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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시럽 뿌리기 - 셋셋 2026
이영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8월
평점 :

한겨레출판의 '셋셋'이라는 시리즈를 어쩌다보니 3년째 꾸준히 발맞춰 따라 읽고 있다. 매년 한국문학의 샛별이 될 수 있을 작가들을 한발 먼저 소개한다는 취지는 매력적이지만, 솔직히 늘 큰 만족감만 남았던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신인들의 첫인상을 모은 앤솔러지라 그런걸까, 작품 간의 편차가 유독 크게 느껴졌기 때문일터다.
작년에 썼던 『셋셋 2025』의 평에는 '현실은 냉혹하고 우리는 일상을 버텨야 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은 평범함에 건네는 위안이 내게는 너무나 밍숭맹숭하게 느껴졌기에 인상적인 작품이 적었다.' 라는 감상이 남겨져있다. 상처를 그저 응시하거나 방관하는 글들은 퍽 공감은 갔으나 깊은 인상을 받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만난 『상처에 시럽 뿌리기』는 작년과는 결이 달랐다.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보통 약을 바르는 게 상처이고 혹은 고통을 배가 하기 위해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라는 관용어를 쓰기도 한다. 그런데 시럽이라니. 상처를 낫게 하려는건지 그 위에 달콤한 기억으로 덧칠을 하려는 건지, 혹은 덧나게 하려는 건지.
확실한 것은 하나다. 상처는 상처대로 놓아두고 그저 살아가자는 게 아니라 일단 그것를 직시하고 상처 위에 무언가를 해보려는 능동성이 작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모르는 척'의 사정거리 밖으로 걸어 나오고(이영주, 「모르는 개 산책」), 보이지 않는 눈에 끝까지 랜턴을 비추어 눈동자에 빛을 보여주는 (신은솔, 「그림자 밟기」) 저마다의 시도가 이어진다. 그 행위들은 딱지가 되어 상처 위에 내려앉을 수도, 혹은 그렇지 못하고 흘러내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각자의 시럽을 쥐고 행동하려는 이 능동성이야말로, 작년에 내가 '셋셋' 시리즈를 읽으며 느꼈던 밍밍한 위안과는 명확히 다른 선을 그어낸다
아마 이런 인상을 갖게 된 데에는 첫 발자국을 뗀 이영주의 「모르는 개 산책」이라는 단편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강남이라는 공간 속에서 '모르는 게 상책'이라는 방어기제를 고수하며 살아간다. 아들 친구의 학교폭력도, 본인이 '개 산책'을 하고 있는 알바 의뢰인이 가끔 보여주는 어긋난 부분에도 전부 눈을 감아버린다. 하지만 주인공은 의뢰인의 죽음 이후, 매일 같이 걸으며 온기를 나누었던 의뢰인의 개 '초코'를 구하러 나선다. '모르는 개'가 비로소 '아는 개'가 되는 순간, 철통같던 '모르는 게 상책'이라는 방어막에도 균열이 간다. 타자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던 삶에서 무언가를 감당해보기로 한 이 서툰 용기의 시작이 '아는 개'라는 키워드에 모두 담겨있는게 인상적이었다.
이어지는 원영원의 「여름의 갈래에서」 역시 그 능동성이 '이해'라는 시간의 축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여름 냄새와 함께 보여준다. 안 팔리는 만화가 아버지와 외도 직전의 어머니, 그리고 그 여름날 어린 아들의 기억. 소설의 결말에서 부모는 결국 미래의 우울증과 다툼 끝에 이혼에 다다른다. 완벽한 해피엔딩은 없다. 그러나 소설은 훗날 남들이 보기에 실패했다고 여기는 사랑의 모양이 될지라도, 과거의 여름밤 두 사람이 서로를 껴안으며 흘렸던 눈물과 찰나의 온기는 진짜였다고 일러준다. 실패한 결말이 지나온 사랑의 진심까지 훼손할 수 없다는 말은, 상처를 끌어안는 또 하나의 '시럽'일 것이다.
살면서 마주하는 상처에 우리는 모두가 다르게 반응한다. 누군가는 그저 바라만 볼 수도, 덮어버릴 수도, 꿰매려 노력할 수도 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상처를 보고 무언가를 하려는 행위 자체가 아닐까. 『상처에 시럽 뿌리기』의 다양한 화자들처럼 상처 위에 슬그머니 시럽을 올려둘 수도 있고 말이다. 유의미하게 치유하거나 사라지게 할 수 없다 한들, 적어도 상처를 바라보고 손을 내미는 그 미련하고도 아름다운 의지가 문학이 건네는 일종의 응원으로 읽혔다. 완벽하게 아물지 않아도 괜찮다. 그렇다 하더라도 손에 쥐어본 시럽의 끈적하고 달콤 쌉싸름한 감각은 오래도록 남을테니까.
**하니포터 13기 자격으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