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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김유나 지음 / 창비 / 2026년 1월
평점 :
▪︎p.96 | 하지만 태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렇게 사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마음 편히, 우리 둘이 재밌는 거. 태은이 골백번을 넘게 상상하다 끝내 경계하고 도리질 쳤던 거.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 은 사람을 위로하기보다, 우리가 이미 견디고 있는 삶의 감각을 정확하게 건드린다. 이 단편집의 인물들은 삶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바꾸고 싶지만 바꿀 수 없는 그런 자리에서 오래 버티고 있는 사람들이다. 대신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비틀리고, 때로 도망치고, 다시 돌아온다. 은행을 턴 「부부 생활」의 인물들 조차 그 돈을 통해 삶을 극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인물들은 나약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떠남이라는 선택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 세계 속에 놓여 있다. 가족도, 노동도, 삶의 조건도 단번에 끊어낼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집의 인물들은 탈출 대신 지속을 선택한다. 혹은 선택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는 「너 하는 그 일」이 좋았는데, 묘하게 느껴지는 서늘함이 인상적이었다. 지난한 수험 생활을 하는 태은과 폭력을 저지르는 남자의 옆을 떠나지 못하는 엄마. 둘은 각자의 위치에서 노력하고 견뎌낸다. 특히 태은은 애매한 상황에 놓여 있다. 시험의 가채점 결과도 애매, 삶도 애매, 그러므로 미래도 애매. 상승은 커녕 추락조차 확정되지 않은 불안정한 상태.
노력하면 벗어날 수 있는가? 희망을 가지면 현실은 바뀔 수 있는가?
나는 이 단편에서 희망이 삶을 바꾸지 못하는 순간을, 노력이라는 서사의 차가움을 읽었다. 그들이 물류센터에서 일하고 탈출하는 그 순간까지. 그 탈출은 해방 같으면서도 승리의 서사가 아니다. 멈출 방법이 없어서 계속 사는 사람들, 도망치면서도 또 다시 버티는 사람들.
『믿을 수 있을 만큼의 진실』을 읽다보면 무엇이 특별히 해결된 것도, 뚜렷한 희망을 발견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인물들의 표정들이 오래 남는다. 그들은 삶을 바꾸지 못했고, 관계를 정리하지도 못했으며, 현실을 크게 극복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계속 살아간다. 이 소설집이 남기는 여운은 바로 그 지속의 감각에서 비롯된다.
삶이 쉽게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히 외면하지 않는 순간들. 더 나은 삶을 약속하지 않으면서도, 조금 덜 거짓된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란.
+ 코로나 팬데믹으로 생계에 직격탄을 맞자 은행털이를 시도하는 학원원장 구영수와 요양보호사 오진희 커플 이야기인 「부부생활」도 재밌는데, 아 이거 그냥 보니 앤 클라이드 아닌가요.
*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