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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 - SF와 인류학이 함께 그리는 전복적 세계
정헌목.황의진 지음 / 반비 / 2024년 8월
평점 :

이처럼 인류학적 논의들이 현실에서 당연시되어온 사실을 새롭게 고찰함으로써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낯설게 볼 수 있도록 만든다면, 낯설게 보기의 또 다른 통로인 SF는 상상을 이야기로 구현함으로써 세상을 낯설게 보도록 한다. (p.74)
SF가 유행이라고 밖에 할 수 없겠다. 신작 소설의 대다수는 하드하든 소프트하든 SF적 상상력이 꽤나 가미되어 있고, 사람들은 이를 오락처럼 즐기고 있다. 왜?
인류학은 그 무엇보다 현실과 밀접하다. 외계인이 인간을 관찰해서 글을 쓴다면 그것이 바로 인류학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SF는 설정상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현실에서는 인간의 몸을 숙주로 삼아 알을 까는 외계인도 없을 것이고(진짜 없나?),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사람을 끄집어 내 선물처럼 보내는 외계 행성의 바다도 없다 (진짜 없나?). 현실에 없고, 있을 법하고 언젠가 오지 않을까 하는 상상력이 펼쳐지는데 이 상상력의 주체는 결국 인간이다. 어떤 배경으로 그리던 인간이 하고 싶은 말이 담겨있다.
작품은 현실의 남성이라면 절대 겪을 일이 없는, 임신·출산과 유사한 신체적 기능성을 외계 생명체의 숙주라는 독특한 장치를 활용해 남성에게 배치한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진실(작지 않은 신체 변화와 함께 엄청난 고통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도 남성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고찰한다. (p.77, 『블러드차일드』와 생물학적 재생산의 인류학)
소설을 꿰뚫어보는 인류학적 논의의 깊이도 절대 얕지 않다. 책장이 훌훌 넘어가는 가벼움은 아니지만 너무 어렵지도 않아서 천천히 읽었을 때 기분 좋은 지적 쾌감이 오는 정도이며, 생각보다 논의의 거리감이 가까워서 몰입하고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ex.'청소년 유해 관련 도서' 지정으로 성교육 관련 도서를 학교에서 폐기하라고 했던 사건)
흔히 인류학은 비서구 지역의 이른바 ‘원시 부족’을 연구하는 학문, 혹은 낯선 타문화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사실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문제를 연구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p.201)

이 가상 민족지 챕터가 굉장히 흥미롭다.
책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진짜로 있다고 가정하고 연구지를 쓴 것인데, 상당히 끔찍했다. 물론 설정 자체의 파격은 기존부터 알고 있긴 했지만 그건 전부 가상의 세계라는 한꺼풀의 막이 씌워진 상태였는데, 소설 내 인물들을 인터뷰한 형식도 그렇고 그냥 지금 당장의 옆나라가 그러고 있다고 가정하고 바라보기 시작하니 다가오는 느낌이 놀라웠다. 이름을 부를 필요도 없고, 마음이 있을 필요도 없고 그저 여성은 '걸어다니는 자궁일 뿐'이라는 말이 상상 이상으로 타격이 컸다. SF를 바라보는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이었는데 신선해서 바로 다음 챕터로 넘어가지를 못했었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블러드차일드』, 『네 인생의 이야기』, 『파견자들』 등 다양한 SF를 인류학적 관점으로 다시 뜯어본다. 읽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면 훨씬 재밌게 읽을 수 있겠지만, 읽지 않은 시선에서도 굉장히 재미있었다. 나만 해도 여기 있는 전 작품을 읽지 않았다. (시녀 이야기 하차, 우빛속...너무 유명해서 손이 잘 안가...ㅠ) 그럼에도 읽는 내내 너무나 즐거웠고 오히려 책을 추천하는 그 어떤 글보다 강하게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SF는 특수한 상황 속에 사람을 밀어넣어 두고 행동 양상을 상상해낸다. 마치 외계인이 인간의 연구를 위해 특수 장치에 사람을 넣고 관찰하듯이. 그런 SF와 사람을 탐구하는 인류학이 만나 퍼즐처럼 짜맞춰진다. 짜맞춰진 자리에는 날카롭게 파헤쳐진 세상이 보인다. If의 세계인 SF를 바라보는 관찰적 학문인 인류학의 조합은 보는 이들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더욱 깊어지게 만든다. 저자들이 다음의 낯선 이야기로 어떤 세계를 보여줄 지 궁금하다. (속편 나왔으면 좋겠다는 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우리를 옭아매고, 불평등의 경계로 우리를 나누고,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환경을 파괴하는 기존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넘어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삶도 가능하다는 상상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그 상상을 위한 원천을 인류학과 SF에서 찾고자 했다. 설령 그것이 진부하게 보이더라도, 세상은 더 많은 ‘착한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p.29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