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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당한 집 - 제4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
최수진 지음 / 사계절 / 2024년 8월
평점 :

가장 부조리한 일들은 이 세상에서 그냥 일어나 우리를 덮치곤 한다. 언제나 우리 중에서 가장 약한 쪽을. 가장 무르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p.167, <금일의 경주>)
2031년 한국 경주에서 원전사고가 터졌다. 그러나 사고 자체가 서사의 중심축이 아니다. 그저 사고 이후의 시점을 배경으로 어떤 이들의 이야기가 커다란 극적 서사 없이 담담하게 기록된다.
1. 취재 기자인 화자가 2033년 6월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을 점거한 시위대와 보름간 함께 했던 기록을 2036년 5월에 작성한 <길 위의 희망>
2. 예술가 남매의 십 년간의 활동을 돌아보는 기록인 <점거당한 집>. 용인 백남준아트센터를 무대로 누나 박하니가 2033년 개인전을 연 그곳에서 2044년에 동생 박한일이 누나의 회고전을 연다.
3. 젊은 소설과 금일과 그의 작품을 2044년에 기록한 <금일의 경주>
제 4회 박지리 문학상 수상작인 해당 작품은 구병모 작가의 심사평처럼 '도파민을 분비하는 일에 최적화된 소설이 아니다'.
시간과 공간은 뒤엉키며 자극성은 떨어져 최근 소설들이 갖추고 있는 대중성과 오락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실험적이고 주제는 예사롭지 않다. 첫 번째 단편인 <길 위의 희망>의 배경이 광주이며, 시위대와 이를 진압하려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 흔히들 머릿속을 자연스레 스쳐지나가는 주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단편들은 장소를 가지고 놀고 있다. 장소의 쓰임을 의도적으로 뒤바꾼다. 무언가에 의해 점거당한다. 집은 미술관으로, 미술관은 집으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시위대가 머무는 공공장소. 시민을 위한 장소이나 강제력으로 쫓겨나는 곳.
역사와 예술이 포개진 전당은 어떻게 공공공간으로 기능하는가? 시민의 공공공간 점거가 언제 어느 때라도 부당한 거라면, 그곳을 짓밟고도 연이어 되풀이된 폭력은 누구의 책임인가? (p.31, <길 위의 희망)
공간을 특수하게 쓴 특징이 있다면 또 시간 역시 독특하게 쓰고 있다. 소설 안에서 뒤엉키는 시간은 마치 밖에서도 흐트러지는 것 같다. 사진과 평면도가 이리저리 첨부된 글들은 어쩐지 미래의 일이 아니라 현실 같고, 사건은 과거의 일을 답습하는 것만 같다. 1980년 5월의 기록과 2036년 5월의 기록, 거의 천 년에 걸친 왕조의 마지막을 바라본 도시에서 다시 맞은 종말같은 사고. 역사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반복된다. 직접적인 문장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이 모두 공유하는 공간의 특수성을 이렇게 가지고 논다.
눈 씨는 우리 시위가 광주 시민들의 억울한 역사를 알리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작으나마 분명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반면 하마 씨는 그런 희망 자체를 의심했다. 유령을 본다 한들 우리가 유령이 될 수는 없다. 그들의 고통과 죽음 너머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p.39, <길 위의 희망>)
아름다운 그림들이 쭉 걸려있는 미술관이 아니라 이리저리 미로처럼 조형물이 툭툭 놓여있는 현대미술관을 보는 것만 같은 소설이다. 서사를 즐겼다기 보다는 구조적 실험을 들여다보고 온 느낌이다. 의도적으로 배치한 난잡함이 그저 정신 없음으로 끝나지 않게 서사를 사용해 공백을 채운 책으로, 요 몇 년간 읽은 그 어떤 소설들보다 구조적 파격이 놀라웠다.
+ 띠지의 '신예 작가의 과감한 플레이팅'이라는 말에 확실히 동감한다.
엄마에게 물어 이해한 표현대로라면, 우리는 친구라기보다 '동지'인 것 같네요. 싸움에 임할 때 뜻을 함께하는 상대를 이르는 표현이라는군요. 일 년 중 가장 겨울이 긴 밤을 이르는 말이라고도 하네요. (p.58, <길 위의 희망>)
"가는 길이 희망이 되고자 하여, 나 구태여."
왜 여기다 밑줄을 그었느냐고 찬란 씨는 물었다. 나는 구태여라는 표현이 흥미로워서라고, 일부러 애쓴다는 뜻의 표현이 희망의 도래를 더 조심스럽게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지만 와야만 하는 것에 어울리는 표현이라고. (p.61, <길 위의 희망>)
살면서 저는 제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옮겨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단 걸 알게 됐습니다. 누나는 잔여물을 삼키고, 누르고, 더 나은 뭔가로 변환시키는 데 전력을 쏟았지만 저는 그걸 그냥 보존했어요. 일상 속에서. 잔여물은 다만 잔여물로써. (p.117, <점거당한 집>)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