 취향과 이념을 드러내는 언어다. 하얀 벽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이 왜 선택되었는지를 질문하는 것, 현대 전시 문화를 비판적으로 읽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p.257


주어진 정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뒤집어 생각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을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는 효과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남성 중심의 시각에서 기록된 예술사' 전부 이론적으로 알지만 미술품들을 들여다보던 관람객들은 단 한번이라도 그 이면을 들여다본 적 있었는가. 전시관의 벽은 당연히 희고, 오기된 작가명도 거기에서 그렇다 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던게 현실이었으니까.


마치 고정된 것 처럼 붙박힌 미술사의 정설을 깨부수고 시대의 욕망과 주류의 철학에 따라 유동적일 수 있다는 도전적인 시선은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예술의 가치를 전복한다. 특히 예술이 예술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공간의 미학과 정치가 결정한다는 말은 마치 환경에서 벗어나 오롯하게 홀로라는 사실이 불가능한 현대 그 자체와도 같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어떤 미술사를 다룬 책보다 가장 현대적인 책이었다.


+ 저런 의미에서 한겨레출판의 미술 관련 책은 대체로 재미있는데, 『언니네 미술관』 (이진민, 2024) 도 매우 재미있다. 같이 세트로 묶어도 꽤 어울릴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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