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평점 :

한 사람의 작가로서, 나는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모든 거주자를 만족시킬 집을 짓는 것은 힘에 부칠뿐더러 답답하고 막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나 자신이 현실과 언어로 지은 인공물 사이의 공감대에 위로받으며 아늑하고 평온하다고 느끼는 집을 짓는 편이 훨씬 더 낫다. (p.10)
켄 리우는 서문에서 미리 밝혀둔다. 이 이야기들은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최선'의 단편집이 아니라 본인이 가장 즐겁게 쓴 이야기들이라고. 그래서일까, 단편들을 하나의 장르로 구분하기가 어렵다. SF 같지만 역사 소설로도 보인다. 머나먼 우주, 현인류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행성부터 2차 세계대전 때의 일본, 당나라 시대의 중국까지 다채로운 배경을 오가며 주제를 던진다. 비현실 속에 현실을 녹이고 많은 사람들이 막연하게 걱정하는 일을 들춰내어 선명하게 상상하게 만든다.
삼국지의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를 살짝 변형하여 디스토피아 시대를 살아가는 세 여성(<회색 토끼, 진홍 암말, 칠흑 표범>),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지구의 모든 도시들이 물에 잠긴 미래 (<「은둔자.매사추세츠해(海)에서 보낸 48시간>), 분쟁 지역의 현실을 가상현실 체험으로 상품화 하는 이야기 (<비잔티움 엠퍼시움>). 특히 현재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인 AI의 창작물과 관련된 이야기 (<진정한 아티스트>) 는 먼 미래가 아니라 현재 내 발밑에서 올라오고 있는 아주 근미래의 일로 읽혀서 잔향이 길게 남았다. 다양한 주제를 다룬 13편의 단편이 이 한 권에 전부 수록되어 있다.
용서란 곧 망각인 것이다. (p.160, <환생>)
인간과 토닌인이 함께 사는 모습을 그린 <환생>. 토닌인은 지구인과 함께 살아간다고 하지만 자신의 방법으로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죄를 지으면 그 기억을 지우고, 점점 사람들을 그들의 입맛에 맞춘다. 그 관계는 마치 식민지배와도 결이 같아보인다. 다들 쉽게 잊을 수 있는 세상에서 자신의 기억을 끌어안고 잊지 않으려 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든다. 기억이 없는 나는 정말 이전의 '나'와 동일인물인가부터 시작해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매번 상기시켜주는 사람들까지.
역사 관련 이야기는 <맥스웰의 악마>에서도 진하게 느껴진다. 2차 세계대전의 일본군과 관련된 이야기. 죽어서도 타국인들을 이용하고자 하는게 끔찍했다. 그 영혼들이 다들 고향으로 무사히 되돌아가기를.
하지만 난 내가 연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어했다는 느낌을 항상 받는단다. 내가 뭘 발견하든 그건 파이 바에오 사람들의 유언이자 마지막 속삭임이야. 그들을 연구하는 사이에 나는 그들과 하나로 이어지고, 그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이에 인류는 외톨이 신세에서 벗어나는 거란다. (p.58, <메시지>)
수록작 중 <은랑전>과 <메시지>는 현재 헐리우드 영화화 진행 중이라고 한다. <은랑전>은 모르겠지만 <메시지>는 이거 영화로 나와도 한 편의 감동 드라마다 생각했는데 진짜 제작 중이라는 소식을 들으니 사람들 보는 눈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죽어버린 외계 도시를 탐험하는 주인공과 전처의 죽음으로 얼떨결에 맡게 된 딸 매기. 멸망한 세계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서먹한 부녀 사이는 점점 가까워지는듯 하는데. 이후의 충격은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개인적으로 이 단편은 SF로 읽히기 보다는 인류의 마지막 순간 반드시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이며, 말이 통하지 않을 외계의 존재에게 어떤 식으로 메시지를 전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표제작인 <은랑전>은 마치 무협지같다. 중국 당 시대, 비구니에게 납치당한 고관대작의 딸이 주인공으로 그 아이는 은랑이라는 이름을 받고 암살자로 키워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첫 임무를 받은 은랑은 바로 실행하지 못하고 정의에 대해 깊게 고뇌하기 시작한다. 이 단편이 다른 것들과는 궤가 다르게 무협지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는 은랑이 차원을 넘어 싸우기 때문이다. 공간을 찢고, 우리가 사는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투를 벌인다. 차원을 다루는 SF에서 무협을 쓴다면 딱 이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싶은데, 단편보다는 장편으로 접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역사와 기억, 인간의 정체성 모두를 안고 있는 단편들 속에서 SF는 사실 배경적 요소 정도에 그친다. (그렇다고 그것이 간단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이해하기 어렵지 않고 과학 그 자체보다는 서사나 감정, 윤리적 고민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현대 사회의 고민과 맞물리는 주제들을 자연스럽게 던지고 있다. 게다가 역사와 문화가 많이 반영되어 있어, 비슷한 문화권이자 식민지배의 아픔을 어느 정도 공유하기 때문에 이야기가 마음 깊게 파고 들었다.
게다가 이 이야기들의 대다수가 여성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데, 어떠한 성별적 사유가 있어서 여성 주인공을 선택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많은 기존 이야기들에서 '당연히' 남성 주인공을 택했듯, 작가도 당연히 여성 주인공을 택한 느낌이다. 여성의 이야기가 '그냥'이 될 수 있다는 점, 성별 전복이니 주체성 획득이니 하는 식으로 노리는 메시지 없이도 당연히 자연스럽게 이야기될 수 있다는 흐름은 나로서는 굉장히 반가운 일이었다.
켄 리우의 소설은 매번 읽어야지 하는 마음만 있었지 본격적으로 펴 본건 『은랑전』이 처음인데 왜 독자들이 그의 작품을 기다리는지 알 것 같았다. SF를 가지고 이토록 감성적인 이야기를 펴낼 수 있다는 점, 어느 시대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상상력에는 한계가 없고, 그 속에서 현실이 보인다. 훗날 언젠가보다 바로 지금 읽는 것이 가장 적절한 타이밍일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