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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공익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류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0월
평점 :

정리하자면, 사회에서 통용되는 '공익'이라는 개념은 사회적약자의 사익 중 현재의 공동체 다수가 위험하지 않다고 보아 그 추구 행위를 허용하는 사익'이다. / p.6
公益. 사회 전체를 위한 공공의 이익. 모두를 위한 이익은 私益과는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모두를 위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있을까. 헌법에서 기본권을 배우다보면 상당히 앞부분에서 기본권의 충돌에 대해 배운다. 누군가의 기본권 행사가 누군가의 기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 늦은 밤 카페에서 즐기는 나의 고요는 카페에서 근무하는 종업원의 시간을 바탕으로 피어오른다. 말 그대로 모든 사람의 이익은 아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노동자를 위해 자본가의 이익을 일정 부분 제한하기도 하고, 조금 더 일상으로 파고들어 흡연자의 흡연권과 비흡연자의 혐연권이 충돌하면 혐연권을 위해 흡연권을 제한하기도 한다. 모두가 자기의 권리와 이익만을 주장할 수는 없다. 아무리 공익같아 보일지라도 결국 특정 집단의 사익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한국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는 노동자의 자유가 아니고 자본가의 자유다. 노동자의 자유 확장은 자본가의 자유 축소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유를 추구하면 자유민주주의 부정 세력이나 친북 좌파가 된다. 의심하지 않으면 이런 거짓말을 믿게 된다. / p.161
해당 책은 < 왜 어떤 '사익 추구'는 '공익'이라 불리나 > 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한다.
입주민으로부터 모욕적인 갑질을 당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신 경비 노동자, 청소 노동자의 노동쟁의가 학업에 방해된다며 고소한 대학생 등 많은 사익 충돌과 투쟁, 그리고 국가의 방관을 꼬집어 말하고 있다. 국가는 방관자이자 공범이다. 어떤 사안들은 방관이 가해자에게 힘이 되어 준다. 그야말로 폭력적 방관이다.
저자는 오랜 시간 '공익' 변호사로 불려왔지만 실은 어떤 이들의 '사익'을 위해 투쟁해왔음을 고백한다. 그런 고백을 하였다 하여 저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약자의 사익을 보장한다는 것이 다른 약자의 사익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며, 많은 사익은 대화와 배려를 통해 같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상대적 약자다. 잠재적인 권리침해 피해자다. 그래서 나 또한 언제 쟁의행위를 할지, 집회 시위를 하게 될지 모른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를 위해 참고 힘을 모아야 한다. '불편함의 품앗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연대 의식이다. / p.146
수 많은 공익적 투쟁을 '불온한' 사익으로만 바라보며 이기적이라 몰아가는 특정 언론과 흰 눈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가득한 혐오의 시대에 공익이란 것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사익이라는 무수히 많은 나무가 모여 공익이라는 숲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이 말을 과연 이 사회는 기억하고 있을까.

+ 해당 저서는 법적 지식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즐겁게 읽힐 것 같다. 투쟁의 내막과 판결의 결과만 나온 것이 아니라 지리할 수도 있는 소송의 과정과 법리적 설명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법적 테두리 안팎의 이야기가 자세하여 '공권력의 본질은 폭력이다'라는 말이 무섭게 설득된다. 정말 많은 과정을 몸으로 함께 해 온 변호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
++ 맨 뒤 책날개에 '함께 읽으면 좋은 한겨레출판의 책'이 소개되어 있는데 <아주 오래된 유죄>와 <오늘도 2명이 퇴근하지 못했다> 찜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